소설리스트

6. 숲의 파괴자 (6/33)

6. 숲의 파괴자

비가 오면 진창이 되는 광장 바닥에 마른 먼지가 날렸다.

말썽꾼들에게서 별다른 소동의 기미가 없자 가금류가 광장으로 되돌아왔다. 뒷골목으로 우회하거나 벽에 바짝 붙어 가던 행인도 한둘씩 광장을 가로질렀다.

중천에 떠있던 태양이 서서히 내리막길을 탔다.

종탑 위에는 작은 매 한 마리가 앉아있다. 주홍색 박공 지붕에 다닥다닥 앉아있던 새를 모조리 달아나게 하고서는 저 혼자만 오도카니 높다란 종탑에 앉아 광장을 빤히 내려다 본다.

어느 골목에서 카이렛이 튀어나왔다. 헐레벌떡 달려 나와 광장을 둘러보는 시선이 분수대에 꽂혔다.

그는 뒤따라온 로에란그린에게 소리쳤다.

“저기 있어. 한참 찾았네.”

“흠, 저 인간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무시무시한 로에란그린의 어조에 카이렛은 손바닥을 펴 햇살을 가리며 그쪽을 자세히 살폈다.

“하, 저 망할 녀석들 봐라? 이 더위에 남한텐 땀을 뻘뻘 흘리게 하더니 저게 뭐 하는 짓거리야. 지금 우릴 우롱하나. 에잇!”

로트와 이터가 분수대에서 입안에 물을 가득 품고 서로의 낯짝에 뿜어대며 웃어대고 있다. 물싸움이 벌어진 광장 바닥은 흥건히 젖었다. 물 뿌리기가 끝나자 서로를 분수대 안에 던지려고 끙끙대며 힘을 겨뤘다.

카이렛은 두 사람을 향해 내달리다가 흑돼지랑 부딪쳤다. 흑돼지가 내지르는 비명에 곁에서 한 아이가 땅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아이에게 옆구리가 떠받혀서 넘어질 뻔한 카이렛이 고함쳤다.

“돼지치기, 이놈아! 조심해! 그리고 저 망할 놈의 흑돼지 좀 치우지 못하겠냐. 종일 여길 누비고 다니니.”

“나리, 저는 돼지치기가 아니에요. 나리의 모습이 너무 눈이 부셔서 미처 못 봤답니다. 아휴, 눈부셔.”

카이렛은 두 무릎을 발딱 꿇고 빌어대는 아이에게 코웃음을 쳤다.

“너, 낯이 꽤 익구나. 목욕탕 집 아들인가.”

“얘는 벨데케 가의 종복이야.”

로에란그린이 카이렛의 뒤에서 나타났다.

어린 한스는 두 귀공자가 위압적으로 버티고 서있자 제 옷소매로 카이렛의 뾰족한 한쪽 신발을 삭삭 닦았다.

“나리, 요거 좀 보세요, 반짝반짝하지요? 저쪽 신발도 닦아드릴게요. 제법 새 가죽처럼 광이 날 거예요.”

신발을 닦게 내버려둔 카이렛이 물었다.

“너 어디를 그렇게 급히 가던 중이야? 집에 불이라도 났냐?”

“저는 장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푸줏간에 고기를 사러 갔다가 주인 나리께 여쭐 게 있어서 돌아가던 길이었어요.”

“고기를 사러 간다니 놀랍군. 그 빈털터리 집안은 요새 푸줏간엔 얼씬도 못 하던데.”

“멋진 연회가 열릴 거라서요”

“무슨 연회?”

“우리 작은 나리께서 돌아오셨으니까요.”

어린 한스는 의기양양해서 외쳤다.

“주인 나리께서 말씀하시길 촛불을 환히 밝히고 사흘간 밤늦게까지 성대한 연회를 벌이신다고 하셨어요. 헤헤. 나리님들께서도 초대를 받으셨지요?”

“너희 작은 나리가 누군데?”

“네! 그분은 우리의 훌륭하신 기사-……. 으앗!”

물에 젖은 머리칼이 헝클어진 로트가 어느새 나타나 한스의 뒷덜미를 잡았다.

“연회를 한다고? 언제, 어디서 하는데?”

로트는 시선을 맞추려고 한스를 공중으로 높이 쳐들었다.

아비의 철저한 교육으로 원수를 즉시 알아본 한스는 발버둥치며 살려달라고 외쳤다.

“이 더러운 난봉꾼아! 그 손을 놔!”

이때 뒤에서 쨍, 하니 고함이 터졌다.

고함을 내지른 상대를 돌아본 카이렛은 또 저 자식이냐며 진절머리를 냈다.

“저 자식은 왜 우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눈만 떴다 하면 우릴 쫓아다니며 들들 볶잖아.”

“우리가 아냐.”

로에란그린이 말을 받았다.

“탐파니스가 잡아먹으려는 놈은 로트야. 저거 봐, 벌써 눈에 불꽃이 튀잖아.”

“여어, 탐파니스.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이터는 탐파니스라고 불린 귀공자에게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고 말했다.

“다들 저길 좀 봐. 원래 공작새는 수컷이 화려하고 아름다운데 인간의 수컷도 그래. 카이렛, 우리 귀여운 얼음 왕자님께서 너랑 똑같은 진홍색 양말 바지를 입었네. 모자와 옷에 깃털과 보석도 번쩍번쩍하고. 와, 멋지다.”

“닥쳐!”

‘귀여운 얼음 왕자’ 탐파니스는 광장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고함쳤다. 뒤에서는 대여섯의 무장한 장정이 그를 에워쌌다.

탐파니스는 얼굴에 수염 하나 없는 앳된 젊은이였다. 체구는 로트 일행보다 작고 나이보다 무척 앳된 얼굴에 커다란 눈동자는 냉랭한 잿빛이었다. 황금 양털처럼 이마 언저리에서 굽이치는 황금빛 머리칼엔 붉은 기가 섞여 있어서 햇살이 비추는 각도에 따라 불덩이처럼 보이곤 했다. 대담한 진홍색 양말 바지 위엔 무더운 날씨인데도 흰 담비 모피를 덧댄 짧은 튜닉을 입고 있었다.

이터의 입을 다물게 한 탐파니스는 허공에 쳐든 검지로 로트를 팍, 찔렀다. 그러고는 증오에 차서 외쳤다.

“더러운 원수, 포겔바이데! 네놈은 남의 집 하인을 어쩔 셈이었냐?”

“안녕, 탐파니스.”

로트가 말했다.

“시끄러워! 네 녀석이 관속에 드러눕는 날이 내가 비단 금침 아래서 두 발을 뻗고 안녕할 날이야. 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남의 집 하인을 없애버릴 참이었냐?”

“절대 아냐.”

로트는 차분하게 답했다.

“난 저 꼬마한테 뭘 좀 물어보려고 한 거야.”

“웃기지 마! 넌 뭔가 끔찍한 수작을 부리려고 했어. 쥐도 새도 모르게 저 녀석 모가지를 따고 피를 짝 뽑아 죽일 작정이었지? 내가 똑똑히 봤어!”

탐파니스는 악을 쓰며 팔팔 뛰었다.

로트는 바닥에 주저앉은 어린 한스를 일으켜 세웠다. 한스는 그 즉시 꽁지가 빠져라 내빼서 골목 뒤에 숨어 둘을 지켜봤다.

로트는 탐파니스에게 가까이 다가서서 손을 내밀었다.

“탐파니스,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

“싫다! 내가 왜?”

“너한테 긴히 할 말이 있어서 그래.”

로트가 정중히 부탁하는데도 탐파니스는 무섭게 눈을 번쩍이기만 했다.

껍질이 벗겨질 정도로 노려보는 시선에 로트는 얼굴이 몹시 따가웠지만 좀 더 가까이 다가섰다.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탐파니스. 나는 너랑 전부터 친하게 사귀고 싶었어. 네가 만약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면 기꺼이 나를 불러줘. 나의 진실한 우애와 신의를 받아준다면 우리는 친구가 될 거야. 자, 사랑스러운 탐파니스, 내 손을 잡아다오.”

로트는 진심을 담아서 조심스럽게 손을 더 내밀었다.

그러자 탐파니스의 싱싱한 뺨에 피가 확 몰렸다.

이터 일행은 호기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탐파니스의 반응을 살폈다.

탐파니스는 그 눈치를 챘다.

“개소리 작작해! 더러운 원수 놈아, 구역질 나게 위선 떨지 마!”

카이렛이 탐파니스에게 눈을 부라렸다.

“하여간 벨데케 놈들은 낯짝은 강아지처럼 앙증맞고 귀엽지만 입은 비렁뱅이가 목욕한 물처럼 더럽다니까.”

“닥쳐! 난 너희처럼 위선적이진 않아!”

탐파니스는 미친 듯이 악을 썼다.

“너희 추잡한 난봉꾼들은 자나 깨나 우리 가문을 모욕하려고 책략을 꾸미고 있어. 내가 모를 줄 아냐? 영주님의 처벌이 두려워서 비겁한 쥐 떼처럼 뒷방에서 작당하고 있지? 이터 폰 오스터팅겐, 저 능글맞고 교활한 난봉꾼을 방패로 삼고서.”

“우린 그런 적 없어.”

카이렛이 받아쳤다.

“너야말로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틈만 나면 우릴 미행하는 거냐?”

탐파니스는 양손으로 허리를 집고서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쳤다.

“흥, 너희를 미행하느니 흑돼지를 쫓아다니고 말지. 내 칼맛이 두려워서 일대일의 정당한 결투는 꿈도 못 꾸고 늘 뭉쳐 다니는 겁쟁이들아!”

모욕이라며 덤비려는 카이렛을 로에란그린이 막았다.

“탐파니스, 지금 그 발언은 취소해. 넌 우리를 모욕했어. 우린 영주님의 명령에 복종해서 너랑 싸우지 않으려고 늘 조심하고 있어. 하지만 네가 우리를 겁쟁이로 부른 것을 취소하지 않는다면 그냥 넘어갈 수 없어. 빨리 사과해.”

“미쳤냐? 절대 취소 못 해! 너희는 겁쟁이가 맞잖아.”

“탐파니스 이 미친놈아! 맛 좀 봐라!”

“그만!”

탐파니스랑 카이렛은 주춤하며 멈췄다. 둘 사이로 뛰어든 로트는 무서운 눈초리로 둘을 노려봤다.

“너희 중에서 누구든 기어코 먼저 칼을 빼려거든 나부터 찔러. 자, 어서 칼을 빼. 어서!”

로트의 드문 고성이 광장에 쩌렁쩌렁 울렸다.

카이렛은 로에란그린에게 어깨가 잡혀서 물러났다.

얼굴이 사과처럼 벌건 탐파니스는 줄곧 로트만 죽어라 노려봤다.

로트는 그 사나운 눈길을 고스란히 받으며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용서해다오, 탐파니스. 디트리히의 죽음은 우리 모두를 끔찍한 불행과 슬픔에 빠뜨렸어. 어떻게 하면 나를 용서해주겠니? 제발 그 방법을 알려줘. 나는 너랑 진심으로 화해하고 싶어.”

“닥쳐! 원수 놈아! 네가 우리 형을 죽였잖아!”

“모함하지 마!”

카이렛이 소리쳤다.

“디트리히가 죽던 날 로트는 현장에 있지도 않았어.”

“비열하게 쥐구멍에 숨어서 사주했으니까 없었겠지.”

“천벌 받을 소리! 디트리히가 먼저 탐욕스러운 구두쇠니 더러운 유대 놈과 한패니 조롱하며 지그문트에게 시비를 걸어서 그 사달이 난 거야. 너처럼 집요한 복수심 때문에 죽음을 자처했다고.”

“이것들이! 죽인다! 앗! 이거 못 놔? 이게!”

칼자루를 움켜쥐려던 탐파니스는 놓으라고 악을 쓰고 몸부림을 쳤다. 그를 엄호하던 장정들은 로트의 험악한 눈길에 눌려서 우물쭈물했다. 로에란그린은 그들을 가로막고 섰다. 이터는 카이렛을 번쩍 들어서 옆구리에 끼고 뒤로 물러놨다.

“이 새끼가! 이거 놔! 놓으란 말야!”

탐파니스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로트는 몸부림치는 그의 양어깨를 꽉 움켜잡고서 억지로 자신을 보게 했다.

“탐파니스, 나를 용서해다오.”

“죽인다!”

“용서할 수 없으면 나를 찔러.”

탐파니스를 흔들어댄 로트는 제 얼굴을 바짝 디밀고서 소리쳤다.

“그래야만 네 원한이 풀린다면 찔러. 난 기쁜 마음으로 너의 칼에 맞아 죽을게. 그게 네가 바라는 거냐, 탐파니스?”

“이거 놓으라고! 놔 줘야 찌르지!”

“제발 나를 용서해줘, 탐파니스.”

“시, 시끄러워! 구역질 나게 못생긴 게 얼굴을 어디다 들이대고 난리야? 우에엑-!”

얼굴이 불덩이처럼 변한 탐파니스는 괴력을 뿜어 로트의 손을 떨쳐냈다. 그러고는 배를 부여잡고 광장 바닥에서 뒹굴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미친 듯이 악을 쓰고 데굴데굴 구르며 헛구역질을 해댔다.

“우엑우엑! 우에엑! 더럽게 못생긴 게 어디다 얼굴을 함부로 들이대고-……. 우에엑!”

카이렛과 로에란그린은 멍했다. 이터는 싱글벙글 웃었다. 탐파니스의 졸개들은 어리둥절해서 눈알만 굴려댔다. 로트는 혼자서 슬픔에 빠져 침통하게 낯을 굳혔다.

곧 얼굴이 새빨개져서 일어나려는 탐파니스에게 로트가 손을 내밀었다.

“내 손을 잡아.”

“치워! 추잡한 위선자야! 화해를 청하는 체하면서 뒷구멍으로는 수작만 부리는 놈아!”

탐파니스의 황금빛 머리칼은 새빨개진 뺨 때문에 불이 난 듯 보였다.

“내가 모를 줄 알았냐?”

그는 로트가 대답이 없자 독을 품고 비웃었다.

“넌 힐데가르트를 유혹했지? 걔를 꼬드겨서 음욕을 채우려고 했지? 음탕한 까마귀 자식아! 흥, 왜 벙어리가 되셨나? 내 말이 틀렸어? 틀렸다면 아니라고 부정해 보시지.”

“난 너한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

잠시 숨을 죽인 로트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네가 알고 있다니 솔직하게 털어놓을게. 난 사실은 힐데가르트를 경애하고 있어.”

“것봐! 것봐! 내 말이 맞았어. 으…….”

탐파니스는 화살을 맞은 살쾡이처럼 몸부림을 치며 바닥에서 또 데굴데굴 굴렀다.

카이렛은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을 잃고 로에란그린은 얼굴을 찡그렸다.

탐파니스는 남들이 보든 말든 아랑곳없이 괴롭게 숨을 헐떡이며 악을 썼다.

“네 녀석이 힐데가르트를 꼬셨어……. 그 애를 납치해서 도망치려고 했지? 으으……. 우리 가문에 치욕을 끼치고 더러운 정욕을 채우려고……. 으…….”

로트는 놀라서 그를 말리려고 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탐파니스. 오해하지 마. 난 힐데가르트에게 말을 건네 본 적도 없어. 딱 한 번 눈 깜짝할 사이에 봤을 뿐이야. 하지만 우리가 신의와 사랑으로 맺어진다면 우리 두 가문은 앞으로-…….”

“닥쳐! 거짓말쟁이야! 죽인다! 넌 더러운 난봉꾼이야! 철면피! 바람둥이! 위선자! 이교도의 악마!”

탐파니스는 발을 구르며 미친 원숭이처럼 부르짖었다.

탐파니스는 로트와 함께 이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로트가 수도원으로 쫓겨나기 전에는 돌멩이를 쥐고 그를 추격했다. 고향에 되돌아온 이후에는 칼을 들고 쫓고 있다. 성질이 괴팍하고 성급한 탐파니스는 벨데케 가문에서도 혀를 내두르는 골칫거리였다.

로트는 탐파니스의 광란에 무척 당혹했고 탐파니스는 그 눈치를 채고 더욱 악을 써댔다.

“이제야 알겠군. 이놈이 왜 이 지랄인지.”

이때 카이렛이 로트를 밀어내고서 나섰다.

“네가 뭘 알아? 이 빨간 원숭이처럼 생긴 놈아, 닥쳐!”

탐파니스는 벌떡 일어나서 소리를 질러댔다.

“너야말로 빨간 원숭이처럼 골이 났군. 넌 사촌인 힐데가르트를 좋아하는 거야. 그런데 그 여잔 네 녀석 같은 귀여운 강아지 상판은 취향이 아닌 거지. 어휴, 눈물 나네. 안타까운 짝사랑의 수렁에 빠져서 꼴사납게 질투하며 앙탈을 부리다니.”

“웃겨!”

탐파니스는 즉시 반격했다.

“힐데가르트 그 계집애는 바보 멍충이야! 그런 못생긴 계집애를 좋아한다고? 내가 눈이 삐었냐?”

“아니라면 왜 이 난리인데? 로트가 원수의 아들이라서? 흥! 핑계도 참 고리타분하군. 넌 지그문트가 본 적도 없는 힐데가르트한테 홀딱 빠졌다고 헛소문이 돌았을 때는 코웃음만 치더니 이번엔 왜 이 난리일까. 사랑의 경쟁자가 로트니까 자신감을 잃어서 그러나?”

“이, 이게! 시끄러워! 닥쳐라!”

“덤벼라! 질투꾼아!”

기어코 칼자루를 움켜잡은 탐파니스가 카이렛을 향해 돌진하려는 순간이었다. 불시에 그들 머리 위에서 거센 바람이 일며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탐파니스와 카이렛은 차례로 정수리에 따끔한 타격을 받고 급히 허리를 굽혔다.

“제기랄! 방금 뭐였지?”

카이렛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저놈이야.”

로에란그린이 종탑을 가리켰다. 종탑 꼭두기에는 작은 화살촉처럼 보이는 새가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반짝이는 은빛 깃털이 한 개가 나풀나풀 떠돌았다. 로트가 그걸 잡아채자 깃털은 손안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그를 놀라게 했다.

삐익-

“와, 저기도 좀 봐.”

손가락으로 휘슬을 분 이터가 광장 곳곳을 가리켰다.

“감시꾼이군. 눈알이 황금처럼 반짝반짝 빛나는구나.”

광장 주변의 골목과 창가에서는 구경꾼들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 눈빛은 이제 곧 철천지원수인 두 가문이 또 피를 보리라는 흥분과 두려움 그리고 지긋지긋한 반목을 일삼는 두 가문의 멸족을 바라는 열망이 담긴 듯했다.

로에란그린도 어느 으슥한 골목을 눈짓했다.

“저기 부랑자랑 방랑 설교사들 뒤를 봐. 두건이 달린 검고 긴 튜닉을 입은 사내가 보이지? 저놈은 우리 중 누구든 칼을 빼면 영주님께 달려갈 거야. 그땐 포겔바이데랑 벨데케, 두 가문 모두 망하는 거야. 그러니 이쯤에서 서로 화해하고 끝내자.”

“화해라고? 웃기시네.”

탐파니스는 야릇한 미소를 품고 독살스럽게 로트를 노려봤다.

“잘 들어라, 로트 폰 데어 포겔바이데! 네 녀석한테 희소식을 알려주마. 우리 벨데케 가문에서 곧 성대한 연회와 가면무도회를 열 거야.”

“와, 언제 하는데?”

이터가 반색하며 물었다.

“연회와 무도회에 우리처럼 잘생기고 매력적인 귀공자들이 빠질 순 없지.”

“하하하. 꼭 와라.”

탐파니스는 째지게 웃어댔다.

“내가 초대장을 보낼 테니까. 참, 오기 전에는 유언장을 작성하는 게 좋을 거야. 너희는 이제 다 끝장이니까! 아니면 골방에 꼭꼭 숨어 있어야 할 거야. 왜냐? 저주받을 원수, 로트 폰 데어 포겔바이데! 위대한 숲의 파괴자께서 응징의 창으로 네 심장을 푹, 찔러 죽일 테니 각오해라! 아하하. 가자! 앗, 이 돼지 새끼!”

흑돼지의 엉덩이를 걷어찬 탐파니스는 무리를 이끌고 자리를 뜨던 중에 로트를 홱 돌아보며 미친 요괴처럼 계속 웃어댔다.

“맙소사. 망했군.”

탐파니스가 가버린 후 이터가 멍하니 중얼댔다.

로트는 이터의 팔을 잡아당겼다.

“탐파니스가 뭐라는 거야? 누가 창으로 날 찔러 죽인다고?”

“그놈이 돌아왔대. 하필이면 이때 돌아오다니.”

“누구?”

“숲의 파괴자 이젠하르트, 그놈이 돌아왔다는군. 힐데가르트의 오라비야.”

침묵의 홍수가 광장에 밀어닥쳤다.

카이렛의 낯빛은 사색으로 변했다.

“젠장. 아까 벨데케의 어린 종복이 말한 작은 나리가 그놈이었군.”

카이렛은 얼이 빠진 로트에게 달려들었다.

“로트, 우린 이제 글렀어. 당분간 숨어 있자. 이젠하르트한테 잡히면 우린 다 죽어!”

탐파니스에게 걷어차인 흑돼지는 이날 오후 내내 어지간히 뛰었다.

기진맥진한 흑돼지는 광장의 어느 으슥한 골목에 숨었다. 돼지치기가 쫓아왔나 싶어 한참 경계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침을 잔뜩 흘린 돼지는 도토리를 찾느라 흙바닥을 헤쳤다. 주둥이로 킁킁, 냄새를 맡으며 골목 깊숙이 들어갔다. 이때 문득 등짝에 싸하게 소름이 돋았다.

돼지는 날래게 뒤를 돌아봤다. 이 순간 시커먼 후드 아래서 살기를 품은 안광이 번쩍 빛났다.

꽤애액!

째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흑돼지는 후닥닥닥, 광장으로 튀어나갔다.

“앗! 저기다! 잡았다!”

앞도 보지 않고 무작정 돌진하던 흑돼지를 돼지치기가 붙잡았다.

돼지치기는 막대기를 높다랗게 치켜들고 돼지 등짝을 후려치려다 놀라서 소리쳤다.

“엉? 누구야? 남의 돼지를 노린 게!”

돼지치기는 골목으로 뛰어갔다. 매섭게 눈을 치뜨고 컴컴한 골목을 샅샅이 살폈으나 아무도 없다.

분개한 소년은 돼지 목에 올가미를 걸고 광장을 빠져나갔다. 칼이 스친 흑돼지의 등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렀다.

말썽꾼이 떠난 광장은 가금과 마차, 행인으로 북적댔다.

흑돼지의 행로를 내내 쫓던 검은 후드의 사내는 돼지치기 소년이 가버리자 골목에서 빠져나왔다. 번득이는 눈으로 광장을 살핀 그는 검은 튜닉으로 몸을 감싼 채 골목 뒤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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