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로트의 등장: 하얀 수사슴
세 사람의 시선은 어느 골목 입구에 꽂혔다.
로트라고 불린 젊은 귀공자는 발밑에 알짱대던 흑돼지의 발을 밟고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골목에서 나왔다.
그는 생각에 잠겨 눈을 내리깔고 광장 중앙 쪽으로 걸었다. 행인은 충돌 직전에야 아슬아슬하게 그를 비켜 지나갔다. 그런 장면이 수차례 반복됐다.
“이제야 나타나셨군.”
카이렛이 이터와 로에란그린을 돌아보며 물었다.
“뭐해, 다들? 저 녀석을 잡으러 가야지. 이봐, 로-……!”
“쉿. 부르지 마.”
로에란그린은 카이렛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쪽으로 올 거야. 지난번 일을 잊지 않았겠지?”
세 사람은 분수대 뒤에 숨었다.
카이렛에게 뒷덜미가 꼭 잡힌 이터는 나체 조각상인 여인의 옆구리 사이로 로트를 훔쳐보며 중얼댔다.
“참으로 쓸모가 없구나. 안타까운 낭비야. 저런 용모를 타고나고서도 저 꼴을 하고 있으니 한심해. 저 낯짝 좀 보라지. 창조주의 축복인데 저 녀석은 사용법을 모르거든.”
“난 그다지 축복으로 여겨지진 않는데.”
로에란그린이 말을 받았다.
“우리가 저런 용모를 타고났다고 치자. 저 친구보다는 사용법에 능통하겠지. 눈짓 한 번으로 온 세상의 여자를 쉽사리 손에 넣겠지. 하지만 반대급부가 있어. 젊고 건강할 때는 찬사와 동경이 부나방처럼 몰려들지만 편견과 오해는 무덤까지 쫓아와 오명을 남길 거야. 로트도 예외는 아니지.”
“그 말이 옳아.”
카이렛이 동조했다.
“나도 옛날엔 저놈 얼굴을 질투했지만 이젠 아냐. 저 표정을 봐. 저건 저주일지도 몰라.”
세 사람은 잠시 침묵에 싸여 분수대 쪽으로 다가오는 로트를 감상했다.
로트의 용모는 5월과 같다. 부드럽게 굽이치는 탐스러운 검은 머리와 녹색 눈동자, 싱싱한 입술과 아름다운 이마, 미끈한 몸뚱이와 흰 양말 바지에 맵시 있게 싸인 늘씬한 두 다리는 젊은 수사슴의 그것처럼 탄력이 넘치고 단단했다.
그러나 저 빼어난 용모가 창조주의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장담하기 이르다. 이 도시에서 청년의 시샘과 여인의 한숨을 독차지해온 창조주의 총아는 그 용모가 무색하게 얼빠진 표정이므로.
세 사람이 숨어서 다가오는 로트를 지켜보는 사이, 공중목욕탕으로 땔감을 싣고 가던 마차가 로트 쪽으로 치달렸다.
눈을 내리깔고 걷는 로트는 아랑곳없이 직진했다.
카이렛이 튀어나갔다.
“로트! 정신 차려! 부딪친다!”
난데없는 외침에 로트는 고개를 홱 쳐들었다. 마차가 가까스로 그를 스쳤다.
카이렛은 먼지구름을 피우며 로트를 향해 돌진했다.
멈칫하며 섰던 로트는 즉각 반응을 보였다.
“앗! 달아난다!”
“저런! 또!”
“저 녀석이! 에잇!”
세 사람이 동시에 소리치자 로트는 흘끔 뒤를 돌아볼 뿐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잡아라! 저 녀석을 잡아라!”
꽤액-
꽥꽥-
거위 몇 마리가 카이렛의 발길에 차였다. 비명을 내지르며 날개를 퍼덕인 거위 깃털이 공중으로 하얗게 치솟았다.
그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본 행인은 허둥지둥 옆으로 비켜서거나 비명을 내지르며 자빠졌다.
그 난장판을 뚫고 로트는 전속력으로 달렸다. 카이렛도 비호처럼 달렸다.
추격전이 벌어졌다. 최고 속력에 도달한 카이렛은 경주마처럼 맨땅바닥을 파내며 부르짖었다.
“잡아라! 그쪽으로 간다!”
“카이렛, 여기야!”
로에란그린이 달려가며 외쳤다.
“골목 쪽은 안 돼! 이쪽으로 몰아!”
카이렛은 두 팔을 쭉 뻗고 휙, 몸을 날렸다.
“잡았다!”
로트의 허리를 낚아챈 카이렛은 먼지를 피워 올리며 땅바닥에 엎어졌다.
로트는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카이렛은 등판에 올라타서 어깨를 찍어 눌렀다.
로트는 반항하며 몸부림을 쳤다. 로에란그린이 달려와서 카이렛을 도왔다.
“여보게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로트는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날 또 토끼몰이 하다니.”
“그러게 누가 달아나래?”
카이렛이 쏘아붙였다.
“달아나다니. 천만에. 난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그럼 잘 됐네. 나도 같이하자고.”
의기양양한 카이렛은 로트의 팔을 꽉 잡았다.
로트는 진저리를 치며 팔을 빼내려고 했다.
“카이렛, 제발 나를 좀 내버려 둬.”
“미안하지만 절대 그럴 순 없어.”
“젠장. 귀찮아 죽겠군.”
“우린 너 때문에 더 귀찮아. 잔말 말고 따라와!”
카이렛의 완력은 대단했다. 포리에게 끌려가는 죄인처럼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끌려가던 로트는 곁에 나란히 걷는 로에란그린을 돌아보고 속삭였다.
“로에란그린, 제발 카이렛한테 나 좀 놔달라고 말해줘.”
“어디로 또 내빼려고?”
“아무 데도 안 가. 정말이야.”
“로트, 미안하지만 우린 며칠간 자네를 찾아 헤맸어.”
“난 종일 집에 있었어.”
“그래? 어느 집 말인가.”
로에란그린이 부드럽게 캐물었다.
“우리 몰래 이사라도 갔나. 항상 집에 없던데.”
“머리 좀 식히려고 산책 갔을 때 왔나 보군.”
“그럼 지금도 잠깐 머리를 좀 식히자고. 자네 이마에 땀이 배었어. 일단 분수대로 가세.”
로에란그린은 분수대에서 손수건에 물을 축여 로트에게 건넸다.
로트는 한숨을 내쉬고 묵묵히 손수건을 건네받았다. 그 꼴을 보고 로에란그린은 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주변을 돌아보던 카이렛이 소리쳤다.
“뭐야? 이번엔 이 인간이 또 내뺐잖아. 이터!”
“이터?”
로트가 되물었다.
“응! 여기 있었는데 그새 내뺐군. 로트 너를 보고 도망친 것 같아. 앗! 뭐야, 뭐야?”
단숨에 카이렛의 팔을 뿌리친 로트는 어느 골목으로 튀어나갔다.
골목 그늘에 숨어서 고개를 살짝 내밀고 분수대를 엿보던 이터는 돌진해오는 로트를 보자마자 결단을 내렸다.
로트도 즉시 고함을 치며 응수했다.
“거기 서라! 이터!”
“빌어먹을. 사람 살려!”
“서라니까!”
“날 죽일 텐데 자네라면 서겠나.”
“사랑하는 친구여, 잠깐 얘기 좀 하자!”
“또 시작이군. 저럴 땐 내빼는 게 상책이야.”
“이터!”
쫓고 쫓기는 두 번째 추격전이 벌어졌다.
혈기왕성한 두 귀공자는 행인 한 명을 바닥에 쓰러뜨리고, 빨래 바구니를 안고 가던 여자를 넘어뜨리고, 닭과 거위 너덧 마리를 허공에 날리며 광장을 빙빙 돌았다.
행인들은 비명을 지르고 혀를 차고 성호를 그으며 저 악마의 자식들을 빨리 데려가달라고 기도했다. 어느 교회의 참사 위원은 이터가 느닷없이 뛰어드는 바람에 말에서 굴러떨어질 뻔하자 사탄의 무리를 외치며 저주를 퍼부었다.
“서라!”
엎치락뒤치락하는 맹렬한 추격전이 이어졌다.
로트는 펄펄 날았다.
그보다 두어 살 연상인 이터는 옆구리를 붙들고 시장 골목으로 뛰었다.
로트가 소리쳤다.
“이터! 서지 못해?”
“친구여, 자네의 자비와 관용은 어디로 사라졌어?”
이터가 돌아보며 외쳤다.
“이게 나의 헌신적인 우정에 대한 보답이냐? 망할 자식! 숨통이 끊어질 것 같지만 잡힐 수는 없지. 으악!”
거대한 풋사과 한 알이 이터의 뒤통수를 땅! 갈겼다.
이터는 두 팔을 쭉 뻗고 시장 골목에 엎어졌다. 바닥에 깔린 염소 똥이 얼굴을 아슬아슬하게 비켰다.
이터는 숨을 헐떡이며 돌아누웠다. 네 쪽으로 금이 간 사과를 곁눈질한 그의 눈이 커졌다. 과일 바구니를 옆구리에 낀 여자가 로트의 팔에 안긴 채 휘청댔다. 로트가 똑바로 세워주자 그녀는 허둥지둥 달아났다.
뚜벅뚜벅 발소리가 울렸다.
이터는 힘없이 눈을 떴다.
“애욕에 눈이 멀어서 흉기로 친구를 때려잡는 난폭자여, 너의 이름은 우애라고는 모르는 망할 놈의 로트 폰 데어 포겔바이데구나.”
“입 닥치고 나랑 말 좀 해.”
이터는 뒷덜미가 잡혀서 광장으로 질질 끌려갔다.
이때 카이렛과 로에란그린이 두 사람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이크!”
로트는 샛길 안쪽으로 이터를 우악스럽게 처넣었다.
이터는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여보게, 나의 귀염둥이, 진정해.”
“시끄러워.”
로트가 무섭게 쏘아붙였다.
“자넨 그동안 어디 숨어 있었어? 날 피해 다녔어?”
“천만에!”
이터가 부르짖었다.
“난 자네를 찾아다녔어. 그랬는데 안 보이길래 사흘간 탑 꼭대기 방에서 단식하며 이런저런 기도를 드렸지.”
“정말이냐?”
“그럼. 우리 숙부한테 직접 물어봐. 난 그분의 명령을 따랐어.”
“날 위해서도 기도했으리라 믿을게.”
“물론 했지. 그런데 자넨 꼴이 그게 뭐야?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돼지치기야.”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평생 돼지치기로 살아도 좋아.”
로트가 뒷덜미를 놔주고 제 머리를 쥐어뜯자 이터의 뺨에 혈색이 되돌아왔다. 그는 옷매무새를 바로잡고 머리를 매만지며 싱글싱글 웃었다.
반면에 로트는 벽에 기대서 눈꺼풀을 내리깐 채 비통하게 중얼거렸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지다니 내 운명이란 게 참 가혹하구나.”
“어이, 로트, 이 바보. 자, 기운을 좀 내.”
뒤돌아서서 남의 집 돌벽에 이마를 처박은 그를 이터가 강제로 돌려세웠다. 그러고서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다 소리쳤다.
“맙소사! 이 얼굴 해쓱한 거 보게. 못 봐주겠군.”
“호들갑 떨지 마. 나처럼 불행한 놈한테는 이런 얼굴 따위 성해봤자 무용지물이지. 목 잘린 유령한테나 줘버릴까.”
“흠, 예상보다 자네 상태가 나쁘군.”
“더 나빠질 수도 있어.”
“그건 또 무슨 암시야?”
“글쎄. 두고 보면 알겠지…….”
“어허!”
이터는 호통치고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종탑에서 뛰어내릴 작정이군. 그런 비뚤어진 맘을 먹으면 못 써요. 그래, 며칠 못 본 새에 용기를 잃고 비탄에 빠져서 이 꼴이 되다니 참 한심하군. 바보야, 정신을 차려. 그리고 네 녀석이 얼굴 빼면 볼 게 뭐 있어? 몸을 소중히 여겨. 내 가슴이 찢어지잖아.”
“자넨 날 놀리기만 하는군.”
“천만에. 신의를 지닌 친구로서 충고하는 거야. 자네가 이토록 의기소침한 꼴을 보니 걱정이라고. 제발 어리석게 굴지 마. 자네 부친께서 이 꼴을 본다면 어쩔래? 또 수도원으로 쫓겨날걸.”
“내가 어리석다고?”
“사람은 모두 어리석지.”
“흥. 이게 누구 탓인데?”
“반은 내 탓이지. 그래서 탑 속에 갇혀 속죄의 기도를 드렸다고 했잖아.”
이터는 숙연히 성호를 그었다.
“난 탑 꼭대기에서 식음을 전폐하며 기도를 드렸어. 네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쓸데 없는 짓을 했군.”
“왜 그렇게 생각해?”
“하느님께서 불경스런 자네의 기도를 들어주실 만큼 자비롭다면 그전에 독실한 내 기도를 들어주셨을 테니까.”
이터는 빙그레 웃었다.
로트는 얄미운 낯짝이 보기 싫다고 쏘아붙였다.
“로트, 자넨 욕심이 너무 지나쳐.”
이터는 그를 꼭 붙들었다.
“하느님께선 자네에게 이미 충분한 보상을 해주셨어.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 극락의 세계를 정복할 무기를 마련해주셨지. 남들은 그걸 부러워하는데 외고집에 반푼이인 자네만 몰라.”
“무기라니?”
“이리 와봐. 고개를 들고. 그렇지, 이제 날 봐.”
이터는 향유 냄새가 나는 엄지와 검지로 로트의 턱을 치켜들었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이 낯짝 좀 봐. 고운 얼굴과 아흐마르디(금실을 넣어 짠 값진 아라비아 산 녹색 실크 천)처럼 빛나는 녹색 눈동자, 사람을 홀리는 미끈한 몸매, 붉고 싱싱한 입술과 튼튼한 가슴팍, 귓전에 이름을 속삭여주면 내장이 녹아날 것 같은 달콤한 음성, 코를 풀 때도 철철 흘러넘치는 기품, 이게 자네가 받은 축복이 아니고 뭐야? 힐데가르트 같은 여자는 빨리 잊어. 대신 모험을 떠나. 당장 자네 몫의 유산을 팔아서 말과 무구를 준비해 이 도시를 떠나. 저 바깥세상에는 자네의 사랑 봉사를 기꺼이 수락해서 몸과 나라를 송두리째 바칠 여왕이 수두룩해. 떠나기만 하면 신세계가 펼쳐질 거야.”
“하지만 난 기사가 되기 싫어.”
“그런 척만 해도 돼.”
“사양할래.”
“자네의 아름다움에 취한 귀부인들은 자네가 엉터리 기사라도 받아줄 거야.”
“나보고 사기꾼이 되라는 거야?”
“모세나 예수, 마호메트쯤은 돼야 사기꾼이 되지.”
“그런 불경스런 말은 닥쳐.”
“고귀하고 정직한 자네가, 때로는 반푼이처럼 너무 순진한 자네가 어떻게 사기꾼이 되겠어. 그냥 창과 방패를 잠깐 들고 근처에 있는 왕국을 한 바퀴 돌고 오라는 거야. ‘넌 누구냐?’ 하고 누군가 물으면 ‘난 모험을 쫓는 무명의 기사요, 사랑과 평화의 수호신이랄까.’ 하고 대답하면 돼. 그럼 그 자리에서 귀부인들이 소맷자락이니 리본이니 속옷을 무더기로 던져줄 거야.”
“난 다른 여자한테는 관심 없어.”
로트는 이터의 손을 뿌리치고 좁은 골목길을 성큼성큼 거닐었다.
“자네 같은 바람둥이는 이런 내 마음을 결코 이해하지 못하겠지. 이번에는 특별한 사랑이야. 난 힐데가르트를 본 순간 첫눈에 반했어.”
“물론 그렇겠지. 넌 항상 아무에게나 첫눈에 홀딱 반하니까.”
“마음껏 빈정대.”
“그럼 한 가지만 묻자. 카이렛, 로에란그린하고 나는 조금 전에도 토론했어. 너의 고질병에 대해서.”
“고질병이라니?”
“네놈의 고질병, 만날 헛물만 켜는 병적인 짝사랑 말야.”
“뭘 새삼스레.”하고 읊조리는 로트의 표정은 냉소적이었다. 별안간 실실 웃기도 했다.
소름이 쪽 끼친 이터가 말을 이었다.
“정신 팔지 말고 내 말을 들어봐. 그런데 이번엔 예전과 경우가 다르다는 게 우리의 의견이야. 그래서 묻는 건데 로트, 자넨 그 여자를 똑똑히 봤어?”
“힐데가르트 말야?”
“그래.”
“당연히 봤고말고.”
“이상하군. 그때는 황혼 무렵이었고 방안이 무척 캄캄해서 따지고 보면 자네가 그녀를 본 것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어.”
“아니. 난 똑똑히 봤어!”
로트는 사자처럼 소리쳤다.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꿈속에서도 수백 번은 봤었고!”
지끈, 머리가 울린 이터는 기다란 손가락을 떨며 이마를 짚었다.
로트는 불현듯 눈을 빛내며 이터의 앞을 바쁘게 오갔다.
이터가 다시 물었다.
“좋아. 그럼 그날 그 여자가 어떤 옷을 입었지?”
“주홍빛의 아름다운 드레스. 그녀는 석양 속에서 작은 불꽃처럼 타올랐어.”
“빌어먹을.”
“왜?”
“로트, 그 여자의 드레스는 하얀색이었어.”
“주홍빛이 틀림없다니까. 날 속이려 들지 마.”
“하얀색인데……. 흠. 혹시 노을 때문에 착시가?”
“제기랄! 이 판국에 그딴 게 중요해?”
로트는 버럭 고함치고 이터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자넨 헛소리라고 하겠지만 사실이야. 그건 주님의 계시였어.”
“빌어먹을. 또 그 흰둥이 수사슴 얘기군.”
“친구여, 내 얘기를 좀 들어다오. 그건 나조차도 처음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신비로운 사건이었어.”
멱살이 잡혀 숨을 헐떡이는 이터를 내팽개치고 로트는 박공지붕 사이로 파란 하늘을 우러러봤다. 회상에 잠긴 듯이 턱을 어루만지며 이터의 앞을 오락가락하다 힘차게 말문을 열었다.
“친구여, 지금 곰곰이 상기해 봐도 그날은 매우 특별한 날이었어. 나는 그때 병마에 싸우는 소년이었고 천국으로 가서 주님을 뵐 날을 오늘, 내일 하며 세고 있었어.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그날 아침에 나는 불가사의한 충동에 이끌려 수도원을 빠져나와 숲으로 갔어. 거긴 마인츠나 쾰른의 대주교 못지않게 권위적인 우리 수도원장이 남의 눈을 피해서 사슴이나 늑대를 잡던 곳이었어. 지독하리만치 엄격한 계율을 고수하던 그도 사냥의 욕망만은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했어.
그리고 다음날이면 속죄의 방편으로써 온 마을의 목욕통을 모아서 걸인과 빈자의 목욕을 시켜주고 이발을 시키고 이를 잡아줬지.
아무튼 그날 반나절 간 나는 그 숲에서 지칠 줄 모르고 헤맸어. 경이로운 경험이었지. 왜냐하면 내 몸뚱이에서는 전에 없던 힘이 치솟고, 나를 좀 먹던 병마가 즙을 짜내듯 전부 빠져나간 것 같았거든.
나는 힘을 주체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온 숲을 쏘다니며 고함을 지르고, 돌멩이를 던지고,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가비욧(사슴 사냥용 투창)처럼 쥐고서 종일 쏘다녔지.
그러던 난 갑자기 음습한 안개에 휩싸였어. 거긴 그 숲의 가장 깊숙한 곳이었지. 저 시문 밖의 검은 숲보다도 더 음침하고 고요했어.
그런데 어두컴컴한 수풀 너머에 뭔가가 새하얗게 빛나고 있잖아. 그건 흰 눈이었어. 새하얀 눈! 한여름이었는데도 시리도록 새하얀 눈이 어느 덤불 위에 산꼭대기의 빙설처럼 내려 있었던 거야.
난 그쪽으로 달려갔지. 그러자 그 새하얀 눈 더미가 바삭, 바삭 덤불을 흔들다 허공에 솟아오르더라고.
난 까무러치게 놀랐어.
그게 뭐였겠나. 쉿. 내가 말할 테니 자네는 입을 다물어.
그건 짐승의 뿔이었어. 한 번만 봐도 눈이 멀 것 같은 새하얀 뿔, 황제의 관인 양 열여덟 갈래로 갈라진 웅장한 뿔이었지.
난 처음엔 일각수가 아닐까 싶어 눈을 비비며 놈의 이마를 살폈어. 하지만 그놈은 수사슴이었지.
그 수사슴은 나를 빤히 보고, 내가 움켜쥔 커다란 돌멩이와 가짜 가비욧을 보더니 이상한 콧바람을 불었어. 그 콧바람은 점차 거세지더니, 마침내 초목과 나무 우듬지를 뒤흔드는 바람이 됐어.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 숲을 뒤흔든 바람이었던 수사슴의 콧바람이 노랫소리처럼 들렸어. 사람의 음성으로 변한 거야.
그는 나를 말끄러미 쳐다보며 이렇게 물었어.
「어린 미물이여,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
그래서 나도 말했지.
「이상한 사슴이네. 뿔도 괴상해.」
그러자 수사슴은 약간 자존심이 상한 듯이 쏘아붙였다네.
「그런 네 녀석은 얼간이 백치인가 보구나. 말라깽이에 허약해서 부질없는 생명도 얼마 안 남았군.」
「흥. 넌 괴물이지?」
나도 쏘아붙였다네. 그리고 내 실망을 솔직하게 말했지.
「뿔이 그게 뭐야? 못생긴 나뭇가지 같이. 쳇, 그리핀이나 일각수였으면 좋았을걸.」
「무례한 철부지 같으니. 나를 모욕했으니 벌을 줘야겠다.」
「모욕이 뭔데?」
나는 약이 올라서 캐물었네. 그 녀석이 날 얕잡아보고 일부러 어려운 말을 써서 조롱하는 줄 알았거든. 그러자 수사슴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지.
「하지만 네 녀석이 나를 도와준다면 자비를 베풀고 선물을 줄 수도 있지.」
그때 비로소 난 그 수사슴의 한쪽 다리가 올가미에 걸려 있는 걸 봤어. 원장이 친 올가미였지. 난 어린 마음에 선물을 준다니까 냉큼 그걸 풀어줬지.
그러자 수사슴은 물기 어린 새카만 보석 같은 눈동자로 나를 빤히 쳐다봤는데 꼭 내 머리에 스며들어 속마음까지 읽어낼 것만 같았지.
내 직감은 옳았어. 가까이에서 나를 본 수사슴은 이렇게 말했어.
「네 녀석은 로트로구나.」
「나를 알아?」
「알고말고. 구두쇠 포겔바이데의 아들이지.」
「우리 아빠도 알아?」
「잘 알지. 네 선조도 다 안다.」
「난 가야겠네. 안녕.」
나는 얼른 그 자리를 떴어. 하지만 몇 발짝 떼기도 전에 돌아서서 물었지.
「수사슴아. 넌 우리 아빠한테 날 여기서 봤다고 말 안 할 거지?」
「글쎄.」
「말하기만 해봐. 네 녀석 뿔을 모조리 잡아 뺄 거야.」
「보기보다 난폭하고 고약한 녀석이구나. 너는 지상의 만물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 내가 심술 맞은 네 녀석을 사랑하듯이.」
「쳇. 사랑이라고?」
나는 샐쭉해서 맞받아쳤어.
「난 미움만 받는 천덕꾸러기인데 사랑이 다 뭐야. 난 그딴 건 몰라. 사람들은 다 내 원수야. 너도 내 원수야. 철천지원수.」
「철천지원수가 무슨 뜻인지는 아느냐?」
「몰라. 알게 뭐야. 벨데케 녀석들은 다 원수야. 날 못살게 괴롭히면 네 녀석도 원수야. 내가 몰래 숲에 나왔다고 아빠랑 원장님한테 일러바칠 거잖아. 그럼 난 또 쫓겨날 거야. 길바닥에서 굶어 죽는다고. 집에서도 쫓겨났는데 여기서도 쫓겨나면 어떡해? 난 죽기 싫어!」
그러고서 나는 가비욧을 홱, 던졌는데 놀랍게도 가비욧은 수사슴의 뿔에 맞기도 전에 튕겨나갔지.
「어리석은 미물이여.」
수사슴은 한숨을 쉬었어.
「네 녀석은 이 숲의 주인도 몰라보느냐. 감히 어디다 그걸 던지느냐.」
「쳇, 빗나갔군. 우리 아빠가 그랬어. 원수를 만나거든 해치우라고.」
수사슴은 그러자 내 비뚤어진 마음보를 나무라며 오랫동안 설교를 해댔지. 원한과 미움을 버리라는 둥,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둥, 천국과 지옥 그리고 연옥은 희망이라는 둥 말했어. 도중에 우리 가문과 벨데케 가문, 내가 죽을병에 걸린 이유, 그리고 바르쿠스 얘기 따위도 들렸지만 난 너무나 어려서 전혀 알아듣지 못했어.
설교가 이어지자 난 너무 지루하고 좀이 쑤셨어. 그래서 가겠다고 했더니 수사슴은 설교를 중단하고 말했어.
「요 녀석, 설교는 안 듣고 내 뿔을 잡아당길 생각만 했군.」
「몰라. 난 갈래. 아빠한테 이르지 마. 안녕.」
그러자 수사슴은 내게 줄 게 있다고 했어.
나는 귀가 솔깃했어.
「뭔데?」
「넌 나를 도와줬으니까 보답으로 선물을 주마.」
「어서 줘.」
나는 신나서 소리쳤어. 진짜 가비욧이나 쇠뇌를 갖고 싶었거든.
그래서 선물을 꺼낼 생각은 안 하고 가만히 날 보기만 하는 그에게 따졌지.
「왜 안 주는데? 얼른 달라니까.」
「이미 주었느니라.」
「어디? 난 못 받았는데?」
나는 호들갑을 떨며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선물은 보이지 않았어.
수사슴은 그때 새하얀 뿔을 높이 쳐들고서 기묘한 미소를 보냈지.
「어리석은 인간이여, 내일 아침에 일어나거든 네 마음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여라. 하루, 이틀, 한 달, 일 년 그리고 그 후에도 항상 네 마음속의 신성에 귀를 기울이렴. 그게 내가 주는 선물이다. 일찍이 주님께서도 ‘그 가르침’을 네게 주셨노라.」
수사슴은 그러고서 사라졌네.
난 얼떨떨하고 수사슴 녀석이 선물을 준답시고 떠들기만 하고 아무것도 주지 않은 게 몹시 분해서 눈물을 흘리며 수도원으로 돌아갔지.
그날 난 밤새 열이 올라서 끙끙 앓았어. 온종일 쏘다녔으니 벌을 받은 거야.
수도사들은 내 종부성사를 준비한답시고 야단을 떨었어. 땀을 흠뻑 흘리다 의식을 잃었던 나는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났어. 내 이마는 여전히 불덩이처럼 뜨거웠고 나룻배를 타고 온 사신이 문밖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지.
그때 문득 어제 수사슴 녀석이 한 말이 떠올랐어. 그 녀석이 나한테 선물을 준다고 했으니까 날 살려주려는 걸까, 생각했지. 아침에 일어나서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라고 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가슴을 몹시 두근대며 귀를 기울였지. 그랬더니 정말로 어떤 속삭임이 들리더군.
‘너는 오늘 밤 죽는다…….’
나는 분이 치밀었다네. 눈물이 줄줄 나더군. 몸뚱이는 장작불처럼 뜨겁고 밤이 새도록 혼절했지.
그러다 깜빡 제정신이 들면 내 원수를 모조리 저주했어. 나를 수도원에 쫓아 보낸 부친이랑, 어린 나를 혹독하게 쥐어짠 엄혹한 수도사랑 날 희롱한 수사슴 녀석을 원망하고 저주하며 눈물을 흘렸지. 그리고 마침내 정신을 잃었어.
나는 한참 후에 눈을 떴어. 그러고서 천사를 기다렸지. 내가 죽어서 천국에 왔다고 굳게 믿었으니까.
하지만 놀랄 일이 벌어졌어. 몸뚱이를 비틀고 눈을 깜짝대자 아름다운 날개를 단 천사 대신에 대머리 수도사의 빼빼 마른 얼굴이 떡, 나타났어. 지난밤에 겪은 고통은 씻은 듯이 사라졌고 신열도 싹, 사라졌어. 나는 심지어 벌떡 일어나서 배가 고프다고 외쳤어.
수도사들은 기적이라고 말했어. 수도원장은 내가 극적으로 회생한 이 사건을 이웃 왕국에까지 떠벌렸지. 그러자 기부금이 물 밀 듯이 답지했어. 내 옷자락을 쓰다듬어 주님의 은총을 훔치려는 자들도 있었지.
어떤 수도사는 만약 내 부친이 축성(祝聖)에 인색하지 않고 수도원에 좀 더 기부했더라면 벌써 나았을 텐데, 구두쇠처럼 인색하게 구느라 자식만 고생시켰다고 속닥였어.
그날로 난 병마를 떨치고 건강하게 자랐어. 어떤 수사슴보다 더 건강히 들판을 뛰어다녔어. 열심히 기도하며 주님의 착한 목자가 되겠다고 맹세했어.
원장한테도 특별히 고해성사를 받았는데 죽으리라 여겼던 날, 내 부친과 수도사, 심지어 하느님마저도 저주했던 사실을 고해했지.
수사슴 얘기는 안 했어. 그랬다간 원장한테 몰래 사냥터에 갔다고 호되게 혼이 났겠지.
「어린 형제여.」
내 고해를 묵묵히 듣던 원장은 그날 딱 한 말씀만 했어.
「그리스도께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책망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이는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의 자식이 되고자 함이다.」
그 이후는 자네가 아는 대로야. 난 수도원에서 건강히 자랐지. 이따금 황금빛 머리칼의 아름다운 소녀와 하얀 수사슴의 뿔이 보이는 이상한 꿈을 꾸곤 했지만 나이를 먹게 되자 그런 꿈도 사라지고 수사슴에 대해선 까맣게 잊어버렸어. 그리고 부친의 호출로 고향에 돌아왔어.
이제는 인정하지만 백색의 수사슴은 내 생명을 구해줬어. 난 그걸 선물이라고 믿어. 그런데 원장의 입으로 대신 전한 설교의 진의는 뭘까. 더욱이 내 마음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라는 설교는 무슨 뜻일까?
귀향한 후로 어느 날 나는 그 수사슴을 다시 꿈에서 봤어. 황금빛 머리칼의 소녀도 재등장했지. 그러자 의심이 되살아났어. 왜냐하면 수사슴은 심술쟁이였으니까 분명 나를 곯리려 했다고 믿었거든.
내가 해답을 얻은 건, 힐데가르트 그녀를 우연히 보게 된 날이야.
나는 그날 설교의 진의를 바로 깨달았지.
아니 그건 심술 맞은 예언이나 다름없었어.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
수사슴은 이렇게 말했었지.
제기랄! 그래. 그 수사슴은 틀림없는 심술쟁이였어.
아, 사랑에 따르는 이 고통이 심술이 아니라면 뭘까. 하필이면 원수를 사랑하게 하다니!
수사슴의 심술은 그게 다가 아냐. 녀석은 날 골탕 먹이려고 주님과 결탁했어. 또 다른 음모를 꾸몄어.
주님은 가혹해. 왜 내게 이런 시련과 고통만 줄까.
이 세상 여자들은 나를 전부 미워하고 원망해. 내가 꽃을 바치면 나를 노려보고 눈물을 흘린다지. 내가 꿀 과자를 사가면 그걸 산산이 바숴버리고 침대에 엎어져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 그러면서 자길 정말로 사랑하느냐고 물어.
그럼 난 이렇게 대답해.
「하늘에 맹세코 나는 그대를 내 목숨보다 사랑합니다.」
그러면 여자들은 또 울어. 내가 함께 눈물을 흘리며 그 소맷자락에 입이라도 맞추려고 하면 발작을 일으켜 나를 때리고,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쿠션을 던지며 나가라고 고함을 쳐. 창부가 들끓는 목욕탕에나 가라는 거야.
대체 내게 뭘 잘못했는데? 나는 진심으로 그 여자들을 사랑했는데.
나는 그래서 마침내 깨닫게 된 거야. 얄미운 수사슴 녀석이 주님과 합세했구나. 주님께선 내게 눈먼 큐피드의 화살을 박아놓고는 여자들에겐 날 벌레처럼 미워하게 만드셨지.
이게 나의 불행한 운명이야. 나를 그 부드러운 두 팔로 꼭 안아준 여자들도 나를 벌레나 나병 환자처럼 미워하는데, 하물며 힐데가르트가 날 사랑해줄까.
그녀도 나를 오해하고 있을 거야. 간통자에 바람둥이라고 여길 거야.
아, 그녀를 한 번이라도 만나서 오해를 풀 수만 있다면 좋겠는데!
저주받은 운명!
어쩌면 나는 평생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거야. 사랑으로 충만한 세상에서 이게 얼마나 가혹한 벌일까!”
로트의 절절한 고백과 비탄에 동화되어 이터는 함께 울었다. 그는 허리띠에 매단 비단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로트에게 건넸다.
“자, 이걸로 눈물을 닦아.”
“고마워.”
“나도 좀 빌려줘. 눈물이 안 멈춰.”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내 슬픔과 고통에 함께 눈물을 흘려주는 자네의 우애에 난 깊이 감동했어.”
두 사람은 손수건이 흠뻑 젖을 때까지 실컷 울고 나서 서로 어깨동무하고 골목에서 빠져나갔다.
광장 입구에 다다른 이터는 문득 멈춰 서서 눈꼬리의 눈물을 마저 닦고 말했다.
“로트, 자네의 둘도 없는 친구로서 자네의 절망과 슬픔을 희망과 환희로 바꿔줄 선물을 줘야겠군. 우리 목숨을 걸어야겠지만. 으악!”
“뭐? 무슨 소리야? 자네 혹시 그녀를 만났나?”
로트는 이터를 벽에 밀어붙이며 외쳤다.
“언제? 어디서?”
“진정해.”
“힐데가르트가 내 얘기를 하던가? 빌어먹을! 혼자서만 만나다니!”
“정신 차려. 탑에 감금당한 공주를 내가 무슨 수로 만나.”
“망할 자식! 지옥에나 떨어져!”
욕지거리를 퍼부은 로트는 홱 돌아서서 성큼성큼 광장으로 나갔다.
이터가 뒤쫓았다.
“로트, 내 말 좀 들어봐.”
“싫어. 뻔하잖아. 딴 여자를 소개할 생각이겠지. 내가 널 얼마나 증오하는지 안다면 꺼져. 이 칼로 네 녀석의 가슴을 찌를 테니.”
“뭐, 그럼 관두자고.”
이터는 허리춤에 껴둔 모자를 머리에 대강 얹었다.
“난 네놈을 위해 모험을 하려고 했는데 꺼지라니 꺼지는 수밖에. 오붓한 식사는 우리 셋이서만 해야겠군.”
로트는 와락 달려들어서 셋이 누구냐고 물었다.
“나랑 콘드비라무어스 그리고 자네의 비둘기지.”
로트는 만세를 부르며 이터를 힘껏 끌어안았다. 뺨에 키스도 퍼부었다.
“자네가 장차 제후가 된다면 나의 신의와 충절은 평생 자네 거야. 그럼 언제, 어디서 만나는 거지?”
“아직 약속한 건 아냐.”
“빌어먹을!”
이터는 속았다면서 욕을 부르짖고 내빼려는 로트를 붙잡고 설명했다.
“콘드비라무어스는 주에 한 번씩 베르나르 사제한테 라틴어 교습을 받고 있잖아.”
“그래서?”
“자네가 귀여운 비둘기를 만난 날도 그날이지. 그런데 힐데가르트도 어쩌면 같이 배울 것 같아. 콘드비라무어스가 늘 집에만 갇혀 있는 그녀를 가엽게 여겨서는 함께 배우자고 하겠다더군. 콘드비라무어스도 경쟁자가 있어야 열을 내는 성미거든. 어쨌든 벨데케가 허락한다면 힐데가르트는 지난번처럼 성으로 올 거야. 내가 그럼 콘드비라무어스에게 부탁할게. 그땐 귀여운 비둘기 한 쌍이 밀회할 수도 있겠지. 어때?”
로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이터를 쳐다봤다. 그 눈빛을 읽어낸 이터는 싱글싱글 웃었다.
로트는 불안에 사로잡혀서 초조하게 속삭였다.
“정말 우리 둘이서 만날 수 있을까?”
“그럼.”
“하지만 만약……. 만약 그녀가……. 내 이름을 묻는다면 어쩌지?”
로트는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내 이름을 듣고 누군지 알면 만나기도 전에 날 증오할 텐데. 빌어먹을! 저주받을 이름 따위! 아니, 이러면 어떨까. 난 가면을 쓰고 가명으로 그녀를 만날게. 일단 만나서 사랑을 고백하고 나중에 내가 누군지 자백하는 거야. 선량하고 사랑스러운 그녀는 분명 날 이해해 주겠지. 응? 어때, 이터? 나중에 내 이름을 밝힌다면 그녀는 날 비열하다고 욕하고 저주할까?”
“뭐, 그런 걱정은 하지 마.”
이터가 대답했다.
“가명이니 가면을 쓴다는 둥, 그런 번거로운 수고도 할 필요가 없어.”
“왜?”
“왜냐고?”
이터는 활짝 웃었다.
“힐데가르트는 이미 자네를 알고 있거든.”
“맙소사!”
로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우린 그날 통성명을 하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날 쳐다보지도 않았어!”
“철천지원수의 아들이면 굳이 통성명할 필요가 없지. 벨데케 일족은 자네 그림자만 봐도 알아볼걸. 참고로 그 집안 지하실에는 자네 집안의 초상화가 걸려 있대. 로트 너의 초상화도 제일 큼지막한 게 걸려 있겠지.”
“그건 또 왜?”
“당연히 화살 과녁이지. 쏘기만 하면 백발백중! 하하하.”
이 무섭고도 당연한 주장에 자신의 처지가 새삼스레 각성된 로트는 불시에 강렬한 공포에 빠졌다.
그는 이성과 감정이 송두리째 빠져 있던 한동안의 미혹 상태에서 깨어나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설마……. 벌써 소문이 퍼진 거냐?”
“네 녀석이 그 여자한테 꽂혀서 반미치광이가 되었다는 소문 말야? 그건 아냐. 아직은.”
“다행이군.”
“로마로 순례 여행을 떠난 자네 부친만 모른단 말이야. 네 녀석이 그런 몰골로 사방팔방 알리고 다녔으면서 비밀이라고 여기다니 깜찍하군.”
“……!”
로트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근거없는 확신으로 그는 이제껏 자신이 이 무서운 비밀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고 여긴 탓이다.
그는 격정에 곧잘 휘둘리는 정열가이지만 그만큼 의지 또한 남달랐다. 로트는 곧바로 충격을 떨치고서 힘차게 말했다.
“이 정도의 시련과 장애는 아무것도 아냐. 이터, 만약 내게 불행이 닥치면 그땐 힐데가르트의 황금빛 머리카락 한 올을 꼭 가져다줘. 그게 우리의 사랑을 지켜줄 거야.”
“힐데가르트의 머리칼은 하얀 금발인데.”
그게 중요하느냐며 이터의 멱살을 쥐고 흔든 로트의 만면엔 이내 희색이 번졌다
“아니면 그녀가 고운 손을 씻은 물이라도 좋아. 그걸 가져다줘. 그걸 송두리째 마셔버리면 헤라클레스가 되겠지. 아, 벌써 힘이 나는군. 가자! 오늘은 내가 맥주를 살게.”
“와! 목욕탕으로 가자. 마사지도 받고 피도 뽑고!”
두 귀공자는 어깨동무를 척, 하고서 카이렛과 로에란그린을 찾으러 광장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