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랑에 빠지지 않는 자는 현명하다
화창한 여름날이었다.
광장에 내리꽂히는 햇살이 허공에 떠도는 먼지를 낱낱이 비췄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아서 시야에 펼쳐진 모든 사물이 햇빛을 담뿍 머금고 하얗게 빛났다.
눈 깜짝할 새에 텅 빈 중앙 광장에는 보석이 박힌 허리띠에 칼을 찬 두 남자가 등장했다. 게르만족의 혈통대로 금발에 파란 눈, 하얀 피부와 늘씬한 키에 사치스런 옷차림을 한 귀공자였다.
그 중에서 턱이 갸름하고 눈매가 깊은 한 명은 값진 루비 반지를 여러 개 끼고 있다.
그보다 약간 키가 작은 또 한 명은 이목구비가 오목조목하고, 붉고 화려한 꽃무늬 자수가 놓인 진홍색의 양말 바지를 입고서 날씬한 다리를 뽐내고 있다.
두 귀공자는 이야기에 열중하며 광장에 들어섰다.
용감한 흑돼지가 그쪽으로 돌진했다.
놈을 줄곧 추격하던 돼지치기 소년은 어느 상점 앞에 우물쭈물 서버렸다.
두 귀공자는 흑돼지를 잡아먹자고 농을 치다 주위를 둘러봤다.
광장이 조용했다. 주변의 상점도 마찬가지였다. 구두장이나 재봉사가 내놓은 가판대 용 나무 덧문은 위아래가 닫혀 있다. 땅바닥을 후벼 파는 흑돼지만 주변에서 알짱거렸다.
“다들 또 달아났나.”
루비 반지를 낀 귀족 청년, 로에란그린은 저 멀리서 우물쭈물하는 돼지치기를 찾아냈다.
“이봐, 돼지치기, 너 혹시 로트를 보았나?”
“전 못 뵀습니다요!”
돼지치기 소년은 쌩! 하니 옆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어떤 사내가 그곳에서 빈 물통을 들고 나왔다. 그는 부딪칠 뻔한 돼지치기에게 욕을 해대며 광장 중앙으로 나갔다.
로에란그린은 그 사내 앞을 가로막고 로트를 봤느냐고 물었다.
“헉! 포겔바이데 나리 말씀이신가요? 절대 못 봤습니다!”
그 역시 줄행랑을 치자 로에란그린은 친구에게 물었다.
“카이렛, 로트 그 녀석 또 어디 갔을까.”
“뻔하지, 뭘. 숲에 갔겠지.”
카이렛이라고 불린 귀공자가 답했다.
로에란그린은 고개를 저었다.
“설마 거길 또 갔겠어.”
“틀림없다니까. 물고기는 물에서 살고 새는 하늘에서 날아다니잖아. 비탄에 빠졌을 때 남쪽 숲에 가지 않는다면 로트가 아니게.”
“아니. 이번에는 나랑 굳게 약속했거든. 숲은 위험해서 다시는 안 가겠다고.”
“과연 그럴까. 흠, 저기 이터가 온다.”
두 귀공자는 어느 골목에서 나와 기다란 사지를 쭉쭉 뻗고 걸어오는 청년을 돌아봤다.
그 또한 늘씬한 장신에 얼굴 윤곽이 뚜렷하고 턱이 단단한 귀공자였다. 이목구비 중에선 움푹 파인 눈과 그 위의 완강한 눈두덩이 유독 인상적이었는데, 그 인상은 사치스런 옷차림에서 풍기는 여성용 향유 냄새 대신에 돌도끼로 때려잡은 짐승의 피 냄새가 어울렸다.
그는 두 귀공자를 보자 여어, 하며 기다란 팔을 쳐들었다. 햇살에 눈이 부셔 가늘게 뜬 파란 눈이 어린애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그는 친구들의 어깨를 치며 물었다.
“자네들 오랜만이야. 그동안 어디 숨어 있었어?”
“그런 자네야말로 어디 숨어 있었나?”
로에란그린이 쌀쌀맞게 물었다.
이터는 헤죽 웃었다.
“나야 아주 좋은 데 가 있었지.”
카이렛은 이터의 옷차림을 훑더니 코를 쥐고서 얼굴을 찡그렸다.
“어휴 향유 냄새가 지독하군. 오늘은 또 어느 과부네 침실에서 기어 나왔어?”
“제발 묻지 말게, 카이렛.”
“왜?”
“카이렛, 이터는 너희 모친 침실에서 기어나왔을 거야.”
로에란그린이 말했다.
카이렛은 눈을 크게 떴다.
“뭐? 거긴 딴 놈들이 줄을 서고 있을 텐데.”
“그래서 늦었어.”
이터가 의미심장한 눈짓을 했다.
“사흘 쯤 줄을 섰지. 다음엔 순번 표를 나눠준다더군.”
두 귀공자는 이터의 대답에 허리를 짚고서 박장대소했다.
이터는 두 팔을 휘두르며 분수대로 걸어갔다. 머리에 대강 얹어놨던 모자를 허리띠 사이로 쑤셔 박고 분수대 물줄기에 머리를 디밀고 물을 마셨다.
그가 젖은 머리를 흔들자 물방울이 얼굴에 튀겨서 카이렛이 욕을 퍼부었다.
로에란그린은 이터에게 비단 손수건을 건네며 나무랐다.
“자넨 언제쯤에야 여자를 멀리하고 성실히 학문에 매진할 테냐. 그러다 숙부에게 매질을 당할걸.”
“매질로 끝나면 다행이게.”
카이렛이 껴들었다.
“허구헌 날 남편들 몽둥이에 쫓겨 지붕을 타고 다니니 추방감이지. 영구 추방!”
“영주님께서도 참을 만큼 참으셨지.”
로에란그린이 심각하게 말을 받았다.
“영주님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 더군다나 콘드비라무어스도 자네 약점을 잡으려고 혈안이라서 또 말썽이 생기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터라는 귀공자는 이 도시의 영주, 하인리히의 조카였다. 아름다운 콘드비라무어스는 그의 사촌 누이였다. 바이에른 출신인 이터는 볼로냐 대학의 법학도로서 작년에 임시로 귀향한 터다.
숙부의 영지인 이 도시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제2의 고향이었다. 카이렛과 로에란그린이 함께 들판을 뛰어놀았다. 그 후 카이렛은 수도원으로, 로에란그린은 인문학도로서 파리에 갔다가 몇 해 전에 귀향해서 재회했다.
이들은 주야로 붙어 다니며 서로의 개인사에 간섭하느라 온 정열과 노고를 바쳤지만 누군가 그들의 아름다운 우애를 살짝 비꼬아 찬사하면 서로의 친분을 완강히 부정하며 개떼처럼 싸웠다.
“이 바람둥이야, 도대체 콘드비라무어스랑은 언제 결혼할 거야? 청혼 안 해?”
카이렛이 이터에게 물었다.
이터는 그런 소리 하지 말라며 펄쩍 뛰었다.
“아무리 미녀라고 해도 난 그런 무서운 여잔 싫어. 난 입술이 앙증맞게 붉고 툭 치면 쓰러질 것처럼 연약하고 부드러운 여자가 좋아. 비둘기처럼 작고 귀여운 여자 말야.”
“그런 여자들이 퍽이나 자네를 귀여워하겠다.”
로에란그린이 혀를 차며 말했다.
“자네가 오죽 밉살 맞아야지.”
“그런데 콘드비라무어스 그 여자는 도대체 왜 시집을 안 가는 걸까.”
카이렛이 말했다.
“이 도시엔 변변한 놈이 없대.”
이터가 대답했다.
카이렛은 코웃음을 쳤다.
“하, 로트 녀석한테 홀딱 반해서 눈독 들여놓고서.”
“이젠 로트를 증오한대.”
“왜?”
“자기가 이 도시 과부나 목욕탕집 딸보다 못 한 게 뭐냐며 몹시 화가 나서 다른 영웅을 기다리고 있대. 자기 속옷을 창에 걸고 마상 창 시합에 나갈 영웅 말야.”
카이렛은 그 대답에 미친 듯이 웃어댔다. 광장 주변을 가끔 살피던 로에란그린도 조소를 머금었다.
“영웅이라니.”
카이렛은 이죽댔다.
“요새 그런 놈이 어디 있다는 거야. 고작 창과 방패만 들면 아무나 원탁의 기사나 롤랑이 되나. 이터 자네는 콘드비라무어스에게 얼마 전에 촌락을 약탈하고 종적을 감춘 도적 기사 녀석 얘기를 해줬어야 해.”
“적기사 말인가.”
“그래. 그런 놈들은 무장한 도적 떼지 무훈 연애담의 영웅이 아냐. 입으로는 사랑 봉사니 신의니 충성이니, 명예를 위해선 목숨을 바치니 어쩌니 나불대지만 사실은 피와 황금에 굶주린 살인자에 약탈자들이야.”
이터가 신이 나서 동의했다.
“그런데 카이렛, 자네 꽤 신랄하군. 혹시 적기사한테 털린 적이 있나?”
로에란그린은 이터에게 조용히 언질했다.
“카이렛은 사실 기사가 되고 싶었대. 유감스럽게도 형들에게 밀려서 수도원으로 쫓겨났지만.”
형제가 가득한 집안의 막내아들인 카이렛은 가족의 영혼 구제라는 신성한 임무를 떠맡고서 강제로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열 두어 살 때의 일이다. 그 수도원에서 먼저 와 있던 로트와 재회했고 이후로 둘은 형제처럼 자랐다.
“허튼 소리!”
카이렛이 빽, 소리를 질렀다.
“누가 그런 약탈자 따위가 되고 싶대? 놈들이 진짜 기사라면 밤낮 갑옷만 번쩍대고 뻐기면서 규방에 잠입할 궁리만 하지 말고 가서 이교도나 무찌르라고 해.”
날이 몹시 더웠다.
저 멀리 영주의 성채 위에 솟은 깃발이 아지랑이에 가려 흐릿해졌다. 따가운 햇살이 쇠뇌를 쏘듯 지상으로 내리꽂혔다.
골목에 숨어 있던 시민들이 참다못해 하나둘씩 광장으로 나왔다. 그들은 세 한량의 주변을 빙 돌아서 부리나케 광장을 가로질렀다. 호기심 많고 시간 많은 구경꾼만 자리를 지키고 뭔가를 기다렸다.
이터와 카이렛은 분수대에서 물장난을 쳤다. 근처의 골목 입구를 살피던 로에란그린이 되돌아 한숨을 쉬었다. 물속에 머리를 처박은 이터의 어깨를 쳤다.
“이터, 자네 오늘 혹시 로트-…….”
“뭐? 로트가 왔다고? 어디? 제기랄! 그 자식 날 죽일 거야. 안녕!”
이터는 즉시 달아나려고 했다.
카이렛은 이터의 뒷덜미를 꽉 붙들었다.
이터는 몸부림을 쳤지만 저보다 체구가 작은 카이렛의 괴력에 꼼짝하지 못했다.
이터는 놔달라고 부르짖었다.
로에란그린이 그의 귀를 잡고 소리쳤다.
“정신차려! 로트는 벌써 며칠째 안 보여서 우리도 지금 찾는 중이야. 어제도 집에 하인을 보냈더니 없다더군. 같이 체스를 두기로 약속하고서 감감무소식이야.”
그러자 이터는 몸부림을 멈추고 싱긋 웃었다.
“로트가 종적을 감췄다고? 다행이군. 난 또 저기 온다는 줄 알았지. 하하.”
로에란그린은 이터의 팔을 후려갈겼다.
“자넨 정말 로트가 지금 어디 있는지 몰라?”
“베르나르 신부한테 가 있겠지.”
“아니. 거기도 없어. 제일 먼저 찾아갔네.”
“하, 불쌍한 녀석. 이 더위에 어디로 간 거야.”
로에란그린은 너스레를 떠는 이터를 냉랭히 쏘아봤다.
“자넨 로트의 칼에 맞아 죽어도 동정의 여지가 없어. 힐데가르트 그 여자를 왜 소개해서 이 사달을 만들어.”
힐데가르트라는 이름이 나오자 이터가 입을 다물었다.
세 귀공자의 주변을 배회하던 흑돼지가 귀를 쫑긋 세웠다. 분수대의 나체 조각상도 항아리에서 물을 퍼붓다 말고 그들을 쳐다봤다. 2, 3층 창가에서 서성이던 구경꾼은 마주 선 세 귀공자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흑돼지는 두 귀공자 흉내를 내며 험악하게 이터를 노려봤다.
이터는 빙그레 웃었다.
“여보게들. 그건 절대 내 탓이 아냐. 순전히 우발적인 사고였어. 야릇한 운명의 장난이랄까.”
“거짓말!”
카이렛이 소리쳤다.
“네 녀석의 고약한 장난이야. 로트가 사랑에 굶주려 있는 걸 뻔히 알고서 그 여자를 소개시켜줬잖아.”
“불혹을 넘긴 과부에게도 눈이 뒤집힐 만큼 사랑을 갈구한 녀석이 로트야.”
로에란그린이 카이렛의 말을 받았다.
“그러다 걷어차이곤 상심해서 며칠이나 종적을 감췄어. 그게 겨우 한 달 전 일이야. 한 번 사랑에 빠지면 천하에 그런 무분별한 정열가가 없어. 이루 말할 수 없이 감상적이고 충동적이지. 그런 친구한테 원수의 딸을 소개시켜주다니.”
두 귀공자는 팔짱을 끼고서 이터를 노려봤다.
이터는 분수대 턱에 뛰어올라서 항변했다.
“자네들은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어. 들어봐. 그건 로트가 타고난 성정과 환경 탓이지 내 장난 때문이 아냐. 로트가 아직 철부지 얼간이에 반푼이라서 그래. 애정결핍의 후유증이지.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겠다, 줄곧 대머리 수도사만 득실대는 수도원에 처박혀 있었는데, 거긴 재수 없게도 시토 수도원(1098년 프랑스 디종 지역 시토에 설립된 개혁수도회. 회칙이 엄격하며 청빈과 육체노동을 중시)이었어. 하하하. 그러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경이로운 애욕의 신세계를 발견한 거야. 쭈그렁 할망구랑 과부가 얼씨구나 로트를 품 안에 꼭 껴안고 쪽쪽 빨아줬지. 그래서 툭하면 사랑에 빠지는 건데 그게 어째서 내 탓이냐? 탓을 하려면 놈을 탓해야지. 놈이 죄인이다!”
“사랑에 빠진 자에게는 죄가 없어.”
로에란그린은 냉정하게 말했다.
“장난을 친 놈이 태형감이지. 좋아. 운명의 장난이라고 해두자. 그 빌어먹을 놈의 운명 한 번 잔혹하네.”
세 귀공자는 입을 다물었다.
로에란그린은 생각에 잠겼다.
카이렛은 이터가 달아나지 못하게 팔을 꼭 붙잡았다.
“어쨌든 방법은 한 가지야.”
로에란그린이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이터 자네가 무조건 책임을 지고 수습해.”
“젠장. 그 여자가 힐데가르트인 줄 알았다면 근처에도 안 갔을 텐데.”
이터가 투덜댔다.
로트가 벨데케 가문의 딸 힐데가르트를 만난 건 베르나르 신부가 영주의 딸 콘드비라무어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는 날이었다. 그는 이터를 따라 영주의 성에 놀러 갔다가 콘드비라무어스와 함께 있던 힐데가르트를 처음 만났다.
“내가 그날 로트 녀석에게 한 말이라고는 ‘로트, 저기 방안에 콘드비라무어스랑 웬 여자가 있다.’ 이 한마디였어. 애정결핍이 심각한 로트 녀석은 복도에서 그 여자를 얼핏 봤을 뿐인데도 바로 사랑에 빠져 버렸어. 우린 그때까지만 해도 그 여자가 벨데케의 딸인 줄도 몰랐어. 내가 방으로 들어가서 저 아름다운 귀부인은 누구냐고 물었는데도 심술맞은 콘드비라무어스가 야릇한 미소만 지었거든. 그래서 로트 녀석이 정식으로 소개를 받으려고 방에 들어오려고 했는데 마침 베르나르 신부가 들어오기에 우린 줄행랑을 쳤지.”
카이렛은 영주의 성에 로트를 데려간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이터를 나무랐다.
이터는 현재 어디선가 방황하고 있을 로트를 걱정하는 로에안그린을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로트가 돌아오면 새 여자를 소개시켜주면 되잖아.”
“아니, 이번엔 예감이 너무 안 좋아.”
로에란그린이 카이렛을 향해 돌아섰다.
“카이렛 자네, 로트가 말했던 백색의 수사슴 얘기, 기억하지?”
카이렛은 낯빛이 어두워지며 “빌어먹을 수사슴, 기억하고말고.”하고 대답했다.
로에란그린은 두 사람의 등을 떠밀었다.
“자, 그럼 말썽이 생기기 전에 로트부터 찾아내자. 이번에 또 사고가 나면 우린 전부 영구추방이야.”
“제기랄, 로트 자식!”
카이렛이 분통을 터뜨렸다.
“도대체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그놈은 언제쯤 정신을 차리고 좀 현명한 놈이 될까.”
“현명한 사람이 되고 싶나, 카이렛?”
이터가 턱을 쓰다듬으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간단해. 사랑에 빠지지 않는 자는 현명하다지.”
이때 로에란그린이 숨을 죽여 외쳤다.
“악마도 자기 얘기를 하면 온다더니, 저길 봐 봐. 로트가 나타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