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마을에 떠도는 소문: 늑대인간과 적기사 (3/33)

3. 마을에 떠도는 소문: 늑대인간과 적기사

첨탑과 종탑이 하늘 꼭대기까지 치솟은 도시의 교회 앞에는 중앙 광장이 있다.

광장에서부터 뻗은 불규칙한 방사상의 가로(街路)는 다섯 개의 시문과 연결되고 가로가 넓어진 곳에도 소규모의 광장이 있다. 그 주변에는 시장이 있다.

주홍색 박공 지붕을 얹은 상가 겸용 3층짜리 주택은 광장 근처에 있다. 그 뒤에는 꼭대기 층에 공격용 돌출부가 달린 높다란 거주용 탑이나 목조, 석조 주택이 자리 잡았다.

주택 사이사이는 미로 같은 골목이 있고 해가 중천에 뜨는 대낮을 빼면 늘 어둡고 조용했다.

주둥이가 길쭉한 흑돼지 한 마리가 어느 골목에서 나타났다. 돼지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교회 앞에 있는 광장으로 나갔다. 달구지에서 떨어진 도토리를 찾아 주둥이로 훅훅, 맨땅바닥을 파헤쳤다.

돼지는 도중에 말굽에 으깨진 도토리 한 개를 찾아내서 꿀떡 삼켰다. 별안간 놈의 말린 꼬리가 짝 펴졌다. 흘끔 뒤를 돌아본 돼지는 앞도 보지 않고 광장 중앙을 향해서 두두두, 내달렸다.

“서라! 죽인다!”

날카로운 외침이 돼지를 추격했다. 흑돼지는 전속력으로 내달려서 앞서가는 어느 남자와 아이 뒤를 쫓았다.

그들은 이제 막 골목에서 나온 참이다. 둘 다 마른 체구에 도토리처럼 귀 언저리까지 머리를 바짝 깎았다. 회색 옷에는 머리 구멍이 뚫린 원형의 짧은 망토를 입었다.

“아버지.”

키 작은 소년이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우린 어디에 가요?”

“장을 보러 간다.”

“왜 가는데? 아욱!”

“통나무 대가리 같은 녀석, 푸줏간에 고기를 사러 가는 게지.”

“우와! 참말로 고기를 사러 가는 거예요?”

“암. 고기를 사러 가지.”

“어떤 고기를 사누?”

“양. 염소. 돼지. 사슴. 고라니. 백조. 왜가리…….”

“와, 아버지! 얼마만이우? 난 한번도 고기를 사러 가본 적이 없는데.”

“처음이지. 기적 같은 일이고 말고.”

“그럼 우리도 고기를 먹을 수 있어요?”

“떽! 배때기 부른 소리 하고 있네. 고기는 나리들만 드시는 게야. 네놈은 냄새나 실컷 맡아둬라. 다시없을 기회니깐.”

소년은 벌써 고기 맛을 본 양 침을 꼴딱대고 흥분했다.

아버지라 불린 늙은 한스는 사뭇 흥분한 듯이 광장을 지나면서 빈틈없는 눈초리로 주변을 살폈다.

소년도 아비 흉내를 내느라 고개를 좌우로 재깍재깍 돌리다 물었다.

“아버지. 작은 나리께서는 언제 오셨어요? 난 깜짝 놀랐어요.”

“어제저녁에 오셨다. 네 녀석은 자빠져 자고 있었지.”

“어디서 오셨어요?”

“저기 멀고 먼 동쪽에서 오셨다.”

“어디 갔다 오셨는데요?”

“네놈은 들어 본 적도 없는 먼 왕국에 다녀오셨지.”

“요정들이 사는 데서 오셨어요?”

“그럼. 제 아비를 양배추랑 커다란 솥에 푹 삶아서 잡아먹는 꼬마 요괴랑, 뱀과 쥐를 잡아먹는 늙은 마녀가 지랄이 나서 낮에는 호호, 하하 웃고 밤에는 낑낑 깽깽대고 울어대는 곳에서 오셨지.”

“아우 무서워라. 거긴 왜 가셨어요?”

“그놈들을 모조리 두들겨 패고 혀를 잡아 빼고 배때기를 찔러 죽이려고 갔다 오셨지.”

“와아, 창과 방패를 들고요?”

“그럼.”

“언제 거길 가셨어요? 난 몰랐는데.”

“네 녀석이 아직 싹수도 안 난 밭고랑 속의 양배추 씨앗일 때 가셨으니까 그렇지. 엇, 집 나온 돼지구나! 살이 통통하군.”

흑돼지가 발걸음이 무척 빠른 한스 부자의 곁에서 맹렬히 내달렸다.

늙은 한스는 군침을 삼키며 주위를 재빨리 둘러봤다. 뒤에서 돼지치기 소년이 막대기를 휘두르며 쫓아오고 있다.

“아버지?”

어린 한스는 마귀와 요정이 뒤범벅되어 날뛰는 머리를 갸우뚱대며 물었다.

“작은 나리님은 훌륭한 기사님이에요?”

“그럼!”

늙은 한스는 거들먹거렸다.

“너도 아까 작은 나리를 몰래 훔쳐봤것다?”

“봤죠. 하느님처럼 빛이 나던데요.”

“흥. 네놈이 하느님을 봤어?”

“암! 봤죠.”

어린 한스는 조그맣고 단단하게 생긴 얼굴을 쳐들고 으스댔다.

“날마다 뵌걸. 저길 봐요. 하느님이 계시잖아요.”

어린 한스는 손을 바짝 쳐들고 중천에 뜬 태양을 가리켰다. 그러다 엉터리 기도문을 중얼중얼 댔다.

늙은 한스는 경탄이 어린 눈초리로 제 아들의 조그만 낯바닥을 노려봤다. 저를 닮아서 영악한 아들놈이 여간 자랑스럽지 않다. 그래도 애새끼 버릇은 초장에 단단히 들여놔야 한다.

“저 불덩이는 네 말대로 하느님이시다. 그렇담 하느님께서는 저기서 뭘 하고 계실까.”

늙은 한스는 위협조로 말을 이었다.

“바로 네놈을 면밀히 감시하고 계시는 게다. 네 놈이 아비 몰래 빵과 고기를 훔쳐서 혼자만 처먹으면 시뻘건 불덩이가 대갈통에 떨어질 게다. 넌 그럼 아비한테 불효한 죄로 괴물이 배를 짝짝 갈라서 배때기 속에 부글부글 끓는 역청을 쏟아 부는 지옥에 가는 게야. 우리 작은 나리 같은 훌륭한 기사님만이 그런 무시무시한 괴물을 무찌르실 수가 있다. 얘, 너 그게 뭐냐?”

“뭐 말이에요?”

“네놈의 볼록한 배때기에 돌돌 감은 그거 말이다.”

“아무것도 아닌데요.”

“요 꼬마 악귀! 이리 내!”

늙은 한스는 아들의 윗옷 허리춤에 끝자락이 삐죽 나온 뭔가를 잡아채다 깜짝 놀랐다.

“헉. 요 녀석, 이걸 어디서 났어?”

“주웠어요.”

“네놈이 감히 이걸 어디서 주워?”

늙은 한스는 아들의 귀 한쪽을 바짝 비틀며 다그쳤다.

어린 한스는 낑낑대면서도 정말로 주웠다고 야무지게 항변했다.

주위를 휙휙 돌아본 늙은 한스는 아들의 뒷덜미를 움켜잡고 으슥한 골목으로 달려가 숨었다. 그러곤 움켜쥔 천 쪼가리를 코앞에 쳐들고서 빈틈없는 눈초리로 살폈다. 그 와중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아서 어린 한스도 덩달아 주변을 살폈다.

“흠. 이런 건 처음 보는군.”

늙은 한스는 감탄을 발하며 혼잣말을 중얼댔다.

“심상치 않아. 심상치 않아.”

“아버지, 왜 그래요? 그게 뭔데요?”

“이건 창에 다는 깃발이야.”

“어느 창에?”

“어디긴! 훌륭한 기사님들이 창에 다는 깃발이지.”

“와! 그럼 나도 막대기에 달아야겠다. 우악!”

어린 한스는 멱살이 옴팡지게 쥐여 잡혔다. 한스는 아들이 다시 가져가려던 깃발을 홱 낚아채고 어디서 훔쳤느냐고 고함쳤다. 절대 훔치지 않았다고 하자 철썩철썩! 싸대기를 맞은 어린 한스는 엉엉 울었다.

“정말 아니에요. 오늘 새벽에 우물에 물을 길러 갔다가 땅바닥에서 주웠어요!”

“요놈, 너 또 숲에 갔다 왔지?”

“아녜요! 아버지가 숲에는 괴물이랑 요괴가 득실댄다고 했잖아요. 죽은 자의 왕이랑 길 잃은 나그네를 잡아먹는 패거리가 우글우글하고요. 아휴, 무서워.”

“요놈! 거짓말하지 마!”

어린 한스는 싸대기 너덧 대를 더 얻어맞고도 훔쳤냐는 아비의 추궁을 완강히 부인했다. 조그만 대갈통에 주먹질이 쏟아져도 절대 훔치지 않았다고 버텼다.

한동안 깃발을 빈틈없이 살핀 늙은 한스는 그걸 품에 감췄다.

이 깃발은 틀림없이 기사의 창에 달릴 법한 값진 물건이다. 세모꼴인 붉은 깃발에는 하얀 담비 가죽으로 덧댄 이상한 문양이 달려 있다. 군데군데는 찢기고 검붉은 피로 얼룩져 있다.

한스는 골목에서 나와 푸줏간으로 가려고 서둘렀다.

“아버지, 내 깃발은 어쨌어요?”

“흥! 난 네놈을 잘 알아. 네놈은 저 시문 밖에 내걸린 늑대인간 '바르쿠스'(평화 상실자. 중세 독일의 마을이나 도시에서 중죄를 짓고 비무장 상태로 추방당하는 범죄자)의 신발을 벗겨서 팔아치워 아비 몰래 꿀 과자랑 바꿔 먹었지?”

“난 그런 적 없는데요?”

“떽! 쉿. 가자.”

늙은 한스는 좌우를 살피고 으슥한 골목에서 빠져나왔다.

어린 한스는 의기양양하게 조그만 두 팔을 휘두르며 아비 앞에서 행진했다. 거짓말이 들키지 않았고 아비가 그 깃발을 소중하게 품에 감춘 걸 보고서 저도 밥벌이를 톡톡히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솟앗다.

저 깃발은 어린 한스가 어제 강아지 깅코를 끌고 시문 밖에 있는 검은 숲에 갔다가 나무 아래서 파냈다.

시문 밖에 펼쳐진 검은 숲은 남북으로 나뉜 두 개의 울창한 숲 중에서 북쪽에 있는 숲이었다.

남쪽 숲은 영주의 사냥터로써 출입금지 구역이다. 북쪽의 검은 숲은 미지와 공포의 대상으로써 늘 안개와 어둠에 잠겨 있었다.

한스 부자는 시장 입구에 이르렀다.

광장 구석에는 가죽이 말라붙은 사내가 두 팔다리가 수레바퀴에 낀 채 죽어 있다.

어린 한스는 그 곁을 지나며 물었다.

“아버지, 저 사람도 벌을 받은 거예요?”

그렇다며 늙은 한스가 경멸에 차서 말했다.

“큰 죄를 지어서 바퀴형을 받고 말라 죽은 게야. 너도 아비 말을 안 들으면 저 꼴이 돼서 지옥에 끌려간다.”

“아버지, 그럼 늑대인간은 왜 죽은 거예요? 난 검은 숲에서 죽은 늑대인간을 봤는데요”

“요 녀석, 조금 전에는 숲에 나간 적이 없다며?”

“아욱! 아녜요. 난 꿈속에서 봤는데……. 그런데 그 늑대인간은 훌륭한 나리님이었다면서요?”

“암. 한때는 훌륭한 나리님이었지. 개새끼처럼 조롱을 당하고 잡혀 죽었다만.”

“왜 죽었는데요?”

“늑대 인간은 큰 죄를 짓고 검은 숲에 숨어 있다가 사람들에게 들켜서 죽은 게야. 주님이 큰 벌을 내리신 게지.”

“무슨 죄를 지었는데요?”

“남의 집에 불을 지르거나 강도질을 하거나, 아니면 저기를 봐라.”

늙은 한스는 중앙 광장의 거대한 교회를 가리켰다.

“저런 주님의 집을 털거나 시체를 약탈하면 그런 벌을 받는다. 큰 죄를 지으면 제아무리 훌륭한 나리님들도 늑대인간이 되어 시문 밖으로 추방당해. 심신의 평화를 잃고 평생 풀뿌리를 캐거나 벌레나 잡아먹으며 구덩이 같은 데 숨어 살아야 하지. 그러다 잡히면 그 자리에서 치욕스런 조롱을 받고 죽음을 당해. 네 녀석이 본 그 늑대인간도 농부 녀석들이 신이 나서 몽둥이로 때려죽였어.”

“아휴, 무서워라.”

어린 한스는 조그만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늙은 한스는 이때 퍼뜩 떠오른 어떤 기억에 몸서리를 치며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아버지, 그런데 저녁 종이 치면 왜 시문 밖에는 절대 나가면 안 돼요?”

“너 같은 놈은 나가기만 하면 홀딱 잡아먹히니까.”

“누가 날 잡아먹어요?”

“무시무시한 도적 기사들이지. 숲의 패거리 말이다. 시퍼런 칼을 휘둘러서 네놈 배때기를 푹 찔러 죽이고서 솥에 넣고 삶고는, 뼈를 오독오독 씹고 피를 쪽쪽 빨아 잡아먹지.”

“아휴, 무서워. 나 같으면 그 칼을 꼭 잡고 빼앗아서 아버지한테 갖다 줬을 텐데. 그럼 값이 좀 나가겠지요?”

“그럼!”

어린 한스는 앞장서서 씩씩하게 시장 골목으로 들어섰다.

늙은 한스는 단단한 조약돌만 한 아들의 야무진 뒤통수를 감탄에 차서 노려봤다.

‘저게 내 새끼다. 저 녀석은 앞으로 큰일을 해낼 거다. 두고 보라지.’

한스 부자는 광장을 지나서 시장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그들을 뒤쫓던 흑돼지는 시장 푸줏간의 식칼이 번쩍번쩍하자 뒤돌아서 다시 광장으로 뛰어들었다.

“엇!”

한 사내가 돌진해오는 흑돼지랑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돼지가 꽥! 비명을 지르자 돼지 꼬랑지를 잡으려고 냅다 팔을 뻗었다.

“흑돼지다! 잡아먹자.”

“야야, 돼지치기가 따라온다. 저기 좀 보렴.”

곁에 선 또 다른 사내가 시장 골목을 턱짓했다.

“저 봐라. 벨데케의 개새끼 두 마리가 가는구나.”

“흥. 우릴 보고 꽁지가 빠져라 내뺀 것 같은데.”

돼지를 잡으려던 사내가 한스 부자를 째려봤다.

“냄새 나는 개새끼가 시장엔 왜 가는 거지?”

“날마다 배를 곯고 있을 테니 개뼈다귀라도 구걸하러 가겠지.”

행색이 비슷한 두 사내는 시장 쪽을 노려보며 계속 속닥였다. 둘 다 한스 부자와 비슷한 차림새이나 체격이 튼튼하고 혈색이 더 좋았다.

두 사내는 이윽고 광장을 휘휘 둘러봤다. 마른 먼지가 날리는 광장은 차림새가 제각각인 행인으로 북적댔다. 그들의 발밑에서는 흑돼지뿐 아니라 거위, 오리 등 각종 가금류나 염소 따위가 우리에서 뛰쳐나와 바닥에 똥을 싸대며 광장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녔다.

“어쩔까?”

사내 중 한쪽이 물었다.

“여기서 저 개새끼들을 기다렸다가 귓방망이를 한 대 올려붙일까?”

“다른 골목으로 빠져나갈지도 몰라.”

다른 사내가 답했다.

“벌써 우리 냄새를 맡고 토꼈을지도 모르지.”

“제길. 몰래 한 방 먹여야겠는데.”

“먹이자고.”

“저 개새끼가 우리를 보고 유대 놈이나 마찬가지인 돼지 새끼라고 헐뜯고 다녔어.”

“저 꼬마 개새끼는 더욱 조심해야 해. 요전 날엔 악귀처럼 팔뚝을 깨물고 물고 늘어져 밤도둑을 잡았다더라.”

“쳇, 그놈들은 주인을 닮아서 다들 개새끼야. 앙상한 거죽만 남은 주제에 죽기 살기로 덤비니.”

“흠, 저 새끼들이 시장엔 왜 갈까?”

“푸줏간 골목으로 들어갔군.”

“어이, 미행해 보자.”

한쪽이 목소리를 죽여 속닥였다.

“벨데케 집안에 간밤에 뭔 일이라도 있었나 봐. 안 그럼 알거지들 주제에 시장에 나올 리가 없어.”

“주인 놈이 뒈지기라도 했나.”

“그런 횡재가 쉽게 생기겠나.”

“난 그땐 한달음에 노새를 훔쳐 타고 우리 주인 나리께 달려갈 거야. 어디 계신지만 안다면.”

“나도 마찬가지야. 난 잠도 안 자고 몇 날 며칠이고 나리를 찾아서 달려가 아뢸 거야. 우리 포겔바이데 가문의 원수 벨데케가 뒈졌다고 말이지.”

“그럼 우리 둘 다 톡톡히 포상을 받겠지?”

“그럼. 주인 나리께서는 한달음에 돌아와서 축제를 벌이실걸.”

포겔바이데 가문의 젊은 하인인 두 사내는 확실히 수상한 냄새가 난다며 짧은 망토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고 한스 부자를 좇아서 시장으로 접근했다.

도중에 그들의 발길에 차인 흑돼지가 광장으로 내빼며 힐끔 뒤를 돌아봤다. 약이 바짝 오른 어린 돼지치기가 막대기를 휘두르며 달려온다.

“서라! 돼지야!”

흑돼지는 기운차게 내달렸다. 마른 먼지가 질풍을 일으키며 내달리는 놈의 꼬리를 따라서 일었다. 녀석은 광장에서 시문으로 향하는 가로의 입구로 돌진했다.

마침 그쪽에서는 마을을 돌며 소금을 파는 행상인이 바싹 마른 노새에 짐을 싣고 광장으로 진입하던 차였다. 곁에서는 머리를 바짝 깎고 지저분한 수염이 얼굴을 뒤덮은 농부들이 저마다 한 짐씩 어깨에 지고 따라왔다.

“곡예단 구경은 꿈도 꾸지들 마쇼.”

방랑 행상인이 농부들에게 말했다.

“곰 놀이도 당분간은 구경 못 할 테니.”

“뭐? 쳇, 여긴 왜 안 오는 건데?”

농부 한 명이 화가 나서 말했다.

“딴 마을로 갔나? 작년에 우리가 난쟁이 녀석 수염을 좀 잡아 뽑았다고 심통이 나서 안 온다 이거지? 쳇!”

“못 오는 거요.”

방랑 행상인이 말했다.

“왜?”

농부들이 다투어 물었다.

“곡예단에 초상이 났수다.”

“엉? 어쩐 일로?”

“뚱보가 죽었소.”

“헉. 불 뿜는 뚱보가 죽었다고?”

행상인은 고개를 까딱했다. 그의 가느다란 버드나무 채찍은 노새의 궁둥이에 붙은 쇠파리를 순식간에 때려잡았다.

농부들은 서로 술렁이다가 물었다.

“이상하네. 언제 죽었수?”

“한 2, 3주 됐소. 내가 옆 마을에서 보리 파종이 끝나 떠나는 길에 봤소.”

“어쩌다 뒈졌대? 황야에서 날벼락을 맞았나?”

“배때기가 창에 찔려서 뒈졌다오.”

행상인은 채찍 손잡이로 허공을 푹, 찔렀다.

“이렇게 푸욱, 꿰뚫렸소.”

“우라질. 우리 집 여편네랑 애새끼들이 또 지랄 나겠구나. 작년에도 앓느라 못 봐서 내내 울었는데.”

농부들은 곡예단 구경을 망친 죽은 뚱보를 나무라고 헐뜯었다.

노새 목에 달린 방울이 짤랑짤랑 울렸다.

시장 골목으로 노새를 몰던 행상인은 광장 주변을 경계하며 문득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 그 뚱보는 살해당했소.”

“뭐? 누가 죽였는데?”

“그자가 죽였다오.”

행상인은 숨을 잔뜩 죽였다.

“시뻘건 갑옷을 입고서 장창을 들고 다니는 그 작자 소문을 당신들도 들었겠지? 시뻘건 불덩이가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새벽녘에만 동쪽에서 나타난다는 그자 말이오.”

“적, 적기사!”

쉿! 하며 행상인은 주변을 두루 살폈다.

농부들은 자기들이 내지른 소리에 지레 놀라서 숨을 죽였다.

그중에서 한 농부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 붉은 깃발을 창에 매달고 다닌다는 기사 말이오?”

“그렇소. 도적 기사지.”

행상인은 거의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속닥댔다.

“내가 들은 것만도 이번이 너덧 번째요. 적기사로 불리는 그 도적 기사가 작년부터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재물을 약탈하고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였잖소. 여기서 아주 먼 도시에서도 출몰했다오. 그러고는 한동안 종적을 싹 감췄다가 다시 나타난 거요. 뚱보를 살해한 직후에도 종적을 싹 감췄소.”

“젠장. 어디로 숨었을까.”

“아무도 모르지.”

“내가 듣기로는 며칠 전에 그 적기사를 본 놈이 있다던데요.”

잠자코 있던 어느 젊은 농부가 말했다.

“어디서 말야?”

농부들이 물었다.

“남쪽에서요. 그 마을 숲에서 적기사를 본 놈이 있다던데요.”

“쳇, 그럼 그놈이 거기 숨었군.”

“근데 한 놈이 아니라던데요. 그 마을 숲에서 한밤중에 길을 잃었는데 캄캄하고 혼이 빠지게 겁이 나서 제대로 못 봤다지만, 모닥불 둘레에 시커먼 그림자 수백 개가 어른댔대요. 말들은 울부짖고 고약한 연기가 자욱하고요.”

“흥. 유령 기사단을 봤구먼. 숲의 패거리이지.”

대담한 농부 하나가 말을 받았다.

“게다가 그런 도적 기사가 어디 한둘인가. 이 도시나 우리 마을에도 득실득실 댄다고. 난 요전 날에 어떤 기사 놈한테 내 거위 한 마리를 빼앗겼어. 그놈이 우리 집에 들어와서 영주님이 보냈다면서 냉큼 채가지 뭐야. 난 그놈이 마른 덤불을 긁어다가 몰래 구워 처먹는 걸 봤다고. 제기랄. 갑옷에 창과 방패만 들었지, 놈들도 실은 도적 떼나 다름없어.”

“쉿! 이 친구가 간댕이는 붓고 눈깔은 삐었나.”

소심한 농부 하나가 까무러치게 놀라서 그를 나무랐다.

“나리님들이 들으면 어쩔라고 그래? 저기 말라 죽은 시체 안 보여? 자네도 혀가 잘리고 저 꼴이 나기 전에 닥치라고.”

이때 그들의 발 언저리에서 흑돼지가 후다닥, 스치고 지나갔다.

회초리로 등을 맞은 돼지는 꽥! 소리 지르며 광장 중앙으로 내뺐다.

돼지치기 소년은 이때다 싶어서 자세를 잡았다. 경황이 없는 흑돼지는 두 다리를 딱 버티고 선 채 막대기를 높이 쳐들고 일격을 노리는 돼지치기 쪽으로 정면 돌격했다. 소년은 돼지가 두두두두 돌진해오자, 무지막지하게 막대기를 내리치며 고함쳤다.

“잡았다! 에잇! 우악!”

돼지는 소년의 두 다리 사이로 쑥 빠져나갔다. 소년은 다리를 치켜들고 벌렁 나동그라졌다.

콧구멍으로 훅훅 숨을 내뿜으며 흑돼지는 전방에서 옥신각신하는 사내들 쪽으로 돌진했다.

“뭐가 어쩌고저째?”

말싸움 중이던 한 사내가 핏대를 세웠다.

“이 절름발이 개새끼가 우리한테 유대 놈이라고 했겠다?”

“유대 놈이지! 네 놈들 기름진 상판이 딱 유대 놈을 닮았잖아.”

싸움꾼들은 차림새가 비슷한 세 사내였다. 두 사내는 조금 전에 한스 부자를 미행하던 포겔바이데 가문의 젊은 하인이었다. 나머지 한 명은 두 사내를 유대 놈이라고 부른 벨데케 가문의 하인이었다.

“너흰 무슨 꿍꿍이로 한스를 미행하는 거냐? 우리 주인 나리께 이른다!”

“우리가 미쳤냐? 냄새 나는 비렁뱅이를 쫓아다니게? 내버려둬도 니들은 곧 쫄딱 망한 집구석에서 다 굶어 뒈질 텐데.”

“흥! 그런 니들 상판은 탐욕스런 구두쇠 주인을 닮아서 유대 놈처럼 피둥피둥 살이 쪘구나.”

“죽인다, 벨데케의 냄새 나는 개새끼야! 네 녀석 간을 파내 주인 나리께 바치면 큰 상을 내려주실 게다.”

“우악! 사람 살려! 이 짐승만도 못한 종놈들이 사람 잡네!”

포겔바이데 가의 두 하인은 벨데케 가의 하인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금세 몰려든 구경꾼은 싸움꾼들 얼굴을 알아보고 저 두 집안은 주인이건 하인이건 만나기만 하면 싸움질이라며 혀를 찼다.

이때 구경꾼 하나가 광장에 마악 들어서는 젊은 귀공자 무리를 알아보고 “이크! 말썽꾼들이다!”하고 소리쳤다. 서로 멱살을 잡고 흔들던 양쪽 하인들도 그들을 돌아보더니 서로에게 침을 뱉고서 부리나케 도망쳤다.

한바탕 소란스럽던 중앙 광장이 금세 텅 비었다. 발걸음이 느린 아녀자만 허둥지둥 뒤늦게 뜀박질을 했다.

“엄마, 엄마?”

엄마 손에 끌려가던 어느 소녀가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왜 다들 도망치는 거예요?”

“주둥이 닥치고 얼른 따라와!”

소녀의 엄마가 허둥대며 소리쳤다.

“저기 남자들 보이지?”

“저기 오시는 귀공자 나리들 말예요?”

“그래! 잘 봐둬라. 저 사람들을 항상 조심해야 해. 한 명이라도 코빼기가 보이면 죽어라 달아나야 목숨을 건진단다. 꾸물대면 금세 곁에서 칼부림을 벌일 테니까!”

기겁한 소녀는 엄마 손을 잡고 광장 골목으로 황급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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