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이젠하르트의 귀향: 원수의 아들이 부활했다 (2/33)

2. 이젠하르트의 귀향: 원수의 아들이 부활했다

성백(성의 백작. 성이나 도시의 군사적 사령관. 통치, 재판권 소유) 오스터팅겐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부터 라인란트 지역에서 하사받은 봉토에 수년에 걸쳐 요새를 지었다.

내, 외막이 이중벽으로 지어진 요새 안에는 영주의 가족과 수행원, 기사수비대와 성직자가 거주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상인과 장인이 요새의 성벽 바깥쪽에 모여들었다. 교통의 요지인데다 근처에 요새화된 농촌 마을이 많아서 요새는 성곽을 확장하며 성채도시로 발전했다.

백작의 후손인 하인리히 폰 오스터팅겐이 이곳의 영주가 됐을 무렵, 도시는 번영을 거듭했다. 더불어 대부분 귀족 가문 출신인 부유한 상인도 도시의 자치권을 요구하며 부흥 일로에 섰다.

벨데케 가는 이곳 성채도시의 유서 깊은 기사 가문이었다.

이 가문의 영웅, '영예와 신의의 기사' 이젠하르트가 지난밤에 귀향했다.

가주 헤르만 폰 벨데케는 어느 새벽, 2층 가족실 여기저기에서 거닐며 심부름 보낸 하인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인이 돌아왔다.

벨데케가 물었다.

“그래, 어떻게 됐느냐. 이젠하르트는 이제 일어났느냐?”

“아닙니다, 나리. 아직 주무시고 계십니다.”

“우리 작은 비둘기 힐데가르트는?”

“아가씨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젯밤 늦게 침소에 드셨다 합니다.”

벨데케는 이후로 뒷짐을 지고 집안에서 초조히 거닐었다.

그동안 하인은 3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수차례 오르내렸다. 가주처럼 하인도 흥분한 기색이었다.

벨데케는 그들에게 호들갑 떨지 말라고 호통치면서 정작 본인이 빈번히 3층 계단을 확인했다.

날이 밝았다.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아침 종이 도시에 울려 퍼졌다. 신성의 울림처럼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거룩한 경외심을 일깨우는 종소리는 시의 벽을 넘어서 안개가 자욱한 숲까지 널리 울려 퍼졌다.

벨데케는 종소리가 그치자 하인을 다시 불렀다.

“너 다시 가서 이젠하르트가 언제쯤 일어날지 살피고 오렴.”

늙은 한스는 곧 가족실로 되돌아와서 알렸다.

“이제 일어나셨답니다. 시동이 말하길 종이 치고 종달새가 한 번 울자 눈을 번쩍 뜨시고는 새매처럼 침대에서 가뿐히 일어나셨답니다. 현재 머리를 빗고 의복을 차려입고 계십니다.”

“옳지. 잘 됐어. 흠, 마침 저기 트루농 부인이 오는군.”

가족실로 들어선 여자 가정교사는 가주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우리 작은 비둘기는 이제 일어났소?"

벨데케가 물었다.

“그애 기분은 어떻소?”

“아가씨께선 일어나시자마자 즐겁게 콧노래를 부르고 계십니다.”

가정교사가 물러갔다.

벨데케는 불로 지져 동그랗게 만 머리를 끄덕이며 흡족하게 중얼댔다.

“이제 좀 안심이군. 그 애 오라버니가 온 덕분이야.”

“아버님.”

뒤에서 들리는 산뜻하고 부드러운 음성에 벨데케는 놀라며 돌아섰다. 곧장 턱수염이 부르르 떨리고 눈에는 물기가 어렸다.

“용맹한 기사여!”

그는 뛰어가서 가족실에 들어선 아들을 얼싸안았다.

“자랑스러운 내 아들, 신의와 미덕의 기사 이젠하르트, 네가 일어났구나.”

“아버님, 밤사이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오냐. 이 아비는 양지 바른 처마 밑에서 낮잠을 즐기는 늙은 개처럼 실컷 잤다. 희망으로 부푼 가슴, 환희로 끓는 뜨거운 심장을 품고서 너와 같은 아들을 둔 덕에 사람들의 시샘 어린 비수에 찔려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푹 잤다.”

“아버님,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요.”

“아들아!”

벨데케는 아들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래, 피로는 좀 씻겼느냐?”

“네, 아버님.”

“단꿈도 꾸고 푹 잤겠지?”

“네. 덕분에.”

“자, 그럼 나를 따라오려무나.”

벨데케는 아들의 손을 잡아당겨 가족실 밖으로 나갔다.

“네 어미가 꼭두새벽부터 너를 기다리고 있다. 이젠하르트, 내 아들아. 이 아비를 한 번만 더 힘차게 안아다오.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마저 시샘할 만큼 용맹한 너의 얼굴은 태양처럼 찬란하고, 젊은 가슴은 당긴 활시위처럼 팽팽하며 늠름하구나. 아, 우리 가문의 영예, 지상의 영웅이 돌아왔도다!”

두 부자는 가족실에서 나와 2층의 어느 문 앞에 섰다.

때마침 문이 열리며 벨데케 부인이 나타났다. 늘씬한 큰 키에 윤곽이 또렷또렷한 작은 얼굴, 금발에 잿빛 눈, 뾰족한 턱을 지닌 그녀는 머리와 턱을 감싸는 베일을 쓰고 화려하게 염색한 천에 자수로 무늬를 짠, 바닥에 끌리는 긴 치마를 입고 있다.

“여보, 귀부인, 누가 왔는지 좀 보시오.”

벨데케가 아내에게 소리쳤다.

“누군지 알아보겠소?”

벨데케 부인은 빳빳이 쳐든 고개를 그대로 두고 아들에게 시선만 돌렸다. 마치 석상의 얼굴에서 눈동자만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회반죽을 바른듯 두껍게 화장한 얼굴은 돌처럼 딱딱했다.

“어머님, 아침 문안 인사 드립니다.”

이젠하르트는 공손히 다가가서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모친의 손을 잡았다.

“나의 기사여.”

벨데케 부인이 입을 열었다.

“나는 오랜 세월 오늘을 고대해왔단다. 드디어 네가 돌아왔구나.”

고개를 도도히 쳐든 부인은 발아래 무릎 꿇은 아들을 내려다봤다. 아들이 빼어 박은 그녀의 냉랭한 잿빛 눈동자는 어느 용맹한 왕의 어깨에 올라탄 새매의 그것처럼 아들의 외양을 날카롭게 훑었다. 기품이 흘러넘치는 아들의 고귀한 자태, 늠름한 가슴과 우아한 몸가짐, 젊고 싱싱한 얼굴과 대리석 같은 이마, 호수처럼 깊은 눈매와 날카로운 잿빛 눈동자 그리고 허리까지 흘러내린 황금빛 머리칼을 샅샅이 훑었다.

이젠하르트는 모친의 손에 키스했다.

“아, 나의 영웅, 나의 기사! 내 아들, 이젠하르트! 미모와 지혜는 제 어미를 빼닮고 사자와 같은 용맹도 나를 꼭 빼닮은 내 아들, 우리 가문의 영예로운 깃발인 네가 돌아왔다니 이 어미는 기쁨에 눈이 멀 것만 같구나.”

벨데케 부인은 그러고서 몸을 홱 돌려 치마를 길게 끌고 가족실로 향했다.

벨데케는 손가락을 꼽아보다 물었다.

“아들아, 네가 고향에 돌아온 게 얼마 만이냐.”

“십여 년쯤 됐습니다.”

“네 외숙부가 전사하기 전에 같이 왔었지?”

“그렇습니다.”

“그럼, 넌 이제 몇 살이지?”

“저는 지난달 초에 스물둘이 됐습니다, 아버님.”

이젠하르트가 정중히 답했다.

“스물둘!”

벨데케는 몹시 감격하여 소리쳤다.

“자랑스럽다, 내 아들! 지상의 온갖 승리와 영예를 독차지하고 아비 품에 돌아온 최고의 기사가 이제 겨우 스물둘이라니.”

“정말 굉장한 업적이에요.”

벨데케 부인이 가족실에서 다시 소리쳤다.

“그 나이 때 당신은 양을 치고 있었지요.”

벨데케는 아들을 데리고 가족실로 들어갔다.

벨데케 부인은 가족실 한복판에 버티고 앉아있다.

“여보, 귀부인.”

하녀가 내올 아침 식사를 기다리는 아내에게 벨데케가 말했다.

“여기 내 배를 좀 보시오. 오늘 아침에 난 벌써 백조 구이 두 마리랑 사슴 고기 파이를 대여섯 개는 먹은 듯이 배가 부르다오. 부인도 그렇지 않소?”

“아뇨. 난 먹어야겠어요.”

벨데케 부인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아무리 우리 집 살림이 궁핍하고 지난해는 수확도 망해서 창고의 쥐가 굶어 죽을 판이지만 설마 당신은 아내와 아들마저 굶겨 죽일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귀부인, 설마 그럴 리가 있겠소.”

헛웃음을 터트리며 벨데케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아내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노려봤다.

“이런, 꾸물대다 해가 중천에 뜨겠군. 한스, 투르농 부인은 또 어디로 갔느냐?”

“염소젖에 벌꿀을 타서 아가씨 침소로 올려보내라고 하녀에게 이르고 규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럼 얼른 가서 우리 작은 비둘기에게 얼른 내려오란다고 전해라. 오라버니가 기다리고 있다고.”

늙은 한스는 3층으로 달려갔다.

그동안 벨데케 부부는 멀찌감치 떨어져 앉았다.

이젠하르트는 남의 집에 온 손님처럼 이리저리 거닐며 가족실을 둘러봤다.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가 눈에 띄었다. 어린 시절을 함께한 태피스트리는 이제 해묵고 빛이 바랬다.

벨데케 부인은 딱딱한 의자 등받이보다 더 꼿꼿하게 목을 쳐들고서 아들을 지켜봤다. 문득 그녀의 미간이 쐐기풀에 쏘인 듯이 꿈틀거렸다.

“이젠하르트.”

“네, 어머님.”

“네게 한 가지 질문이 있구나.”

“네, 말씀하세요.”

남편이 고개를 갸웃대는 곁에서 부인은 엄숙히 물었다.

“너는 어제 저녁 종이 울리고 제2종이 칠 무렵 시문 밖에 도착했다지.”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시문이 닫히기 직전에 통과해서 집으로 돌아왔고. 내 말이 맞느냐?”

“네, 그렇습니다.”

“바로 그 점이다.”

벨데케 부인은 정색했다.

“어째서 넌 해 질 무렵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시문을 통과했니? 왜 시종을 먼저 집으로 보내지 않았지?”

“옳지. 나도 그 얘기를 하려던 참이었다.”

벨데케가 끼어들었다.

“아들아, 네가 우리에게 너의 도착을 미리 알려줬다면 어제처럼 우리가 잠자리에서 허겁지겁 너를 맞이하진 않았을 게다. 영주님께서도 대대적인 환영 행사를 베푸셨을 텐데.”

“환영 행사뿐이겠습니까.”

벨데케 부인이 말을 받았다.

“영주님께선 시문 밖으로 직접 말을 몰아서 저 애를 맞이하셨을 겁니다. 사제랑 기사들, 값진 보석을 주렁주렁 매단 귀부인들도 줄줄이 데리고 말이지요.”

“영주님의 따님도 데리고 말이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일주일 내내 환영 파티를 열어주셨을 거예요.”

“풍각쟁이를 불러다 술잔치도 벌이고. 허허.”

“아들아!”

벨데케 부인이 다시 소리쳤다.

“너는 마땅히 융숭한 대접을 받았어야 했다. 탐욕스러운 유대인과 천박한 상인이 기세 등등하게 날뛰고, 음탕한 패거리가 나대는 이 타락한 도시에, 고귀한 혈통을 지닌 신의와 미덕의 기사라고는 오직 너뿐이다. 수많은 제후의 방패와 창을 조각내고, 그보다 더 사납고 용맹한 왕들을 저 푸르른 벌판에 무수히 낙마시킨 주님의 성스러운 전사, 고귀한 귀부인들에게 사랑과 봉사의 맹세를 바치며 이 지상의 모든 숲을 통째로 벌목해 창을 만들어 버린 숲의 파괴자! 그 창으로는 천하의 왕들을 굴복시켜 패자의 맹세를 받아냈으면서도 어미의 손에는 산들바람처럼 입을 맞추는 상냥한 기사는 바로 너뿐이다! 너는 따라서 만인의 존경과 환호 속에서 우리 가문의 깃발을 휘날리며 개선장군처럼 귀향했어야 했어.”

“경애하는 아버님, 어머님.”

이젠하르트는 모친이 말을 맺자 그 앞에 고개를 숙였다.

“두 분을 실망하게 해드렸으니 면목이 없습니다. 저는 아버님의 병환 소식을 듣고 너무도 두렵고 슬픈 마음에 서둘러 오느라 두 분의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제발 너그러운 마음으로 저를 용서하시고 예전처럼 사랑해주세요.”

“아들아!”

벨데케가 감격하며 소리쳤다.

“우리는 너를 책망하는 게 아니다. 너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나는 하루라도 빨리 너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이 도시에 들렀던 모든 편력 기사(모험과 일거리를 찾아서 떠돌아다니는 기사)에게 너를 만나면 속히 집으로 돌아와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었으니까.”

“네, 아버님, 그 전언을 듣자마자 저는 쉬지 않고 말을 달려 집에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버님께서 쾌차하심을 확인했으니 다시 길을 떠나야겠습니다.”

“또 모험을 떠나겠다고?”

“네, 아버님.”

“언제 말이냐?”

“두 분이 허락하시는 대로 곧.”

“오오…….”

“하지만 머지않아 가문을 위해 더 큰 영광과 명예를 안고 당당히 돌아와서 그때는 두 분께 더욱 사랑받는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겠습니다.”

“가혹하신 주님!”

벨데케는 비애에 차서 부르짖었다.

“차라리 저를 벌하소서! 아들아, 너는 상냥하고 아름다운 입술로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는구나. 만나자마자 생이별이라니!”

“어리석은 당나귀 울음소리!”

“……!”

느닷없는 호통에 벨데케는 입을 닥치고 뒤를 돌아봤다.

벨데케 부인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당신은 누가 누구랑 생이별을 한다는 겁니까. 이젠하르트, 내 아들아.”

어리둥절한 남편에게 혀를 차댄 부인은 아들을 불렀다.

“너는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스스로 판단하거라.”

“네, 어머님.”

“나는 이 자리에서 먼저 네게 한 가지를 명하겠다.”

“어머님, 무엇이든 저는 어머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너는 이제부터 내 허락이 없는 한 절대로 이 집을 떠날 수 없다. 왜냐하면 네 어미는 이제 곧 불행한 과부가 될 테니까.”

“귀부인, 그건 또 무슨 해괴한 말씀이시오. 도대체 누가 당신을 과부로 만든다는 거요?”

“누구냐구요?”

부인은 쇠파리를 후려치는 노새의 꼬리처럼 쏘아붙였다.

“그걸 지금 제게 묻다니 당신의 양심은 비겁자의 가슴에 두른 철갑보다 더 두껍게 녹이 슬었나 보군요. 나를 비참한 과부로 만들 사람은 내 지아비인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은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싱그러운 젊음과 눈부신 미모, 막대한 재산과 명성마저도 모두 빼앗기고 농부보다 더 비참하게 고생한 나를 이 지옥 같은 궁핍과 굴욕 속에 홀로 내던져둘 속셈이시지요. 나 몰래 챙겨둔 재물을 몽땅 싸들고 내일이라도 야음을 틈타 산골 깊숙한 수도원으로 달아날 작정이셨어요. 내 말이 틀렸나요? 거기서 아내를 속이고 부당하게 축적한 금은보화로 혼자서만 주님의 구원을 사들일 속셈이 아니었던가요?”

“부, 부인!”

벨데케는 창백해진 낯으로 아내에게 손을 내밀었다.

“세상에 그런 누명이 어디 있소? 억울하오. 설마 우리 명망 높고 유서 깊은 벨데케 가문의 가주인 내가 사랑하는 아내를 내버리고 도망쳐서 혼자서만 주님의 구원을 바라겠소?”

“아, 물론 그렇진 않으시겠지요.”

“그렇소!”

벨데케는 가슴을 탕, 쳤다.

“나는 결단코 단 한 번도 그런 비겁한 생각을 한 적이-…….”

“물론 그렇겠죠. 나뿐만 아니라 어린 딸년까지도 내버리고 갈 생각이셨으니까.”

“……!”

“의지할 데 없는 불행한 처자를 비참한 가난과 무서운 굴욕 속에 내던지고 말입니다. 베르나르 신부는 어느 수도원을 추천해주던가요? 물론 그 수도원의 한 발짝 옆에는 돈 많은 귀부인 출신인 수녀원장이 천상에서 얻을 구원을 운운하며 설립한, 아리따운 처녀랑 젊은 귀부인이 수녀의 탈을 쓰고 매춘부처럼 드글드글하는 수녀원이 있겠지요.”

“귀부인, 그런 신성모독의 발언을 하다니요.”

“이젠하르트, 아들아, 이제 똑똑히 알게 되었느냐.”

벨데케 부인은 남편의 푸르죽죽한 안색은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자, 저길 보렴. 네 아비의 저 푸른 낯바닥이랑 벌벌 떠는 입술을. 네 아비는 이제 저렇게 비겁자가 되고 말라빠진 노새처럼 노쇠했단다. 밤이 되면 날이 새도록 기침만 해대는 통에 별거한 지가 오래란다. 그게 꾀병이 아니라면 말이다.”

“쿨, 쿨럭! 부인, 말씀이 심하오.”

“하지만 내 지아비라는 자의 저런 가증스런 비겁보다 더 통탄할 죄가 있어. 그게 뭐냐고? 네 아비는 한때 부유하고 명망 높았던 기사 가문의 가주로서 졌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저버렸다는 거다. 이제는 기사로서의 명예욕과 투지마저도 깨끗이 망각해버리고 가련한 뒷방 노인네가 됐단다. 노쇠한 육신의 질병이 아니라 비겁과 나약함, 제 안위만을 구하는 영혼의 나병이 네 아비를 정복한 게다.”

“보시오, 귀부인!”

벨데케는 가까스로 아내의 말을 끊고 껴들어 소리쳤다.

“당신의 주장에 나는 이의를 제기하겠소. 어째서 그런 억울한 누명을 씌우시오? 나는 내 뼈가 바스라 지도록 이 집안에 헌신해왔소. 농사철이 되면 들에도 나가서-…….”

“그렇다면 당신이 젊은 시절엔 어떠했지요?”

부인은 격렬히 성호를 긋고 말을 이었다.

“하느님, 불쌍한 저이를 부디 굽어 살펴주소서. 네 아비가 아직 젊었던 시절에도 마찬가지였어. 네 아비는 여름철 수확이 끝나 농한기에 접어드는 늦가을에도 집안에 틀어박혀 닭이니 거위 알 따위만 일일이 셌단다. 그러곤 영주님의 명으로 전투에는 울며 겨자 먹기로 참여하는 시늉만 했을 뿐, 그 흔한 마상 창 시합에도 번번이 불참하여 동료 기사에게서 온갖 멸시와 비웃음을 사셨단다.”

“큼.”

“아들아, 그러니 네가 이제 판단해보렴. 그게 대대로 명성이 드높았던 기사 가문의 후손으로서, 네 아비가 혼신을 다 바쳐 마땅히 이루었어야 할 업적일까?”

“큼. 크흠!”

“아니면 창과 방패를 제 손으로 꺾고 만인의 지탄을 받아 마땅한 비겁과 불명예일까. 나는 한때는 네 아비의 머리채를 잡아채서 당나귀 엉덩이를 걷어차듯 마상 창 시합에 쫓아 내보낸 적도 있지만, 네 아비는 결국 저토록 타락했어. 골방에서 포도주나 홀짝이며 수도원으로 달아날 궁리를 하면서. 이러한 죄악과 비극을, 이젠하르트, 나의 용맹하고 고귀한 아들아, 너는 감히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니?”

“어머님,”

“아무 말도 말아라.”

벨데케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들아, 나는 그래서 네게 명하노라. 네 아비는 수도원으로 달아나도록 내버려두자. 하지만 나는 이미 이 가문에 헌신하여 모든 재물과 정기를 빨리고 이제는 의지할 데 없이 늙고 비참한 신세, 나도 앞으로는 너를 내 곁에 두고, 부모로서 너의 공경과 봉사를 받고 싶구나. 그건 마땅한 나의 권리다.”

벨데케는 아내가 말을 마치자 천장을 쳐다봤다.

“여보, 귀부인.”

이윽고 낯 껍질을 벗길 듯이 따가운 아내의 시선에 그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내 생각이 짧았소. 생각해보니 부인께선 그런 오해를 할 수도 있었을 거요.”

그는 아들에게 달려가서 손을 덥석 잡았다.

“아들아, 네 어미의 불평을 이해해다오. 네 어미는 많은 고생을 했다.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나 고생이라곤 일절 모르고 살았는데, 이 집안에 시집와 딱히 하는 일 없이 허송세월만 했으니 얼마나 권태롭고 힘들었겠니. 하지만 내가 수도원으로 달아난다는 주장은 결단코 사실이 아니란다. 어쨌거나 너는 이 늙은 부모를 두고 다시 떠나지는 않겠지?”

“아버님, 저는-…….”

“고맙다! 아들아!”

벨데케는 아들의 뺨에 열렬히 입 맞췄다.

“네가 힘든 결정을 내렸구나. 이 늙은 부모의 곁을 다시는 떠나지 않겠다니!”

벨데케 부인은 남편은 아랑곳없이 아들만 뚫어지게 주시했다.

이젠하르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님, 어머님, 송구하지만 저는-…….”

“아니, 왜 아직도 소식이 없어?”

벨데케는 아들 손을 뿌리치고 문가로 달려가 소리쳤다.

“한스! 이 녀석이 어딜 갔어? 우리 작은 비둘기는 도대체 코빼기도 안 보이네. 제 오라버니가 왔는데도 뭘 꾸물대는 거야? 얘야. 이리 와 보렴. 우리 작은 비둘기는 내려온다더냐?”

“아가씨께선 아직 규방에 계십니다.”

벨데케가 불러세운 하녀가 답했다.

“아직도? 왜? 옷 투정이라도 하더냐?”

“아닙니다.”

하녀는 머뭇대다 답했다.

“아가씨께선 지금……. 울고 계십니다.”

“뭐? 또!”

“네, 아가씨의 비단 쿠션이 벌써 눈물에 흥건히 젖었습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루비가 박힌 빗으로 탐스러운 머리채를 빗으며 즐겁게 치장하시더니, 저희한테 빗을 내던지고 갑자기 침대에 쓰러져 울고 계십니다.”

“어허, 이를 어쩌나. 또 변덕이군. 변덕이야.”

벨데케는 의자에 주저앉으며 탄식했다.

얇은 입술에 묘한 경련을 일으킨 벨데케 부인은 아들을 불렀다.

“이젠하르트.”

“네, 어머님.”

“나는 아직 네 답변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네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부담을 덜어주려면 내가 신속히 우리 가문의 수치 덩어리를 해치워야겠구나.”

벨데케 부인은 무슨 말이냐는 남편의 말은 들은 체도 않고 하녀를 불러들였다.

“너는 당장 3층으로 올라가서 힐데가르트한테 짐을 싸놓고 대기하라고 일러라. 그 애는 오늘 안에 수녀원에 가든지 숯 검댕을 뒤집어쓴 이 집안의 천덕꾸러기 부엌데기가 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거야.”

“여보, 귀부인. 또 왜 그러시오?”

벨데케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내의 손을 다급히 잡았다.

“진정하시오. 아무리 그 애가 철부지라지만 부엌데기를 시킨다면 너무 가혹하지 않소.”

“가혹할 수도 있겠지요.”

벨데케 부인은 손을 내치며 고함쳤다.

“하지만 그것도 당신이 자처한 불행입니다. 지금 그 애는 즐겁게 몸단장을 하고 있다가 또 갑자기 발광이 나서 미친 계집처럼 울고 있다지요. 그게 누구 업적인가요? 당신입니다! 당신께서 날마다 그 계집애 역성을 들어 그 꼴을 만드셨지 뭡니까. 못난 철부지의 변덕은 가시나무 회초리로 모질게 다스렸어야 했는데, 날마다 꿀 과자에 가짜 보석 따위로 구슬리기만 했으니, 제 주제를 잊고 저 모양으로 앙탈을 부리는 겁니다. 그러니 모질게 벌을 주고 수녀원으로 보냅시다. 아니면 부엌데기가 되는 수밖에! 아시겠지요? 헤르만 폰 벨데케, 당신께 가주로서 마지막 기회를 드리겠으니 빨리 결정하세요.”

벨데케는 아내의 손을 다시 꼭 잡았다.

“당신은 내가 그 애 역성만 들어 버릇을 망쳐놨다고 하는데 억울하오. 나도 나름대로는 최근에 그 애에게 모질게 훈계를 해왔소.”

“뭐라고 훈계하셨나요?”

“날마다 그 애한테 이렇게 말했다오. 얘, 귀엽고 아름다운 내 외동 딸, 힐데가르트야, 우리네 얼굴에는 두 개의 눈물주머니가 있단다. 하지만 둘 다 슬픔이 아니라, 환희의 눈물주머니야. 그러니 너는 제 아무리 변덕이 나도 비탄의 눈물은 거두고 즐거운 마음으로 부모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렇게 날마다 입이 부르트도록 꾸짖고 우리 어린 비둘기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사정없이 매질까지 했었소.”

“어린 비둘기!”

벨데케 부인은 얇은 입술을 비틀었다.

“나는 지금 그년 나이 때 큰 애를 낳고 셋을 더 낳았어요. 모조리 죽어버렸지만요. 흥, 배은망덕한 년! 제 오라버니를 다 제치고 살아난 천하의 불효녀가 어미 속을 썩이는구나. 가라는 시집은 안 가고 철딱서니 없이! 케르베로스(지하 세계의 문지기, 머리 셋 달린 개)는 어디 있다더냐! 사악한 놈들을 지옥으로 잡아가지 않고. 천하에 저주받을 놈들! 내게서 피눈물을 뽑아내는 너희도 대대손손 너희 무덤에 고혈을 쏟아낼 거다!”

느닷없이 저주를 퍼부은 벨데케 부인은 의자 팔걸이에 축 늘어졌다. 몸종이 달려와서 부채질을 해대고 코끝에 향유를 뿌려댔다.

벨데케는 멀찌감치 떨어져 한숨을 푹푹 내쉬며 천장을 바라봤다.

“아버님.”

잠시 아들을 잊고 있던 벨데케는 놀라서 뒤로 돌아섰다.

이젠하르트는 부모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경애하는 아버님, 어머님. 두 분께선 왜 그렇게 깊은 한숨을 쉬고 계십니까. 누가 감히 어머님의 아름다운 두 눈에서 저렇게나 쓰라린 눈물을 짜내고 있습니까. 부디 말씀해주십시오.”

“아들아, 아직은 묻지 말아다오.”

벨데케가 비애에 차서 대답했다.

“너는 오랜 세월, 모험과 영광을 찾아 험난한 가시밭길을 개척하다가 어제저녁에야 내 품에 돌아왔다. 그런 네게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짐을 지울 수는 없어.”

“아버님.”

위압적인 음성에 벨데케는 몸이 굳었다.

이젠하르트는 일어나서 벨데케를 똑바로 눈에 담았다.

“저는 기사입니다. 저를 욕되게 하지 않으시려면 속히 말씀해주십시오.”

“아들아…….”

“어떤 자들입니까. 누가 감히 두 분과 우리 가문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까. 당장 그 원수를 고발해주십시오. 그러면 제 창으로, 저 동쪽에서 수많은 왕의 창과 방패를 박살 낸 제 창으로 놈들을 즉시 단죄하겠습니다.”

투지가 불타는 그의 잿빛 눈이 무섭게 번쩍였다. 상냥했던 음성에서는 이제 살얼음이 풀풀 날렸다. 손에는 창이 들리고 머리에는 벌써 투구가 씌워진 듯했다.

벨데케는 이때 굳은 낯으로 홀린 듯이 아들을 바라봤다. 기묘한 위화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벨데케 부인도 야릇한 표정을 짓고서 아들을 주시했다.

이젠하르트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다그쳐 물었다.

“아버님, 도대체 누굽니까? 두 분과 힐데가르트를 울리는 놈들이.”

“포겔바이데!”

벨데케가 고함쳤다.

“포겔바이데, 저주 받을 원수 놈! 그놈이다. 그놈의 불한당 아들 녀석이 우리 가문을 모욕하고 교활하게 희롱하고 있다.”

“바로 그 녀석이야!”

벨데케 부인도 이어서 소리쳤다.

“천하의 음탕한 녀석! 제 아비를 꼭 닮아서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음란 마귀, 포겔바이데!”

벨데케 내외는 앞다투어 적을 고발했다. 온갖 저주와 욕설이 동시다발로 쏟아졌다.

이젠하르트는 한마디도 놓치지 않을 듯이 경청했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듯했다.

“아버님, 어머님.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두 분께선 포겔바이데가 원수라고 하셨지요?”

“그렇단다.”

“그들이 혹시 제가 아는 그 포겔바이데가 맞습니까?”

“맞다! 그놈들이야.”

벨데케가 연이어 대답했다.

“아들아, 너도 기억하고 있겠지? 우리 가문 대대손손의 원수이자 간사한 여우, 하르트만 폰 데어 포겔바이데를.”

“네, 물론 기억합니다. 제가 어찌 그 원수를 잊겠습니까?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드는군요. 아버님께서는 그 집안의 ‘불한당 아들’이라고 하셨는데 도대체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외동아들 놈 말이다.”

“제가 알기로 놈은 어려서 병으로 죽었습니다만. 천벌을 받아 죽었지요.”

“그래! 이 도시민들 모두가 그놈이 제 명대로 못 산다고 장담했었지.”

“그럼 그 포겔바이데 집안이 새로 양아들을 들였습니까?”

“천만에! 망자가 부활했어! 무덤을 뚫고 살아났다!”

벨데케는 그러고서 아들의 앞에 우뚝 섰다. 그의 가슴은 흥분으로 부풀어 오르고 수염은 철사처럼 뻣뻣해졌다.

“이젠하르트, 내 아들아, 들어보렴. 네가 외숙부의 시동으로서 견습기사가 되어 고향을 떠났을 때만 해도 그 집안은 보잘것없는 선대의 부와 명성마저 모조리 탕진하고 쫄딱 망할 운명이었다. 가솔마저 깡그리 굶어 죽을 판이었지. 저주받은 그 집안을 주님이 징벌하신 게야. 그때만 해도 어린 그놈은 죽은 목숨이었어. 송장 치울 날이 머지않았지. 그런데 망자가 무덤을 뚫고 부활했어. 어느 봄날에 광장으로 나갔더니 죽을 줄만 알았던 망자가 벌건 태양 아래서 두 팔을 휘젓고 척척 돌아다니고 있었다!”

벨데케는 그 흉내를 내느라 두 팔을 휘저으며 가족실을 척척 가로질렀다.

이젠하르트는 침묵했다. 의도한 침묵이 아니라 말문이 막힌 상태였다.

“내가 환청을 들었나.”

그는 혼잣말을 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그 말라깽이 울보에 오줌싸개가 살아남았다니.”

“빌어먹게도 살아남았단다!”

벨데케가 통렬히 받아쳤다.

“개암나무 열매에 얹어 맞고서도 징징 울어대던 그 약골 녀석이 죽지 않고 고향에 돌아와서 장성했다.”

말없이 눈을 깜빡이던 이젠하르트가 물었다.

“그 원수의 아들놈이 언제 돌아왔습니까?”

“3년 전이다. 그때 버젓이 나타나서 벌건 대낮만 되면 저 광장을 휩쓸며 제 집인 양 활개치고 있단다.”

“그럼 놈의 병은 완치됐습니까?”

“완치됐느냐고? 허!”

벨데케는 긴 탄식을 뿜었다.

“여자들 변덕보다 더한 게 주님의 변덕이다. 놈은 대장장이처럼 건강하단다. 뜨거운 쇳물을 삼켜도 끄떡없을 만큼 혈기가 왕성해. 담금질을 얼마나 했는지 이교도의 검처럼 몸뚱이는 미끈하고 빌어먹을 그 낯짝을 말하자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낯짝!”

벨데케 부인이 노여움에 바들바들 떨며 소리쳤다.

“천지 창조 이래로 하느님은 그 어떤 사내에게도 그보다 더한 아름다움을 주지는 않았어. 태양처럼 빛나는 얼굴, 탐스럽게 굽이치는 이교도의 검은 머리! 깊은 호수 같은 초록색 눈동자, 붉고 싱싱한 뺨과 입술, 대리석처럼 매끈하고 깨끗한 이마! 그 용모는 5월의 꽃처럼 화사하고 아름다워서 여자들의 애간장을 전부 녹여버린다지.”

“귀부인, 아니, 어떻게 원수의 아들놈에게 그런 칭송을 하시오?”

“-라고 이 마을의 눈깔이 삔 여편네들이 마구 떠들고 다니니 새빨간 거짓말이야. 놈의 눈깔은 썩은 생선 눈깔이고 이마는 주름져서 울퉁불퉁하며 낯짝은 시커먼 숯덩이! 정욕에 찌들어 번들거리는 탐욕스런 눈깔, 세 쌍둥이를 잡아먹은 양 부푼 배불뚝이 배, 넓적하고 털이 뒤숭숭한 손! 그런 추잡하고 역겨운 이교도 악마의 자식은 꿈에 볼까 무서워.”

“아들아, 네 어미의 말이 정확하다.”

벨데케도 진저리 치며 응수했다.

“녀석은 악마의 자식이다. 화사한 낯짝 뒤에 음란한 음모를 숨기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녀자를 희롱하며 온 도시에 씨를 뿌리고 다니는 놈, 야수 같은 정욕에 벌게진 눈으로 호시탐탐 처녀들을 노리는 그놈이……. 그놈이-…….”

“아버님, 설마 힐데가르트를 울린 놈이 그놈입니까?”

이젠하르트는 창백해진 입술을 부르르 떨며 물었다.

“바로 그놈이다!”

벨데케는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그 음탕한 악마의 자식이 음모를 꾸며 우리 가여운 힐데가르트를 현혹했다. 순진한 비둘기의 심장에 눈먼 큐피드의 화살을 꽂아 악랄하게 농락하고 있어. 순진한 그 애는 야비한 새매의 발톱에 움켜잡힌 비둘기처럼 꼼짝달싹 못 하고 비탄에 빠져 버둥대고 있단다. 그놈이 그 애를 저잣거리의 천한 계집애처럼 희롱해서……. 응?”

눈앞에서 휙, 이는 바람에 놀라 벨데케는 말을 끊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어느새 문가에 서 있는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아, 갑자기 어딜 가려느냐? 식당에 가느냐?”

“곧 돌아오겠습니다.”

이젠하르트는 통로로 나갔다. 이내 문 너머에서 하인에게 명하는 음성이 들렸다.

“마구간으로 가서 내 시종한테 말과 무구를 준비하라고 일러라.”

“지금 바로 준비하라고 할까요?”

“당장 준비하라고 해.”

하인이 마구간으로 달려갔다.

벨데케가 뛰쳐나와 아들을 붙잡았다.

그가 입을 떼기도 전에 이젠하르트는 부친을 가족실로 몰아넣고 선언했다.

“아버님, 어머님, 먼저 식사하십시오. 저는 그 사이 원수의 갈빗대를 부숴 그 죗값을 받아오겠습니다.”

이젠하르트는 머리칼을 휘날리며 돌아섰다.

벨데케는 허겁지겁 그 뒤를 쫓으며 소리쳤다.

“아들아, 기다려라! 잠깐만 내 말을 들어다오! 오, 아들아! 안 된다!”

이젠하르트는 팔을 붙든 부친의 손길을 매몰차게 떨쳐냈다.

“아버님, 부디 저를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 이 몸은 부모와 군주께는 충성과 신의를 바치고, 적과 원수에게는 파괴와 응징을 맹세한 기사. 부모를 오욕과 시름에 잠기게 하고, 누이를 비탄 속에 빠뜨린 원수랑 단 하루도 같은 하늘 아래서 살 수 없습니다. 놈의 더러운 시신을 곧 안장에 매달고 오겠습니다.”

“허어, 하지만…….”

“절대 안 된다! 안 돼!”

벨데케 부인의 날카로운 외침이 막 자리를 뜨려는 이젠하르트의 발길을 잡았다.

이젠하르트는 돌아섰다. 미간은 분노와 초조로 일그러지고 잿빛 눈에는 고통이 역력했다.

벨데케 부인은 문가에 서서 아들에게 명했다.

“이젠하르트, 이리 오거라.”

“어머님.”

“아들아, 명령이다.”

“어머님, 차라리 저를 아들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이젠하르트는 모친의 발아래 몸을 던졌다.

“아니면 제발 저를 가도록 허락해주세요. 두 분께서는 기필코 저를 비겁자로 모욕하실 생각입니까?”

“가여운 디트리히! 스러진 꽃!”

벨데케 부인이 엉뚱한 괴성을 질러서 이젠하르트는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는 복수에 불타는 아들의 시선을 냉랭한 눈초리로 맞받아치며 말했다.

“너는 네 아비처럼 경솔하고 어리석게 굴어선 안 된다. 채 꽃을 피우기도 전에 스러져야 했던 가여운 디트리히, 그 애가 천당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어.”

“디트리히가 죽었습니까?”

“죽었다.”

부인은 원한과 절망이 뒤섞인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네 사촌 형 디트리히는 광장에서 저 간악한 원수 놈의 칼을 맞고 비참하게 죽었어.”

“어머님, 그런데도 두 분은 왜 저를 말리십니까. 오늘이 바로 복수의 그날입니다! 제 창과 검이 원수의 일족을 모조리 멸하고 살인자의 더러운 심장을 꿰뚫을 것입니다!”

“살인자의 심장을 꿰뚫겠다고? 아하하.”

벨데케 부인은 배를 잡고 웃었다.

“그놈의 심장이 꼬챙이에 꿰이듯 꿰뚫리는 꼴을 못 보니 안타깝구나. 그러나 기뻐하렴. 그 살인자도 이미 죗값을 받았으니까.”

“그럼, 그놈도 죽었습니까?”

“당연하지.”

부인은 자랑스럽게 외쳤다.

“네 사촌 탐파니스가 살인자를 해치웠단다. 제 형의 복수를 한 거야. 우리 벨데케와 포겔바이데, 두 집안의 사촌이 서로 칼질을 해서 한때 저 중앙 광장이 새빨간 피로 물들었단다. 아하하.”

두 부자는 입을 다물었다. 부인의 히스테릭한 웃음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벨데케는 꺼림칙한 낯으로 아내를 훔쳐보다가 몸종을 시켜 그녀를 가족실로 들여보냈다.

다음에는 이젠하르트를 구석으로 데려가서 조용히 말했다.

“보았느냐, 아들아. 네 어미는 약간……. 알겠지? 디트리히가 죽고 나서 줄곧 저런 상태다.”

“디트리히가 언제 죽었습니까?”

“3년 전에.”

“포겔바이데 그놈이 돌아왔을 때입니까?”

“그렇단다. 그 직후에 터졌지.”

“탐파니스는 어떻게 됐습니까?”

“그 앤 볼로냐로 추방됐다가 작년에 돌아왔어. 영주님께서 관대한 처분을 내리셨지. 네 어미가 저 꼴이 됐으니 말이다.”

벨데케는 가족실을 경계하며 말을 이었다.

“이제 알겠느냐, 아들아. 우리는 신중해야 한다. 피는 피를 부르는 법! 그때 영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엄중히 경고하셨다. 또 한 번 두 가문 사이에 칼부림이 일어나 피를 본다면 그 원수와 내 목을 자르고 시체를 광장에 매달겠다고 하셨다.”

벨데케는 몸서리를 치며 거창하게 성호를 그었다.

“아들아, 그러니 우리는 참아야 한다. 포겔바이데 놈들이 벼락을 맞아 죽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문득 아들을 돌아본 벨데케는 아들의 심상찮은 침묵에 말을 중단했다.

이젠하르트는 부친이 빤히 보고 있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한 듯이 침묵에 빠져 있다.

“얘, 너 괜찮으냐?”

이젠하르트는 대답 대신 입술에 이는 경련이 그칠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숨을 삭였다.

“이젠하르트?”

벨데케는 아들이 뿜어내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놀라서 문득 무심코 뒷걸음을 쳤다.

그것도 잠시.

벨데케가 부르르 떨자 이젠하르트는 심중을 감추고 부드럽고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버님, 식사 준비는 아직 멀었습니까. 배가 몹시 고프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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