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 가엾은 어린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다 (1/33)

지은이 · 이한

목차

1. 가엾은 어린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다

2. 이젠하르트의 귀향: 원수의 아들이 부활했다

3. 마을에 떠도는 소문: 늑대인간과 적기사

4. 사랑에 빠지지 않는 자는 현명하다

5. 로트의 등장: 하얀 수사슴

6. 숲의 파괴자

7. 사랑은 그의 빵이요, 포도주

8. 신의의 기사

9. 죽은 자의 왕

10. 지그프리트와 에른스트

11. 저주일까, 축복일까.

12. 오라버니는 그분을 죽이고 말 거야

13. 너의 원수를 사랑하라

14. 밤도둑

15. 친절한 경고, 마지막 자비

-등장인물-

로트 폰 데어 포겔바이데

하르트만 폰 데어 포겔바이데: 로트의 부친

이터: 영주의 조카. 친구

로에란그린: 친구

카이렛: 친구

지그문트: 사촌

이젠하르트 폰 벨데케

헤르만 폰 벨데케: 이젠하르트의 부친

벨데케 부인: 모친

힐데가르트: 누이동생

탐파니스: 사촌

디트리히: 사촌

콘드비라무어스: 영주의 딸. 이터의 사촌

만필요트 백작: 기사단장

하인리히 폰 오스터팅겐: 영주

베르나르 신부

늙은 한스: 벨데케의 종복

어린 한스: 한스의 아들

1. 가엾은 어린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다

동녘에서 황금빛 태양이 솟아오를 무렵 어느 괴상한 무리가 황야에 나타났다.

행진하는 그들에게서 북소리와 뿔피리 소리, 드높은 합창 소리가 울렸다.

난쟁이 고수가 맨 앞에서 나아갔다. 뿔피리를 부는 절름발이 키다리와 뚱보, 알록달록한 뿔 모자를 쓴 맨발의 합창단 어린이들이 뒤따라 행진했다.

합창단 뒤에서는 가짜 왕관을 쓴 돼지와 원숭이가 흑마의 안장에 위풍당당하게 앉아 행진했다.

뒤에서는 개가 쇠사슬에 묶인 곰을 끌고 가고, 수레바퀴가 혼자서 굴러가듯 공중제비를 도는 어릿광대와 소녀가 뒤따랐다.

마지막으로는 어느 젊은 남자가 밧줄에 손이 묶인 채 휘청이며 끌려갔다.

“길을 비켜라!”

난쟁이가 외쳤다.

“어릿광대 고행자가 나가신다! 도망쳐라! 적기사가 나타난다!”

눈썹이 불에 그슬린 뚱보가 남자의 밧줄을 잡아당겼다.

남자는 넘어졌다 다시 일어섰다. 그는 코 부근에 숨구멍이 뚫린 부대를 머리에 쓰고 있었다. 한쪽 발은 황금 박차가 달린 멋진 장화를 신었다. 다른 발은 맨발이었다. 어린애 하나가 장화 한 켤레를 품에 안고서 그를 뒤따랐다.

거대한 태양이 대지가 게워낸 불덩어리처럼 지평선에 반쯤 솟아올랐다. 황금빛 햇살이 수레바퀴처럼 방사상으로 살을 뻗어, 어둠의 장막을 걷어냈다.

“길을 비켜라! 얼간이 울보 대왕이……. 헉!”

난쟁이는 제자리에 우뚝 섰다.

동녘의 시뻘건 불덩이 속에서 뭔가 뛰쳐나왔다. 붉고 거대한, 켄타우로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마의 괴물)를 닮은 듯한 괴물이었다.

괴물의 붉은 투구가 번쩍였다. 갑옷 위의 망토는 화염에 휩싸인 듯 펄럭였다. 괴물의 장창은 하늘을 찔렀고, 방패는 붉은 광선을 내뿜었다. 갤럽으로 돌진하는 적마의 발굽 아래서 대지가 진동했다.

“허억! 적기사다!”

난쟁이는 긴 수염을 돌돌 말아 품에 안고 뒤로 내빼다 넘어졌다.

뒤를 따르던 합창단도 차례로 앞사람의 등을 처박고 땅바닥에 벌러덩 벌러덩 나동그라졌다. 어릿광대는 물구나무를 선 채로 얼어 붙었다.

지팡이로 다그치며 남자를 끌고 가던 뚱보도 남자랑 같이 쓰러졌다.

뚱보는 사지를 버둥대며 일어나려다 그대로 굳고 말았다. 시커먼 그림자가 이마에 드리워졌다.

“적, 적기사!”

뚱보가 외쳤다.

장창이 그의 배를 푹, 찔렀다. 뚱보는 눈을 까뒤집고 눈과 코로 피를 뿜었다.

째지는 비명이 사방에서 터졌다. 합창단은 꼬리에 불붙은 꼬마 요괴처럼 괴성을 지르며 달아났다.

장창이 이어서 난쟁이의 사지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난쟁이는 눈을 부릅뜨고 중얼댔다.

“난……. 난쟁이 살려…….”

“고귀하신 기사님!”

이때 애처로운 음성이 장창을 막았다.

누더기를 입은 소녀가 거대한 적마 아래 몸을 내던졌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호해주시길! 부디 저희에게 자비를 내려주시면 하느님의 권능이 기사님의 앞날에 축복을 내리고 모든 불행을 막아줄 것입니다.”

창끝의 날카로운 쇠붙이가 난쟁이의 목에 닿을락말락했다.

“너희는 도적 떼가 아닌가.”

적기사가 물었다.

“내 발길을 막고 심판을 자처한 것은 너희다. 너희는 저 고행자를 어디로 끌고 가는 거지?”

기사의 장창이 뚱보의 시체 곁에서 비틀대며 일어서는 남자를 가리켰다.

소녀가 울먹였다.

“고귀하신 기사님, 저희는 곡예단이며 천막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저 고행자를 왜 포박하여 끌고 가느냐?”

소녀는 바닥에 엎드렸다.

“기사님, 저희는 저 고귀하신 분을 서쪽 황야의 절벽에서 만났습니다. 저희도 처음엔 고행자인가 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아니었습니다. 저분의 고운 얼굴은 매정한 바람과 흙먼지에 할퀴어 마른 가죽처럼 거칠어지고, 하얀 손은 바위에 부대껴 상처가 나 있었습니다. 저분은 가엾은 어린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고 계셨습니다.”

“가엾은 어린 양처럼……. 흐억!”

적기사의 창이 복창하는 합창단의 중앙을 가격했다. 한 어린애가 바위 너머로 날아가 바닥에 동댕이쳐졌다. 합창단은 전부 입을 닥쳤다.

“자비로우신 기사님!”

소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저분께선 그런데 며칠이나 식음을 전폐하며 헤매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분을 저희의 천막으로 모시고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분께선 도중에 자꾸만 말을 몰아쳐, 눈에 띄는 모든 바위에 머리를 찧고 절벽을 찾아대시기에 할 수 없이 저분의 눈을 가리고 손을 묶었습니다. 어째서인지 비탄에 잠겨 자꾸만 머리를 쥐어뜯고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훌륭하신 기사님, 저 분은 제 칼을 빼앗았어요!”

난쟁이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제 칼을 빼앗아서 이렇게 자기 가슴에 대고 푸욱, 찌르려 하셨어요.”

적기사의 투구가 남자 쪽으로 향했다. 얼굴을 가린 투구의 면갑 너머에서 그의 시선은 남자의 차림새를 훑었다. 값진 보석이 박힌 허리띠가 햇살에 번쩍였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합창단은 어깨가 치솟도록 숨을 들이켰다.

“절벽에서 만났다고?”

적기사가 물었다.

“네.”

소녀가 답했다.

“거기서 뭘 하던가.”

“뛰어내리려고 하셨어요.”

“왜?”

“모르겠습니다.”

적기사는 잠시의 침묵 후에 다시 물었다.

“어느 곳에 사는 누구라고 하던가?”

“자비로우신 기사님, 그것도 저희는 모른답니다.”

소녀는 겁에 질려 대답을 이었다.

“저희에겐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답니다. 어느 댁으로 모셔다 드릴까 여쭈었으나 하염 없이 눈물만 흘리셨답니다.”

“풀어줘라.”

적기사가 말했다.

난쟁이는 달려들어 남자의 손을 풀었다. 머리에 뒤집어씌운 부대도 벗겼다.

남자는 고개를 쳐들었다. 흑색의 탐스러운 머리는 새둥지처럼 산발이다. 부대에 묻은 검댕 때문에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새카맸다.

그는 눈을 비비고 적기사를 올려다봤다. 적기사는 창을 거두고 기다렸다.

“이름 모를 기사여.”

남자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제 갈 길을 가면 될 걸 공연한 친절을 베풀었군요. 내 육신은 이미 냄새나는 고깃덩어리이자 주님의 은총을 잃은 영혼의 감옥, 눈먼 큐피드가 이렇게나 나를 모질게 희롱하니 서쪽 황야의 절벽 아래만이 내 안식의 침상이거늘, 당신이 괜히 간섭하는 바람에 나는 아직도 이 육신의 감옥을 벗어나지 못하고, 지상의 고통은 덕분에 늘어났군요.”

그러자 적기사가 그에게 바짝 말을 몰았다. 합창단은 얼굴이 하얘져서 눈을 가렸다.

“이름 모를 고행자여.”

적기사가 응수했다.

“눈먼 큐피드 운운하는 걸 보니 그 꼴사나운 몰골은 역시 귀부인 때문이군. 그럼 나는 빌어먹게도 공연한 짓을 했군. 한낱 허영꾼인 여인의 보잘것없는 사랑 때문에 반미치광이가 된 놈을 위해 갈 길을 멈추었으니 내가 어리석었어. 게다가 그 은혜를 입은 자는 뻔뻔하고 시건방지게도 외려 나를 책망하는군.”

“나의 기사여, 내 변명을 들어주세요. 내가 잠깐 정신이 혼란하여 그만 실례를…….”

“그 입을 다물어라.”

적기사가 말을 잘랐다.

“네놈이 지금 비무장 신세인 것을 신의 가호로 여겨라. 내가 이 두 손에 창과 방패를 든 이래로, 이런 배은망덕을 결코 좌시한 적이 없었다. 만일 네가 어리석은 정열의 충동에 휩쓸린 가련한 얼간이가 아니었다면, 내 창은 너의 사지가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동서남북으로 제 갈 길을 가도록 흔쾌히 도와줬을 것이다. 그러나 이 창은 이제껏 용맹한 왕과 제후의 방패를 무수히 조각낸 용맹과 명예의 상징, 너의 배은망덕에는 몽둥이찜질이나 너의 말대로 절벽 아래의 푸른 침상만이 어울리겠지.”

“당신은 고귀하신 분, 용맹한 기사 중의 기사입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그러니 더는 나를 방해하지 말고 제 갈 길을 가세요.”

“너는 눈먼 큐피드에게 어리석게 놀아나는 철부지 중의 철부지.”

적기사가 말을 받았다.

“나는 다음에 너를 또 한 번 꼭 만나기를, 그땐 네가 반드시 무장을 하고 있길 바란다.”

“하늘의 뜻이 그렇다면 우리는 또 만나게 될 겁니다.”

남자가 자못 비장하게 답했다.

“하늘의 뜻이 반드시 그러하길.”

적기사는 그를 가소롭게 여기며 응수했다.

적기사는 곧 말머리를 돌렸다.

남자는 그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하느님께서 이름 모를 당신을 보호해 주시길!”

“하느님께서 철없는 네놈을 보호해 내 창 아래로 데려다주시길.”

적기사는 떠났다.

남자, 포겔바이데 가의 외아들 로트 폰 데어 포겔바이데는 서쪽 지평선 너머로 멀어지는 장창의 붉은 깃발을 보며 중얼댔다.

“음, 저 기사는 누구일까. 성품은 좀 거칠어 보이지만 목소리는 꽤나 감미로워.”

로트는 동녘으로 돌아섰다.

“하아, 하지만 가슴이 아파서 미치겠구나. 저 태양도 조각난 내 심장처럼 시뻘건 핏덩이군.”

로트는 허리에 감긴 밧줄을 풀어 내던졌다.

그리고 핏빛으로 물든 동녘 저편으로 휘청이며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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