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 One Man’s Poision (12/13)

외전 2. One Man’s Poision

놈이 수상하다.

그렇게 느낀 지는 꽤 됐다. 시작은 놈이 수업에 들어오지 않는 것부터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놈에게 아카데미에서 가르치는 수업의 수준이 성에 찰 리 없었고, 그렇게 놈이 수업에 흥미를 잃은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놈이 이제껏 성실하게 수업에 출석한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니 이제 와 놈이 수업 몇 번을 빼먹는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감히 놈에게 뭐라 할 선생도 없었고, 나조차 놈이 출석으로 점수를 잃으면 줄곧 놈에게 빼앗겼던 수석의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커지는 셈이니 굳이 놈을 설득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놈이 수업을 빼먹는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가 궁금할 따름이었으나, 놈은 늘 그랬듯 의뭉스러운 웃음으로 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그렇게 놈이 수업에 들어오는 것보다 들어오지 않는 빈도가 더 잦아질 무렵, 본격적으로 내 의심에 불을 지피는 사건이 하나 터졌다. 검술 시간에 나와 놈의 대련이 있었는데, 그날따라 놈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보였고, 여느 때와 같이 놈의 급소를 노리고 목검을 찌른 순간 놈의 반격이 들어왔다. 나는 사정없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고, 대련을 구경하던 학생들은 볼거리가 끝나자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나는 좀처럼 꼴사납게 넘어진 자세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순간 느꼈던 놈의 살의 때문이었다.

놈과 결코 짧은 시간을 함께한 것이 아닌데도 놈이 내게 살의를 표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놈은 내게 흥미를 갖기 전까지 나를 무시했고, 내게 흥미를 가진 후부터는 나를 놀려 먹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나는 놈이 나를 봐주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으나, 얼마나 봐주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받아 낸 놈의 살의는, 무서웠다. 다른 수식어를 붙일 자리조차 없이 그저 무서웠다. 다리가 풀린 것에 굴욕감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나는 해를 등지고 서 있어 그림자 진 놈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 눈에 얼핏 빛이 스치고 지나간 듯했으나, 너무 순식간인 나머지 그 의미를 정확히 읽을 수 없었다. 실수라고 생각하는 걸까? 어쨌든, 놈이 찰나에 집중력을 잃은 것만큼은 자명했다. 놈이 집중력을 잃다니, 그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놈에게 불쑥 손을 뻗었다. 일으켜 달라는 제스처였다. 손끝이 볼썽사납게 부들거렸다. 아직 채 공포가 가시지 않은 탓이었다. 내가 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흔치 않았고, 심지어 내심 놈을 두려워한다는 걸 드러내는 일은 더더욱 흔치 않았으나, 그 순간은 어쩐지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놈은 내 손을 한참이고 내려다보더니, 결국 등을 돌렸다.

용기를 내어 뻗은 손을 거절당했다는 것에 새삼 마음이 상하진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저 놈의 오랜 병이 도진 건가 생각하고 있었다. 놈은 사춘기와 함께 지독한 무료함을 앓고 있었는데, 그건 세상 만물을 꿰고 있다는 오만함에 대한 형벌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그 상태가 유난하여 한동안은 예의 주시해야겠거니 결심했다.

그리고 그게 단지 무료함의 증상만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건, 그날 밤의 일이었다. 놈은 수업에 들어오지 않으면서부터 기숙사에도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싸늘하게 식은 내 옆의 침상을 바라보며 잠들었다. 그러다가 늦은 밤에서 새벽 사이, 눈을 떴다. 어떤 예감 때문이었을까, 한번 잠들면 좀처럼 깨지 않는 나였지만 그날만큼은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

놈은 한밤중의 유령처럼 침대 위에 걸터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둑한 방 안에서 우리는 서로를 똑바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놈의 소매로부터 바깥바람의 냄새와 알싸한 풀 냄새를 맡았다. 그건 내게 몹시 익숙한 냄새였다. 나는 밀려오는 아득함에 눈을 감았다.

그대로 꿈을 꿨다. 꿈에는 옛날에 뒷골목에서 알고 지내던 사내가 나왔다. 고아인 나에게도 드물게 친절함을 베풀던 사내였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는 내게 친절함을 베풀지 않았다. 내게만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친절함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굴었다. 뼈만 앙상한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거멓게 달라붙었고, 이지를 잃은 그 눈동자는 내가 알던 사내의 것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볼품없이 죽었다. 시체로 나뒹구는 그의 소매에서는 알싸한 풀 냄새가 났다. 나는 그 이후로도 몇 번인가 그 냄새를 맡았다. 처음에는 그 냄새가 뒷골목 사람들이 풍기는 특유의 냄새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뒷골목을 찾은 부자 나리조차 같은 냄새를 풍긴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비로소 그 냄새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마약이지?”

나는 눈앞의 녀석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러자 녀석이 당황한 듯 떠듬거렸다.

“가, 갑자기 무슨…….”

“놈이 요즘 이상한 이유, 마약 때문이지?”

녀석은 마법 특기생 중 한 명으로, 놈만큼은 아니어도 마법에 꽤 두각을 드러내는 인재였다. 최근에는 흑마법에 관심이 생겼다는 걸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낼 작정인지 복장 불량으로 걸리는 것도 불사하고 음침한 거적때기를 두르고 다녔다. 그 때문에 나는 속으로 녀석을 ‘음침로브’라 부르곤 했다.

“그, 그걸 왜 나한테 묻는…….”

“너, 놈이랑 마법 수업 같이 듣잖아.”

물론 음침로브가 놈과 같은 수업을 듣는다고 해서 놈이 마약을 하는지 안 하는지 알 의무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도리어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고, 결국 음침로브는 울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눈을 부라렸나, 협박하려던 건 아니고 그냥 나의 순진무구함을 강조하려던 거였는데. 나는 목덜미를 긁적이다가 이왕 이렇게 된 거 협박조로 밀어붙이기로 마음먹었다.

“마약은 대체 어디서 구한 거래?”

“나는 모, 몰라. 그런 건 나 말고 차라리 저런 애들을 찾아가서 물어보는 게…….”

음침로브가 가리킨 쪽에는 아카데미에서 소문 빠르기로 유명한 애들이 모여 있었다. 저들 중 몇몇은 아예 정보상 쪽과도 연이 닿아 있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니, 쟤네는 안 돼.”

“왜?”

“쟤네는 돈 받잖아. 나는 돈 없어.”

그랬다. 그들에게는 나름대로 규칙이 있었는데, 절대 대가 없이 입을 놀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음침로브가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면서 말했다.

“내, 내가 빌려줄게.”

“야.”

“으응……?”

“내가 너한테 삥 뜯을 놈으로 보이냐?”

사실 고백하자면, 내가 음침로브에게서 삥을 뜯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돈을 빌려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한 까닭은, 그래 봤자 허사일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로, 놈은 철저했다. 나는 예전에 이미 뒷골목의 인연을 통해 놈의 정보를 의뢰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오는 정보는 한정적이었다. 나는 그 얄팍한 종이 뭉치를 보며 여기엔 놈이 ‘허락한’ 이야기만이 적혀 있을 걸 알았다. 프로에게조차 자신의 정보를 뜯기지 않는 놈이 저런 아마추어들에게 정보를 뜯길 리가 없었다.

두 번째로, 혹여나 저들이 기적적으로 놈의 정보를 입수했다 한들 그걸 내게 팔 리가 없었다. 팔아도 되는 정보와 안 될 정보를 구분하는 게 그들의 일이었고,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상 놈의 정보는 후자로 분류될 게 분명했다.

결국, 내가 기댈 곳은 단 한 군데뿐이었다. 나는 음침로브를 빤히 바라보다가 그에게 들리도록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내가 요즘에 잠을 못 자.”

“……?”

음침로브는 난데없는 내 한탄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믿어져? 오전 검술 시간에 선 채로 졸았다가 연무장 돌라는 벌을 받았는데 뛰면서도 꾸벅꾸벅 졸아서 기면증 의심받은 내가, 요즘 잠을 못 잔다니까?”

“그,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이 타이밍에서는 왜 잠을 못 자느냐고 걱정을 해 줘야지.”

으이그, 나는 한심한 것을 바라보는 눈을 해 보였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테니까, 이번에는 제대로 물어봐.”

“으응, 알겠어. 그러니까…….”

“왜 요즘 잠을 못 잔 건데.”

“왜 요즘 잠을 모, 못 잔 건데?”

음침로브가 앵무새처럼 내 말을 따라 하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놈 걱정하느라.”

“…….”

나는 어이없다는 듯 날 쳐다보는 음침로브에게 천연덕스레 물었다.

“너도 친구가 위험한 길로 빠지진 않았을까 걱정되지 않니?”

“벼, 별로 안 그런데…….”

“별로 안 그래도 이럴 때는 그렇다고 해야 하는 거야. 아무튼, 그래서 말이지, 네가 날 도와줬으면 좋겠어.”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은 정말 오랜만이어서 어색하기 그지없었으나,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물론 순수하게 도움을 요청한 것은 아니고 음침로브를 이용해 먹으려는 생각이 만만이었지만, 어쨌든 그 계획이 오롯이 음침로브의 호의에 달린 것도 사실이었다. 음침로브가 어수룩하게 말했다.

“내, 내가 널 도와? 어떻게?”

“놈이 어디서 마약을 구한 건지 알려줘.”

“그건 아까 말했잖아. 나, 나는 모르는 일이라니까…….”

“거짓말, 너는 알고 있잖아.”

그러나 나는 그 어수룩함을 믿지 않았다. 자고로 뒷골목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은 어수룩한 자였고, 그 규칙은 아카데미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분명 알고 있을 거야. 네가 모를 리 없어.”

내가 재차 말하자 음침로브가 아랫입술을 꾹 지르물었다. 나는 마지막 확인 사살을 하듯 말했다.

“알잖아, 나 친구 별로 없는 거. 너 말고 지금 날 도와줄 사람이 없어. 너밖에 없어.”

“…….”

“그러니까, 도와줘.”

그렇게 말하는 내 목소리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여기서 거절당하면 그건 정말로 안 된다는 뜻이니 포기하고 다른 수를 알아봐야 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음침로브는 잠시 입술을 달싹이더니 입을 열었다.

“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어? 내가 알고 있다고.”

“그야, 모르는 게 더 어렵지 않겠어?”

음침로브는 똑똑하고, 취향이 괴팍하며, 또래들 사이에서 묘하게 소외되어 있었다. 그건, 그가 타인을 관찰하기 좋은 자리에 앉아 있다는 뜻과도 같았다. 그러나 음침로브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비단 그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가 바삐 눈동자를 굴려 대도 들키지 않는 건, 어디까지나 멍청이들 한정이었다.

결국, 음침로브는 체념하듯 물었다.

“너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데?”

“놈이 하는 마약이 절대 일반적인 마약은 아니라는 거.”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애초에, 놈은 평범한 마약으로는 취할 수 없는 몸이다. 놈은 웬만한 독에는 내성이 있었다. 문제는,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들 역시 본질은 우리를 해롭게 하는 독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놈에게는 술도, 담배도, 약도 좀처럼 듣지 않았다. 너무 강하다는 이유 하나로 놈은 자신을 짓누르는 거대한 무료함으로부터 도피조차 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니 그 운명을 뒤틀 방법이 있다면, 결코 정상적인 것은 아닐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수소문해 봐도 놈이 하는 마약의 정체는 알아낼 수 없었어.”

“다, 당연히 그랬겠지.”

나는 음침로브의 말에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설명해.”

“너, 너는 생각해 본 적 있어? 왜 시간은 정방향으로만 흘러가고, 왜 밤하늘의 별은 반짝이고, 왜 위로 던진 공은 다시 바닥으로 떨어지는지 말이야.”

“아니.”

“그렇겠지, 너는 그런 걸 궁금해할 성격은 아니니까……. 그, 그렇지만 마법사들은 바로 그 ‘왜?’라는 걸 궁금해해. 원인을 알아내서, 그 결과를 뒤바꾸는 게 우리의 일이거든.”

“그래서, 결론은?”

난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던 음침로브는 잠시 입을 우물거리더니 말했다.

“있잖아, 왜 그동안 놈을 중독시킬 수 있는 약은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

순간 멈칫했다. 내가 눈을 두어 번 깜빡일 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음침로브 역시 딱히 내 대답을 바라고 물은 것은 아니라는 듯 마저 말을 이었다.

“정답은, ‘그걸 만들 이유도 없고, 만들 수도 없으니까’야. 어, 어지간한 사람들은 어지간한 독이면 이미 죽어서 나자빠지거든.”

“…….”

“그, 그럼 질문을 바꿔 볼게. 이제 와서 놈을 중독시킬 수 있는 약이 나타났다면, 그걸 만든 건 누구일 것 같아?”

그걸 만들 이유도 있고, 그걸 만들 수도 있는 사람. 답이 될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뿐이었다. 나는 작게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결국, 너도 물증은 없고, 심증뿐이라는 거네.”

“무, 물증이 없으니까, 심증이라도 믿어야지.”

“말은 잘해.”

겉으로는 그렇게 비꽜지만, 속으로는 이미 납득한 뒤였다. 그렇구나, 그러니까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놈이 하는 마약의 정체를 알아낼 수 없었던 거야.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는 정황에 나는 머리를 짚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냥 약쟁이인 줄 알았더니, 직접 제조까지 하는 거였어?”

차라리 놈이 다른 데서 마약을 공수해 온다고 한다면 찾아가 깽판을 놓든 했을 텐데, 일이 복잡하게 됐다.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어째서 놈은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놈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독을 만들어 냈다. 신이 될 수 있었던 사내는 불완전하고 결함투성이이며 실수를 저지르는 인간으로 남길 택했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나는 그제야 놈이 검술 시간에 내게 살의를 내비친 후, 그 얼굴에 찰나 스쳐 지나간 표정을 무어라 부를 수 있는지 깨달았다. 그건, 여유를 잃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놈은 과연 무엇 때문에 그토록 몰려 있었던 걸까. 나는 오래 생각하는 대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도와줘서 고맙다.”

“이,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놈을 잡으러 가야지. 궁금한 건 혼자서 골머리를 썩이며 끙끙거릴 게 아니라,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면 그만이다. 나는 한 무리의 아이들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아까 음침로브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바로 그 무리였다.

“걔 지금 어디 있냐?”

“누구?”

“누구겠어, 내가 찾는 사람이야 뻔하지.”

“아아, 네 룸메이트? 걔라면 아까 정원 쪽에서 봤던 것 같은데.”

“땡큐.”

나는 품에서 동전 하나를 꺼내 대답한 아이에게 던져 줬다. 뒤에서 음침로브가 ‘아, 아까는 돈 없다며!’ 하고 따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걸어 나갔다. 아이가 준 정보는 동전 하나어치의 값을 했다. 나는 풀밭 위에 한가로이 누워 있는 놈을 내려다봤다.

“수업은 어쩌고 여기서 신선놀음이야?”

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떠서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설마 하고 물었다.

“지금도 취해 있는 건 아니지?”

내가 놈을 위아래로 훑자 놈은 그제야 상체를 일으켰다. 뒷머리며 등에 풀떼기와 흙 따위가 잔뜩 들러붙어 있었지만, 놈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자기, 할 말 있어서 나 찾아온 거 아냐?”

그건, 어서 할 말 하고 꺼지라는 놈 나름의 축객령이었다. 그러나 놈의 까칠한 반응에 울컥하기에는 퍽 새삼스러웠다. 나는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맞아, 너한테 물어볼 게 있어.”

“뭔데?”

놈은 뭐든 물어보라는 식의 관대한 어투로 답했다. 어쩌면 내가 할 말이 무엇일지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 태도에 나는 마치 놈과 처음 만났던 때로 돌아간 듯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제…….”

계획에 없던 말을 꺼낸 건, 그래서였다.

“이제, 내가 재미없어졌어?”

나는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진심에 입을 틀어막았고, 놈은 조금 생경한 표정을 지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수에 허를 찔린 사람 같았다. 그러나 시간은 언제나 정방향으로만 흐르고,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으므로, 결국 놈은 잠시간의 침묵 후에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그러면?”

“자기는 너무 재밌어서 탈이지.”

‘그래서일까.’ 하고 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는 때때로 자기를 죽이고 싶어져.”

그렇게 말하는 놈의 목소리가 지독히도 평온했다. 그러나 나는 그 아래에서 들끓는 충동과 꾹꾹 짓누른 진심을 읽었다. 햇빛은 따사롭고, 발치에서는 바람결을 따라 풀잎이 하늘거렸다. 누군가로부터 나를 죽이고 싶다는 고백을 듣기에 딱 적당한 날이었다.

“물론, 나는 그러지 않을 거야. 나는 멍청이가 아니니까.”

“…….”

“그렇지만 아무도 내게 이 충동을 어찌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

놈은 서서히 내게 손을 뻗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내가 놈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이제는 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놈으로부터 쏟아지는 그림자가 아찔했다. 마침내 놈의 손이 안착한 곳은, 내 목덜미였다. 놈은 손에 힘을 주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붙들고만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어쩐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놈의 손 아래에서 내 맥박이 쿵쿵 거세게 요동쳤다. 나는 타인의 손아귀에 완전히 숨통을 내맡긴 기분에 속수무책으로 압도당했다.

그때 놈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자기야, 발기했어?”

나는 그제야 놈의 손을 거세게 쳐냈다. 놈은 낮게 웃었다. 여느 때와 같은 질 나쁜 희롱이었지만, 여느 때와 달리 움찔한 이유는 정말 그대로 조금만 더 있었다면 발기했을 것만 같아서였다. 내가 여전히 놈에게 재미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놈이 나를 파괴하고 싶을 만큼 원한다는 사실이 기쁘고 기뻐서.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 얄팍한 가장마저 놈에게 전부 읽힌 것 같아 수치스러웠다.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도리어 도끼눈을 뜨고 나섰다.

“그래서야?”

“뭐가.”

“마약에 손댄 거.”

나는 아직도 목덜미에 남아 있는 놈의 온기를 벅벅 닦아 내며 말했다.

“고작 그까짓 충동 하나 어쩌지 못해서?”

“글쎄.”

이죽거리는 물음에도 놈은 정말로 곰곰이 생각해 보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자기한테서 관심을 좀 돌릴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지.”

“네가 그 정도로 겁쟁이인 줄은 몰랐는데.”

“나도 몰랐어.”

놈이 처연하게 눈을 내리깔자 기다란 속눈썹이 나풀거렸다.

“자기는, 언제나 내게 처음이고 유일하며 예외적인 존재니까.”

“하.”

그 꼴이 견딜 수 없이 가증스러워 나는 기어이 놈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있잖아, 너 그거 알아? 요즘 네 소매에서 내가 싫어하는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어찌나 심한지 도통 잠을 못 잘 정도야.”

그러면서 멱살을 쥔 손에 좀 더 힘을 주어 놈의 얼굴을 내 코앞까지 바짝 끌고 왔다. 서로의 숨결이 맡아질 정도의 거리였다. 나는 달콤한 밀어를 속삭이는 연인처럼, 혹은 무고한 이를 겁박하는 무뢰배처럼 뇌까렸다.

“지금까지 내가 봤던 사람 중에 그 냄새를 풍기고도 멀쩡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거든.”

“그래서, 자기가 볼 땐 나도 곧 그들처럼 될 것 같아?”

“아니, 그럴 리가.”

나는 삐뚜름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너라면 멀쩡하고도 남겠지.”

“맞아, 잘 알고 있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렇게 화가 난 이유는…….”

놈의 눈을 들여다봤다. 바로 그 안에 내가 놈에게 화가 난 이유가 있었다. 나는 내가 발견한 그것을 고스란히 입 밖으로 내뱉었다.

“질투가 나서 그래.”

내가 네 관심을 끌기 위해서 어떤 짓을 했는데, 고작 마약 하나로 나를 대체해 버리겠다는 게. 네가 그렇게 나를 쉽게 놔 버리겠다는 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그대로 놈의 입술에 내 입술을 붙였다. 서로의 치아가 부딪혔다. 필사적이고도 갈급한 입맞춤은 차라리 애원이나 협박에 더 가까운 형태를 띠고 있었다. 놈은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는데, 그게 내가 한 말을 예상하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내가 먼저 입을 맞춰 온 것이 처음이라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나는 놈의 입술 위에서 속삭였다.

“그렇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야.”

“…….”

“나는 쉽게 부서지는 장난감이 아니야. 이것 봐, 나는 이렇게 따듯하고, 축축하고, 보드랍고, 단단한걸.”

그렇게 말하며 놈을 향해 입 안을 벌려 보였다. 방금까지 놈이 제멋대로 유영한 곳이었다.

“그러니까 나로 만족해.”

나는 빛으로 번들거리는 놈의 눈을 보며 짙은 미소를 지었다.

“왜, 발기했어?”

그건 아까 놈이 지껄인 농지거리에 대한 복수이자, 내 볼품없는 입맞춤에도 놈이 제대로 흥분했다는 데에서 오는 음습한 기쁨의 표출이었다. 그러자 놈이 곤란한 듯 한쪽 눈가를 찌푸리며 웃었다.

“응, 정말로.”

그러면서 곧장 입을 맞추려 들기에 그 버르장머리 없는 주둥아리를 손으로 틀어막으며 말했다.

“약은 그만 만들겠다고 약속해.”

“장담은 못 해.”

“어째서?”

“좋은 무기가 될 테니까.”

놈은 내 손에 입술을 묻은 채 벙긋거렸고, 나는 간지러움에 몸을 움찔했다. 그게 퍽 마음에 들었는지 놈의 눈꼬리가 반달 모양으로 사르르 휘어졌다.

“사람은 원래 고통보다 쾌락에 약한 법이지. 그게 실은 독인 걸 알면서도 속절없이 취하게 될 거야. 그러니 이보다 더한 무기가 어딨겠어.”

“그 양날 검에 베이지 않을 자신은 있고?”

“응, 이제 나를 망가뜨릴 수 있는 건 자기뿐이니까.”

놈이 내 손끝에 쪽쪽 입을 맞췄다. 나는 관대하게 말했다.

“좋아, 봐줄게.”

전과 같은 이유로 약을 하는 게 아니라면 됐다. 나는 놈의 볼을 붙잡았다.

“대신 내게 들키지만 마.”

“그래.”

“그리고 나랑 사귀자.”

“그래.”

우리는 키스했다. 목 뒤로 넘어가는 타액이 독과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 키스에 속절없이 취했다. 놈의 말마따나 사람은 고통보다 쾌락에 약한 탓이었다. 자글자글한 희열이 속에서 엉망으로 얽힌 채 들끓었다. 이제 너를 망가뜨릴 수 있는 것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도 나뿐이었다. 나를 망가뜨릴 수 있는 것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도 너뿐이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서로를 갉아먹으면서도 끝끝내 맞잡은 손을 놓지 못하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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