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Down the Rabbit Hole (11/13)

외전 1. Down the Rabbit Hole

콧노래가 절로 나올 정도로 상크름한 날씨였다. 산들거리는 바람이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헤집고 지나갔다. 반사적으로 머리카락을 정돈하려 손을 들자 그 끝에 무언가 바스락거리는 게 걸렸다. 정체를 확인하니 그건 색색의 꽃송이를 얼기설기 엮은 화관이었다. 내가 이걸 왜 쓰고 있더라, 곰곰이 생각해 보려던 찰나 저 멀리서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나이를 지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청량하고 산뜻한 미성이었다.

웃음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의 아이가 보였다. 분명 익숙한 얼굴의 아이인데도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진 까닭은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표정 때문일 것이다. 다른 꿍꿍이 없이 해맑은, 내게는 낯선 그 표정을 하고 아이는 맨발로 풀밭을 거닐며 발가락 사이를 간질이는 잔디의 감촉을 즐기고 있었다. 그게 어떻게 보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 화관은 아이가 씌워 준 것이었지. 그제야 기억이 났다.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옆에서 나직이 책을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 들어 보니 그건 마침내 마녀의 흉계에서 벗어나 제 연인을 구하러 가는 어느 공주의 이야기였다. 책 읽는 목소리의 주인은 커다란 밀짚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아이의 형임을 알고 있었다.

얼핏 저 멀리 있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눈을 반달 모양으로 휘며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내가 그랬죠?’ 그 말을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언젠가 아이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형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아저씨도 형을 만나면 금방 형을 좋아하게 될 거예요.’

‘형이 되살아나면, 그러면, 우리 다 같이 소풍을 가요.’

‘이번에야말로 행복할 거예요. 행복할 수 있을 거예요.’

그 말마따나 아이는 행복해 보였다. 옆에서 책 읽는 소리가 뚝 하고 그쳤다. 아이의 형은 책의 남은 이야기를 마저 읽는 대신 책갈피를 끼워 두길 택했다. 그리고 소풍 바구니에서 찻잔과 찻잎을 꺼냈다. 아이의 형은 나를 보며 눈짓했다.

“너도 줄까?”

흰 꽃을 말려서 만든 찻잎에 뜨거운 물을 붓자 순식간에 물 안에서 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했다. 그것이 내게는 어쩐지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아니, 됐어.’ 그렇게 말하려는데 어쩐 일인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목을 부여잡고 캑캑거렸다.

“사양하지 말고.”

아이의 형이 내게 찻잔을 내밀었다. ‘싫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이의 형도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찻잔을 들고 성큼 내 쪽으로 다가오기에 그만큼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아이의 형은 그런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왜 거부하는 거야? 고작 차 한 잔일 뿐이잖아.”

그건 내가 대답해 줄 수 없는 물음이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가 아니라, 고작 차 한 잔에 내가 왜 이토록 겁을 먹는지 나조차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아이의 형은 계속해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자 등 뒤에 나무껍질이 닿았다. 그 감촉에 나도 모르게 소스라쳤다. 그러다 실수로 발이 미끄러졌고, 꼴사납게 뒤로 넘어졌다.

머리를 부딪칠 거야,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상황은 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하필이면 나무의 밑동 부근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구멍 속으로 빨려 가듯 떨어졌다. 그대로 아찔한 추락감이 이어졌다. 아래로, 아래로, 더 깊고 어두운 곳으로. 한참이고 떨어지는데 혹시 내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중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암흑에서 벗어나 마침내 닿은 바닥은 뜨거운 용암이 아닌 차디찬 눈 더미였다. 나는 눈 위를 엎어지듯 굴렀다. 에퉤퉤, 입 안에 들어간 눈을 뱉어 내고, 온몸에 묻은 눈을 털어 냈다. 쌓인 눈이 추락의 충격을 줄여 줬는지 통증이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두 발로 깡충 뛰어 일어났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 저 멀리에 작은 오두막 한 채가 보였다. 오두막 쪽으로 걸어가는데 기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꼬리뼈 부근에 이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솟아난 게 느껴졌다. 아까 추락했을 때 뼈가 탈골이라도 됐나 보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머리 위쪽으로도 달랑거리는 한 쌍의 무언가가 생겨난 게 느껴졌다. 아까 쓰고 있던 화관이 머리카락과 잘못 엉키기라도 했나 보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주머니 속에는 이전에 없던 무언가가 들어 있는 게 느껴졌다. 꺼내 보니 심장이었다. 혹은 회중시계거나,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시계는 째깍거리는 소리 대신 두근거리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 소리에 바쁘게 걸음을 재촉했다.

“늦었다, 늦었어.”

나는 무의식적으로 뱉어 놓고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늦었다는 거지? 그러나 깊이 생각할 새도 없이 어느새 나는 오두막의 문 앞에 당도해 있었다. 문을 열기 전, 문득 엄습하는 이유 모를 불안감에 주변을 살폈다. 무언가 수상한 점을 찾기 위해서였다. 예를 들자면, 눈밭에 질질 끌린 자국이라든가.

그러나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별다른 이상한 점은 눈에 띄지 않았고, 그제야 나는 안심하고 오두막의 문을 열 수 있었다. 오두막 안의 공간은 기이했다. 그나마 가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테이블 하나뿐이었는데, 그 위에는 수프 한 그릇이 달랑 놓여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 주위로는 커다란 버섯이 포진해 있었는데, 그중 가장 큰 버섯 위에는 애벌레 한 마리가 초록색 망토를 두르고 앉아 있었다.

“너는 누구니.”

애벌레가 입을 열 때마다 그녀가 피우고 있던 담배 연기 또한 함께 번져 나왔다. 나는 대답했다.

“나는 ‘나’야.”

“이거 기막힌 우연이구나. 마침 나도 ‘나’인 참이거든.”

“아니, 너는 애벌레지.”

“그러는 너는 토끼고.”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틀렸어. 종(種)을 따지자면 나는 인간이야.”

“네가 인간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니?”

“나는 기다란 팔다리를 가지고 있고, 이족 보행을 하니까.”

“동시에 기다란 귀를 가지고 있고, 토실한 꼬리를 흔들어 대지만 말이지.”

그제야 나는 내 꼬리뼈 부근에 새로 생긴 것은 짤막하고 둥근 꼬리이며, 머리 위에 새로 생긴 것은 털이 복슬복슬한 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내가 인간이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야.”

“네가 토끼라는 말도 거짓이 아니란다. 그렇다면 너는 토끼-인간이거나 인간-토끼이거나 둘 중 하나인 게 틀림없어.”

“순서가 중요한 거야?”

“보통 뒤쪽에 붙는 말이 더 본질에 가깝긴 하지.”

“그러면 나는 토끼-인간일 거야.”

아마도. 불필요한 말은 목 뒤로 삼켰다. 애벌레는 끊임없이 담배 연기를 뻐끔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너는 아까 ‘나’라고 그랬잖니?”

“맞아, 아니, 사실은 내가 누구였는지 기억이 잘 안 나.”

“너, 이름을 잃었구나. 이름을 잃은 것의 말로는 뻔하지. 하나의 관념으로 전락하는 것.”

그 말에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나는 물었다.

“우리 예전에 이 얘기를 한 적이 있던가?”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네가 믿는 게 곧 진실이니, 네가 믿고 싶은 대로 믿으렴.”

나는 콜록콜록 기침을 뱉었다. 어느새 방 안은 부연 담배 연기로 꽉 차 있었다. 나는 서둘러 이 오두막을 떠나고 싶었다. 이 짜증 나는 애벌레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을뿐더러, 손안에 들린 회중시계-심장의 바늘이 계속 두근거리며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쓸데없이 시간을 지체했군. 여기서 나가는 문은 어디지?”

“저쪽.”

애벌레가 가리킨 쪽에는 쥐나 간신히 드나들 법한 작은 크기의 문 하나가 나 있었다. 나는 불평했다.

“저 문은 너무 작아. 그냥 여기 들어왔던 문으로 다시 나가면 안 될까?”

“그 문은 입구란다. 입구는 들어오는 문이지. 너는 출구로 나가야 해. 왜냐면 그게 나가는 문이니까.”

말도 안 되는 억지였지만,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입구로 나가 봤자 끝없이 펼쳐진 설원 말고 다른 것은 없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출구로 나가는 법을 알려 줘.”

“문고리를 잡고, 문고리를 비틀고, 문을 밀고, 그 밖으로 걸음을 내디디면 된단다.”

“말이 안 통하는군. 좋아, 그러면 저 문의 크기에 맞게 내 몸을 줄이는 법을 알려 줘.”

그러자 애벌레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테이블 위에 있는 수프를 마시면 네 몸이 줄어들 수도 있을 거야.”

나는 그 말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건, 수프를 마셔도 내 몸이 줄어들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지?”

“그래, 어쩌면 반대로 네 몸이 엄청나게 부풀어 오를지도 모르지. 그러다 이 오두막을 가득 채우고도 부풀어 오르는 게 멈추지 않으면, 압력을 못 이겨서 펑 하고 터져 버릴지도 모르는 일이고.”

“무책임한 말이네. 결국엔 그 무엇도 확신하지 못하고, 그 무엇도 보장하지 못한다는 거잖아.”

“그야, 네가 수프를 마신 다음에 일어날 일은 네가 수프를 마신 다음에야 알 수 있으니까.”

애벌레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 나는 건더기 하나 없는 희멀건 수프와 눈싸움을 했다. 이 수프를 마시고 난 뒤 펑 하고 터질 내 몸뚱어리가 어렵지 않게 상상됐다. 살점은 조각조각 나서 사방으로 흩어지고, 내장은 철퍽철퍽 아래로 쏟아지고, 뼈는 형체조차 알 수 없게 무너져 내릴 터였다. 나는 불쑥 물었다.

“이 수프에는 뭘 넣었어?”

“너도 알고 있잖니.”

“내가 뭘 알고 있는데?”

“네가 뭘 알고 있는지는 너만이 아는 일이겠지.”

“난 너랑 선문답 따위 하고 있을 시간 없어.”

애벌레는 빙빙 돌려 말하는 데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 따지고 들어 봤자 내 손해라는 걸 깨닫고 수프 그릇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입에 대고 기울이려는 찰나, 가까워진 액체로부터 고소한 냄새가 훅 풍겨 왔다. 순간 무언가 잘못됐다는 감각이 싸하게 등줄기를 내달렸다. 나는 수프를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안 마시니?”

“응. 왜냐면 출구로 나가는 방법은 수프를 마시거나 마시지 않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니니까.”

선택지는 항상 둘뿐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애벌레가 출구라고 말한 작은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문을 발로 세게 걷어차기 시작했다. 빠직하는 소리와 함께 헐거운 통나무 벽이 서서히 부서져 내렸다. 때로는 가장 단순한 답이 정답일 때가 있는 법이다. 나는 부서진 벽의 틈으로 몸을 던졌다. 등 뒤에서 애벌레의 희미한 노랫소리가 마치 나를 배웅하듯 들려왔다.

“달리렴, 토끼야. 열심히 달리렴. 시간이 늦었으니,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달려서 집에 돌아가야지.”

오두막집 밖은 흰 자작나무 숲으로 이어져 있었다. 눈밭에는 마치 따라오라는 듯 새의 발자국이 주욱 찍혀 있었다. 그 흔적을 따라 걷자 어느 순간 발자국이 뚝 하고 끊겼다. 그러나 발자국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코를 찡긋거렸다. 빽빽이 늘어서 있는 나무들 사이로 짐승 특유의 냄새가 맡아졌다.

“숨어 있지 말고 나와.”

나는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어, 어떻게 알았어?”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몸통 없이 머리만 둥둥 떠다니는 도도새 한 마리가 서 있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기이한 도도새의 몰골 때문이 아니라, 발자국의 주인이 까마귀일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은 탓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 또한 이상한 일이었다. 왜 발자국의 주인이 까마귀일 것이라고 단정 지었을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서 상념을 떨쳐 내고는 도도새를 향해 물었다.

“너는 누구야?”

“나는 체셔-도도새야.”

“그럴 리가 없어. 너는 체셔 고양이이거나 말더듬이 도도새이거나 둘 중 하나여야만 해. 체셔-도도새는 존재하지 않아.”

“그, 그렇게 치면 너도 토끼이거나 인간이거나 둘 중 하나여야만 해. 지금 네 꼴은 그 어느 쪽도 아니잖아.”

나는 내가 뱉은 말을 그대로 되돌려 받을 줄은 몰라서 짐짓 당황했다. 눈이 맹하길래 어수룩한 성격일 줄 알았는데, 이 도도새는 예상외로 영리했다. 할 말을 잃은 나를 두고 도도새는 히죽 웃어 보였다. 제법 체셔 고양이를 닮은 음흉한 웃음이었다. 결국, 나는 못마땅한 얼굴로 체셔-도도새의 존재를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너는 어,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는 길이었어?”

“나는…….”

그다음 말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하트 킹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어.”

“하트 킹을?”

“응. 그런데 너, 하트 킹이 어딨는지 아니?”

그러자 도도새가 난감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나, 나는 몰라. 하지만 하트 킹이 어딨는지 아는 사람이 어딨는지는 알지.”

“좋아, 그럼 하트 킹이 어딨는지 아는 사람이 어딨는지 알려 줘.”

“이 숲을 헤치고 나아가면 모자 장수의 티 파티 장소가 나올 거야. 모, 모자 장수는 하트 킹을 끔찍하게 싫어하니까, 하트 킹이 어딨는지도 알고 있을 거야.”

“고마워, 도도새야.”

나는 감사의 의미로 도도새의 부리 끝에 쪽 하고 가벼운 입맞춤을 남겼다. 그러자 도도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얼마나 눈을 크게 떴는지, 그 안와 밖으로 눈깔이 툭 튀어나올 정도였다. 나는 그 눈깔을 주워 들며 키득키득 웃었다.

“네 눈깔은 네가 잘 챙겨야지.”

“너, 너무 놀라서 그만…….”

“몸통도 없는데 눈깔까지 없어지면 어떡해.”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너, 왜 몸통이 없는 거야?”

“기억 안 나?”

그러자 도도새가 한쪽뿐인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동시에 내 손아귀에 있는 도도새의 눈깔도 저 혼자 멋대로 도르륵 돌아가더니 나를 쳐다봤다.

“너한테 줬잖아.”

“나한테?”

“응, 너한테.”

“왜 그걸 나한테 줬는데?”

내 태연한 물음에 도도새가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너를 사랑하니까…….”

나는 예상치 못한 말에 입가를 딱딱하게 굳혔다.

“다시 말해 봐.”

“너를 사랑해. 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도도새는 사랑한다고 말할 때만큼은 절대로 말을 더듬지 않았다. 나는 그 절절한 고백에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침묵했다.

“……나는 바란 적 없는 일이야.”

나는 도도새의 정수리를 검지로 긁어 주며 말했다. 냉정한 말과 달리 그 손길에는 투박한 애정이 묻어 나왔다. 손가락을 떼 보자 내 손길을 따라 도도새의 머리 깃이 비죽비죽 삐쳐 있었다. 나는 그것을 정리해 주는 대신 그저 도도새로부터 몸을 돌리길 택했다. 작은 심술이었다.

“가, 갈 거야?”

“갈 거야.”

영리한 줄 알았던 도도새는 역시 멍청했다. 대체 그 누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의 몸통을 통째로 바친단 말인가. 심장이라면 또 모를까. 때마침 주머니 속의 회중시계-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모자 장수의 티 파티는 언제나 여섯 시에 시작했다. 티 파티에 늦지 않게 도착하려면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자작나무 숲을 깡충거리며 내달렸다. 그러다 문득 도도새가 아직도 나와 헤어졌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저 멀리 머리만 남은 도도새가 눈밭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도도새가 내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하트 킹을 믿지 마.’

그 순간 쿵 하고 무언가와 부딪쳤다. 충격으로 엉덩방아를 찧으려 할 때 허리 뒤쪽으로 나를 받치고 들어오는 팔이 있었다.

“뛸 때는 앞을 보면서 뛰어야 하지 않겠소.”

나는 눈알만 데굴데굴 굴려 나를 지탱해 준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빛을 등지고 있어 짙게 그림자가 드리워진 얼굴은 쉬이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나는 그가 미치광이 모자 장수라고 확신했다. 왜냐면 모자를 다섯 개나 겹겹이 머리 위로 쌓아 올릴 사람은 그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모자 장수는 마치 왈츠의 한 동작을 수행하는 것처럼 우아하게 나를 일으켜 세웠다.

“티 파티에 늦을까 봐 그랬지.”

“앞으로는 그러지 마시오. 그리 서두르지 않아도 티 파티에 늦을 일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티 파티의 시작 시각은 여섯 시잖아. 지금은 여섯 시를 한참 넘겼는걸.”

“그대가 오는 시간이 곧 티 파티의 시작 시각이오.”

“어째서?”

그 물음에 모자 장수의 한쪽밖에 남지 않은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대가 바로 이 티 파티의 주인공이니까.”

나는 그 눈빛을 피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모자 장수의 너른 가슴팍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는 검은색 셔츠에 검은색 조끼에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목 끝까지 채운 크라바트가 금욕적인 느낌을 줬지만, 동시에 팽팽하게 당겨진 모든 옷감이 그 아래에 깔린 근육에 대한 은밀한 상상을 부추기기도 했다.

곧이어 그는 검은색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나를 에스코트했다. 그가 신고 있는 검은색 가죽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끝이 뾰족하고 무광에 윙팁으로 포인트를 준 그 신발 안으로 검은색 양말을 신고 있는 발이 보였다. 나는 도착적으로 그의 발목을 훑으며 그가 과연 양말 가터를 차고 있을지 따위를 궁금해했다.

“이리로.”

그는 나를 자작나무 숲 한가운데에 멈춰 있는 기차 쪽으로 이끌었다. 나는 철로도 없는데 왜 기차가 이곳에 있는지, 어떻게 이곳에 있는지 궁금했다. 내 궁금증을 눈치 빠르게 알아챈 모자 장수가 말했다.

“내가 이곳까지 몰고 왔소. 내가 이 기차의 차장이니까.”

“너는 차장이 아니라 모자 장수잖아.”

“이제부터는 차장-모자 장수요”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모자 장수는 기차를 갈취한 게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고작 모자 따위를 팔아서 기차를 살 수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미치광이 모자 장수가 파는 모자를 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찻삯은?”

“그 반지가 좋겠군.”

모자 장수는 내가 끼고 있는 백금 반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대는 빈털터리잖소. 그 반지를 제외하고는 달리 찻삯을 지불할 방법이 없을 텐데?”

“그렇지만 이건 안 돼.”

“그럼 어쩔 수 없군. 그럼 모자 장수의 이름으로 그대를 미치광이 티 파티에 초대하겠소. 초대받은 손님은 찻삯을 낼 필요가 없지.”

그럼 처음부터 나를 티 파티에 초대해 주면 됐을 텐데, 모자 장수는 쓸데없이 번거롭게 일을 처리했다. 나는 입을 비죽이며 기차 안으로 들어섰다. 기차의 창문 밖으로는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훌륭한 경치였지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바깥은 자작나무 숲이었는데, 그새 눈이 전부 녹아 버려서 물 아래로 잠기기라도 한 걸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객실에 한가운데에는 기다란 만찬 테이블이 자리해 있었다. 모자 장수는 테이블의 가장 상석에 나를 앉히고, 그 바로 옆자리를 차지했다. 문득 내려다본 흰색 테이블보에는 빨간 글씨가 적혀 있었다.

주의: 창밖으로 찻잎을 던지지 마시오. 이 티 파티는 미치광이 티 파티이므로 바다에 찻잎을 던지고 싶다면 보스턴 티 파티를 찾아가시오.

나는 그 주의 문구에 코웃음 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만찬 테이블은 나와 그의 자리를 제외하고는 전부 비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하트 킹을 왕좌에서 끌어내리려는 작전이 실패한 뒤, 혁명단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소.”

“그러면 왜 계속 티 파티를 여는 건데?”

“그대를 위하여. 오로지 그대만을 위하여.”

모자 장수의 말은 퍽 낭만적으로 들렸다. 그들의 장대한 역모가 실패한 원인이 바로 나 하나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하지 않고 들으면 말이다.

“나는 이 황량한 티 파티를 홀로 지키며 그대를 기다렸다오. 감히 명계의 왕비를 탐하다 왕의 분노를 사 망각의 의자에 앉게 된 페이리토오스처럼, 찻잔에 먼지가 쌓이고 찻주전자에 거미줄이 쳐질 때까지 그대만을 기다렸다오.”

모자 장수의 손이 내 목덜미를 쥐었다가 턱을 타고 뺨까지 올라왔다. 그 미끈하고 서늘한 가죽 장갑의 감촉이 마치 기어가는 뱀과도 같았다.

“그대, 머리를 좀 잘라야겠군.”

그러나 마침내 모자 장수의 입을 비집고 나온 말은 참으로 난데없는 것이었다. 그는 눈가에 아른거리는 내 앞머리를 함부로 잡아서는 엄지와 검지로 배배 꼬아 댔다.

“네가 잘라야 한다는 게 머리를 말하는 거야, 머리카락을 말하는 거야?”

그는 내 질문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그러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또 다른 물음으로 화제를 돌리길 택했다.

“그대는 까마귀와 책상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오?”

이상한 수수께끼였다.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말했다.

“둘 다 포가 썼으니까.”

에드거 앨런 포는 그의 시 ‘까마귀’를 쓰기 위해 책상을 써야만 했을 것이다. 모자 장수는 내 대답에 제법 흡족한 듯 눈을 길게 휘었다.

“포의 까마귀를 알고 있소?”

“알다마다.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한 화자에게 어느 날 밤 창문을 통해 이름 없는 까마귀가 찾아드는 내용의 시지.”

“가엾은 것!”

모자 장수가 갑자기 쾅 하고 테이블을 치며 일어났다. 그를 따라 테이블 위의 너절한 식기들이 달그락거렸다.

“너의 신께서 너를 보내셨구나. 이 천사들로 하여금 네게 죽은 연인의 이름을 떠올릴 약을 보내 주셨구나. 들이켜라. 오, 이 고마운 약을 들이켜고 기꺼이 죽음을 택하라!”

나는 그제야 모자 장수가 시의 한 구절을 낭송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작위적인 말투와 달리 그의 얼굴은 무표정하기 그지없었다.

“그러자 까마귀 가로되, 그럴 일은 영영 없으리.”

“…….”

“그리하여 까마귀는 날지 않고, 장미 정원의 분수 바로 위 부서진 천사상 앞에 여전히 앉아 있네. 그 그림자로부터 네 영혼이 벗어날 일은, 영영 없으리라.”

모자 장수가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가 외우는 포의 까마귀가 내가 알던 내용과 사뭇 다름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구태여 그것을 지적하고 나서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모자 장수는 미치광이이기 때문이었다. 미치광이가 시 하나 잘못 외웠다고 해서 이상하게 여길 이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모자 장수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는 포의 작품 중에선 까마귀보다 리지아가 더 좋아.”

“이런, 까마귀가 들으면 슬퍼하겠군.”

“그래서, 네 답은 뭔데?”

“무슨 답 말이오?”

“까마귀와 책상의 공통점 말이야.”

그러자 모자 장수는 다시 얌전하게 자리에 앉아 다리를 꼬면서 말했다.

“까마귀와 책상 둘 다 죽음이고, 순리고, 절대 잘못된 결말을 부르지 않지.”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시시한 수수께끼로 괜히 시간만 버렸네.”

“그 말은 이상하군.”

“왜?”

“시간이 물건이라면 버릴 수 있을 테지만, 시간은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오. 차라리 시간을 죽였다고 하면 모를까.”

나는 모자 장수의 말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사람이라면 죽일 수 있을 테지만, 시간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치광이와 실랑이를 하느라 더 많은 시간을 버리고, 아니, 죽이고 싶지 않았던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정정할게. 시시한 수수께끼로 괜히 시간만 죽인 거로.”

“그 말도 이상하군.”

“이번엔 왜?”

“내가 그대보다 앞서 시간을 죽여 버렸기 때문이오. 이 끔찍한 티 파티에서 할 일이라고는 시간을 죽이는 것밖에 없으니까.”

나는 이번에야말로 모자 장수의 말에 반박하기로 했다.

“새빨간 거짓말은 그만둬. 내 시간은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걸.”

나는 주머니에서 두근거리는 회중시계-심장을 꺼내 모자 장수에게 보여 주며 내 승리를 확신했다. 이렇게 명백한 증거가 있으니 모자 장수도 이번만큼은 반박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모자 장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첫째, 거짓말은 빨간색이 아니오. 둘째, 그건 그대의 시간이 아니오.”

“이게 내 시간이 아니라고?”

“그래, 대체 어디서 시간을 훔쳐 온 건진 모르겠지만. 그대도, 그대에게 시간을 도둑맞은 사람도 참 불쌍하게 됐소. 그대가 훔친 시간은 영원히 멈추지 않고 그대를 괴롭힐 테고, 그대에게 시간을 도둑맞은 사람은 영원히 변하지도 않고, 자라지도 않고, 늙지도 않고, 썩지도 않을 테니.”

문득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그건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남의 시간을 훔쳤다는 부끄러움, 혹은 죄책감, 혹은 두려움, 혹은 기시감일 게 분명했다. 그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고개를 숙여 테이블보를 쳐다봤다. 그러자 테이블보에 새로운 주의 문구가 떠올랐다.

주의: 테이블 위로 도마뱀이 기어 다녀도 신경 쓰지 말 것.

주의 문구를 다 읽는 것과 동시에 시선 끝에 이상한 것이 걸렸다. 어디서 온 건지, 언제부터 있던 건지 모를 도마뱀 한 마리가 테이블 위를 빨빨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도마뱀은 기이하게도 뒷다리가 둘 다 잘려 있었는데, 자세히 들어 보면 그가 테이블 위를 기어 다닐 때마다 ‘지이익,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도마뱀은 잠시 혀를 날름거리더니 모자 장수의 앞에 놓인 찻잔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내가 ‘어, 어.’ 하고 바보 같은 소리를 내는 와중에 모자 장수는 아직 도마뱀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태연하게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대, 포도주 한잔하겠소?”

“여기에 포도주가 있어?”

“아니, 없지.”

그러면서 그가 찻잔을 들이켰다. 찻잔 안에는 찻물 대신 알록달록한 젤리가 잔뜩 들어 있었다. 모자 장수가 와그작거리며 젤리를 씹어 먹는 동안 나는 그가 혹시 도마뱀도 함께 씹어 먹지 않을까 마음을 졸였다. 그러나 괜한 걱정이라는 듯, 도마뱀은 언제 찻잔을 탈출한 건지 다시 테이블 위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모자 장수가 집어 든 찻잔 아래의 티 코스터에도 숨겨진 주의 문구가 적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주의: 만약 테이블 위를 기어 다니는 도마뱀을 신경 쓰지 말라는 주의 문구가 있다면 무시하시오. 그리고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발견했을 시, 즉시 모자 장수에게 알리시오. 우리 티 파티에는 도마뱀을 초대하지 않소.

나는 상반되는 주의 문구 사이에서 과연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마침내 두 주의 문구의 말투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즉시 모자 장수를 향해 소리쳤다.

“잠깐. 그 차, 아니, 젤리, 아니, 차-젤리 마시지 말아 봐.”

그러나 이미 늦은 뒤였다. 내가 모자 장수가 마시고 있는 것을 무어라 칭할지 헤매는 동안 모자 장수는 차-젤리를 모조리 씹어 먹었다. 이후 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무지갯빛의 토사물이 후드득 떨어지며 객실 바닥을 더럽혔다. 그 꼴을 본 도마뱀이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이 빌어먹을 도마뱀 같으니라고!”

그제야 도마뱀의 존재를 알아차린 모자 장수는 도마뱀을 으깨 버릴 작정인지 마구잡이로 주먹 쥔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도마뱀이 어찌나 재빠른지 애꿎은 테이블만 쾅쾅 두드릴 뿐이었다. 나는 다기며 접시 따위가 사방팔방으로 튀어 오르는 것을 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만! 나는 이런 바보 같은 티 파티에 어울려 주려고 온 게 아니야. 나는 하트 킹이 어딨는지 물어보려고 온 거라고.”

그러자 모자 장수가 반색하며 물었다.

“방금 하트 킹이라고 했소?”

“그래, 너 하트 킹이 어딨는지 알아?”

“물론 알고 있지. 하트 킹은 저 바다 너머에 있소. 그렇지만 그대는 육지 생물이니, 이 망망대해를 헤엄쳐서 하트 킹이 있는 곳까지 다다르진 못할 거요.”

모자 장수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물을 무서워했기 때문에 헤엄은커녕 바닷물에 발끝조차 담그기 어려울 터였다. 내 곤란한 낯을 본 모자 장수가 슬그머니 덧붙였다.

“내가 그대를 도와줄 수 있소.”

“어떻게?”

“이 기차는 바다 위를 달리지. 내가 기차를 몰아 그대를 하트 킹에게 데려다주겠소.”

“그렇게 해서 네가 얻는 게 뭔데?”

내 의심 가득한 눈초리에 모자 장수가 답했다.

“복수, 오롯하고도 처절한 복수.”

“내가 하트 킹에게 가는 게 어떻게 네 복수라는 거야?”

“아니지, 그건 ‘네’ 복수가 아니라 ‘내’ 복수요.”

“내 말이 그 말이야. 내 입장에서 네 복수는 ‘네’ 복수라고.”

“하지만 내 입장에서 내 복수는 ‘내’ 복수인 걸.”

나는 답답한 마음에 가슴팍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그러나 나에게는 미치광이와 실랑이할 여유가 없었고, 결국 ‘됐어, 그만하자.’라며 모자 장수를 이해시키길 포기했다. 그러자 모자 장수는 기차의 앞머리로 가서 핸들을 붙잡았다. 그건 마치 배의 키처럼 생긴 핸들이었는데, 모자 장수는 그걸 아무 방향으로나 마구잡이로 돌려 대기 시작했다.

“잠깐만, 그거 그렇게 마구잡이로 돌려도 되는 거야?”

“마구잡이라니,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오. 남쪽으로 백 리, 동쪽으로 백 리, 북쪽으로 백 리, 그러면 우리는 처음 출발했던 위치로 되돌아오게 되지.”

“그 말은 이상해. 서쪽으로도 백 리를 가야 우리가 처음 출발했던 위치로 되돌아오는 거 아냐?”

“보통이라면 그렇지. 그러나 우리가 처음 출발했던 위치가 ‘세상의 끝’이라면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얘기요.”

나는 모자 장수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쓰다가 또다시 모자 장수의 시답잖은 수수께끼에 말려들었다는 걸 깨닫고는 불퉁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 그래서 우리가 처음 출발했던 위치로 되돌아오는 게 무슨 소용이야? 나는 하트 킹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

“바로 그래서 우리가 처음 출발했던 위치로 되돌아가는 거요. 왜냐하면, 하트 킹이 바로 ‘세상의 끝’에 있으니까.”

나는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하트 킹이 우리가 처음 있던 곳에 있다는 거야? 하트 킹은 바다 건너에 있다며?”

“그렇게 말해도 틀린 건 없지. 바다를 건너 한 바퀴를 돌면 결국 우리가 원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오게 되니 말이요.”

“그러면 굳이 바다를 건널 필요는 없었던 거잖아!”

모자 장수는 내 말을 못 들은 체했다. 나는 제풀에 씩씩거리다가 머리를 짚었다. 저 미치광이에게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가다니, 다른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하트 킹이 있는 곳에 데려다주겠다는 그 말까지 거짓은 아니었는지, 한동안 신나게 키를 돌리던 모자 장수가 외치듯 말했다.

“이제 곧 하트 킹의 장미 정원이요. 제동을 걸 테니 손잡이를 꽉 붙드시오.”

“여기 손잡이가 어딨는데?”

“손잡이야 많지. 찻잔에도 손잡이가 달려 있고, 찻주전자에도 손잡이가 달려 있잖소. 개중에서 그대가 잡고 싶은 손잡이를 골라잡으시오.”

그 어이없는 말에 내가 미처 반박하기도 전에 모자 장수는 기차에 급제동을 걸었다. 끼이익 하는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몸이 앞으로 쏠렸다. 나는 필사적으로 찻잔의 손잡이를 붙잡았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꼴사납게 넘어진 내 위로 테이블의 식기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이윽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이번엔 몸이 뒤로 쏠렸다. 이리저리 데굴데굴 구르면서 나는 내가 유리병 안의 조약돌이 된 건 아닌지 의심해야 했다.

“자아, 목적지에 도착했소. 어서 내리시오.”

“잠시만 기다려 봐, 나 옷 좀 털고…….”

“꾸물거릴 시간 없소. 곧 기차가 폭발할지도 모른단 말이오!”

버럭 소리를 지른 모자 장수는 꼴사납게 엎어져 있는 내게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곤 한 손은 내 등을 받치고 다른 손은 내 오금 밑을 받친 채 나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망설임 없이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아찔한 부유감도 잠시, 모자 장수는 눈 덮인 땅 위에 가붓하게 착지했다.

그러나 모자 장수의 우려는 곧 괜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기차가 폭발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기차가 들이박은 분수의 천사상은 졸지에 반 토막이 났으며, 충돌한 기차의 앞머리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게 보였다. 내가 속으로 자그마한 유감을 표하던 찰나, 손안에서 도마뱀 한 마리가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아까 모자 장수와 난장을 피웠던, 바로 그 도마뱀이었다.

뒤이어 도마뱀을 발견한 모자 장수는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달리 해 줄 말이 없어 그저 눈알을 굴리기만 했다. 기차가 터질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듣고 나도 모르게 도마뱀을 낚아챈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마뱀과 모자 장수가 기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틈을 타 나는 모자 장수의 품 안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하트 킹의 장미 정원에는 눈 쌓인 장미들이 잔뜩 피어 있었다. 장미는 분명 여름꽃일 텐데, 눈을 맞고도 활짝 피어 있는 그 꽃떨기가 어쩐지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인상을 찌푸린 걸 눈치챘는지, 모자 장수가 말했다.

“여기 있는 장미는 모두 박제요. 하트 퀸이 장미를 좋아하거든. 그래서 하트 킹이 그를 위해 사시사철 장미가 피어 있는 정원을 선물했소.”

“끔찍하군.”

“그리고 끔찍할 정도로 낭만적이지.”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모자 장수의 말투는 여상하기 그지없었지만, 나는 그가 이죽거리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 말에서 미약한 혐오와 경멸의 냄새를 맡은 탓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침입자다, 잡아라!”

“저기 장미 정원을 망가뜨린 죄인이 있다!”

한 무리의 카드 병사들이 이리로 뛰어오고 있었다. 하긴, 기차로 정원을 들이박았는데 들키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모자 장수는 쯧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저들을 전부 따돌리는 건 무리요.”

“그럼?”

“어쩔 수 없지. 둘로 나뉘는 수밖에.”

이어지는 모자 장수의 제안은 이랬다.

“나는 이곳에 남아 저들의 주의를 끌 테니, 그대는 하트 킹을 찾으러 가시오.”

“네가 미끼가 되겠다는 소리야?”

“저들이 물고기도 아닌데, 내가 왜 미끼가 되겠소?”

“미끼가 된다는 건, 그러니까, 관용적인 표현인데…….”

그러나 나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카드 병사들이 지척에 다다랐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차라리 내가 유인하는 역할을 맡을게. 잽싸게 도망가는 거로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그러다 만약 잡히기라도 한다면? 나야 잡혀도 아무 문제 될 것이 없지만, 그대는 하트 킹에게 볼일이 있다 하지 않았소?”

“그건 그렇지만…….”

“그대가 하트 킹을 찾아가는 건 그대가 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가 원하는 것이기도 하오. 기억하시오?”

그래,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하트 킹을 찾아가는 게 모자 장수의 복수라는 그 이해할 수 없는 말은 잊어버리려야 잊어버릴 수도 없었다.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 말대로 하자.”

그러자 모자 장수는 어깨를 가벼이 으쓱해 보였다. 나는 제자리에서 통통 뛰면서 몸을 풀었고, 모자 장수는 그런 나를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리하여 모자 장수는 뛰지 않고 여전히 앉아 있네.”

나는 그 말이 아까 외웠던 포의 까마귀를 변형한 것임을 눈치채고 물었다.

“장미 정원의 분수 바로 위, 부서진 천사상 앞에서?”

“장미 정원의 분수 바로 위, 부서진 천사상 앞에서.”

그제야 깨달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옷을 두른 모자 장수는 마치 포가 그의 시에서 말한 까마귀의 모습을 닮았다는 걸 말이다. 그의 눈은 꿈꾸는 악마의 눈과 같고, 그의 몸으로부터 흘러내린 빛은 바닥에 그림자를 비추니, 나는 그가 나에게 할 작별 인사가 어떤 말일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은, 영영 없으리라.”

그 말이 신호탄과 같았다. 나는 곧바로 카드 병사들이 쏟아지는 반대편으로 뛰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 모자 장수가 병사들을 잘 상대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애써 앞만을 보며 뛰었다.

문득, 내가 이 넓은 장미 정원에서 과연 하트 킹을 찾아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엄습했다. 그렇게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마주친 것은 한 정원사였다. 그는 한 손에 페인트 통을 든 채 색이 하얗게 바래 버린 장미를 도로 붉은색으로 칠하고 있었다.

“이봐요, 혹시 하트 킹이 어딨는지 알아요?”

그 질문에 정원사는 그는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손가락으로 저 먼 곳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높은 첨탑이 서 있었다. 나는 첨탑을 향해 바로 뛰어가려다가, 불쑥 정원사에게 물었다.

“있잖아요, 새하얀 장미를 새빨갛게 칠하는 게 당신의 일이라면…… 그러면 새하얀 거짓말도 새빨갛게 칠할 수 있을까요?”

거짓말은 빨간색이 아니라는 모자 장수의 말이 마음에 걸렸던 탓이다. 그러나 정원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실망을 감추지 못한 채 정원사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정원사는 그 인사에 가벼운 묵례로 화답했다.

그렇게 나는 한참을 달리고 달려 높은 첨탑 앞에 다다랐다. 아마 이 탑의 꼭대기에는 내가 그다지도 찾으려 했던 하트 킹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나는 나선으로 빙글빙글 꼬인 계단을 오르며 생각했다. 인간들이 탑을 쌓는 이유는 하늘에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라고 하던가. 그러나 나는 차라리 추락이 더 어울리는 사람으로, 감히 신에게 도전하고 싶은 마음도 없으면서 탑을 오르고 있다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그런데도 내 몫이 아닌 이 모든 고행을 기꺼이 자처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자기야, 왜 이렇게 늦었어?”

그래, 오로지 너를 만나기 위함이 분명했다.

“하긴, 자기는 언제나 한 발짝씩 늦곤 하니까. 그만큼 내가 기다려 주면 그만인 일이지, 그렇지?”

“웃기지 마, 나는 딱 제시간에 도착했어.”

나는 주머니 속에서 회중시계-심장을 꺼내 놈에게 보여 줬다. 그러자 놈은 늦었다며 타박하던 태도를 저 멀리 던져 버리고 순식간에 말을 바꿨다.

“맞아, 자기는 제시간에 도착했어. 왜냐하면, 자기가 도착하는 시간이 곧 제시간이니까.”

그건 모자 장수가 했던 말과도 비슷했다. 내가 오는 시간이 곧 티 파티의 시작 시각이라고 했던가. 기묘한 우연에 미간을 찌푸리자 놈이 덧붙였다.

“이곳은 자기가 주인공인 세상이잖아. 그러니까 시간도 자기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게 당연하지.”

“너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데?”

“내가 왜 그걸 모르겠어, 내가 바로 자기 손에 시간을 쥐여 준 장본인인데.”

그렇게 말하며 놈은 내게 한 발짝 다가왔다. 그리고는 심장을 붙들고 있는 내 손에 제 손을 포개 그러쥐었다. 그 상태로 놈이 내 손끝에 가볍게 키스했다. 나는 손안에서 쿵쿵거리는 심장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럼 너는 왜 그런 짓을 한 건데?”

“그야, 자기가 서둘러서 뛰어오다가 넘어지기라도 하면 속상할 테니까.”

그건 참으로 끔찍하고, 동시에 끔찍할 정도로 낭만적인 이유였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이 세상에 그런 이유로 움직일 인간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래서, 네가 하트 킹이야?”

그러자 놈이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아니.”

“그럼?”

“한때는 그랬지. 지금은 자기한테 하트를 줘 버렸으니까, 하트 킹이라고 불릴 수 없어. 굳이 따지자면, 하트 퀸의 국서 정도가 되지 않을까.”

나는 순간 터져 나오는 실소를 참지 못했다. 놈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그토록 많은 사람이 달려들었는데, 결국 놈은 제 발로 왕좌에서 내려온 셈이기 때문이었다. 하트 퀸의 국서라니, 이전에 비하면 형편없는 직책에도 놈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는 듯했다.

“자기야, 꼬리가 너무 귀엽다.”

심지어 놈은 눈앞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복슬복슬한 내 꼬리에 정신이 팔린 채였다.

“알아, 내 꼬리가 좀 귀엽긴 하지.”

나는 꼬리를 만지는 척 은근슬쩍 엉덩이를 더듬어 대는 그 손을 무심하게 쳐 내며 응수했다.

“귀도 너무 귀엽고.”

이번에는 미리 머리 위로 손을 올려 곧 다가올 손길에 방어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놈의 손이 향한 곳은 내 머리 위로 솟아난 기다란 귀가 아니었다. 놈은 원래 있던 자리에 얌전히 붙어 있는 내 귀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는 귓가에 바짝 입술을 붙인 채 속삭였다.

“어쩜 이렇게 귓바퀴가 동그랗지?”

내게 온전히 쏟아지는 그 나직한 감탄에 비죽 소름이 돋았다. 귀가 약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 나는 재빨리 놈에게서 몸을 물렸다. 그러자 놈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고, 나는 그 음흉함에 질색하며 말했다.

“개수작 말고. 그럼 하트 퀸은 지금 어디 있는데?”

“하트 퀸은 지금 자고 있어. 그는 늦잠쟁이거든. 너도 알다시피, 미인은 잠꾸러기라서 말이야.”

“나는 하트 퀸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가 아니라 어디 있는지를 물었어.”

그 말에 놈은 입가를 매만졌다. 그게 꼭 고민하는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심기가 불편한 사람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뜸 들이기도 잠시, 마침내 놈이 입을 열었다.

“하트 퀸은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있어.”

“뭐?”

나는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나 탑의 꼭대기 층에는 나와 놈을 제외하곤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놈 옆에 베일에 싸인 유리관 하나만이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나는 설마 하는 마음이 되어 그 유리관 쪽으로 성큼 다가갔다. 놈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전부 하라는 양 방관하는 태도였다.

나는 유리관 위를 덮고 있는 베일을 홱 끌어 내렸다. 그곳에는 몸뚱어리 한 구가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하트 퀸의 몸뚱어리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 머리가 댕강 잘려 있는 채였기 때문이다. 나는 놈을 노려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당장 설명해.”

그러자 놈이 짧게 한숨을 뱉고는 말했다.

“자기도 하트 퀸의 말버릇은 잘 알고 있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저놈의 목을 쳐라!’ 하는 거 말이야.”

“…….”

“그날도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었어. 하트 퀸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발견했고, ‘저놈의 목을 쳐라!’ 하고 말했지. 단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면, 하트 퀸이 가리킨 게 바로 거울 속의 자신이었던 것뿐이야.”

“멍청하긴.”

내가 신랄한 어조로 말하자 놈이 웃었다.

“그래, 멍청했지. 내가 멍청했어. 하트 퀸이 거울 속 비친 자기 자신을 마음에 들지 않아 할 줄은 몰랐거든. 내 눈에는 그저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으니까. 그럴 줄 알았다면 진즉에 거울이란 거울은 전부 치워 놨을 거야.”

나는 멈칫했다. 놈의 말투가 꼭 자책하는 사람의 그것처럼 들려서였다. 놈과 자책이라니, 그보다 더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 어디 있다고. 나는 애써 고개를 저어 방금의 생각을 털어 냈다. 사실 내가 멍청하다고 평한 것은 거울 속 자기 자신도 못 알아보고 목을 치라고 외친 하트 퀸이었지만, 구태여 정정하지 않은 까닭은 그것이 놈에게 전혀 문제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트 퀸의 머리는 목으로부터 달아났어. 관용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머리에 발이 달려서 달아나 버리고 만 거야. 덕분에 머리를 잃은 하트 퀸은 끔찍한 저주에 걸리고 말았어.”

“그 끔찍한 저주란 게 뭔데?”

“머리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거울 나라의 꿈을 꾸는 저주야. 하트 퀸이 거울을 봐서 이 모든 일이 벌어졌으니, 꽤 합당한 저주지.”

나는 유리관 안의 몸뚱어리를 흘깃 쳐다봤다. 장미 정원의 장미만큼이나 솜씨 좋게 박제된 몸뚱어리는 그저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이라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내게 그 몸뚱어리는 단지 잘 관리된 물건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내색하지 않았고, 놈은 마저 말을 이었다.

“그 저주의 가장 끔찍한 점은, 꿈을 너무 오래 꾸면 결국 어느 쪽이 꿈이고 어느 쪽이 현실인지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는 거야. 틀린 그림 찾기를 오래 하다 보면 어느 쪽이 원본이고 어느 쪽이 틀린 그림이었는지 잊어버리는 것처럼 말이야. 거울 나라는 마치 거울에 반사된 것과 같이 이곳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곳이니까, 더 헷갈리기 쉬울 수밖에.”

“그러면 너도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빨리 하트 퀸의 머리를 찾으러 가야 하는 거 아냐?”

내 말에 놈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나는 미소가 다소 의미심장했다.

“아니, 그러니까 더더욱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지.”

“왜?”

“왜냐하면, 하트 퀸의 머리는 결국 나를 찾으러 올 수밖에 없을 테니까.”

나는 그 근거 없는 확신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놈이 덧붙였다.

“하트 퀸은 저 자신은 싫어할지언정 나는 좋아했거든. 그것도 아주 많이.”

순간 묘한 불길함이 나를 사로잡았다. 놈이 나직이 나를 불렀다.

“자기야.”

“그만, 말하지 마.”

“이제 그만 일어날 시간이야.”

놈이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섰다. 나는 망연히 생각했다. 그렇구나, 내가 바로 하트 퀸의 달아난 머리였구나. 부정하고 싶은 마음과 달리 나를 위해 열려 있는 놈의 품 안은 참으로 아늑해 보였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놈에게 안기려는 찰나, 어디선가 비명을 닮은 외침이 들려왔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이야!”

나는 거짓말은 새빨간 색이 아니라고 지적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소리를 지른 건 내 다리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도마뱀이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모자 장수와 찢어졌을 때 도망간 줄 알았더니 기어이 나를 쫓아온 모양이었다.

“하트 킹은 너를 속이려는 거야! 너를 하트 퀸으로 만들어서, 이곳에 묶어 놓으려는 거야!”

악을 쓰는 도마뱀을 두고 놈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자기야, 저 도마뱀의 말을 믿어?”

그렇게 묻는 놈의 눈이 순진무구했다. 달리 말하자면, 그 눈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매끈한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 나는 도도새가 남긴 말을 떠올렸다. ‘하트 킹을 믿지 마.’ 그래서 놈에게 대꾸하는 대신 조심스러운 손길로 도마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도마뱀이 말했다.

“너는 여기 있으면 안 돼.”

“왜?”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야.”

“그럼,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딘데?”

“저 위.”

도마뱀이 가리킨 곳은 탑의 천장이었다. 높다란 천장 한가운데에는 동그란 구멍 하나가 뻥 뚫려 있었는데, 그로부터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저 위는 어딘데?”

“정말 모르겠어?”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자 도마뱀이 내게 속삭였다.

“이 탑이 바로 네가 굴러떨어졌던 그 토끼 굴이야.”

그 말에 멈칫했다. 나는 사방을 뒤덮은 깜깜한 암흑과 끝없을 것 같던 추락을 기억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어둑어둑한 탑의 내부와 까마득한 그 높이가 익숙했다.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마침내 모든 이야기가 시작됐던 곳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나선형 계단처럼 배배 꼬인 이 이야기를 내 손으로 끝맺는 것. 그제야 나는 놈에게 나를 보낸 모자 장수의 속셈을 알 수 있었다. 결말에는 필연적으로 상실이 따랐고, 모자 장수는 놈에게 영원한 상실의 고통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게 바로 그의 복수였다. 깨달음을 얻은 나는 놈을 돌아봤고, 놈은 그에 화답하듯 물었다.

“자기야, 거울 나라의 꿈을 계속 꾸고 싶은 거야? 거기는 고통스러운 일투성이잖아. 여기서는 모든 걸 잊고 행복할 수 있어.”

놈은 언제나 그렇듯 웃는 낯과 달콤한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그 유혹에 넘어가고 싶은 충동이 바로 목구멍 아래에서 들끓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은 그와 다른 형태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가야만 해.”

그러자 놈이 반문했다.

“어째서?”

“내가 바라는 건 행복이 아니니까.”

대답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튀어나왔다.

“행복해지는 법은 너무 쉬워. 모든 걸 포기하면 돼. 손아귀에 쥔 유리 조각을 내려놓으면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고, 발목에 매인 족쇄를 풀어 던지면 어디로든지 떠날 수 있는 걸 알아.”

그러나 손아귀의 유리 조각은 내려놓기엔 너무나도 반짝거렸고, 발목의 족쇄는 나를 이 땅에 발붙이게 만드는 유일한 닻이었다. 나는 가진 것 없이 태어나서 온전한 나의 것 하나를 얻는 일이 그토록 힘겨웠고, 간절했으며, 그렇기에 그 무엇도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다.

“이건 돌려줄게.”

나는 주머니 속에서 두근거리며 뛰고 있는 심장을 꺼내 놈에게 건넸다. 새삼 아쉬움은 들지 않았다.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닌 물건이었다. 남에게 잠시 빌린 물건을 다시 돌려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놈은 그 심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걸 받으면 나는 다시 하트 킹이 되어야만 하잖아. 나는 하트 퀸의 국서 자리가 더 마음에 들어. 하트 퀸의 소유로 남을 수 있으니까.”

놈다운 이유였다. 나는 두 번 권하지 않고 다시 심장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소매를 걷어붙이며 벽 쪽으로 다가갔다. 짧게 심호흡을 하고 벽에 손톱을 박아 넣었다. 탑의 꼭대기 층에 다다른 뒤, 위로 이어지던 계단은 끊겼다. 저 천장의 구멍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벽을 기어오르는 수밖에 없었다.

“고통스러울 거야. 손톱은 다 부러지고, 피가 흐르겠지. ‘그냥 이곳에 남을걸.’ 하고 몇 번이나 후회하게 될 거야.”

“…….”

“정말로 갈 거야? 날 혼자 두고?”

그 시험하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어디선가 들었던 오르페우스 얘기를 떠올렸다. ‘여보, 뒤를 돌아봐요. 뒤돌아 나를 바라봐요.’ 환청처럼 그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그러나 나는 오르페우스가 아니었고, 뻔히 아는 규칙을 어길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았다. 뒤에서 나를 끌어안는 힘이 있다면 모를까, 이곳에 매여 있을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너 기다리는 거 잘한다며.”

놈은 위를 향해 올라가는 내 발목을 충분히 붙잡을 수 있을 텐데도 끝끝내 그러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물을 뿐이었다.

“그러면 말해 줘. 나는 언제까지 널 기다려야 해? 언제까지 너를 그리워하고, 갈망하고, 사랑해야 해?”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이따금 토끼 굴에 굴러떨어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너무 괴롭고 힘들고 고통스러울 땐 다시 이곳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무책임한 약속으로 놈을 고문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잔인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네가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을 때까지.”

그렇게 답한 것은 그래서였다. 판도라의 상자 가장 밑바닥에 희망이 깔려 있다면 놈은 그 상자를 평생 지고 갈 것을 알아서, 그 어떠한 여지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놈은 도리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자기를 기다려야겠네.”

감히 영원을 기약하는 것치고 그 말의 무게는 지나치게 산뜻했다. 덕분에 나도 불퉁하게 대꾸할 수 있었다.

“그러든가.”

그게 우리의 작별 인사가 될 걸 알았다. 놈의 목소리는 더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벽을 기어오르는 데 집중했다. 놈의 예언은 그대로 실현됐다. 손톱은 다 부러지고, 피가 흐르고, ‘그냥 그곳에 남을걸.’ 하고 몇 번이나 후회했다. 무엇보다 놈이 여전히 그 자리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나를 지켜보고 있을까 궁금해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위로, 위로, 더 높고 빛나는 곳으로. 그리하여 영영 닿을 일 없을 것 같던 빛이 어느새 내 코앞에 다다랐다. 손을 뻗었다.

그렇게 나는 잠에서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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