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y New Year
마침내 멈춰 선 곳은 물이 말라붙은 지 오래인 분수 앞이었다. 나는 그 분수대 위에 끼고 있던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고개를 들자, 세월과 함께 스러져 가고 있는 천사상이 보였다. 반쯤 부서진 그 조각상은 내 기억보다도 훨씬 작고, 초라하며, 볼품없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조각상의 받침대 부분에는, 먼지 쌓여 희미해진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나는 분수 안으로 기어들어 가서 조각상의 받침대를 손으로 조심스럽게 털어 냈다.
Tempus fugit, amor manet.
시간이 흘러도, 사랑은 남는다. 그 문구를 망연히 바라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까악 하고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까마귀가 분수대 위에 올려 두었던 보따리를 입에 물고 푸드덕거리며 날아오르려 하고 있었다. 안 돼. 서둘러 분수 밖으로 기어 나갔다. 그렇게 까마귀를 향해 손을 뻗은 순간…….
챙강,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 돼, 안 돼…….”
제풀에 놀란 까마귀가 물고 있던 천 자락을 놓치고 만 것이었다. 까마귀는 어디론가 날아가고, 병 안에 담겨 있던 수프는 그대로 땅바닥에 엎어졌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흙더미를 파헤쳤다. 그러나 아무리 두 손 가득 흙더미를 그러쥔다고 해도, 이미 쏟아진 수프가 되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아, 아아…….”
아아악! 그 단말마의 비명은, 아무도 들어 주는 이 없이 허공을 메아리쳤다. 그게 하염없이 비참했다.
분수에 적힌 글귀를 읽고 잠깐 딴마음을 먹은 게 들켜서 벌을 받는 걸까. 아니면 줄곧 나를 괴롭혀 온 세상의 순리라는 놈이, 그 찰나의 낌새를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고 내게서 아예 선택지를 앗아가려는 걸까. 그도 아니면, 원래 죽음이라는 게 다 이런 것인데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걸까.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어느 쪽이든, 전부 엿이나 먹으라지.
나는 수프가 쏟아진 자리의 흙을 한 움큼 쥐어 입 안에 욱여넣었다. 흙에서는 흙 맛이 났다. 그것이 못내 우스워 실성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웃을 때마다 채 삼키지 못한 흙이 턱을 타고 부스스 떨어졌다.
안 될 일이다. 나는 흙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퍽 하고 이마를 잘못 부딪치는 소리가 났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나는 게걸스럽게 흙을 먹어 치우는 데만 몰두했다. 정확히는 그 흙에 스며들었을 수프를, 놈으로 끓인 그 수프를, 그러니까, 놈을 말이다.
으적으적 짓씹으면서 생각했다. 그간 마셔 온 네 피에서는 비릿한 맛이 났는데, 이번에는 텁텁한 맛이 나는구나. 다른 무엇보다도 그 사실이 나를 못 견디게 했다. 나는 이제 알았다. 놈과 함께한 모든 곳이 찬란했던 게 아니라, 놈과 함께했기에 그 모든 곳이 찬란했던 것이다. 왜냐면 놈이 곧 나의 신이고, 나의 진실이며, 나의 빛이었으니까.
그러나 빛을 잃었다고 살아갈 필요가 없는 건 아니었다. 빛이 없는 세상이라면, 어둠에 익숙해지면 그만인 일이었다. 누군가 귓가에 속삭였다. 겁먹지 마, 사랑에 눈이 멀기를 두려워하지 마. 시간은 흘러도, 사랑만은 그 자리에 언제나 남아 있을 거야.
그렇게 나는 눈을 감았다.
*
“……야.”
“왜.”
“야야.”
“왜 불러, 자기야.”
“저거, 이제 슬슬 치워야 하지 않을까?”
나는 러그 위에 드러누운 채 발끝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는 자그마한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반짝거리는 장식을 매단 그 나무는 치울 때가 한참 지났는데도 꿋꿋하게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으응, 그럴까?”
내 말에 놈은 나무를 화분째 들어 올리더니 벽난로 쪽으로 다가갔다. 나는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 왜 밖이 아니라 그쪽으로 가는 건데?”
“그야, 장작 대신 때려고 그러지.”
“아냐, 됐어. 그거 도로 내려놓고 이리 와.”
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더니 벽난로 근처에 화분을 내려놓았다. 벽난로 위에는 상했을 것이 분명한 우유 한 잔과 먼지 쌓인 쿠키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놈과 나의 양말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것들도 치워야 하는데 언제 치우지. 내가 ‘으으.’ 하고 앓는 소리를 내자, 어느새 내 앞으로 온 놈이 내 허리에 제 팔을 둘렀다.
“자기야, 힘들면 굳이 치울 필요 없어. 안 치우고 저대로 놔둬도 돼.”
그리고는 쪽 하고 이마 위로 가붓한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나는 속절없이 놈의 품 안으로 무너져 내렸다. 사실, 이런 일이 오늘로 처음인 것도 아니었다. 요즘 들어서 나는 한창 무기력과 사투 중이었다. 내 행동 범위는 오로지 놈과 나의 신혼집, 그 거실 안으로 제한됐다. 하다못해 나는 침실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곳에 들어서려고만 하면 움찔하고 발걸음이 멎었다.
덕분에 내가 온종일 러그 위에 누워서 빈둥대고 있으면, 놈은 그 옆에서 뜨개질을 하거나 책을 읽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밖에 나간 게 언제였더라. 기억을 되짚어 보니 놈이 준 반지를 잃어버렸다는 걸 깨달았을 때였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아서 집 주변을 온통 헤집고 다녔지. 그때 갑작스레 내 손목을 붙잡는 손이 있어 나도 모르게 확 쳐 내 버렸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그 정체는 다름 아닌 놈이었지만. 나는 네 손이 너무 차가워서 그랬노라 어물어물 변명했다. 원래 체온이 높은 놈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진 걸 보자 놈이 얼마나 나를 찾으러 다녔는지 짐작이 갔다.
‘돌아가자, 자기야. 반지 따위는 얼마든지 잃어버려도 괜찮아.’
‘그렇지만, 중요한 거 아니었어?’
‘이제는 쓸모가 없어졌잖아. 정말로 중요한 건, 이 안에 있으니까.’
놈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내 가슴팍을 가리켰다. 그 안에는 두근두근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 고동 소리에 나는 내가 왜 그 반지를 찾으려 그토록 헤맸는지 잊어버렸다. 왜 그 반지가 중요한 것인지도 잊어버렸다.
‘그러니 함부로 내 곁을 떠나지만 마.’
내가 그 말에 뭐라고 대꾸했더라. 다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았던 눈사람과 눈 천사 자국은 기억났다. 아마도 그 눈사람은 영원히 혼자일 테고, 그 눈 천사 자국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테지. 녹아내리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채로, 그렇게…….
퍼뜩, 상념에서 깨어난 것은 똑똑 하고 규칙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기이하게도 소리는 현관이 아닌 창문가로부터 들려왔다.
“야, 여기 잠깐만 있어 봐.”
어디 딴 데 가지 말고. 잠깐 떨어지는 것인데도 나는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다. 놈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나는 내 허리를 두르고 있던 놈의 팔을 치우고 창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까마귀 한 마리가 발에 소포를 매달고 있었다. 이런 걸 보낼 사람이 없는데, 누굴까. 소포를 이리저리 둘러봐도 보낸 사람의 이름은 없고, 다만 포장지 한 귀퉁이에 이렇게 적혀 있을 뿐이었다.
Happy New Year!
그렇다면 새해 선물이라는 건데……. 나는 익숙하게 검지로 까마귀의 머리를 긁어 주며 바스락거리는 포장지를 풀어 헤쳤다. 그 안에 든 것은 내 손바닥보다 조금 큰 크기의 거울이었다. 그걸 들어 올리자, 거울에는 집 안의 풍경이 반사되어 비쳤다. 오래된 폐허처럼 다 무너져 가는 정원에 홀로 남은 나.
“자기야, 괜찮아?”
“……어?”
순간 거울을 놓쳤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거울은 산산이 조각났다. 과연 그 순간 손에서 힘이 빠진 것이 의도적인 게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들어 뒤늦게 창문 쪽을 바라봤다. 그러나 까마귀는 이미 날아간 듯 온데간데없고, 차가운 바람만이 끊임없이 불어닥칠 뿐이었다. 그 너머로는 하늘을 수놓는 녹색의 망토 자락, 아우로라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소포를 보낸 이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응, 괜찮아.”
아마 그녀라면, 내가 집 안의 거울이란 거울은 모조리 깨부순 것을 알면서도 부러 이런 선물을 보내온 것일 터였다. 하여튼 그 빌어먹을 마녀, 고약한 취향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나는 툴툴거리며 창문을 닫았다. 아니, 깨진 유리 조각이 위험하다고 놈이 대신 닫아 줬던가? 어쩌면 그 누구도 창문을 닫지 않아서 그 창문은 영원토록 휑하니 열려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우리 춤출까?”
“갑자기?”
“기분전환이 필요해졌거든.”
나는 노래를 틀 만한 것을 찾아 온 거실을 헤맸다. 그러자 놈이 어딘가에서 낡은 오르골 하나를 찾아 꺼내 주었다. 오르골 뚜껑을 열자 나직한 음악 소리와 함께 두 인형이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볼품없는 음악이었지만, 연인은 행복해 보였다. 그걸로 충분했다.
나는 놈에게 손을 내밀었다. 놈은 웃으면서 그 청을 받아들였다. 한쪽 손은 놈의 날개뼈 위에 얹고, 한쪽 손은 놈의 손을 꼭 쥔 채로. 흘러나오는 선율에 맞춰 우리는 발을 옮겼다.
렌탄도, 데크레셴도, 소그난도, 그리고, 모렌도.
음악 소리는 점점 잦아들었고, 우리의 몸짓은 점점 느려져 갔다. 그래도 괜찮았다. 고장 난 오르골의 늘어지는 음악은 영원히 되풀이될지언정 결코 멈추지는 않을 테니까.
“있잖아, 돌이켜 보니까…… 나는 네 입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 했으면서, 정작 내가 먼저 사랑한다고 고백할 생각은 못 했더라고.”
나는 놈을 향해 속살거렸다. 물론 놈에게 먼저 사랑한다고 고백할 생각을 하지 못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테지만, 더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올려다본 놈의 얼굴은 꼭 도자기 인형처럼 매끈하고도 완벽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혀끝에 맴도는 텁텁한 흙의 맛은 영원히 가실 일이 없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너를 사랑해.”
“…….”
“내 생을 다 바쳐서라도, 이 세상의 모든 걸 등져서라도, 너를 사랑해.”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그 언제보다도 환하게 웃어 보였다. 비로소 고대해 마지않던 파국이었다. 우리의 지난한 사랑은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썩지도 못한 채 서서히 잊혀 갈 것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시간은 흘러도 사랑은 남고, 나는 영원히 사랑하는 이로 남을 것이니.
무릇 세상은,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