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Give It to Someone Special
보글보글, 어디선가 물 끓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물보다는 좀 더 진득한 액체가 끓는 소리였다.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렇다고 해서 눈을 뜨고 싶지는 않았지만, 누군가가 자꾸 내 머리카락 끝을 잡아당기는 통에 나지막이 신경질을 부렸다.
“조금만 더 잘게, 조금만…….”
나는 자연스럽게 이어질 상황을 생각했다. 만약 이다음에 중요한 일이 없다면 놈은 조금만 더 자겠다는 잠투정을 받아 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줄 테고, 일이 있다면 나를 깨우기 위해 온갖 애교를 부릴 터였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한참을 기다려도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느껴지지 않았다. 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일도 없었다.
아, 맞다. 놈은 죽었지.
눈을 떴다. 머리맡에는 애꾸눈의 까마귀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마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긴 게 녀석인 모양이었다. 다행인 점은, 이번엔 까마귀가 꽤 정상적인 상태로 보인다는 점이고, 불행인 점은, 녀석이 그저 정상적인 까마귀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여전히 그에게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다는 말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 위에서 바닥으로 포르르 내려간 까마귀는 통통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발자국 걷다가 나를 뒤돌아보는 것이, 마치 자신을 따라오라는 것 같았다.
까마귀를 따라 방문을 나섰다. 녀석이 안내한 곳은 부엌이었다. 그곳에는 녹색 망토를 입고 있는 사람이 냄비를 휘휘 젓고 있었다. 내가 들었던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와 내가 맡았던 고소한 냄새 모두 저 냄비 속에서 비롯된 모양이었다.
“거기,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렴.”
녹색 망토는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국자로 의자 쪽을 가리켰다. 나는 얌전히 의자를 하나 빼서 앉았다. 까마귀가 푸드덕하고 녹색 망토의 어깨 위로 날아올랐다.
“너도 저기 가서 앉아 있으렴. 깃털이 빠져서 수프에 들어가잖니.”
그 말이 마뜩잖은지 까마귀는 녹색 망토의 어깨를 부리로 몇 번 쪼다가 결국 내 앞의 테이블 위로 내려앉았다. 뒤뚱거리며 테이블 위를 걷는 까마귀의 목덜미를 검지로 슬슬 쓰다듬었다. 내 손길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녀석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나, 당신이 누군지 알아.”
“그래? 내가 누구일 것 같은데?”
녹색 망토는 일말의 동요도 보이지 않고 태연했다. 내가 정말로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든 아니든 개의치 않다는 태도였다.
“아우로라, 맞지?”
녹색 망토는 수프를 마저 젓다가 이내 탕탕하고 국자를 냄비에 두어 번 털었다. 그리고는 비로소 내 쪽을 돌아보며 답했다.
“그래, 그것도 나를 부르는 이름 중 하나긴 하지.”
“…….”
“참고로 까마귀는 나를 바바야가라고 불렀단다. 원래 여신과 마녀는 종이 한 장 차이거든. 그러니 너도 아우로라든 바바야가든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렴.”
바바야가라고 한다면, 까마귀에게 까마귀 가면을 빌려주고 내기를 했다는 바로 그 마녀였다. 그제야 집채만큼 커져서 이성을 잃은 까마귀가 왜 녹색 망토의 앞에서는 얌전하게 굴었는지 이해가 갔다.
“그럼, 까마귀가 저 꼴이 된 게 내기에서 져서 그런 거야?”
“아니, 내기는 아직 계속되고 있단다.”
“그렇다면 왜…….”
“글쎄, 들어 보렴. 까마귀가 ‘세상의 끝’에 처박힌 네게 도움을 주기 위해 그 섬을 차지하고 있던 악마와 덜컥 계약을 해 버렸지 뭐니. 우리가 쓴 계약서에는 분명 중복 계약 금지 조항이 있었는데 말이야. 결국, 까마귀는 자그마한 페널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단다.”
아우로라의 말은 마치 까마귀가 혼자 멍청한 짓을 저질렀고, 그녀는 모든 걸 절차대로 처리했을 뿐인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마냥 그 말을 믿을 순 없었다. 아우로라와 까마귀 사이의 내기에서 까마귀가 페널티를 받았다는 건, 결국 지금 상황이 그녀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나는 까마귀가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아마, 까마귀는 다 알면서도 스스로 불리해지는 길을 택했을 터였다. 나는 저택에서 다리 잃은 마법사에게 쫓길 때 나타났던 붉은 글씨들을 떠올렸다. 나를 위해 고작 그 몇 글자를 적어 주려고, 까마귀는 막심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렇지만 까마귀가 저 꼴이 되었으니 아무래도 내기는 정상적으로 진행되기 어려워졌지. 그래서 내가 대신 온 거란다. 나는 밤의 장막을 걷는 새벽의 여신이니까, 사람들에게 진실의 빛을 나눠 주는 게 내 일이기도 하거든.”
“……아무런 대가 없이 진실을 알려 준다고?”
“설마, 그럴 리가. 본디 진실이란, 듣는 것 자체로 그 대가를 수반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아우로라는 푹 눌러쓰고 있던 녹색 망토를 뒤로 젖히며 말했다. 마침내 드러난 그 얼굴은 어린아이의 것이었다가도, 눈 한 번 깜빡이는 순간에 늙은 사람의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변검처럼 얼굴이 뒤바뀌는 와중에도, 그녀가 마치 순진한 것을 보는 양 나를 향해 웃고 있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었다.
“이따금 인간들은 진실을 알고 나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처럼 믿곤 하더구나. 그러나 진실은 마냥 아름답고 상냥한 존재가 아니야. 어둠 속에 살던 인간들에게 갑자기 나타난 빛은, 그들의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존재일 뿐이란다.”
“…….”
“그럼 얘야, 진실을 맞이할 준비는 됐니?”
그 말에 떠오른 것은, 내일이 찾아오는 것이 무서워 떠오르는 해의 반대 방향으로 달린 남자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남자가 내일을 맞이할 준비가 됐든 안 됐든 간에 결국 새벽은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그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우선, 네가 ‘까마귀’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 네가 생각하는 그 작은 아이가 아니라는 것부터 시작해 볼까.”
아우로라는 검지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다가, 이내 산뜻한 말투로 말했다.
“너도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잖니.”
“……놈이 나를 살해한 장본인을 가만뒀을 리 없다고는 생각했지.”
“심지어 그 아이는 도망치지도 않았단다. 그저 네가 죽은 직후, 놈의 손에 무참히 살해당하기를 택했어.”
멍청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우리가 세운 계획 중에는 놈을 죽인 후 도망갈 수십 가지의 탈출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그중 단 하나도 실행하지 않고 무력하게 포기하길 택한 것이었다. 물론 그 계획이 어그러진 원인은 결국 나 때문이었으므로, 내게 그 아이를 비난할 자격은 없었지만.
“헷갈리니까 이제부터는 네 가슴에 칼을 꽂은 장본인이자 이제는 죽어 버린 그 아이를 ‘진짜 까마귀’라고 하고, 네가 되살아난 다음에 만난 까마귀를 ‘가짜 까마귀’라고 하마.”
“그럼, 가짜 까마귀의 정체는 뭔데?”
나는 흘긋 테이블 한구석에 몸을 말고 자리를 잡은 까마귀를 쳐다봤다. 태평하게 고개를 꾸벅거리며 조는 그 모양새가, 제 얘기를 하는 줄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자고로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연어가 있기 위해선 폭포 또한 존재해야 하는 법이지.”
“……갑자기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연어가 너라면, 폭포는 까마귀란다. 네가 순리를 거슬러서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면, 까마귀는 너를 다시 원래 있던 자리에 되돌려 놓으려는 순리 그 자체지.”
인상을 찌푸렸다. 고작 저 비루먹은 새가 실은 그런 거창한 것이라고? 그러나 단박에 부정하는 말을 내뱉지 못한 것은, 그간 까마귀가 내게 끊임없이 순리를 따르라고 종용한 기억 때문이었다.
“네게 좀 더 와닿게 설명해 주자면, 너는 운명의 손아귀로부터 도망친 망령이고, 까마귀는 널 다시금 죽음으로 인도하는 저승사자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럼, 왜 그동안 가짜 까마귀는 진짜 까마귀 행세를 했던 건데?”
나는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 하나를 떠올렸다. 저승사자는 죽은 사람이 살아생전 가장 좋아한 사람의 얼굴로 나타난다는 이야기. 그러나 만약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까마귀는 까마귀가 아니라 놈의 형상으로 날 찾아왔어야 옳았다.
“진짜 까마귀 행세를 했던 게 아니야. 저 불쌍하고 작은 새도 정말 자기가 그 아이인 줄로만 알고 있단다.”
아우로라의 말은, 결국 까마귀도 진실은 알지 못한 채 주어진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내 의문은 여전했으므로 나는 아우로라를 향해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러니까, 왜 하필이면 까마귀였던 건데?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할 수도 있었잖아.”
“하필이면 까마귀였던 게 아니라, 까마귀일 수밖에 없었던 거지. 그건 까마귀가 오로지 네 부활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 네가 되살아남과 동시에 태어난 것이기 때문이란다.”
나는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너는 네가 되살아난 다음, 처음 본 얼굴을 기억하니?”
“그야 당연히, 놈의 얼굴이지.”
“아니, 틀렸단다. 잘 생각해 보렴, 정말로 네가 깨어나서 처음으로 본 얼굴이 놈의 얼굴인가.”
눈을 깜빡였다. 아우로라의 말에 불쑥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내 손 아래서 뭉개졌던 코, 부릅떠진 눈, 그 원망 어린 시선, 목이 댕강 잘려져 있던 머리……. 그리고 검은색 머리카락과 한쪽 눈의 흉터까지.
“나와 함께 시체 더미 아래로 굴러떨어졌던 그 머리.”
그에 정답이라는 듯, 아우로라가 빙글 웃어 보였다. 하, 기가 차서 마른세수를 했다.
“그 머리가, 까마귀의 머리였다고.”
“그래, 그게 네가 되살아난 직후 처음으로 목격한 타인의 얼굴이었단다. 그래서 까마귀가 그 얼굴을 하게 된 거야. 만약 네가 되살아난 뒤 처음으로 본 게 거울이었다면, 지금쯤 까마귀는 네 얼굴을 하고 네 흉내를 내고 있었겠지.”
“…….”
“참으로 기가 막힌 우연이지 않니? 놈이 실수만 저지르지 않았어도, 네가 처음으로 목격한 얼굴이 까마귀의 것이 될 일은 없었는데 말이야.”
뭐? 이건 또 무슨 소리람. 한쪽 눈가를 일그러뜨리며 아우로라를 노려보자,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네 육체를 구성하기 위해 총 일곱 명의 시체를 엮은 건 알고 있지?”
“그래, 차라리 몰랐으면 하는 얘기였지.”
분명 머리, 몸통, 두 팔, 두 다리, 그리고 심장, 이렇게 일곱 부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걸 여기저기서 가져와 누덕누덕 기운 결과물이 지금의 내 몸이라고 그랬지.
“그중 머리는 까마귀의 것을 쓰자고, 네가 ‘음침로브’라 부르는 흑마법사가 제안했단다."
“…….”
“사실, 그건 꽤 합리적인 제안이었지. 쉰 명의 제물 중에서도 그 일곱 명은 아주 신중하게 선택되어야 했거든. 왜냐하면, 이 주술은 제물로 바쳐지는 쪽과 제물을 받아들이는 쪽, 양측의 합의를 전제로 이루어지니까.”
“그렇다면 이상하네, 나는 한 번도 그 주술에 동의한 적 없는데 말이야.”
그러자 아우로라가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그 눈이 마치 ‘정말?’ 하고 묻는 듯했다.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매번 말은 그렇게 해도, 내 심장 가장 안쪽을 파헤쳐 보면 그곳엔 살고 싶다는 발칙한 욕망이 있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제물로 바쳐지는 자들이 너를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도, 모두 그 합의라는 조건 때문이란다. 특히나 그 일곱 명은 너를 위해 기꺼이 신체 일부를 내어 줄 정도로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어야 했지.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건 직접 겪어 봐서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녹아내린 오른손, 그걸 다시 복구시키기 위해 내가 어떤 짓을 해야 했는지 떠올리면 지금까지도 진절머리가 났다.
“그런 이유에서 까마귀의 머리를 갖다 쓰자는 건 썩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어. 너도 알다시피, 그 아이는 너를 제법 좋아했으니까. 그런데 그 제안에 반대한 건, 다름 아닌 놈이었단다.”
그래, 놈이 아니면 누가 그랬겠나 싶다. 심지어는 놈이 반대한 이유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절대 사사로운 분노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건, 지독한 독점욕 때문일 게 분명했다. 나조차 너를 죽여 보지 못했는데, 너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내가 되어야 하는데. 나 말고 너를 죽인 누군가의 육체로 다시 너를 빚는다는 건, 놈에겐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테다.
“그래서 놈은 결국 네 원래 머리를 다시 네 머리로 쓰기를 택했어.”
그 또한 전혀 놀랍지 않은 얘기였다. 내 시체의 머리가 없어진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끝끝내 놈이 내 머리를 어디에다가 썼는지 얘기를 안 해 주더니, 정말로 팔아먹은 건 아니라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까.
“기뻐하지 말렴.”
“……당신, 독심술도 쓸 줄 알아?”
“굳이 독심술을 쓰지 않아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은 일이지.”
읽기 쉬운 사람이라 죄송하게 됐네요, 내가 입술을 비죽이고 있으니 아우로라가 가만 눈을 맞춰 오며 말했다.
“내가 네게 기뻐하지 말라고 한 이유는, 그게 놈이 저지른 가장 치명적인 실수이며,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고, 모든 비극의 시초기 때문이란다."
“……어째서 그게 그렇게 되는데?”
사자소생술에 원래 자기 머리를 재활용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그러나 잠시간의 침묵 끝에 아우로라가 내놓은 답은, 내가 완전히 예상치 못했던 것이며 동시에 내 정곡을 찌르는 말이기도 했다.
“왜냐면, 너는 너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거든.”
‘제물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지.’ 아우로라가 중얼거렸다. 덜컥 말문이 막힌 나를 두고 그녀가 물었다.
“얘야, 너는 신이 결코 누리지 못하는 인간만의 특권이 뭔지 아니?”
“이 세상에 신이 누리지 못하는 것도 있어?”
“그래, 예를 들자면 열등감, 소유욕, 독점욕, 집착……. 그 모든 걸 통틀어 ‘질투’라는 한 단어로 묶을 수 있겠지. 그건 아주 오래된 원죄고, 인간들은 그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 없는 숙명을 타고났단다.”
“…….”
“그리고 놈 또한 예외일 순 없었지. 놈은 질투에 사로잡혀 모든 일을 망쳤단다. 그게 놈이 저지른 단 하나의 실수였어.”
사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가장 처음 떠오른 생각은, 놈이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놈의 비인간적인 완벽함을 알았다. 그는 실수조차 계산적으로 저지르는 사람이었다.
“너는 인정하기 싫을 수도 있겠지. 너는 마치 놈을 신처럼 숭상하니까. 그런데 그거 아니. 보다 신에 가까운 처지에서 봤을 땐, 놈도 어디까지나 한낱 인간에 불과하단다.”
그렇게 말하는 아우로라의 얼굴에선 비웃음과 비슷한 그 어떠한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그녀가 나를 가소로워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비단 나뿐만 아니라 서로에게서 신과 구원과 나락을 찾는 모든 인간을.
“아킬레스에게도 발뒤꿈치가 있듯 놈에게는 네가 있지. 오직 너와 관련된 일에만 놈은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이고, 다분히 인간적인 결정을 내렸단다.”
“그건, 그렇지만.”
“놈은 손수 네 시체로부터 머리를 잘라 내면서도 자신이 영리한 줄로만 알고 있었을 테지. 자기가 기막힌 꾀를 낸 줄 알고. 그러나 그게 결국 모든 일을 어그러지게 만들 줄은 몰랐을 거야.”
“…….”
“만약 놈이 얌전히 까마귀의 머리를 갖다 썼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겠지. 어쩌면 너희 둘은 아무런 역경과 고난 없이 마냥 행복했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어쩌겠니, 놈이 인간인 것을. 예정된 행복을 한순간의 실수로 놓쳐 버리는 건 모든 인간이 저지르는 짓이지.”
나는 아우로라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신이 될 수도 있었던 놈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린 게 나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놈에게 들은 아우로라의 얘기를 떠올렸다. 아우로라는 자신이 사랑한 인간을, 자신의 유일한 약점을 골방 속에 처박아 버렸다. 아무도 그를 해칠 수 없게, 다만 자신만이 들여다보고 예뻐할 수 있도록. 그런 게 바로 신의 선택이라는 것이겠지.
반면에 놈은 나와 끊임없이 갈등하고, 싸우고, 쫓고, 쫓기기를 택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그는 나를 인간 대 인간으로, 대등한 존재로 마주하기 위해 직접 계단의 아래쪽으로 걸어 내려왔다. 나는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고는 음습하게 기뻐하고, 위선적으로 슬퍼했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놈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쉬이 납득하기에 아우로라의 말에는 분명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나는 그중 한 가지를 지적하고 나섰다.
“만약에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러면 내 머리도 오른손과 함께 줄줄 녹아내렸어야 맞잖아. 그런데 내 머리는 멀쩡했어.”
“정말?”
순간 대답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건 내가 예상했던 그 어떠한 반응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내 대답을 재촉하듯 재차 물어 왔다.
“정말 네 머리가 멀쩡했을까? 그렇게 믿니?”
“…….”
“글쎄, 나라면 그러지 않을 것 같구나. 왜냐면 인간이 유일하게 스스로 볼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신체 부위가 바로 뒤통수거든.”
그 말에 나는 정말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오른손이 녹아내렸을 때, 놈이 머리를 말려 줬었지. 그때 아무렇지 않은 척 내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 주면서 놈도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깨달았을 게 분명했다.
“그래, 고작 오른손이 녹아내린 정도로 놈이 그렇게 심각하게 굴었을 리가 없잖니. 만약 그대로 놔뒀으면 정말 네가 말한 대로 네 머리도 줄줄 녹아내리는 꼴을 볼 수 있었겠지만, 놈은 순순히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았지.”
“……놈이 또 무슨 짓을 저질렀는데?”
“너도 네 몸의 붕괴를 막는 법 정도는 알고 있잖니.”
아우로라의 말에 내가 처음 떠올린 건 놈의 타액이나 혈액이나 정액을 섭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굳이 따지자면 꼼수에 가까운 방법이었다. 모범 답안은 아무래도, 내게 제물로 바쳐진 시체들을 먹어 치우는 것이겠지.
“놈이 네게 주고 간 수프를 기억하지?”
그래, 그 기이하게도 비릿한 맛이 나던 수프. 그건 잊으려야 잊을 수도 없었다.
“그 재료를 알고 싶어 했잖니.”
“이제는 별로 안 궁금해졌는데.”
“까마귀였단다.”
한 박자 늦게 귀를 틀어막았다. 나는 방금 아무것도 못 들은 거다. 그러나 아무리 귀를 틀어막아도, 진실을 알려 주는 여신의 목소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저기 앉아 있는 가짜 까마귀 말고, 진짜 까마귀 말이야. 놈의 손에 죽은, 그리고 네 지금의 머리를 대신할 뻔한 그 아이의 몸. 그게 수프의 재료였어.”
“…….”
“마침내 진실을 알았는데도 별로 기뻐 보이지 않는구나. 그런데 어쩌지, 아직 본론은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말하는 여신은 묘하게 즐거워 보였다. 아우로라는 몹시 우아하고 고즈넉한 몸짓으로 내게 손을 뻗더니, 귀를 꽉 막고 있는 내 두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리고는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그걸 붙잡아 떼어 내더니, 내 귀 옆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붙였다. 그리고는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얘야, 네 머리의 어디 한 군데가 고장이 났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
“……이미 확신하고 있는 목소리네.”
“네가 그걸 몰랐을 리가 없어. 그저 모른 척하기를 택했을 뿐. 너만 입 닫고 있으면, 아무런 문제 없다는 듯 그렇게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말이야.”
그래, 내가 내 기억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걸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다만 아우로라의 말처럼, 될 수 있는 한 구석으로 미뤄 두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러나 진실을 영원히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알량한 마음이 모든 걸 꿰뚫어 보는 신의 앞에서 낱낱이 파헤쳐진 순간, 나는 이제 그 무엇도 더는 미뤄 둘 수 없는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네 머리가 고장 난 이유, 그건 네가 까마귀 수프를 먹은 부작용이란다. 모든 일엔 언제나 대가가 따르거든. 예를 들어, 지나친 자책과 자기혐오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과거를 잊어버려야 하는 것처럼.”
“그래서, 결국 내 머리가 무너지는 대신 내 기억에 문제가 생긴 거다?”
“혹은, 그냥 까마귀 고기를 삶아 먹어서 깜빡깜빡하게 된 걸 수도 있지만.”
잔인한 농담이었다. 내 싸늘한 반응에 아우로라는 ‘왜, 인간들은 그런 표현 자주 쓰지 않니?’ 하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처음으로 네가 무언가를 잊어버렸던 순간을 떠올려 보렴.”
“……음침로브를 만났을 때, 분명 의심 가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어.”
“그보다는, 그 수프를 마신 바로 직후의 얘기란다. 네가 꾼 꿈에서 말이야.”
맞아, 그랬다. 그러고 보니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를 의식하자마자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 왔다. 내 안의 목소리가 물었다. 너,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어? 부모님 이름은 댈 수 있겠어? 까마귀의 이름은? 왜 ‘세상의 끝’의 저택 안에서 놈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던 건데? 혹시, 너 자신의 이름은 알고 있어?
“고작 이름 몇 개 까먹는 걸 가지고 뭔 대수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름이라는 건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단다. 이름은 곧 한 개체의 정체성이고, 다른 개체와의 구분점이라고 할 수 있거든.”
“그렇게 뜬구름 잡듯 말하지 말고, 제대로 설명해.”
“글쎄, 어떻게 말해야 좋을까……. 생각해 보렴. 만약 네 앞에 수많은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면, 너는 그 나무들을 전혀 구분할 수 없겠지. 하지만 만약 네가 그중 한 라임 오렌지 나무에 ‘밍기뉴’라는 이름을 붙여 줬다면, 너는 비로소 그 개체를 인식하게 될 거야.”
아우로라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까마귀의 머리를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만약 까마귀가 한 무리의 까마귀 떼 틈으로 섞여 들어간다면, 나는 과연 내가 찾는 까마귀가 누군지 알아차릴 수 있을까?
“그게 바로 문제의 본질이란다. 너는 네가 마주친 모든 ‘놈’이 같은 개체라고 확신할 수 있겠니?”
“……그런 어쭙잖은 말로 날 속이려 들 생각 마. 내가 놈 하나 못 알아볼 정도로 바보인 줄 알아?”
“혹은, 이런 생각은 해 본 적 없니? 놈은 네가 아카데미의 탑 밑으로 밀어 떨어뜨렸을 때, ‘세상의 끝’으로 가는 여정 중 바닷속으로 빠져 버렸을 때, 그 모든 때마다 죽어 버렸던 거야. 다만 매번 새로운 ‘놈’이 태어나서 그 자리를 메우는 거지. 마치 게임 속의 주인공이 모험 중에 죽어 버려도, 게임을 다시 시작하면 어느새 똑같은 주인공이 모험을 이어 가고 있는 것처럼.”
아랫입술을 잘근 지르물었다.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었다. 해 봤을 리가 없었다. 내리깐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동안 막연히 놈이라면 어떻게든 내게 돌아오겠거니 하는 절대적인 믿음만이 있었다. 그 ‘어떻게든’이 정말로 어떻게 가능했던 건지는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게 바로 이름을 빼앗긴 개체의 말로란다. 하나의 존재에서 하나의 개념으로 전락하게 되는 거지. 이름이 없는 세상에서 산다는 건 그런 거야. 예를 들어, 밍기뉴에게 이름이 없어진다고 생각해 보렴. 그럼 그는 한 그루의 나무가 될 뿐이겠지.”
“그게, 뭐 어쨌다고.”
“달리 말하자면, 바로 그 순간부터 이 세상에서 ‘밍기뉴’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하나의 나무만이 남게 되는 거란다. 밍기뉴가 죽은 건 아냐. 다만 하나의 존재에서 하나의 개념으로 격하됐을 뿐.”
“…….”
“너의 세상에서 이름을 잃은 것들을 떠올려 보렴. 까마귀는 순리 그 자체를 상징한다고 이미 말해 줬었지. 그렇다면, 놈은 어떨 것 같니?”
놈은 어떨 것 같냐니, 그 질문에 나는 까마귀의 정체를 설명하면서 아우로라가 들먹인 비유를 떠올렸다. 연어가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선 폭포가 필요하다. 연어가 나고, 폭포가 까마귀라면, 그렇다면 놈은…….
“연어의 회귀 본능, 쯤이려나.”
“그래, 네가 순리를 거스른 존재라면 놈은 네가 순리를 거스르게 만드는 힘이지. 놈이 아니라면 너는 이 세상에 존재하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놈은 네가 이 세상에서 맺고 있는 유일한 관계이자 유일한 연결 고리고, 동시에 널 이 세상에 묶어 두고 있는 모든 사랑과 집착을 대표하지.”
그건 아주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내 심장 안의 작은 반지, 그 정체를 알게 됐을 때 내가 뭐라고 생각했던가. ‘놈은 마치 나에 대한 사랑과 집착을 인간의 형태로 빚어 놓은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가.
“혹시 네가 살고 싶어 하는 모든 순간마다 놈이 너를 구하러 오지 않았니? 그건 놈이 결국 너의 생존 의지를 상징하기 때문이란다. 그러니까 그 어떤 괴물도, 두려움도, 놈 앞에서는 종적을 감추는 거야.”
“그래서 까마귀가 놈이 없을 때만 나타날 수 있었던 거고?”
아우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나는 오래된 기억 하나를 끄집어냈다. 처음 까마귀가 등장한 날,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춘 까마귀를 보면서 놈이 혹시 그걸 알아차리진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결국 놈은 까마귀의 방문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굴었고, 나는 그걸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아우로라의 말대로라면, 놈이 까마귀의 방문을 눈치채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면 까마귀는 애초부터 놈과 같은 공간에 존재할 수 없었으니까 말이다.
“‘세상의 끝’에서 마주친 아이도 빼놓을 수 없지. 네가 자꾸만 그 아이에게 이입한 것을 부정할 순 없을 거란다. 왜냐면 그 아이는 과거 한 순간의 너를 빼닮았으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는, 놈 대신 죽을 결심을 한 너를 말이다. ‘네 잘못이 아니야.’ 사실 그 말은, 과거의 네게 해 주고 싶은 말 아니었니?”
“…….”
“혹시 ‘세상의 끝’에 있는 나무에 아이가 묶어 둔 리본의 개수는 세어 봤니? 아이가 추모한 사람의 숫자 말이야. 그게 딱 쉰 개라는 사실을 네가 알아차렸다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그래서, 네 말은 그 모든 게 사실은 잘 만들어진 허상에 불과하다는 뜻이야?”
그러자 아우로라가 방긋 웃었다.
“아니, 그럴 리가.”
“방금까지 한 얘기랑은 사뭇 다른 말인데.”
“나는 네가 겪은 일을 부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단다. 다만, 이름이 없는 것들이 개념으로 전락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려 주고 싶은 것뿐이지. 그렇게 네가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면, 이후에 내가 보여 줄 갈림길에서 좀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갈림길, 좀 더 현명한 선택, 그 단어들로부터 묘한 불길함이 느껴졌다. 마침내 그 뜻을 물어보려 입을 열었을 때, 어디선가 쾅 하고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짓말이야! 모두 거짓말이라고!”
쾅.
“마녀는 거짓말쟁이야!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거라고!”
쾅.
소리가 난 쪽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두 다리를 잃은 마법사, 그가 창문에 들러붙어선 유리창을 매섭게 내리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렴, 이 집은 나의 영역이니 고작 마물 따위가 함부로 침입할 순 없을 거란다.”
쾅쾅 위협적으로 유리창을 내리치는 몸짓에도 아우로라는 그저 여유롭게 다리를 꼬았다. 그러나 그 굳은 입매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저건 대화를 방해받은 불쾌감 때문일까, 아니면, 마법사의 말에 찔리는 것이 있기 때문일까.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물론, 아우로라의 말은 단순히 거짓이라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그럴싸한 면이 있었다. 그러나 아우로라가 내게 어떤 사실을 알려 줬다는 건, 달리 말해 어떤 사실은 은폐했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자고로 의심해야 할 사람은 적이 아닌 아군이라고 했다. 나는 아직도 아우로라가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마법사는 유리창을 내리치는 것이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아예 까득, 까드득, 하고 손톱으로 유리창을 긁어 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끈질김에 나직이 혀를 차다가, 문득 떠오르는 의문에 창밖을 기어 다니는 마법사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쟤는 뭔데?”
“뭐?”
“내 세상에서 이름 잃은 것들은 개념으로 전락한다며, 그럼 쟤는 뭐냐고.”
창밖에서 나는 소음이 점점 심해지자, 아우로라는 벌컥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창문가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마법사의 눈앞에서 창문의 커튼을 내려 버렸다. 그녀가 입고 있는 망토의 색깔과 같은 짙은 녹색의 커튼이었다.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게 된 게 효과가 있었는지 소리는 점차 잦아들었고, 그제야 아우로라는 대화를 이어 갔다.
“너는 네 몸을 만들기 위해 바쳐진 일곱 명이 누구누구인지 알고 있니?”
불쑥 던져진 질문에 기억을 뒤적였다. 분명 두 팔은 부모님의 것을, 심장은 놈의 것을 썼다고 했지. 그리고 머리는 내 것을 썼다고 한다면……. 남은 건 몸통과 두 다리였다.
“참고로 몸통은 음침로브의 것을 썼단다.”
그래, 걔가 빠졌을 리 없지. 어쩐지 실내에서도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다 싶었더니 아예 몸통이 없는 걸 가리기 위함이었나보다. 나는 마지막에 내 발치로 굴러떨어진 음침로브의 머리를 떠올렸다. 정확한 장면을 보지는 못해 놈이 기어이 참수를 시켰으려니 짐작했는데, 어쩌면 그저 자연스러운 수순에 따라 몸통을 잃은 머리가 떨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두 다리뿐인데…….”
잠깐, 뭔가 기시감이 들었다.
“그래, 너 때문에 두 다리를 잃은 자. 그게 바로 저 마법사란다.”
그 말에 나는 잠시 아우로라가 농담을 하는 건 아닌지 의심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게 그 어떠한 우스갯소리나 농지거리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떠듬떠듬 반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저 마법사가 나 때문에 두 다리를 잃은 건 맞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차 위에서 벌어진 일이었어. 내게 두 다리를 바쳤다면, 처음부터 다리 없이 등장했어야 맞지 않아?”
“전혀 이상해할 것 없단다. 저 마법사도 가짜 까마귀와 비슷한 존재니까 말이다. 어차피 진짜는 이미 죽어 제물로 바쳐진 지 오래일 테니, 다리의 유무 따위야 큰 문제가 안 되지.”
“그리고 내게 두 다리를 바칠 정도로 나를 좋아한 사람이라기엔, 나는 전혀 모르는 얼굴인걸.”
“꼭 네가 기억하고 있는 사람만 너를 좋아하리라는 법은 없단다. 네가 스쳐 지나가듯 베푼 호의도 누군가에겐 삶의 구원이 될 수 있어.”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때문에 마법사가 내게 제물로 바쳐진 거라면, 내 호의는 그에게 삶의 구원은커녕 독이 됐을 뿐이다. 나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참고로 저 마법사가 사자소생술을 연구하는 집단에 들어간 것도,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였단다. 즉, 너를 되살리기 위해서였어. 그도 네게 무언가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거든.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놈과 음침로브에게 순서를 뺏겼지.”
“…….”
“결국, 그는 노선을 바꿨단다. 네 발목을 붙잡는 데 필사적인 쪽으로 말이지. 순리고 나발이고, 그런 건 그에게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야. 그저 네가 자신을 한 번만이라도 돌아봐 주는 것, 그게 저 마법사가 원하는 전부란다.”
나는 마법사가 내게 보이는 것이 적나라한 악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마법사는 직접 나를 죽이려고 한 적은 없었다. 다만 어떻게든 나를 뒤쫓거나, 내 주변인들을 해치는 데 관심이 있었을 뿐. 내가 간신히 헛웃음을 삼키는 동안, 창밖에서 나직한 흥얼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리 나오렴, 착하지, 나랑 놀자. 내가 눈사람도 만들어 줄 수 있어, 너 눈사람 좋아하잖아…….”
“뭐, 굳이 따지자면 저것이 상징하는 바는 암담한 현실이나 자기혐오 정도가 되겠지.”
“마녀는 믿을 사람이 못 돼, 마녀의 집은 숨을 곳이 못 돼. 마녀는 달콤한 과자로 너를 살찌워서, 가장 마지막 순간 한입에 너를 잡아먹을 거야.”
“처음에는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았을 거란다. 그저 자그마한 골칫덩이에 불과했을 뿐. 그러나 그걸 그냥 놔뒀더니 어떻게 됐니. 집요하고도 끈덕지게 네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더니 결국에는 놈을 해치는 지경까지 이르지 않았니?”
“너는 속고 있는 거야,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알면서도 속아 주는 바보가 되길 원하진 않잖아, 그렇지?”
“네가 무시하지 않으면, 저건 세상 끝까지 너를 쫓아올 거란다. 물론, 이미 세상의 끝을 넘어서까지 너를 쫓아왔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저 생생한 노랫소리를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어. 나는 이를 악물고 아우로라를 향해 짓씹듯 말했다.
“증명해.”
“무엇을?”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는 거, 거짓말을 하는 쪽은 저 마법사라는 거. 당신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 봐.”
당연하게도, 그 말에 아우로라는 코웃음을 쳤다.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늦지 않았니?”
“당신이 증명하지 않으면, 나는 저 마법사의 말을 무시할 수 없어.”
“얘야, 뭔가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나는 네게 나를 증명할 의무가 없단다.”
처음부터 의심의 씨앗은 뿌려져 있었다. 그를 싹틔운 것이 바로 마법사의 외침이었고. 그러나 아우로라는 자라나기 시작한 묘목을 짓밟기는커녕 되려 내가 혼란에 빠진 것을 기꺼워하는 모양새였다. 그도 그럴 게, 그녀는 올곧게 자라날 믿음을 위해 가지치기를 하는 정원사가 아니라 무성한 의심의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에 사는 마녀였으니까.
“솔직히 그렇게 따지자면 끝이 없지 않니? 내 말이 진실이면, 저 마법사의 말은 거짓이 될까? 혹은 저 마법사의 말이 진실이면, 내 말은 거짓이 될까? 둘 다 진실을 말하고 있거나, 거짓을 말하고 있지는 않을까?”
“시답잖은 말장난은 그만둬.”
“사실 이 모든 게 네가 죽기 전에 보는 일련의 주마등이 아니라는 보장은? 아니면 못된 환각 마법에 걸린 게 아니라는 보장은? 아니, 아예 처음부터 현실의 너는 아카데미의 침대 위에 누워서 그저 한 편의 악몽을 꾸고 있는 게 아니라는 보장은?”
“…….”
“너에게 증명을 해 보여야 할 사람은, 오직 너 스스로뿐이란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너 자신을 믿으렴. 네가 믿고 싶은 데까지가 진짜고, 네가 믿고 싶지 않은 데까지가 거짓이 될 테니 말이다.”
그렇게 간단할 리가 없어, 부정하고 싶었지만 사실 마음속 한구석에선 이미 아우로라의 말이 맞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그녀를 믿을지 다리 잃은 마법사를 믿을지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에 대한 책임도 오롯이 내가 져야 할 몫일 테고. 마치 놈을 믿을지 까마귀를 믿을지 선택했던 그때처럼 말이다.
“……그래서, 네가 보여 주겠다던 갈림길은 뭔데?”
“그래, 이제야말로 갈림길에 대해 들을 준비가 되었니?”
“우선 듣고 나서, 그걸 믿을지 말지 결정하겠어.”
아우로라는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여전히 수프가 끓고 있는 냄비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오목한 그릇에 그걸 퍼 올리며 말했다.
“너는 지금 이야기의 마지막 갈림길에 서 있단다. 네가 할 수 있는 선택 중 하나는, 바로 순리를 따르는 거야. 사실 너는 이미 한 번 까마귀를 따르기로 약속한 적이 있었지, 그렇지 않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로라는 테이블 위에 달칵하고 그릇을 올려놓으며 마저 말을 이었다.
“순리를 따르는 방법은 간단해. 네가 도로 죽으면 된단다.”
“…….”
“물론, 네가 놈의 심장을 품고 있는 한 너는 결코 네 뜻대로 죽을 수 없을 거야. 장담하건대, 네가 죽으려고 하는 매 순간 너는 번번이 방해받을 거란다.”
“그럼, 내가 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죽는 것조차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에 새삼 억울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다만, 그 방법이 궁금할 뿐이었다. 기차에서 까마귀가 미처 알려 주지 못한 그 방법이.
“놈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렴.”
“……뭐?”
그러나 아우로라가 마침내 내뱉은 말에, 나는 멍청히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까 사자소생술은 제물로 바쳐진 사람과 제물을 받는 사람의 합의하에 이루어진다고 말한 걸 기억하니?”
“그래, 그래서 제물로 바쳐진 사람이 나를 사랑해야 하는 거라며.”
“그걸 뒤집어 생각해 보렴. 네가 그들의 사랑을 거부하면 그만인 일이란다. 그것만으로 이 주술은 파기할 수 있어.”
아우로라는 아주 쉬운 일을 얘기하듯 말했다. 확실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죽기 위해 별별 일을 다 할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그에 비하면 입 한 번 벙긋하고 말 한마디 내뱉는 정도야 양반인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기꺼이 그렇게 하겠노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색색 숨만 몰아 내쉬었다.
“네가 놈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순간, 거부받은 놈의 심장은 네 몸 밖으로 토해질 거란다. 그렇게 너는 서서히 죽어 갈 테고, 모든 일은 순리대로 흘러갈 테지. 물론 그 모든 게 전부 없던 일로 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까마귀는 나와의 내기에서 이길 수 있을 거란다.”
“…….”
“그리고 너는, 마침내 놈의 이름을 기억해 낼 수 있을 테고.”
그 말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됐다. 맞아, 나의 죽음으로서 모든 일이 원래대로 돌아간다면 놈의 이름도 기억이 나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 그제야 비로소 퍼즐 조각이 들어맞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네가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면, 이후에 내가 보여 줄 갈림길에서 좀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아우로라가 했던 그 말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사실,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는 선택지였다. 까마귀도 마녀의 전서구가 될 일이 없고, 나는 이름 없는 세계에서 벗어나고, 어긋났던 톱니바퀴가 다시 들어맞듯 모든 건 순리를 따라갈 터였다. 단지 내가 놈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죽기만 한다면, 그러기만 하면…….
“그럼, 내가 죽는 선택지 말고 다른 선택지는 뭔데?”
그 물음에 아우로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정말로 거의 다 넘어갈 뻔했다. 다른 선택지는 듣지도 않고 결정을 내리려고 했으니까. 그러나 안 될 일이지, 나는 어쩐지 그것이야말로 아우로라가 의도한 바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시렴.”
아우로라는 표정 없는 얼굴로 내게 수프 그릇을 들이밀었다.
“그게 바로 네가 죽는 대신 계속 놈과 함께 살아가는 선택지란다.”
“이 수프 한 접시가?”
나는 의아한 얼굴로 수프를 내려다봤다. 별다른 건더기조차 보이지 않는 희멀건 수프에서는 고소한 냄새만이 올라올 뿐이었다. 순간, 어떤 강렬하고도 불길한 예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아니, 아니다. 질문을 바꿀게.”
“…….”
“이 수프에 뭐가 들어갔는데?”
아우로라는 한참이나 대답 없이 나를 바라봤다. 그게 마치 내게 이미 알고 있지 않으냐고 묻는 것 같았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말아 쥐었다. 아우로라는 여상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얘기 들어 본 적 없니?”
“무슨 얘기.”
“세상에 태어난 최초의 인간은 연인이었단다. 그들이 이 세상에 태어날 적, 신은 이렇게 말했어. 그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먹어 치운다면, 그들에게 불멸의 삶을 허락하겠노라고. 그렇게 그들은 산과 들과 바다를 누비며 온갖 산해진미를 먹어 치웠단다. 그들은 함께였고, 행복하고, 풍요로웠어.”
“그래서, 둘이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얘기야?”
“아니, 어느 순간 연인은 깨닫고 말았지. 자신들이 맛볼 수 있는 모든 걸 맛본 뒤에도, 자신들에겐 불멸의 삶이 허락되지 않았음을 말이야. 그들은 신이 자신들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어. 그 슬픔은 아주 깊어서 무릉도원의 복숭아조차 달래 줄 수 없었지.”
인상을 찌푸렸다. 뜬금없는 얘기였다. 나는 아우로라가 내 질문에 대해 대답하길 회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영문 모를 얘기를 멈추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얘기랑 지금 상황이 무슨 관계가…….”
“그러다가 마침내 연인 중 한쪽이 알아차렸단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맛보지 못한 게 있다는 걸. 그건, 바로 자신의 연인이었어.”
“…….”
“그렇게 ‘그들’은 ‘그’가 됐단다. 그는 자신이 혼자가 된 줄도 모르고, 뱃속에 품은 연인과 영원을 함께하는 것에 기뻐했지.”
그 말을 듣자마자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입을 벙긋해 무언가라도 말하거나, 하다못해 그 자리에서 수프 그릇을 뒤엎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눈을 깜빡이고 숨을 내쉬는 방법조차 잊은 사람처럼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만약 네가 그와 같은 결말을 맞기를 바라는 거라면, 이 수프를 마시는 걸 반대하진 않으마.”
“……만약 내가 이 자리에서 선택하지 않고 도망치길 택한다면?”
“글쎄, 도망을 간다면 어디로 갈 거니? 네가 돌아가야 할 곳, 너의 유일한 고향인 놈이 바로 이곳에 있는데.”
나는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 결국, 부정하고 싶던 사실을 정면으로 맞닥뜨린 셈이었다. 새삼 충격받을 일도 아니었다. 사실 그건 내가 이미 오래전에 맞닥뜨린 문제였으니까.
‘그대는 그런 자와 불멸을 함께할 수 있겠소? 없어지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고, 외면할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는. 오로지 그대만을 위한 물건처럼 그대의 입맛에 맞춰서 행동하는 자와 함께.’
나는 기차에서 까마귀가 한 말을 떠올렸다. 차라리 그때 확답을 주었더라면, 이렇게 극단적인 형태로 다가올 일은 없었을까.
“그래서, 네가 네 연인을 골방에 처박은 것처럼 나도 내 연인을 내 뱃속에 처넣어서 보관하라는 거야?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나만 아는 곳에 고이 간직해 두고 예뻐하라고?”
“‘그따위 불멸은 필요 없어.’ 그렇게 말하고 싶니? 그럼 이미 선택지는 나와 있어. 놈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구차한 삶 대신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면 그만인 일이지.”
빌어먹을 갈림길이었다. 이제 와서 보니 나의 생사 따위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놈을 사랑하면 놈을 먹어 치워야 하고, 놈을 먹어 치우지 않으려면 놈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니. 실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아우로라의 멱살을 틀어쥐지 않은 이유는, 그래 봤자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도망은 충분히 칠 만큼 쳤잖니. 더는 미룰 수 없어.”
다가오는 새벽의 빛을 무시할 수 없듯이, 어느새 이 비극적인 이야기의 결말이 바짝 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신인지 마녀인지 알 수 없는 존재가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자, 이제 선택의 시간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