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You Gave It Away (4/13)

You Gave It Away

덜컹덜컹.

창밖을 내다봤다. 기차는 이제 막 다리를 지나고 있는 참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강물의 표면에 햇빛이 반사돼 반짝반짝 빛났다.

“나 때는 말이야, 이런 기차도 없었어…….”

“으응, 그랬구나.”

벌써 세 번째로 내뱉는 말에 놈이 건성으로 대답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감흥에 젖어 들었다.

물론 나 때도 기차가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장거리로 뚫린 철로도 없었고, 푯값이 비싸 좀처럼 탈 일도 없었다. 게다가 어쩌다 타게 되더라도 흔들림과 소음도 심해 조금만 가면 멀미가 났다. 즉, 방금 내 옆으로 간식 트롤리를 밀고 지나간 직원 같은 존재는 있을 수가 없다는 뜻이었다.

“자기야, 뭐라도 먹을래?”

“됐어.”

“간식이 싫으면, 나는 어때?”

그건 더 싫었다. 얼굴을 처참히 일그러뜨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놈은 기어이 알록달록한 젤리 한 봉지를 샀다. 직원에게 돈을 건네주고, 상품을 건네받고, 인사까지 하는 그 모양새가 몹시 낯설었다.

놈이 저렇게 정상적으로 사회성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가. 내가 기억하는 놈은 좀 더 까칠하고 성격도 지랄 같았는데, 놈도 나이를 먹긴 먹은 모양이었다. 나로서는 좋아해야 할 일일 텐데도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아마도 나 한정으로만 고장 나는 놈의 사회성 때문이겠지. 결코 같잖은 독점욕 때문은 아니었다.

절대 아니었다.

……그래, 씨발, 그 같잖은 독점욕 때문인 게 맞았다.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아까부터 묘한 기분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였다. 이토록 밝은 대낮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기차역에 나오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 한 탓이었다. 놈이라면 나를 어렵게 되찾은 만큼, 꽁꽁 싸매고 어디 내보여 주지도 않을 줄 알았다. 물론 아카데미에 데려가긴 했지만, 거긴 사실상 폐허와 다를 바 없는 곳이니 예외로 치고.

아무튼, 고작 놈이 나를 밖에 내놓은 일 가지고 이리 심술이 나는 걸 보면 아닌 척해도 속으로는 평생 놈의 보금자리에서 그렇게 지지고 볶고 하며 살 줄 알았나 보다. 그걸 뭐라 그러더라, 황제 감금? 그래, 내심 그런 걸 기대했던 모양이다.

“자기야, 아 해 봐.”

무의식적으로 놈을 따라 입을 여니 놈이 아까 샀던 알록달록한 젤리를 입에 쏘옥 넣어 줬다. 색소를 잔뜩 넣은 게 분명한 젤리에서는 인공적인 단맛이 났다. 내가 인상을 팍 쓰며 입 안에 든 것을 질겅거리자 놈이 작게 웃었다.

“자기야, 아.”

음, 더 먹고 싶은 맛은 아닌데. 머뭇거리다가 입을 벌렸다. 그러나 이번에 입 안에 들어온 것은 젤리가 아니었다. 그건, 다름 아닌 놈의 혓바닥이었다.

뭐, 말캉거리고 단맛이 난다는 것은 젤리랑 똑같지만. 순식간에 혀와 혀가 얽혀 들었다. 놈답지 않게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점점 몸이 뒤로 밀렸다. 놈이 의자 등받이와 내 머리 사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부딪히지 않게 해 주려는 의도인 것으로 보였던 손은, 나중에 가선 자연스럽게 내 머리칼을 그러쥐는 모양새가 됐다.

그 성마른 손길에 나도 덩달아 조급해졌다. 각도를 조금 틀자 입술이 좀 더 깊게 맞부딪혔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놈은 숨이 막힐 때까지 입 안을 헤집어 대던 평소와는 달리 내게서 산뜻하게 손을 뗐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는 건 덤이었다.

“……나랑 뭐 하자는 거야, 지금?”

불만을 그득 담아 놈을 노려봤다. 오랜만에 소꿉놀이라도 하고 싶은 건지 풋풋하게 구는 놈이 가증스러웠다. 심지어 내가 분명 간식도, 놈도 싫다고 그랬는데 기어이 내 입에다가 그 둘을 전부 다 물려 준 죄도 빼놓을 수 없었다. 놈은 내 턱 부근에 흐르는 타액을 손가락으로 훔치며 말했다.

“더 하고 싶어도 자기 입에서 단내가 나서.”

“네가 방금까지 젤리를 처먹였으니까 그렇지.”

“으응, 너무 달아서 내 취향은 아니더라.”

그리고는 타액을 훔친 손가락을 제 입에 집어넣고 쪽 빨았다. 마치 그것조차 아까운 사람처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놈을 바라봤다. 내 타액에서도 단맛은 똑같이 날 텐데, 언행 불일치도 이런 언행 불일치가 따로 없었다.

그렇지만 여기서 놈에게 키스를 더 조르기에도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입을 꾹 다물고 팽 하니 고개를 돌렸다. 놈은 내가 왜 토라졌는지 뻔히 알면서도 그저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약간 일그러진 눈매가 어쩐지 곤란한 것처럼도 보였다. 이윽고 놈이 내 쪽으로 바짝 상체를 숙이더니, 귓가에다가 속살거렸다.

“사실 여기서 더 하면 내가 자제를 못 할 것 같아서 그래, 자기야.”

놈이 말할 때마다 그 숨결이 닿는 귀에 소름이 돋고 솜털이 바짝 곤두섰다. 놈에게서 몸을 물리며 거칠게 귀를 문질러 댔다. 자기가 언제 자제를 했다고, 퍽 새삼스러운 이유였다.

“지분거리지도 않을 거면, 기차 칸은 도대체 왜 통째로 빌린 건데.”

그랬다, 놈은 기차 칸 하나를 통째로 빌렸다. 나를 혼자 놔두고 직원과 하하 호호 웃으며 얘기를 하더니 이제 됐다며 가자고 했다. 한 칸을 통째로 빌린 걸 알게 된 것은 기차가 출발하고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전까지는 왜 우리를 제외한 승객이 아무도 타지를 않는 걸까 궁금해하다가 별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정작 놈에게 물어보니 그냥 통째로 빌렸다는 답이 돌아왔다.

“음, 그쪽이 더 편할 것 같아서?”

아니, 편하기야 편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사람들이 무서웠다. 기차역에 우글거리는 사람들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저들은 내가 저지른 일이나 내가 겪은 일을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감히 저 세계에 발을 들여선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혹은 발을 들여도, 그대로 튕겨 나오거나 나만 괴리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놈은 태연하게 내 어깨를 감싼 채 기차역으로 들어갔다. 수많은 사람이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중 단 한 사람도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긴 숨을 내뱉었다. 나도 모르게 긴장이라도 했는지 팔다리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다.

나는 놈을 올려다봤다. 놈에게서는 나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냄새가 났다. 놈은 사람들 틈에 섞이지 못한 게 아니라 섞이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어쨌든 그것이 묘한 안정감을 줬다. 적어도 이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단아가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거니까. 그 어디에도 들어맞지 못하는 내가 적어도 놈의 품 안에는 딱 들어맞으니까.

“왜, 설마 내가 기차 칸 하나를 통째로 빌린 이유가 남 눈치 안 보고 자기를 마음껏 만지작거리기 위해서라고 생각한 거야?”

그러나 그렇게 안정감을 느낀 것도 그때 한순간뿐이었다. 지금처럼 건수를 하나 잡았다는 듯, 나를 놀려 먹을 생각이 만만해 보이는 놈을 보면 그냥 다 떠나서 홀로 독립하고 싶어졌다.

“아니, 네 평소 행실을 생각하라고. 내가 그렇게 안 생각하게 생겼나.”

“자기가 야외플에 관심이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는데.”

말을 하면 할수록 말려드는 기분이었다. 결국, 나는 꾹 눌러쓴 모자와 칭칭 싸매고 있던 로브를 신경질적으로 벗어 던졌다. 놈이 남 보여 주기 아깝다고 씌워 준 것이었다. 어디, 네가 이러고도 나한테 손을 안 대나 보자.

벗어 던진 로브 아래에는 놈의 취향대로 예쁘게 입혀 놓은 옷이 있었다. 펑퍼짐한 소매 끝을 리본으로 묶은 흰색 셔츠는 꽤 옷감이 얇아서 안이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비쳤다. 좀처럼 찰 일이 없는 서스펜더는, 놈이 반바지에 무릎까지 올라오는 양말을 신기려는 것을 말리다가 결국 합의하에 차게 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발목이 훤히 보이는 베이지색 슬랙스와 윙 팁이 새겨진 갈색 로퍼는 놈이 야하다며 난리를 쳤던 것이었다. 밑단이 딱 떨어지는 슬랙스 밑으로 드러나는 얇은 발목이 먹음직스럽다나 뭐라나. 나는 그 발목이 놈에게 잘 보이도록 느릿한 동작으로 다리를 꼬았다. 어느덧 눈가를 찌르는 앞머리도 한 번 쓸어 넘겨 줬다. 음, 언제 한번 머리도 잘라야겠군.

“……자기야, 지금 그걸 유혹이라고 하는 거야?”

“응, 그런데.”

놈이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나는 그 웃음 끝에 미약하게 묻어나는 욕정을 놓치지 않았다. 턱을 괴고 놈을 향해 발목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놈이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날 유혹하고 싶다면, 그것보단 더 분발해야 할 텐데.”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뭐. 나는 발끝으로 놈의 발목께를 슬슬 쓸었다. 놈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간지럼을 태우듯 은근하게 발목을 쓸던 발끝은 점점 놈의 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종아리를 막 지나친 발끝이 놈의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려던 참이었다.

“그만.”

놈이 홱, 내 발목을 잡아챘다. 나도 모르게 중심을 잃고 끌려갈 뻔했지만 두 손으로 의자를 붙잡고 버텼다. 놈이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상체를 숙였다. 그 커다란 등이 둥글게 굽어졌다. 놈은 한 손으로는 내 발목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내 신발을 벗겨 냈다. 그리고는 내 복사뼈 위쪽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것이 어쩐지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악, 아파!”

경건하긴 개뿔.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바로 이를 세웠다. 개새끼도 아니고 입질을 다 한다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놈은 개새끼가 맞았다. 발목에 둥근 잇자국이 남았다. 뒤 구르기 하면서 봐도 사람이 남긴 자국이었다. 물론 남의 발목에 관심을 두는 사람도 없을 테고, 있어도 내 발목으로 눈길이 향하는 순간 놈이 바로 눈깔을 뽑아 버리겠지만, 그래도 이걸 달고 어떻게 밖을 나돌아 다니냐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그런 고민도 놈과 눈을 마주하자 순식간에 휘발됐다. 놈의 시선이 끈적하게 내게 달라붙었다. 가슴팍을 지나서 명치로, 명치에서 배로, 그리고 배에서 그보다 더 아래로 떨어지는 눈길에 한 겹도 남김없이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목이 바짝바짝 마르고 두피가 팽팽하게 당겼다. 그 일촉즉발의 분위기 속에서, 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자기야, 잠깐 여기 있어.”

“……뭐?”

그리고는 미련 없이 내 발목을 놔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얼얼할 정도로 세게 붙잡혀 있던 발목을 매만지며 물었다.

“뭐야, 어디 가는데.”

“음, 기차에 쥐새끼들이 올라탄 것 같아서. 잡으러 갔다 올게.”

쥐새끼? 그러나 놈은 더 설명하지 않고 상큼하게 웃으며 객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어정쩡한 자세로 발목을 만지작거렸다. 짜증은 뒤늦게 밀려왔다. 지금, 이렇게 애매하게 분위기를 달궈 놓고는 혼자 책임도 안 지고 내뺀다 이거지.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는데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표 검사가 있겠소.”

놈이 기차 칸을 통째로 빌렸고, 그래서 따로 표 검사 따위를 받을 일이 없다는 걸 기억해 낸 것은 이미 문고리를 잡아 돌린 뒤였다. 멍청이. 그대로 다시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이미 벌어진 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발이 있었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구두코였다. 검은색 가죽으로 만들어져 매끈하게 잘빠진 그 구두는 신는 사람의 취향을 잘 반영하고 있었다. 그다음에 본 것은 마치 거미나 뱀처럼 문틈 사이로 스르륵 들어오는 손가락이었다. 턱 하고 문을 붙잡은 그 손가락들은, 역시나 검은색 장갑을 끼고 있는 탓에 길이가 제법 길다는 것 외에는 알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나는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쳐들어온 발을 밀어 내기 위해 뒤늦게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보다는 문을 열어젖히는 힘이 더 강력했다. 그렇게 마침내 열린 문 너머에는 이곳에서 보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한 얼굴이 서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문전박대라니, 너무하는 것 아니오?”

새까만 정복을 차려입고 있는 까마귀였다.

“오랜만이오, 그대.”

까마귀는 쓰고 있는 차장 모자를 슬쩍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내 맞은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이건 무어요?”

“아, 그거.”

아까 먹다 남은 젤리 봉지였다. 놈도 나도 좀처럼 건들지를 않아 처치가 곤란하던 참이었기에 나는 선심을 쓰는 양 관대한 투로 말했다.

“먹고 싶으면 먹어도 돼.”

까마귀는 젤리 봉지를 든 채로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가면을 풀어 내렸다. 역시, 저렇게 생긴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다니는 건 죄악이었다. 까마귀는 새빨간 젤리 하나를 골라서 조심스럽게 입 안에 넣었다.

냉하게 생겨서 설산의 눈을 녹여 만든 물만 마실 것 같은 중년의 남자가 젤리를 오물거리는 꼴이 꽤 볼 만 했다. 심지어는 제법 입맛에 맞는지, 하나를 더 꺼내 들기까지 했다. 그래 놓고 슬쩍 내 눈치를 보는 꼴이 꽤 귀여웠다.

나는 몇 개를 주워 먹든 신경 안 쓴다는 뜻으로 손을 절레절레 내저어 보였다. 많이 먹어라, 많이 먹어. 누가 까마귀 아니랄까 봐 잔반 처리 하나는 믿고 맡겨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놈을 밖으로 유인해 낸 것도 네가 한 짓이야?”

“글쎄, 그랬다면 좋았겠지만.”

까마귀는 무척 애석하다는 듯 말했다.

“나 말고도 놈의 적은 많으니 말이오. 아마 그중 하나겠지.”

“구체적으로 짐작 가는 바는 없고?”

“가장 유력한 후보는 둘이오. 사자소생술에 반대하는 집단과 사자소생술에 미쳐 환장하는 집단.”

역시, 놈이 신혼여행이네 뭐네 한 것은 다 개소리가 맞았다.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실상은 야반도주에 가까웠다. 한밤중에 몰래 달아난 것이 아니라 훤한 대낮에 대놓고 도망간 것이라는 점만 빼면 말이다.

놈이 구태여 사람이 바글바글한 기차를 타길 선택한 이유도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 수많은 민간인 앞에서 대놓고 일을 칠 정도로 미쳐 있고, 그걸 수습할 수 있을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놈 정도는 돼야 할 테니까.

“그러니 그대도 아까처럼 생각 없이 문을 열어 주어선 안 될 것이오. 이번엔 나여서 다행이었지, 아니었다면 두 집단 중 어느 쪽이었어도 좋은 꼴은 못 보았을 테니.”

“전자는 그렇다 치고, 후자는 왜?”

사자소생술에 반대하는 집단이라면, 나야말로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존재이니 보는 즉시 척살일 게 뻔했다. 다만 사자소생술에 관심이 있는 집단이라면 나한테 딱히 억하심정을 갖고 있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 까마귀는 내 물음에 다시 물음으로 답했다.

“그대, 해부당하는 취미라도 있는 게요?”

음, 그렇군. 말을 듣고 나니 문을 열었을 때 서 있던 게 까마귀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 일인지 실감이 됐다. 그러다 문득 눈을 가늘게 좁히며 물었다.

“그래서, 너는 어느 집단에 속해 있는데?”

“……나는 어느 집단에도 속해 있지 않소.”

“믿기 어려운 걸, 혼자 움직이는 척 나를 회유하라는 임무라도 받은 거 아냐?”

“나는 이미 한 번 놈을 죽이는 데 실패한 적 있소. 그런 나를 누가 영입하려 들겠소?”

까마귀는 정말로 독단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 이유가 까마귀 본인이 말하는 것처럼 이미 놈에게 한 번 패배한 전적이 있기 때문은 아닐 터였다. 아마 까마귀 본인이 어디 밑으로 들어가기엔 지나치게 프라이드가 높기 때문이겠지. 이번엔 파란색 젤리를 꺼내서 우물거리던 까마귀는 비로소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래서 내 제안은 생각해 봤소?”

“아니, 안 해 봤는데.”

“참 당당도 하시구려.”

까마귀가 쯧쯧 혀를 찼다. 얼핏 보인 그 혀가 방금 삼킨 젤리의 색소 때문인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그래서 불만이야?”

“뭐, 그대답다고 해야 할까.”

“나도 네 제안 생각해 보려고 했거든? 근데 그럴 정신이 없었어. 놈이 내 대가리를 똑 떼어다가 딴 데 팔아먹은 바람에…….”

“그대 대가리는 멀쩡히 잘 달려 있소만.”

“아니, 이 대가리 말고. 다른 대가리 있어.”

이렇게 말하니까 뭔가 묘한 게, 꼭 머리가 여러 개인 히드라나 케르베로스가 된 기분이었다. 거기에 까마귀는 한술 더 떠서 이렇게 물었다.

“그래서, 대가리가 없어서 생각을 못 했단 말이오?”

“음, 틀린 말은 아닌데 그렇게 말하니까 되게 기분 나쁘게 들린다.”

내 말에 까마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그를 이해시키길 빠르게 포기하고 말했다.

“그리고 충격적인 일이 그것만 있는 줄 알아? 내가 어쩌다가 손가락이 베였는데…….”

“그대, 다쳤소?”

깜짝이야, 까마귀가 내 두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리고 이리저리 돌려 보는 게, 얼마나 다쳤는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내가 다쳤다고만 하면 호들갑이었다. 내 손에 별다른 상처가 없다는 걸 알고는 뒤늦게 손을 놓아주려고 하기에, 냉큼 그 손에다가 깍지를 껴서 붙잡았다. 한 번 잡았으면 잡은 거지, 뭘 또 소심하게 다시 빼려고 해.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손가락이 진짜 쪼끔 베였거든? 근데 막 피가 철철 나는 거야.”

“……알겠으니까 이 손은 놓고 말씀하시오.”

“이거 어떡하나 싶었는데 놈이 침 발라 주니까 싹 낫더라고. 나는 상처에 침 바르면 낫는다는 게 다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거든.”

내가 마치 오랜만에 본 친구에게 수다를 떠는 것처럼 말을 늘어놓는 와중에도, 까마귀는 붙잡힌 손을 어쩔 줄 몰라 꼼실거리고만 있었다. 나이도 잡술대로 잡수신 양반이 연인 손 한 번 못 잡아 본 숙맥처럼 구는 게 귀여웠다. 이럴 때 보면 예전이랑 크게 달라진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이지.

“그래도 다행이군. 그대로 놔뒀으면 아무리 작은 상처라고 해도 그대 온몸의 피가 빠져나갈 때까지 출혈이 멈추지 않았을 거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데?”

“그게 순리니까. 흘러가는 대로의 이치. 그대가 살아 있는 것이 오히려 그 흐름을 거스르는 일이지. 자기 것도 아닌 피를 자기 것인 양 몸 안에 품고 있으니.”

어디선가 비슷한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오른손이 녹아내렸을 때 음침로브한테서 들은 말이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음침로브는 나한테 현상을 설명해 주는 의사 같은 투였지만, 같은 말이더라도 까마귀의 것은 묘하게 질책하는 투로 들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애써 모른 척하며 말했다.

“그리고 말이야, 여기서 끝이 아니야. 글쎄, 놈이 내 심장에다가 반지를 넣어 놨다잖아.”

그러자 까마귀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 그래. 반지, 반지라……. 그것참, 놈다운 표현이구려.”

“뭐야, 너도 알아?”

“그럼 알지, 모를까.”

그 웃음이 꼭 나를 비웃는 듯하여 기분이 나빠졌다. 뭐야, 뭔데 저래. 어쩐지 언짢아지는 기분에 깍지 낀 손을 놓으려 하는데, 이번엔 도리어 까마귀 쪽에서 손가락에 바짝 힘을 줬다. 의식해서 붙잡은 건 아닌 것 같은데, 당하는 나는 손가락이 조금 아플 지경이었다.

“혹시 그대, 놈이 말하는 반지가 정말로 형체가 있고 무게가 있는 반지인 줄 아는 건 아니겠지?”

음, 그런 줄 알았는데.

“그럼, 형체가 있고 무게가 있는 반지가 아니면 뭐란 말이야?”

“그대는 본디 반지의 역할이 무엇인지 아시오?”

까마귀가 깍지 낀 내 손을 바짝 자기 쪽으로 끌었다. 얼결에 나는 까마귀에게 반쯤 안긴 모양새가 됐다. 바로 앞에 번뜩이는 까마귀의 눈깔이 있었다. 이제는 한쪽밖에 남지 않은, 광기 서린 눈동자.

“반지는 사실, 사랑하는 연인을 자신의 곁에 묶어 두기 위한 작은 족쇄라오. 구속, 속박, 집착, 독점욕, 그런 감정들을 담아 반지를 주고받는 행위는 그 자체로 하나의 맹약이지.”

“……그래서?”

“지금 그대의 심장 안에는, 그래, 굳이 형상화하자면 반지의 모양처럼 둥글게 엮인 것이 있소.”

그리고 까마귀가 한 손을 들어서 내 가슴팍 위에 빙글 원을 그렸다. 꼭 내 약지의 지름만큼, 작은 원이었다.

“그대를 향한 놈의 감정, 놈의 생명력, 그게 바로 지금 그대를 이 땅에 묶어 두고 있는 매개체요.”

까마귀는 아주 중대한 대목을 말하는 양 분위기를 잡았지만, 나는 오히려 반지의 정체를 알고 나서 조금 맥이 빠져 버렸다. 진지하게 심장을 열어서 반지를 꺼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참인데, 사실은 그게 어떤 무형의 힘을 빗대어 표현한 것임을 알게 됐기 때문이었다.

“그대 눈에는 보이지 않소?”

“뭐가.”

“지금 그대는, 마치 질 나쁜 인형사에게 걸린 마리오네트 같아.”

까마귀는 깍지 낀 내 손을 제 눈앞으로 끌고 갔다. 정말로 내가 보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기라도 한 건지, 내 손이 아니라 손에 걸려 있는 어떤 것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혹은 거미에게 먹히기 직전의 먹잇감이나.”

“뭔진 모르겠지만 퍽 좋은 꼴이 아닌 건 알겠네.”

“아주, 아주 얇은 실이 있소. 그런데 그게 아주 뭉텅이로 있소. 이 정도로 생명력을 뽑아내려면 몇 명이나 들어갔을지, 도통 가늠이 안 되는군.”

나는 지금 까마귀가 궁금해하고 있는 질문의 답이 쉰 명이라는 걸 알았지만,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그 방대한 실이, 지금 그대의 온몸을 칭칭 감싸고 있는 채요. 누가 뽑아낸 건진 몰라도, 이 주술을 집도한 술사는 상당한 실력자인가 보군. 사람들의 생명력을 이토록 얇게 세공했다는 건 보통 재주가 아니니까.”

“동시에 상당한 변태기도 하지…….”

“뭐, 그렇게 말하는 게 무리도 아니오.”

까마귀는 지금 나에게 걸린 고약한 흑마법을 보고 시전자의 취향이 변태 같다는 얘기를 하는 거겠지만, 내가 말하고자 한 바는 그게 아니었다. 나는 이 주술을 집도한 흑마법사가 누군지 알고 있었고, 걔는 표현상의 변태가 아니라 진짜 변태였다.

“그리고 그 모든 실을 거꾸로 타고 올라가 보면 결국, 하나의 고리에 연결되어 있소.”

“그게 내 심장에 박힌 놈의 생명력이다?”

“바로 그렇소.”

지금 내 육체를 유지하고 있는 게 놈의 심장이라는 말은, 아주 처음 듣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까마귀의 말이 쓸모없진 않은 게, 그의 설명은 몹시 친절해서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자면……

“나는 그 반지를 부숴서 그대에게 매인 모든 생명력을 흩어지게 할 생각이오.”

……그래, 저런 생각. 모든 실이 하나의 고리에 연결되어 있다는 건, 결국 그 하나의 고리만 없어지면 모든 실도 끊어진다는 얘기였다.

“그게 내 계획이오. 그래서 그대의 협조를 요청한 것이고.”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나는 도로 죽고, 놈은 심장을 돌려받고, 나에게 제물로 바쳐진 사람들은 모두 되살아나는 해피 엔딩이야?”

“아니, 그대는 죽고, 놈도 죽고, 그대에게 제물로 바쳐진 사람들도 모두 그대로 죽은 채일 거요.”

뭐야, 그게. 눈을 깜빡였다. 결국엔 모두가 다 죽어 버리는 얘기라니, 전혀 재미있지 않았다. 까마귀는 젤리 봉지에 남아 있던 젤리를 창문턱에 와르르 쏟아붓더니 색색별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면 남는 게 뭔데?”

“남는 건 없소. 다만 모든 게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오.”

“아니, 그러면 나한테 바쳐진 사람들도 되살아나야 하는 거 아냐? 나만 아니었다면 죽을 일 없던 사람들이잖아.”

“한 번 죽은 사람은 그걸로 끝이오. 되살아나는 것 자체가 순리를 거스르는 일, 그렇게 해서 살아 돌아와 봤자 세상에 혼란만 줄 뿐이오.”

젤리를 색색별로 분류하는 작업을 마치자, 까마귀는 개중 붉은색의 젤리를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으깨기 시작했다. 그 손톱 밑에 무참히 부서진 젤리의 새빨간 부스러기가 잔뜩 묻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개미를 눌러 죽이듯, 유치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죽었던 내가 되살아나니 너도 혼란스러웠어?”

그러자 그 상처 난 눈가가 꿈틀했다.

“……애초에 이 일은 남는 것을 바라고 해서는 안 될 일이오. 더한 불행을 겪지 않기 위해 하는 일이지.”

까마귀는 내 질문을 못 들은 척했다. 나는 그것이 가여운 동시에, 내가 아직 그에게 유효한 반응을 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퍽 달갑게 느껴졌다.

“내가 묻잖아. 너도 네 손으로 나를 찔러 죽였다는 사실이 꽤 고통스러웠지?”

“이건 그대에게도 나쁜 것 없는 제안이오.”

“악몽을 꿨니? 얼마나 꿨어? 내가 나오는 꿈이었어?”

“나는 그대를 놈에게서 해방시켜 주려는 거요.”

“혹시 놈에게 복수하고 나서, 너도 따라 죽으려고 했던 건 아니고?”

“그대가 놈 곁에 남아 봤자, 받을 것이라곤 끔찍한 저주밖에 없소.”

“그런데 내가 살아 돌아왔으니, 솔직히 말해 봐. 기뻤지?”

대화는 맞물리지 않고 자꾸만 어긋났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 하고 싶은 말만 했다. 나는 까마귀를 자극하는 말을 하고, 까마귀는 그것을 필사적으로 외면하려 들었다. 그러나 이런 게임은, 원래 처음 주도권을 잡은 쪽이 유리하기 마련이었다. 까마귀는 마른세수를 하다가, 마침내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겠소.”

아주 속 시원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듣고 싶은 말은 대충 들었으니 이쯤에서 까마귀를 봐주기로 했다. 나는 방긋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계속 말해 봐. 끔찍한 저주가 뭐 어쨌다고?”

놈의 곁에서 는 것이라곤, 이렇게 사람 약 올리는 재주밖에 없었다. 까마귀는 꼭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입을 두어 번 벙긋하더니,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잠시 후 다시 쳐든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무표정했다. 간신히 흔들어 놨더니 순식간에 다시 평정을 되찾은 게 아니꼬웠지만, 적어도 내가 그를 흔들 수 있는 존재임을 확인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불멸, 그게 그대가 받게 될 저주의 이름이오.”

“불멸? 영원히 사는 거라면 좋은 거 아냐?”

그거 하나 얻으려고 많은 사람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거로 알고 있는데. 그러나 까마귀는 저주가 괜히 저주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저주를 우습게 보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대는 불멸이 영원히 사는 거라고 생각하오?”

“영원히 사는 게 아니면 뭔데?”

까마귀는 잠시 침묵하더니 말했다.

“나 빼고 다른 모든 이가 죽는 것.”

“…….”

“그것이 바로 불멸이오.”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게 불멸의 실체라면 과연 불멸의 저주,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지않은 미래가 눈앞에 그려졌다. 순리라는 이름의 아주 거대한 흐름은 계속해서 나를 짓눌러 죽이려 들겠지만, 불행히도 나는 결코 죽지 못할 터였다. 나에 대한 그 모든 사랑과 집착이 나를 지켜 주고 옭아맬 테니까. 참으로 끔찍하게도.

문득, 음침로브가 내게 남겼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모두 너를 사랑해. 그러니까 죽지 마.’

비로소 그 말의 진의를 깨달았다. 나는 그들에게 내 죽음에 대한 권리를 빼앗긴 거였다. 나는 조금 가라앉은 어조로 물었다.

“그러면 놈은?”

놈도 죽는 거야? 나를 내버려 두고? 사실 고백하자면, 다른 모든 이가 죽는 건 상관없었다. 물론 상관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 장이 뒤틀리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날 되살린 놈을 원망할 정도로 절망스럽겠지만, 그래도 놈과 함께라면 견뎌 낼 수 있었다. 놈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자신이 저주를 받는대도 놈의 안위부터 묻다니, 그대도 참 어지간하구려.”

“새삼스럽게, 몰랐던 것도 아니잖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놈은 그대와 억겁의 세월을 함께할 거요.”

그 말에 안도감보다는 ‘그럼 그렇지.’ 하는 감상이 먼저 들었다. 놈은 마치 나에 대한 사랑과 집착을 인간의 형태로 빚어 놓은 것 같았다. 그런 놈이 죽었으면 나와 같이 죽었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죽는 것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놈의 생명력은 이제 완전히 그대에게 귀속되었으니, 그대가 죽지 않는 한 놈도 살아 있겠지.”

“그러면, 놈도 불멸의 저주인가 뭔가를 같이 받은 거야?”

“그건 아니오. 그대, 내가 저번에 했던 말 기억하오?”

고개를 갸웃했다. 저번에 했던 말이 어디 한두 개도 아니고, 까마귀가 개중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나로선 알 도리가 없었다.

“그대에게 심장을 건넨 그 순간부터, 놈의 시간은 멈췄다는 말.”

“그래, 기억나.”

“그게 놈이 받은 저주요. 불멸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르지.”

“……그게 무슨 뜻인데?”

“말 그대로, 그 시간 그대로의 모습으로 박제되는 것이오.”

이어지는 까마귀의 설명은 이랬다.

“주술은 살아 있는 인간을 제물로 받지 않소. 보통 물건을 매개체로 발현되지. 그런데 지금 그대에게 걸린 주술은 놈을 중심으로 유지되고 있소. 주술의 법칙을 어기고 자신을 토템으로 썼다는 것은, 곧 인간성을 포기하겠다는 말과 같지.”

“원래도 놈한테서 인간성을 찾아보긴 힘들었잖아.”

“그런 인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오. 놈은 이제 더는 자라지 않소. 대신 늙지도 않지. 발전하지도 않고, 퇴보하지도 않소. 성장도, 변화도, 놈에겐 허락되지 않은 것이오. 그대는 과연 그런 존재가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하오?”

입을 다물었다. 놈이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면,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말이 되니까. 어쩌면 이게 바로 놈의 복수일지도 몰랐다. 놈을 두고 죽은 나에 대한 복수. 그렇지만 이런 방식으로 역지사지의 마음을 알게 할 의도였다면, 지나치게 잔인했다.

“뭐, 그대에겐 기꺼운 일일지도 모르지. 그대를 향한 놈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요. 놈의 감정도 그러하고.”

“…….”

“다만 앞으로 놈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놈이 진정으로 생각하고 느껴서 하는 것이 아닐 거요. 그저 과거의 기억을 기반으로, 예전의 자신을 따라 하고 흉내 낼 뿐이지.”

“그만.”

“사실, 지금 놈은 그대를 마냥 사랑하기만 하는 건 아닐 것이오. 그대가 죽었을 때 느꼈던 원망, 분노, 증오 또한 모두 그대로일 테니까. 다만 그대에게 가장 좋은 모습만을 보여 주려고,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은 필사적으로 숨기고 달콤한 것들만을 겉으로 꾸며 낼 뿐."

“그만하라고, 이제 충분히 알겠으니까.”

내가 패배를 시인했음에도 까마귀는 멈추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까 내가 까마귀를 약 올린 대가를 치르나 싶었다. 그러나 까마귀의 눈을 보자 깨달았다. 늘 철저한 통제와 금욕을 최우선으로 삼던 그가, 이 순간만큼은 스스로에 대한 제어를 놓쳤다는 것을 말이다.

“스스로 인간성을 포기해 놓고도 괜찮을 거라 믿은, 그런 오만한 자에게 퍽 어울리는 벌이지 않소?”

그는 마치 선로를 이탈한 기관차 같았다. 낄낄 광소를 뱉어 내는 까마귀는 진심으로 통쾌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뚝 하고 웃음을 그쳤다. 까마귀가 내 쪽으로 좀 더 가깝게 상체를 숙였다.

“그러는 그대는 어떠하오. 그대는 그런 자와 불멸을 함께할 수 있겠소? 없어지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고, 외면할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는. 오로지 그대만을 위한 물건처럼 그대의 입맛에 맞춰서 행동하는 자와 함께.”

“…….”

“나는 지금 그대에게 기회를 주는 거요. 자신을 악의 구렁텅이로부터 구원할 기회를. 그대의 영혼은 아직 놈의 것만큼 더럽혀지지 않았소. 그대는 충분히 용서받을 수 있소.”

나와 함께하기만 한다면.

마치 이브를 유혹하는 뱀이 이랬을까. 까마귀는 내 마음을 훤히 꿰고 쥐락펴락하는 사람 같았다. 모진 말을 쏟아 내며 정신 못 차리게 하다가도, 가장 몽롱해질 타이밍에 달콤한 과실을 건네며 구원을 입에 올렸다. 구원. 그래, 구원. 나는 이미 놈에게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을 낙원 삼는 것만큼 멍청한 일이 또 있을까. 인간은 이토록 연약한 존재인 것을.

“……협상하는 기술이 제법 늘었네.”

나는 마른세수를 하다가 애써 웃는 목소리를 냈다. 까마귀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자신이 으깨 버린 젤리 부스러기를 한 손에 쓸어 담았다. 그리고는 입 안에 홀랑 털어 넣고 와작와작 씹어 댔다. 그 모양새가 상당히 전투적이었다. 서너 개의 젤리가 한꺼번에 까마귀의 이빨 사이에서 짓이겨졌다. 그 혀는 색소끼리 섞이다 못해 거멓게 물들어 있었다.

“잠깐만.”

그 순간, 무언가 이상한 점을 눈치채고 말았다. 까마귀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혹은, 내가 무슨 말을 꺼내든 넘어가 주지 않을 사람처럼 강경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할 말은 그따위 비굴한 간청이 아니었다.

“너, 그 장갑 벗어 봐.”

겉으로 드러나는 표정은 없었지만, 나는 까마귀가 당황했다고 확신했다. 까마귀는 이 객실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장갑을 벗지 않았다. 끈적이는 젤리를 먹을 때 정도는 그 미끈한 가죽을 벗어 치울 만도 하건만, 그는 결코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했다. 장갑을 벗기 싫거나, 아니면 장갑을 벗을 수 없는 사정이 있거나.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나는 까마귀의 손을 강하게 붙잡았다. 까마귀는 내 손을 뿌리쳐야 하나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가 결론을 내릴 때까지 순순히 기다려 줄 내가 아니었다. 나는 재빠른 손길로 까마귀의 장갑을 벗겨 버렸다. 그리고 장갑 안에 들어 있던 손은…….

“……이게 뭐야.”

사람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분명 다섯 손가락이 다 달려 있긴 했지만, 그 마디마디가 마치 새의 것처럼 울퉁불퉁했다. 굽어진 발톱은 날카로웠을 그 끄트머리가 하나같이 전부 잘려져 있었다. 자르다가 혈관을 건드렸는지 피를 본 흔적도 있었다.

“제대로 설명해.”

이러고 나 손가락 조금 베였다고 했을 땐 그렇게 호들갑을 떨면서 걱정을 했다는 거지. 비로소 그 기이했던 악력이 이해됐다. 새들이 먹이를 낚아챌 때 그 발힘이 얼마나 강한데, 정말로 까마귀는 힘 조절에 실패했던 것이다. 까마귀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마녀 바바야가에게 가면의 대가로 지불한 것이오.”

“저번에 봤을 땐 안 이랬잖아.”

“바바야가가 최근 우슬라의 얘기에 큰 감명을 받은 모양이더군. 듣기로는 사랑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묘약을 나눠 주고, 정해진 기간 내에 사랑을 이루지 못하면 물고기로 만들어서 평생 자신의 시중을 들게 한다던가.”

까마귀는 내 손에서 자신의 장갑을 도로 빼 갔다. 그리고는 기형적인 손가락을 움직여서 능숙하게 장갑을 꼈다. 그 꼴이 지나치게 태연하여 손이 새의 것으로 변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나와도 내기를 했지. 가면을 빌려주는 대신 정해진 시간 내에 내 뜻을 이루지 못하면, 까마귀로 만들어 평생 자신의 전서구로 쓰겠다고 하더군.”

“너는 또 거기에 동의했고?”

“어쩔 수 없었소. 놈 몰래 그대를 만나기 위해선 이게 필요했으니까.”

까마귀가 옆의 의자에 놔둔 가면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마 저 가면을 쓰면 쓸수록 진짜 까마귀에 가깝게 변해 가는 거겠지. 까마귀가 얼마나 저 가면을 자주 썼는지는 몰라도, 내가 본 것은 딱 한 번뿐이었다. 그런데도 벌써 손이 전부 까마귀의 발처럼 변해 버렸다. 다음에는 또 어디가 어떻게 변할지 몰랐다.

“……시간이 얼마나 남은 건데?”

“많이 기다릴 수는 없소. 그러니 그대도 고민이 되는 사안이겠지만…….”

“할게.”

까마귀의 말을 자르고 단호한 어조로 답했다. 놈을 배신하는 거야,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미 한 번 저지른 일을 두 번이라고 못 저지를까. 무엇보다도 나는 겁쟁이였다. 이미 멈춰 버린 놈의 시간과 절대 멈추지 않을 나의 시간. 그 무엇으로도 메꿔지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벌어져만 갈 간극에 무섬증이 돋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때 낡은 오르골 하나를 손에 넣은 적이 있었다. 고아 신분으로는 쉬이 얻을 수 없는 물건이라, 틈만 나면 나 혼자만 아는 장소에 벌러덩 누워서 그 오르골을 들여다봤다. 오르골을 열면 칠이 다 벗겨진 인형 둘이 나와 삐걱거리며 춤을 췄다. 나는 그들이 얼마나 오래된 연인일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인형 중 한쪽이 멈춰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다른 인형 한쪽은 아무것도 모르는 양 빙글빙글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영원토록.

그건 내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비극이었다.

나는 그 이후로 그 오르골을 꺼내 보지 않게 되었다. 다만 남은 인형 하나는, 세상이 망하기 직전까지도 그 오르골 뚜껑을 열면 빙글빙글 춤을 추고 있겠지. 나는 단지, 그것이 놈과 나의 이야기가 되질 않길 바랄 뿐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 줘.”

까마귀는 내게 구원을 말했지만, 그걸 바라고 내린 선택은 아니었다. 솔깃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내게 구원을 내려 주는 역할은 어디까지나 놈의 몫이었고, 다른 그 누구에게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나는 그저, 인정했을 뿐이다. 까마귀의 말이 옳다고. 이건 남는 것을 기대하고 할 일이 아니라, 더한 진창을 구르지 않기 위해 할 일이었다.

“……내 손이 그대의 동정이라도 샀나 보군.”

“하, 누가 누굴 동정할 처진데.”

“뭐, 상관없소. 화를 내는 것도 간절하지 않은 사람이나 하는 짓이지. 나는 그대의 동정이든 뭐든 이용할 준비가 되어 있소.”

동정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도 들어 처먹지를 않으니 별수 없었다. 믿고 싶은 대로 믿으라고 내버려 두는 수밖에. 그러다 내가 문득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 놈한테 복수하는 게 목적 아니었어?”

“…….”

“생각해 보니까 그냥 우리 둘이 저주받게 내버려 두는 쪽이 너로선 더 훌륭한 복수 아냐?”

나는 미심쩍은 눈을 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게, 저번에 까마귀한테 들은 얘기가 있기 때문이었다. 놈은 까마귀네 무리를 쫓을 때,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 나오면 죽여 주고 뒷면이 나오면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모습으로 살려 줬다고 했다.

까마귀가 정말로 복수를 원한다면, 그가 준비할 것은 어설픈 자비나 나를 위한 구원이 아니라 양면이 다 뒷면으로 된 동전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죽음을 선사하느니 평생을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글쎄, 그대가 무언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놈에게 복수하는 것이 내 목적이라 말한 적 없소.”

“그래, 직접 말한 적은 없지. 그렇지만…….”

그렇다면 내가 목격한 그 광기는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란 말인가. 까마귀가 발뺌하는 꼴이, 딱 봐도 뒤가 구렸다. 무언가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만, 그 수작이 무엇일지 짐작도 가지 않는 게 문제일 뿐.

“그대, 어떻게 하면 놈을 죽일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은 게요?”

“발뺌이 안 통하니까, 이제는 협박이야?”

“어떻게 하면 모든 걸 원래 자리로 돌려놓고 저주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지, 궁금하지 않으냔 말이야.”

당연히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까마귀의 말은, 그것이 알고 싶다면 이 사안에 대해서 조용히 함구하라는 말이었다. 이를 악물었다.

“……알겠으니까, 그 방법이란 게 뭔지 빨리 설명해. 놈이 떠나기 전에 분명 쥐새끼들을 잡으러 간다고 그랬거든.”

놈이 쥐새끼라 표현을 했다는 건, 그다지 강력한 인사가 아니라 잔챙이들을 보냈다는 얘기다. 즉, 놈이 언제까지고 그들을 쫓느라 정신 팔리진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벌써 까마귀와 실랑이를 벌이느라 꽤 시간을 잡아먹었다. 놈이 언제 청소를 마치고, 이 객실 문을 걷어차며 등장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제야 까마귀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 방법은…….”

“방법은?”

“방법은…….”

우욱, 갑자기 까마귀가 입을 부여잡았다.

“뭐야, 이 중요한 순간에.”

“우웨엑.”

결코 우연일 리 없는 타이밍에 까마귀가 토악질하기 시작했다. 철퍽, 객실 바닥이 토사물로 더럽혀졌다. 눈이 아플 정도로 알록달록한 색깔의 향연이었다. 무지개도 아니고, 토사물이 이런 색깔이라고? 발치를 내려다봤다. 내 갈색 로퍼에도 빨간색 젤리 한 점이 튀어 있었다. 그제야 나는 까마귀가 젤리 한 통을 전부 집어먹은 것을 기억해 냈다.

“야야, 괜찮아? 너 멀미해? 토할 정도였으면 작작 처먹지 그랬냐.”

일단 그 등을 두드려 주는데, 당황해서 입 밖으로 고운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더 가관이었다.

“그대가 준 것인데, 어찌 남길 수가 있겠소.”

까마귀가 숙였던 고개에서 눈만 들어 나를 쳐다봤다. 뭔가 이상한 조짐을 눈치챈 것은 그즈음이었다. 아니, 눈치채지 못하려야 그럴 수도 없었다. 정확히 그가 게워 낸 토사물과 똑같은 알록달록한 색깔로, 까마귀의 눈동자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으니까.

기괴한 장면이었다. 오색찬란한 빛들이 까마귀의 거먼 눈동자 안에서 이리저리 춤을 췄다. 자박자박,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까마귀가 머리를 짚은 채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뭐지, 놈이 돌아오는 건가. 객실 문 너머를 슬쩍 엿봤다. 저 멀리서 간식 트롤리를 밀며 직원이 다가오고 있었다. 놈이 아니라고 안심했던 것도 찰나……

“쟤가 범인이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첫째, 직원이 밀고 있는 트롤리 위에 간식 대신 온갖 종류의 암기가 올려져 있었기 때문이고, 둘째, 그 직원이 환하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직원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더니 나중에 가서는 트롤리를 밀며 거의 뛰어오는 수준이 됐다.

씨발. 나는 다급하게 까마귀를 돌아봤다. 어느새 까마귀는 가면을 다시 주워 쓴 채였다. 그리고는 내 멱살을 콱 붙잡았다. 뭐라 항의할 틈도 없이 창문을 열어젖혔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들이닥쳤다. 딱 달리는 기차의 속도만큼 거센 바람에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휘날렸다. 까마귀는 창문틀을 붙잡고, 창가에 발을 얹었다.

어, 라.

얼핏 보이는 까마귀의 손목에 다닥다닥 깃털이 돋아나는 게 아주 느리게 눈에 들어왔다. 그대로 시야가 뒤집혔다. 붕 떠오르는 몸뚱어리에, 나 지금 창문 밖으로 날려진 건가 싶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까마귀의 발에 멱살이 붙잡힌 채였다.

나를 붙잡고 창밖으로 뛰쳐나온 까마귀는 난다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비틀거리고 있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와중에 그 억센 발톱 힘만이 나를 추락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머지않아 방금까지 있던 객실에 트롤리를 밀던 직원이 쳐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객실 안을 둘러보다가 창문이 열려 있는 걸 발견하고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내 쪽으로 무언가 휙 하고 날아왔다. 거의 동시에 까마귀가 날개를 펼쳐서 나를 감쌌다. 순식간에 시야가 검은 깃털로 뒤덮였다. 이윽고 푹 하는 소리와 함께 날개를 뚫고 박힌 날카로운 비수 끝이 바로 내 코앞에서 번득였다.

“으악, 악.”

등골에 소름이 돋을 새도 없이 까마귀의 발이 기어이 나를 놓치고, 어딘가로 내동댕이쳐졌다. 데굴데굴 구르다가 간신히 바닥을 손으로 짚고 멈춰 섰다. 고개를 들어 보니 그 자리에서 조금만 더 굴렀다간 까마득한 기차 아래로 추락할 뻔했다. 꿀꺽, 저절로 침이 삼켜졌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더 분명해졌다. 나는 달리는 기차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었다. 덜컹덜컹. 기차 위는 세차게 바람이 불고 있었고, 두 발로 중심을 잡고 서 있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있는데, 저 멀리 곧 기차가 접어들 터널이 보이기 시작했다. 터널이라, 눈을 가늘게 좁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기차 위에는 나 혼자만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바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는 그로데스크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완전한 까마귀도 아니고 완전한 인간도 아닌 새까만 괴생명체가 피인지 체액인지 모를 검붉은 액체를 토해 내며 연신 바르작거렸다. 아마 그가 전부 먹어 치운 젤리나 날개를 관통한 비수에 뭔가 수작을 부려 둔 것이겠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다.

나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기색이 없는 까마귀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주 찰나의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라 아직도 얼떨떨하긴 했지만, 정황상 까마귀가 나를 붙잡고 창문 밖으로 날아서 도주를 시도한 모양이었다. 그러다 던져진 비수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제 날개를 펼쳤고, 나를 대신해서 칼빵을 맞은 뒤 그대로 기차 위로 추락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에 죄책감을 느낄 시간조차 내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누군가 기차 위로 기어 올라오고 있었으니까.

“과연 어디에서 날아온 까마귀일까, 우리 쪽 인사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기차 위로 난입한 불청객은 놈에게 알록달록한 젤리를 팔았던, 그리고 간식 트롤리를 밀고 우리 객실에 쳐들어왔던 바로 그 직원이었다.

“누가 반짝이는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까마귀 아니랄까 봐, 보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날름 낚아채 가네.”

“…….”

“그렇지만 그 보석을 노리는 사람이 어디 한두 명이어야지. 혼자 독점하려는 꼴을 그냥 두고 볼 순 없으니까.”

직원은 얼핏 보기엔 맨몸처럼 보였다. 무투파일 확률도 배제할 순 없었지만, 몸을 단련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웬만해선 마법사라고 보는 게 맞았다. 쯧, 마법사랑 싸우는 건 성가신데. 평소라면 그냥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겠지만, 이쪽에 부상자가 있는 게 문제였다. 걸리적거린다고 나 대신 칼 맞은 놈을 버리고 갈 순 없는 일이었으니까.

사실 마법사를 상대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더 강한 마법사를 데려오는 거였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놈이 나를 구해 주길 기다리며 마냥 시간을 끌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하필이면 이렇게 타이밍이 맞아떨어진 게 우연이라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처음부터 놈을 유인하기 위해 미끼를 풀고, 놈이 없을 때를 틈타 나를 습격해 왔다고 보는 게 더 신빙성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낙담하는 대신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은, 달리 말하자면 놈이 없으면 날 포획하는 것 정도야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간과한 게 있다면, 바로 내가 탑 꼭대기에서 용사가 구해 주러 오기를 기다리는 공주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차라리 어떻게든 탑을 자력으로 탈출하려는 공주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이 정도 시련쯤이야, 가뿐히 이겨 내 줘야겠지.

“이쪽은 젤리가 꽤 맛있었나 본데. 그쪽은?”

마법사는 처참한 꼴로 사경을 헤매고 있는 까마귀를 발로 두어 번 툭툭 차면서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쉽게도, 내 취향은 아니라서.”

“그래? 다음부터는 취향을 알려 주면 참고할게.”

“글쎄, 다음은 없을 텐데.”

나는 덤덤한 어조로 덧붙였다.

“왜냐면 너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을 테니까.”

그 말을 듣고도 마법사는 그저 웃음을 터트렸다. 꽤 여유 만만해 보이는 태도가, 실력에 어지간히 자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낮잡아 보는 웃음에도 불쾌해하는 대신 우둑우둑 목을 늘리며 근육을 풀었다.

“그것참, 기대되는데……. 그럼, 각오는 됐고?”

마법사가 말하는 것이 죽을 각오인지 죽일 각오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후우 하고 길게 숨을 내뱉고는 몸을 숙여 자세를 조금 낮췄다. 덕분에 중심을 잡는 일이 훨씬 안정적으로 되었다. 그 상태로 곧장 튀어 나갈 수 있게 온몸의 근육을 팽팽하게 수축시키고, 마법사를 향해 검지를 두어 번 까닥거렸다.

“들어와.”

그 말과 동시에 재빨리 뒤로 공중제비를 돌았다. 탄력 있게 바닥을 박차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허리를 유연하게 꺾었다. 그러자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에 정확히 비수가 날아와 꽂히는 게 보였다. 연이어 날아 온 비수들이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나를 쫓아왔다. 아마도 마법이 걸려 있는 거겠지. 눈으로 보고 피하면 늦을 게 뻔해서 순전히 감에 의존해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몇몇 비수는 회피에 성공하고 몇몇 비수는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치명상이 될 만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으스대긴 일렀다. 방금의 공격은 내 목숨을 노린 일격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정직하고 얕았기 때문이다.

내가 자세를 가다듬는 동안, 마법사가 제법이라는 듯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그렇군, 그는 나를 얕보고 있었다. 아마 처음부터 나를 죽일 생각 따윈 없었던 거겠지. 어떤 꼴이어도 좋으니 목숨만 붙여서 데려가는 게 목적일 터였다. 그렇다면, 내가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때마침 마법사의 발치에서 빌빌거리던 까마귀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시선이 오고 간 뒤, 나는 까마귀를 향해 버럭 외쳤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도망쳐!”

그 말을 신호 삼아 까마귀는 눈 깜짝할 사이에 몸집을 줄였다. 이윽고 새까만 까마귀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비명처럼 ‘도망쳐! 도망쳐!’ 하고 외치는 새된 목소리가 점점 ‘까악! 까악!’ 하는 까마귀 소리로 바뀌어 들렸다.

그러나 까마귀는 그 길로 곧장 도망치는 대신, 마법사의 얼굴에 찰싹 들러붙기를 택했다. 집요하고 끈질기게 버티던 까마귀는 끝내 마법사의 손에 채여 저 멀리 날아갔다. 퍽 하고 어딘가 처박히는 소리가 났다. 아마도 기차 아래로 추락한 모양이었으나, 까마귀를 걱정할 틈 따윈 없었다.

“이런, 인질을 놓쳐 버렸네. 쟤도 참 어지간히 질긴 놈이야. 그 꼴을 하고도 움직일 힘이 남았을 줄은 몰랐거든.”

마법사는 신경질적으로 얼굴에 붙은 검은색 깃털을 떼어 내며 말했다. 까마귀의 뭉툭한 발톱은 마법사에게 생채기조차 입히지 못했다. 그러나 그거면 충분했다.

“됐어, 방해꾼 한 명이 사라진 셈 치면 되니까. 이제 둘이서 오붓하게 시간 좀 보내볼까?”

전형적인 악당 대사가 진부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금껏 저렇게 입 터는 새끼 중에 내가 이기지 못한 놈은 한 명도 없었다.

“그거, 데이트 신청이야?”

“그렇다고 하면?”

마법사는 내가 웃는 이유도 모르고 이를 드러내며 마주 웃었다. 그 새하얀 치아에 드는 감상은 딱 하나였다.

“어쩌지, 내가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라.”

저 이빨, 참으로 빠개 버리기 좋게 생겼다는 거. 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듯 바닥을 짚고 술식을 불어넣었다. 까마귀가 벌어준 아주 작은 틈, 그 틈을 타서 완성한 술식이었다. 드드득, 바닥을 타고 식물의 줄기가 빠르게 돋아났다. 자라난 식물 줄기가 마법사의 다리를 휘감았다.

내가 아무리 마법적 재능이 없다고 해도, 아카데미를 몇 년을 다녔는데 마법 한두 가지 정도는 쓸 줄 알았다. 그리고 저게 바로 내가 쓸 줄 아는 그 몇 안 되는 마법 중 하나였다. 마법사는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게, 식물이 자라나는 마법 자체는 정말로 별것 아닌 마법이지만, 저 마법만큼은 다를 테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저거 예전에 내가 놈을 가지고 촉수플을 하려고 필사적으로 연습한 마법이거든.

괜히 어설프게 덤볐다가는 놈한테 역으로 당할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만큼, 그때 나는 밤잠도 줄이고 코피까지 흘려 가며 놈을 엿 먹일 마법을 연구했다. 물론 결과는 뭐, 처참한 실패였지만. 그래도 그렇게 단련해 둔 마법이 이럴 때 쓸모가 있을 줄은 그 누구도 몰랐을 테다. 심지어 나조차 몰랐으니까.

마법사는 처음에 마법을 파훼하려고 시도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악의 가득하게 몇 차례고 배배 꼬아 놓은 술식에 당황을 감추질 못했다. 결국, 새로운 마법을 부려 억지로 식물 줄기를 뜯어내려고 들었으나,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내가 아니었다.

“어딜 감히.”

퍽 하고 시원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느새 근접으로 붙은 내가 올려 찬 다리에 마법사가 얼굴을 맞는 소리였다. 저 멀리 흰색 무언가가 날아가는 게 보였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게, 내가 목표로 삼은 마법사의 이빨이 분명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마법사들은 좀처럼 육체를 단련하지 않았다. 물론 놈 같은 예외도 있었지만, 대체론 육체를 단련할 시간에 방어 마법 하나를 더 연구하는 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상대가 자신감이 넘쳐 보이면 넘쳐 보일수록, 여유를 부리면 부릴수록, 마법을 열심히 연구한 마법사라는 뜻이니 어렵지 않게 승기를 잡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단 한 순간의 틈만 주어진다면.

그리고 그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까마귀였다. 까마귀가 없었다면 마법사를 상대하는 일은 훨씬 까다로웠을 게 분명했다.

마법사의 실책을 짚어 보자면, 우선 그는 까마귀에게서 벗어난 그 즉시 나를 공격해야만 했다. 태연하게 얼굴에 붙은 깃털을 떼고 있을 게 아니라. 또한, 식물 마법에 붙잡혔을 때도 마법을 파훼하려고 시도할 게 아니라 바로 그 줄기를 잘라 내는 판단을 해야 했다. 내가 척 봐도 마법적 재능이 전무해 보이니 쉽게 마법을 파훼할 수 있을 줄 알았겠지. 하여간 마법사란 족속들은 그 오만함을 버리지 못해 문제였다.

“하, 하. 이게 끝이야?”

저 봐, 끝까지 여유로운 척이지. 마법사가 퉤 하고 핏물 섞인 침을 뱉으며 이죽거렸다. 확실히, 내가 날린 건 마법사의 주둥이와 이빨 몇 개였지, 마법사의 모가지가 아니었다. 이대로 그냥 놔뒀다간 마법사의 반격이 날아올 게 불 보듯 뻔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럴 리가.”

애초에 발차기를 날렸던 건, 유효타를 먹이려는 목적이었다기보단 그저 마법사의 정신을 흩트려 놓기 위해서였다. 마법사가 그의 발을 붙들어 놓은 식물 줄기와 ‘곧 닥쳐올 상황’ 사이의 연결 고리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겸사겸사 사심도 좀 담아서 말이다. 나는 속으로 칼같이 타이밍을 쟀다. 셋, 둘, 하나. 동시에 휙 하고 허리를 뒤로 꺾었다. 조금 무리할 정도로 허리를 꺾는데, 마지막으로 본 마법사의 표정이 꽤 볼 만 했다. 그대로 콰득 하는 소리가 났다.

이게 바로 내가 기다리던 것이다. 기차가 터널에 접어드는 것.

지금 내 코앞에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스쳐 지나가는 터널 천장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허리를 덜 꺾었다간 내 코도 같이 갈려 나갔을 터였다. 모골이 절로 송연해졌다. 그 와중에 무참하게 꺾인 허리가 저려 와서, 그냥 그 자리에 털썩 누워 버리기를 택했다. 누운 자세 그대로 슬쩍 고개만 들어 봤다. 발치에는 식물 줄기에 붙잡힌 마법사의 두 다리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 다리‘만’ 있었다. 터널 입구에 부딪힌 마법사의 상반신이 전부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 울퉁불퉁한 단면이 꽤 처참했다.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겨 걸었던 마법을 해제했다. 붙잡고 있던 줄기가 사라지자 주인을 잃은 두 다리는 맥없이 쓰러졌고, 이내 덜컹거리는 기차의 움직임에 따라 슬슬 바깥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터널을 다 통과할 즈음엔 완전히 기차 밖으로 떨어져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뒤였다.

어둑한 터널 밖으로 나오자 쏟아지는 빛이 눈을 찔렀다. 그런데도 일어나서 객실로 돌아갈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나는 너무 지쳤고, 휴식이 절실했다. 눈을 감고 머리 뒤로 팔짱을 꼈다. 덜컹덜컹. 위에서 무슨 사단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 기차는 계속해서 선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잠이 솔솔 오는, 화창한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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