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t the Very Next Day
“허억, 허억.”
거칠게 몸을 몰아 내쉬었다. 어디, 어딨어. 엄마 잃은 어린아이처럼 애타게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그러다 손끝에 쥐어지는 것이 있었다. 놈의 옷자락이었다.
그것이 구명줄이라도 되는 양 질기게도 부여잡았다. 쉬이, 놈이 낮게 나를 어르며 등을 도닥였다. 옷자락이 쭈글쭈글해질 때까지 몇 번이고 고쳐 잡았다. 등을 두드리는 손길 역시 쉽게 나를 떠나지 않았다. 문득 올려다본 얼굴은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불면에 시달렸다는 놈은, 문제의 원인이 해결됐는데도 마치 그게 또 다른 문제의 시작인 것처럼 벌겋게 충혈된 눈을 하고 있었다.
“처음이 아니구나.”
“그래.”
“나 몇 번이나 이렇게 깼어?”
“……다섯 번.”
대답하기 마뜩잖다는 듯 들려오는 목소리가 나직했다. 이미 해결된 문제도, 새롭게 도래한 문제도, 둘 다 원인 제공자는 나였다. 이런 죄책감을 보통 사람들은 미안함이라 부르는 거겠지. 그러나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까닭은, 놈이 바라는 게 고작 미안함 따위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몸이 놀라서 그래. 오늘 충격을 많이 받았으니까.”
말은 잘하지, 내가 오늘 충격을 받은 이유가 과연 뭣 때문인데. 나는 등을 도닥이는 손길을 쳐 내고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우물우물 뭉개지는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괜찮다고 하지 마.”
“응응, 그래.”
“그렇게 내려다보지도 마.”
내 약한 모습 같은 건,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와 놈은 동등한 위치에 서로 마주 보고서 대적하는 사이, 둘도 없는 견원지간이어야 했다. 동정도, 연민도, 그걸 닮은 그 어떠한 것도 놈에게선 받고 싶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놈의 보살핌 따위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내가 가장 약해지는 순간마다 그 자리에는 놈이 있었다. 혹은, 나를 가장 약하게 만드는 것이 놈이라든가.
문득 놈을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아카데미 시절. 자기를 룸메이트라고 소개하는 놈의 눈에 비치는 것은 어벙한 얼굴로 놈을 올려다보고 있는 나였다. 그 무심한 눈동자가, 꼭 나를 하찮게 여기는 모양새라 괜한 분심이 일었다.
놈이 나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걸 하찮게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세상 꼭대기에서 만물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그 오만한 눈길을 마주한 사람은 보통 둘로 나뉘었다. 그를 숭배하게 되거나, 욕하게 되거나.
나는 전자이자 후자였다. 놈의 거만함을 욕하면서도 내심 내가 그의 룸메이트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게 너무나도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정작 놈은 아무것도 하질 않았는데도, 그 눈을 보면 내 이중적인 생각을 다 꿰고 비웃는 것만 같아 자꾸만 자존감이 깎여 나갔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춘기 소년다운 오기가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미친놈을 상대하기 위해선 나도 미친놈이 되면 그만이었다. 고작 룸메이트 자리에 기뻐할 게 아니라,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싶다면 나도 급이 맞는 또라이가 돼야 했다.
그 이후로 세간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고 미친 짓을 일삼았다. 내가 신경 쓰는 것은 오로지 놈의 시선뿐이었다. 내 모든 행동의 준거가 놈이 되었다.
그 눈에 일순 흥미가 돌면, 마치 잘했다는 말을 들은 학생처럼 기뻐했다. 그가 ‘자기야.’ 하고 징그러운 호칭으로 나를 부를 때면, 실은 모두에게 그것을 과시하고 싶어서 더 날뛰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질 때면, 남몰래 수음할 때의 쾌감을 닮은 짜릿함을 느꼈다.
그러나 어느새 아카데미의 미친놈 양대 산맥으로 나와 놈이 거론될 즈음, 나는 슬슬 내 한계를 깨닫고 있었다. 무릇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고,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려다간 다리가 찢어지는 법이었다. 노력파 미친놈은 아무리 해도 타고난 미친놈을 이길 수 없었다.
점점 모든 게 버거워져만 가는데, 놈은 옆에서 자꾸만 나를 부채질했다. 그런데도 놈한테 내가 가짜라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경멸도, 혐오도 아닌 그 무엇도 담지 않은 무심한 눈길이 되돌아올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애를 썼는데도 놈은 결국 알고 있었나 보다. 그 무의미한 발악마저 놈에게는 즐거움을 준 것이겠지. 참담한 마음에 잡고 있던 옷자락을 놓았다. 그 말이 맞았다. 이제껏 펼쳐진 온갖 잔인하고 구역질 나는 짓거리들에, 아무렇지 않은 척했어도 실은 그러지 못했다. 내게는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고, 심지어 그것들은 하나같이 경중을 따질 수 없을 만큼 가혹했다.
이미 한 번 죽었다 되살아난 나, 쉰 명분의 토막 난 시체 더미, 녹아내린 오른손, 나 때문에 죽었다는 사람들, 나한테 고백한 썩어 가는 시체, 그 썩어 가는 시체에 키스한 나, 결코 잊을 수 없는 비릿한 피 맛, 그리고 이제 다시는 들을 일 없게 된, 날 향해 뛰는 놈의 심장 소리…….
“나 토할래, 토하고 싶어…….”
놈을 쳐다봤다. 어둠 속에서도 그 눈이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쟤는 또 뭐에 화난 거야. 아냐, 아니다. 지금 내겐 놈의 감정까지 신경 써 줄 여유 따위 없었다. 옷장 안에 쑤셔 박아 뒀다가 문을 여는 순간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옷가지들처럼, 열심히 미뤄 놨던 감정들이 벌처럼 들이닥쳐 오는 밤이었다.
그 와중에 제일 혐오스러운 건,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염치없이 살고 싶다는 사실이었다. 놈을 위해 기꺼이 죽을 때는 언제고, 놈을 위해 다시 한번 살고 싶었다. 죽은 채 내버려졌다면 모를까, 기회가 주어지니 나도 모르게 욕심이 났다.
그렇게 주체할 수 없는 것들이 자꾸만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왔다. 기어이 우욱 하고 헛구역질을 하니, 놈이 물을 가져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확히는 물에다가 좀 더 약을 타서 가져오겠다는 것일 테지만. 차마 가지 말라는 말이 입 밖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망연히 떠나가는 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놓쳤다. 놈을 놓쳤다.
아니다, 내가 놓는다고 놓쳐질 놈이 아니다. 그러니까, 놈이 제 발로 떠나간 것이다. 이성적으로는 놈이 그저 물을 가지고 오기 위해 나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도 물밀듯 밀려오는 우울감에 그제야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열병에 시달려 헛소리를 지껄이는 사람처럼, 약효와 피로감에 못 이겨 지나치게 진심을 내뱉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마음은 잘 갈무리를 해 둬야 했다. 비로소 제정신으로 눈을 떴을 때,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다시 미친놈 연기를 하려면.
“그래, 그대도 잠깐은 쉬어야 하지 않겠소.”
낯선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은 그때였다. 끌어 올렸던 이불을 내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환청까지 들리나. 그 생각을 멍청한 것이라고 꼬집듯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놈도 참 독종이지. 종일 떨어지지를 않고, 설령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눈’은 꼭 붙여 놓고 나가니 말이야.”
덕분에 놈이 방심하는 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며, 목소리가 툴툴거렸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창가에 웬 까마귀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까마귀가 아니라, 매에 비견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덩치가 커다란 까마귀였다.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지? 인상을 찌푸리며 바라보자 까마귀가 꼭 한심한 것을 보는 양 나를 쳐다봤다.
이윽고 까마귀가 날갯짓하며 창가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푸드덕, 허공에 까만 깃털들이 휘날렸다. 바닥에 닿는 그 발은 어느덧 사람의 것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새까만 망토에 신사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얼굴에는 부리가 기다란 역병 의사 가면을 쓰고 있는 채였다.
“……너, 누구야.”
까마귀는 대답하는 대신 목덜미로 손을 옮겨 가면을 풀어 내렸다. 그제야 드러나는 얼굴은 점잖은 중년의 것이었다. 한쪽 눈에 길게 상처가 나 있는 것이, 놈이 사나운 투견이라면 이쪽은 마치 은퇴한 군견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때마침 흘러내린 앞머리가 그 상처를 가렸다. 까마귀는 목덜미를 덮을 정도로 조금 긴 흑발을 가지고 있었다.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 눈가를 찌푸렸다.
“배신자, 더러운 변절자.”
나를 질책하는 그 목소리는 몹시도 평온했다. 이렇게까지 힌트를 주시니, 나는 긴가민가하던 까마귀의 정체를 확신했다.
“배신자라니, 처음부터 같은 편이었던 적이 없었는데 억울하네.”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까마귀의 정체는, 다름 아닌 내 심장에 검을 박아 넣은 장본인이었다. 친애하는 나의 살해자, 그는 과거의 일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벽에 기대 팔짱을 끼었다.
“나는 너도 같이 제물로 바쳐졌을 줄 알았어.”
그도 그럴 게,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제물로 바쳐졌다면 그중 까마귀가 빠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 본인은 전혀 티 내지 않은 줄 알겠지만, 미친놈 비위 맞추기로 단련된 나로서는 그의 감정을 알아차리지 않는 게 더 어려웠다. 하지만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 꼴을 보니, 어찌어찌 잘 도망쳐서 제물 신세는 피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나를 죽인 장본인인 만큼 놈이 아득바득 이를 갈고 있을 텐데, 간도 크게 직접 잠입했구나 싶었다.
“그 우스운 가면은 또 뭐야?”
“마녀 바바야가의 작품. 까마귀로 변할 수 있는 주술이 걸려 있는 물건이오.”
“어쩐지, 못 본 사이에 취향이 바뀌었나 했어.”
까마귀는 생긴 값을 톡톡히 하려는지, 귀하고 고급스러운 것만 골라 찾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지금 들고 있는 가면은 어쩐지 삿되고 낡은 구석이 있어 그의 고상한 취향과는 한참 멀었다.
“그대와 잡담할 시간은 없소.”
까마귀는 고작 회포나 풀려고 나를 찾아온 게 아니라는 듯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그래, 나도 오랜만에 봐서 반가워. 늙은 건 또 왜 이리 폭삭 늙었어? 바바야가에게 물건의 대가로 저주라도 걸렸나 보지?”
그러자 까마귀가 묘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뭐, 자기 늙었다고 그래서 꼬운가? 하지만 사실인 걸 어떡해. 원래 까마귀는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솜털이 채 가시지도 않아 보송보송하고, 젖살이 아직 덜 빠진 얼굴이 눈앞에 생생했다.
어울리지도 않는 중늙은이 말투를 따라 하는 게 정말 귀여운 귀공자님이었는데……. 이렇게 중년의 얼굴이 되니 이제는 그 말투가 퍽 어울릴 뿐 아니라 어디 북부의 대공 자리 하나 꿰찼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나이를 먹은 것은, 세월이 그만큼 지났기 때문이오.”
그러나 까마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대는 그대가 죽은 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생각하오?”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어물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물론 저번에 놈이 스쳐 가듯 말하긴 했다. 자기가 잠 못 든 세월을 따지려면, 개월이나 년 단위가 더 세기 편할 거라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꼬맹이가 장성하다 못해 중년이 될 정도로 시간이 지났을 줄은 몰랐다.
“그렇지만, 놈은 하나도 안 늙었던데?”
“그 작자가 그 얼굴을 유지하기 위해 몇 명을 죽였는지 못 들었나 보군.”
까마귀가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대가 다시 깨어났을 때 자기를 못 알아볼 수도 있다면서, 놈은 늙지 않는 흑마법에 손을 댔소.”
“산 사람의 피로 목욕을 한다든지, 그런 거?”
“뭐,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요. 쓰면 쓸수록 시전자의 영혼이 더럽혀지는, 그런 종류의 마법이었으니까. 그래도 놈은 거리낌 없이 정말 남발을 해 대더군. 덕분에 그 얼굴에 주름이라도 하나 질라치면 모두가 공포에 벌벌 떨었소.”
그래, 놈이라면 제 영혼 아까워 않고 팍팍 쓸 만도 했다. 잔뜩 비꼬는 말투였지만 그래도 친절하게 부연 설명을 붙여 준 것이 고마워 눈물이 찔끔 났다. 요즘 앞뒤 사정 다 잘라먹고 결론만 떡하니 던져 주는 놈이랑 다녀서 그런지, 이렇게 평범하게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게 기적처럼 느껴졌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 괴벽도 그대에게 심장을 주고 난 후엔 끝이 났소. 정확히 말하자면, 더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해야 맞겠지. 심장을 잃은 그 순간부터 놈의 시간은 멈췄거든.”
“그 과정에서 몇 명이나 죽었는지는 말 안 해 줘도 돼……. 그게 내 정신 건강에 더 이로울 것 같으니까.”
내가 견뎌야 할 죽음은 이미 쉰 명분으로 차고 넘쳤다. 기분 탓인지, 나를 내려다보는 까마귀의 눈빛이 조금은 측은한 것도 같았다. 그러나 까마귀는 공사를 칼같이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봐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 식으로 회피하면, 마음이 좀 편해지오?”
“응, 아마도?”
“……어이가 없군.”
나는 그렇게 말하는 까마귀를 이해했지만, 까마귀는 아마 평생을 가도 나 같은 사람을 이해할 수 없을 터였다. 그는 나와 달리 성실한 사람이었으니까.
“처음 그대의 배신을 알아차렸을 때는, 그대에게도 뭔가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다음에는 그대에게 무슨 사정이 있었더라도 어차피 결과는 바뀌지 않으니 이해할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했지.”
“…….”
“그리고 이제야 알겠군. 그냥 그대도 놈과 똑같은 사람이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야.”
그걸 이제야 알았다니,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사실 엄연히 말하자면 나는 까마귀를 배신한 적도 없었다. 처음부터 같은 편이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 모든 생각을 속으로 삼켰다. 내가 지금 까마귀에게 해야 할 말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안.”
놈에게는 좀처럼 나오지 않던 말이 까마귀에게는 참 쉽게도 나왔다. 까마귀는 내가 사과할 줄은 예상치 못한 건지, 아니면 사과 자체가 마음에 차지 않은 건지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비틀린 심사를 훤히 알게 해 주는 표정이었다.
“그대가 내게 미안해할 건 아무것도 없소.”
“……정말로?”
“하지만 굳이 사과하고 싶다면, 거절하진 않겠소. 마침 부탁할 게 있었으니.”
‘그러니, 모쪼록 협조하시길 바라오.’
그 말에 기시감이 들었다. 언젠가의 어린 시절, 이렇게 당당한 말투로 나를 찾아온 꼬맹이가 있었다. 물론 하는 말은 전혀 꼬맹이답지 못했다. 그가 내게 인사 대신 내뱉은 첫마디는, 놈을 죽이자는 말이었으니까.
놈은 언제나 적이 많았다. 얽히고설킨 권력과 이해관계, 그리고 빈말로도 감싸 주지 못할 놈의 성격 때문이었다. 그리고 적의 적은 곧 나의 친구라고, 꼬맹이는 나 또한 놈의 숱한 적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하고 접근한 것이 분명했다. 겉으로 볼 때 놈과 나의 관계는 파국도 이런 파국이 없었으니까.
다만 꼬맹이의 유일한 꼬맹이다운 부분은, 놈과 내가 서로 으르렁거리면서도 결국엔 꼭 붙어 다니는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고 보이는 것만 믿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단칼에 제안을 거절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는 대신, 내 협조가 필요하다면 그럴 마음이 들게끔 해 보라는 말로 그를 도발했다. 나는 유독 어린아이에게 무르게 굴곤 했으니까.
일이 이상하게 꼬인 것은 그다음부터였다. 꼬맹이가 나를 좋아하게 된 것쯤은 문제의 축에도 들지 못했다. 진짜 문제는, 내 생각보다 꼬맹이의 능력이 뛰어났다는 사실이었다.
놈을 살해하겠다는 계획은 점점 구체화되고, 규모는 점점 커져만 갔다. ‘이러다간 정말 놈을 죽일 수 있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제안을 수락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그 계획의 주축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꼬맹이가 자연스럽게 나를 한패라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가 부탁하면 부탁하는 대로 열심히 놈의 정보를 물어다 줬기 때문이다. 필요할 때 놈을 방해하거나 시선을 끌어 달라고 하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 줬다. 그건 다른 그 누구보다도 내가 자신 있는 분야였으니까.
고백하자면, 그때의 나는 무책임했다. 솔직히 말해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마음이 대부분이었고, 그게 눈덩이 구르듯 이렇게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내가 직접 그 계획을 망쳐 놓기로 했다. 나로 인해 세워진 계획이라면, 나로 인해 그르치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 생각했다.
그렇게 되지도 않는 이중 스파이 노릇을 시작했다. 애초부터 놈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알면서도 당해 주는 눈치였다. 그렇지만 놈도, 꼬맹이도, 이 세상 그 누구도 내가 놈을 위해 대신 검에 찔릴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나는, 그러니까…….”
그리고 내 심장에 직접 검을 박아 넣으며 허망한 표정을 짓던 그 꼬맹이는, 이제 원숙하고 노련한 모습으로 돌아와 나한테 다시 한번 놈을 배신할 것을 제안했다. 아니, 다시 한번이라기보다는, 이번에야말로 진정으로 놈을 배신하라고.
“그래, 그대도 놈이라면 질색을 했잖소. 하필이면 되살려도 ‘그런 몸’으로 되살려서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지.”
‘그런 몸’이라니, 보아하니 까마귀는 꽤 많은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다른 것보다도 까마귀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놈이 일을 허투루 할 리는 없고, 하물며 나에 관한 것은 철저하게 관리를 하고 있을 텐데. 과연 저 정보가 어떻게 새어 나간 것인지 의문이었다.
“염치가 있다면, 그런 꼴을 하고 살아갈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겠지. 그렇지 않소?”
그래서 그 아픈 말은 못 들은 척하고 물었다.
“이상해. 왜 네가 굳이 내 도움을 필요로 하지? 이제 나에 대한 신뢰는 밑바닥에 가까울 텐데.”
“다른 수가 없으니까.”
“…….”
“정말로, 그대 외에 내게 남은 수가 없소.”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이어지는 까마귀의 말은 이랬다.
“그날 이후 놈은 끈질기게 우리를 추적했고, 가담자를 붙잡은 다음에는 동전을 던져 생사를 결정했소. 행운의 여신이 그려져 있는 앞면이 나오면 운이 좋다며 죽여 줬고, 뒷면이 나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모습으로 살려 줬지. 도망치는 데 성공한 몇몇도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뿐인 신세니, 다시 놈에게 덤비자고 해도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겁에 질려 벌벌 떨 족속들이오. 그러니 인정하오, 나는 실패했소.”
답하는 어조가 담백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그 말에 신빙성이 있었다. 동전 던지기는 놈과 내가 아카데미 시절 자주 내기를 걸던 것이었다. 그걸로 내 복수를 해 주었다니, 참으로 놈다운 짓거리였다. 문득, 아주 근본적인 부분에 의구심이 들어 물었다.
“그럼 너는 왜 끝까지 놈을 죽이려는 거야? 그것도 못 미더운 나한테 도움을 요청하면서까지.”
“그야, 그 괴물 놈을 죽이는 것이 이 세계의 인류와 평화에 기여하는 길이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까마귀가 웃었다.
“무엇보다 나한테 남은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
복수. 오롯하고도 처절한 복수. 그걸 원하는 눈이 광인처럼 번뜩였다. 나도 결국엔 놈과 다를 바 없느냐며 비난하던 까마귀였다. 그러나 이제 와 돌이켜 보니 그 말에는 일말의 자조가 짙게 서려 있었다. 내가 괴물의 곁에 남기 위해 괴물이 되길 택했다면, 까마귀는 괴물을 사냥하기 위해 괴물이 되길 택했던 것이다.
까마귀는 다음에 찾아올 때까지 답을 생각해 두라며, 놈이 돌아오기 전 사라졌다. 가면을 고쳐 쓰고, 망토 자락을 한 번 펄럭이니 새까만 천이 몸에 착 붙는가 싶더니 이내 전신을 뒤덮었다. 그 상태로 조금씩 작아지던 덩어리 틈에서 빼꼼 하고 까마귀가 머리를 내밀었다. 그렇게 처음에 봤던 커다란 까마귀 형태로 돌아간 녀석은, 빛이 들지 않은 어둠 속으로 총총 걸어 들어갔다.
“자기야, 많이 기다렸지?”
그리고 벌컥, 놈이 문을 열며 등장했다. 우연히 타이밍이 맞았다기보단 놈이 올 것을 알고 사라진 것이 분명했다. 나는 놈을 쳐다봤다가, 까마귀가 걸어 들어간 자리로 한 번 시선을 주었다. 까마귀가 저 어둠 속에서 그대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을까. 아니면, 그림자랑 하나가 돼서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일까.
어찌 됐든 어둠을 이용하는 것이 까마귀의 방법이었다면, 그가 내 몸 상태에 대해 알고 있던 것도 납득이 됐다. 빛과 그림자는 어디에나 있으니, 정보를 얻기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놈이 그것을 몰랐을 것인가. 그게 문제였다. 나야 원체 마법적 재능은 전무한 사람이니 그렇다 쳐도 놈은 아니었다. 타고난 감응력이 뛰어나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기색이 있으면 곧잘 알아차리곤 했다. 그런 놈이 까마귀의 존재를 정말 몰랐을까. 아니면……
“거기 뭐라도 있어?”
그냥 모른 척한 걸까.
내가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자 이상하게 느껴졌는지, 놈이 작은 탁자 위에 가져온 물컵을 내려놓고는 내가 보고 있던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자박자박, 그가 걸음을 뗄 때마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손에 땀이 뱄다. 어쩌지, 말려야 할까. 말리면 말릴수록 더 하고 싶어 하는 그 심보를 알았다. 그렇다면 까마귀가 어련히 알아서 흔적을 정리했으려니 믿고 얌전히 있어야 할까.
어느새 까마귀가 걸어 들어간 어둠이 드리운 경계에서 발을 멈춘 놈이 ‘흠.’ 하고 콧소리를 냈다. 보다 못한 내가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놈이 그 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글 돌더니 나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는데.”
긴장이 탁 풀리는 말이었다. 그러나 티 내지 않고 태연함을 가장했다. 놈을 상대로는 끝까지 방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냥 멍하니 있지도 못해?”
“응, 아무리 허공이라고 해도 질투 나니까.”
놈이 그대로 성큼성큼 다가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붙잡았다. 워낙 손이 크다 보니 그냥 잡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놈이 코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만 바라봐, 자기야.”
이상한 데 한눈팔지 말고.
놈이 샐쭉하니 웃었다. 가늘게 휘어진 눈이 무언가 가늠이라도 하는 양 내 얼굴을 살폈다. 꿀꺽, 침을 삼켰다.
“지랄하지 말고 물이나 내놔라.”
다행히도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놈의 얼굴을 밀어 내자 놈이 의미 모를 얼굴로 웃더니 손바닥 한가운데를 진득하게 핥고 떨어졌다. 으으, 기겁하며 손을 털었는데…… 잠깐만. 생각해 보니까 이 손, 오른손이잖아?
“자, 여기 물.”
“어, 어.”
얼결에 그 손 그대로 컵을 받아 들었다. 그 좆같은 토끼 머그잔이었다. 씨발, 아주 약을 탔다고 광고를 해라. 문득 이 물을 처리할 아주 획기적인 방법이 떠올랐다. 컵을 들어 놈의 머리 위에 거꾸로 들이부었다.
“……자기야, 이건 무슨 뜻?”
뚝뚝, 졸지에 물세례를 맞은 놈의 턱선을 타고 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쫄딱 젖은 생쥐 꼴이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생쥐 같은 귀여운 비유는 놈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쫄딱 젖은 늑대 정도라면 모를까. 놈이 축축한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내 젖은 모습이 보고 싶었다면 말을 하지 그랬어.”
놈이 셔츠의 위쪽 단추를 풀어 헤치며 요사스럽게 웃었다. 알고 보니 늑대도 아니고 여우였다.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놈이었다. 잘 알기만 할까, 너무 잘 써먹어서 문제지.
나는 놈에게 셔츠 단추를 하나 더 풀 것을 명령했다. 놈은 꼭 이럴 때만 얌전하게 말을 잘 들었다. 풀어 헤쳐진 앞섬과 목빗근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 선명한 가슴골이 눈요기 역할을 톡톡히 했다. 솔직히 꼴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방금 허락도 안 받고 내 손바닥 핥았잖아. 누가 그렇게 버르장머리 없이 굴라고 했지?”
“으응, 오랜만에 자기 오른손 보니까 반가워서 인사한 거지.”
“그럼 나도 오랜만에 내 오른손 잘 움직이나 테스트 좀 해 본 건데?”
그나저나 신기하긴 했다. 분명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모차렐라 치즈를 얹은 닭발 신세였는데, 하루 만에 흔적도 남지 않고 복구가 됐으니 말이다. 고작 피 좀 마셨다고. 손을 쥐었다 폈다 하고 있으니 놈이 옆에서 불쑥 끼어들었다.
“자기 그러고 있으니까 꼭 아가들이 죔죔 하는 것 같아.”
안 듣느니만 못한 말이었다. 지금 저 머리통 속에선 이미 나와 결혼해서 2세까지 낳고 애랑 같이 죔죔 놀이를 해 주고 있을 게 뻔했다. 잠깐, 정말로? 놈이 과연 애를 원할까. 눈을 가늘게 뜨고 놈을 위아래로 훑었다.
놈이라면 애새끼 따윈 시끄럽고 징그럽다며 질색을 할지도 몰랐다. 혹은, 의외로 애랑 잘 놀아 주는 성격일 수도 있고. 평소에 덩치 산만 한 성인도 귀엽다 귀엽다고 해 주는데, 애들이라고 못 해 줄 것도 없었다. 그리고 놈이 때때로 보여 주는 비인간성을 고려해 보자면, 애를 무슨 내 피 절반과 자기 피 절반을 섞어서 만든 연금술의 결과처럼 여기는 것도 가능성이 있었다. 부모로서의 사랑은 아니겠지만 반지나 목걸이 같은 증표처럼 아껴 주는 것쯤은 해 줄 만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단지 내 추측에 불과했고, 그 답을 가장 확실하게 알 방법은 역시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이었다.
“야, 너는 애가 있으면 어떨 것 같냐.”
“……자기, 갑자기 임신이라도 하고 싶어졌어?”
애가 있으면 어떨 것 같냐고 묻는데, 자연스럽게 그걸 내 임신으로 연결해 버리는 작태에 어이가 없었다. 아니, 그 이전에 말이지.
“너는 씨발, 내가 남자라는 사실은 아예 대가리에서 지워 버렸니?”
"그 정도야, 마법으로 충분히 극복 가능한걸."
내가 알기로 극복이란 단어는 그런 데 쓰는 게 아니었지만, 그걸 지적하고 나서는 것보다 놈이 마구잡이로 지껄이는 게 더 빨랐다.
“만약 자기가 임신하면 입덧은 내가 할 테니까, 자기는 먹고 싶은 거 사 달라고만 해.”
“됐거든. 너는 밤하늘의 별을 따 달라고 하면 운석 충돌시켜서 행성을 멸망시킬 놈인 걸 내가 모르겠냐?”
“메테오 스트라이크는 요즘엔 그냥 구전되어 온 전설처럼 여기는 추세라 연구하는 사람이 드물긴 한데……. 자기가 원한다면 안 될 거야 없지.”
그 말이 믿음직스럽기는커녕 무섭게만 들렸다. 그게 놈이 의도한 바라면 성공이겠지만. 어쩌면 고대에도 놈 같은 미친놈이 한 명 있어서 마법사가 죄 멸종한 탓에 고대 마법의 대가 끊겨 버린 걸지도 몰랐다. 어느 시대나 미친놈 한 명씩은 있기 마련이니까. 이번 시대의 미친놈이 내 곁에 들러붙어 있다는 사실이 그저 참담할 뿐이었다.
“……진지하게 물어보는 건데, 너는 밤하늘의 별을 따 달라는 연인한테 고대 마법의 비밀을 갖다 바치면 좋아할 것 같니?”
“애초에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연인한테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잖아. 나는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 머저리들이랑은 다르게 진짜 그럴 능력이 있다는 거니까.”
놈이 삐뚜름하게 웃었다. 그래, 그 말이 틀린 건 아닌데……. 역시 미친놈 중에 제일가는 미친놈은 능력 있는 미친놈이었다.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놈에게는 새삼 고개를 내젓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너한테는 뭔 말을 못 하겠다. 나는 분명 너한테 애가 있으면 어떨 것 같냐고 물었거든?”
“자기, 아니면 혹시 나 말고 딴 살림 차린 건 아니지?”
봐 봐, 지금도 의처증에 눈을 까뒤집는 저 독점욕 가득한 새끼가 과연 내 애정의 대상이 늘어나는 걸 용납하긴 할까? 알 수 없었다. 일단 확실한 건, 저 유전자를 보존시킨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크나큰 죄악이라는 것이었다.
“뭐, 자기를 닮은 애라면 좀 봐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그럼, 나를 안 닮았으면?”
그러자 놈이 그냥 웃고 말았다. 나를 안 닮고, 놈과 닮은 애라면……. 내 표정도 절로 썩어 들어갔다. 이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애초에 일어나지 않을 일을 가정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니까 말이다. 물론,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장담은 못 하겠지만. 생각해 보면 내가 되살아난 것만 해도 그 누가 알았을까 싶었다.
……잠깐만, ‘내가 되살아난 것’이라고?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가 묘하게 신경을 갉작였다. 분명 내가 잊어버린 게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나는 잡힐락 말락 하는 가닥을 간신히 부여잡은 뒤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고 보니까 너, 내가 잠들기 전에 내 ‘원래 몸’은 어쨌는지 물었을 때 끝까지 대답 안 했었지.”
내가 되살아나기 위해 새로 몸을 짜깁기해야 했다면, 이전의 몸은 달리 쓸 곳이 없었다. 그런데도 행방을 숨기는 꼴이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잘만 떠들던 놈이 입을 꾹 다무는 게, 전처럼 그냥 넘어가려는 속셈이 틀림없었다.
“정말 안 보여 줄 거야?”
그렇지만 나에겐 내 시체를 직접 확인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놈은 어쩐지 조금 못마땅한 눈치로 팔짱을 끼고 나섰지만, 달리 내 요구를 거절할 구실도 없어 보였다. 정말로 그 몸이 그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면, 보여 주지 못할 것도 없을 테니까. 결국, 놈은 입을 열어 허락의 말을 뱉었다.
“자기가 그걸 원한다면, 당연히 들어줘야지.”
어쭈. 방금까지 고민하던 주제에 태연한 척 대답하는 꼴이 제법 우스웠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채 말을 받기도 전에 놈이 ‘다만.’ 하고 군소리를 덧붙였다.
“작은 문제가 하나 있어.”
“무슨 문제.”
“그 박제 말이야, 여기서 좀 멀리 떨어져 있는 데에 있거든.”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길래 놈이 저렇게 난처한 웃음을 짓나 싶었다. 놈의 성미라면 세상 끝까지 가서 숨겨 놨을 확률도 없지는 않아서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륙 끝자락, 혹은 어디 섬나라의 지명이 온통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을 때, 전혀 예상치 못한 단어가 불쑥 튀어나왔다.
“아카데미.”
“뭐?”
“아카데미에 있어, 자기 몸.”
“……아카데미라고 하면, ‘그’ 아카데미?”
놈이 고개를 주억였다. 즉, 박제한 내 시체를 우리의 모교에 보관해 뒀다는 말이었다. 빌어먹게도 놈다운 발상이었다.
“그 사람 많은 데에 용케도 안 들키고 숨겨 놨다?”
그러자 놈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글쎄……. 그건 일단, 가 보면 알 거야.”
그 말이, 어째서인지 불길하게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