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I Gave You My Heart (2/13)

I Gave You My Heart

“우리 자기는 늦잠쟁이네.”

이제는 코앞에 있는 놈의 얼굴 정도로는 당황하지도 않았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가, 문득 손을 뻗어 놈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머리에 뭘 처바르는 건지, 부들부들하니 감촉이 좋았다.

“머리가 짧네…….”

“으응, 아직 잠이 덜 깼어요? 하긴, 미인은 잠꾸러기라고 하니까. 우리 자기는 어릴 때부터 잠이 많았지.”

내가 머리카락을 만지기 좋게 놈이 나를 고쳐 안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놈의 품 안에서 잠이 깼다. 아직은 잠들기 직전의 기억이 선명하지 않아 그 품에 얌전히 안겨 있었다. 따끈따끈하기도 하고, 묘한 속박감이 기분 좋기도 해서.

“기억나? 자기 아카데미 다닐 때도 맨날 늦잠 자서 내가 깨워 줘야 했잖아.”

“왜 머리가 짧지…….”

“머리 다시 길러 줘? 긴 머리가 더 좋아? 안 어울린다고 내 머리카락 죄다 불살라 버린 건 자기였으면서.”

맞아, 그랬지. 평소처럼 놈이 나를 빡치게 한 일이 있어서 그 머리채를 휘어잡고 흔들다가, 그러는 와중에도 실실 쪼개는 꼴이 보기 싫어서 그냥 확 그 머리카락에 불을 질러 버렸다. 놈은 그 이후로 짧은 머리를 고수했다. 그렇지만, 그게 긴 머리가 안 어울린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나는 슬슬 만지작거리던 머리카락을 놓아 주고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놈은 아쉬운 눈을 숨기지도 않았다. 양심이 있다면 저런 눈을 해 보일 순 없을 텐데 말이다.

“야.”

“왜 불러, 자기야?”

“너, 물에다가 약 탔지.”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무심코 오른손으로 등짝을 갈기려다가 아차 싶었다. 아직도 내 오른손에는 놈의 옷에서 찢어 낸 천 쪼가리가 칭칭 감겨 있는 채였다. 왼손으로 때리면 타격감이 덜한데, 쩝, 입맛을 다시다가 아쉬운 대로 발로 놈을 걷어찼다.

“수프에는 뭐 탔어. 설마, 네놈 정액이라고만 하지 마라.”

“음, 자기가 상상력이 풍부한 건 알았지만……. 다음부터 그렇게 해서 줄까?”

아니라면 됐다. 그럼 그 비린 맛은 뭐였을까. 놈에게 물어보면 답이야 해 주겠지만 호기심이 쥐를 죽인다고, 차라리 묻지 않는 편이 나을 걸 알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게, 생각해 보니까 거기에다가 탄 게 내 정액이었으면 좋았겠다. 돌아와 보니까 자기가 그 수프 접시에 고개를 처박고 있더라고. 얼굴에 온통 끈적끈적하게 들러붙은 게, 어찌나 질투가 나던지…….”

“그러면 씨발, 네가 약을 안 탔으면 될 일 아냐.”

“어쩔 수 없었어. 내가 없는 동안에 자기 혼자서 심심해할 거 아냐. 그래서 일부러 약도 귀한 거로 썼는데, 머리 안 아프지?”

아팠다. 약 때문이 아니라, 저놈 말본새 때문에. 골이 다 울리는 기분이라 신경질적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니, 놈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해 보였다. 저, 저, 가증스러운 것. 품 안에서 벗어나려 아등바등 애를 쓰자 놈이 더 나를 꽉 끌어안았다.

“음, 자기야. 지금 자기 가운 하나만 걸치고 있는 거 알지?”

“뭐. 너랑 나랑 볼 장 다 본 사이인데.”

“그거야 그렇긴 한데……. 지금 여기에 자기랑 볼 장 아직 덜 본 손님이 한 분 계시거든.”

뭐, 손님? 그제야 놈의 너른 어깨 너머로 푹 로브를 눌러쓰고 있는 인영이 보였다. 나랑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리는 꼴이, 마치 ‘난 아무것도 못 봤어요.’ 하고 외치는 모양새였다.

“자기야, 질투 나게 어딜 봐.”

“너 이 새끼…….”

“응?”

“다른 사람이 있었으면 말을 해 줬어야지!”

놈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그래서 지금 말해 줬잖아.’ 하는 목소리가 절로 따라 들렸다. 아이고, 두야. 머리를 짚으며 내가 이제껏 무슨 말을 했는지 곰곰이 되짚어 봤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도 남들에게 보이지 못할 추태를 부린 건 분명했다.

음, 그냥 다시 죽어 버릴까. 그러면 내가 이런 수모 겪을 일도 없을 텐데. 그러나 머릿속으로 각기 다른 자살 플랜을 열 개 정도 돌려 봐도, 번번이 어디선가 방해하는 놈이 튀어나와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놈을 살해하는 플랜을 열 개 정도 돌려 봤다. 생각해 보니까 나는 이미 한 번 죽었는데 또 죽는 것도 억울했다.

“자기야, 다 했어?”

“아니.”

“응, 다 하면 말해. 그리고 우리 손 치료받자.”

그러면서 천으로 칭칭 감긴 손을 가져다가 쪽쪽 입술을 문대는 꼴이 퍽 다정하기도 했다. 지금 속으로 자기를 죽이는 갖가지 방법을 떠올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니, 기다려 준다는 걸 보니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중요한 건 놈이 드디어 내 손을 고쳐 줄 사람을 데리고 왔다는 사실이었다.

“내 손, 고칠 수 있대?”

“일단 봐야 안대.”

놈이 조심스럽게 오른손에 감긴 천을 풀어냈다. 천에 찐득하게 살점이 눌어붙었다가 떨어졌다. 드문드문 하얀 뼈가 드러난 오른손은, 굳이 표현하자면 모차렐라 치즈를 얹은 닭발의 청소년 관람 불가 버전이었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아무것도 못 느꼈던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한 번 죽었다 살아나면 통증도 사라지나?”

“글쎄, 그런 말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니, 너 말고. 저기 있는 음침로브한테 물은 건데.”

그러자 자기를 부를 줄은 몰랐는지, 또다시 화들짝 놀라는 로브 놈이었다. 그러면서도 ‘음침로브’가 자기를 말한 게 맞는지 영 확신을 못 하는 꼴이, 어쩐지 멍청해 보여 신뢰도가 확확 깎였다.

“그래, 너. 너 부른 거 맞아. 너 말고 여기에 음침로브라 부를 만한 사람이 또 어딨다고.”

“으, 으응…….”

“꼬락서니 보니 견적 나오네. 100m 밖에서 봐도 흑마법사 재질인데, 이거 고칠 수 있겠냐?”

음침로브가 잘 볼 수 있도록 오른손을 들어 흔드는데, 닭발에 묻어 있던 모차렐라 치즈가 다시 주르륵주르륵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에 기겁하는 건 당사자인 나도 아니고, 녹아내린 살점이 옷에 튄 놈도 아닌, 멀리서 보고 있던 음침로브였다. 일순 경악한 그는 허둥지둥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어, 어, 그걸, 그렇게 흔들면 안 되는데…….”

그 더듬는 말씨를 듣고 있자 하니 문득 생각나는 놈이 있었다. 직전까지 걔가 나오는 꿈을 꿔서 그런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일단 흔들던 오른손을 멈췄다. 음침로브가 그걸 잡아서 자세히 살피려는데, 가로막는 손이 있었다.

“보기만 해. 닿지는 말고.”

어이없는 눈으로 놈을 올려다보자 놈이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말았다. 하긴, 지금 내가 입고 있는 가운도 질투할 놈이었다. 뭘 기대하지를 말아야지. 음침로브는 놈의 난데없는 견제에도 당황하지 않고 물었다.

“일단, 다른 때에는 감각이 있었지? 지, 지금 오른손만 통각이 없다는 거지?”

기억을 되짚어 보니 그랬다. 놈이 물어뜯은 입술이나 다른 살갗도 따끔거렸고, 목욕할 때 수온도 다 느껴졌다. 고개를 끄덕이자 음침로브가 마저 말을 이었다.

“응, 그게, 사실 안 아픈 게 당연해. 왜냐면 ‘붕괴’는 네 육체가 워,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하는 성질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거든. 그러니 아플 리가 없지. 오, 오히려 네가 지금 멀쩡히 살아 움직이는 게, 더 이상한 거니까…….”

즉, 애초에 이미 한 번 죽은 몸을 되살린 것이니 점점 좀비화되는 게 당연하다는 뜻이었다. 어설픈 인상에 비해 꽤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음침로브는 내 오른손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말했다.

“그렇지만 확실히, 붕괴가 이렇게 빨리 진행되는 건 이상해. 뼈, 뼈는 다행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고…… 근육 조직은 대부분 무너져 내렸네. 붕괴가 시작된 지 얼마나 됐다고?”

“아직 하루도 안 지났어.”

“막은, 제, 제대로 다 먹인 거지?”

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놈의 막. 내가 어제 그걸 다 처먹느라 생고생을 했는데. 얘기하는 걸 들어 보니 단지 놈이 날 엿 먹이려고 벌인 짓은 아니고, 정말로 모종의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그거네, 그, 손 주인이 너를 생각보다 안 사랑했나 보다.”

“뭐?”

그게 대체 무슨 뜻이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에 인상을 찌푸리니, 음침로브가 고개를 갸웃대며 말했다.

“서, 설명 못 들었어?”

“응. 내가 제발 들려주세요, 하고 사정해도 안 들려주던데.”

“자기가 언제 그랬어. 설명 안 하면 내 머리털을 죄 뽑아 놓을 거라면서 협박을 했지.”

“뭐, 그게 그거잖아.”

어쨌든 설명을 안 해 준 건 놈의 잘못이 맞았다. 그런데도 태연자약하게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꼴에 기가 다 찼다. 내가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으니 치아 상한다며 그 사이로 손가락을 물려 주는 것이 화룡점정이었다. 음침로브가 딴생각을 하느라 그 어이없는 꼴을 보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그는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로 한참을 망설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원리는 생략하고 겨, 결론만 말하자면…… 너를 되살리기 위해 제물로 쉰 명을 바쳤거든? 그중에 일곱 명은 네 육체를 구성하는 데 쓰고, 나머지는 그걸 품어 주는 역할을 했어.”

"둘이 뭐가 다른 건데?"

"육체를 구성한다는 건, 머리, 몸통, 두 팔, 두 다리, 그리고 심장, 이렇게 해서 총 일곱 부분을……."

음침로브가 허공에서 두 손을 휘적거리며 뭔가를 짜 맞추는 듯한 동작을 해 보였다. 어젯밤 보았던 것과 같은 토막 난 시체를 인형 끼우듯 저렇게 짜 맞췄다는 얘기다. 한마디로, 내 몸은 너덜너덜한 조각보와도 같다는 뜻이었다.

“그, 그렇다고 남이 쓰던 거라고 불쾌해할 필요 없어. 어차피 이 주술 자체가 그렇게 기운 몸을 온전한 네 소유의 몸으로 만드는 과정이니까……. 실밥 자국도 안 남았고, 혀, 형태도 네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너의 몸이잖아? 재료만 빌려 썼지, 결과물은 완전히 다르다고 보면 돼. 마치 요리나, 뜨개질처럼.”

“……너는 내가 지금 불쾌해하는 게 남이 쓰던 몸 빌려 써서 그런 것 같니?”

“……아, 니야?”

쟤도 참 대단했다. 사람 셋이 모였는데 이 중 멀쩡한 놈이 한 놈도 없는 게 한숨만 나왔다. 하긴, 결국 사람은 끼리끼리 놀기 마련이니까.

“어쨌든 중요한 건, 제물로 쓸 쉰 명은 전부 다 너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

“애정?”

“꼭 애정일 필요는 없지만, 애정이 가장 성공률이 높아. 그, 그보다 강력한 매개체는 드물거든.”

그 말에 여태 가만히 있던 놈이 한마디 덧붙였다.

“죽은 자를 붙잡는데 산 자의 미련만 한 게 없지.”

그러니까 지금, 나를 살리기 위해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 쉰 명을 죽였다는 얘기다. 뭐 그런 주술이 다 있어, 내가 할 말을 잃고 실소하든 말든 음침로브는 조곤조곤 설명을 이어 갔다.

“그래서 정상적으로 주술을 마쳤는데도 네 오른손이 무너져 내리는 건 아마 거부 반응……. 그러니까, 그, 재료로 쓴 사람이 생각보다 너를 안 좋아했던 탓일 확률이 커.”

“그게 누군데?”

“네, 네 어머니인데…….”

음, 그렇다면 이해가 됐다. 그 양반 나를 별로 안 좋아했으니까. 슬쩍 놈을 돌아보자 놈이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친부모가 아닌 건 알았지만, 자기 장례식에서 하도 구슬프게 울길래 괜찮을 줄 알았어.”

“시, 실제로도 주술이 실패하지 않고 어떻게든 성공한 걸 보면 너를 싫어한 건 아닐 거야. 그냥 조금 덜 좋아했을 뿐인 거지.”

“지금 그걸 위로라고 하는 거면 다시는 하지 말자, 친구야.”

그러자 음침로브가 바로 입을 닫았다. 그래도 물에 빠트리면 입만 동동 뜰 것 같은 누구랑은 다르게 말은 잘 듣는구나 싶었다.

“차, 참고로 네 왼쪽 팔은 아버지 걸 썼어. 그러니까 적어도 네 아버지는 널 좋아했을 거라는 뜻이야.”

그리고 5초 만에 방금 그 생각을 철회해야만 했다. 이러니까 흑마법사들이 친구가 없지.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그래서, 정리하자면 내 어머니가 생각보다 나를 별로 안 좋아해서 지금 내 오른손이 이렇게 녹아내리고 있는 건데…….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싶지만 일단 넘어가고, 그러면 어떻게 고칠 방법이 있긴 있는 거야? 뭐, 강령술이라도 해서 어머니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어야 하나?”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한데, 손이 좀 많이 가고 어려워서…….”

농담 삼아 내뱉은 말을 진담으로 받는 게, 어쩌면 일부러 저러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나마 제일 손쉬운 방법은, 음, 녹아내린 육체를 갈아 치우는 거야.”

“그게 나를 좋아하는 한 명을 더 죽이겠다는 얘기면 집어치워라.”

“그게 싫으면…… 여, 열심히 먹어 치워야지.”

열심히 먹어 치워? 뭐를? 시체 더미를 싸고 있던 막은 저번에 한 점도 남김없이 전부 다 먹어 치웠다. 여기서 더 먹을 게 있나. 이왕이면 그게 평범한 밥과 물이길 바랐지만, 그렇게 자비로우면 흑마법일 리가 없었다.

“시간도 좀 걸리고, 고통스럽기도 고통스럽겠지만…….”

“그래서, 뭘 먹으라는 건데.”

“주, 주술에 썼던 제물들?”

“……그거 설마, 지금 나보고 인육을 먹으란 소리야?”

이쯤에서 내 인생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 보자면 이랬다. ‘언제나 지금이 가장 최악의 순간인 줄 알지만, 그보다 더한 최악의 순간이 기다리고 있다.’ 그건 바로 이 순간에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나는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내 의지랑은 전혀 상관없이 다시 살아난 그 순간이 가장 최악인 줄 알았다가, 그 막인가 뭔가 좆같은 걸 다 처먹은 순간이 가장 최악이라고 생각을 고쳤다. 그런데 막으로도 모자랐는지, 이제는 아예 나보고 시체를 먹으라고 한다. 나는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나 그냥 오른팔 없이 살면 안 될까……?”

그러자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안 돼.”

“왜 안 돼.”

“부, 붕괴를 그냥 놔두면 지금은 오른팔이지만…… 나중엔 전체가 무너질 거야. 특히나 시간이 지날수록 가속화되어서 초기에 바로잡아야 해.”

어쩜 사는 게 이리 거지 같을 수가, 아니다, 거지도 아마 날 보면 형님, 하고 한 수 접고 들어갈 테다. 마음만 같아선 그냥 그렇게 무너져 내리면 좋겠는데, 놈이 순순히 그걸 허락할 리가 없었다. 결국, 나는 누가 들어도 내키지 않아 보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 다른 방법은 없어?”

“정 그러면, 오, 오른팔 자리에 촉수를 대신 붙이는 방법이…….”

“그거 말고.”

그러자 음침로브가 힐끔 놈의 눈치를 살폈다. 왜, 놈이 들으면 안 되는 말이라도 있나? 여차하면 놈을 방 밖으로 내쫓거나 로브를 데리고 방 밖으로 도망갈 계획을 세우는데, 그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음, 다른 방법도 있긴 있는데, 그건 효율이 낮고…….”

“내가 지금 효율 따질 상황으로 보여?”

나는 로브의 멱살을 콱 잡아서 훅 하고 당겼다.

“말해.”

그나저나 이게 무슨 냄새람. 음침로브를 가까이 끌어당기면 당길수록 묘한 썩은 내가 났다. 하긴, 내가 아는 마법사도 연구 하나 시작했다 하면 몇 날 며칠을 씻지도 않고 살았으니 너그럽게 이해해 주기로 했다. 졸지에 멱살이 잡힌 음침로브는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그, 너한테 심장을 제공해 준 사람이라면…… 굳이 전부를 먹어 치울 필요까진 없을 거야.”

“그렇게 끌리는 방법은 아닌데, 나한테는 전부를 먹나 일부를 먹나 거기서 거기라서.”

“그러니까, 살 말고도 혈액이라든지, 타액으로도 효과가 있을 거라는 얘기야.”

오, 그건 좀 끌리는 얘기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피는 그렇다 치고. 시체에서도 타액이 분비되나?”

그 말에 음침로브가 눈을 깜빡거리더니, 다시금 놈을 쳐다봤다. 놈은 별말 없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야, 왜 또 둘만 아는 세계에 가 있어. 이즈음 됐으면 나도 끼워 줄 때 되지 않았나? 불만 가득한 눈으로 둘을 번갈아 째려보자, 결국 음침로브가 입을 열었다.

“이 주술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게 바로 심장이거든. 시, 심장을 기준으로 육체가 결집하고, 심장이 그렇게 결집한 육체를 유지하는 역할을 해서……. 심장의 제공자, 그러니까, 심장의 원주인은 그 누구보다도 너에 대한 애정이 강한 사람이어야 돼.”

“그래서, 그게 뭐 어쨌는데.”

“그, 그 누구보다도 널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니까……?”

“그러니까, 그게 뭘 어쨌다고…….”

순간 머리를 강타하는 깨달음에 퍼뜩 고개를 돌려 놈을 쳐다봤다. 설마, 아니지? 그러자 놈이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놀고 있네, 진짜. 인상을 팍 구기고는 음침로브에게 따지고 들었다.

“저 새끼가 나한테 자기 심장을 떼어 줬다고?”

“으응, 맞아.”

“보통 사람이 심장 없이 살 수 있어?”

“아니, 지……?”

“그런데 저 새끼는 살아 있는데?”

“그렇지……?”

“저 새끼가 심장을 나한테 떼어 줬다면, 지금 저 새끼가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는 건데?”

“그야,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

아오, 복장 터져. 답답한 마음에 가슴팍을 쿵쿵 내려쳤다. 물론 내 가슴팍 말고, 놈의 가슴팍을. 안 그래도 억울해 죽겠는데, 자해까지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놈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 심장의 주인이 쟤란 말이지. 쓸데없이 로맨틱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그 실체가 원하지 않은 장기 이식이라면 또 얘기가 달라졌다. 그래도 시체를 뜯어먹을 일은 없게 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타, 타액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거야.”

“맞아, 입술이 부르틀 때까지 비벼 댔는데도 지금 자기 손이 이 모양 이 꼴인 걸 보면.”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 놈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음침로브는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말했다.

“그, 그래서 타액은 평소에 현상 유지하는 용으로 쓰고 지금 같은 위급 상황에는 혈액을 쓰는 걸 추천해. 아무래도 타액보다는 정액이, 정액보다는 혈액이, 혈액보다는 살점이 더 효과가 좋을 테니까…….”

선택지가 타액과 혈액에서 한 가지 더 는 것 같은데, 나는 굳이 그걸 지적하고 나서기보단 망연히 중얼거리는 쪽을 택했다.

“이건 뭐, 흡혈귀라고 해야 하나, 식시귀라고 해야 하나, 색귀라고 해야 하나…….”

“나는 색귀가 제일 섹시한 것 같아, 자기야.”

“닥쳐. 누가 네 의견 궁금하다고 했니?”

살아난 것도 억울한데, 졸지에 팔자에도 없는 마물 행세를 하게 생겼다. 문득 아카데미 앞에서 진을 치고 ‘흑마법도 마법이다!’ 하는 구호를 외치던 흑마법사 연대가 생각났다. 나는 이제 그 앞에 가서 당당히 외칠 수 있었다. ‘흑마법은 씨발이다!’ 하고.

“그리고 혈액으로도 부족한 상황에는, 여차하면 제, 제물을 먹을 각오도 해 두는 게…….”

“와, 그 방 미리 치워 버렸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렇지, 자기야?”

그 방이라고 하면, 시체 더미가 잔뜩 쌓여 있는 그 방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차라리 깡그리 치워 버렸다면 선택의 여지조차 없었을 텐데, 나는 쯧 하고 혀를 찼다. 이제 테이블 위에 올라오는 육류는 엔간해선 먹지 말아야지, 결심을 다지는데 음침로브가 거기서 한마디를 더 얹었다.

“야, 약도 중독되지 않는 선에서 아낌없이 쓰는 걸 추천해.”

“그건 또 왜.”

“육체가 부, 붕괴하는 건 고통이 없다고 해도…… 다시 새 살이 돋고 뼈가 자라나는 건 만만치 않게 고통스러울 테니까.”

좋아, 이제 매 식사에 약도 같이 섞여서 올라오겠군. 저 새끼는 유난히 저런 말만 잘 들어서 소금이랑 후추 대신에 약으로 간을 할 놈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조만간 테이블 위에 먹을 수 있는 게 단 하나도 남지 않는 날이 올지도 몰랐다.

“쓸데없는 조언 정말 고오맙다.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네…….”

“으, 으응. 별것 아닌데 뭘.”

역시, 저 새끼는 일부러 저러는 게 틀림없었다. 슬그머니 풀어 주었던 음침로브의 멱살을 다시 틀어쥐자, 놈이 옆에서 만류하기를……

“자기야, 고마운 건 알겠는데 그 손은 그만 놓자. 질투 나잖아.”

……란다.

“솔직히 말해 봐. 너희 둘이 나 미치고 팔짝 뛰는 꼴 보고 싶어서 단합했지?”

“자기야,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나랑 한 세트로 엮일 수 있는 사람은 자기뿐인 거 알잖아.”

“나, 나도 쟤랑 엮이는 건 별로…….”

입을 다물고 있으면 반이라도 갈 텐데, 결국 나는 뻗치는 성질을 못 참고 음침로브의 멱살을 짤짤 흔들었다. 팔랑팔랑 나부끼는 그 종잇장 같은 몸이 아무리 흔들어 대도 돌덩이같이 꿈쩍도 안 하는 놈의 몸과는 사뭇 비교됐다. 그러다가 툭, 데구루루 하고 뭔가가 멱살을 잡은 내 왼손 위로 떨어졌다.

잠시 손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동그란 덩어리 하나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내가 본 게 틀리지 않았다면, 저건 분명 신경이 더덕더덕 붙어 있는 눈깔이었다.

잠깐만, 눈깔이라고?

“아, 시,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야, 너…….”

당황한 찰나에 음침로브가 몸을 숙여 그 눈깔을 주웠다. 순간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쟤는 눈깔이 빠졌는데 왜 저렇게 태연하지? 쟤 눈깔이 아닌가?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로브 속에 얼핏 보이는 얼굴에 한쪽 눈이 텅 비어 있는 걸 보니 역시 쟤 눈깔이 맞았다. 설마 내가 흔들어서 떨어진 건가? 내가 그렇게 힘이 셌나? 그러나 혼란의 도가니에 빠진 나와 달리 음침로브도, 놈도, 평온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지금 내가 이상한 거야?”

“전혀 이상해할 것 없어, 자기야.”

“아니, 사람 눈깔이 빠졌다고. 멀쩡한 사람 눈깔이, 툭 하고…….”

내 왼손 위를 스치고 간 그 물컹한 감촉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러자 놈이 그 왼손을 거둬 가서는 손등의 검붉은 얼룩을 슬슬 닦아 없애 줬다.

“그야 쟤, 멀쩡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건 또 뭔 소리냐. 놈은 차근차근 설명하는 법이라곤 아예 모르는지, 언제나 원인과 결과가 있으면 결과만 딱 던져 주고 말았다. 얘기를 못 알아먹은 걸 뻔히 알면서도 가타부타 덧붙이는 말이 없는 게 더 악취미였다. 결국, 보다 못한 음침로브가 입을 열었다.

“나, 나도 네게 바쳐진 제물 중 한 명이니까.”

“뭐?”

“옛날 옛적, 과거 어느 날…… 새,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나를 찾아왔어. 그, 그 잘나신 몸이 일개 흑마법사 따위를 찾아오실 줄 그 누가 알았을까.”

갑자기 음침로브가 옛날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난데없는 이야기에도, 나는 이야기 속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바로 놈이라는 사실을 곧장 알아차렸다. 사실,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더 이상했다. 문득 올려다본 놈의 미간에는, 깊게 골이 파인 채였으니까.

“사, 사자소생술에 관해 묻는 거야 별로 놀랍지도 않았어. 하루에도 많으면 열댓 명씩은 찾아오곤 하니까. 흑마법이면 대충 아, 악마랑 계약하고 영혼을 팔아넘기고 원하는 걸 얻는 줄 아는 그런 대가리 빈 것들……. 아, 그렇다고 네 대가리가 비었다는 말은 아니고.”

“그래, 말을 잘 골라서 해야 할 거야. 알지?”

당장이라도 저 나불거리는 아가리를 으깨 버리고 싶은 눈으로 놈이 웃었다. 그러자 음침로브가 슬슬 놈의 눈치를 살피며 마저 말을 이었다.

“으응, 내, 내가 놀랐던 건 그러니까…… 사자소생술에 관해 묻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걸 물어보는 사람이었어. 그리고 곧장 전후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지.”

“…….”

“그, 그도 그럴 게 정말 폐인도 그런 폐인이 따로 없었거든. 설마 예전의 그놈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몰골이었어. 그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놈을 그렇게 처참하게 망가뜨릴 수 있는 사람이야, 내, 내가 알기론 딱 한 사람밖에 없었으니까.”

그 순간 나는 미간에 골이 파일 정도로 놈이 짜증을 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기 싫어서였겠지. 조금 착잡해졌다. 물론 내가 죽었는데 멀쩡한 꼴은 아닐 걸 알았지만, 그래도 잠깐 슬퍼하다가 말 줄 알았으니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나 궁금해서 따, 따라가 봤더니 거기에 정말 오랜만에 보는 네가 있더라. 유리관에 무슨 공주님처럼 얌전히 모셔져 있었어.”

“으엑, 취향하고는.”

“그, 그래도 살아생전 그대로의 모습을 박제해 놓는 게 보통 기술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니까……. 어차피 주술로 새로운 몸을 만들 생각이었지만 조, 조금 아깝긴 했어.”

놈도 그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그때 너를 되살리는 주술을 걸어 주기로 했어. 내, 내가 가장 첫 번째로 바쳐지는 제물이 되는 조건으로다가.”

“……그래도 되는 거야?”

“주술이라는 게, 일단 시작만 열어 두면 그 이후에는 주술사의 역할이 크게 필요하지 않거든. 제물 공수해 오는 거야, 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아니, 주술사가 죽어도 주술이 유지되는지 물어본 게 아니라. 자신을 그렇게 쉽게 제물로 바쳐 버려도 되는지를 물은 건데……. 돌아온 대답은 약간 핀트가 엇나가 있었지만, 그래도 충분히 답이 됐다. 응, 쟤는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게 아무렇지 않은 놈이구나, 하고.

“그나저나 제물로 바쳐졌다는 건 그때 죽었다는 뜻이잖아. 그럼, 너도 나처럼 되살아난 거야?”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자 뒤에서 나를 안고 있던 놈이 말했다.

“자기는 유일무이한 존재야. 자기를 되살리기 위해선 두 번은 구하기 어려운 재료들과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 밖의 정교한 작업, 그리고 그 무엇보다 엄청난 운이 필요했으니까. 쟤는 그냥, 자기 몸에 생긴 이상을 봐주기 위해 내가 잠깐 불러낸 것에 불과해.”

“그, 그리고 이제 슬슬 돌아갈 때가 된 거지…….”

기분 탓인지, 음침로브가 말을 할 때마다 풍기는 썩은 내가 점점 짙어졌다. 놈이 옷소매로 슬쩍 내 코를 가려 줄 정도였다. 이제는 그게 단지 안 씻어서 나는 냄새가 아닌 걸 알았다. 그건, 정말로 시체가 실시간으로 부패하는 악취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제껏 나랑 멀쩡하게 대화한 사람이 사실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고, 심지어 나를 되살리기 위해 제물로 바쳐진 사람 중 한 명이었다니.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몰라도, 그걸 본 음침로브가 말했다.

“이, 있잖아. 제물로 바쳐진 사람 중에는 물론 강제로 끌려온 사람도 있었지만…… 나처럼 스스로 지원한 사람들도 많았어. 아까 말했잖아. 제, 제물로 쓸 사람들은 모두 너를 사랑해야 한다고.”

“나는 바란 적 없는 일이야.”

딱 잘라 말했다. 그러자 돌아오는 답이 더 가관이었다.

“맞아. 우리 모두 우리가 원해서 했던 일이지. 그러니까 내 말은, 새, 생각보다 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거야. 비록, 너는 평생을 가도 모르겠지만.”

그건, 마치 저주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그 말마따나 나는 평생을 가도 내게 제물로 바쳐진 쉰 명이 누군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설령 이름을 듣더라도 누군지 기억조차 해내지 못할 사람들이 많을 테지.

“……이해가 안 돼. 나는 네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알아, 나도, 나도 내가 왜 너를 사랑했는지는 모르겠어.”

그러면서 실실 웃는 게, 그가 죽었을 때의 나이가 내 생각보다 어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웃음이 이유도 모르면서 첫사랑을 하는 소년의 것을 닮았기 때문이었다. 허탈하지만 절대 후회하지는 않는, 그런 미소.

그걸 보면서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아무리 음침해 보이는 흑마법사도 남들과 같이 사랑을 앓는구나. 다만 그는 그냥 내버려 뒀다면 스쳐 지나가는 열병이었을지도 모를 것에 목숨까지 걸었을 뿐이다. 결코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우리 모두 너를 사랑해.”

“…….”

“그러니까 죽지 마.”

그렇게 말하는 음침로브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로브 안의 얼굴은 아까 떨어진 눈알을 시작으로 서서히 썩어 내리고 있었다. 마치 내 오른손처럼 흐물흐물 뭉개지는 얼굴은 드문드문 하얀 뼈가 드러날 지경에 이르렀다. 빈말로도 곱다고는 못 할 얼굴이 내게 사랑을 고백하고 있는데, 어쩐지 혐오스럽게 느껴지진 않았다.

내가 자기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음침로브가 로브 윗부분을 잡아서 푹 끌어 내렸다. 아마도 보이기 역겨운 얼굴이라고 생각한 거겠지. 나는 아직도 코를 막고 있는 놈의 소매를 잡아 치웠다. 썩은 내는 점점 강해졌으면 강해졌지, 약해지지는 않았으나 이상하게 아까보다는 견딜 만했다.

“있잖아.”

“으, 으응?”

“너, 방금은 말 안 더듬었네.”

그러자 음침로브가 고개를 푹 숙이며 떠듬거렸다.

“이건, 그러니까, 연습해서 그래.”

“연습?”

“너, 너 다시 만날 때 들려주려고……. 사랑한다는 말만큼은 안 더듬고 말해 주고 싶었어.”

그 말에 내가 어이없다는 듯 웃자 음침로브는 왜 웃는지도 모르면서 좋다고 따라 웃었다. 고백할 때 말을 더듬어선 안 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제물로 바쳐지는 건 상관없는 흑마법사의 생각이야, 내가 평생을 가도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겠지만.

“그리고 연습할 때, 쟤가 많이 도와줬어.”

“이 새끼가 널 도와줬다고?”

“응, 그, 그래 봤자 이 세상에서 너를 제일 좋아하는 건 자기일 거라고 가소롭게 쳐다보던데…….”

얘가 그럴 놈이 아닌데 웬일로 호의를 베풀었나 싶어서 쳐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어지는 뒷말이 있었다. 고작 그걸 가지고 잘난 척 거드름을 피웠다는 게 기가 막혀서 말했다.

“아니,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자기일 거라는 말이면 또 몰라. 나를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자기일 거라고 자부심을 느끼는 게 말이 돼?”

“그야 전자는 당연한 거고, 자기야. 후자는 내가 내 힘으로 당당하게 노력해서 이룬 업적인걸.”

그래, 너 잘났다. 음침로브는 이렇게 알콩달콩 깨를 볶는 광경에 질투도 안 나는지 속없이 웃기만 했다.

“야, 너는 나 좋아했다면서. 연적 하나 없애는 셈 치고 이 새끼 죽여 버릴 생각은 안 했냐?”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자기야,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저 연약한 놈이 내 대적자가 되겠어?”

음, 그렇긴 하지. 바로 납득해 버린 나에 비해 음침로브는 얕보는 것을 숨기지도 않는 그 말에 발끈했는지 무어라 대거리를 해 댔다.

“그, 그것보다는, 그냥 인정해 준 거지.”

“인정? 뭘 인정해. 이 새끼 집착은 신의가 와도 구제 못 할 수준이라는 거?”

“아니, 네게 심장을 줄 사람은 쟤밖에 없다는 거. 소, 솔직히 나도 내 심장을 바치려는 시도를 안 해 본 건 아닌데, 내 사랑은 그 정도까진 아녔나 봐.”

산뜻한 말투와는 다르게 꽤 아쉬움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반면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나름 음침로브도 나의 가장 첫 번째 제물 자리를 자처할 정도로 나를 좋아했을 텐데, 그보다 더한 사랑은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그리고 네가 눈 떴을 때 쟤가 없으면 넌 바로 따라 죽을 사람이잖아.”

그 말도 맞긴 맞았다. 쟤가 나를 언제 봤다고 저렇게 잘 알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의심이 가는 건 한 사람밖에 없었다.

“야, 너 이름이 뭐냐.”

“응?”

“내가 지금 짐작 가는 놈이 딱 한 명 있는데, 마침 걔 이름이 기억 안 나거든?”

그러자 음침로브가 눈을 두어 번 끔뻑이더니 의미 모를 말을 해 댔다.

“걔 이름만 기억이 안 나?”

“뭐?”

“잘 생각해 봐. 네가 잊어버린 게, 과연 걔 이름만일 것 같아?”

얼굴을 팍 구겼다. 이런 수수께끼는 딱 질색이었다. 그러면 그렇다, 아니면 아니다, 딱 잘라서 말해 주면 어디가 덧나기라도 하냐고. 나는 왼손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짜증 어린 목소리를 냈다.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해 주면 안 돼?”

“보, 본인이 알아내지 못하면…… 내가 무슨 말을 해 줘도 의미가 없을 거야.”

“너 지금 이름 말해 주기 싫어서 수 쓰는 거지. 알았으니까 이것만 말해 줘 봐. 너 나랑 같은 아카데미 나왔냐?”

“글쎄, 네가 그렇게 믿고 싶으면 그렇게 믿는 거지.”

음침로브는 말귀 못 알아먹는 척하는 데만 재주가 있는 줄 알았더니, 무슨 속세를 벗어난 선인처럼 선문답하는 데도 재주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순순히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야.”

“으응?”

“내가 뽀뽀해 줄 테니까, 힌트 하나만 줘라.”

콜? 눈웃음 지으면서 묻자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지금쯤 자기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귀를 의심하는 중일 터였다. 대답이 없으면 내 멋대로 콜인 걸로 생각하지, 뭐. 내 뒤를 단단히 지키고 있는 놈이 나를 붙잡기 전에, 재빨리 그 로브 속의 얼굴을 붙잡고 대충 입으로 추정되는 곳에 입술을 비볐다.

쪽 하는 귀여운 소리 대신 퍽 하고 뭉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입술에 물컹물컹한 살점이 잔뜩 묻었다. 에퉤퉤, 입 안에 들어갔어. 이로써 나는 지상 최고의 미친놈과 뽀뽀한 사람뿐 아니라 썩어 가는 시체와도 뽀뽀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왼손으로 열심히 입술을 문대고 있는데, 문득 고개를 들자 허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두 남자가 보였다. 한쪽은 꼭 한눈판 찰나에 뭔지 모를 무언갈 주워 먹은 고양이를 보는 얼굴이고, 다른 한쪽은 돈이 없어서 장기를 판 바로 다음 날 복권에 당첨됐다는 소리를 들은 얼굴이었다.

“바, 방금 그 일은…….”

“없었던 거로 하자.”

그래 놓고 일을 친 당사자는 빼고 둘끼리 합의를 보기까지 했다. 그래, 나는 모르는 일이다. 알아서들 놀아라. 뒤로 벌러덩 드러누웠더니 연이어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구태여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데굴데굴, 내 발치로 음침로브의 머리통이 굴러왔으니까.

놈의 없던 일로 하자는 말이 이런 뜻이었는지, 그 짧은 사이에 음침로브의 목을 참수해 버린 모양이었다. 그냥 놔뒀어도 어차피 곧 썩어서 죽어 버렸을 텐데, 하긴, 놈한테 참을성을 기대하는 게 더 말이 안 되긴 하지만.

음침로브는 머리가 잘린 뒤에도 잠시 살아 움직이는 물고기나 곤충처럼 나를 향해 입술을 뻐끔거렸다. 아무래도 성대가 없으니 소리가 되어 나오진 않는 모양이었다. 심지어는 입술 대부분이 뭉개진 채라 독순을 하기도 여의치 않았다.

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을 ……마?

열심히 해석하고 있는데, 이내 퍼석 소리와 함께 그 머리통이 누군가의 발밑에서 무참하게 으깨졌다. 그 길쭉하게 뻗은 다리를 타고 시선을 위로 옮기자, 놈이 단단히 화가 났는지 표정이랄 게 없는 낯을 하고 있었다. 그제야 찰나의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딱 네 음절짜리의 깨달음이었다.

아, 좆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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