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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문 진화의 시작-504화 (504/505)

00504  끝나지 않는 전쟁  =========================================================================

504. 끝나지 않는 전쟁

송이의 딱한 사정을 듣는 순간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코요테의 새끼를 잡고 구한 각성의 씨앗 다섯 명 분량은 이미 서인과 아영의 동생을 각성시켜주기로 이미 약속한 상태였다.

송이의 남동생이 시간이 많다면 시베리아 미스트 존을 정리하고 도와줘도 되지만, 살 수 있는 날이 길어야 한 달이라 시간이 없었다.

산동네 지하 단칸방에 네 식구가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내가 어릴 적 살던 집은 겨울엔 턱이 덜덜 떨릴 만큼 추웠고, 여름은 덥고 눅눅해 곰팡이가 피어 코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튼튼한 사람도 병들어 쓰러질 만큼 열악한 곳으로 루게릭병 환자인 남동생의 고통은 내가 느꼈던 것보다 더욱 컸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고통은 아픈 동생도, 자식을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니는 아빠와 엄마도 아닌 송이였을 것이다.

부모는 돈 번다고 온종일 밖을 쏘다녀 움직일 수 없는 동생을 돌봐줄 사람은 송이밖에 없었다.

학교를 마치면 쏜살같이 집에 돌아온 송이는 오물이 잔뜩 묻은 남동생의 기저귀를 갈고, 밥을 챙겨 먹이고, 등창이 나지 않도록 몸을 돌려주며 온종일 아픈 동생을 돌봤다.

한창 뛰어놀 어린 소녀가 10년간 동생을 돌본 건 위인전에나 나올 얘기였지, 현실에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그래도 돼?”

“그럼요.”

“당연히 사람부터 살려야죠.”

“처남 처제들에게 미안해서 어쩌지?”

“지홍씨가 지금까지 해준 것만 해도 저와 동생들은 평생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어요. 실망은커녕 잘했다고 할 거예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 저하고 동생들 오빠 아니었으면 예전에 죽었어요. 동생들도 그걸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했어요. 어떻게 제가 오빠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수가 있어요.”

“하아~ 둘 다 내 말 잘 들어. 지난 일은 그만 잊어. 너희가 지금껏 내게 해준 것만 해도 지난날 내가 했던 보잘것없는 일은 수천 배 갚고도 남았어. 언제까지 은혜 운운할 거야?”

“알았어요. 다시는 말하지 않을 테니 화내지 마세요.”

“오빠가 너무 미안해해서 그만... 죄송해요.”

“둘 다 이리와!”

“네에~”

서인과 아영을 동시에 품에 꼭 안았다. 내가 둘을 거둔 건 이득을 얻자고 한 것도 아니었고, 다른 생각이 있어 그런 것도 아니었다.

단지 안쓰럽고 불쌍해서... 엄마를 잃고 불안해하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그런 것뿐이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기에, 순수한 마음이었기에 서인과 아영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덕분에 세상에 다시없을 보물인 정화수를 얻었고,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침묵 스킬의 도움을 받아 고난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도 둘은 여전히 내게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이 가슴 깊이 각인돼 그런다는 건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며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서인과 아영의 뜻을 존중해 처남, 처제들은 내년으로 시간을 미루고 5명분을 모두 시간이 얼마 없는 불치병 환자에게 쓰기로 했다.

“방송을 이용하자고?”

“네!”

“너무 속 보이는 거 아니야?”

“속 좀 보이면 어때요? 좋은 일 하자는 건데.”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어.”

“선행을 널리 알리는 건 잘난체 하자는 게 아니에요. 세상이 살만한 곳이란 걸 사람들에게 알려 더 많은 사람이 좋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풍토를 조성하자는 거예요.”

“좋은 뜻인 거 아는데, 받는 사람이 불편하면 그건 선행이 아니야. 그리고 잘못하면 송이와 남동생, 가족 모두가 질시의 대상이 될 수도 있어. 많은 사람이 잘됐다고 자기 일처럼 박수를 치겠지만, 일부는 엉뚱한 얘기를 지어내 송이와 가족을 힘들게 할 수도 있어.”

세상엔 아픈 사람이 널리고 널릴 만큼 많았다. 가까운 종합 병원만 가도 오늘내일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그런 사람들이 송이의 사연을 듣고 같이 눈물을 흘릴 것이라 생각하는가? 절대 그렇지 않았다.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동물로 송이의 남동생 대신 자신이 선택받지 못한 것에 화를 낼 게 분명했다.

좋은 일을 널리 알리자는 제니퍼의 말엔 동감했지만, 그 일로 인해 송이와 남동생이 상처받게 할 순 없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은 우리 민족, 나아가 사람의 음흉한 본성이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었다.

“네가 송이구나. 반갑다.”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말은 동생 완치되면 그때 말해.”

“실패해도 괜찮아요.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평생 잊지 않을 거예요.”

“동생이 완치되지 않으면 앙심을 품겠다는 뜻이야?”

“아니요~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니에요.”

“평생 잊지 않겠다고 말했잖아. 그게 그 뜻 아니었어?”

“도와주신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뜻으로 말한 거예요.”

말장난 중 가장 재미있는 말장난은 아이들을 놀리는 것이었다. 반응이 즉각 즉각 나오는 데다 조금만 자극해도 울음을 터뜨려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동생을 10년 동안 돌본 송이도 애어른이기는 했지만, 결국엔 13살짜리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말꼬리를 잡고 계속 늘어지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며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그만해! 애 데리고 장난치면 재미있어?”

“응! 재밌어. 흐흐흐흐~”

“아주 못 됐어. 송이야! 오빠가 장난친 거야. 신경 쓰지 마.”

“정말요?”

“그럼!”

한창 재미있었는데... 은비가 뛰어드는 바람에 산통이 깨지고 말았다. 조금만 더 놀리면 눈물을 뚝뚝 떨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정말 아쉬웠다.

“사람들이 다들 오빠를 무서운 사람이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겁이 나서 눈물을 흘릴 뻔했어요. 그런데 말해보니 오빠는 참 재미있는 분인 것 같아요. 처음 보는 저에게 농담을 걸어주시고... 고맙습니다.”

“오빠? 내가 왜 네 오빠야?”

“나이가 20살 정도밖에 안 돼 보이잖아요. 아저씨라고 부를까요?”

“아니! 계속 오빠라고 불러.”

“네!”

송이는 눈치가 백 단에 붙임성도 좋은지 오빠라고 부르며 살갑게 굴었다. 이런 성격이 있었기에 몸도 가누지 못하는 동생을 돌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송이 남동생을 도와주기로 한 건 자식을 위해 헌신한 부모 때문이 아니라 동생을 걱정하는 송이의 마음이 편지 곳곳에 그대로 묻어난다는 상아의 말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도, 부모도 하기 힘든 일을 13살 소녀가 10년간 했다는 것에 감명받아 도와주게 된 것이다.

물론 반지하 단칸방도 한몫했다. 좋은 집에 살았다면 10년이 아니라 100년을 돌봐도 절대 도와주지 않았을 것이다.

내게 가난은 화인처럼 남은 상처였지만, 숨길 생각도 없었고, 부끄럽게 생각한 적도 없었다.

가난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 나 같은 사람이 없기를 바랐고, 그런 사람의 마음을 십분 이해해 도와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나머지 4명도 송이처럼 힘들게 살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뽑았다.

남편이 죽고 혼자 힘들게 자식 셋을 키우다가 병든 엄마, 아픈 할머니와 둘이 꿋꿋하게 살다가 불치병에 걸린 손자, 나이 50이 되도록 하루도 쉬지 않고 가족을 위해 일하다가 쓰러진 가장, 태어나 단 한 번도 밖에 나가보지 못한 소녀.

이렇게 5명을 선정해 쥐도 새도 모르게 가족을 통째로 나진시로 이주시켜 살 집과 직장을 마련해주고 새로운 인생을 열어줬다.

“태어나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어. 그리고 남을 돕는 게 기분 좋은 일이라는 것도 오늘에야 제대로 깨달았고.”

“남을 돕는 건 자신의 마음을 채우는 일이야. 도움을 받는 사람만 혜택이 돌아가는 게 아니야. 도움을 준 사람도 받는 사람만큼 큰 행복을 선물로 받는 거야.”

“그것까진 모르겠고, 기분은 좋아.”

“그러면 됐어. 기분이 좋은 것만으로도 충분해!”

소연의 말처럼 기분이 좋으면 됐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내가 행복하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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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3월 1일

4년간 브라질·콩고민주공화국·인도네시아의 정글, 리비아·사우디아라비아의 사막, 신장웨이우얼의 고원, 시베리아·남극의 설원, 홋카이도의 냉대림을 돌며 미스트 존을 모두 정리했다.

그린란드의 버드나무를 시작으로 브라질의 보아뱀, 콩고민주공화국의 로랜드 고릴라, 인도네시아의 아시아 코끼리, 리비아의 사막여우,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라비아 오릭스, 신장웨이우얼의 붉은 판다,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남극의 제왕 펭귄, 홋카이도의 흰죽지참수리를 모두 잡고 검은 돌 9개를 얻었다.

뉴욕과 바다를 빼고 미스트 존이 모두 정리됐지만, 사라지는 숫자만큼 미스트 존은 다시 생겨났다.

플로리다의 미시시피악어, 로키 산맥의 회색곰, 네바다의 퓨마, 애리조나의 독도마뱀, 몬태나의 아메리카들소 등 미국에만 총 10개의 미스트 존이 새로 생겨났다.

이를 두고 일부에선 미국의 만행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고 했고, 일부에선 우리가 장난을 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신의 징벌이란 증거도, 우리가 장난을 쳤다는 증거도 찾을 수 없어 뜬소문으로 끝났다.

미스트 존이 10개나 생긴 미국은 초일류 강대국이란 말이 무색하게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걸었다.

뉴욕처럼 도시를 통째로 집어삼킨 미스트 존은 없었지만, 도로가 끊기고 흉물스러운 안개 장벽이 생기며 겁을 먹은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 빠르게 쇠퇴했다.

또한, 대형 군사기지와 군수공장 4곳이 미스트 존에 사라져 국방력까지 큰 타격을 받아 러시아에도 밀리는 상황이었다.

미국이 몰락의 길을 걷는 동안 우리는 최선을 다해 미국을 도왔다. 미스트 존 열 곳에 모두 들어가 결계 레드몬을 사냥하고 다친 사람들을 구조했다. 이로 인해 우리 인기는 미국 대통령보다 더했고,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다.

“진실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죽이고 싶겠죠.”

“미국이 그럴 힘이 있나?”

“없죠.”

“그래도 모르는 게 낫겠지?”

“그럼요.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 될 때도 있으니까요.”

“흐흐흐흐~”

중국과 일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미국은 힘을 잃고 점점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러시아와 유럽의 주요 정치인들은 인공 각성이란 선물과 함께 소희의 암시에 걸려 수족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지는 해가 있으면 뜨는 태양도 있듯이 동북 3성과 혼슈, 시코쿠를 얻은 대한민국은 빠르게 성장하며 아시아의 맹주를 넘어 세계 속에 우뚝 섰다.

“전쟁이 끝난 건가?”

“끝과 시작은 꼬리잡기와 같아요. 시작이 있어야 끝도 있고,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도전을 받을 차례네?”

“그렇죠. 로스차일드 가문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기득권 세력이니까요.”

“구태야?”

“새로운 세력에겐 그렇게 보이겠죠.”

“씁쓸하네.”

상아의 말에 입이 썼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정권을 찬탈한 세력도 시간이 지나면 고인 물과 같은 신세가 되는 건 역사가 증명한 사실이었다. 우리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순 없었다.

“레드몬과의 싸움도 끝이 없겠지?”

“그렇죠. 앞으로 더 강한 레드몬이 출현할 테니까요.”

“하아~ 끝이 없네.”

“인생은 죽는 순간까지 끝이 없는 싸움이잖아요.”

“죽으면 끝나는 거야?”

“적어도 자신에겐 그렇죠. 남겨진 사람에겐 아니겠지만요.”

“그러면 죽지 말아야겠네. 내 예쁜 아내들 우는 거 보지 않으려면.”

“오빠가 죽을 때 따라 죽으면 되죠. 헤헷~”

“뭐라고?”

--- 끝 ---

============================ 작품 후기 ============================

지금까지 레드문 : 진화의 시작을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글을 끝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여러분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모두 행복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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