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98 뉴욕을 삼킨 괴물 =========================================================================
498.
“이브를 거론한 건 앞으로 대놓고 감시하겠다는 말처럼 들리네요. 그런 뜻으로 말한 거죠?”
“그렇지 않습니다.”
“뭐가 아니라는 건가요? 우리가 그린란드에 간 일부터 미스트 존 공략을 위해 돌아다닌 일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서 감시한 적이 없다고 오리발을 내미는 건가요?”
“그 부분에 대해선 뭐라 드릴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뜻으로 이브를 거론한 건 아닙니다. 믿어주십시오.”
“대통령의 약속도 헌신짝처럼 저버리면서 믿어 달라? 그런 말을 믿을 바보가 있겠어요?”
“.......”
“그러면서 도와 달라는 말은 참 쉽게 하네요. 내가 태어난 미국이 이런 모습이라니 참으로 부끄럽네요.”
“.......”
제니퍼가 점점 더 신랄하게 비판하자 고어 부통령은 대역 죄인이 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조용히 듣기만 했다.
변명을 하면 할수록 미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꼴로 제니퍼의 화만 돋웠다.
이럴 땐 무조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의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것이 현명했다.
거세게 몰아치는 소나기는 피해 가는 것이 상책이듯 어설픈 변명으로 제니퍼의 화를 돋울 이유가 없었다.
“잘못에 대한 질타는 죽을 때까지 달게 받겠습니다. 그러니 측은지심을 갖고 미스트 존에 갇힌 사람들을 구해주십시오.”
“흥!”
“그곳엔 어린아이들도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제니퍼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리자 노회한 정치인답게 고어 부통령이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아이를 볼모로 내세웠다.
아내들은 소연과 한숙의 아이를 너와 나의 아이로 구분 짓지 않고 자기 아이처럼 함께 돌보며 안고 빨고 물어댔다.
친언니·친동생·친자매 그 이상으로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에 이럴 수 있는 것이지만, 아이들을 유난히 좋아하는 것도 한 이유였다.
10만 명이 넘는 아이를 수용한 미래 보육원은 우리가 이렇게 좋은 일을 한다고 보여주기 위해 만든 시설이 아니었다.
아이들을 정말 좋아하는 아내들의 뜻에 따라 만든 시설로 보육원은 남다른 애정 없인 운영할 수 없는 시설이었다.
고어 부통령은 이런 사실을 파고들어 제니퍼의 마음을 움직였다. 제니퍼도 차마 아이들까지 모른척할 수 없어 행태가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이쯤에서 적당히 타협하기로 했다.
“미스트 존이 생긴 지 일주일이 지나 사람들이 살아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800만 명 전부 죽진 않았을 겁니다. 단 한 명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진입하려면 최소 5일은 더 기다려야 해요.”
“박지홍 회장님이 도와주겠다는 발표만 해도 미국 국민은 희망을 품고 고마워할 겁니다.”
“발표만 하고 진입하지 않으면 클린턴 대통령과 민주당 대신 우리 남편이 욕을 먹을 수도 있잖아요?”
“그 부분은 기자회견 때 제가 책임지고 회장님과 사모님들께 누가 되지 않도록 설명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미스트 존에 갇힌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다고 우리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잖아요?”
“그 부분 역시 기자회견 때 사람들이 모두 죽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설명하겠습니다.”
“감시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은 분의 말을 믿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요?”
“문서로 보장하겠습니다.”
“좋아요. 지금 한 말과 미스트 존 처리 보상에 관한 내용을 문서로 작성해오세요. 합당한지 검토한 후 결정할게요.”
“일단 출발부터 하시죠. 시간이 없습니다.”
“가봐야 어차피 5일은 기다려야 해요. 그 안에 좋은 결과가 있도록 고어 부통령이 노력하시면 되잖아요. 안 그래요?”
“후유~ 알겠습니다.”
미국이 미스트 존 처리 대가로 제시한 금액은 100억 달러였다. 한화로 11조 5,000억으로 1998년 대한민국 예산 16%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지만, 세계 최고 도시인 뉴욕의 절반이 그 안에 있다는 걸 생각하면 껌값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미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 필라델피아까지 계산하면 1,000억 달러를 요구해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돈 말고 다른 것을 주세요.”
“땅을 원하십니까?”
“아니요?”
“그럼 원하는 게 뭡니까?”
“우리 문화재요.”
미국에 있는 우리 문화재는 밝혀진 것만 43,601점으로 이중 상당수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었다.
미국은 6만 점이 넘는 문화재를 약탈한 일본 다음으로 우리 문화재를 많이 갖고 있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문화재를 반출했다고 말하겠지만, 당시 문화재 대부분이 일본에 의해 도굴된 것으로 장물이라 할 수 있었다.
또한, 말도 안 되는 헐값에 줍다시피 가져간 것으로 일부 공식적인 선물을 빼면 절대 정당하게 취득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우리가 100억 불 대신 문화재를 요구하는 건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돈을 받는 건 욕 먹기 딱 알맞은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럴 바엔 양국의 우호증진을 위해 미국을 돕는다는 명분도 얻고, 그것을 빌미로 잃어버린 우리 문화재를 찾는 게 나았다.
“개인소유라 어렵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논의한 건 없던 일로 하죠. 수고하셨어요. 그만 돌아가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제니퍼가 고어 부통령에게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나진시를 떠나라고 말했다.
사유재산이란 말로 살짝 몸을 사리며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려던 고어 부통령은 제니퍼의 강한 반격에 눈이 동그래졌다.
이건 전적으로 고어 부통령의 잘못으로 제니퍼는 밀고 당기며 시간 낭비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그런 성향을 사전에 파악해 놓고도 버릇처럼 노회한 티를 내다가 된서리를 맞고 말았다.
“뉴욕은 록펠러 가문의 집이 있는 곳이자 제니퍼님의 고향입니다.”
“그래서요?”
“고향을 생각해 인정을 베풀어주십시오.”
“태어난 고향이 중요한가요? 정 붙이고 살며 그곳이 고향이죠. 국가도 마찬가지잖아요. 이민으로 채워진 미국의 부통령께서 그걸 모르진 않을 텐데요?”
“그래도 태어난 곳만큼 좋은 곳은 없습니다.”
“하아~ 5일 후에 진입한다고 한 건 남편의 몸이 다 회복해서 말한 날짜가 아니에요. 800만 명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 무리하면서 날짜를 앞당긴 거예요. 우리 남편은 목숨을 거는데, 미국은 고작 훔쳐간 문화재가 아깝다는 건가요?”
“.......”
“그리고 전부를 다 달라고 했나요? 최대한 노력하는 성의라도 보여 달라는 거잖아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소장한 것만 넘겨줘도 우리는 만족했을 거예요.”
1880년 개관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은 뉴욕 시에 있는 가장 큰 미술관이자 세계 굴지의 미술관 중 하나였다.
이집트·바빌로니아·아시리아, 극동과 근동, 그리스와 로마, 유럽,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의 아메리카, 뉴기니 및 미국의 귀중한 예술품이 소장된 미술관으로 건축·조각·회화·드로잉·판화·유리제품·도자기·직물·금속세공품·가구·무기·갑옷·악기 등 엄청난 유물이 전시돼 있다.
“그리고 미국 정부는 800만 명의 목숨보다 남의 나라에서 약탈한 문화재가 더 소중한가 보죠?”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관리 운영 평의회와 즉시 논의해 모두 넘겨드리겠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국가나 정부 기관이 아닌 순수하게 민간이 주도해 설립한 미술관으로 운영 관리는 평의원회(Board of Trusty)가 담당했다.
맨해튼 중심부 센트럴 파크에 있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도 미스트 존에 빨려 들어가 우리 도움이 절실했다.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대한민국 문화재만 사라지게 아니라 미술관이 보유한 모든 문화재와 미술품이 사라졌다.
1998년 8월 4일
계약이 성사되자 제니퍼와 고어 부통령이 합동 기자회견을 열었다. 제니퍼는 인류애를 발휘해 미스트 존에 갇힌 사람들을 구해준다고 발표했고, 고어 부통령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미국에 있는 한국 문화재를 아무런 조건 없이 반환한다고 발표했다.
기자회견이 끝나자 대기하고 있던 전용기에 탑승해 미스트 존에서 가장 가까운 볼티모어 공항으로 날아갔다.
“장인어른 당분간 나진시에 있는 게 낫지 않겠어?”
“태리타운은 미스트 존에서 30km나 떨어져 있어 괜찮아요.”
“계엄령이 선포돼 불편하실 수도 있잖아?”
“누가 우리 아빠를 괴롭히겠어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럼 다행이고. 으음... 언제 각성해드리면 될까?”
“이번 일 끝나면 해주세요. 안 그래도 아빠가 기대에 부풀어 잠도 못 이루고 계세요.”
“알았어.”
“정말 고마워요!!”
“가족끼리는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네! 헤헷~”
몸을 추스르자 능력자로 인공 각성시킬 명단을 작성했다. 그린란드에서 얻은 각성의 씨앗은 총 16명분으로 아내 중 유일하게 능력자가 아닌 은하, 은비의 할아버지 최광석, 소연의 아버지 민정국이 가장 먼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다음은 한숙의 아버지 정형운 KM 그룹 명예회장, 아리의 부모님 두 분, 소희의 아버지 차영철 소장, 미래 레드몬 연구소의 정신적 지주 최정준 박사, 레드몬 탐지 레이더를 만든 조진호 박사가 선택됐다.
그리고 미래 레드포스 김도형 대장, 미래 안전보장국 강승원 국장, 미래 레드몬 법무팀 서정재 팀장, 미래 레드몬 그룹 김관웅 전무이사, 미래 레드몬 신소재 연구소 김일섭 박사, 정화수 연구소 정지윤 박사가 선정됐다.
마지막 한 장은 제니퍼의 아버지인 존 록펠러 회장에게 돌아갔다. 가족부터 챙긴 다음 다른 사람을 챙기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처남 처제들은 아직 젊어 1~2년 늦어져도 괜찮다는 생각에 지금껏 나를 믿고 따라온 직원들부터 각성시키기로 했다.
이건 두 가지를 노린 것으로 우리를 위해 열심히 노력한 미래 레드몬 식구에겐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해준다는 것과 가족이라고 무조건 우대하고 감싸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현대 사회는 먹여주고 재워주고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로 사람을 동물처럼 부리는 시대가 아니었다.
상대의 재능을 금전을 지급하고 이용하는 사회로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급해야 했다.
또한, 회사를 위해 지대한 공을 세웠다면 금전적 보상 이외에 공에 맞는 추가 보상이 따르는 게 마땅했다.
나는 그 보상을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만이 해줄 수 있는 능력자 각성으로 대신하려 했다.
인공 각성은 사람들에겐 꿈이자 꼭 이루고 싶은 소원으로, 그런 천문학적인 보상을 직원들에게 해주면 나를 미친 사람이라고 욕할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인류에게 꼭 필요한 정치인, 문학가, 과학자에게 해주는 것이 낫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한 명당 10조 원을 받아야 한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위대한 과학자보다, 세상을 바꿀 위대한 지도자보다 이들이 더 중요했다.
이들은 남들이 우리를 하찮게 여길 때부터 동고동락하며 나진시를 만든 사람들로 세상 그 어떤 위대한 인물보다 값지고 귀한 내 사람들이었다.
이런 이유뿐만 아니라 직원들에게 이런 대우를 해줌으로써 미래 레드몬 식구 전체에게 자발적 노동의욕과 애사심을 키울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행복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