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89 멸문(滅門) =========================================================================
489.
“그런데 지홍이가 이브를 만나는 걸 허락할까?”
“전권을 위임받았으니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럼 오늘 밤에 처리할 수 있게 준비하면 되겠네?”
“그래.”
이브와 다비드, 필립을 찾았다는 것과 이브를 만나보겠다는 내용이 암호문으로 날아왔다. 도청을 걱정해 중요한 내용은 은하가 만든 암호문으로 주고받았다.
책임자인 하람에게 전권을 맡겨 놓은 상태라 하람의 의견을 존중해 이브를 이용하려는 작전에 토를 달지 않았다.
현장에 있는 사람만큼 상황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수천km 떨어진 따뜻한 방에 앉아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건 잘못된 행동으로 책임자가 빠르게 판단하고 조치할 수 있게 맡겨야 한다.
물론 그에 대한 교육과 훈련은 기본이었고,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을 책임자로 앉혀야 했다.
또한, 전권을 준 최고 책임자가 모든 책임을 져야 했다. 전권을 준 것도 최고 책임자였고, 그 자리에 앉힌 것도 최고 책임자였다.
다음 날 아침 필립과 다비드의 위치가 적힌 쪽지와 놈들이 숨은 건물과 주변 풍경이 찍힌 사진 그리고 한번 만나자는 하람의 서신이 이브의 거실 탁자에서 발견됐다.
아무도 모르게 거실에 놓고 간 편지에 이브는 겁이 났다. 죽는 게 두려워서 그런 게 아니라 르원틴 박사의 원수를 갚지 못하는 게 두려워서 겁이 났다.
편지를 읽은 이브는 밤새 어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상대가 인기척도 없이 다녀갈 정도면 자신보다 아래가 아니라는 것은 자명했다.
더구나 편지에 보낸 사람이 누군지 명확히 밝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이브가 두려워하는 사람은 딱 두 명으로 박지홍과 서하람이었다.
둘은 상급 레드몬을 여섯 마리나 잡았고, 자신의 몸에 깃든 요코와 써커들을 모두 처리한 능력자였다.
로스차일드 가문에 복수하며 가장 걱정했던 것이 박지홍과 서하람이 끼어드는 것이었다.
다행히 로스차일드 가문과 적대관계였고, 다비드도 박지홍과 자신이 손을 잡았다고 의심해 마음 편히 로스차일드를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젠가 찾아올 거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르원틴 박사가 시킨 대로 박지홍을 찾아갔어야 하는 게 아닌지 후회스러웠다.
저녁까지 고민하던 이브는 먼저 상대가 알려준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했다. 상급 능력자가 없는 필립부터 확인하고, 다비드를 지키는 마이클 쿠삭까지 확인했다.
만나자는 의도가 좋은 뜻인지 나쁜 뜻인지 알 순 없지만, 알려준 내용이 틀리지 않자 살짝 믿음이 갔다.
그러나 상대가 살려준다는 보장이 없어 죽기 전에 원수를 갚기로 했다. 먼저 손쉬운 필립부터 제거했다.
쌍두독수리 공대의 공격에서 간신히 목숨을 구한 필립은 낭트를 도망 나와 크헤이의 고택으로 숨어들며 블랙 나이트 대장 사무엘 윌슨을 불렀다.
필립이 가문의 수장이 되자 엎드려 충성을 맹세한 사무엘 윌슨은 이제 로스차일드 가문의 유일한 상급 나이트로 필립에겐 마지막 남은 구명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첫 번째 배신이 어렵지 두 번째 배신은 일도 아니었는지 필립이 공격받자 사무엘 윌슨은 이번에도 온다간다 말도 없이 꽁지를 빼고 사라졌다.
부랴부랴 살아남은 중급 능력자와 하급 능력자, 최하급 능력자까지 모두 끌어모았지만, 다 합쳐도 150명이 안 됐다.
4만 명에 달하던 나이트가 이브와 가족의 상잔에 모두 죽고 달랑 150명만 남은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브에게 허수아비 같은 존재들로 무인지경을 달리듯 순식간에 필립에게 다가간 이브는 필립의 멱살을 잡고 밖으로 빠져나와 하늘 높이 올라갔다.
겁에 질려 오줌을 질질 싸는 필립을 1,000m 상공까지 끌고 올라간 이브는 살려달라는 외침을 아름다운 미소로 화답하고 잡았던 멱살을 놓았다.
“아아아아악~~~ 퍽!”
긴 비명이 퍽 소리를 끝으로 사라지며 필립은 단단한 벽돌 바닥에 떨어져 머리와 내장이 터져 죽었다.
필립의 죽음을 확인한 이브는 곧바로 다비드 회장을 잡기 위해 쎄흐쥐 시로 날아갔다.
다비드 회장은 마지막까지 곁에 남아있던 부하들이 필립을 잡으려다 대부분 죽고 돌아오지 못하자 깊은 상심에 빠졌다.
화를 참지 못해 마지막 남은 충성스러운 부하들마저 죽음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자 더는 정신적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날 이후 간신히 숨만 붙은 다비드는 듣지도 말하지도 먹지도 못한 채 시체처럼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쿠삭 형제가 번갈아가며 다비드의 방 앞을 지킨다는 것을 알아낸 이브는 방어력이 약한 존 쿠삭이 방을 지키자 날개로 몸을 감싸고 득달같이 달려들어 심장에 구멍을 냈다.
전투 경험이 풍부한 존 쿠삭은 방어막을 두르고 라이트닝 스피어를 연달아 쏘아 시간을 벌며 동생 마이클 쿠삭을 불렀다.
그러나 둘이 있어도 상대하기 힘든 이브를 혼자서 막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로 마이클 쿠삭이 도착하기도 전에 목숨을 잃었다.
형이 죽자 눈이 돌아간 마이클 쿠삭이 괴성을 지르며 스톰 트위스트를 사용해 이브를 죽이려 했지만,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열 손가락에서 쏟아진 레이저에 벌집이 되어 허망하게 쓰러졌다.
쿠삭 형제를 가볍게 처리한 이브는 다비드의 침대 앞에 서서 단검을 치켜든 끌로드 베리 비서실장과 마주했다.
주인을 지키려는 마음은 가상했지만, 자신을 세상에 있게 한 원흉이자, 사랑하는 르원틴 박사를 죽게 한 원수를 가로막는 끌로드 베리 비서실장을 살려둘 순 없었다.
공포에 부들부들 떨어대는 끌로드 베리 비서실장의 심장에 구멍을 뚫고 침대에 다가간 이브는 늙고 병든 초라한 노인을 바라봤다.
그냥 내버려둬도 며칠 살지 못하고 죽을 상태였지만, 원수가 평안하게 죽게 둘 순 없었다.
목을 비틀어 죽이려다가 이것이 오히려 편안한 죽음을 선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나온 이브는 돌과 나무로 다비드의 침실을 둘러쌌다. 살아있는 무덤을 만든 이브는 다비드가 오래오래 고통스럽게 살다 죽기를 바랐다.
‘박사님! 원수를 갚았어요. 그런데 이제 뭐 해야 하죠? 어떻게 살아야 하죠? 박사님 얼굴도 기억이 나질 않아요. 흑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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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자고 한 목적이 뭐죠?”
“첫 번째는 다비드와 필립이 어디 있는지 알려드리기 위해섭니다.”
“두 번째는요?”
“박지홍 회장이 이브님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왜요?”
“친구가 될지 적이 될지 알기 위해섭니다.”
“레드몬인 저와 친구가 되려 한다고요?”
“박지홍 회장은 레드몬과 인간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말이 통하고 자신과 뜻이 같으면 누구든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레드몬을 죽인 분이 그런 희한한 생각을 하고 있다니 정말 의외네요.”
“레드몬을 죽였다고, 인간을 죽였다고 친구가 안 될 건 없습니다. 인간은 서로 끊임없이 죽이지만, 언제나 서로 친구라고 부릅니다.”
“맞는 말이네요.”
“많이 괴팍한 친구지만, 편협한 시각으로 상대를 보진 않습니다. 만나보면 실망하진 않을 겁니다.”
하람의 말에 긴장된 이브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러나 아직 상대를 믿을 수 없어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건 여전했다.
“친구가 아닌 적이 되면 어떻게 되는 거죠?”
“죽을 수도 있습니다.”
“죽을 수도 있는데 박지홍 회장을 만나라고요? 제가 바보로 보이세요?”
“죽일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만나자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달아날 순 있지만, 평생 달아날 순 없습니다. 이브님을 찾을 방법은 아주 많으니까요. 파리에 온 지 하루도 걸리지 않아 찾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협박하는 건가요?”
“박지홍 회장은 이브님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뜻으로 만나자고 한 겁니다.”
“저에 대해 안다고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박지홍 회장은 상대의 기억을 읽는 특수한 능력이 있습니다. 코르시카 섬의 키메라 생산기지는 우리가 없앤 겁니다. 그때 테슬라 박사의 기억을 박지홍 회장이 모두 읽었습니다. 이브님이 만들어진 과정, 자란 과정, 도망친 것까지 모두 말입니다.”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군요.”
“테슬라 박사가 아는 만큼밖엔 모릅니다. 누구보다 순수하고 착한 성격이었다는 것, 사람을 사랑했다는 것, 세상을 알고 싶어 했다는 것 정도입니다.”
“모두 옛날얘기에요. 지금은 손에 잔뜩 피를 묻힌 채 사람을 미워하고, 믿지 못하는 괴물만 남았어요.”
“다른 사람은 이브님을 이해하지 못해도 저는 이해합니다.”
“이해하는 척하는 거겠죠. 안 그런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이브님과 똑같은 경험을 했기에 이해합니다.”
“똑같은 경험이요?”
“제 예전 이름이 타타리가미입니다. 아마 들어보셨을 겁니다.”
“커다란 섬을 평지로 만든 멧돼지가 당신이라고요?”
“맞습니다.”
“헉!”
이브는 매우 아름답고, 섹시하고, 상대를 잡아끄는 묘한 매력과 함께 진득한 살기를 풍겼다.
그러나 그건 겉모습일 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겁에 질린 소녀에 불과했다.
겁에 질린 이브의 눈을 통해 진실을 엿본 하람은 이브의 모습에서 아내를 잃고 방황하던 자신을 보았다.
그래서 자기가 누구인지, 무슨 일을 했는지, 지홍과 어떻게 만났는지,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있는 그대로 솔직히 말했다.
자기와 같은 길을 걸어온 이브가 더는 상처받지 않고 마음의 평화를 얻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람은 자신의 얘기를 들려줬다.
“사람들이 알면 놀라 까무러치겠네요.”
“저 말고도 한 명 더 있습니다.”
“누구죠?”
“그건 친구가 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하람님의 말씀에 희망이 생기네요. 하지만 제 몸엔 요코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요코와 써커를 모두 죽인 박지홍 회장님이 저를 친구로 맞이할까요?”
“피가 어떤 색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이브님만 그런 거 아닙니다. 저도 그렇고, 사람들도 그렇고, 박지홍 회장도 그렇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사람을 좋아하고, 밝고 순수한 본래의 마음으로 사시면 됩니다.”
“그런 마음 사라진 지 오래예요.”
“사람의 본성은 한순간에 바뀌지 않습니다. 사는 동안 상처로 인해 조금씩 바뀌지만, 갑자기 악인이 선인이 되고 선인이 악인이 되진 않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악인이었나 보죠.”
“자신을 괴롭히지 마십시오. 그러지 않아도 세상은 살기가 녹록하지 않습니다.”
“하아~”
“원수도 다 갚았으니 저희랑 같이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불편하시면 원하실 때 찾아오셔도 됩니다.”
“그러고 보니 갈 곳은 없고, 오라는 사람은 박지홍 회장님밖에 없네요. 그곳이 무덤이 되더라도 가지 않을 수 없네요.”
“그런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고마워요!!!”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늘도 행복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