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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문 진화의 시작-488화 (488/505)

00488  멸문(滅門)  =========================================================================

488.

다음 날 아침 필립이 받은 계약서엔 언제까지 이브를 처리하겠다는 날짜도, 이브를 죽이겠다는 내용도 없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 피해를 줄이겠다는 내용만 장황하게 적혀 있었다.

날짜도 명시하지 않은 계약서가 있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지만, 상급 레드몬을 몇 날 며칠까지 사냥하겠다고 계약서에 명시하는 게 더욱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엘리트 레드몬 사냥 계약서에도 날짜가 명시되지 않았다. 이는 레드몬을 찾는 일부터 사냥하는 일까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무수히 발생하기 때문으로 건물을 짓고, 물건을 만드는 일과 레드몬 사냥은 전혀 달랐다.

이런 조항을 이용해 선금을 받고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 넘게 레드몬을 처리하지 않아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많지 않았다. 레드몬 사냥도 신용이 가장 중요해 최대한 빨리 처리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레드몬을 찾지 못해 사냥에 실패하고, 의뢰한 내용보다 레드몬이 강력해 실패하는 등 변수가 많아 의뢰 후 최소 6개월, 최대 1년을 통상적인 사냥 기간으로 잡았다.

“이제 어쩌실 거예요?”

“약속했으니 가야지.”

“며칠 있으면 한숙 언니와 소연 언니 해산일인데, 프랑스에 가겠다고요? 머리끄덩이 잡히고 싶으세요?”

“대머리로 살 순 없지. 아기 낳는 거 옆에서 봐야겠다.”

“그럼 계약은 어떻게 해요?”

“하람이하고 혈풍이 불러들여.”

“하람 오빠하고, 혈풍 오빠 보내게요?”

“머리 뽑힌다며?”

“그거야 말이 그렇다는 소리죠.”

“아기 나오는데 아기 아빠가 자리를 비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약속했는데 뭉그적거릴 수도 없고, 일하는 척이라도 해야겠지. 그래야 욕이라도 덜 먹지. 안 그래?”

“너무 얍삽한 거 아니에요.”

“제니퍼! 오늘부터 혼자 자고 싶지?”

“멋지다는 얘기를 조금 과하게 했네요. 죄송해요.”

“한 번만 더하면 평생 골방에 가둬둔다.”

“히잉~”

무시무시한 협박에 제니퍼가 울상을 지었다. 말만 골방에 가둔다고 했지 육감적인 몸매의 제니퍼를 내가 왜 골방에 가둬두겠는가? 온종일 끌어안고 주물러대도 모자랄 판에...

“하람 오빠와 혈풍 오빠는 건 이브를 죽이려는 거죠? 먼저 만나보고 죽일지 말지 결정한다고 했잖아요.”

“죽이라고 보내는 거 아니야. 일하는 척하라고 보내는 거지.”

“그럼 하람 오빠만 보내도 되잖아요. 혈풍 오빠는 왜 보네요? 혈풍 오빠는 유령이나 마찬가지인데, 가봐야 소용도 없잖아요.”

혈풍의 존재는 여전히 극비였다. 동화 스킬은 어두운 일을 처리하기에 안성맞춤이라 당분간 그림자로 살게 할 생각이었다.

“할일이 있으니까 보내지.”

“설마... 혈풍 오빠로 필립을 처리하려는 건 아니죠?”

“빙고~”

“너무 사악한 거 아니에요?”

“사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라고 했어. 그러니 최대한 사악하게 살아야지.”

“사악이 아니라 독한 거 아니에요?”

“사악이나 독한 거나 다를 게 뭐가 있어? 이방원 그랬잖아.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하하하하~”

“정말 은하 언니 말이 사실이었네요.”

“뭐가 사실이야?”

“때와 장소, 상항에 맞지 않는 말을 잘한다고요.”

“.......”

다비드가 우리를 이브와 한패로 생각해 기타큐슈와 후쿠오카에 하람과 혈풍을 보내 도시를 방비하게 했다.

나진시만큼 중요하진 않지만, 두 도시도 우리 품에 들어온 이상 위험에 노출되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다음 날 아침 특명을 받고 하람과 혈풍, 지영, 연희, 민영, 희은, 은미, 선희, 진숙이 프랑스 파리로 날아갔다.

달랑 남자 둘만 보내면 성의가 없다는 말이 나올 수 있어 오랫동안 나진시에 갇혀있던 새끼 마누라들도 함께 보냈다.

파리에 가서 쇼핑도 하고, 관광도 하고 재미나게 놀다 오라고 하자 자신들을 내쫓는 줄 알고 달라붙어 엉엉 울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하람과 혈풍 둘만 보내면 모양이 안 살아 같이 보낸다고 1시간 동안 설득하고 나서야 간신히 얼굴에 웃음이 돌아왔다.

“하람아! 애들 잘 돌봐. 다치거나 그러면 죽을 줄 알아.”

“걱정되면 보내지 마.”

“평생 나진시에 갇혀 살 순 없잖아. 다치지 않게 잘 데리고 갔다 와.”

“마누라들은 정말 끔찍이 아낀다.”

“부러우면 너도 장가가. 말리지 않으니까.”

“누구랑? 아정 처제랑?”

“죽고 싶냐? 다시는 세상 구경할 수 없게 1,000m 파고 묻어줄까?”

“농담이야!”

하람이 급히 손사래를 치며 농담이라고 말했지만, 얼굴이 굳어지는 게 아정에 관심이 있는 게 분명했다.

하람은 남자답고, 의리 있고, 자상하고, 똑똑하고, 순정파였다. 보기만 하면 타박을 했지만, 정말 믿을 수 있는 놈이었다.

그러나 처제를 줄 순 없었다. 놈이 싫어서가 아니라 처제가 상처받는 것을 볼 수 없어서였다.

놈이 혈랑처럼 인간으로 진화했다면 한 번쯤 생각을 달리할 수도 있었다. 혈랑과 살림은 차린 조은영은 깨가 쏟아지도록 잘 살았다.

조은영은 혈랑이 과거에 늑대였다는 걸 문제 삼지 않았다. 혈랑은 사람으로 변한 이후 사람으로 살기 위해 노력했다. 조은영도 혈랑의 이런 모습을 좋게 보며 사람으로 대했다.

둘 다 레드몬이지만, 하람은 인간으로 변신한 것이고, 혈랑은 인간의 모습으로 완벽히 바뀐 것이었다.

혈풍은 사람을 미워했는데 사람으로 변했고, 하람은 사람을 깊이 동경했는데 고작 변신 스킬을 얻은 게 전부였다.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지만, 모습이 바뀌자 생각도 바뀌었다. 혈랑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스킬로 모습만 바꿀 수 있는 하람은 자신을 사람으로 생각하려 노력했지만, 모습을 자각할 때는 정체성 혼란을 겪기도 했다. 이렇듯 변하고 변하지 못한 차이는 아주 극명했다.

그렇다고 하람이 아영 처제를 아프게 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정이 많아 죽을 때까지 아끼고 사랑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마음이 더욱 아팠다. 아기도 낳을 수 없는데, 정체성 혼란까지 겪는 모습을 봐야 하는 아영 처제는 또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프랑스로 날아간 하람은 지극히 평범한 수준으로 이브의 정보를 모았다. 신문과 뉴스만 봐도 다 알 수 있는 그런 수준 낮은 정보만 모았다.

지영, 연희, 민영, 희은, 은미, 선희, 진숙은 내가 시킨 대로 샹젤리제 거리를 돌며 갖고 싶은 명품 가방, 구두, 옷, 액세서리 등을 원하는 만큼 샀다.

옷과 가방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나진시에만 갇혀 있어 사고 싶은 명품을 구매할 기회가 없었다.

아내들이 원정 때마다 한 아름씩 사다가 나눠줬지만, 취향이라는 것이 같은 수 없어 아쉬움이 많았다.

그러다 기회가 오자 샹젤리제 거리의 명품 매장을 몇 개 차려도 될 만큼 양손에 가방을 가득 들고 행복한 얼굴로 수다를 떨어댔다.

쇼핑이 끝나자 다음은 관광이었다. 센 강과 에펠탑, 개선문, 베르사유 궁전, 노트르담 대성당, 몽마르트르 언덕, 퐁네프의 다리, 물랭루주, 피카소 미술관 등 파리의 유명 관광지는 모두 돌아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파리에 도착한 하람과 지영 등은 이브를 자극하는 행위는 일절 하지 않았다. 이브가 민간인을 공격하진 않았지만, 자신을 죽이러 왔다는 걸 알면 적대적으로 나올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계약서에 이브를 처리하기 전까진 공증인을 빼고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지 말 것을 명시했다.

인간의 언어를 모르는 레드몬은 자신을 죽이러 사냥팀이 왔다는 걸 알아도 상관없지만, 이브는 반인반수라 함부로 떠들고 다니면 숨을 수도 있었고, 기습을 가해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계약서에 이러한 내용을 삽입한 건 이브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지, 공격받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이브가 전투기만큼 빠르게 날며 공격해도 하람을 이길 순 없었다. 인간으로 모습을 바꾸며 C급 상급 레드몬의 능력밖에 발휘할 순 없지만, 대인전에 특화된 이브의 공격쯤은 무난하게 막았다.

대신 하람도 스킬이 단조로워 이브를 잡긴 어려웠다. 화염탄을 사용해 공격할 순 있지만, 유도탄 기능이 없어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하람이 이틀간 지영 등을 따라다니며 보호하는 동안 혈풍은 필립을 찾기 위해 파리와 인근 도시를 돌아다녔다.

미래 레드몬 서정재 변호사가 파리에서 필립을 직접 만난 계약서를 쓰고 주식을 넘겨받으며, 필립의 체취가 사라지지 않도록 서류를 밀봉해 가져왔다.

늑대 출신답게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혈풍은 서정재 변호사가 가져온 서류에서 냄새를 맡아 필립을 찾아다녔다.

“찾았어.”

“어디야?”

“파리 북쪽 크헤이 시 외곽에 있는 아주 오래된 저택에 숨어있어.”

“오늘 밤 처리하면 되겠네?”

“그래야지. 그런데 필립보다 더 중요한 사람을 찾았어.”

“누구? 다비드? 이브?”

“둘 다!”

“정말 둘 다 찾았어?”

“응!”

필립을 찾아 헤매던 혈풍은 파리 서쪽의 쎄흐쥐 시에서 능력자를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뒤를 따라가 다비드 회장을 찾아냈다.

그리고 파리 근교의 고급 주택가 베르사유에서도 아주 특이한 냄새를 맡고 추적해 이브를 찾았다.

혈풍은 이브에게 발견될 수도 있어 가까이 다가가진 않았지만, 강자답게 상대의 강함을 느낄 수 있어 꽃보단 예쁜 여성이 이브라는 걸 단번에 알아봤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파리 근처에 다 모여 있었네.”

“힘들게 뛰어다니지 않아도 되고 좋네.”

“필립과 다비드는 이브가 처리하게 넘겨주는 게 좋겠어.”

“그럼 이브가 달아날 수도 있잖아?”

“이브는 우리 몫이 아니야. 지홍이가 만나보고 결정할 거야.”

“이브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도움이 되면 그렇게 하겠지. 그건 그렇고 무작정 필립과 다비드의 위치를 알려주면 이브가 함정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놈들이 가진 물건을 하나씩 동봉해서 보내주면 믿지 않을까?”

“오히려 의심만 더할 거야. 본인을 증명할 물건은 누구나 소중하게 다루는데, 그걸 보내면 나부터 함정으로 의심하지.”

“그럼 어쩌지?”

“만나자는 편지를 보내야겠어. 우리가 누군지 정확히 밝히고.”

“이브가 만나려 할까?”

“싫다면 어쩔 수 없지. 필립과 다비드를 우리 손으로 죽일 수밖에.”

============================ 작품 후기 ============================

오늘도 행복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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