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문 진화의 시작-485화 (485/505)

00485  분열(分列)  =========================================================================

485.

“교황의 발에 엎드려 충성을 맹세한 게 가문을 위한 것이다? 그런 억지는 평생 처음 들어보는군.”

“그건 종교적인 행위였지 가문의 일과는 무관합니다.”

“팔라딘 최고 상급부대 인퀴지터가 낭트에서 네놈을 지키고 있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어디서 헛소리를 지껄여?”

“그들은 협정에 따라 이브로부터 저를 보호하기 위해 잠시 머무는 것이지 다른 뜻은 없습니다. 형님처럼 몰래 숨어 작당 모의를 하지는 않습니다.”

“뭐라고?”

“힘없는 원로들을 불러내 강압적으로 수장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꼼수를 부리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못하는 말이 없군.”

“누구처럼 걸레를 물고 떠들지는 않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퍽!”

“으악~”

흥분한 벤저민이 분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두르자 사병들이 칼과 총을 뽑아들고 당장에라도 서로를 공격하려 했다.

“그만!”

쓰러졌던 필립이 일어나 공격을 제지했다.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지만, 태연하게 옷을 털고 일어나 벤저민 앞에 섰다.

“네가 꼼수로 가문의 수장 자리를 차지한다고 해도 너를 따를 사람은 많지 않아. 이게 뭔지 알아? 나를 가문의 수장으로 지지한다는 연판장이야. 네놈이 힘으로 굴복시켜 이 자리에 앉힌 원로들보다 훨씬 많은 분이 서명했어.”

“가짜 서류로 나를 협박하려고?”

“가짜인지 진짜인지 직접 알아보면 될 거 아니야?”

“네놈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수 없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어.”

“뭐라고?”

“소중한 상급 나이트를 일본에 보내 모두 죽게 했잖아. 섀도 헌터와 중급 나이트들로 상급 나이트가 포함된 사울 공대와 인퀴지터를 상대할 수 있겠어?”

“지금 협박하는 거냐?”

“협박이 아니라 현실을 알려주는 거야.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멍청이에게.”

“이놈의 자식이!”

“보는 사람도 많은데 예의를 좀 지키지. 이런 행동은 추진력, 결단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잖아.”

“흐음...”

필립의 침착한 태도와 달리 벤저민은 시종일관 거친 언행과 행동으로 원로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줬다.

회의에 참석한 원로들이 벤저민에게 호의적이긴 했지만, 언제든 배를 갈아탈 준비가 된 노회한 사람들이었다.

그 말은 필립의 우세가 점쳐지면 벤저민을 버리고 재빨리 필립에게 달라붙어 아부를 떨어댄다는 의미였다.

연판장이 진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급 능력자인 하워드 슐츠와 엘리자베스 뱅크스, 아이작 스턴을 모두 잃으며 전력에서 필립에게 밀리고 있었다.

일본에서 다윗 공대와 함께 상급 능력자 세 명을 모두 잃은 벤저민 회장은 전력을 만회하고자 상급 능력자 영입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상급 능력자가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도 아니고 새로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의 행동이 후회됐지만, 이미 기차는 기적 소리와 함께 멀리 떠난 후였다.

그리고 오늘 적수로 인정하지도 않던 필립에게 모멸감을 느끼며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꼈다.

“연판장 사본을 놓고 갈 테니 어떻게 처신해야 옳은 행동인지 잘 생각해 봐.”

“이런다고 내가 네 밑으로 들어갈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면 오산이야.”

“들어오든 나가든 그건 네가 알아서 해. 하지만 한 번 나가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잊지 마. 그게 무얼 뜻하는지 알지? 몰라? 말해줄까? 가문에서 영원히 추방당하는 거야. 불명예스럽게!”

“.......”

필립이 회의장을 떠나자 잠시 눈치를 보던 원로 20명이 저마다 핑계를 대며 도망치듯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그래도 3분의 1은 자리를 지켰다. 이들은 벤저민과 오랫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한 사람들로 배신하고 가봐야 필립이 받아주지도 않았다.

“한 번 숙이면 영원히 일어설 수 없습니다. 모로코로 근거를 옮겨 힘을 키우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세르쥬 갱스부르 비서실장의 말이 옳습니다. 프랑스에 남는 건 내일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북아프리카는 회장님 세력이 가장 큰 곳입니다. 그곳을 발판으로 세력을 키우면 됩니다.”

세르쥬 갱스부르 비서실장과 섀도 나이트 대장 파브리스 클뤼제의 말에 벤저민의 마음이 움직였다.

필립 밑으로 들어가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그건 가문에서 쫓겨나는 것보다 더욱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필립이 떠나도록 내버려둘까?”

“이브가 설쳐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회장님을 지지하는 원로들의 눈치도 봐야 해 모른 척 눈을 감을 게 확실합니다.”

“나는 괜찮지만,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그게 옳은 선택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군.”

“필립 회장에게 고개를 숙이면 회장님을 지지하던 사람들도 조만간 등을 돌리고 떠날 겁니다. 권력만큼 비정한 게 없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흐음...”

“다윗 공대도 뿔뿔이 흩어질 겁니다. 회장님은 이제 필립의 적이나 다름없습니다. 살려둘지조차 의심스러운데 세력을 그대로 두겠습니까?”

세르쥬 갱스부르 비서실장 말에 벤저민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필립의 사갈 같은 심보를 생각하면 분명 자신과 가족을 죽여 후환을 없애려 할 게 분명했다.

“알았네. 최대한 빨리 떠날 수 있게 준비하게.”

“알겠습니다.”

필립에게 밀린 벤저민은 3일 후 배웅도 없이 쓸쓸하게 수십 년간 머문 리옹을 떠나 모로코의 카사블랑카로 옮겨갔다.

세르쥬 갱스부르 비서실장의 생각과 달리 필립은 벤저민이 프랑스를 떠나 모로코로 가는 건 용납했지만, 다윗 공대원을 데려가는 건 허락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죽자고 싸우고 싶었지만, 필립에겐 상급 나이트 2명에 중급 나이트가 500명이나 있었다.

바티칸에서 빌려준 종교재판관 인퀴지터 속에는 상급 능력자에 해당하는 상급 팔라딘이 한 명 포함돼 있어 싸워봐야 개죽음이었다.

세르쥬 갱스부르 비서실장이 빌고 또 빌어 최하급 피지컬리스트 30명을 데려가는 것을 허락받은 벤저민은 초라한 모습으로 도망치듯 모로코로 달아났다.

벤저민이 프랑스를 떠나자 필립은 원로들을 모두 소집해 다비드와 벤저민, 이들의 직계 가족 모두를 가문에서 영원히 추방했다.

그리곤 이 사실을 신문과 방송에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브에게 다비드가 더는 로스차일드 가문 사람이 아니니 자신들을 공격하지 말아 달라는 걸 대놓고 광고한 것이었다.

다비드와 벤저민을 축출한 필립은 유럽의 고위 인사들을 모두 초대해 대관식을 하듯 화려하게 로스차일드 가문의 수장 자리에 올랐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행동으로 이브를 자극할 우려가 있다고 걱정하는 사람도 많았었다.

그러나 이브는 필립의 승리를 축하하기라도 하듯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브가 나타나지 않자 필립이 바른 선택을 했다며 로스차일드 가문이 위기를 벗어났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또한, 이브의 목표는 오직 다비드 회장이란 소문이 퍼지며 오랜 세월 다비드 회장을 따르던 측근들도 살기 위해 등을 돌렸다.

사람을 모으는 건 힘들어도 흩어지는 건 순식간이라고 수천만 명에 이르던 열렬한 지지자들이 모두 사라졌다.

이제 다비드 회장의 곁에는 끌로드 베리 비서실장과 쿠삭 형제가 이끄는 쌍두독수리 공대원 300명, 블랙 나이트와 사무엘 윌슨 대장이 전부였다.

“회장님! 이상한 쪽지가 발견됐습니다.”

“이상한 쪽지? 내용이 뭔가?”

“그게...”

“이리 줘보게.”

끌로드 베리 비서실장이 공손히 건넨 쪽지를 받아든 다비드 회장이 작은 메모지에 적힌 내용을 급히 읽었다.

아주 짧은 글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절대 가볍지 않아 다비드 회장의 표정이 수시로 바뀌었다.

< 필립을 죽이고 로스차일드를 섬멸하라. 그러면 너의 죄를 사하리라! 이브! >

“누가 보낸 건가?”

“출입문에 놓여 있는 것을 존 쿠삭 대장이 가져온 것이라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윌슨도 모른다고 하던가?”

“사실은... 어제저녁부터 윌슨 대장과 연락이 끊겼습니다.”

“전부 다 사라진 건가?”

“네!”

“흐음~”

추적과 척살, 정보를 담당하던 블랙 나이트와 대장 사무엘 윌슨이 온다간다 말도 없이 어제저녁 감쪽같이 사라졌다.

끌로드 베리 비서실장에게 물어보지 않아도 필립에게 간 게 확실했다. 블랙 나이트도 이브의 공격에 인원이 100명도 안 남았고, 살아남은 인원도 크고 작은 부상에 성한 곳이 없었다.

가망 없는 미래와 조여 오는 죽음의 공포를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의를 부르짖던 윌슨이 말 한마디 없이 사라지자 참고 참았던 화가 끓어올랐다.

다비드 회장은 부하 직원에게 박하게 군적이 없었다. 연봉도 최고, 복리후생도 최고로 언제나 최고라는 말이 나올 만큼 항상 최고로 대우했다.

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노력한 대가 그 이상을 지급해 부하들의 사기를 고양했다. 물론 불만을 품은 사람도 있고, 배신자도 있고, 이용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벤저민, 필립과 비교하면 극소수라 할 만큼 적은 수로 나름 양심을 지키며 살았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자부심은 이브의 공격과 함께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쳐 어쩔 수 없이 곁을 떠난다고 해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는 할 줄 알았다.

다비드 회장도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떠나는 부하들을 말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켜주지 못해 떠나는 것이라 잘못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 한 명도 메시지조차 남기지 않고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벤저민과 필립, 가문의 원로들도 이럴 수는 없었다. 가문의 수장으로 밤낮없이 노력했고, 월등한 힘을 갖고도 가문의 평화를 위해 동생들의 도전을 눈감아줬다.

그런데 돌아온 건 차디찬 배신뿐이었다. 부하와 가문 모두에게 배신당했다는 생각이 들자 잠을 잘 수도,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다.

다비드 회장은 이브가 나타난 지 4개월 만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체중도 크게 줄어 삐쩍 마른 80대 노인처럼 변했다.

“답장을 쓰게. 누가 보낸 것인지 명확한 확증을 달라고. 그러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준다고.”

“이브가 보낸 게 맞다면 정말 가문을 공격하실 겁니까?”

“그들이 나를 버렸으니, 이제 내가 그들을 버릴 차례야.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지.”

“그래도...”

“로스차일드란 이름에 아직 미련이 남았나?”

“그건 아니지만...”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게.”

“알겠습니다.”

다비드 회장이 직접 작성한 답장은 휘몰아치는 바람에 함께 사라졌고, 1시간 후 하얀 깃털이 이브의 답장 대신 출입문 바닥에 깊이 꽂혀 있었다.

깃털의 진위를 확인한 존 쿠삭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비드 회장이 마지막까지 남은 끌로드 베리 비서실장과 쿠삭 형제, 프랑수아 아르디, 루이즈 보르고앙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 모았다.

============================ 작품 후기 ============================

사과말씀 드립니다.

485편을 올려야 하는데, 486편을 올렸습니다.

죄송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