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77 분노의 화신 이브 =========================================================================
477. 분노의 화신 이브
상아의 말에 화들짝 놀란 아리가 펄쩍 뛰었다. 하루라도 섹스를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지만, 아내들을 거칠게 다루진 않았다.
여자는 유리그릇과 같아 조심조심 다뤄야지 함부로 다루면 깨지고 망가져 다시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능력자라 다칠 염려는 없었지만, 마음은 망가질 수 있어 언제나 아내들이 쾌락을 느낄 수 있게 노력했다.
그러나 피의 저주를 사용하면 들끓는 욕정에 아주 거칠고 강하게 다뤄 아내들이 두려워했다.
그렇다고 목을 조르고, 때리고, 물어뜯는 가학적인 짓을 하진 않았다. 쉽게 가라앉지 않는 욕화에 아내들이 지쳐 스러질 때까지 쉬지 않고 그 짓을 해 힘들어하는 것이었다.
“소연 언니는 임신해서 안 되고, 저와 마샤, 아영이, 소희는 그날이라서 안 돼요.”
“그럼 나랑 서인 언니, 은비, 제니퍼 이렇게 넷이서 상대해야겠네?”
“미안해요. 언니!”
“아니야. 어쩔 수 없지.”
“아리 언니!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책임질게.”
“은비야! 그러다 죽을 수도 있어.”
“오빠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괜찮아. 내가 죽어 오빠가 살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우아~ 열녀 났네. 지홍이가 너를 옆에 끼고 다닌 보람이 있다.”
“예뻐하고 사랑하는 만큼 보답해야지. 안 그래? 히히히히~”
B급 상급 레드몬 히드라 한 마리와 떨어져 나온 A급 엘리트 레드몬 블랙맘바 12마리를 잡았지만, 나온 건 달랑 레드주얼 하나였다.
몸통에서 떨어져 나온 블랙맘바는 레드몬으로 쳐주지도 않는지 레드주얼은 고사하고 레드스톤도 하나 없었다.
“빛 좋은 개살구네.”
“개살구라도 소환수 주얼이 나오면 대박이잖아.”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내 사랑을 듬뿍 받았으니까 분명 그럴 거야.”
“사랑은 내가 줬잖아.”
“그걸 받아준 게 나야. 지금도 허리가 아파 죽겠어.”
“미안!”
정말 은비의 헌신적인 사랑이 통했는지 바라고 바라던 상급 레드몬에서 소환수 주얼이 나왔다.
히드라에서 나온 레드주얼은 크기가 5cm로 머리 셋 달린 뱀이 숲을 종횡무진 달리는 모습이었다.
파란 비늘이 가득 덮인 길이 50cm의 히드라는 머리 셋으로 영광의 주인은 막내 소희였다.
그러나 상급 레드몬에서 나온 소환수라는 것이 창피할 만큼 스킬은 달랑 독탄 하나뿐이었다.
그래도 효과는 매우 출중해 B급 엘리트 레드몬은 중독 후 10분 이내 사망, A급은 중독 후 3분 이내로 속도 80% 저하, C급 상급 레드몬도 30% 저하로 성능은 구미호만큼 뛰어났다.
“오빠! 언니들! 정말 고마워요. 제니퍼 언니! 미안해요!”
“나는 미스트 존에서 나온 멋진 녀석을 소환수로 삼을 거니까 마음 쓰지 않아도 돼.”
“언니는 마음이 착해 히드라보다 백배 더 좋은 소환수를 얻을 거예요.”
“백배 더 좋은 걸 얻으라는 말은 정말 고마운데, 착하다는 말은 다른 사람 앞에서 하면 안 돼. 나 착하지 않아. 성질 더럽다고 소문났어. 우리 식구들에게만 착한 척하는 거야.”
“그건 저도 그래요. 학교 다닐 때 못된 짓 많이 했어요. 지금도 뒤에서 욕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누가 더 못 됐는지 베틀 붙었어? 그럼 한숙 언니가 일등인데. KM 그룹 직원들 한숙 언니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잖아.”
“은비 너 뒤에서 욕했다고 한숙 언니에게 이른다.”
“마음대로 해. 언니도 아는 사실이라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아. 그리고 언니는 여마두라는 별명을 싫어하지 않아. 말해봐야 웃기만 할 걸?”
“나는 한숙 언니가 화내는 걸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도통 이해가 안 돼. 대체 어딜 봐서 여마두라는 거야?”
“제니퍼! 너도 성질 더럽다고 했지만, 우리가 보기엔 엄청나게 착해. 여기 있는 사람 중 절반은 너랑 같아. 다른 사람들 앞에선 온갖 성질 다 부려도 가족에겐 절대 그렇지 않아. 그래서 남들이 욕하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욕한다고 화내고 편드는 거야. 가족을 더 힘들게 하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은 다 우리처럼 살아.”
은비의 말처럼 개차반 같은 성격도 자기가 사랑하는 연인과 가족에겐 최대한 그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긴 하지만, 그래도 본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래서 가족이었다.
밖에선 천하에 몹쓸 놈이라도 가족에겐 잘하려고 하는 것 그게 바로 연인, 남편, 부모, 자식이었다.
“이제 우리가 아는 상급 레드몬은 다 잡았고, B급 상급 레드몬까진 큰 무리 없이 잡을 수 있으니까 미스트 존을 공략해도 되지?”
“좋아. 대신 미스트 존을 공략할 때 하람 오빠와 혈풍을 무조건 대동해. 그러면 나도 더는 얘기하지 않을게.”
“혈풍까지 데리고 다니라고? 그럴 필요 있을까? 하람 하나면 충분한데.”
“말이 좀 많은 게 흠이지만, 전투엔 큰 도움이 되잖아.”
“화병으로 죽는 건 생각하지 않고?”
“크라켄 잡을 때 자기 몫의 200% 이상했어. 소란피우지도 않고 묵묵하게 행동했고. 평소 수다가 과하고 성가시게 구는 게 흠이지만, 싸움에선 언제나 진지했어. 그러니 선입견을 품고 보지 마.”
“재고할 생각 없어?”
“없어. 혈풍 데리고 가지 않을 거면 나는 물론 언니들과 동생들 모두 밟고 가야 할 거야.”
“후유~ 알았어. 알았다고. 데리고 가면 될 거 아니야.”
“고마워!”
소연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혈풍을 미스트 존 공략팀에 포함했다. 사실 혈풍을 못마땅하게 말한 건 수다 때문이 아니라 나진시를 지킬 확실한 카드가 필요해서였다.
규슈의 후쿠오카와 기타큐슈가 공격받는 건 두렵지 않았지만, 나진시가 공격받는 건 생각하기도 싫었다.
나진시는 나와 아내들의 피와 땀이 서린 곳이었다. 밤잠을 설쳐가며 방어벽을 세웠고, 레드몬을 사냥해 터전을 만들었다.
또한, 도시의 건물 하나하나 아내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직접 벽돌을 쌓지는 않았지만, 건물 설계와 들어설 위치 등을 아내들이 몇 날 밤을 상의해 만든 도시였다.
그래서 유독 나진시에 애착이 컸다. 도시 시설과 크기는 후쿠오카와 기타큐슈가 몇 배 더 크고 뛰어났지만, 내 손으로 만든 도시이기에 보잘것없어도 훨씬 멋지게 보였다.
그 때문에 후쿠오카와 기타큐슈보다 몇 배나 많은 신기전과 신형 방어탑, 미래 레드포스가 도시를 방어했다.
남들이 보면 인구 1,000만 명이 사는 도시를 방어한다고 생각할 만큼 지나치게 병력이 많았고, 방어시설도 심하게 과했다.
그런데도 계속 모자라 보였다. 그건 내 도시이기에, 아내들의 도시이기에, 미래 레드몬 가족 모두의 도시이기 때문이었다.
내 자식이 아무리 못나도 판·검사하는 남의 자신보다 소중한 것처럼 우리 모두의 땀이 녹아든 도시이기에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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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월 20일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정글 속 바위틈에서 한 달 동안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이브가 깨어났다.
나비가 허물을 벗고 하늘 높이 날기 위해 고치 속에서 시간을 보내듯 이브도 고치를 깨고 세상으로 나오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첫 번째 변화는 써커들처럼 등에 날개가 생겼다. 잠자리 날개 같은 얇고 힘없는 날개가 아닌 천사의 날개처럼 하얀 깃털이 달린 크고 멋진 날개였다.
날개를 빼면 눈에 띄는 외형적 변화는 없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몸에서 풍기는 신비하고 매혹적인 아우라가 이브를 가냘픈 소녀가 아닌 여신처럼 보이게 했다.
이브가 땅을 보고 바다라고 하면 바다라고 믿고, 달을 보고 해라고 하면 해라고 믿을 만큼 무한한 신뢰를 줬다.
가장 큰 변화로 상급 레드몬이자, 최상급 피지컬리스트, 최상급 멘탈리스트로 진화한 것이었다.
마이클 쿠삭과 써커의 영향으로 인간과 레드몬의 장점을 모두 갖고 태어난 이브는 레드몬인 동시에 인간이었고, 인간인 동시에 레드몬이었다.
진화를 통해 두 가지 장점을 극대화한 이브는 다비드 로스차일드 회장이 꿈꾸고 바라던 모습으로 환골탈태(換骨奪胎)했다.
진화의 끝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강력해진 이브는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정글의 강자들을 차례로 제압하며 한 달 만에 사방 200km 내에 적수가 없는 왕으로 우뚝 섰다.
껍데기를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온 이브는 한 달이 지난 줄도 모르고 리처드 르원틴 박사가 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하지만 금방 찾아온다던 르원틴 박사는 일주일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고, 한 달이 다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그제야 박사에게 안 좋을 일이 일어났거나, 자신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치를 깨고 나오며 최강의 생물로 진화했지만, 순수한 마음은 바뀌지 않았다. 때 묻지 않은 산골 소녀의 모습 그대로 변한 게 없는 이브는 르원틴 박사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다 도망치기 전 고개를 돌려 바라본 박사의 얼굴이 꿈속에 나타나며,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됐다.
이브는 박사의 눈에서 애절함, 안타까움, 미안함 그리고 다시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아픔을 읽으며 박사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아 애써 아니라고 부정하며 박사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한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더는 불안한 마음을 참을 수 없어 박사와 헤어진 말리 공화국으로 갔다.
바로 어제 일처럼 느껴지는 사건 현장은 싸움의 흔적도 박사의 체취도 찾을 수 없었다.
이브가 일주일만 일찍 왔어도 블랙 나이트들과 마주쳤을 것이다. 데랑제르의 말을 믿지 못한 블랙 나이트 사무엘 윌슨 대장은 사건 현장에 블랙 나이트들을 보내 이브를 잡아먹은 레드몬을 찾게 했다.
그러나 애당초 있지도 않은 레드몬을 찾을 수 없었다. 또한, 주위를 아무리 뒤져도 혈흔조차 발견할 수 없어 데랑제르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알게 됐다.
부랴부랴 정보원들을 다시 총동원하고, 위성을 샅샅이 훑었지만, 정글 속 깊은 바위틈에 숨은 이브를 찾을 수 없었다.
이브가 다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 달 넘게 블랙 나이트들을 잠복시켰지만, 사람 냄새를 맡고 찾아온 레드몬들에 사상자가 급증하자 어쩔 수 없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박사를 찾을 방법은 연구소로 가는 것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브는 새처럼 날아 박사와 함께 지나온 길을 되짚어 스위스로 날아갔다.
제트기처럼 빠르게 날아 단 하루 만에 스위스 베른의 아델보덴 생체병기 연구소에 도착했다.
긴장된 마음으로 연구소에 도착한 이브는 평소 박사가 했던 다급할수록 마음을 침착하게 갖고 주변을 둘러보라는 말을 기억해 냈다.
르원틴 박사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는 이브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박사와 함께 자신을 담당한 남성 연구원을 몰래 따라가 납치(?)했다.
최대한 착하고 예의 바르게 르원틴 박사가 어디 있는지 묻던 이브는 겁에 질려 횡설수설하던 연구원의 입을 통해 박사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얼마 안 되는 짧은 생이었지만, 이브에게 르원틴 박사는 유일한 친구이자 사랑이자 가족이었다.
그런 박사를 잃자 눈앞이 깜깜해지며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지독한 슬픔은 눈물이 되었고, 눈물은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변했다.
분노는 다시 증오가 되었고, 증오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영혼인 이브를 복수의 화신으로 바꿔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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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행복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