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71 호문쿨루스(Homunculus) 이브(Eve) =========================================================================
471.
박사의 말을 철석같이 믿은 이브는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이브는 박사를 따라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평생 좁은 실험실에 갇혀 살았다.
20걸음이면 도달할 좁은 실험실에선 달릴 곳도 없었고, 달리라는 명령을 내리는 연구원도 없었다.
그런 이브가 거친 사바나의 평원을 달리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 5분도 안 돼 숨이 가빠 심장이 터질 것처럼 요동쳤고,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르원틴 박사가 내린 마지막 명령을 어길 수 없어 이브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그렇게 안간힘을 쓰며 달리자 어느 순간부터 힘들다는 생각이 사라지며,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가빴던 숨이 편안해지고, 다리까지 가벼워지자 점점 속도가 붙어 달리면 달릴수록 빨라졌다.
마음껏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던 이브는 끝없이 펼쳐진 사바나 지대를 달리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마음이 뻥 뚫리자 몸을 태울 것 같은 뜨거운 열이 일었다. 불덩이 같은 열이 온몸을 휘감자 시원한 바람으로 열을 식히기 위해 더욱 빨리 달렸다.
데랑제르 대장은 르원틴 박사를 죽이고 따라갈 때만 해도 10분이면 잡는다고 확신했다.
지친 공대원들이 뒤로 처져도 자신과 부관 로만 가르시아만 있으면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믿었다.
데랑제브 대장은 이브가 실험실에 갇혀있던 호문쿨루스로 체력적 한계로 오래 달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이브는 데랑제르 대장의 예상을 깨고 폭주기관차처럼 달려 깊은 정글로 들어갔다.
“대장님! 더 들어가면 위험합니다.”
“하아! 하아! 포기하면 문책을 피할 수 없어.”
“더 들어가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이브도 깊은 정글로 들어간 이상 절대 살아나올 수 없습니다. 상부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어 정상 참작을 해줄 겁니다.”
”과연 그럴까?“
“죽었다고 보고하는 겁니다. 대장님과 저 이렇게 둘밖에 없으니 입을 맞추면 아무도 모를 겁니다.”
“흐음...”
이브를 놓치고 돌아가면 문책을 피할 수 없었다. 감봉 정도의 문책이 아니라 일의 중대성을 고려하면 맞아 죽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정글에 뛰어들 순 없었다. 정글에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 날이 제삿날이었다.
‘공대원 중 다친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이브만 레드몬에 죽었다고 말하면 그걸 믿겠어? 나라도 믿지 않겠다. 그렇다면 누군가 죽어야 한다는 뜻인데... 부관을 죽이고 적당한 핑계를 대는 것이 좋겠군. 그래야 나라도 살아날 확률이 있지?’
“알았네. 어서 나가세.”
“잘 생각하셨습니다.”
“뛰다가 발을 접질린 것 같네. 부축 좀 해주게.”
“알겠습니다.”
로만 가르시아 부관이 다가와 부축하자 데랑제브 대장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가르시아 부관은 상관인 데랑제르 대장이 불편할까 봐 열과 성의를 다해 부축했다.
쌍두독수리 공대를 여유 있게 따돌린 이브는 뜨거운 몸을 식히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렸다.
말리 공화국의 국경을 넘어 계속 동쪽으로 달린 이브는 부르키나파소, 베냉, 나이지리아, 카메룬을 지나 중앙아프리카 공화국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렸다.
20시간을 달리는 동안 수많은 동물이 놀라 달아났고, 영역을 침범당한 레드몬들이 공격했지만, 이브는 빠른 속도와 민첩한 움직임으로 상처 하나 없이 3,000km를 넘는 거리를 지나왔다.
최강의 전사 마이클 쿠퍼와 써커의 DNA 덕분인지 이브는 타고난 전사이자, 진정한 호문쿨루스였다.
은밀하게 날아온 독침도, 비처럼 쏟아진 가시도, 채찍처럼 뻗어온 꼬리도 모두 피해내며 사바나의 초원과 정글을 통과했다.
그렇게 마음껏 자유를 만끽한 이브는 힘이 다하자 부서진 바위틈을 비집고 들어가 잠이 들었다.
20시간을 쉬지 않고 달린 이브는 금세 잠이 들었다. 그리고 한 시간 후 하얀 액체가 흘러나와 몸을 감쌌다.
흡사 누에고치처럼 변한 이브는 그런 사실도 모른 채 르원틴 박사를 닮은 아이를 갖는 꿈을 꾸며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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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월 1일
크라켄 주얼의 기억 흡수 스킬에 푹 빠져 한 달 넘게 두문불출하는 사이 1997년 정축년(丁丑年) 소의 해가 가고, 1998년 무인년(戊寅年) 호랑이의 해가 밝았다.
풀과 꽃을 시작으로 나무, 토끼, 사슴, 족제비, 스라소니, 멧돼지, 늑대, 곰, 호랑이 등 식물과 동물을 두루 섭렵한 다음 레드몬으로 넘어갔다.
레드몬도 종류를 가리지 않고 기억을 흡수하며 먹이와 생활방식, 종족 번식에 대한 욕구, 자연에 대한 이해, 인간에 대한 생각, 진화가 일어나는 모습 등 수많은 것을 알게 됐다.
동물보다 지능이 월등히 높은 레드몬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다. 좋게 보면 고등화한 것이고, 나쁘게 보면 인간처럼 탐욕의 깊이가 깊어졌다.
사물과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도 식물과 동물이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과 달리 레드몬은 인간처럼 의미를 부여하거나, 이용하거나, 아무런 감흥 없이 바라보았다.
결국, 지능이 발달하며 인간이 걸어온 길을 답습한다는 것으로 씁쓸하면서도 점점 위험이 커진다는 것에 마음이 불안했다.
그래도 기억 흡수 덕분에 놈들의 특성과 약점을 확실하게 파악했고, 수련에도 큰 도움이 됐다.
그러나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고 동물과 레드몬의 잔인한 모습과 잔혹한 공격성을 계속 기억에 담자 나도 모르게 성격이 악독하고 과격하게 변했다.
이를 고치기 위해 자연을 품은 나무와 풀의 기억을 수시로 흡수했다. 순수한 자연을 접하면 마음이 편안해져 살심을 다스릴 수 있었다.
하지만 기억은 사라지지 않아 예전보다 조금 더 잔인해진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대하는 건 아니었고, 레드몬을 죽일 때 전처럼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인간의 적 레드몬을 상대하며 측은지심을 갖는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레드몬이란 이유만으로 죽이는 것이라 미안한 마음을 갖고 좋은 곳에 가기를 바라는 건 최소한의 도리였다.
그러나 기억 흡수 이후 이런 마음이 사라지며 독하게 손을 써 아내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한숙아! 다음 주에 검은 코뿔소 잡으러 탄자니아 갈 거니까 준비해.”
“벌써요?”
“벌써는 무슨? 원래 지난해에 잡으려고 한 건데, 크라켄 때문에 늦춰진 거잖아. 몸도 다 나았고, 빨리빨리 해치워야지.”
“왜 그렇게 서두르세요?”
“뭘 서둘러?”
“일 중독자처럼 한시도 가만있질 않잖아요.”
“내가?”
“네!”
“그런가?”
“그런가가 아니라 아주 심해요. 무언가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게 느껴질 만큼 심해요.”
한숙의 말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맞는 것 같았다. 1992년 6월 1일 나진시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정말 열심히 달려왔다.
누가 뒤에서 쫓기라도 하는 것처럼 쉬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다. 가끔 주말에 침대에서 빈둥대며 아내들을 괴롭히기도 했지만, 그런 날은 손을 꼽을 만큼 며칠 안 됐다.
일 년의 4분의 1은 해외 원정으로 소비했고, 나머지 기간도 상급 레드몬 사냥, 일본과 중국 문제처리 등 온갖 잡다한 일로 집에 있는 날이 많지 않았다.
더 황당한 건 최근 침대에 누워 있었던 기간이 모두 상급 레드몬을 사냥하다가 다쳐서 강제로 휴식을 취한 거란 사실이었다.
한 마디로 휴식다운 휴식을 갖지 못하고, 한숙의 말처럼 일에 쫓겨 6년 동안 쉼 없이 달리기만 한 것이었다.
“최소 일 년에 한 번 피크닉 가자고 하고선 지키지도 않고,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내가 그런 약속을 했나?”
“사할린 옆에 있던 작은 섬 갔다 온 거 벌써 까먹은 거예요?”
“흐흐흐흐~”
“알면서 시치미나 떼고... 정말 너무하세요.”
“알았어. 가면 될 거 아니야.”
“어디로 갈 거예요?”
간다는 말에 냉랭하던 한숙의 얼굴이 화사한 복사꽃처럼 단번에 바뀌는 걸 보고 당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말을 꺼낸 이상 물릴 수는 없었다. 그건 남편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일로, 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듯이 하기로 했으면 하늘이 두 쪽 나도 해야 했다.
그리고 그동안 약속을 지키지 못한 미안함을 생각하면 당했다고 해도 무조건 들어줘야 했다.
피크닉 장소는 시코쿠 섬 서남단 있는 오키노시마 섬으로 정했다. 기타큐슈에서 불과 190km밖에 떨어지지 않아 전용헬기를 이용하면 금방이었다.
“정보원들을 총동원해?”
“응!”
“뭘 찾는데?”
“남자와 여자!”
“그게 무슨 말이야?”
“남자는 리처드 르원틴 박사로 헤나 테슬라 박사의 수제자고, 여자는 여기저기 다 알아봤는데,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어.”
“테슬라 박사면 키메라 연구하는 그 박사 아니야?”
“맞아.”
“다비드 회장이 가장 아끼는 박사의 수제자가 왜 도망을 쳐? 대우가 최고일 텐데, 도망갈 이유가 없잖아?”
“여자 때문인 것 같아.”
“어떤 여자기에 테슬라 박사 수제자가 사랑의 도피를 해?”
“강승원 국장은 신형 키메라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어. 그게 아니면 도망칠 이유가 없어. 아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30년간 테슬라 박사 옆에 딱 달라붙어 연구만 한 박사야.”
“괴물 키메라와 사랑에 빠졌다? 취향이 아주 독특한 박사네. 하하하하~”
신형 키메라와 달아났다는 소연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사랑은 무조건 축복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괴물 키메라를 사랑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자 취향이 독특하면 그럴 수도 있지만, 예쁜 여자도 많은데 괴물을 좋아하는 건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진을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그래 봐야 괴물이지.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는 거 아니잖아.”
“봐봐! 괴물로 보이는지 천사로 보이는지.”
“헉!”
사진 속 여성은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놀고먹는 엘리자베스 뱅크스만큼이나 아름다웠다.
엘리자베스 뱅크스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화신이라고 불릴 만큼 대단한 미녀로 마샤, 상아, 소연만이 비슷한 수준이었고, 나머지 아내들은 미안하지만 살짝 미모가 달렸다.
그런 최고의 미녀와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사진 속 여성도 눈이 번쩍 뜨일 대단한 미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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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행복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