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36 사라진 도쿄 =========================================================================
436.
순록의 레드주얼을 흡수하자 파멸의 창과 바람 스킬의 성능이 두 배로 향상됐다. 바람 스킬은 속도가 두 배 빨라져 빛처럼 빠르게 움직였고, 공기저항도 더욱 줄어 소리 없이 은밀히 다가갈 수 있었다.
파멸의 창도 성능이 두 배로 향상하며 단단한 바위를 1,000m나 파고들었고, 지나간 자리엔 지름 20m의 커다란 동굴이 뚫렸다.
파괴력도 크게 향상돼 중급 레드몬은 살짝 스쳐도 파동 에너지에 미숫가루처럼 곱게 가루가 되어 부서졌고, 엘리트 레드몬은 가죽만 남긴 채 단단한 본스틸까지 조각조각 부서졌다.
또한, 파멸의 창에 다친 상처는 아리와 마샤의 힐링 스킬로도 재생이 안 됐고, 아영의 정화 스킬을 사용하고 치료해도 복원되지 않았다.
“미스트 존의 안개도 복원되지 않고 뚫려 있지 않을까요?”
“글쎄?”
“안개면 뚫려도 메워지지만, 결계라면 뚫린 상태로 있을 수도 있잖아요?”
“지난번엔 구멍이 메워졌잖아.”
“그때는 소멸 기능이 없었잖아요.”
상아의 말에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멸 기능이 추가된 만큼 결계가 복원 기능만 없다면 구멍이 뚫린 상태로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안개 형태를 취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난번처럼 복원될 가능성이 높아 낙관할 수는 없었다.
‘조만간 실험해보면 알겠지.’
내가 찬 바닥에 앉아 레드주얼을 흡수하는 동안 도쿄 도는 절반이 날아가며 1,00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렇듯 갑작스럽게 큰 피해가 발생한 건 그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보스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기후 현으로 달아났던 보스는 3개월 만에 몸길이 6.12m, 꼬리 길이 4.55m, 몸무게 1.253ton으로 급성장해 A급 엘리트 레드몬이 되어 나타났다.
놈은 호위병처럼 B급 엘리트 레드몬을 10마리를 데리고 나타나 도쿄 남서쪽 카나카와 시를 공격했다.
보스의 입김에 방어벽을 지키던 자위대가 독에 중독돼 모두 죽자 변종 방사능 포베로미스들이 방어벽을 부수고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갔다.
파죽지세로 한 시간 만에 요코하마까지 점령한 놈들은 배를 먼저 타기 위해 서로 밀치고, 밟고, 아우성을 치던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심장과 간을 빼먹었다.
간식을 즐긴 놈들은 해안을 따라 가와사키와 미나토로 쳐들어갔고, 그곳에서도 피의 살육을 즐기며 눈에 보이는 사람은 하나도 남김없이 죽였다.
놀란 가미카제 공대와 사무라이들이 급히 출동했고, 다윗 공대도 만약을 대비해 뒤를 받치며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다행히 하워드 슐츠와 아이작 스턴, 엘리자베스 뱅크스가 보스를 물리쳤고, 가미카제 공대와 다윗 공대도 B급 엘리트들을 3마리 잡으며 500마리가 넘는 변종 방사능 포베로미스를 죽였다.
그러나 일본은 사무라이 682명이 죽고 555명이 크게 다쳤고, 뒤를 받치던 다윗 공대도 전투에 휩쓸리며 225명이 죽고 146명이 크게 다쳤다.
또한, 달아난 변종 방사능 포베로미스들이 도쿄 항과 정박한 배를 파괴해 수송에도 큰 차질을 빚게 됐다.
“도쿄와 사이타마, 아다치, 지바만 멀쩡한 상태로 외곽은 자위대마다 모두 철수해 포베로미스가 들끓는 실정이에요.”
“항구는?”
“요코하마 항구는 포베로미스에게 넘어갔고, 도쿄 항은 50% 정도만이 간신히 가동 중이에요.”
“공항은?”
“도쿄 국제공항은 요코하마 시에 있어 사용할 수 없고, 나리타공항도 지바 시에서 동북쪽으로 30km 떨어져 포베로미스에게 넘어갔어요.”
“남은 공항이 없는 거야?”
“도쿄만 남쪽의 오시마 섬에 공항이 있긴 한데, 길이가 2km 정도라 대형 항공기와 수송기는 사용할 수 없어요.”
“다윗 공대는 어쩌고 있어?”
“계약 위반이라고 길길이 날뛰고 있어요.”
“계약서에 A급, B급이 명시돼 있었어?”
“그건 아닌가 봐요. 다만 다윗 공대와 계약할 때 보스가 B급으로 알고 있어 A급을 상대할지는 몰랐던 거죠.”
“상급 능력자인 하워드와 아이작, 엘리자베스 셋이서 보스를 물리쳤다고 하지 않았어?”
“물리쳤다기보단 조심성 많은 보스가 물러난 것 같아요.”
“지난번에 새끼와 호위들을 끌고 기후 현으로 숨은 것처럼?”
“네!”
“머리는 나쁜데 영악하네.”
보스는 하워츠와 아이작, 엘리자베스가 독에 중독되지 않고, 숫자에서도 압도적으로 밀리자 다음을 기약하며 꽁지를 빼는 영리함을 보였다.
“정화 스킬을 사용하는 능력자도 없는데, 독은 어떻게 방어했어?”
“B급 엘리트 레드몬의 가죽으로 만든 방호복으로 물샐틈없이 방어하고, 얼굴 전체를 가리는 전면 마스크와 산소탱크를 착용했어요.”
“그걸 뒤집어쓰고 싸우려면 보통 불편한 게 아닐 텐데, 훈련을 어마어마했나 보네.”
“다윗 공대 전원이 같은 복장이었어요. 사전에 충분한 준비를 했다고 봐야죠.”
“일본은?”
“얼굴을 가리는 방독면이 전부였어요. 그 때문에 피해가 다윗 공대보다 세 배나 많았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상아의 설명과 함께 첩보위성으로 찍은 전투 동영상을 분석했다.
인간처럼 두 손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보스와 B급 엘리트들은 날카로운 손톱과 기다란 꼬리, 빠른 속도를 이용해 사무라이와 다윗 공대원을 손쉽게 처리했다.
그런데도 사무라이와 다윗 공대가 이긴 건 보스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 숫자도 600:9,000으로 절대적으로 앞섰기 때문이었다.
또한, 중급 능력자와 멘탈리스트가 많았고, 엘리트 레드몬 치고 방어력이 약한 것도 이길 수 있던 큰 요인이었다.
전투가 벌어진 시간은 새벽 2시로 곳곳에 전조등이 밝혀졌지만, 어두운 밤이라 영상이 흐릿해 잘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포베로미스가 어떻게 공격하는지, 사무라이와 다윗 공대가 어떤 식으로 방어하는지 대충 감은 잡을 수 있었다.
대검을 사용하는 하워드, 활을 사용하는 아이작, 냉기 스킬로 놈들을 공격하는 엘리자베스도 어렴풋이나마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화질이 나빠 섣불리 단언할 수 없지만, 아이작과 엘리자베스는 상급 능력자치곤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고, 하워드는 확실한 상급 능력자의 수준이었다.
“셋 중 하워드 슐츠가 단연 으뜸이네.”
“그러게요. 몸을 회전하며 날아가 상대를 공격하는 스킬은 파괴력도 뛰어나지만, 속도도 매우 빨라 피하지를 못하네요.”
“성격은 어떻다고 했지?”
“아이작은 매사 부정적이며 불만이 많고 여자를 심하게 밝히고, 엘리자베스는 매우 음탕하고 활달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내성적이라고 하네요. 하워드는 침착하고 꼼꼼한 성격으로 부하들에게 인망도 높지만, 주관이 뚜렷하지 않다고 하네요.”
“주관이 뚜렷하지 않다는 게 무슨 뜻이야?”
“벤저민 회장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대요.”
“그거야 사냥개로 키워졌으니 당연한 거 아닌가?”
“엘리자베스와 연인 사이였는데, 벤저민 회장이 가로챘대요. 그런데도 충성을 다한다고 하네요.”
“자기 여자를 뺏어간 상관의 명령을 따른다고? 바보 아니야?”
“그러게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네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넘겨준 자료와 강승원 국장이 어렵게 구한 자료를 뒤적이며 상아가 하워드와 아이작, 엘리자베스의 성격은 물론 구질구질한 과거사까지 알려줬다.
“그걸로 내분을 일으킬 확률은 없어?”
“없어요. 워낙 잘 길들어서 꿈쩍도 안 할 거예요.”
“의리가 남다른 놈이네.”
“의리가 있는 건지, 줏대가 없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여자가 보기엔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남자예요. 엘리자베스가 불쌍할 지경이네요.”
‘하워드도 웃기지만, 옆에 붙어 있는 엘리자베스도 이해가 안 되네. 자신을 지켜주지 않은 남자 옆에 있는 게 말이나 돼? 줏대 없기는 둘 다 똑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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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지?]
[응, 아주 조용해.]
[불편한 건 없고?]
[없어.]
[일본 사태가 끝날 때까진 그곳에 있어야 하니까 심심해도 참아.]
[조은영 공대장이 잘 보살펴줘 심심하지 않아.]
[마음에 들어?]
[뭐가?]
[조은영 공대장!]
[마음에 들고 안 들고 어디 있어? 좋은 동료인데.]
[조은영 공대장이 여자로 보이냐고 물어본 거야! 야이 등신아~]
[여자니까 당연히 여자로 보이지.]
[아이고~ 이런 벽창호! 말귀를 못 알아들어.]
[왜 그러는데?]
[정말 무슨 말인지 몰라? 조은영 공대장이 동료가 아닌 자빠뜨리고 싶은 여자로 느껴지지 않느냐고 물어본 거야?]
[나는 또 무슨 소리인가 했네. 그쪽으론 관심 없어.]
짜증을 내자 하람은 그제야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머리는 아이큐 200의 천재지만, 아직 유머와 은유를 구사하는 능력은 한참 떨어져 말귀를 못 알아들을 때가 많았다.
[너 아정 처제 마음에 두고 있는 거 아니지?]
[아니야~]
[다시 한 번 말하는데, 꿈도 꾸지 마. 둘이 같이 있다가 걸리는 순간 그날이 네 제삿날이다. 알았어?]
[그런 일 절대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럼 다행이고.]
하람이 멧돼지만 아니면 처제와 사귀는 걸 방해할 생각이 없었다. 내가 극구 만류하는 이유는 아이를 낳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녀석은 모습만 사람이지 속은 멧돼지라 아이를 낳을 수 없다. 아이를 싫어하는 내가 이런 걱정을 한다는 게 우습지만, 아들딸 많이 낳아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게 소원인 아정 처제를 슬프게 할 순 없었다.
[너 정말 조은영씨와 사귈 생각 없어?]
[없어!]
[그러면 미래 2공대원 중에 마음에 드는 여자도 없어?]
[내 마음속에 여자는 미치코 한 명뿐이야.]
[평생 죽은 아내만 생각하며 살 거야?]
[살다 보면 다른 사랑이 찾아올 수도 있겠지. 그러나 지금은 아니야. 미안한 마음이 깨끗이 사라지기 전까지 다른 여자를 사귀고 싶지 않아.]
[너무 오랫동안 잡고 있지 마. 그건 미치코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니까.]
[알았어.]
전화를 끊으며 내가 한 말을 내가 지킬 수 있을까 생각했다. 정을 마구 뿌리고 다니는 난봉꾼이지만, 아내 중 한 명이라도 잃게 되면 하람처럼 크게 낙담해 실의에 빠질 게 분명했다.
남들은 아내가 많아 한두 명 사라져도 신경도 쓰지 않을 거라고 말하지만, 내게 있어 아내들은 세상 모든 보물을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희망이자 등불이었다.
그런 아내들을 잃는다면 멀쩡하게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광기에 빠져 세상을 향해 분노를 폭발할 게 분명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모두 즐거운 주말되세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