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33 사라진 도쿄 =========================================================================
433.
3일 후 어렵게 성사된 회의는 30분 만에 파행으로 끝났다. 미국은 기후 현, 아이치 현, 도야마 현을 포함한 서남쪽을 모두 우리에게 할양할 뜻을 보였다.
이는 지난번 제시안보다 훨씬 넓어진 것으로 혼슈의 40%가 넘는 크기였다. 분위기가 살짝 좋아질 찰나 한숙이 일본인은 혼슈에 살 수 없다는 조건을 내걸자 회의는 급속도로 냉각되며 결렬됐다.
고어 부통령은 미국 땅에 누가 살지 결정하는 건 미국 소관으로 부당한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고어 부통령의 말은 너무도 지당한 말이었다. 미국 땅에 누가 살지 결정하는 건 주권국인 미국이 결정할 일이지 다른 이가 결정할 사항은 아니었다.
명백한 내정간섭으로 내가 그런 소리를 들었다면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한숙이 그런 조건을 내건 건 미국이 정말 땅을 차지할지도 의심스러웠고, 미국이 차지한다고 해도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 게 확실해 그런 것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일본인을 위해 변종 방사능 포베로미스를 사냥해준 꼴이 되는 것이었다.
눈에 뻔히 보이는 꼼수를 부리는 미국과 고어 부통령의 행태에 한숙이 언성을 높이는 것으로 협상은 결렬됐다.
이후 일주일간 두 번의 협상이 더 있었지만,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듯 평행선을 달리며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그동안 우리는 아침마다 규슈로 출근해 방사능 정화작업에 몰두하며 바쁜 척 행동했다.
우리 목적은 도쿄와 나고야, 오사카가 쑥대밭이 되고 혼슈에 사람이 남지 않은 다음 우리 입맛에 맞게 협상을 이끌어가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건 미국이 전보다 우리 눈치는 더 본다는 것이었다. 그건 기타큐슈를 지키고 있는 하람 때문이었다.
소문을 내달라는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여왕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친한 사람들에게 고급정보라며 하람의 이름을 동네방네 떠들어댔다.
클린턴 대통령도 여왕의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중요인사로 하람에 대한 소식을 전달받고 진위파악에 들어갔다.
그러나 하람에 관한 내용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하람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건 남자라는 게 전부였다.
진짜인지 확인하진 못했지만, 내가 같은 수준의 최상급 피지컬리스트라고 말한 만큼 가벼이 여길 수 없어 더욱 조심스럽게 우리를 대했다.
이런 모습은 중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지구촌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였다.
나와 비슷한 수준의 능력자가 또 있다는 소식은 일본에 터진 수소폭탄만큼 엄청난 뉴스였다.
더구나 최상급 피지컬리스트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며, 인터뷰가 쇄도했다.
또한, 각국 정상들도 사실 확인을 위해 인맥을 총동원해 아내들을 괴롭히며 나진시 전체가 몸살을 앓았다.
“하람씨 인터뷰 요청이 쏟아지는데 어쩌죠?”
“모두 거절해.”
“지홍씨가 최상급 피지컬리스트가 맞는지 확인해 달라는 요청도 있어요.”
“정밀 포스측정기로 측정이라도 해달라는 거야?”
“그건 아니고요. 지홍씨가 사실인지 아닌지 그것만 말해 달래요.”
“상급 레드몬을 두 마리나 잡았는데, 확인이 더 필요해?”
“하긴 그러네요.”
“하람은 조만간 실력을 보여줄 거니까 인터뷰 요청은 무시해도 돼.”
“어떻게요?”
“변종 방사능 포베로미스를 하람이 정리할 거야.
“그러면 조만간 실력을 보여준다는 내용은 발표해도 되겠네요? 특사들이 종일 찾아오고, 전화가 빗발쳐 일할 수가 없어요.”
“좋을 대로 해.”
상급 레드몬 타이거 스네이크의 비늘과 특수 섬유를 이용해 만든 방호복을 입고 있어 정밀포스측정기를 코 앞에 들이대도 하람이 레드몬이란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녀석을 카메라 앞에 세울 생각은 없었다. 나만큼 사람들 앞에 서는 걸 꺼리는 녀석을 동물원 원숭이로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은밀한 일에 자주 써먹어야 해 얼굴이 알려지는 것도 도움이 안 돼 나처럼 최대한 언론에 노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따르릉~ 따르릉~”
“강승원 국장님? 네! 네! 네, 알겠어요.”
“무슨 일인데 그래?”
“오사카가 공격받고 있어요.”
“언제 시작됐어?”
“30분 전에요.”
“상아야! 모두 브리핑실로 데리고 와.”
“네.”
상아가 5층 정원에서 수다를 떠는 아내들을 부르기 위해 달려나가자 한숙을 데리고 서재 옆 브리핑실로 들어갔다.
한숙이 책상에 있는 단추를 누르자 한쪽 벽면의 절반을 차지한 커다란 화면이 켜지며 강승원 국장이 나타났다.
“충성!”
“상황을 보고하세요.”
“30분 전 변종 방사능 포베로미스 1,000여 마리가 도요나타와 히라카타 시 방어벽을 뚫고 도시에 난입했습니다. 선두에 진입한 변종 방사능 포베로미스가 방어벽을 따라 돌며 초병을 제압하는 사이, 나머지 놈들이 숙소를 공격했습니다. 전혀 낌새를 차리지 못한 중국 인민해방군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며, 현재 방어벽 주변은 변종 방사능 포베로미스에 점령당한 상태입니다.”
“지능적으로 움직인 겁니까?”
“그렇다고 보긴 어렵습니다. 초병의 총소리를 따라 방어벽을 돌며 공격했고, 막사는 사람 냄새를 따라 공격한 것 같습니다.”
“전혀 낌새를 차리지 못한 겁니까?”
“그렇습니다. 미군이 정보를 차단한 게 주요 원인으로 중국 인민해방군은 교토까지만 수색했고, 변종 방사능 포베로미스가 숨은 기후 현은 미군이 담당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놈들이 방어벽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몰랐단 말입니까?”
“땅굴을 파고 접근한 것 같습니다.”
중요 도시에 방어벽을 설치할 때 레드몬이 땅굴을 파고드는 것을 막기 위해 최대한 땅을 깊이 판 후 철근 콘크리트 기둥을 촘촘히 박고, 그 위에 다시 콘크리트를 깔고 방어벽을 설치했다.
이렇게 하면 두더지 레드몬도 쉽게 파고들 수 없었다. 이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암석 지대에 방어벽을 세우거나, 본스틸 합금으로 방어탑과 기둥을 박는 것이지만 둘 다 대도시에 사용하기엔 현실성이 없었다.
“수준은 어느 정도입니까?”
“미군의 레드몬 킬러가 측정한 에너지양에 따르면 2500~3000 사이로 모두 C급 엘리트 레드몬입니다.”
“전투 상황을 볼 수 있습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강승원 국장이 위성을 조작해 대형 모니터에 화면을 띄우는 순간 아내들이 브리핑실로 들어왔다.
“보시는 곳은 아마가사키 시로 중국 인민해방군 본부가 있는 오사카 성에서 서쪽으로 10km 떨어진 지점입니다.”
“쑥대밭이 됐군요.”
“변종 방사능 포베로미스가 진입한지 5분 만에 도시의 5분 1이 파괴됐고, 아마가사키에 주둔 중인 인민해방군 8만 명 중 절반 이상이 죽은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화면에는 까만 연기와 폭발하는 불꽃, 겁을 집어먹고 허둥지둥 달아나는 인민해방군, 빠르게 다가가 도망치는 인민해방군들을 난자하는 변종 방사능 포베로미스의 모습이 보였다.
“화이 공대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습니까?”
“아직 투입되지 않았습니다.”
“달아날 심산이군요?”
“그럴 가능성이 크지만, 유방 주석이 혼슈에 대한 욕심이 커 명령 없이 함부로 후퇴하진 못할 겁니다.”
“퇴로는 확보한 겁니까?”
“남해 함대 일부가 오사카 항구에 있지만, 프리깃함과 구축함으로 많은 병사를 태우긴 어려운 실정입니다.”
“고베공항과 간사이공항에 수송기가 제법 많다는 소문이 있던데?”
“구소련 수송기 AN-12를 중국에서 라이선스 생산한 Y-8 수송기가 80대가량 있지만, 크기가 작아 지휘부와 공산당 위원, 화이 공대원을 태우면 자리가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두 공항 모두 안전하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둘 다 경비부대가 있지만, 외곽에 있어 변종 방사능 포베로미스의 수중에 떨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항구가 아니면 빠져나올 수단이 없군요?”
“그렇습니다.”
수송을 책임진 건 미군으로 중국은 남해함대 소속 프리깃함과 구축함 10척을 오사카만 경비용으로 보낸 게 전부였다.
10분 단위로 화면이 바뀔 때마다 변종 방사능 포베로미스 무리가 인민해방군 본부가 있는 오사카 성으로 점점 다가갔다.
열화우라늄탄을 장착한 기관포와 대물저격총, 장갑차로 방어막을 쌓고 필사적으로 변종 방사능 포베로미스를 막아섰지만, 엘리트 레드몬을 상대론 역부족이었다.
결국, 2시간 30분 만에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羽柴秀吉)가 축성한 오사카 성은 화염에 휩싸여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지휘부는 성이 함락되기 30분 전 화이 공대의 보호 속에 오사카 항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러나 이마가사키 시에서 갈라진 변종 방사능 포베로미스 무리 중 한 무리가 항구로 향하던 지휘부보다 먼저 오사카 항에 도착했다.
지휘부와 사무라이를 기다리며 항구에 정박 중이던 구축함 1척과 프리깃함 2척에 올라간 놈들은 군함을 박살 냈다.
겁에 질린 나머지 군함이 급히 항구를 빠져나갔고, 이를 모르고 항구에 도착한 화이 공대와 변종 방사능 포베로미스 50여 마리의 전투가 벌어졌다.
변종 방사능 포베로미스가 C급 엘리트 레드몬이지만, 3,000명이나 되는 화이 공대를 당할 수 없어 전투는 얼마 못 가 화이 공대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죽을 때 커다란 종기가 터지며 독가스를 내뿜어 300명이 넘는 선인이 죽었고, 사체가 썩으며 주변 일대가 죽음의 땅으로 변해 항구를 이용할 수 없었다.
급히 1.5km 떨어진 페리 터미널로 이동해 군함을 다시 타려 했지만, 그사이 지휘부를 쫓아온 200여 마리에 포위됐다.
화이 공대는 어릴 적부터 혹독한 수련을 거친 엘리트 집단으로 지방 정부에 소속된 선인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같은 하급 피지컬리스트라도 전투 기술이 월등히 뛰어나 2:1로 싸워도 지지 않을 만큼 실력이 출중했다.
하지만 변종 방사능 포베로미스가 죽을 때마다 터지는 종기와 순식간에 썩으며 발산하는 독가스에 사방이 죽음의 땅으로 변하며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더군다나 놈들의 숫자가 빠르게 증가해 결국 한 명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전원 사망했다.
화이 공대원 3,000명을 모두 죽인 변종 방사능 포베로미스들은 기쁨의 포효를 내지르며 배를 가르고 심장과 간을 빼먹었다.
일부는 소모된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팔다리를 잡아 뜯어 과자처럼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인민해방군 98만 명 중 탈출에 성공해 중국으로 귀환한 인원은 18,187명입니다. 현재 오사카를 탈출해 나고야로 향한 인원이 13만 명 정도고, 3만 명은 이와지 섬과 남쪽 와카야마 현으로 달아났습니다.”
“나고야까지 무사히 갈 수 있겠습니까?”
“배가 부른지 이들을 쫓지 않아 탈출엔 큰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이들을 받아주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중국이 오사카를 차지해 두 나라가 견원지간이 되긴 했지만, 지난번 오사카 주민과 자위대원들을 모두 나고야로 보내줘 사이가 조금 개선 된 것으로 아는데, 아니었습니까??”
“보내주기 전 강간, 폭행, 살인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네?”
“일본 측 주장에 따르면 자위대원 1만 명이 죽고, 100만 명에 달하는 여성이 집단 윤간을 당했다고 합니다.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많은 사람이 죽고, 강간을 당한 건 사실입니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요.”
중국이 오사카를 점령하고 한 달 후 미국의 압박에 살아남은 주민들과 자위대를 나고야로 모두 보냈다.
그러나 그사이 수천 명이 죽고, 많은 여성이 끌려가 몹쓸 짓을 당했다. 이 때문에 중국을 바라보는 일본인의 눈은 나를 바라보는 것만큼 격앙돼 있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모두 즐거운 주말되세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