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26 블랙스톤과 씨앗 =========================================================================
326.
“이런 거 본 적 있어?”
“아니요. 처음 보는 거예요.”
“이런 걸 누가 구했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도 없어?”
“네.”
“미스트 존에서 나온 레드몬을 사냥했거나, 잡았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 없어?”
“사냥한 적도, 들어본 적도 없어요. 그리고 미스트 존에서 나왔다고 해도 워낙 깊은 정글 속에 있어 알 수가 없어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스텔라에게 씨앗을 보여주며 미스트 존에 관해 물어봤다. 역시나 생각한 것처럼 아는 게 전혀 없었다.
미스트 존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말했을 것이다. 나와 밤을 보내기 전부터 아내들과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두 얘기하는 사이로 셋 다 누굴 속이거나 숨기는 음흉한 성격이 아니었다.
“한국말은 언제 배웠어?”
“작년 마카파에서 헤어진 다음 조금씩 배우기 시작하다가 12월에 집에 돌아와 집중적으로 공부했어요.”
“잘하네.”
“아직 많이 부족해요.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 미워하지 마세요.”
“왜 미워해?”
“지홍씨! 외국어 하는 사람 싫어하잖아요.”
“싫어하는 게 아니라 내가 못 알아들어서 짜증내는 거야.”
“사람들은 지홍씨가 싫어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최근 나진시 특사는 한국말을 잘하는 사람을 임명해요.”
“그랬어?”
“네.”
“근데 왜 내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자국어를 하지?”
“그야 대통령, 총리, 여왕 같은 최고위급 인사만 만나니까 그렇죠. 아니면 나이가 많아 한국어를 배우긴 너무 늦은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요.”
“아~ 정말 그러네.”
스텔라 말처럼 내가 만난 외국인은 대부분 일국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개중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시장처럼 직급이 낮은(?) 사람도 있지만, 이들은 타국어를 배우기엔 나이가 너무 많았다.
나이가 젊은 나도 혀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 외국어라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데, 머리가 굳어진 사람들에게 한국어를 배우라고 하는 건 죽으라는 소리와 같았다.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말이 우리말이었다. 단어도 많고, 조사도 많고, 높임말도 많아 배우기가 쉽지 않았다.
한글 역시 마찬가지로 처음 만들어졌을 땐 이처럼 복잡하지 않았다. 매년 법을 바꾸듯 국어학자들이 문법을 고쳐대는 바람에 전문가들도 맞춤법이 맞는지, 단어가 맞는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글이란 국민이 좀 더 이해하기 쉽고, 쓰기 쉽게 시대에 맞춰 바꾸는 것이었지, 어렵고 불편하게, 자신이 똑똑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바꾸는 것이 아니었다.
포르투 벨류를 끼고 흐르는 마데이라 강(Rio Madeira) 따라 20km 동북쪽으로 올라가다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10km쯤 올라가자 목표물인 A급 엘리트 레드몬 재규어가 나타났다.
A급 엘리트 레드몬 재규어
전투력 : 9308
지능 : 106
상태 : 적대감 최대치 상승
효과 : 순발력·민첩성·전투력 0% 하락
에너지양 : 53,007
스킬 : 알 수 없음
몸길이 7.85m, 꼬리 길이 3.5m, 무게 1.24ton의 호피 무늬 재규어는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는지, 3km까지 다가가자 접근을 알아차리고 선제공격을 가하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왔다.
“오빠! 이리로 곧장 달려와요.”
“방어막!”
상아의 경고에 아리에게 지킴이를 불러내 보호막을 치게 하고, 구미호와 함께 놈을 향해 뛰어갔다.
재규어도 우리를 잡기 위해 전속력으로 달려오자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지며, 싸움이 시작됐다.
달려가며 가시창 세 자루를 소환해 연속으로 던져 놈의 움직임을 살폈다. 빠르게 달리는 와중에도 유연하게 창을 피한 재규어가 번개같이 달려들며 커다란 앞발로 얼굴을 후려쳐왔다.
뒤로 껑충 뛰어 피하며 여우 채찍을 휘둘러 목을 감아가자 잽싸게 몸을 낮춰 채찍을 피하곤, 날카로운 발톱을 앞세워 가슴을 찔러왔다.
바람 스킬로 빠르게 원을 그리며 뒤로 돌아가 다리를 노리자, 귀신같이 알아챈 놈이 앞으로 내달려 거리를 벌리곤 입을 크게 벌렸다.
“크앙~”
재규어가 포효하자 반경 1km가 시간이 정지한 듯 딱 멈춰 섰다. 놈을 견제하러 접근하던 구미호마저 몸이 굳어져 바닥에 떨어질 뻔했다.
그래도 레드주얼 두 개를 합치고, 황금원숭이의 레드주얼까지 먹인 보람이 있어 3초 만에 마비를 풀고 놈의 눈을 향해 레이저를 난사했다.
“삐용삐용~ 삐용삐용~”
열이 받은 구미호가 레이저를 마구 쏘아대자 다람쥐처럼 요리조리 피하던 재규어가 몸을 잔뜩 웅크렸다가 힘차게 뛰어올랐다.
20m 까지 접근해 재규어를 공격하던 구미호가 깜짝 놀라 잽싸게 옆으로 몸을 날리자, 재규어도 공중에서 허공을 차 방향을 바꿔 구미호를 뒤쫓았다.
“펑펑펑펑펑~”
혈기탄 다섯 발이 얼굴과 옆구리로 날아들자 재규어가 양발을 사용해 혈기탄을 쳐냈다.
공중에서 연속으로 허공을 차며 날아갈 능력은 없는지 추력을 잃은 재규어가 바닥에 내려섰다.
조심성이 아주 많은 놈인지 바닥에 내려서자 방향을 세 번이나 바꿔가며 공격에 대비했다.
질주주얼에 포스를 주입하자 이동 속도가 30% 향상되며, 몸이 공중에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놈의 옆구리를 향해 한 발 내딛자 몸이 둥실 떠올라 바람처럼 날아갔다. 순식간에 옆에 나타나 여우 채찍을 휘두르자 깜짝 놀란 재규어가 크게 울부짖었다.
“크앙~”
포효에도 꿈쩍 않고 채찍을 휘두르자 놈이 뒤로 펄쩍 뛰어오르며, 노랗게 눈을 빛냈다.
재규어의 눈이 노랗게 빛나자 몸이 다섯 개로 불어났다. 모양·크기·형태까지 일치하는 다섯 놈이 일렬로 쭉 서서 나를 노려봤다.
구미호가 다섯 마리로 불어난 재규어를 향해 레이저를 쏘아대자 다섯 마리가 모두 실체가 있는 것처럼 각각 움직이며 레이저를 피했다.
재미난 구경에 공격을 중단하고 뒤로 물러나 재규어의 움직임을 기감으로 면밀히 살폈다.
심각한 표정으로 1분쯤 바라보고 있자 동물원 원숭이처럼 구경 당하는 게 기분 나빠는지 다섯 마리가 둥그렇게 포위한 채 다가왔다.
30m까지 다가오자 왼손에 움켜쥔 뇌전탄을 왼쪽에서 접근 중인 놈에게 향해 잽싸게 던졌다. 번쩍하는 순간 뇌전탄에 맞은 재규어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아차! 하는 순간 뒤에서 접근한 놈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등을 내리쳤다. 빠르게 앞으로 굴러 발톱을 피하며 등 뒤로 뇌전탄을 날렸다.
“지지지지직~”
뇌전탄에 맞은 재규어가 강력한 전류에 감전돼 부들부들 떨어대자 제대로 잡았다는 생각에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놈도 가짜인지 먼지처럼 부서지며 이번엔 우측에서 기다란 꼬리가 채찍처럼 날아왔다.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여우 채찍을 쭉 펴자 100m로 늘어난 채찍이 재규어의 미간을 꿰뚫었다.
“이런~”
(오빠! 앞에 있는 재규어가 진짜예요.)
(고마워.)
연속으로 허탕을 치자 답답했는지 상아가 텔레파시로 허상이 아닌 진짜 재규어를 알려줬다.
여우 채찍을 왼손에 바꿔 쥐고 오른손에 힘을 모으자 파멸의 창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강력한 일격을 준비하자 위험을 느낀 재규어 두 마리가 좌우에서 달려들었다. 놈들이 바로 앞까지 다가온 순간 피해 면역을 발동하며 있는 힘껏 뛰어올랐다.
피해 면역은 30초간 모든 피해를 막아주지만, 앞발에 얻어맞으면 무게 차이로 날아가는 것까지 막아주진 못해 될 수 있는 한 물리 공격은 피하는 게 좋았다.
파멸의 창이 완성되자 실체인 왼쪽 놈을 향해 힘차게 던졌다. 거대한 힘이 담긴 창이 날아오자 실체인 재규어가 뒤로 펄쩍 뛰어올라 창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파멸의 창은 손을 떠나는 순간 빛이 되었고, 재규어가 위험을 느끼고 피하려 했을 땐 이미 가슴을 뚫고 지나간 후였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후에야 창에 맞았다는 것을 깨달은 재규어가 황당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지지지지징~~~”
고통에 입을 벌려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가벼운 진동음과 함께 내장과 세포가 부서져, 마지막 비명도 토하지 못하고 숨이 끊겼다.
“오빠! 괜찮아?”
“응.”
“정말 다치지 않았어?”
“봐봐. 멀쩡하잖아.”
재규어가 쓰러지자 전력을 달해 뛰어온 은비가 품에 안기며 몸을 더듬었다. 언제나 툴툴거려도 나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은 은비가 아내 중 가장 깊었다.
그래봐야 종이 한 장 차이라 그날 기분에 따라 순위가 달라지긴 했지만, 오늘 1등은 은비가 확실했다.
상아가 아니었으면 매우 힘든 전투가 될 뻔했다. 기감으로도 어떤 게 허상이고, 어떤 게 실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기감력이면 뭐든 다 알아낼 수 있다고 자만하던 마음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만큼 초라해졌다.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세상은 동전의 양면처럼 앞이 있으면 뒤가 있다고 하잖아요. 그거 아시죠?”
“뭐?”
“무기의 역사요. 벙커를 만들자, 그걸 깨기 위해 수류탄을 만들고, 미사일을 만들자, 격추할 요격 미사일을 만든 거요. 스킬도 마찬가지에요. 완벽한 건 세상에 없어요.”
“맞는 말이네.”
“이거 오빠가 제게 해준 말이에요. 헤헤헤헤~”
“하하하하~”
상아가 말한 것처럼 세상엔 대응하는 물건이 꼭 있었다. 독과 해독제가 있고, 불과 물이 있고, 남자와 여자가 있듯이 기감력을 무력화할 스킬도 당연히 있었다.
언제나 방심하면 안 된다고 입버릇처럼 떠들던 내가 그걸 망각했다. 더 황당한 건 이런 생각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어떤 일이든 시간이 지나면 까맣게 잊었다. 이래서 쓰디쓴 쓸개를 씹는 구천의 마음을 잊어선 안 된다.
중국 춘추 시대 오(吳)나라 왕 부차(夫差)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불편한 섶에 누워 복수를 꾀해 월(越)나라 왕 구천(句踐)에게 항복을 받았지만, 싸움에서 패한 구천은 매일 쓰디쓴 쓸개를 씹으며 복수를 다짐해 결국 부차를 패배시켰다.
부차도 와신상담(臥薪嘗膽)의 마음으로 노력해 구천을 잡았지만, 결국 그 마음을 잊는 순간 구천에게 다시 지고 말았다.
이렇듯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변하지 않는 평상심(平常心)을 유지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부차만도 못한 사람으로 하루 12번 다짐하고, 13번 까먹는 우(愚)를 범하면서 살았다.
“집에 돌아가면 바로 할 거야?”
“실험 좀 해보고.”
“동물 실험?”
“응. 돌아가면 작은 원숭이 세 마리만 구해줘.”
“알았어.”
인공 각성 실험을 할 방법은 이미 마음속에 정해져 있었지만, 무턱대고 한숙에게 시술할 순 없다.
안전하다고 장담했지만, 씨앗을 얼마나 써야 할지 몰라 먼저 인간과 가장 비슷한 원숭이를 상대로 실험할 생각이었다.
“휴우~”
“기운 내. 잘 될 거야.”
“고마워!”
눈을 맞춘 채 고개를 끄덕여 강한 믿음을 주는 소연의 행동에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소연은 내 삶의 버팀목이자 바른길로 나아갈 수 있게 길을 열어주는 등불 같은 존재로, 소연이 없다면 이런 행복한 삶도 살 수 없었다.
꼭 끌어안아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자, 내 마음을 이해하며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 작품 후기 ============================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__)
디도스 공격으로 글 올리기가 계속 지연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