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문 진화의 시작-275화 (275/505)

00275  미치광이 잭(Jack the Ripper)  =========================================================================

275.

“밤늦게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예의도 없이 이렇게 찾아올 만큼 마음이 급해서 그랬습니다. 널리 이해해주세요.”

“아닙니다.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지홍 회장님!”

“네.”

“영국 국민 아니 불쌍한 미들즈브러 사람들과 부모·자식이 애타게 기다리는 군인들을 측은하게 여겨주세요. 그들이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말을 끝맺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급히 허리를 숙여 같이 절하며 손을 잡아 일으켜 자리에 앉혔다.

올해 70살의 여왕은 나이에 비해 무척 젊어 보여 50초반으로 보였지만, 엄연히 할머니연배였다.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예의범절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70살 먹은 할머니께 절을 받을 만큼 막돼먹진 않았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았습니다. 좀 더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격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꼭 붙잡은 손을 놓아주질 않아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는 아이들을 정말 많이 부러웠다. 할아버지·할머니께 투정을 부리며 먹을 것을 사달라는 모습, 명절이면 품에 안겨 맛난 것을 먹는 모습, 같이 손 붙잡고 놀러 가는 모습, 업혀 잠든 모습까지 부러워 미칠 것투성이였다.

국민학교 3·4학년이 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행동했지만, 할아버지·할머니, 외할아버지·외할머니 중 단 한 분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런 마음 때문인지 할머니 같은 여왕의 손을 잡자 마음속 깊이 잠들어 있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오빠는 정에 너무 약해요.”

“내가?”

“네, 그것도 아주 심하게.”

“흐흐~ 할머니 같은 사람이 간절히 부탁하는데 어쩌겠어. 들어줘야지.”

“할머니가 아니라 여왕이에요. 그것도 그냥 평범한 여왕이 아니라 영국 성공회의 최고 치리자, 랭커스터 공작, 맨 섬의 영주, 노르망디 공작, 피지의 최고 추장, 함대 사령장관 등등 엄청난 수식어가 붙은 절대 권력자 중 한 명이에요.”

“알고 있어.”

“근데 왜 할머니 같다고 하셨어요?”

“속에 뭐가 들었을지 몰라도 겉모습은 할머니잖아. 살면서 할머니 손을 잡은 건 오늘 처음이야. 그래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지네.”

“아이고~ 울 오빠 또 아기 되셨네. 이리 오세요. 제가 안아줄게요.”

상아의 가슴에 얼굴을 묻자 푸근함과 함께 향긋한 사과향이 물씬 풍겨왔다. 뭉클한 감촉에 티셔츠를 올리고 분홍색 작은 유두를 입에 물고 빨자 온갖 시름이 사르륵 녹아내렸다.

‘평생 이렇게 상아 가슴이나 만지며 살면 좋겠다. 행복이 뭐 별거야? 사랑하는 여자의 체취를 맡으며 살면 되는 거지. 안 그래?’

여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최대 열흘간 영국에 더 머물기로 하고, 노스요크 무어 국립공원을 기점으로 순색 범위를 반경 50km까지 넓혔다.

하지만 놈은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찾을 수 없었다. 인근 마을이나 다른 대도시로 옮겨갔다면 놈의 특이한 식성 탓에 금세 행적을 찾을 수 있을 텐데, 그런 소식조차 없어 놈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간과 심장을 잔뜩 빼먹고 사람으로 변한 거 아닐까?”

“소설을 너무 읽었어.”

“아니면 도 닦고 우화등선했거나.”

“레드몬이 참선도 해?”

“그렇지 않다면 20일이 다 돼가도록 숨어있을 순 없잖아. 3일이 멀다 하고 나타나 사람 간과 심장을 빼먹던 놈이 감쪽같이 사라진다는 게 말이나 돼? 혹시 다른 놈에게 잡아먹힌 게 아닐까?”

“은비야! 제발 헛소리 좀 그만해. A급 엘리트 레드몬을 잡아먹을 정도면 상급 레드몬이란 뜻이야. 그럼 미들즈브러가 아니라 영국이 끝장나는 거야. 더불어 우리도 끝장이고.”

“아 맞다.”

“하아~ 주변에 습격 받은 곳 있는지 확인했어?”

“응, 한 곳도 없대.”

“없는 게 아니라 모를 수도 있잖아.”

“그럴 수도 있지.”

반항한 흔적도 없고, 고통조차 느끼지 못한 채 무표정한 얼굴로 죽었다면 마비나 홀드보단 마인드컨트롤 계열에 당했을 가능성이 컸다.

마비나 홀드는 스킬에 당하는 순간 놀란 표정과 죽는 순간의 고통스러운 표정은 그대로 남았다.

놈이 얼굴을 만져 표정을 바꿔주지 않는 한 놀람과 고통의 표정은 바꿀 순 없었다.

현혹이나 정신조작은 표정까지 제어할 수 있어 마인드컨트롤 스킬에 걸렸다면 죽는 것도 모르고 당했을 것이다.

이럴 경우 놈이 집이나 건물 안에 들어가 간과 심장을 빼먹으면 가족이 연락을 취하거나, 가까운 이웃이 방문해 발견하기 전까진 놈이 왔다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존 프레스콧 특사에게 반경 100km 이내의 마을과 도시를 다시 조사해 사람들이 무사한지 확인하라고 해. 특히 작은 마을과 따로 떨어진 농가는 하나도 빼놓지 말라고 하고.”

“알았어.”

은비가 프레스콧 특사에게 내 말을 전달한지 12시간 만에 남쪽으로 90km 떨어진 브리드링톤(Bridlington) 인근 농장 네 곳에서 시체 열다섯 구가 발견됐다.

두 곳은 노부부와 가족, 두 곳은 젊은 부부와 아이들로 평소 왕래가 없던 사람들로 찾는 사람이 없어 붉은여우에게 당했는지도 몰랐다.

여우의 습성상 개를 꺼려 사냥터를 바꿨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풍산개는 미들즈브러에 남겨두고 빠르게 브리드링톤으로 이동했다.

다음 날 새벽 동쪽 해안가 절벽에서 기어 나온 놈이 브리드링톤 근처 농가로 살금살금 다가가는 것을 잡아냈다.

재빨리 방어구를 챙겨 입고 놈이 노리는 농가로 달려갔다. 꼬리를 손처럼 사용해 현관문을 가볍게 비틀어 따고 들어간 놈이 2층 침실로 올라가 잠든 노부부를 살며시 깨웠다.

4.5m에 이르는 커다란 여우의 모습에 놀란 부부가 소리를 지르려다 말고 팔을 축 늘어뜨린 채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붉은여우의 눈에서 뿜어진 밝은 광채에 노출되는 순간 노부부가 마리오네트처럼 변하는 것으로 보아 예상대로 현혹 스킬이 확실했다.

노부부의 모습에 만족했는지 놈이 입을 씰룩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노부부가 바닥에 누워 가슴을 열어젖히자 다섯 개의 꼬리 중 하나가 뾰족한 칼처럼 변해 배를 가르려 했다.

A급 엘리트 레드몬 : 붉은여우

전투력 : 9899

지능 : 135

상태 : 적대감 최대치 상승

효과 : 전투력 0% 하락

에너지양 : 58,997

스킬 : 알 수 없음

“쨍그랑~”

살기를 투사하자 붉은여우가 창문을 깨고 집 밖으로 튀어나왔다. 창을 잡고 공격 자세를 취하자 놈이 거리를 두고 주위를 빙빙 돌며 나와 구미호를 관찰했다.

아내들은 현혹 스킬에 대비해 300m 후방에 가시덩굴로 방어막을 치고 전투를 돕도록 했다.

빙빙 돌던 놈의 눈에서 서치라이트가 켜지듯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놈이 스킬을 사용해 나를 현혹하려 했다.

미리 3단계 정화수를 마신 상태에서 눈에 포스를 모아 준비하고 있자 머리를 쪼아대는 통증만 조금 있을 뿐 별다른 증상이 없었다.

“휘이익~”

“쾅!”

현혹 스킬이 먹히지 않자 화가 났는지 꼬리 한 가닥이 쭉 늘어나 채찍처럼 머리를 공격해왔다. 창으로 쳐내자 폭탄이 터지는 굉음과 함께 팔에 충격이 전해왔다.

“피용피용~ 피용피용~”

구미호가 레이저가 발사하자 놈이 옆으로 살짝 움직여 가볍게 레이저를 피했다. 어찌나 빠른지 잔상조차 남지 않아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고 생각할 지경이었다.

눈으로 따라갈 수 없는 붉은여우의 속도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며칠 전 독일에서 만난 도베르만과는 질적으로 다른 놈으로 속도부터 파워까지 모든 걸 갖춘 놈이었다.

최대의 강적을 만났다는 생각에 마음이 떨렸지만, 한편으로 호승심이 불타올랐다.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눈을 감았다. 기감은 눈보다 빠르고, 귀보다 정확했다.

“펑펑펑~”

혈기탄 세 발을 쏘아내며 블링크를 최대로 사용해 번개같이 놈에게 다가갔다. 움직였다고 느낀 순간 놈에게 다가갔지만, 놈은 나보다 한 걸음 빨리 뒤로 물러나 꼬리를 휘둘렀다.

“쿠앙~”

땅을 3m나 파고든 꼬리를 피해 재빨리 뒤로 물러나 혈기탄을 쏘아내자 구미호도 붉은여우의 움직임을 방해하기 위해 기관총처럼 레이저를 쏘아댔다.

“퍽퍽퍽!”

혈기탄을 꼬리로 쳐낸 붉은여우가 구미호의 레이저를 장난치듯 피하며 순식간에 다가왔다.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공간을 압축해 이동하는 축지법과 워프를 사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쒸우웅~”

뒤로 물러나며 창을 던졌다. 바로 코앞에서 던진 창에 놈도 당황했는지 몸을 뒤로 비틀며 꼬리 다섯 개로 날아든 창을 쳐냈다.

“찌지지직! 찌지지직!”

강력한 전류에 붉은여우가 멈칫거리는 사이 재빨리 글라디우스를 뽑아들고 발끝으로 땅을 찼다.

포스를 가득 머금은 글라디우스에서 4.5m로 자란 날카로운 예기가 놈을 향해 날아갔다.

“쾅쾅쾅쾅쾅!”

칼을 튕겨 참격을 날리자 순식간에 전류를 해소한 붉은여우가 꼬리를 둘로 나눠 세 가닥으론 참격을 막아내고, 두 가닥으론 구미호의 레이저를 막아냈다.

참격을 쳐낸 놈의 꼬리를 칼로 재빨리 내리쳤다. 칼과 부딪치려는 순간 반향을 바꾼 꼬리가 얼굴을 노리고 찔러왔다.

왼 주먹에 포스를 가득 둘러 꼬리를 쳐내자 꼬리 두 가닥이 허리와 다리를 휘감아왔다.

칼로 쳐내며 혈기탄을 쏘자 놈이 순식간에 뒤로 돌아가 등을 노렸다. 빼쪽한 송곳처럼 변한 꼬리를 피해 허리를 숙이며 다시 혈기탄을 쏘아냈다.

“펑펑펑!”

놈이 혈기탄을 막는 사이 뒤로 돌며 허리에 꽂아둔 창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왼손에 냉기탄을 준비했다.

얼굴과 허리를 노리고 찔러오는 꼬리를 피해 접근하며 복부를 향해 창을 던졌다. 지척에서 날아든 창을 피해 놈이 움직이자 기감으로 놈이 움직일 방향을 알아냈다.

“쾅쾅쾅!”

냉기탄 세 방이 놈을 가운데 두고 터지자 반경 100m가 두꺼운 얼음에 갇혔다.

얼음에 놈을 가두고 품에서 도베르만을 잡고 얻은 레드스톤을 꺼냈다. 흡기를 사용해 에너지를 뽑아내자 37,007몬의 방대한 에너지가 폭포처럼 파동주얼에 쏟아져 들어갔다.

“차앙~”

경쾌한 소리와 함께 은행나무창이 펴지자 파동주얼에 담긴 에너지가 창으로 옮겨가 파란 고리 300개를 만들었다.

“쩌저정~ 쩌저정~”

얼음이 깨지려 하자 가시덩굴을 빠져나온 소연과 서인이 데스 홀드와 죽음의 비명을 붉은여우에게 난사했다.

놈을 1초라도 묶어두기 위해 소연과 서인이 사력을 다하는 사이 충전을 마친 창이 놈을 향해 날아갔다.

“쒸우웅~~~”

온 힘을 다해 던진 창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날아가 붉은여우가 갇힌 얼음에 꽂혔다.

“우우우우웅~~~”

창이 울음을 토해내자 강력한 진동이 퍼져나가 반경 100m를 가득 메운 얼음덩이를 가루로 만들었다.

무더운 6월 어느 날 얼음이 눈이 되어 휘날리는 아름다운 밤에 붉은여우가 눈 속에 누워있었다.

============================ 작품 후기 ============================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__)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