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61 260. 인간의 탐욕 : 절름발이 백호 쉬어 칸 =========================================================================
261.
“으하하하~ 우리도 이제 엘리트 레드몬 슬레이어다.”
“슬레이어는 뭐야?”
“오우거 잡으면 오우거 슬레이어, 드래곤 잡으면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소설에 나오잖아. 엘리트 레드몬을 잡았으니 이제부터 우리도 엘리트 레드몬 슬레이어지. 음하하하하~”
“그렇게 좋아?”
“응, 너무 너무 좋아.”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은비가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소연도, 서인도, 아리도, 상아도, 아영도 모두 기뻐했다.
말은 안 했지만, 아내들은 항상 내게 짐이 된다고 생각했다. 위험하고 강력한 레드몬은 언제나 나 혼자 잡았다. 그 때문에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잘못된 생각으로 상아의 탐색 능력, 아영의 정화, 아리의 치유는 물론 소연과 은비, 서인, 소희도 자신의 몫을 다했다.
사냥에서 가장 돋보이는 일은 사냥감을 잡는 일이다. 축구로 따지면 스트라이커와 같은 일로 누가 봐도 가장 폼 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엔 레드몬의 목숨을 취한 것보다 더 어렵고 힘들고 많은 일이 숨어 있었다.
사냥감의 정보를 모으고, 사냥에 필요한 물건을 준비하고, 사냥 날짜를 잡고, 사냥감을 잡기 위해 이동하고, 숙소를 정하고, 먹고, 마시고, 자고, 사체를 거두고, 기록을 남기고, 사람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돌발 상황을 대비하고, 집에 돌아오는 일까지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이 사냥이란 단어 속에 포함돼 있었다.
그런 일들은 겉으로 크게 표시나지 않아 사람들의 주목을 받진 못하지만, 그런 일을 해주는 사람이 있기에 내가 편하게 사냥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아내들이 없다면 영어 한마디 못하는 나는 해외에 나갈 수도 없고, 잡은 레드몬을 처분할 능력도 없고, 음식은 구워 먹고 삶아 먹는 게 전부고, 잠은 항상 바람과 이슬, 땅을 벗 삼는 풍찬노숙(風餐露宿)이었다.
내가 잘하는 건 딱 하나 레드몬을 때려잡는 것으로 아내들과 미래 레드몬 식구들이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얻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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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처럼 하얀 백호 쉬어 칸은 우리가 올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놀라지도 않았고, 화를 내지도 않았다.
언젠가 올 사람이 온 것처럼 평온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그런 쉬어 칸의 모습에 당황한 건 우리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녀석에게 강력한 살기를 투사했다. 녀석을 잡기로 결정한 순간 불쌍한 마음도, 측은한 마음도 모두 잊었다.
싸울 상대를 동정하는 건 나와 내 동료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놈이 불쌍해도 사랑하는 아내들과 바꿀 수는 없었다.
B급 엘리트 레드몬 벵골호랑이 쉬어 칸
전투력 : 7908
지능 : 91
상태 : 평온, 깊은 병
효과 : 전투력 0% 하락
에너지양 : 39,755
스킬 : 알 수 없음
살기를 투사하자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특이한 문구가 떠올랐다. 평온, 깊은 병. 레드몬도 살아 있는 생명체라 아프고 병든 게 이상할 건 없었다.
능력자도 병들어 죽는데, 레드몬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다만 치유력과 재생력이 높아 병든 레드몬을 찾기가 쉽지 않을 뿐이었다.
기감으로 쉬어 칸의 몸을 샅샅이 훑었다. 레드몬으로 변이하기 전 돌에 맞은 상처가 군데군데 남아있었고, 안질이 심한지 빨갛게 충혈된 채 눈곱이 덕지덕지 끼어 있었다.
척추측만증으로 등이 심하게 휘었고, 이빨도 들쭉날쭉해 입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어디가 아픈 거야?”
“뇌종양.”
“엘리트 레드몬이 뇌종양에 걸려?”
“추측이지만, 레드몬으로 변이하기 전에 걸린 것 같아.”
“엘리트 레드몬으로 진화하면 없어져야 하는 거 아니야?”
“그것까진 모르겠고, 엘리트 레드몬으로 진화하며 발병 속도가 늦춰지긴 한 것 같아. 그것도 한계에 부딪힌 것 같긴 하지만.”
“커?”
“뇌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어. 살아 있는 게 용할 지경이야.”
“내버려둬도 죽겠네?”
“응, 그래도 바로 죽진 않을 것 같아. 잘 하면 몇 달은 버틸 수도 있어.”
“그 기간 동안 고통이 엄청 심하겠지?”
“말도 못하겠지.”
“혹시 말이야. 우리가 앞에 나타나도, 오빠가 살기를 투사해도 평온한 이유가 죽여 달라는 뜻은 아닐까? 너무 아파서.”
“그럴 수도 있지.”
쉬어 칸은 다른 B급 엘리트 레드몬 레드타이거와 비교하면 지능이 매우 낮았다. 나진시에서 잡은 A급 시베리아 호랑이는 지능이 125로 B급이면 최소 110은 나와야 정상이었다.
근친교배로 인해 지능이 낮게 태어난 것이 원인으로 강력한 엘리트 레드몬으로 진화하고도 지능이 고작 91밖에 안됐다.
그러나 지능이 높다고 현명한 것도, 생각이 깊은 것도 아니었다. 지능은 사고력, 관찰력, 상상력, 기억력에 영향을 줄 뿐 품격과는 무관했다.
“오빠!”
“응?”
“제가 잠시 이야기를 나눠 봐도 될까요?”
“그래.”
상아가 앞으로 나서 쉬어 칸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던 녀석이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상아를 바라봤다.
텔레파시의 단점으로 상아가 일방적으로 얘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오랜 세월 인간과 함께한 쉬어 칸은 인간의 습성을 잘 아는지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저어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죽인 사람은 모두 돌을 던진 사람이래요. 더 많은 사람이 있지만, 사람이 많은 도시에 숨어있어 무고한 사람까지 다칠까봐 내버려 뒀대요.”
“마음은 이해하지만, 돌을 던졌다고 잡아먹는 건 인간의 기준으론 용서할 수 없어.”
“먹지는 않았대요. 죽이기만 했지.”
“그것도 마찬가지야. 죽이든 먹든 달라질 건 없어.”
“자기가 한 짓을 용서받을 생각은 없다고 했어요. 다만, 부탁이 하나 있대요.”
“무슨 부탁?”
“그동안 새끼를 낳으려 많이 노력했는데, 몸이 기형이라 잘 안됐대요. 그러다가 운 좋게 임신해 한 달 전 간신히 새끼 한 마리를 낳았대요. 자신과 같은 백호지만, 다행이 병은 없는 것 같다고 키워줄 수 있냐고 물어보네요.”
“아빠도 엘리트 레드몬이야?”
“네.”
“흐음...”
엄마·아빠가 둘 다 엘리트 레드몬이면 새끼는 무조건 엘리트 레드몬이었다. 욕심은 났지만, 녀석을 길들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키우다 적응 못하면 죽여도 원망하지 않겠대요. 어미가 없으면 어차피 살아남을 수 없다고 키워달라네요.”
“우리를 어떻게 믿고 그런 소리를 해? 우리도 녀석이 당한 것처럼 새끼를 학대할 수 있어.”
“공격력은 낮지만, 특별한 스킬이 있어 사람 볼 줄 안대요.”
“사람을 봐?”
“네, 사람이나 동물, 레드몬에서 아우라를 느낄 수 있대요.”
“아우라?”
아우라(aura)는 인체에서 발산하는 영혼의 에너지 또는 인물이나 물체가 발산하는 영적인 분위기를 말했다.
테드 안드류즈는 아우라를 육체를 둘러싸는 에너지 필드라고 했고, 제인 스트라자즈는 아우라를 통해 사람의 건강, 기분, 에너지 레벨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종교에선 등에 그려지는 후광을 아우라라 하는데, 유대의 신비학 카발라에선 아우라를 성기광이라 표현했고, 크리스트교의 종교 회화에는 빛의 아우라에 휩싸인 인물이 그려져 있었다.
“아우라를 통해 사람의 기분, 심성, 에너지 레벨 등을 알 수 있대요.”
“그걸로 우릴 파악하고 가만있었던 거야?”
“네, 덤벼봐야 이기지도 못하고, 덤빌 기운도 없고, 덤빌 생각도 없었대요. 길어야 한 달이면 죽는데, 고통스럽게 기다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대요. 다만, 새끼 때문에 마음이 많이 아팠는데, 살릴 길이 생긴 것 같아 무척 기쁘다고 했어요.”
“새끼는 어디 있어?”
“뒤쪽 동굴에 숨겨놨대요.”
“데리고 오라고 해.”
“네.”
상아가 새끼를 돌봐주겠다고 텔레파시를 보내자 쉬어 칸이 새끼를 물어왔다. 어미를 닮아 털이 하얀 새끼는 얼굴은 아빠를 닮았는지 호랑이 본연의 모습이었다.
백호는 모두 사시라고 들었는데, 녀석은 엘리트 레드몬으로 태어나며 열성인자를 모두 탈피했는지 눈도 정상이었고, 질병도 없었다.
호랑이 새끼는 성장이 빨라 태어난 지 2주 후에 눈을 뜨고, 4~5주면 걷기 시작했다. 8주면 젖을 뗐고, 7개월째는 스스로 먹이를 잡았다.
그러나 두 살까지는 어미와 지내며 살아남는 법과 사냥하는 법을 배웠다. 어린 새끼가 죽는 비율은 매우 높아 반 이상이 3~4세가 되기 전에 죽었다.
레드몬 역시 크게 다를 것이 없어 최상위 포식자라 해도 성체가 되기 전에 호시탐탐 노리는 적들에게 많은 수가 죽었다.
그렇게 어미의 보호 속에 2년을 살며 살아남는 법을 배워도 죽는데, 어미가 없는 새끼가 생존할 확률은 야생에선 없었다.
“자기와는 다른 똑똑한 녀석이라고 잘 좀 돌봐 달래요.”
“또 다른 부탁은 없어?”
“고통 없어 죽여달라고 했어요.”
“상아야!”
“네?”
“새끼 데리고 먼저 돌아가.”
“다른 방법은 없겠죠?”
“없어.”
상아가 새끼를 품에 안고 아내들과 함께 헬기를 타고 칵드윕으로 돌아가자 쉬어 칸에게 다가갔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지막을 정리할 시간을 주었다. 30분쯤 기다리자 쉬어 칸이 고개를 끄덕여 정리가 끝났음을 알려줬다.
망설임 없이 글라디우스를 뽑아 파란 예기를 뽑아냈다. 3m로 늘어난 예기가 단번에 뒤통수를 뚫고 뇌를 파고들자 쉬어 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가 서서히 감겼다.
‘다음 생엔 부디 인간들이 없는 세상에 태어나라. 미안하다.’
쉬어 칸의 미간에서 레드주얼을 파내고 심장에서 레드스톤을 꺼낸 후 흔적을 지우고 운반선을 불렀다.
쉬어 칸의 사체를 싣고 돌아오는 내내 기분이 우울했다. 녀석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선실 밖으론 나오지도 않았다.
칵드윕에 나를 내려준 운반선은 후글리 강을 따라 캘커타로 이동했다. 한숙과 경호대가 배와 함께 캘커타로 이동해 쉬어 칸을 대중에 공개하자 인도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살인 호랑이를 잡았다는 안도감에 거리를 뛰어나온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께 기도하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개중에는 나를 칭송하며 내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내가 악의 화신 쉬어 칸과 혈투 끝에 잡은 것으로 생각했다.
진실은 이렇듯 사람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지만, 진실 따위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대중에겐 눈앞에 있는 결과물. 그것이면 족했다.
“사체는 인도에 팔아.”
“알았어.”
“풍산개 키우는 사육사들에게 호랑이도 키울 수 있는지 물어보고.”
“응.”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거니까 준비해.”
“알았으니까 이제 씻어.”
쉬어 칸의 피 냄새를 씻어내고자 보디클렌져 한 통을 다 쓰며 살가죽이 벗겨지도록 문질렀지만, 피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음속에 남은 냄새는 물과 비누로 씻을 수 없어.”
“그럼 어떻게 해야 사라지지?”
“받아들어야지. 그래야 냄새가 없어져.”
“받아들이라고?”
“응,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받아들이면 돼. 그리고 자기 과거와 비교해 생각하면 안 돼. 세상엔 비슷한 일은 많지만, 같은 일은 없으니까.”
“흐음...”
“일이 생길 때마다 과거의 상처를 들쑤시는 것은 잘못된 버릇이야. 그건 너에게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우리한테도 좋은 일이 아니야.”
소연의 따끔한 충고에 할 말이 없었다. 소연의 말처럼 난 어떤 일이든 나와 연관 지어 생각했다.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행동은 나쁠 게 없지만, 깊이 빠져들어도 좋을 게 없었다.
내 어린 날의 과거는 이제 영원히 지난 일이었다. 과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면 평생 과거의 망령에 묶여 살아야 한다.
“미안!”
“아니야. 넌 지금까지 잘 해왔어. 앞으로도 잘할 거야.”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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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