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48 세계 나이트 격투 대회(World knight Combat Games) =========================================================================
248.
“졌네.”
“누가?”
“엠마 스톤.”
“왜?”
“지쳤어.”
“이제 5분 지났는데 벌써 지쳐?”
“오버페이스야. 숨이 턱까지 찼어.”
“정말이네.”
“멘탈리스트가 민첩형 피지컬리스트와 뛰어다니며 싸운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상대는 이미 장단점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왔는데, 엠마 스톤은 상대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라. 기본이 안 됐어. 쯧쯧쯧쯧~
“아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작은 화살이 엠마 스톤의 허벅지에 틀어박혔다. 고통에 찬 비명과 함께 엠마 스톤이 바닥을 구르자 재빠르게 뛰어온 러시아 선수가 축구공을 차듯 엠마 스톤의 턱을 걷어찼다.
“헉!”
“아이고!”
“야이 개자식아! 쓰러진 여자 얼굴을 발로 차는 건 너무 하잖아! 그러고도 네가 남자냐?”
러시아 선수의 과격한 행동에 열이 받은 은비가 유리창에 달라붙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남자가 여자 얼굴을 발로 차는 건 매우 비신사적인 행동으로 영화가 아니면 절대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목숨 걸고 싸우면서 여자라고 봐줄 순 없었다. 레드몬이 암컷이라고 봐줄 수 없듯 상대가 여자라고 손을 잡아 일으켜 줄 순 없는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러시아 선수의 행동은 칭찬받아 마땅했다. 하지만 그런 말을 입 밖에 꺼낼 순 없었다.
이방에 남자는 나 혼자고, 절대다수인 여성 7명은 몹시 화가 난 상태였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고 지금은 못 본 척 입을 다물고 딴짓을 해야 할 때였다.
멍청하게 러시아 선수의 행동을 설명하고 두둔했다간 돌아오는 건 욕과 매밖에 없었다.
‘어이, 러시아 친구! 미안하게 됐네. 내가 자네 욕을 해도 이해해주게. 나도 살아야지 어쩌겠는가. 미안허이~“
첫 번째 경기에 어이없이 패한 미국이 페이스를 잃고 두 번째 경기마저 연달아 내주자 관중석 분위기는 침울하다 못해 폭동이 일어날 만큼 살벌했다.
3일 밤낮을 줄을 서 입장권을 산 건 자국 선수가 무참히 깨지는 걸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1991년 미소 냉전 시대가 끝났지만, 아직도 미국과 러시아는 최대 라이벌이자 앙숙이었다.
이는 국민감정에도 고스란히 스며들어 우리가 일본에 지면 열이 뻗쳐 잠을 못 자는 것처럼 경기장에 모인 상당수 미국인도 러시아에 지는 걸 치욕이라 생각했다.
우월주의에서 비롯된 이런 행동은 다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깔보고 업신여기고 배척하려는 국수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지나친 애국심과 자만심이 원인이었다.
모든 나라가 다 그렇듯 미국도 이런 생각이 강했다. 영화를 보면 결정적인 장면에 성조기를 흔드는 일이 다반사였고, 정의를 지키는 사람은 항상 미국인이란 공식이 존재했다.
곳곳에 이런 장면을 배치하다 보니 영화 흐름도 엉망이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장면이 때문에 영화가 끝나면 줄거리보단 휘날리는 성조기만 기억됐다.
미국에서 만든 상업영화라 그러려니 하며 참고 보려 해도 미국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영웅들의 나라, 착하고 정직한 나라로 묘사하는 장면이 너무 많아 물리다 못해 짜증이 났다.
이 정도면 아메리칸 드림을 영화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어 상업영화가 아니라 홍보영화라 불러야 했다.
다민족국가에 아메리카 토착민의 땅을 강탈해 나라를 만들고, 역사와 전통도 매우 짧아 국민 통합 차원에서 이런 장면을 곳곳에 배치했다고 천만 배 이해하려 해도 나오는 영화마다 그따위라 돈이 아까워 볼 수가 없었다.
“마샤는 왜 안 와?”
“여긴 보는 눈이 많아서 경기 끝나고 숙소로 오기로 했어.”
“어떻게 할 거야?”
“난 언제나 네가 하자는 대로 따를 거야.”
“도와주고 싶어?”
“음... 솔직히 마음은 그래. 불쌍하잖아.”
“상대가 미국이야. 걸리면 아주 골치 아파진다는 건 알고 있지?”
“응. 알고 있어.”
“하아~~~”
소연이 이럴 정도면 은비, 서인, 상아, 아영의 생각은 물어보나 마나였다. 그나마 한숙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겠지만, 동생들의 의견을 따를 게 확실해 물어봐야 소용도 없었다.
“도박사들 큰일 났네. 8:2에서 2가 이기게 생겼네. 낄낄낄낄~”
“러시아가 이기는 곳에 돈 건 사람들 완전 대박인데요.”
“그렇게. 100만 원이 400만 원이 되는 거잖아. 우리도 어제 잡은 거북이 몽땅 걸었으면 돈이 얼마야? 800억 원에 4배면 3,200억 원? 아이고 배야~”
“그런 생각 때문에 도박에 빠지는 거야. 무조건 이긴다는 생각. 폭삭 망해 거지되고 싶어. 정신 차려!”
“웃고자 농담인데. 우씌~”
3경기는 다시 미국 여성과 러시아 남성의 대결이었다. 중급 멘탈리스트인 미국 여성은 경기가 시작되자 양손을 앞으로 뻗어 러시아 남성을 잡는 시늉을 했다.
“속박 스킬이야.”
“속박 스킬만 쓰면 이길 수가 없잖아.”
“가시덩굴처럼 상대를 압사해 죽일 수 있어. 봐봐. 몸이 우그러들잖아.”
아리의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러시아 선수가 다급히 손을 흔들어 경기를 포기했다.
5m 공중에 매달렸다가 바닥에 떨어진 러시아 선수는 고통이 큰지 몸을 부들부들 떨어대며 피를 게워냈다.
급히 힐러가 달려가 치유 스킬로 치료하자 구급요원들이 들어와 들것에 실어 경기장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러시아 선수가 사라지자 심판이 미국의 승리를 선언했다. 그러자 성조기가 휘날리며 경기장 안은 USA를 외치는 소리가 떠나갈 것 같았다.
승자에겐 축하를 패자에겐 위로를... 그런 인간적인 모습은 경기장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 번에 한 명밖에 못 잡아. 포스 소모도 많고.”
“그래도 대인전 스킬로는 끝내주네.”
“그렇긴 하지. 만약 상급 멘탈리스트로 진화한다면, 그땐 매우 위험한 상대가 될 수도 있어.”
“이름이 뭐라고 했지?”
“안나 패리스. 1967년생. 모스크바 출신.”
“잘 기록해놔. 언젠가 쓸데가 있을 테니까.”
“알았어.”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장미향을 맡았다. 몸을 기대며 향기를 맡자 아리 얼굴이 장미처럼 붉어졌다.
미래 공대에서 아리가 맡은 업무는 치료 빼고도 능력자의 스킬과 능력치를 파악해 자료화하는 일이었다.
풍산개와 함께 일을 맡기자 자신도 미래 공대의 진정한 일원이라 생각했는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오빠! 경기 보러 오길 잘했지?”
“응.”
TV를 통해선 능력치와 스킬을 파악할 수 없다. 포스로 몸을 기감해야 능력치를 알 수 있고, 포스의 움직임을 느껴야 어떤 스킬인지 알아낼 수 있었다.
TV는 실제 일어난 일을 보여주는 건 맞지만, 우리가 보는 건 허상이라 이렇게 경기장에 와서 직접 눈으로 봐야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럼 자주자주 오자. 경기 구경하며 기분전환도 하고, 능력자 수준과 각종 스킬도 알아내면 좋잖아. 꿩 먹고 알 먹고. 어때?”
“그래. 그렇게 하자.”
“히히히히~”
얘기를 들어주자 은비가 목에 매달려 뽀뽀를 퍼부었다. 아내들이 원하는 건 이런 것이었다.
자기 얘기를 귀담아들어 주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 지금도 경기장에 자주 온다고 약속했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일 년의 반을 해외에서 떠돌아야 했고, 집에 돌아가도 해야 할 일이 태산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서울에 있는 경기장을 찾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은비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걸 알면서도 말하는 건 내가 자기 얘기를 귀담아들어 주길 원하는 것뿐이었다.
3경기를 따온 미국이 4경기를 연속으로 가져오며 승부가 원점으로 돌아가자 경기장은 흥분을 넘어 광기에 빠져 곳곳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경찰이 투입돼 충돌한 관중들을 갈라놓으며 일촉즉발의 위기를 넘겼지만,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유쾌하게 경기 보러 와서 왜들 싸우죠?”
“돈 걸었나 보지. 그것도 전 재산을.”
“설마요?”
“분위기 봐봐. 지면 깽판 부릴 기세잖아.”
“정말 그러고도 남겠네요.”
마지막 5경기에 나온 미국 선수 론 하워드와 러시아 선수 유리 야코블레프는 둘 다 장신의 공격형 피지컬리스트로 파도치는 칼날모양의 커다란 프렘버그(Flamberge)를 들고 나왔다.
프렘버그는 칼날이 뱀처럼 휘어진 형태로 베이면 상처가 일정하지 않아 회복이 매우 더뎠다.
이 때문에 날 부분이 톱니 형태로 베이면 살이 뜯겨 나가는 소드 브레이커(Sword breaker)와 함께 미국과 유럽 피지컬리스트들이 애용하는 병기 중 하나였다.
빠르게 다가선 론 하워드가 사선 베기와 횡 베기로 가슴을 공격하자 뒤로 물러난 유리 야코블레프가 30cm 길이의 단검을 던졌다.
바로 코앞에서 날아온 단검을 팔을 보호하는 뱀브레스로 침착하게 쳐낸 하워드가 재빨리 달라붙으며 다리를 노렸다.
껑충 뛰어 칼을 피한 야코블레프가 하워드의 머리를 노리고 짧고 간결하게 연속으로 내려치자 하워드가 양손으로 칼을 받쳐 공격을 막아냈다.
“캉캉캉캉~”
칼을 막아낸 하워드가 몸을 움츠리며 복부를 향해 칼을 찔러넣자, 야코블레프가 칼을 옆으로 쳐내고 곧바로 머리를 찔렀다.
론 하워드 : 힘-181 민첩-153 체력-149 총합-483 멘탈포스-13
유리 야코블레프 : 힘-182 민첩-156 체력-165 총합-503 멘탈포스-15
둘 다 힘과 민첩이 비슷한 수준으로 실력도 비등하자 다섯 경기 통틀어 가장 박진감 넘치는 경기가 펼쳐졌다.
스킬도 예기를 이용한 찌르기와 베기 위주라 관중들이 원하던 전형적인 검투사의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둘 다 공격 위주라 자잘한 상처가 생기며 피를 질질 흘려대자 흥분한 관중들이 고함을 질러대며 상대를 죽이라고 악을 써댔다.
“피에 굶주린 광자들이 따로 없네.”
“오빠, 사람들이 피에 광분하는 이유가 뭘까요?”
“지배욕과 소유욕 때문이라고 누가 그러던데... 타고난 본성 아닐까?”
인간의 공격성향은 처음부터 있던 게 아니라 집단생활 이후 생긴 ‘지배욕’과 ‘소유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이 지배욕과 소유욕을 갖게 된 이유가 다른 사람과 자기를 견주며 상대적인 행복감과 박탈감을 맛보는 습관을 굳혔기 때문이고 했다.
사람은 동물과 달리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물자와 짝을 소유하는데 만족하지 못했다.
필요하지도 않은 물자를 소유하려 했고, 번식에 도움도 안 되는 많은 짝을 지배하려 했다.
또한, 타인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으려 했고, 남에게 자기의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정신적 만족감을 얻으려 했다.
이런 행동이 폭력을 양산했고, 결국엔 상대를 파괴하고자 전쟁을 일으키는 파괴욕까지 불러왔다.
재미있는 건 이런 소유욕과 지배욕, 파괴욕이 인간을 동물과 다른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러시아가 이겼네.”
“아직 비등하잖아.
“비등하면 결국 체력이 뛰어난 쪽이 이기게 돼 있어.”
“겨우 16 차이인데?”
“비등한 차이면 티끌만 것 하나로 승부가 갈리는 거야. 근데 16이 적어?”
30분 넘게 진행된 전투는 러시아의 유리 야코블레브의 승리로 돌아갔다. 체력 차이가 고작 16이었지만, 숨이 턱까지 찬 상태에서 체력 16은 바다만큼 큰 차이로 작용했다.
숨이 턱까지 찬 존 하워드의 비틀거리는 틈을 파고든 유리 야코블레프의 프렘버그가 허벅지 살을 왕창 잘라내자 피가 콸콸 쏟아져 내리며 경기는 끝이 났다.
칼을 높이 쳐든 야코블레프의 포효에 러시아 선수들이 경기장으로 뛰쳐나와 환호성을 질러대자, 러시아 관중들도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며 노동자 마르세예즈를 불렀다.
1991년 소련의 붕괴 이후 한없이 추락하던 러시아의 위상이 4년 만에 미국 땅에서 다시 우뚝 서는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