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7 응징(膺懲) =========================================================================
197.
한숙이 확실한 대답을 회피한 채 조진우 기자의 판단에 맡긴다는 오묘한 말을 남기고 단상을 내려오자 한숙 주위로 기자들 몰려들어 질문을 퍼부었다.
미래 레드포스 대원들이 밀어내도 성난 군중처럼 마이크를 들이밀며 질문을 던지는 통에 기자회견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아니라고 말하지 왜 알아서 판단하라고 했어?”
“착각하게 만들려고요.”
“왜?”
“그래야 지홍씨 인지도와 몸값이 오르죠.”
“그러다 상급 레드몬 잡아달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래?”
“거절하면 그만이죠.”
“뭐?”
“저들이 레드몬을 잡아달라고 부탁한다고 우리가 들어줄 이유는 없잖아요. 판단은 엄연히 우리 몫이에요. 그리고 계약서에 상급 레드몬 사냥 조항은 넣지도 않았어요. 잊으셨어요?”
“그렇긴 하지. 근데 거짓말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전 지홍씨가 최상급 능력자라고 말한 적 없어요. 지홍씨도 그런 말 한 적 없고요.”
“너무 무책임한데.”
“지홍씨가 상급 레드몬을 사냥하겠다고 약속한 적 있나요? 없죠. 저 역시 그런 약속을 한 적 없어요. 그런데 뭐가 무책임하다는 거죠?”
“사실인 척 말했잖아.”
“올해 안에 최상급 능력자가 될 수도 있잖아요. 전 그렇게 생각하고 알아서 판단하라고 말한 거예요. 호호호~”
“컥...”
한숙은 내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많은 사람이 우리가 힘도 커졌고 충분히 인지도로 쌓았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소리였다.
겉으로 보기엔 대단한 권력과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이제 겨우 우물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개구리 신세였다.
각국 청년들에게 가장 강력한 능력자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여전히 미국의 마샤 타이엘나와 아폴로 윌리엄스, 벤저민 링컨을 꼽았다.
우리가 세상에 알려진 건 고작 두 달 남짓으로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고, 실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그보다 몇 배나 많았다.
또한, 각국 정상들이 우리에게 러브콜을 보내는 건 이용가치가 있어서였지, 우리를 믿고 신뢰하고 자신들과 같은 수준으로 봐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세상의 권력과 돈을 움켜쥐고 있는 실세들이 보기에 우린 이제 겨우 자라나는 새싹이자, 변방에서 용쓰는 양아치에 불과했다.
현재 우리 위치는 바닥 중의 바닥으로 계급으로 따지면 이제 겨우 갈매기 하나를 단 하사 수준이었다.
미래 레드몬 총괄지원단 단장인 한숙은 이런 사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어 작은 기회만 있어도 내 이름을 알리고 힘을 실어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은행잎은 다 어디 갔어?”
“네가 일어나면 찾을 것 같아 다음날 바로 수거해 냉동 창고에 보관해뒀어.”
“잘했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야.”
“나 때문에 정신도 없었을 텐데... 고생했어.”
“네가 누워 있다고 넋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우리를 더 우습게 보잖아. 그래서 한 거야. 칭찬받을 일 아니야.”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바라는지 꿰뚫고 있는 소연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은행잎을 모두 모아 냉동 창고에 보관했다.
착하고, 순종적이고, 어른을 공경하며, 음식을 잘하고, 아이를 쑥쑥 잘 낳는다고 현모양처는 아니었다.
분명 좋은 아내인 건 사실이지만, 소연처럼 남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지,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을 헤아려 이해하고 도와주려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현모양처였다.
현명한 아내를 얻는 것은 하늘이 내려준 축복이라고 할 만큼 매우 어려운 일로 현명한 소연이 있어 집안이 화목했다.
소연이 없다면 은비가 그 일을 대신해야 하는데, 사교성은 소연보다 뛰어나지만, 포용력과 이해심은 소연괴 비교하면 한참 모자라 집안을 화목하게 꾸려나가기엔 부족함이 많았다.
“이러니 안 예뻐할 수가 있어? 안 그래?”
“사람들이 보잖아. 그만해!”
“내 마누라 내가 안겠다는데 어느 놈이 시비를 걸어? 죽고 싶어?”
“배시시~”
은행잎은 현기증과 이명(귀울음), 기억력 감퇴, 집중력 장애 개선에도 도움이 되는 약으로 여성의 잔주름 예방, 피부노화억제, 건성 피부 치료에도 효능이 있다.
이런 효능 때문에 놈들과 싸우는 내내 은행잎을 모아 약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내들의 건강을 책임진 다음부턴 약초든, 레드몬이든 눈이 보이는 건 모두 약으로 사용할 만한 게 없는지 유심히 관찰하게 됐다.
덕분에 약초학과 의학서적도 꽤 많이 섭렵해 돌팔이 한의사는 가볍게 뛰어넘은 수준까지 도달했다.
“통째로 옮겨주십시오.”
”무게가 5,000ton이 넘는데, 무슨 재주로 옮겨가요.“
“그럼 이곳에 임시 연구소를 지어 주십시오.”
“누가 지킬 건데요? 박사님이 지키실 거예요.”
“정말 방법이 없는 겁니까?”
“해체해 연구실로 옮겨 다시 조립해 드리기로 했잖아요. 이미 결정 난 사항을 이제 와서 이러면 어쩌라는 거예요.”
“이런 귀중한 자료를 자르는 건 과학에 대한 모독입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내려오세요. 계속 안 내려오면 그냥 두고 갈 거예요.”
은비가 한바탕 소란을 떤 다음에야 간신히 최정준 박사를 은행나무에서 끌어 내릴 수 있었다.
괴팍하긴 하지만 진중한 성격의 최정준 박사는 연구에 관련된 일엔 가끔 똘기를 부렸다.
천재의 히스테리까진 아니지만, 어처구니없는 요구로 사람을 당혹하게 하는 아주 요상한 재주가 있었다.
반쯤 미쳐 날뛰던 기자와 대표들을 나진시로 강제 소환하자 이번엔 미래 연구소 연구원들이 몰려와 난동을 부렸다.
은행나무가 훼손될까 두려워 밤잠을 설치던 최정준 박사와 연구원들은, 환자를 두고 차마 가보자는 말을 꺼내지 못해 발만 동동 굴렀다.
그러다 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50명이 넘는 연구원이 잽싸게 날아와 은행나무를 관찰하고, 찔러보고, 쓰다듬고, 핥아보다 급기야 통째로 옮겨달라는 황당한 시위를 벌였다.
그게 가능하다면 나도 그러고 싶었다.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를 토막 칠 수 있는 사람은 달랑 나 한 명뿐이라 뽑아서 갈 수 있다면 일일이 잘라내야 하는 수고로움이 덜 수 있었다.
하지만 구축함에 해당하는 무게와 크기인 은행나무를 통째로 옮겨가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땅으로 옮길 수만 있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방법을 모색하겠지만, 레드몬이 우글거리는 산과 숲을 뚫고 간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길이라곤 하늘밖에 없어 만화나 영화라면 헬기 수십 대에 쇠사슬을 연결해 은행나무를 옮기겠지만, 그건 영화 속에나 가능한 허구였다.
더구나 땅속에 깊이 박힌 길고 큰 뿌리를 자르지 않고 뽑을 방법이 없었다. 콩나물도 아니고 밖에 드러난 몸통보다 뿌리가 더 큰데 무슨 재주로 놈을 뽑을 수 있겠나?
누구보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과학자들이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요구를 계속하자 그 정신으로 연구는 제대로 하는지 의심마저 들었다.
먼저 다양한 각도로 은행나무의 사진을 찍어 컴퓨터에 입력해 입체적인 모양을 잡고, 무게와 크기에 맞게 나무에 줄을 긋고 숫자를 적었다.
그에 맞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듯하게 잘라내면 MI-26 헤일로 수송헬기에 실어 연구소로 옮긴 후 기중기를 이용해 하나씩 다시 조립했다.
이틀 동안 땅 위에 드러난 부분을 모두 해체해 연구소로 실어 보내고 뿌리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뿌리가 다치지 않게 최대한 넓게 구덩이를 파자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은행나무 뿌리가 드러났다.
땅 위에 드러난 몸통만큼 클 거란 예측을 훌쩍 뛰어넘어 뿌리 깊이가 100m에 달했고, 가장 먼 곳까지 뻗어 나간 뿌리는 1km나 뻗쳐 있었다.
분지의 절반을 뒤덮고 있다는 표현이 적당할 만큼 엄청난 크기로 분지가 은행나무였고, 은행나무가 분지였다.
“오빠!”
“응?”
“이상한 게 있어요. 봐주세요.”
“뭔데 그래?”
“작은 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많이 특이해요.”
“알았어.”
상아를 따라 북쪽으로 1km를 올라가자 움푹 파인 바위틈에 작은 나무 두 그루가 자라 있었다.
마주 선체 자란 1m 크기의 은행나무 두 그루는 크기에 비해 굵기가 굵고 잎이 무성한 것이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아주 탐스러웠다.
“분지 내에 살아 있는 나무가 다 있네. 위치가 좋아서 그런가?”
“특이한 거 못 느끼셨어요?”
“나무 크기에 비해 포스가 지나치게 높은 거?”
“그것도 있지만, 뿌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상아의 말에 기감으로 작은 은행나무 뿌리를 훑었다. 겨우 1m밖에 안 된 작은 나무라 뿌리가 짧을 것이란 고정관념을 깨고 가느다란 뿌리 한 가닥이 1km나 뻗어 있었다.
“엘리트 레드몬 은행나무 묘목?”
“맞아요.”
“어떻게 발견했어?”
“제가 아니라 풍아가 발견했어요. 냄새를 맡았는지 뿌리를 따라 이곳까지 왔어요. 그래서 알게 됐어요.”
“기특하네.”
잘했다는 표시로 풍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다음 묘목을 어떻게 처리할까 잠시 고민했다.
은행나무 암수는 죽기 직전 마지막 남은 생명의 불꽃을 뿌리 통해 이곳으로 보낸 게 분명했다. 그렇게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제2의 인생을 꿈꿨을 것이다.
위험성을 생각하면 당장 뽑아버려야 하지만, 가치를 생각하면 무작정 죽이는 것이 능사는 아니었다.
“말은 붙여봤어?”
“네, 하지만 식물이라 제 생각이 전달됐는지 확인할 수가 없어요.”
“텔레파시에도 그런 단점이 있네. 흐흐흐~”
텔레파시는 양방향 서비스가 아니라 일방통행 서비스로 의사 표현 수단이 없는 상대에겐 내용이 전달됐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상아가 보기엔 분신일 것 같아? 아니면 죽은 어미의 씨앗일 것 같아?”
“분신일 가능성이 크죠. 하지만 온전하지 않아 씨앗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온전히 능력을 전달받았다면 요렇게 작지는 않을 거예요.”
A급 엘리트 레드몬인 암놈과 상급 레드몬인 수놈의 본신이 최후의 순간 죽음을 피해 달아났다면, 15일 동안 자란 게 고작 1m는 아니었을 것이다.
잔뿌리를 이용해 죽은 나무와 동물, 레드몬 사체에서 에너지를 흡입하면 얼마든지 빠르게 몸을 키울 수 있었다.
내가 다시 올 게 두려워 숨어 있었다면 본체와 뿌리를 연결하고 있을 까닭도 없었고, 이렇게 눈에 띄게 자라 있을 이유도 없었다.
나라면 작은 싹만 틔우거나 땅속에 숨어 위험 사라질 때까지 5년이고 10년이고 기다렸을 것이다.
1,000년을 넘게 살아온 은행나무에게 5년, 10년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짧은 시간이었다.
“일단 이놈들은 우리 집 정원에 심어놓고 당분간 관찰한 다음 죽일지 살릴지 판단하자.”
“위험하지 않을까요?”
“아직 걱정할 단계는 아니야. 최정준 박사와 연구원들에겐 절대 비밀이야. 함부로 넘겨주면 위험할 수도 있어.”
“알았어요.”
마음 같아서 살기를 투사해 놈들의 상태를 면밀히 파악하고 싶었지만, 최하급도 안 된 어린 새끼라 살기를 투사하면 죽을 게 확실했다.
당분간 매일 지켜보며 은행나무 열매라도 따먹을 수 있을지 아니면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하다 불쏘시개로 쓰게 될지 두고 봐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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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모두 메르스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