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94 연리지(連理枝) =========================================================================
194.
내가 깨어난 건 정신을 잃은 지 정확히 15일 만이었다. 15일 동안 죽은 듯이 잠만 자던 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하게 일어났다.
연리지가 쓰러지자 한달음에 달려온 아내들은 내 모습에 눈물을 펑펑 흘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언제나 믿음직스럽게 자신들을 보호하고 백 년 만년 함께 살아갈 거라 믿었던 내가 사경을 헤매자 침착한 소연마저 몸을 떨며 어찌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은비는 내 얼굴을 붙자고 엉엉 울어댔고, 상아는 세상을 사라지는 충격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었다.
서인은 더욱 심해 다리 힘이 풀러 자리에 주저앉아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나마 부모의 죽음을 의연히 버텨낸 아영만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정화 스킬을 퍼부었다.
그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든 소연이 피가 흘러내리는 옆구리와 허벅지를 지혈하고, 급히 헬기를 불렀다.
나진시에 돌아온 건 그로부터 1시간 뒤로 나진시엔 보건소 수준의 병원밖에 없어 서울로 이송해야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서울까지 가기엔 매우 위독한 상태였고, 서울로 간다고 해도 뾰족한 치료 방법이 없었다.
외관상 허벅지와 옆구리 상처로 인한 심한 출혈과 내장 손상이 우려되는 상황이었지만, 실상은 무리한 흡기로 몸에 균형이 깨져 회복과 재생능력이 바닥까지 떨어진 상태로 현대 의학으로 치료하기엔 쉽지 않은 상태였다.
의료진이 할 수 있는 건 은행잎을 제거하고 상처를 봉합해 출혈을 막는 것이 전부였다.
이제 마지막 희망은 뛰어난 힐러를 구해 생명력을 북돋워 망가진 몸을 스스로 치료하길 바라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다.
부랴부랴 남포에 있는 김아리 힐러의 전화번호를 알아낸 한숙이 간신히 통화에 성공했다.
김아리 힐러가 전화를 받자 솟구치는 슬픔에 한숙이 엉엉 울어대기만 하자 소연이 전화를 넘겨받아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거절하면 어쩌나 가슴이 조마조마했는데, 김아리 힐러는 망설이지 않고 단번에 승낙했다.
이제 김아리 힘러가 도착할 때까지 내가 버텨내면 실낱같은 희망이 생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훼방꾼들이 나타났다. 오성 그룹과 오성 공대 공대장 김일권이 김아리 힐러를 가지 못하게 막아서며 일이 꼬이고 말았다.
김아리 힐러가 오성 공대를 떠나겠다고 크게 화를 내자 그제야 우리가 보낸 헬기를 타고 나진시에 올 수 있었다.
김아리 힐러가 도착한 건 내가 다친 지 이틀 후였다. 놈들은 자신들의 헬기를 남쪽으로 모두 보내버리고 우리가 보낸 헬기도 착륙하지 못하게 막는 등 내가 죽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동안 아내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온종일 내 옆에 달라붙어 내가 무사하길 빌고 또 빌었다.
종교도 없는 무신론자들이 하나님, 예수님, 부처님, 마호메트 등 세상의 모든 신께 나를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원했다.
아내들의 간절한 마음이 통했는지 1시간도 버티지 못할 것 같던 난 김아리 힐러가 도착할 때까지 무사히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라 김아리 힐러가 도착했을 땐 미미하지만, 몸이 조금씩 회복하는 중이었다.
아내들은 내가 상급 피지컬리스트에 듀얼리스트라 그런 줄 알고 기뻐했지만, 사실은 욕심 때문에 목숨을 건진 것이었다.
정신이 가물거리는 상태에서 누가 훔쳐갈까 두려워 흡입한 두 개의 레드주얼 중 하나 목숨을 살렸다.
연리지에서 뜻으로 연리지주얼로 명명한 노란색 레드주얼은 크기가 3cm로 구슬 안에 노란 은행나무 한그루 서 있는 모습이었다.
피톤치드의 영향을 받은 연리지주얼은 육체와 정신을 항상 최상의 상태로 유지해주는 기능이 있어 체력을 향상해주고, 육체와 정신의 피로를 빠르게 회복시켜줬다.
또한, 남녀의 애정을 상징하는 연리지만의 특징인지 반경 30m 이내의 사람 중 애정을 가진 사람에 한해 효과를 공유하는 능력이 있었다.
단, 남성이 사용하면 여성에게만 효과가 있었고, 여성이 사용하면 남성에게만 효과가 있었다.
“덕분에 목숨을 구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없었어도 금방 털고 일어나셨을 거예요.”
“그렇진 않습니다. 아리님 도와주셔서 정신을 차렸지, 그렇지 않았다면 1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작은 도움을 드렸는데, 너무 크게 말씀하시네요.”
“사실을 말한 겁니다.”
“어찌 됐든 건강을 되찾아 정말 다행이에요.”
키 173cm, 몸무게 50kg, 청순한 외모에 75B의 빵빵한 가슴과 매력적인 몸매를 가진 김아리는 침착하고 단아한 성격으로 대인관계도 원만해 대한민국 남성이 가장 좋아하는 여성 1위로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국내 최대 규모의 광신도 집단인 팬클럽 아리사랑은 회원수가 50만 명에 100% 남성들로 김아리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하게 해줬다.
1993. 06. 15 : 힘-34 민첩-32 체력-95 총합161 멘탈포스 659
치유의 바람과 재생의 바람 두 가지 스킬을 사용하는 김아리는 전 세계 힐러 중 100위 안에 드는 실력자로 오성 공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공대장인 김일권보다 컸다.
다만 여자라는 핸디캡과 공격능력이 없는 힐러 그리고 나서는 것을 좋아하는 않는 성격으로 김일권에게 공대장 자리를 양보한 것뿐이지 인품이나 포용력, 지도력까지 두루 갖춘 인재였다.
“저 때문에 회장 방침을 어겨 잘리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안 그래도 관두려고 했어요. 관둘 명분이 생겨 오히려 잘된 거죠.”
“오성 공대만큼 좋은 직장이 어디 있다고 그만둡니까? 남들은 못 들어가서 난리인데요.”
“급료와 대우는 최고일지 몰라도 사람 사는 냄새가 없어요. 뭐랄까? 부속품이라고 할까? 정해진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다가 고장 나고, 부서지고, 필요가 없어지면 버려지는 부속품 같은 존재에요.”
“사회는 어디나 다 그런 거 아닐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그래도 인간 냄새가 나는 곳에서 일하고 싶어요. 친구처럼 가족처럼 일할 수 있는 그런 곳이요.”
“생각하신 곳이 있으십니까?”
“오라는 곳은 많은데, 아직 갈 곳을 정하진 못 했어요. 모두 제 능력만 원하지 제가 원하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거든요.
“가족 같은 분위기라... 그 말을 들으니 욕심이 생기네요.”
“미래 공대는 가족들만 함께하는 곳이잖아요. 그것도 부부만.”
“그렇지 않은 분도 계십니다.”
“한 분 있긴 하네요. 근데 많이 불편할 것 같아요. 혼자만 소외된 기분이라 그럴까? 옆에선 콩 볶는 냄새가 진동하는데, 혼자만 따로 노는 느낌? 기분이 별로일 것 같네요.”
“미쳐 그 생각은 못했군요.”
“한 번 물어보세요. 의리로 남은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조은영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심지어 같은 공대원이란 사실조차 잊고 있었던 것 같았다.
조은영은 아내들과 매우 친해 매일 수다도 떨고, 술 마시고, 어울려 다니며 놀아 소외된 기분을 느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김아리의 얘길 듣자 조은영이 겉돈다는 느낌이 들었다. 활달하던 성격이 나진시에 온 이후론 말수도 적어졌고, 웃는 모습도 잘 보질 못했다.
「속으로 엄청나게 욕했겠네. 그렇다고 여자로 보이지도 않는데 데리고 살 수도 없잖아. 조은영도 나를 남자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던데.」
“지난 번 일은 정말 죄송해요?”
“지난 번 일이라뇨?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강릉 사건요.”
“아~”
“사람들에게 잘못한 부분을 말하고 바로 잡았어야 하는데... 용기가 나지 않아 피하고만 있었어요.”
“김아리 힐러님 잘못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려는 정부와 이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기업의 잘못이죠.”
“그렇지 않아요. 저도 그에 대한 이익을 함께 했어요. 제 잘못도 있어요.”
“제가 알기로 김아리님은 금전적인 이익을 탐하지 않은 거로 알고 있습니다. 누구는 엄청나게 챙겼는데 말입니다. 또한, 신문사에 그에 대한 내용을 말한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신문사가 기사를 내보내지 않아서 사람들이 모르고 있을 뿐이죠.”
“사람들에게 알릴 방법은 신문을 빼고도 많아요. 기자회견을 열 수도 있고, 제 팬클럽에 잘못을 알리고 진실을 널리 퍼뜨릴 수도 있었어요. 전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어요. 모두 제가 나약한 탓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나약한 동물입니다. 그래서 사회를 구성하고, 정당을 만들고, 회사와 모임, 가족을 만드는 겁니다. 자책하지 마십시오. 능력자도 나약한 사람입니다.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개 개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회장님은 이렇게 많은 일을 하셨잖아요.”
“제가 혼자 했습니까? 아니죠.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건 비밀 아닌 비밀로 제가 한 건 하나도 없습니다. 아내들이 모두 했죠. 전 옆에서 놀고먹고 일하는 아내들 괴롭히는 재미로 살고 있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을 많이 모아 적재적소에 배치할 줄 아는 지도자가 좋은 지도자라고 생각해요. 혼자만 잘나서도 안 되고, 사람들을 마구 부려서도 안 되죠. 그런 면에서 회장님은 좋은 지도자인 것 같아요.”
“사람들이 들으면 큰일 날 소리 하십니다.”
“뭐가요?”
“제가 왜 지도자입니까? 전 그냥 레드몬 사냥꾼입니다. 어디 가서 그런 소리 다시는 하지 마십시오. 욕바가지로 먹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회장님께 거는 기대가 엄청나게 커요. 국가의 위상을 드높이고, 레드몬으로부터 사람들을 지켜주고, 국민을 위해 각종 사회복지 사업도 할 거라고 믿고 있죠.”
“다 잘못된 정보입니다. 저란 사람을 모르고 떠드는 소리입니다. 저는 이 나라에 관심도 없습니다. 오직 내 가족, 내 회사, 내 것 이것만 생각합니다. 무슨 슈퍼히어로쯤으로 착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저는 속 좁은 남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절대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호호호~ 정말 재미있는 분이네요. 지금까지 만난 남자들은 자랑만 늘어놔 닭살이 돋았는데, 회장님은 반대로 자기 욕만 하시네요.”
“자랑할 것도 없고, 없는 말을 지어내는 성격도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추잡하게 거짓말하는 것도 성격에 맞지 않습니다.”
“참 희한하게 매력을 발산하시네요. 호호호~”
“네에?”
취향이 다양한지 속 좁고 못났다는 걸 사실대로 말하자 그걸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이 있었다.
「고통이나 학대를 받는 걸 좋아하는 마조히즘 아니야? 희한한 성격일세.」
김아리 힐러는 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까지 아침·점심·저녁 하루 세 차례씩 치유의 바람과 재생의 바람을 사용해 나를 치료했다.
연리지주얼이 몸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는 신비한 효과가 있지만, 상처가 엄중하고, 몸 상태가 엉망이라 공급할 포스가 바닥나 간신히 목숨을 이어주며 아주 조금씩 상태를 호전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틀 동안 그렇게 상태가 조금씩 호전될 때 김아리 힐러가 도착해 치유력을 쏟아 붓자 아영의 정화 스킬과 결합해 시너지 효과가 나며 몸이 빠르게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포스가 모이자 연리지주얼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해 엉망이 된 몸을 정상으로 돌려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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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모두 메르스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