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4 초대(招待) =========================================================================
184.
황준지우 박사는 유전자공학(Gene Engineering)의 대가로 DNA 실험과 DNA 클로닝 등의 유전자조작기술 분야에선 중국 내 최고 권위자였다.
재작년까지 생물 무기 연구소 소장을 맡은 진도명이 실적 부진으로 숙청당하며 연구소장을 맡게 된 황준지우 박사는 가족과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에 몰두했다.
하지만 생체병기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차오스 주석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비굴한 모습을 보이며 목숨을 구걸해야 했다.
그나마 황준지우 박사의 실력이 뛰어나 대체할 만한 과학자가 없어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박사와 부인은 이미 죽어 땅에 묻혔을 것이고, 두 딸은 선인 인공배양 실험체가 되어 색욕에 찌든 선인들의 노리개가 되었을 것이었다.
“모기는 왜 죽은 건가?”
“영양 공급이 끊긴 것이 원인인 것 같습니다.”
“연구원의 반응은 어떠했나?”
“불안한 모습 빼곤 정신적으로 멀쩡한 상태였습니다. 다만, 수치에서 보시는 것처럼 몸이 하루가 다르게 지치고 쇠야 해져 갔습니다.”
“개선 방안은 찾아냈나?”
“아직 원인 분석 중입니다.”
“임상 시험은?”
“인체 실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럼 쥐새끼에게 아까운 모기를 주입하려 했나?”
“아.아닙니다.”
“하아~ 내가 이런 사람을 믿고 중요한 생물 무기 연구소를 맡기고 있다니 정말 한심스럽기가 이를 때가 없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수들을 보내줄 테니 올해 안에 확실한 결과를 가져오게. 어차피 죽을 자들이니 값싼 동정심 따위는 갖지 말고. 값싼 동정심이 자네와 자네의 가족을 불행하게 할 수 있어. 이점을 항상 잊지 말게.”
“며.며.명심하겠습니다.”
“일주일 동안 하급 피지컬리스트에 버금가는 힘을 발휘한다. 아주 매력적이야. 하지만 일주일은 너무 짧아. 고작 일주일 동안 선인이 되겠다고 달려들 바보 멍청이는 그리 많지 않아. 적어도 일 년은 넘어야 돈과 여자로 바보 멍청이들을 끌어들일 수 있어. 안 그런가?”
“그.그.그렇습니다.”
“꼭 성공해야 하네. 이 일이 성공해야 나와 자네의 조국이 미국, 러시아, 일본, 영국 등을 제치고 단번에 최고가 될 수 있어.”
“기.기필코 성공하겠습니다.”
“암 그래야지. 그래야 말고. 그래야 자네와 자네의 가족이 살 수 있지 않겠나? 하하하~”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993년 5월 8일 12:00 청와대 방문
“진작 초대했어야 하는데, 늦어서 미안합니다. 지난 군사정권의 잔재도 털어내야 하고, 국민을 위해 정부도 새롭게 꾸며야 해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해해주세요.”
“아닙니다. 초대해주신 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듣던 대로 부인들이 모두 대단한 미인이시군요. 눈이 번쩍 뜨입니다.”
“감사합니다.”
홍은하 소장과 이승구 비서실장의 세부조율이 끝나자 대통령은 우리를 청와대에 초청한다고 발표했다.
우린 곧바로 이에 응한다는 기자회견을 열고 다음 날 아침 헬기를 이용해 김포공항까지 이동한 후 리무진을 타고 청와대로 들어갔다.
우리 모습은 월드컵 축구 중계를 하듯 나진시를 출발해 김포공항에 도착한 모습, 청와대로 이동하는 모습, 청와대에 도착해 대통령과 다정하게 인사 나누는 모습, 공동기자회견과 맛없는 칼국수를 함께 먹는 모습까지 일거수일투족이 생방송으로 중계됐다.
“이승구 비서실장으로부터 얘기는 들었어요. 내가 미리 신경을 썼어야 하는데, 워낙 바쁘다 보니 미처 신경 쓰지 못해 지금과 같은 일이 생긴 것 같군요.”
“.......”
“지나간 과거는 강물이 흘러가듯 그렇게 잊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물결이 흘러와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습니다. 내 말이 맞지요?”
“... 그렇겠죠.”
“마음이 불편했다면 모두 이 사람의 잘못으로 생각하고 넘어가 주세요. 아랫사람을 관리하지 못한 잘못도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좀 더 신경을 써야 하는데, 워낙 많은 일을 하다 보니 신경을 다 쓸 수가 없어요. 그리고 지난 정권의 잔재들이 아직 곳곳에 남아 있어 이런 일이 일어난 겁니다.”
자기가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나간 일을 왜 따지냐고 지랄하는 것인지, 자기가 잘못이 아닌 지난 정권의 잘못이라고 하는 건지,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안 됐다.
원래 노회한 위정자들은 다 그런 건지 기자들을 물리고 따로 만난 자리에서 오간 대화는 유체이탈 화법이 아니면 동문서답이었다.
구체적인 것도 없고, 자기가 뭘 하겠다는 것도 없고, 물어보면 엉뚱한 소리만 하고, 한미 관계의 중요성만 떠들어대고, 한마디로 말해 시간 낭비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소연아! 난 기감으로도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단이 안 되던데, 넌 독심술로 알아낸 게 있어?”
“나도 없어. 내용이 없는데 어떻게 알겠어. 머리만 어지러울 뿐이야.”
“상아야! 넌 어때?”
“회색이에요.”
“회색? 소속이나 정치적, 사상적 경향이 뚜렷하지 않은 회색분자를 말하는 거야?”
“회색분자가 아니라 진짜 회색이에요. 진실의 흰색과 거짓의 검은색을 마구 섞어놓아 거짓도 진실도 아닌 회색이 됐어요. 다른 말로 이도 저도 아니라는 거죠.”
“나 참! 살다 살다 별 거지 발싸개 같은 꼴을 다 보네.”
“너무 열 받지 마. 이것도 좋은 경험이니까.”
“맞는 말인데, 두 번 경험하고 싶진 않다. 한 시간이 한 달처럼 길었어.”
이번 만남은 말도 통하지 않는 외계인과 서로 등을 돌리고 앉아 떠들다 온 찝찝한 기분이었다.
지구를 침공했으면 지구인의 말을 배워와야지 옆 동네 화성말을 배워오면 어쩌란 말인가?
그것도 초대해 놓고 등을 돌린 채 넋두리만 해대는 통에 짜증이 밀려와 돌아오는 내내 뒷담화로 누군가의 귀를 간지럽혔다.
“대통령과 여·야 대표가 모여 회의하는 기분이 바로 이런 거구나.”
“그러게. 원탁에 앉아 입으론 잘해보자고 떠들며 생각은 딴 데가 있고, 회의 끝나고 인터뷰하면 다들 자기 말에 수긍했다고, 자기가 잘했다고 떠들기만 하지.”
은비 말을 듣고 나자 이번 일에 관해 어떠한 논평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했네. 잘못했네. 그런 말 하는 것 자체가 우리도 놈들과 똑같아지는 것이었다. 그걸 생각하자 역겹다 못해 신물이 넘어왔다.
“도저히 이 상태로는 잠을 잘 수가 없겠다. 술 한잔하자.”
“아주 좋은 생각이야. 술 한잔하면 꿀꿀한 기분이 풀릴 거야.”
술이란 말에 은비가 반색하며 주방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애주가인 은비는 일주일에 적어도 서너 번은 술을 마셨다.
술친구로는 절대 빠지지 않는 한숙과 조은영, 홍은하 소장 그리고 술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 서인까지 다섯 명이 멤버였다.
난 술도 음식이란 생각에 마시는 건 뭐라 하지 않았다. 단, 술 먹고 주정 부리는 건 무진장 싫어해 먹는 걸 막지 않는 대신 난동을 부리는 건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술이 죄지 사람이 무슨 죄냐고? 개소리하지 마라! 술이 발이 달린 것도 아니고 스스로 움직이는 존재도 아닌데, 알아서 사람 입으로 들어갔나? 자기 손으로 처먹고 술이 죄라니 무슨 헛소리인가?
그리고 술 먹는다고 모든 사람이 고주망태가 되어 행패 부리고, 시비 걸고, 주먹을 휘두르진 않았다.
주정은 습관으로 하던 사람만 했지, 대다수는 주사 없이 즐겁고 유쾌하게 마시고 웃고 떠들었다.
우리나라 사법부는 애주가와 주당만 모아놨는지 음주 사고에 관해 아주 너그러운 처벌을 내렸다.
술에 취해 여성을 때리고, 폭행하고, 강간한 건 본인의 의지가 아닌 술 때문이라며 감형 또는 집행유예로 범인을 풀어줬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는데, 어찌나 남의 마음을 그리 잘 헤아리는지 아픔을 보듬어 안았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자신도 그와 같은 짓을 해보지 않았다면 절대 그 마을을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샤워를 마치고 풀장으로 내려가자 고기 익는 냄새가 진동했다.
“오빠! 시원하게 맥주 한잔 하세요.”
“고마워!”
상아가 따라준 시원한 맥주를 한 번에 마시고 소금을 뿌려 구운 두툼한 고기 한 점 입에 넣고 씹었다.
어린 레드와피티를 저온 숙성해 구운 고기는 부드러운 식감과 고소한 향기, 풍부한 육즙이 더욱 풍부해지며 식욕을 자극했다.
“많이 피곤하죠?”
“괜찮아.”
“괜찮지 않아요. 얼굴이 핼쑥해요.”
“그래?”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눈 밑이 까맣게 변했어요.”
“그 정도는 아니야. 그냥 머리가 좀 아플 뿐이지.”
“스트레스가 심해서 그래요.”
“그런가?”
“맛있는 거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대요. 어서 드세요.”
“알았어.”
신문과 방송은 우리와 청와대의 만남을 특종으로 보도하며 갖가지 기사를 쏟아냈다.
이번 만남으로 불신이 종식되며 대한민국의 위상이 강화됐다는 기사부터 정부의 대의적인 행동을 칭찬하는 기사, 앞으로 우리 활약을 예상하는 기사 그리고 하이에나처럼 죽은 왕교언을 희생양으로 물고 늘어지는 기사까지 다양한 기사가 신문과 방송을 장식했다.
“이제 내부도 대충 마무리됐으니 외부로 눈을 돌려야지.”
“그래야지.”
“발표는 최대한 늦춰도 원칙은 미리 만들어놔야지.”
“생각해둔 거 있어?”
“어제 청와대 일로 회의하다가 계약 국가 선정과 사냥 원칙에 관해 우리끼리 의견을 나눴어.”
“결론 났어?”
“아니. 의견만 나눈 거야.”
“어떤 의견?”
“계약 국가 선정과 사냥의 첫 번째 원칙은 안전이라는 것.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에선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다는 것. 그게 토론의 주재였어.”
대단한 부귀영화를 누리고 권력을 움켜쥐자고 해외 원정 사냥에 뛰어든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등 떠밀려 남의 뒤치다꺼리나 하러 다니는 것도 아니었다.
순전히 힘을 키우고 타인에게 간섭받지 않는 삶을 살자는 목적으로 나선 것이라 위험을 무릅쓰며 목숨을 걸 이유는 없었다.
============================ 작품 후기 ============================
오늘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모두 메르스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