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1 초대(招待) =========================================================================
181.
“대통령님은 박지홍 회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하십니다. 청와대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달라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말한 것이지 다른 뜻을 가지고 있진 않습니다.”
“저희는 그런 식의 정치적인 표현은 원하지 않아요. 이익 관계라면 확실하고 명료하게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것을 규정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해요.”
“정치는 그렇게 선을 그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손해도 보는 게 정치입니다.”
“박지홍 회장님은 정치할 생각도 없고, 대통령과 정치를 논하자는 것도 아니에요. 회장님이 청와대에 원하는 건 철저한 비즈니스 파트너로 행동해 달라는 거예요. 우린 그 이상 바라는 게 없어요.”
홍은하 소장의 선을 긋는 발언에 이승구 비서실장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레임덕도 아니고 이제 정권이 출범한지 고작 3개월이었다.
3개월이면 서슬 퍼런 칼을 마구 휘두를 때로 산천초목이 벌벌 떨며 숨죽인 채 처분만 기다릴 때였다.
이승구 비서실장은 대통령직인수위가 구성된 이후 이제껏 자신에게 버릇없이 대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모두 군기가 바짝 든 신병처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처분만 기다리거나, 살아남기 위해 발바닥을 핥는 놈들만 보아왔다.
심지어 대한민국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오성 그룹 이병석 회장과 기영 그룹 김유종 회장도 말을 아끼며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었다.
그런데 듣도 보도 못한 어린 계집이 조목조목 따지고 들자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그렇다고 평소처럼 화를 낼 수도 없고, 권력으로 찍어 누를 수도 없었다.
계집의 옆엔 박지홍이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뒤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 러시아 옐친 대통령, 일본 호소카와 모리히 총리, 중국 차오스 국가주석 등 각국 대통령과 총리, 수상이 잔뜩 버티고 있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제왕적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한민국 내에서 국민을 상대로 발휘하는 능력이었지, 외국에선 씨알도 먹히지 않는 종이칼에 지나지 않았다.
외국에 나가 각국 정상들과 사진을 찍을 땐 그럴싸한 포즈도 취하고 어깨에 힘도줬지만, 카메라가 꺼지고 기자들이 사라지면 찍소리도 못하고 예! 예! 거리다가 비 맞은 개처럼 돌아왔다.
그런 상황에서 못 참고 화를 냈다간 다시 청와대에 전화가 빗발치고 그러면 자신의 정치 인생도 끝이었다.
“그럼 박지홍 회장이 원하는 걸 구체적으로 말해주시죠. 최대한 수용하겠습니다.”
“방송국과 신문사 설립을 허가해주세요.”
“기존 방송국과 신문사를 인수하실 생각입니까?”
“신문사는 대한 일보와 단군 일보 주식을 매입해 조만간 인수 절차를 밟을 생각이에요. 그러니 딴죽만 놓지 않으시면 되요. 방송국은 처음부터 새롭게 꾸밀 계획이라 기존 방송사를 인수할 생각은 없어요. 빨리 허가만 내주시면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하죠.”
“흐음... 알겠습니다.”
“북쪽 주민 중 부모가 없거나 부양능력이 없는 15세 미만 아이들을 나진시로 보내주세요. 여성 인력도 함께 보내주시면 좋겠네요.”
“몇 명이나 원하십니까?”
“10만 명이요”
“너무 많습니다.”
“질병과 기아로 목숨이 위태로운 주민이 최소 5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 중 태반이 아이들이에요. 그 아이들 데리고 있어봐야 아까운 목숨만 잃게 될 뿐 재벌들의 배를 채워주진 못할 거예요. 그럴 바엔 인도적인 차원에서 우리에게 넘겨주는 게 이익 아닐까요?”
15세 미만의 아이들을 요구 한건 8대 도시를 차지한 재벌들이 정부 요구에 별다른 반대 없이 응할 수준이란 판단 때문이었다.
제대로 먹지 못해 아프리카 난민보다 상태가 더 나쁜 북쪽 아이들은 태반이 영양실조로 데리고 있어봐야 골치만 아플 뿐 노동력엔 아무 도움이 안됐다.
아이들의 건강을 되찾고 교육시켜 사회 구성원으로 키우려면 엄청난 돈이 들겠지만, 장기적인 투자라 생각하면 결코 손해는 아니었다.
이들이 자라 나진시의 군인과 일꾼이 되고, 나를 추종하는 세력이 되면 그건 돈보다 더 큰 사람을 남기로 장사로 최소 천 배에 달하는 이익이었다.
“늦어도 다음 달까진 보내주셔야 해요.”
“알겠습니다.”
“더는 나진시에 첩자를 보내지 마세요. 지금까지 보낸 것만 해도 충분하다 못해 화가 날 정도에요.”
“.......”
“왜 대답이 없으시죠?”
“전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럼 안전기회부, 기무사, 레드몬 안정청에서 얼마나 많은 첩보원을 나진시에 보냈는지 청와대 초청 전까지 알려주세요. 아셨죠?”
“후유~ 알겠습니다.”
“끝으로 장세룡 장관이 무단으로 나진시를 침입한 일, 왕교언 장관이 회장님을 협박한 사건, 매국노와 사기꾼으로 몰아붙인 일까지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통해 공식적으로 사과해주세요.”
“장세룡 장관 일은 지난 정권 일로 우리와는 무관합니다. 왕교언 장관 역시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독단적으로 움직인 일로 이미 죽었고, 대통령님이 지시한 일이 아닙니다. 매국노와 사기꾼 문제도 정부에서 한일이 아니라 조일, 대동, 합동 일보 등 언론과 방송에서 자기들 멋대로 떠든 일이라 우리와는 무관합니다.”
“장세룡 장관 일은 지난 정권 일이니 그렇다 치죠. 하지만 나머지 사건이 현 정부와 무관하다고 우기는 건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에요. 왕교언 내무부 장관이 지난 정권 장관인가요? 아니면 일본 장관인가요? 삼사 TV 방송사 모두 정권의 나팔수인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자기들 멋대로 우리를 욕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요? 또한, 조일·대동·합동 일보가 관변 언론이라는 건 세 살 먹은 아이도 아는 일이에요. 그런데도 상관이 없다고 하실 건가요?”
“적어도 대통령님은 그 일과 무관합니다.”
“직접 명령만 내리지 않으면 관계가 없다는 뜻이죠?”
“.......”
“정말 너무 하시네요. 선량한 시민을 매국노로 만들어 놓고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면 일이 해결된 건가요?”
“그런 뜻은 아닙니다.”
“뭐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면서 우리와 협력할 생각을 하시다니 놀랍기만 하네요.”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권위와 체면이 중요합니다. 아랫사람의 잘못으로 어른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서는 안 될 일입니다.”
“헌법에 대통령의 권위와 체면을 세워야 한다는 조항이 있나요? 대체 어디에 그 같은 조항이 있는지 알려주세요. 있다면 지난 일을 다시는 문제 삼지 않겠어요.”
아랫사람의 허물을 덮고, 잘못을 책임지진 못할망정 자신이 시킨 일도 부하 직원에게 떠넘기는 놈들의 행태에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이놈들은 평생 책임이란 건 통감해 적도 없이 일이 잘못되면 모든 걸 남의 탓, 국민 탓으로 돌리면서 특권 의식에 젖어 남보다 더 많은 걸 가지고 더 많은 걸 누리려고만 했다.
“대국민 담화문에 왕교언 사건에 연루된 관련자 전원을 사법처리하겠다고 발표하겠습니다. 또한, 언론사에 사과문을 게재하도록 하고 그와 별도로 압수수색과 세무조사 등 강력한 제재를 가하겠습니다.”
“대통령 사과는요?”
“사과는 오찬 때 사석에서 따로 하겠습니다.”
처음부터 대통령이 카메라 앞에 나와 머리 숙여 사과할 거라곤 생각하지도 않아서 그런지 화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진짜 사과 받아야할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강릉에서 죽은 무고한 시민들과 목숨 바쳐 호그질라를 막아낸 군인들이었다.
국가의 잘못된 판단과 늦장대응, 사건은폐 등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에게 대통령이 진정을 갖고 사과해야했다.
하지만 권위와 체면 그리고 허상에 빠진 위정자는 자신을 뽑아준 국민에게 머리 숙여 사과하는 일조차 부끄럽게 생각했다.
“앞에 요구한 사항이 모두 받아들여진다면 회장님이 이 나라를 떠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또한, 엘리트 레드몬이 나타나면 국가의 우환을 덜어드리기 위해 무료로 제거해 드릴 거예요.”
“적극적으로 협조해 달하는 요구사항에 맞지 않습니다.”
“회장님은 청와대에 속한 분이 아니에요.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마세요. 지금 해드리는 것만 해도 미국과 러시아가 매일 찾아와 부탁하는 것과 비교하면 최소 열 배가 넘는 후한 처사에요.”
“그들은 타인이고 우리는 같은 국가, 같은 민족입니다.”
“어이가 없네요. 같은 국가 같은 민족이 열심히 사는 국민을 비방하고 협박합니까? 양심을 가지고 말하세요.”
“크험~”
자기가 말하고도 무안했는지 헛기침으로 어색함을 모면하려 했다. 위정자들은 인생을 참 편하게 살았다.
말하다가 실수하면 헛기침이나 모르쇠, 말 바꾸기, 말 돌리기로 상황을 모면하면 끝이라고 생각하는지 뻔뻔하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미래 재단을 설립해 남쪽에 대형 도서관 스무 개와 종합대학 두 개를 짓고, 일자라 30만 개를 만들어 드리죠. 또한, 나진시에 태능 선수촌에 버금가는 체육시설을 마련해 비인기 종목 선수들을 대거 영입해 국위를 선양하겠어요. 이 정도면 충분한 선물이라 생각하는데, 어쩌시겠어요? 우리 요구조건을 수용하시겠어요? 아니면 끝까지 싸우시겠어요? 원하는 대로 하세요.”
“흐음... 좋습니다. 세분적인 내용은 내일 청와대에서 마저 조율하고 초청은 모레 점심 때로 하겠습니다.”
“알겠어요.”
설전 끝에 적과의 동침에 합의했다. 이로써 우린 정부와 소모적인 충돌을 피하며 빠른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었다.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철옹성을 건설할 시간이 필요했다.
철옹성이 완성되는 순간 더러운 협작꾼들과 밀실에 앉아 구차한 논의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됐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고 했다. 그 날이 올 때까진 참고 인내해야 했다.
“지난 과거는 모두 잊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지요.”
“앞으로 문민정부와 함께 대한민국이 발전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이승구 비서실장과 손을 맞잡고 친한 척 흔들며 어색한 웃음을 짓는 것으로 기나긴 회의가 끝났다.
내일 아침 홍은하 소장과 전략 연구소 직원들이 청와대로 건너가 세부사항을 조율하면 모레 점심 우린 대통령과 함께 거짓된 웃음을 입가에 머금고 멋진 포즈로 카메라 앞에 설 것이다.
그리곤 마음에도 없는 협력을 약속하고, 맛대가리 없는 칼국수 한 그릇을 억지로 먹고 씁쓸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올 것이다.
「칼국수 한 그릇 먹자고 청와대까지 가야 하는 거야? 정말 웃기지도 않네. 이게 정말 코미디지 뭐가 코미디겠어. 하여간 위정자들은 보여주는 거 참 좋아해. 진심도 없으면서. 크크크~」
============================ 작품 후기 ============================
오늘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모두 메르스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