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2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 =========================================================================
172.
MI-26 헤일로가 청송 시민 운동장 옆 헬기 이착륙장에 나타나자 10,000명 넘는 사람이 하늘을 향해 일제히 손을 흔들었다.
급히 출동한 군·경이 외곽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사람들의 진입을 통제하고 있었고, 안쪽인 헬기 이착륙장엔 미래 레드포스 대원들이 일렬로 늘어서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커다란 헬기가 사뿐히 내려앉고 문이 열리자 미래 레드몬 사냥팀이 눈처럼 하얀 풍산개를 앞세우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우와~”
함성과 함께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지며 풍산개와 우리 모습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1,000명이 넘는 군인과 경찰이 고함을 질러대고 경찰봉을 휘두르며 힘으로 밀쳐내지 않았다면 사고가 일어날 만큼 사람들은 레드독 풍산개의 모습에 매료된 상태였다.
레드몬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특권(?)은 능력자에 국한한 것으로 일반인이 살아 움직이는 레드몬을 눈으로 본다는 것은 죽기 직전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헬기를 빠져나와 한성철 팀장의 경호 속에 준비된 차량으로 이동하자 말쑥한 정장 림의 남성 10여 명과 어깨에 별을 3개나 단 군인 그리고 보좌관으로 보이는 대령이 천천히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경북 도지사 이도준입니다.”
“이번에 신설된 레드몬 안전청 청장을 맡은 정반수입니다.”
“반갑습니다. 국군기무사령부를 맡은 사령관 박도식입니다.”
“미래 레드몬 사냥팀을 이끄는 박지홍입니다.”
“청송 군수 송만득입니다. 청송 군민 전체를 대표해 회장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오지나 다름없는 청송까지 오셔서 위험한 레드몬을 잡아주신다는 고마운 말씀에 모든 군민이 바쁜 농사일도 팽개치고 이렇게 다 모였습니다. 아무쪼록 사고 없이 무사히 대업을 완수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군수님과 군민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10,000여 명의 시민 중 절반은 청송 군민들로 엘리트 레드몬을 잡아준다는 말에 학교까지 임시 휴업한 채 모두 몰려나왔다.
경상북도 중동부에 있는 청송은 고추와 사과가 유명한 고장으로 동·남·북부가 모두 산악 지형으로 매우 천박한 곳이었다.
1년 내내 산밖에는 볼 것이 없는 청송은 군민체육대회가 아니면 이렇다 할 행사도 없는 심심하고 무료한 고장이었다.
그런 조용한 동네에 외지에서 수천 명이 몰려들고, 방송국 카메라에 헬기까지 나타나자 축제가 따로 없었다.
“회장님! 바쁘시더라도 잠시만 시간을 내주십시오. 10분이면 됩니다.”
“그러시죠.”
오늘 중으로 삵을 잡고 집에 돌아가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그렇다고 10분도 안 된다고 말할 순 없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옆 대기실로 들어가자 이도준 경북 도지사, 정반수 레드몬 안전청 청장, 박도식 기무사령관만 따라 들어오고 나머지는 문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보조사냥꾼을 운영하지 않는다는 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농담이라 생각했지 없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하하하~”
“.......”
정반수 레드몬 안정청장의 헛소리에 입을 열지 않자 뻘쭘했는지 박도식 중장이 은비를 아는 체하며 말을 걸었다.
“은비양! 잘 지내고 계시죠? 전에 최광석 사장님과 집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까.”
“죄송해요. 기억이 없네요.”
“그럴 수도 있죠.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라 기억을 못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하하하하~”
“.......”
“최광석 사장님과는 오래전부터 잘 알고 지낸 사이입니다. 미래정밀도 군수업체나 다름없어 종종 만나 뵙고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도 전화를 드려 이것저것 물어보며 조언을 구했습니다.”
“아아~ 그러셨군요.”
상아를 쳐다보자 고개를 살짝 흔들어 사실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하여간 이것들은 입만 열면 구라를 쳤다.
미래 정밀에서 전차와 장갑차, 항공기, 전투함 등 무기에 들어가는 정밀 부품을 생산하는 건 맞지만, 부패한 정권이 눈엣가시 같은 미래 정밀 제품을 써봐야 얼마나 쓰겠는가?
질 좋고(?) 값비싼 미국산 부품을 국민의 혈세로 얼마든지 펑펑 살 수 있는데, 값싸고 우수한 미래 정밀 부품을 쓸 일이 없었다.
“무슨 일로 보자고 하신 겁니까?”
“저희가 이렇게 회장님을 모신 건 부탁할 일이 있어서 모셨습니다.”
“부탁이라니요?”
“사냥이 끝나면 정부와의 관계를 생각해 조금 유화적인 메시지를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박도식 기무사령관은 만면에 어색한 웃음을 가득 띤 채 최대한 친근한 표정을 짓기 위해 얼굴을 마구 구겨댔다.
박도식 사령관이 3성 장성 장군이지만, 이런 말을 할 위치는 아니었다. 청송으로 이동하는 사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변화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한숙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위성전화기를 꺼내 들고 구석진 자리로 이동하며 빠르게 번호를 눌러댔다.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죠. 저는 기무사령관님이 무슨 말씀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대통령각하께서 이번 일로 매우 곤혹스러워 하십니다.”
“우리가 대통령을 불편하게 했다는 말입니까?”
“그런 뜻이 아닙니다. 대통령께선 회장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동안 관계가 소원했던 건 대한민국을 좀 먹던 군사정권의 잔재를 털어내고 국민을 위한 문민정권 시대를 열어가느라 바빠서였지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그래서요?”
“대한민국은 미국의 영원한 우방국으로 회장님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부디 국가와 국민을 위해 넓은 아량을 베풀어주십시오.”
박도식이 일어나 허리를 숙이자 이도준과 정반수도 따라 일어나 머리가 땅에 닿을 듯 깊숙이 숙였다.
이들의 행동은 진심이 아닌 정치적 이유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지만, 밖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눈이 많아 어쩔 수 없이 나도 머리를 숙여야 했다.
빌어먹을 나라는 나이가 벼슬이자 깡패로 잘못이 없어도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욕을 먹는 나라라 마음이 없어도 예의는 무조건 지켜야 했다.
“우리가 도착하기 30분 전 빌 클린턴 대통령이 청와대에 전화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굽실거리는 거야?”
“네, 데이비드 액설로드 특사의 말론 우리를 건드릴 경우 한미 안보에 심각한 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대요. 앞으로 함부로 못 할 거라고 큰소리를 땅땅 치던데요.”
“미국 대통령 말 한마디에 태도가 180도 달라져 마음에도 없는 사과와 좋은 관계 운운하는 거야?”
“이번 정권도 그전 정권과 같이 미국에 목을 맨 정권이라 미국 대통령 말이라면 꼼짝 못하죠. 정말 창피해 죽겠어요.”
“젠장!”
북한이 사라진 지 30년이 넘었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미국의 영향 아래 놓인 채 기침만 해도 벌벌 기었다.
사대주의는 아무리 뽑아도 사라지지 않는 잡초인지 아니면 위정자들에겐 생활의 일부분인지 20세기에도 여전히 기승을 부리며 친일파, 친미파란 이름으로 국민의 등골을 뽑아먹었다.
여당인 자유당을 보면 그 실상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일로 미국 상원의원과 사진 찍기에 열광하고, 다국적 기업을 위해 일하며, 일본 자위대기념일과 일왕 생일파티 참석해 지랄염병을하는 등 국민 의식 수준은 나날이 향상하는데, 위정자들의 수준은 점점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그럼 박지홍 공대장님이 허락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제가 누구에게 허락하고 말고 할 처지가 아니라서 그런 말씀은 부담스럽습니다. 대신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저와 조금이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면 지난날과 같은 흑색선전은 다신 없어야할 것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전 실천이 따르지 않는 공염불을 극도로 혐오합니다.”
“그럼요.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없도록 재발 방지를 약속해야죠.”
“좋은 결과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럼 바빠서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문으로 다가가자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청송 군수 송만득이 재빨리 문을 열어주었다.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뒤 준비된 차량에 탑승했다. 바리케이드가 열리자 좌우로 길게 늘어선 군인들과 경찰들이 몸으로 사람들을 막아 길을 만들어주었다.
선두에 선 경찰차가 출발하자 미래 레드포스 대원들이 탑승한 험비가 앞뒤에서 우리가 탄 험비와 풍산개를 태운 트럭을 보호하며 달렸다.
그 뒤로 군인들을 태운 트럭과 지붕에 카메라를 장착한 방송차량이 줄줄이 따라붙었고, 나진시부터 따라온 헬기들도 그사이 연료를 채웠는지 상공에서 우리를 따라왔다.
“카퍼레이드가 따로 없네. 얼굴 내밀고 손이라도 흔들어줘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언니가 먼저 하세요. 다음에 제가 할게요.”
“어쭈구리! 이제 언니를 놀리네.”
“헤헤헤~”
“아영아! 이거 냄새나지 않냐?”
“무슨 냄새요?”
“청송 군수가 주민들 자발적으로 모였다고 했잖아. 근데 갑자기 우리에게 우호적으로 변한 이유가 미국 때문이잖아. 그럼 이들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동원했다고 봐야지?”
“상아야! 은비 언니 말 들었지?”
“응, 언니 말씀처럼 동원한 사람들이에요. 그래도 절반은 타지에서 자발적으로 온 사람들이고, 주민 중에도 정말 우리를 환영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자발적으로 온 사람들은 우리 아기들 보러왔나?”
“그럴 수도 있고, 우리를 보러 왔을 수도 있어요. 많진 않지만 우리에게 호의적인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은비와 아영, 상아가 창문을 열고 좌우에 길게 늘어서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자 시민들도 태극기를 흔들며 열렬히 환호했다.
상아의 말처럼 서울과 대전, 광주, 부산에서 눈썹이 휘날리게 달려온 사람이 5,000명이 넘었다.
평소 능력자와 레드몬에 관심이 많던 사람들로 우리 모습을 한번 보겠다고 일도 팽개치고 달려온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잘못한 것을 바로 잡으라는 뜻을 이해했을까?”
“글쎄? 이해했다고 해도 곧이곧대로 전달하진 못할 거야. 그랬다가는 바로 잘릴걸.”
“그럴 줄 알았어. 혹시나 해서 말해본 거야.”
“우리나라 어디든 완벽한 수직구조잖아.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사실을 말하거나 직언을 하면 대든다고 생각해 살아남질 못해.”
“흐음... 앞으로 정부에서 어떻게 나올 것 같아?”
“미국에서 압력은 넣은 만큼 당분간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겠지.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이 아니라 언제 바뀔지 몰라. 소리장도라고 했어. 경계심을 더 높여야 해.”
웃음 속에 칼날을 품었다는 소리장도(笑裏藏刀)는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음험한 생각을 품고 남을 해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당나라 태종(太宗) 때 이의부(李義府)는 아부하는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 높은 벼슬을 지낸 인물로 평소 온화하고 공손한 성격으로 사람들과 대화할 때 항상 미소를 띠며 좋은 인상을 주었다.
하지만 속이 좁고 음험한 사람으로 요직과 권세를 이용해 사람들을 이간질하고, 자기 뜻에 조금이라도 거스르면 살려두지 않았다.
이런 이의부의 모습은 국민 앞에선 만면에 웃음을 띠고 뭐든 다해줄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상은 국민을 쥐어짜지 못해 발악하는 대한민국의 위정자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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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하루되세요.
(모두 메르스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