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62 계약(契約) =========================================================================
162.
[역시 금 의원은 믿을 수가 있어요. 그럼 편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미래 레드몬 박지홍이라고 알고 계시죠?]
[나진시인가 뭔가에서 말도 안 되는 소란을 피우고 있는 어린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습니다.]
[실력도 출신도 모두 미천한 놈을 존귀하신 실장님께서 왜 관심을 가지십니까? 워낙 개망나니라 조선을 병들게 하고 대일본제국을 이롭게 하는 놈이지만, 워낙 버러지 같은 놈이라 신경 쓸 가치도 없는데...]
에비스 겐이치 실장은 순간 욕이 튀어나오려는 걸 입술에 피가 나도록 질끈 깨물어 억지로 참아냈다.
엄청난 돈을 들여 4선 국회의원에 여당 최고위원, 황국신민회 회장까지 만들어줬고, 최근에는 차기 대통령 후보감이라는 수식어까지 달게 해줬는데, 나이가 들고 배에 기름이 끼자 이젠 젊은 날의 약삭빠른 모습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여당 내에서도 박지홍을 회유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는데, 최고위원이란 놈이 돌아가는 상황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지금은 다른 대안이 없어 무조건 참아야 했다. 대안만 있었다면 병신 같은 새끼를 단칼에 제거하고 똘똘한 놈을 그 자리에 앉히고 싶었다.
하지만 여당 최고위원에 대통령 후보감이라는 수식어를 달려면 최소 3선 국회의원은 돼 줘야했다.
그래야 계파라는 걸 만들어 이권에 걸린 자리도 차지하고 초선, 2선 의원들도 끌어모을 수 있었다.
재작년까지 잘 나가던 유망주 중 3명이 지난해 대한당과 붙어 모두 낙선하며 세력 확장과 물갈이에 차질을 빚고 있었다.
이런 마당에 마음에 안 든다고 금송무를 잘라버리면 총알받이로 사용할 친일세력이 확 줄어들어 당분간은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끌고 가야 했다.
[하아~ 알고 있군요. 현재 나진시에 각국 투자단이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 대 일본제국도 미쓰비시 상사 이름으로 투자단을 파견했습니다.]
[아아아~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미쓰비시 상사가 나진시에 투자단을 파견했다는 소리를 듣고 왜 그런 짓을 했는지 걱정이 많았습니다. 세계적인 기업이자 일본의 상징인 미쓰비시 상사가 어촌만도 못한 나진시에 투자한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지만, 자칫 박지홍의 농간에 빠져 손해를 보면 어쩌나 밤잠을 못 이뤘습니다. 사실은 이 문제를 실장님께 보고 드려야 하는 게 아닌가 수십 번도 더 고민했습니다.]
[으드득~]
[어디 불편하신 곳이 있으신지...]
[후유~ 아닙니다. 며칠 전 내무부 왕교언 장관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말 아까운 인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와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로 술도 자주 마시며 대한민국과 일본의 미래를 같이 고민하던 속 깊은 친구였는데... 그런 인재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다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늦었지만 친구분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실장님! 실장님이 명복을 빌어준 걸 알면 그 친구도 저승에서도 기뻐할 겁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에비스 겐이치 실장의 이마엔 굵은 핏줄이 돋아났다. 호소카와 총리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전화기를 집어 던지고 욕을 퍼부었을 것이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에비스 겐이치 실장은 딸린 식구가 5명이나 됐다.
첫째 아들은 동경 대학에, 둘째 아들은 교토 대학에 다녔고, 셋째 딸은 내년에 와세다 대학 입학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또한, 아내는 재작년 태어난 늦둥이를 보느라 온종일 집안에 묶여있었다. 이렇듯 다섯 식구가 에비스 실장만 쳐다보는 실정이라 더럽고 치사해도 자리를 지켜야 했다.
내각정보조사 실장이면 엄청난 권력자로 이래저래 남는 게 많았지만, 결국엔 월급쟁이라 자리에서 쫓겨나면 좋은 시절도 끝이었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월급쟁이는 다를 것이 없어 싫든 좋든 끝까지 회사에 남아 있어야지 나오는 순간 갈 곳 없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였다.
[우리 정보에 의하면 내무부 장관 왕교언은 나진시에 다녀온 다음 날 새벽 괴한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저.저.정말입니까? 심장마비가 아니라 타살이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왕교언 장관이 독단적으로 박지홍을 만났을 리는 없고 분명 청와대 지시로 나진시에 다녀온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게 영 석연치가 않습니다.]
[보나마나 박지홍 그놈이 죽였을 겁니다. 왕교언 장관이 비밀을 캐내자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죽인 게 틀림없습니다.]
[우리도 그쪽을 무게를 싣고 있습니다. 세상에 알려지면 안 되는 비밀스러운 것을 누구보다 유능하고 명석한 왕교언 장관이 알아내자 박지홍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 동석한 측근 삼인방과 함께 모두 죽여 입을 막을 게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한날한시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자살과 사고로 죽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런 죽일 놈! 이런 후레자식!]
[만약 그렇다면 나진시에 있는 우리 측 요원들과 미쓰비시 투자단도 목숨을 보장받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천황폐하와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위해 목숨을 걸고 박지홍의 비밀을 캐기 위해 나진시에 들어간 영웅들입니다. 그런 영웅들을 죽게 내버려둔다면 그건 대일본제국의 수치입니다. 제가 믿을 사람은 금 위원이 밖에 없습니다.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기필코 놈의 죄를 밝혀내 죽은 왕교언 장관의 명예를 되찾고, 위험에 빠진 우리 대일본제국의 영웅들을 구하겠습니다.]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덴노 헤이카 반자이~ 반자이~ 반자이~]
에비스 겐이치 실장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금송무의 천황폐하 만세 소리가 영 미덥지가 않았다.
머리를 조금만 굴려도 의심 가는 부분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왜 죽였는지 명확한 이유도 없었고, 어떻게 죽였는지도 모르고, 도와달라고만 했지 어떤 식으로 도와달라는 구체적인 설명도 없었다.
그런데도 금송무는 믿을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말에 광분해 천황폐하 만세를 연창했다.
이건 정상적인 사람은 도저히 취할 수 없는 행동으로 금송무의 모습은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멀쩡한 정신이 박힌 놈이 대한민국을 수탈하고 분단국가로 만든 일본을 찬양하며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칠 일은 없었다.
적어도 나사가 10개 이상 빠지고 대가리에 총을 서너 방은 맞아야 침략 국가를 조국이라 믿고 찬양할 수 있다.
“이번 작전은 박지홍과 한국 정부 사이를 이간질해 완전히 갈라놓기만 하면 되는 일입니다. 임무의 특성을 생각하면 금송무가 자장 적임자입니다.”
“그렇긴 한데...”
“천방지축 날뛰는 금송무가 이번 일을 맡은 이상 박지홍과 한국 정부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것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는 짓을 보면 잘할 수 있을지 미덥지가 않아서 그래.”
“금송무 밑에 지난해 비례대표로 당선된 라운경이란 초선의원이 있습니다. 법대를 다닐 때부터 매년 자위대 창설기념일을 빼놓지 않고 참석한 골수 친일파로 힘을 실어주면 금송무의 모자란 부분을 채울 수 있을 겁니다.”
“확실히 쓸만한 인재인가?”
“머리도 잘 돌아가고 충성심도 강한 인재입니다. 아직 경력이 미천해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지만, 우리가 도와주면 금송무를 대신할 수 있는 훌륭한 재목이 될 것입니다.”
“그럼 라운경에게 힘을 실어주게.”
“알겠습니다.”
자신의 오른팔이자 내각정보조사실 국제부 부장인 무카이 오사무의 말을 듣자 조금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둘 다 크게 다르진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워낙에 쉬운 일이라 실패할 확률은 제로였다.
반자이를 외치는 금송무가 박지홍을 맹비난해 발끈하면 절반 이상 성공이었고, 나진시에 쳐들어가 한바탕 분탕질이라도 치면 100% 성공이었다.
“이번 작전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금송무의 입에 일본 이름이 들어가선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네. 우리는 금송무가 박지홍을 공격하면 언론을 통해 한국 정부를 끝까지 물고 늘어져 둘 사이를 완벽히 갈라놓아야 하네. 잊지 말게.”
“믿고 맡겨주십시오. 기필코 작전을 성공하겠습니다.”
무카이 부장에게 작전을 넘긴 에비치 실장은 박지홍의 마음을 사로잡을 선물을 고른 다음, 금송무가 이번 일로 정치권에서 멀어질 때를 대비해 잠시 써먹을 카드를 준비했다.
라운경이 쓸만한 재목이라고 해도 아직은 햇병아리라 금송무를 대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걱정할 게 없는 게 자유당과 언론, 사학, 법조계 등엔 차고 넘치도록 친일파가 많았다.
금송무 만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제지만, 당장 쓰고 버릴 놈들은 차고도 넘쳤다.
이런 놈들로 돌려막기를 하며 그사이 인재를 육성하면 되는 일이었다. 잠시 영향력이 줄어들긴 하겠지만, 워낙 식민사관이 뿌리 깊이 박혀 주도권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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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우리 집 거실에 첩자가 다섯 명이나 숨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네.”
“철저히 조사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처벌해 주십시오.”
“죄송해요. 모두 제 불찰이에요. 제가 제대로 확인하지 못해 이런 일이 발생했어요.”
“집안일은 내 일인데 신경 쓰지 못한 내 잘못이야.”
“진실의 눈으로 알아냈어야 하는데 그걸 못한 제 잘못이에요.”
“그만! 모든 잘못은 최종 결정권자인 나에게 있습니다. 다시는 이 일을 거론하지 마세요.”
강승원 국장에게 메이드들을 조사하라고 지시한지 일주일 만에 5명의 첩자를 잡아냈다.
3명은 중국, 2명은 일본에 포섭된 상태로 모두 저택에 일하기 직전 거액의 유혹에 빠져 정보를 빼돌리게 됐다.
이 일로 강승원 국장은 보안 책임자로서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원했고, 한숙은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잘못을 빌었다.
소연은 집안 살림을 맡은 책임자로, 상아는 첩자를 알아내는 못했다는 이유로 내게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책임을 따지면 집안의 가장이자 최고 결정권자인 내 책임 가장 커 이번에도 역시 죄를 내게 묻기로 했다.
지난번에는 한 달간 수영장 청소로 죗값을 치렀다. 이번엔 죄질이 더욱 나빠 항구 주변을 한 달간 청소하기로 했다.
“가장 오래된 첩자가 63일이고 가장 짧은 첩자는 32일로 다행히 기간이 짧고 접근 가능한 지역이 많지 않아 중요한 정보가 넘어가진 않았습니다.”
“일상적인 내용을 보고하고도 한 달에 1,000만 원에서 3,000만 원까지 받는다는 게 이해가 안 됩니다.”
“미끼라고 보시면 됩니다. 처음엔 아주 간단한 일로 거액을 안겨줘 쉽게 돈을 벌 수 있다고 유혹해 빠져나올 수 없게 만든 후 고급 정보를 요구하는 수법입니다.”
그동안 이들이 첩자인 걸 몰랐던 건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된 것도 있었고, 눈을 마주칠 일도 말을 섞을 일도 거의 없어서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들이 가진 마음 상태 때문에 첩자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이들은 자신의 행동에 별다른 죄책감이 없었다.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일을 보고하는 것이라 우리에게 피해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 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껏 들떠 있었다. 미안함과 걱정이 컸다면 행동에 이상함을 느껴 눈치 챌 수도 있겠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을 의심할 사람은 없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치고도 이상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겨우 느낀 게 지나치게 예쁘고 몸매가 아름답다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 다행인건 나머지 인원은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들마저 문제가 있었다면 청소와 빨래를 아내들이 직접 해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었다.
============================ 작품 후기 ============================
관심과 성원에 감사합니다.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모두 메르스 조심하세요. 걸리면... 큰일 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