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7 레드타이거 =========================================================================
97.
레드타이거의 포효에 노출된 공대원들은 한동안 심한 무기력증과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레드타이거의 포효 속엔 이상 상태를 유발하는 강력한 살기가 깃들어 있어 스킬 저항력이 낮을 경우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저항력은 멘탈포스와 체력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항목으로 멘탈포스가 높은 소연은 일주일 만에 포효의 후유증을 털어냈고, 멘탈포스와 체력 둘 다 낮은 조은영은 두 달 넘게 침대에 너부러져 시체놀이를 해야 했다.
힘든 와중에도 아영이 매일 정화수를 만들어줬기에 치료 기간이 많이 줄어들지, 만약 아영이 없었다면 조은영은 최소 1년은 시름시름 앓을 수도 있었다.
나 역시 공대원들과 마찬가지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서 바깥출입이 최대한 자제하며 치료에 전념했다.
바로 코앞에서 살기에 노출돼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엘리트 레드몬에게 후유증이 남을 만큼 허약하진 않았다.
내 상처는 레드타이거에게 입은 상처가 아니라 흡기를 무분별하게 사용해 생긴 부작용이었다.
다른 생명체의 생명력을 과다하게 흡입해 몸에 부하가 걸려 생긴 병으로 심한 두통과 몸살을 앓고 있었다.
“오뉴월에 개도 안 걸린다는 감기를 상급 능력자인 오빠가 앓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어. 이건 해외 토픽감이야.”
“흐흐~ 이제 좀 살만해?”
“응! 아침 되니까 좋아졌어. 어제저녁까진 힘이 하나도 없고 머리도 아파 죽는 줄 알았어.”
“아영이에게 고맙다고 해. 아영이 아니었으면 열흘이 아니라 최소 삼 개월은 고생했을 거야.”
“안 그래도 몇 번이나 말했어. 고맙다고.”
“잘했어.”
“자기 몸도 아파 움직이기도 힘들 텐데 매일같이 정화수 만들어 나눠주고 동생이지만 미안해 죽는 줄 알았어.”
“책임감이 강해서 그래.”
“맞아! 아영이도 그렇고 언니도 그렇고 정말 대단해! 난 힘들고 머리가 아파 꼼짝도 못 하는데, 언니하고 아영이는 웃는 얼굴로 쉬지도 않고 일했어. 난 나이만 먹었지 철이 없는 것 같아. 하아~”
“이번에 철 좀 들었어?”
“응! 근데... 얼마나 갈지 모르겠어. 난 왜 이런 거지? 머릿속에 지우개가 들었나봐! 앞으로 그러지 말자고 다짐하고 다짐해도 금방 잊어버려! 미치겠어!”
“하하하~”
소연과 아영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만큼 책임감과 사명감이 투철했다. 소연은 나선시 개발에 관련된 모든 일을 맡아 처리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나와 동생들에게 소홀함이 없었다.
소소한 것 하나까지 일일이 신경 쓰며 항상 미소로 집안 분위기를 밝고 건강하게 이끌었다.
아영은 동생들을 위해 고난을 마다치 않은 투철한 희생정신의 소유자로 나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고 소연과 은비에게도 친언니 이상으로 정성을 다했다.
또한, 엄청난 노력파로 지난번 여우꼬리로 만들어준 유성추를 수련하며 여기저기 긁히고 멍들어 성한 곳이 없었지만, 아픈 내색도 없이 하루도 쉬지 않고 유성추를 돌리며 자신의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번에도 아픈 몸을 이끌고 다친 공대원들을 위해 정화수를 만드는 등 언제나 조용히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숨은 일꾼이었다.
“그건 태어날 때부터 각자 가지고 태어나는 본성이라 쉽게 바뀌지 않아. 너무 실망할 거 없어.”
“사람은 태생보다 환경이 더 중요해. 난 너무 곱게 자라서 그런 거야.”
“태생, 환경, 혈액형 다 연관이 있겠지. 근데 그거 알아. 소연이하고 아영이는 A형이고, 넌 O형이야. 혈액형만 보고 성격을 판단할 순 없지만, 우린 기가 막히게 잘 맞는 것 같아.”
“뭐가 맞아?”
“A형은 배려심과 인내심이 강한 성격으로 소연이하고 아영이 딱 맞는 스타일이야. O형은 긍정적이고 적극적이지만, 인내심이 부족하고 산만한 성격으로 바로 너하고 일치하는 성격이고!”
“내가 산만하고 인내심이 부족해?”
“응!”
“그런 오빠는 무슨 형이야?”
“나? AB형!”
“헉...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그. 그. 그. AB형?”
“응! 이제 알았으면 조심해! 나 똘아이 기질이 다분해. 열 받으면 확 들이받는 수가 있어.”
“헉...”
혈액형은 성격을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지표지만 절대적인 건 아니었다. 누구 말처럼 A형 같은 B형도 있고, AB형 같지 않은 AB도 있었다.
대체적인 부류를 나눠놓은 것이라 자신에게 맞을 수도 있고, 맞지 않을 수도 있고, 일부만 맞을 수도 있는 등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였다.
그래도 우린 대체적으로 맞는 편으로 소연과 아영은 전형적인 A형이었고, 은비는 덜렁대는 O형이었다.
그리고 난 AB형으로 거슬리는 거 싫어하고, 참견하는 것도 싫어하고, 쓴웃음이 많고, 혼자 고민하면서 끙끙 앓고, 가끔은 제멋대로였다.
하지만 이 역시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는 성격으로 조금 더 표출되고, 조금 덜 표출될 뿐 특별할 건 없었다.
“이번 레드주얼은 붉은 안개밖에 없네.”
“스킬이 아니라 버프라서 그런가봐.”
“버프?”
“응! 이번 염화주얼은 능력치를 올려주는 버프가 내장돼 있어.”
“어떤 능력치를 올려주는 건데?”
“힘, 민첩, 체력, 정신력 네 가지 능력치를 모두 올라줘.”
“와! 정말?”
“응! 근데 레드타이거가 사용할 때만큼 많이 오르진 않아. 놈이 염화를 사용했을 땐 두 배 이상 강력해졌는데, 이건 고작 30%밖에 안 올라.”
“30% 어디야!! 그것만 있어도 최상급 피지컬리스트에 육박하잖아. 멘탈포스도 상급 직전이고.”
“그렇긴 하지. 그래도 좀 아쉽네. 최소 두 배는 기대했는데.”
“욕심부리지 마! 레드주얼은 앞으로 계속 나올 거고 모으다 보면 더 좋은 것도 있을 거야. 그리고 계속 모이면 최상급 더 나아가서 특급 능력자가 될 수도 있잖아.”
레드주얼은 개수에 상관없이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어 구할 수만 있다면 특급 능력자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레드주얼 같은 기물에 의존하게 되면 실력 향상에 소홀할 수 있어 장기적으론 복이 아니라 화가 될 수도 있었다.
“이번에 얻은 염화주얼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어. 레드주얼 때문에 훈련을 게을리하면 어쩌나 하고.”
“넌 신외지물보다 자신의 능력을 더 중요시하잖아.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야. 그건 내가 보증할 수 있어.”
“사람 일이란 아무도 모르는 거야. 부지런한 사람도 한순간에 게으름을 피우고, 검소했던 사람도 사치스럽게 변할 수 있으니까.”
“만약 그런 일이 있으면 내가 옆에서 조언해 줄게. 걱정하지 마!”
“그래! 고마워!”
모든 능력치를 30% 향상해주는 염화주얼은 몸속에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효과를 볼 수 있어 반영구적이라 말할 수 있었다.
번개주얼과 냉기주얼은 포스를 주입해야 스킬이 구동됐지만, 염화주얼은 몸과 접촉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포스가 흘러들어가 능력치를 향상해줬다.
포스 소모량도 적어 소연에게 양보했지만, 퍼센트로 능력치가 올라가 내가 사용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는 소연의 주장에 밀려 이번에도 내가 사용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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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1월 10일
공사를 시작한 지 4개월 만에 나선시를 보호할 방어벽 공사가 끝이 났다. 아직 후창동과 멸리동이 남아있어 공사가 끝났다고 할 순 없지만, 그곳은 농지라 급히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나선시는 아직 주민이 한 명도 없어 식량 생산을 서두를 필요도 없었고, 해안지대라고 해도 북쪽 끝이라 겨울엔 매서운 한풍이 몰아쳐 공사를 이어가기 어려웠다.
따뜻한 봄이 올 때까진 부서진 건물을 철거하고 도로를 내드는 등 나선시 개발에 치중할 생각이었다.
방어벽 공사는 초단기간에 이룩한 대단한 성과지만, 비용적인 측면을 생각하면 엄청난 손실이었다.
단기간에 공사를 끝내기 위해 3배나 많은 인원과 장비를 투입하며 엄청난 대가를 지급해야 했다.
하지만 인명 피해를 줄이고 빠르게 터전을 확보한다는 의미를 생각하면 장기적으론 이익이었다.
“집들이를 꼭 오늘 해야 하는 거야? 좀 더 있다 하면 안 돼?”
“더 늦추면 안 된다고 성화야. 어쩔 수 없어.”
“조은영씨 아직 몸도 안 좋잖아.”
“본인이 괜찮다는 걸 어떻게 해! 그냥 해야지.”
“그 몸으로 술을 마시겠다고? 대단하다.”
정한숙은 입주한 지 열흘 만에 요리사 1명과 주방보조 3명 그리고 하우스키퍼 10명을 구해왔다.
요리사는 20대 후반 여성으로 한식, 중식, 양식까지 마스터한 유학파로, KM 정근욱 회장의 전담 요리사를 정한숙이 억지로 뺏어온 것이었다.
주방보조 역시 요리사와 함께 세트로 뺏어온 것이었고, 하우스키퍼는 메이드 교육을 받은 전문직 여성 중 20대 중반으로 엄선해서 골라왔다.
이렇게 사람을 구해주곤 집들이를 하라고 매일 성화였다. 다친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성화를 부리는 정한숙도 이해가 안 됐지만, 가장 회복이 늘린 조은영이 한패가 된 거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몸은 어떠세요?”
“이제 괜찮습니다.”
“병문안도 못 오게 해서 걱정 많이 했어요.”
“대단한 게 아니라서 그랬습니다.”
“대단하지 않다니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상급 능력자가 일주일이나 누워있는데, 그게 별거 아니라니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좀 어지러워서 그런 거지 몸에 이상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다행이고요.”
정한숙은 나를 보자마자 옆에 달라붙어 몸은 괜찮은지, 불편 없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동안 수차례 병문안을 오겠다는 걸 내가 막자 걱정이 많았는지 나보다 얼굴이 더 핼쑥했다.
정한숙은 내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자 얼굴이 사색이 되어 집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레드포스 대원들의 제지로 집에 들어올 수 없었고 이후에도 안정이 취해야 한다는 이유로 만나주지 않아 애간장을 태웠다.
그러고 보면 소연을 조른 이유도 집들이가 목적이 아니라 나를 보고 싶어 핑계를 댄 것 같았다.
“이렇게 얼굴을 보니 이제 마음이 놓이네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뭘 했다고 감사를 받아요. 도움도 못 드렸는데.”
“하아~”
걱정 가득한 정한숙의 눈을 보자 깊은 한숨이 나왔다. 내 어떤 면이 마음에 들어 이렇게 정성을 쏟는지 이해 안 됐다.
난 정한숙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 것조차 싫었다. 말만 해도 기분이 나쁘고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걱정하고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에 감동하는 모습을 보며 계속 미워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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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