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8 정화(淨化) =========================================================================
78. 정화(淨化)
“힘들수록 마음을 가다듬고 내 주변에 있는 사물을 느끼려 노력해봐. 몸이 지칠수록 감각은 더욱 또렷해지니까.”
“후우~~~”
눈은 감은 채 숨을 끝까지 내쉬고 명상에 들어갔다. 기감을 사용해 들여다본 소연과 은비, 아영은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기감력은 나만의 고유 스킬이었다. 누구나 느낄 수 있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능력이지만, 난 그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경지까지 끌어올려 나만의 특기로 만들었다.
고유 스킬은 남에게 알려준다고 배울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가령 불을 다루는 멘탈리스트에게 요령을 배운다고 피지컬리스트가 파이어볼(Fireball를 사용할 순 없었다.
듀얼 리스트인 나조차 소연의 홀드 스킬과 은비의 에너지 파동을 배우는 건 고사하고 흉내조차 낼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기감력을 소연과 은비, 아영에게 가르치는 건 누구나 가지고 있고, 누구나 배울 수 있는 인간의 원초적 능력이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해서 기감력은 배우는 게 아니라 자신의 내면 안에 잠들어 있는 능력을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기감력을 나만이 가진 고유 스킬이 아니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공통 스킬이라 생각했다.
“우웅웅웅웅웅~”
집중 명상을 시작한 지 30분쯤 지나자 아영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 아영을 중심으로 대자연의 기운이 몰려들며 미세한 떨림이 생겨났다.
소연과 은비도 포스의 급격한 변화를 느꼈는지 눈을 뜨고 아영을 바라봤다. 아영의 피부로 포스가 스며들 듯 세차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2시간쯤 지나자 거세게 몰려들던 포스가 서서히 평온을 찾자 아영이 기지개를 켜듯 몸을 쭉 펴며 눈을 떴다.
“아함~ 깜빡 잠이 들었었나 봐요. 오빠 죄송해요!”
“괜찮아! 좋은 꿈 꿨어?”
“따뜻한 기운이 몸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꿨어요. 정말 신기한 꿈이었어요.”
“기분은 어때?”
“오빠가 안아주는 것처럼 포근하고 좋았어요. 따뜻해서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아영은 방금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는지 깜빡 잠이 들었다고만 생각했다. 나도 회양에서 작은 깨달음을 얻었을 때 잠깐 졸았다고 생각했었다.
“아영아! 눈을 감고 주변에 느껴지는 게 있나 확인해봐.”
“네!”
눈을 꼭 감은 아영이 정신을 집중하자 한 가닥 실 같은 기가 뻗어 나와 주변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 오빠와 언니들이 손으로 만져지는 것처럼 느껴져요.”
“눈으로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느껴져?”
“그 정도는 아니고요. 대략적인 형태만 느껴져요.”
“최대한 멀리까지 느껴봐.”
“음... 강아지들이 있는 울타리가 보여요.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아요. 정말 신기해요.”
아영이 기감력을 사용해 느낄 수 있는 거리는 대략 30m로 사물의 형태도 눈으로 보는 것처럼 명확하지 않고 겉만 대충 확인할 수 있는 걸음마 수준이었다.
거리도 매우 짧고 사물의 상태도 기감할 수 없는 형편없는 수준이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걸음마를 뗐다는 건 노력하면 뛸 수 있다는 뜻으로 창공을 나는 독수리도 태어나자마자 하늘을 나는 건 아니었다.
다리가 없고 날개가 없는 게 문제였지, 걸을 수 있고, 날 수 있다면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었다.
“아영아! 축하해!”
“아영이 멋지다. 완전 천재야! 우리하고 차원이 달라!”
“아니에요. 오빠와 언니들이 도와주셔서 가능했던 거예요.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1992년 6월 12일
윤아영 : 힘-21 민첩-20 체력-33 총합-74 멘탈포스-135
기감력을 얻으며 2주일 만에 피지컬 수치가 두 배로 향상했고, 멘탈포스는 무려 세 배나 향상하며 단번에 하급 멘탈리스트가 되었다.
“포스를 손에 모아봐. 기감력 말고 느껴지는 게 있을 거야.”
아영이 포스를 모으자 손이 초록색으로 빛났다. 대략적이긴 하지만 포스 색깔로 스킬 계열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영과 같은 초록색은 치유 계열을 뜻했고, 검은색은 정신 계열, 붉은색은 화염 계열, 하늘색은 냉기 계열, 흰색은 무속성 계열, 은색은 전기 계열, 노란색은 실드 계열, 파란색은 바람 계열과 샤프니스 계열 등을 뜻했고, 이외에도 다양한 색상이 있었다.
하지만 색깔이 같다고 효과도 같진 않아 색깔만으로 상대의 스킬을 판단하는 건 매우 어리석은 짓이었다.
“오빠 몸에 시험 해봐도 돼요?”
“그래! 걱정하지 말고 해!”
아영의 손을 떠난 초록색 빛이 몸에 닿는 순간 시원한 느낌과 함께 몸이 상쾌해졌다.
10초 정도 지나자 피로가 서서히 풀리며 몸에 활력까지 돌았다. 30초간 몸을 감쌌던 초록빛이 사라지자 무언가 잃어버린 것 같은 허전한 마음마저 들었다.
“아영아! 소연과 은비에게도 스킬을 사용해봐.”
“네! 오빠!”
소연과 은비 역시 생경하지만 황홀하고 놀라운 느낌에 눈을 꼭 감고 초록빛에 폭 빠져들었다.
“아영이 힐러였어?”
“제가요? 설마요! 제가 어떻게 힐러가 될 수 있어요. 말도 안 돼요.”
“힐러는 아닌 것 같아.”
“오빠! 포스 색깔이 초록색이잖아. 그럼 치유 계열 맞잖아.”
“지홍아! 내가 보기에도 아영이는 힐러가 맞는 것 같은데. 찌뿌둥했던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어.”
“음... 치유가 아니라 정화라고 봐야 할 것 같아. 상처를 치유하는 게 아니라 몸속 피로물질이 제거됐어. 그래서 몸이 가볍고 활력도 생긴 거야.”
“정화? 불순물을 제거하는 그 정화?”
“단순히 불순물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몸속에 있는 해로운 물질을 없애준다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
“해로운 거라면 독이나 이상 상태 같은 거?”
“확실한 건 실험을 해봐야 알 것 같아. 잠시 쉬고 있어. 독초와 독사 좀 구해올게.”
모터보트를 타고 소초도 앞 연두봉으로 향했다. 숲에 들어가 맹독성 독초인 미치광이풀과 독우산광대버섯을 캐고, 한반도에서 독성이 가장 강한 까치살무사를 잡아 돌아왔다.
진경제와 진통제로 사용하는 미치광이풀은 가짓과에 속하는 다년초로 먹으면 미치광이가 된다고 '미치광이' 또는 '미치광이풀'로 알려졌다.
부교감신경의 말초신경을 마비시키는 아트로핀(atropine)과 중추신경을 마비시키는 스코폴라민(scopolamin) 등이 들어있는 매우 위험한 독초였다.
독우산광대버섯은 흰주름버섯과 비슷한 모양으로 새하얗고 아름답게 생겼지만, 한 조각만 먹어도 내부 장기가 손상돼 며칠 내로 사망하는 맹독성 버섯이었다.
엄청난 독성으로 소량만 먹어도 사망에 이르게 해 ‘죽음의 천사(Destroying Angel)’라 불렸다.
“독초를 먹을 테니까 정화 스킬로 독성을 제거해봐.”
“오빠! 안 돼요~”
“괜찮아! 강릉에 있을 때부터 자주 먹던 음식들이라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말이죠? 먹고 큰일 나는 거 아니죠?”
“아영아! 오빠는 레드바이퍼에게 물려도 끄떡없어. 절대 죽지 않는 불사신이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진짜죠? 은비 언니 말이 사실이죠?”
「헉... 불사신? 물리면 독이 퍼지기 전에 아파서 죽겠다. 우씨~」
“그럼! 이런 건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탈도 않나.”
아영을 안심시키고 미치광이풀을 맛있게 씹어 먹었다. 뿌리에 몰려있던 맹독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알싸한 맛이 느껴졌다.
강릉에서 즐겨 먹던 독이라 저항력이 발동하지 않아도 금방 중화될 독이었다. 초록색 빛이 몸을 감싸자 상쾌한 느낌과 함께 미치광이풀의 독성이 금세 중화됐다.
이번엔 미치광이풀보다 독성이 더 강한 독우산광대버섯을 먹었다. 버섯이라 향기도 있고 씹는 느낌도 부드러워 독버섯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독우산광대버섯을 식용버섯인 줄 알고 먹었다가 목숨을 잃었다.
초록빛이 몸에 스며들자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맹독도 감쪽같이 중화되며 버섯의 좋은 기운만 남았다.
이빨을 드러내고 반항하는 까치살무사의 목을 잡아 강제로 입을 벌리고 독을 뽑아냈다.
독을 몽땅 뽑아내고 숨통을 끊은 후 김도형 대장에게 맛도 좋고 몸에도 좋은 놈을 넘겨주자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씨익~ 웃어주고 맹독과 물을 섞어 음료수처럼 시원하게 들이켰다. 내가 잘못되면 어쩌나 손을 벌벌 떨고 있던 아영이 잽싸게 정화를 걸어주자 까치살무사의 맹독도 독성이 중화되며 시원한 물과 함께 사라졌다.
“이제 레드몬의 독과 이상 상태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겠다.”
“속단하긴 일러. 일반적인 독초와 독사의 독을 레드몬과 비교할 순 없어. 아직은 가능성만 있다고 생각해야 해.”
“에이! 왜 그렇게 신중해. 딱 봐도 답이 나왔는데.”
“무슨 뜻인지 알고 있어. 그래도 확실한 결과가 나오기 전에 미리 속단해서 좋을 건 없어.”
은비의 말처럼 이미 결론은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효과가 미미해도 아영의 성장 속도면 늦어도 1년 안에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또한, 피로해소에 큰 도움이 돼 당장 전투에도 활용할 수 있었다. 우리 공대의 고질적인 병폐인 부실한 체력 문제를 정화 스킬로 일부나마 해결할 수 있어 전투력을 한층 끌어올릴 수 있었다.
“아우~ 이런 복덩이가 어디서 굴러온 거야? 호박이 넝쿨째로 들어왔네.”
“아니에요. 전 아직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한참 더 배우고 노력해야 오빠와 언니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지금만 해도 큰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앞으로는 네가 지홍의 가장 강력한 조력자가 될 거고.”
“소연 언니! 왜 그러세요. 전 언니들 뒤에서 작은 도움만 돼도 감사하단 말이에요.”
“아이고~ 예뻐! 겸손까지 하고 현모양처 감이네!!!”
“은비 언니! 숨 막혀요!”
은비가 아영을 끌어안고 예뻐 어쩔 줄을 몰랐다. 처음 아영을 집에 데려왔을 때 그 누구도 오늘과 같은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도 못 했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아영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돌봐주고 싶은 마음에 데려온 것뿐이지 어떤 목적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런데 결과는 어처구니없을 만큼 황당했다. 갑자기 능력자로 각성하고 상상을 초월하는 성장 속도를 보이더니 소연과 은비를 제치고 기감력을 터득했다.
더구나 한 번도 보고된 적이 없는 정화 스킬까지 얻으며 이젠 공대에서 아니 내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
사심 없는 행동이 이런 결과를 낳았지만, 꿈이 아닌가 할 만큼 아영은 매일매일 우릴 놀하게 하고 있었다.
인연이란 참으로 오묘했다. 거지 소년에게 작은 온정을 베풀어 훗날 목숨을 구하는
설화처럼 우리가 한 행동은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낳고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웬만하면 척지지 말고 살아야겠네. 작은 온정이 이런 결과를 낳았는데, 원한을 사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잖아. 싫은 소리 했다고 칼 들고 덤빌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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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