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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이서인2
점점 혀가 꼬이더니 이상한 소리까지 해댔다. 싫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술주정하는 여자였다.
힘이 세도 소용없는 일이 술 취한 여자 다루기였다. 울고불고 소리 지르고 발광하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남자라면 아구창을 날려버리겠지만, 연약한 여자는 때릴 수도 없고 도무지 제어할 방법이 없었다.
「성질대로 하면 한 대 때리고 싶은데 여자라 그럴 수도 없고. 앞으로 계속 봐야 하는데 미쳐버리겠네. 아~ 꼬여도 더럽게 꼬였네. 젠장!」
“누군 좋겠어? 재벌 딸까지 좋아하고. 부러워 죽겠네!”
“그런 거 아니야. 술 취해서 헛소리하는 거야.”
“생전 처음으로 남자를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그게 술주정이야? 우리가 보기에도 순정을 다 받쳐 말하는데 그걸 술주정으로 몰아가면 너무 심한 거지. 안 그래 언니?”
“맞아. 못 됐어.”
“일 때문에 잠깐 만난 거야. 좋아할 이유가 없어.”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1초면 충분해. 난 오빠를 보는 순간 사랑을 느꼈어.”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하지만 난 아니야. 난 싫어!”
“왜? 예쁘고 능력 있고 똑똑하고 모든 걸 다 갖춘 여잔데 왜 싫어?”
“그것부터 마음에 안 들어! 완벽하다는 것만으로도 싫어! 그리고 말투도 싫어! 은근히 비웃는 것도 싫어! 딱 질색이야!!!”
“심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그러던데... 혹시? 정말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내 스타일 아니라고~”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아니면 아닌 거지.”
“네가 계속 억지를 부리니까 그렇지.”
“오빠! 오빠는 아닐지 몰라도 한숙 언니는 맞거든. 그리고 싫어도 여자에게 그렇게 노골적으로 표시 내는 거 아니야. 상처받은 여자가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아?”
“.......”
“여자가 한은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했어. 그만큼 여자가 앙심을 품으면 무서운 거야. 그리고 한숙 언니가 그냥 여자야? KM 그룹 회장이나 다름없는 대단한 여자야.”
“난 싫다 좋다 아무 말도 안 했어.”
“그건 오빠 생각이지. 싫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뭘 아무것도 안 해. 순정을 지켜주진 못할망정 상처는 주지 마. 알았어?”
“.......”
「정한숙! 으드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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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5월 25일 청진항
“서인 언니! 왜 이제 오는 거야? 눈이 빠지게 기다렸잖아.”
“미안해! 몰래 빠져나오는 게 쉽지 않았어.”
“문정후 그 개자식이 언니와 동생들을 감시하고 있었던 거야?”
“응! 감시원을 다섯 명이나 풀어놔서 따돌리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
“개 같은 놈! 끝까지 지랄이네. 염라대왕은 대체 뭐하는 거야. 그런 개종자를 끌어다가 지옥 불에 처넣어야 할 거 아니야. 이 양반 완전 직무유기네.”
“흐흐흐~”
이서인은 예상보다 5일 늦은 25일 돼서야 청진항에 도착했다. 신선 공대가 큰 사고로 당하며 해체되자 문정후는 이서인을 비너스 공대로 집어넣으려 했다.
문정후의 입김이 먹히는 비너스 공대에 이서인을 맡겨 달아나지 못하도록 사전에 막으려는 속셈이었다.
문정후는 이서인을 평생 놓으려 하지 않으면서도 결혼해 데리고 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어차피 대유 그룹 회장 문일권이 반대하겠지만, 특권의식에 남다른 문정후는 근본(?)도 없는 이서인을 아내로 맞을 생각이 없었다.
두고두고 데리고 놀 생각만 했지 미래를 함께하거나 사랑한다는 생각 따위는 해본 적도 없었다.
재벌이 다 그렇듯 문정후도 자기와 어울리는 잘난 집 딸년과 3년 전 약혼을 맺은 상태였다.
대유 그룹보다 더 잘나가는 5선 국회의원의 딸로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안하무인(眼下無人)인 문정후도 눈치를 봐야 하는 상대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대유 레드몬 사장으로 부임한 작년 말 첩이나 동거인으로 들어 앉혀 놓고 죽도록 괴롭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은비야! 정말 고마워! 네 덕분에 동생들을 무사히 데려올 수 있었어.”
“언니 일이 내일인데 당연히 도와야지. 우리가 남이야?”
“아니! 둘도 없는 언니 동생이지.”
“바로 그거야. 히히히~”
동생들을 북쪽으로 데려오기 위해선 정부허가가 필요했다. ‘꼭 필요한 사람이야!’라는 은비의 말에 할아버지는 군소리 없이 대유 그룹 몰래 허가증을 얻어주고 배편까지 마련해줬다.
“은영이 언니는 아직 안 왔어?”
“네. 아직 안 오셨어요.”
“나랑 같이 배 타고 강릉 갈 때 언니도 합류할 것처럼 말했는데 이상하네. 나보다 먼저 올 줄 알았는데 무슨 일 있나?.”
“아직 며칠 남았으니까 그 안에 오시겠죠.”
“같이하면 좋겠다. 성격이 조금 괄괄하지만 참 좋은 사람이야.”
“맞아요. 전 은영이 언니 남자 같은 성격이 보이쉬한 매력이 있어 좋아요.”
“하긴 그런 성격은 남자보다 여자들이 더 좋아하지. 신선 공대 있을 때도 남자들은 은영 언니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나하고 너만 좋아했지.”
“남자 같은 여자 참 매력적인데 남자들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박력 있고 터프하고 정말 있는데.”
“그러게.”
소연과 은비를 만난 이서인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 청진으로 동생들을 데리고 들어오기 위해 걱정이 많았었는지 얼굴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고생한 이서인과 동생들을 위해 숲으로 들어가 레드보어 수놈 한 마리를 잡아왔다. 진흙으로 화덕을 만들고 석쇠를 걸고 손질해온 고기를 후추와 소금으로 간을 한 후 구워주었다.
“이건 무슨 고기야? 정말 맛있네.”
“음... 이제 언니도 한 식구니까 비밀을 말해줘도 되지?”
“알아서 해.”
은비의 물음에 마음대로 하라고 말해주었다. 이서인이 언더커버(Undercover)일리도 없거니와 동생까지 모두 데려온 마당에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언니가 보기엔 무슨 고기 같아?”
“처음 먹어본 고기라 잘 모르겠어.”
“이거 멧돼지야!”
“멧돼지? 아닌데. 나도 멧돼지 고기는 먹어봐서 맛을 아는데 이런 맛 아니었어.”
“그냥 멧돼지가 아니거든. 레드보어야. 그것도 수놈!”
“뭐라고? 레드보어 수놈?”
“응!”
“청진에선 레드보어 고기도 팔아?”
“아니!”
“그럼 어디서 구한 거야? 서울에서 시킨 거야?”
“아니! 오빠가 잡아왔어?”
“.......”
나를 바라보는 이서인의 눈엔 놀람! 황당함! 장난치는 건가? 이런 식의 온갖 감정들이 마구 섞여 있었다.
“서인 언니! 은비가 지금 한 말 사실이에요. 지홍이랑 인사하고 잠깐 안보였죠. 그때 숲에 들어가서 잡아온 거예요. 언니 몸보신 해드린다고요.”
“정말이야?”
“네! 회양에서 드신 레드와피티 고기도 지홍이가 잡아온 거예요.”
“언니! 우린 오빠가 사냥해온 레드몬 고기만 먹어. 다른 고기는 맛이 없어서 안 먹어.”
“......”
“많이 당황스러우실 거예요. 간단하게 설명해 드릴게요.”
소연이 앞뒤 꼬리는 다 자르고 내가 상급 피지컬리스트이자 듀얼 리스트라는 것과 회양에서 신선 공대를 도운 일을 말해주었다.
“궁금한 것은 차차 알려드릴게요.”
“사실을 말해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좀 더 일찍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정부로부터 이양받은 땅 때문에 미리 말씀드릴 수가 없었어요.”
“아~ 무슨 뜻인지 알겠다. 내게 미안해할 거 없어. 나라도 그런 상황이었다면 말하지 않았을 거야. 주변에 적이 잔뜩 있는데 비밀을 말한 순 없잖아.”
“이해해주셔서 고마워요.”
“오히려 내가 고맙지. 따지고 보면 난 너희완 적이나 다름없는데 동생들까지 받아줬잖아.”
“언니! 전 언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 깊은 슬픔까지 모두 이해할 순 없지만, 같은 여자로서 안타까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옆에 있으면서 도움도 위로도 못 드려 정말 미안했어요.”
“아니야. 그래도 너와 은영 언니가 있어서 위로가 됐어.”
“서인 언니! 언니 잘못이 아니에요. 언니는 최선을 다한 거예요. 그러니 자책하지 마세요. 그리고 이제 과거는 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사세요.”
“나 같이 흠 많은 여자를 받아줄 남자가 어디 있다고 그래. 조용히 동생들하고 살 거야.”
“언니가 어때서? 예쁘지 착하지 몸매 죽이지. 나보다 훨씬 나은데 왜 그래?”
과거의 남자 때문에 사랑받을 자격조차 없다는 이서인의 말에 은비가 발끈했다. 사랑하다가 헤어진 건 잘못이 아니었다.
더구나 사랑도 아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쳐 고통받은 이서인은 다른 이보다 더욱 각별한 사랑을 받아야 하는 피해자였다.
“은비 네가 나보다 100배는 더 예뻐. 그리고 나와는 다르고.”
“그렇지 않아. 언니가 몰라서 그러는데 오빠가 가장 먼저 좋아했던 여자가 바로 언니야. 소연이 언니하고 같이 좋아했어.”
“컥~”
갑작스러운 은비의 말에 고기가 목에 꽉 걸려 사레가 들었다. 은비는 가끔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농담하지 마!”
“진짜야! 오빠가 말했단 말이야. 언니가 마음에 들었는데 다른 남자가 있어서 포기했다고.”
“.......“
조금 전까지 흠이 있어 다신 남자를 만날 수 없다고 말하던 이서인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잘도 지껄이더니 누군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하자 싫지 않았는지 눈에 생기가 돌았다.
남자가 절대로 믿어선 안 되는 여자의 거짓말이 있다. ‘나 화 안 났는데... 괜찮아!’ 이 말은 화났으니 조심하라는 뜻으로 달래주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됐어! 말 시키지 마!’ 계속 말 시키기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는 뜻으로 멍청하게 가만히 있으면 몇 날 며칠 괴롭힘을 당할 수 있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난 잘못한 거 없으니 네가 사과해야 한다는 말로 여자의 기분이 풀릴 때까지 사과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지난 일을 끄집어내 괴롭힌다는 뜻이었다.
이렇듯 여자가 하는 말과 속마음은 엄청나게 다를 수 있었다. 이서인의 눈빛에서 내숭이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남자가 허세를 부리듯 여자의 내숭을 흠이라 말할 순 없었다. ‘여자의 내숭은 필요악’이라고 할 만큼 자연스러운 것으로 남자들은 솔직한 여자보단 내숭 떠는 여자를 더 좋아했다.
적당한 내숭은 상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그만큼 관심이 있다는 표현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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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