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8 청진 =========================================================================
58. 청진
신선 공대가 자리를 떠난 후 5분도 되지 않아 피 냄새를 맡은 레드몬들과 동물들, 심지어 곤충들까지 몰려들어 죽은 사람들과 레드마우스의 사체를 뜯어 먹었다.
죽은 동물이 살아 있는 동물의 먹이가 되는 건 자연의 세계에선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시체마저 찾을 수 없는 가족들에겐 두고두고 가슴에 못이 박힐 일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전두수씨는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아. 은주식 부공대장과 박두일씨도 상태가 매우 위독해 어떻게 될지 모르겠고.”
“형님은 어떠셔?”
“오빠도 상처가 심해 당분간 사냥이 어려울 것 같아.”
“얼마나 심한데?”
“최소 1년은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아. 힐러가 치료해주면 한두 달 안에 완치될 수도 있지만, 워낙 귀하신 몸이라 쉬운 일이 아니야.”
“김아리 힐러에게 부탁하면 되잖아.”
“같은 공대원이 아니면 웬만해선 치료해주지 않아.”
“치료비를 주는데 왜 안 해줘?”
“일반적인 외상 상처는 치료가 어렵지 않지만, 레드몬에게 다친 상처를 치료하려면 포스 소모가 심해서 그래.”
다친 상처 속에 스며든 레드몬의 포스를 중화하는 건 치료에 특화한 힐러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힐링 스킬은 외상과 내상 치료, 재생력 향상, 체력 회복 등엔 큰 효과를 발휘하지만, 이상 상태 치료엔 적합하지 않았다.
살의를 가진 포스가 몸속에 스며들어 상처 회복을 더디게 만드는 것도 이상 상태의 일종이라 이를 치료하려면 찢어진 상처보다 몇 배나 많은 포스를 소모해야 했다.
“오성 공대 인원이 280명이야. 그 인원을 다 챙기려면 다른 사람을 도와줄 여력이 안 된다고 봐야지.”
“신선 공대는 어떻게 되는 거야?”
“해체해야지. 1년이나 공대장이 자리를 비우는데 남아 있을 공대원이 없잖아. 멀쩡한 공대원도 서인이 언니하고 은영이 언니밖에 없지만.”
“그럼 회양 기지는?”
“당분간 폐쇄하든지 이대로 놔두던지 대유 그룹이 알아서 하겠지. 그거야 우리가 걱정할 일은 아니잖아.”
서울로 후송된 박두일은 결국 3일 만에 숨을 거뒀고, 은주일 역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금일조는 6개월, 김보영과 김재곤도 각각 3개월간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중상이었다.
웬만한 상처는 하루 이틀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능력자가 한 달 이상 병원에 입원한다는 것은 일반인 기준으로 치면 엄청난 중상을 의미했다.
평생 병원 문턱도 넘지 않던 사람이 환갑 진갑 다 넘어 병원에 실려 가는 꼴로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한 달도 그런데 무려 3개월, 6개월, 1년 심지어 오늘내일하고 있는 사람도 있으니 상처가 얼마나 심한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결국, 김갑수가 입원하고 2주일 후 신선 공대는 해체하여 창설 된지 10년 만에 문을 닫았고, 상처 없이 살아남은 소연과 은비, 이서인, 조은영은 실업자에 되어 새로운 직장을 찾아야 했다
“포베로미스의 뿔과 레드스톤밖엔 챙길 시간이 없었어.”
“그 상황에서 챙길 정도면 뭔가 특별했나 보네.”
“그런 건 아니고 쥐가 뿔이 난 게 특이해서 가져온 거야.”
“아무 기능도 없어?”
“없어. 그냥 뿔이야. 또 모르지 코뿔소 뿔처럼 해열제나 지혈제, 살균제, 정신 안정제로 사용할 수 있을지도.”
이동 스킬과 연관이 있을지도 몰라 잽싸게 챙겨온 포베로미스의 뿔은 별다른 효용이 없었다.
기감을 통해 내부도 살펴보고 포스를 밀어 넣어 무기처럼 사용할 수 있는지 요모조모 확인했지만, 아무런 기능도 없었다.
약재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지만, 기대했던 것과 달리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자 은근히 짜증이 났다.
“오빠! 고함은 새로운 스킬이야? 소리 한 번에 레드몬이 벌벌 기던데.”
“아직 잘 모르겠어.”
“스킬을 사용한 사람이 모르면 어떻게 해?”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소리친 거라 스킬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어.”
“그 후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어?”
“그럴 상황이 아니었잖아. 공대가 풍비박산 났는데 마을을 비울 순 없잖아.”
“그래도 느끼는 게 있을 거 아니야?”
“맹수들이 내뿜는 살기 같은 효과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
“살기? 우린 전혀 못 느꼈는데. 머리가 띵하고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큰 소리로만 들었지 몸이 떨리거나 두렵다는 느낌은 없었어.”
“분노가 향한 대상에게만 효과가 있을 수도 있고, 사람에겐 효과가 없을 수도 있겠지. 아직 확실한 게 아니라서 실험을 해봐야지 알 것 같아.”
“청진에 도착하면 알아봐야겠네. 고함 스킬을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으면 나진시 정리는 식은 죽 먹기잖아.”
“그래야지.”
사고 이틀 후 정부는 1992년 6월 1일부로 온성군, 선봉군, 새벌군, 경원군, 은덕군, 나진시에 대한 개발권을 미래 레드몬에 이양한다고 발표했다.
개발권에 대한 대가로 정부가 요구한 것은 30년간 총 3,000억 원의 사용료를 국가에 지급하는 것이었다.
8대 재벌에겐 수십만 명의 공짜 노동력과 세금면제, 5조 원 제로금리 대출 등 온갖 특혜를 제공해놓고, 아무런 지원도 없는 우리에겐 돈을 요구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형평성을 생각하면 때려치워야 할 일이지만, 외교권과 군권을 제외한 모든 권한을 우리가 가지고 있어 레드몬을 정리하고 개발에 성공할 수만 있다면 결코 손해는 아니었다.
한해 100억 원을 국가에 납부하는 조건이라 금전적인 손실이 크지만, 조세권(租稅權)을 가지고 있어 레드몬에 붙는 특별세 15%와 종합소득세가 고스란히 내 주머니로 돌아와 10년 안에 정부에 납부할 3,000억 원을 상쇄할 수 있었다.
또한, 엘리트 레드몬 사냥을 본격화하면 10년이 아니라 2~3년 이내에 손실을 만회하고 엄청난 이익을 챙길 수도 있었다.
특히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할 수 있어 마음껏 우리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정권을 잡은 정부·여당과 할아버지는 하늘을 같이 이지 못하는 불구대천지원수(不俱戴天之怨讐)라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시비를 걸게 분명해 사실상 국내에서 우리가 커 나가기란 불가능했다.
소연과 은비를 만나지 못했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생각 자체가 비겁한 짓이었다.
연을 맺은 이상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남자의 의무이자 도리였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열사가 박해받는 개 같은 나라가 문제였지, 그 집안에 태어난 소은과 은비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정부가 함경북도 북부지역 개발권을 미래 레드몬에게 이양한 이유는 미래 정밀이 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함경북도 북부는 기업들이 손사래를 칠만큼 춥고 위험한 지역으로 누구도 개발에 참여하길 원하지 않았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어도 이익을 남기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 지역으로 국경 넘어 옌볜 조선족 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와 투먼(??), 훈춘(?春)도 고립된 도시라 교류할 곳도 없었다.
소연과 은비가 있지만, 그녀들만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100% 망할 것을 굳게 믿고 함경북도 북부 지역을 넘겨주게 된 것이었다.
1992년 4월 30일 청진
다친 공대원들을 서울로 이송한 지 2주일 만에 신선 공대가 해체되며, 환송회도 없이 조용히 원산을 떠나 청진에 도착했다.
청진은 KM 그룹이 관할하는 거점 도시로 동해라인의 끝이라 그런지 원산보다 훨씬 개발 수준이 낮았다.
레드몬 사냥팀도 달랑 두 개라 사체공장도 크게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보리·콩 등 잡곡을 심을 경지면적이 넓어 8대 도시 중 식량 자급률이 가장 높았다.
또한,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곳이라 명태·정어리·대구·고등어 등 수산물 어획량이 풍부해 원산에 비하면 생활이 매우 풍족했다.
지하자원도 풍부해 비료, 섬유, 유지, 식료품 가공공업 등 다양한 업종을 이전하며 동해라인 중에선 가장 살기 좋은 도시였다.
이는 KM 그룹 정형운(1928) 명예회장의 노력 덕분으로 북한 주민도 대한민국 주민과 같다는 생각에 투자를 아끼지 않은 결과였다.
대대로 선비이자 대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난 정형운은 바른 생각을 가진 개화인사로 일제에 항거해 독립군에 많은 군자금을 쾌척한 민족주의자였다.
지금처럼 보수의 탈을 쓴 그런 매국노가 아닌 조국을 사랑한 애국주의자로 할아버지와는 오래전부터 서로 우호적인 교류를 맺고 있는 사이였다.
국내 기업 중 미래 정밀을 편드는 몇 안 되는 회사로 나선시 개발에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한 상태였다.
“어서 오십시오. 이번에 미래 레드몬 사장으로 발령받은 김관웅입니다.”
“반갑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바지사장인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하하하~”
청진항에 내리자 김관웅 사장이 직원들을 대동한 채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인사를 나눈 후 숙소에 짐을 풀고 아이들을 데리고 식당으로 나갔다.
배멀미로 고생한 아영과 아이들을 함경도 토속 음식인 함흥냉면, 강냉이밥, 감자국수, 콩국수, 콩 부침 등으로 급히 속을 달랬다.
자동차만 타도 멀리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뱃길로 400km 떨어진 청진까지 왔으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김관웅 사장은 어떤 사람이야?”
“할아버지가 가장 아끼는 부하 직원으로 성실하고 착한 아저씨야. 성격도 서글서글하고 대인관계도 원만하고 일도 잘한다고 소문이 자자해.”
“너무 과분한 분을 보내주셨네.”
“하나밖에 없는 손주사위가 일을 시작하는데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니야?”
“흐흐흐~”
정부 발표가 있자 할아버지는 미래 정밀 부사장 김관웅을 미래 레드몬 사장으로 전보 발령해 청진으로 보냈다.
김관웅 사장은 올해 나이 49살로 말단 사원으로 시작해 차곡차곡 계단을 밟아 미래 정밀 부사장까지 오른 성실한 사람으로 할아버지의 오랜 측근이자 아끼는 부하 직원이었다.
김관웅 사장은 당분간 청진에 머물며 나선시 개발에 필요한 자재와 인원을 공급할 계획이었다
“언제 오신다고?”
“내일 오후 3시 도착 예정이야.”
“이 먼 곳까지 직접 오지 않으셔도 되는데.”
“겸사겸사 나도 보고 언니도 보고 오빠도 보려고 오는 거지. 우리에게 소개해 줄 사람도 있다고 했고.”
“그래도 많이 힘드실 텐데. 거리가 상당하잖아.”
“오빠가 준 산삼 먹고 날아다닌다고 했어. 평소에도 좋은 거 많이 먹고 운동 열심히 해서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말 그러면 다행이고.”
원산을 떠나 청진에 도착하자 할아버지가 우릴 보기 위해 내일 중으로 청진으로 온다는 연락이 왔다.
서울에서 강릉까지 차로 240km, 강릉에서 청진까지 배 타고 600km라 합치면 무려 840km였다.
산삼을 먹고 활기를 되찾았다고 해도 73살 고령을 생각하면 절대 쉬운 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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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