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4 순정(純情) =========================================================================
44. 순정(純情)
“옷은 다음부턴 할아버지에게 보내달라고 해야겠어. 여긴 물건이 너무 후져.”
“할아버지에게? 어떻게?”
“할아버지에게 정기 구독한 잡지와 카탈로그를 같은 걸로 한 부씩 맡긴 다음, 마음에 드는 제품을 찍어서 부쳐달라고 하면 되지.”
“할아버지 연세가 있으신데 그게 가능해?”
“말이 많아서 그렇지 시키는 건 잘해. 센스도 있고.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아직도 젊은 여성 댄스가수를 좋아해. 킥킥킥~”
“와! 할아버지 끝내주신다. 멋지시다.”
“크크크~”
회양엔 식당이 하나도 없어 외식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도 몸에 좋고 맛도 좋은 레드몬 고기와 약초, 산나물, 남쪽에서 공수한 김치와 각종 반찬이 있어 불편함은 없었다.
그러나 매일 같은 것만 먹으면 맛나고 몸에 좋아도 물리기 마련이었다. 우리 입은 몸에 안 좋은 음식을 끊임없이 갈구했다.
특히 피자와 햄버거, 순대, 어묵, 떡볶이, 튀김 등 길거리 음식을 20년간 달고 살은 소연과 은비에게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이게 얼마만이야. 면발 죽인다.”
“짬뽕 국물도 정말 맛있다. 탕수육도 고소하고.”
“입에서 살살 녹는다. 이런 걸 먹어줘야 몸이 버티는 거라고. 안 그래 언니?”
“맞아.”
“전 오빠가 끓여준 김치찌개가 더 맛있어요. 이건 느끼하고 짜기만 해요.”
“저도요. 이걸 어떻게 사람이 먹어요.”
아솔과 아림이 인상을 팍 구기곤 젓가락을 놓았다. 화학조미료인 MSG의 깊은 맛(?)을 알지 못하는 아영과 아정, 아솔, 아림에게 짜장면과 짬뽕, 탕수육, 팔보채, 고추 잡채는 음식이 아니었다.
평생 조미료와 캐러멜을 먹어본 적도 없는 아이들에게 느끼하고, 기름지고, 달고, 짠맛 중화요리는 음식이 아니라 독처럼 느껴졌다.
평소 집에서 조미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표고버섯가루와 멸치 가루, 새우 가루 등 산과 바다에서 나는 천연 재료만 사용해 음식을 만들었다.
소금도 질 좋은 천일염만 사용해 달거나 짜지 않은 음식을 만들어 먹였다. 그러다 보니 중화요리는 아이들에겐 너무 자극적이었다.
“이게 얼마나 맛있는 건데 그래. 짜장면, 짬뽕은 한국인의 기본 메뉴야. 어서 먹어.”
“언니! 이런 거 먹으면 배탈 나요. 오빠가 만들어주신 좋은 음식을 드세요.”
“맞아요. 오빠가 만들어 준 음식이 최고예요.”
“아림아! 아솔아! 음식을 가리면 안 돼. 뭐든 잘 먹어야 튼튼해지는 거야.”
“이걸 먹고 튼튼해진다니 말도 안 돼요. 이건 몸에 안 좋은 조미료가 잔뜩 들었잖아요. 저흰 오빠가 해주신 맛난 음식과 익수영진고만 있어도 충분해요. 이런 건 안 먹어도 돼요.”
“맞아요. 오빠가 주신 보양식과 환약을 먹고 몸이 얼마나 튼튼해졌는데요. 키도 이만큼이나 컸어요.”
아림과 아솔이 눈을 반짝이며 은비가 한 말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애들을 세뇌를 시켰네.”
“세뇌 아니에요. 오빠가 우리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데 그러세요.”
아정까지 은비의 말에 토를 달고 있었다. 이러다 아영까지 나서면 싸울 것 같아 급히 중식당을 빠져나와 고깃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이곳도 얼마 못 가 퇴짜를 맞아 우린 치킨집으로 또다시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치킨집은 호텔에서 먹은 좋은 기억이 있는지 군소리 없이 잘 먹었다. 역시 음식은 추억의 맛이 절반인지 짜장면, 짬뽕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는데 다들 좋아했다.
어렵게 점심을 해결한 후 화장품 매장과 신발, 속옷, 잡화 매장까지 보이는 매장은 모두 돌아보는 본격적인(?) 쇼핑이 시작됐다.
“언니! 여기도 쓸 만한 물건이 없네. 하나같이 옛날 물건 아니면, 싸구려만 잔뜩 가져다 놨어. 재고 처분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야? 그리고 재고면 재고답게 싸게 팔든지 해야지 소비자가격을 다 받아 처먹는 법이 어디 있어? 거기다 자기들 직원은 할인가로 팔고 우린 아주 호구로 알고 바지를 씌우네. 나쁜 놈들!”
“안 되겠다. 당장 입을 속옷하고 실내복, 양말만 사고 나머진 소포로 받아야겠다. 질도 안 좋고 가격도 너무 비싸.”
“다시는 원산에선 쇼핑 안 할 거야. 바가지를 씌워도 정도가 있지. 너무 하잖아.”
“물 건너왔으니까 이해는 하는데, 이해할 수준을 한참 벗어났어. 그리고 이런 식으로 판매하는 행위는 정말 양심 없는 행동이야.”
소연과 은비가 쌍으로 매장과 대유 그룹을 비난했다. 번화가에 자리 잡은 각종 매장은 대유 그룹에서 직접 운영하거나 대유 그룹 임직원들이 운영하는 가게로 대유 그룹 직원에겐 할인가로 판매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 바가지를 씌웠다.
대유 그룹 직원이 아닌 사람들은 배 타고 강릉까지 갔다 올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바가지를 쓰고 있었다.
마치 피서지에서 생긴 일처럼 원산 역시 이런 식으로 폭리를 취하는 매장이 많았다.
“숙소 잡자.”
“집에 안 가고?”
“언니! 오랜만에 나왔는데 하룻밤 자고 가자. 회에 소주도 한잔 하고. 응?”
“그래. 바람도 쐴 겸 그러자. 지홍아! 괜찮지?”
“그럼.”
“앗싸!”
「호텔도 바가지요금인데 그건 또 괜찮나 보네. 흐흐흐~ 여자들 심리는 알다가도 모르겠네.」
원산 호텔 스위트룸에 비싸게 방을 잡고, 천천히 걸어 바닷가로 걸어나갔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인데도 원산은 바닷가라 그런지 그리 덥지 않았다.
해가 떨어지자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와 돌아다니기엔 그만이었다. 바닷가에 늘어선 횟집 중 가장 크고 깨끗한 집으로 들어갔다.
광어와 우럭을 시키고 잠시 기다리자 싱싱한 활어회가 상에 올라왔다. 강릉에 있을 때 소연을 따라 먹어본 후 입맛에 맞아 서울에서도 곧잘 먹으러 다녔었다.
아영과 아이들이 싫어하면 어쩌나 생각했는데, 낚시로 잡은 생선을 날것으로도 먹어봤는지 별다른 거부감 없이 맛있게 먹었다.
“캬하~ 좋다. 역시 외엔 소주가 최고야. 달다 달아.”
“술이 그렇게 맛있어?”
“맛보단 분위기에 취하는 거야. 오빠도 있고, 언니도 있고, 아영이와 동생들도 있잖아. 거기다 탁 트인 바다까지 눈앞에 있는데 맛이 없을 수가 없잖아.”
“분위기는 좋은데, 맛은 잘 모르겠다.”
“어떻게 여자인 나보다 술 맛을 몰라?”
“그러게 말이다.”
사실 술을 못 마셔서 안 마시는 게 아니라 마셔도 별맛이 없어서 마시지 않았다. 주량이라면 온종일 마셔도 취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상급 능력자라 그런지 아무리 먹어도 취하지도 않고 맛도 맹숭맹숭해 갈증 해소로 시원한 맥주를 한두 잔 마시면 모를까 다른 술은 손이 안 갔다.
“애들이 오빠 정말 좋아해. 알고 있어?”
“나보단 너하고 소연이를 더 많이 따르잖아. 난 음식 해줄 때만 잠깐 좋아하는 거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이래서 오빠가 여자를 모른다고 하는 거야. 오빠하고 대화할 때와 나랑, 소연 언니와 대화할 때 애들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잖아. 그걸 못 느껴?”
“능력자도 아니고 눈이 왜 빛나?”
“여자들은 누굴 좋아하면 바라보는 눈깔이 달라.”
“애들한테 별소리를 다 하고 있어.”
“애들?”
“그래! 애들은 기댈 곳이 없어서 나를 의지하는 거야.”
“아이고 이런 바보 멍청이! 해삼 말미잘!”
“........”
“아영이 나이가 17살이야. 아정이도 13살이고. 아솔이와 아림이는 그렇다 쳐도 아영이와 아정이는 남자를 좋아하고 사랑할 나이가 됐어.”
잠시 바람을 쐬러 방파제로 나오자 은비가 쪼르르 따라와 아영과 동생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난 아영과 동생들이 나를 좋아한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라 호기심과 고마움이었다.
첫째 아영이는 처음으로 잘해준 남성에 대한 호감이었고, 둘째 아정은 이성에 눈뜨며 첫 번째 본 남자에 대한 설렘이었다.
꼬맹이들도 지나칠 만큼 순종적이고 맹목적으로 따르긴 했지만, 그 역시 울타리가 되어준 오빠이자 아빠에 대한 믿음이라 생각했다.
“그 나이에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동경이자 호기심이야.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상대가 바뀔 거야.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바뀌지 않아도 상관없어. 누군가 오빠를 좋아한다고 막을 생각은 없으니까.”
“지금 나보러 바람을 피우라는 거야?”
“바람피우게? 그것도 나쁘지 않네. 걸리지만 않으면.”
“뭐라고?”
“근데 그게 가능할까? 소연 언니가 대번에 알아차릴 텐데.”
“내가 이상한 말을 계속하니까 홧김에 나온 소리야. 그럴 생각 없어.”
생각지도 않은 얘기에 나도 모르게 발끈했다. 동생 같은 아이들을 여자로 본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흐~ 아이들이 오빠를 왜 좋아하는 것 같아?”
“글쎄?”
“자상함 때문이야. 때론 오빠 같고, 때론 아빠 같고, 때론 남자친구 같은 자상함. 그것 때문에 아이들이 끌리는 거야. 나와 언니도 오빠의 그런 자상한 모습이 좋았고.”
“나 자상하지 않아. 엄청나게 까칠해.”
“다른 사람에겐 까칠하게 해도 돼. 우리에게만 자상하면 되는 거야. 앞으로 영원히 변치 말고.”
“알았어.”
“아영과 아정이에게 잘해줘. 내가 이런 얘기했다고 밀어내지 말고. 그건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만 주는 거니까.”
“.......”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건 인력으론 막을 수 없어. 막고 밀어낼수록 상처만 남는 거야. 순시대로 흘러가도록 기다려야 해. 그래도 바뀌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거야.”
“.......”
은비가 달콤하게 입을 맞춘 후 품에 안겨왔다. 보듬어 앉자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은비의 긴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은비는 거침이 없는 말투로 성격이 강해 보이지만, 사실은 한없이 여리고 착했다. 성격 탓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을 좋아해 나보다 더 많이 걱정하고 사랑했다.
사실 난 오빠나 아빠의 심정으로 아이들을 대하는 게 아니었다. 술집에서 본 아영의 모습을 통해 어린 날 내 모습을 본 것 같아 보듬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소연과 은비는 진심으로 아영과 동생들을 위하고 아꼈다. 나처럼 위선과 가식이 아닌 친동생을 대하듯 아이들을 가르치며 돌봤다.
오늘도 은비는 엄마와 같은 마음으로 아이들을 더욱 사랑해 줄 것을 내게 요구하고 있었다.
은비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자 오늘따라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초콜릿같이 달콤한 입술을 더듬자 향긋한 혀가 내 입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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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