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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문 진화의 시작-39화 (39/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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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초소가 띄엄띄엄 설치된 허술한 방벽을 넘어 레드와피티 사체를 집으로 가져왔다. 높이가 고작 5m에 지나지 않고 경비도 허술해 사체를 집으로 가져오는 일은 너무도 간단했다.

회양 기지 경비대도 원산 경비대와 마찬가지로 책임자를 뺀 대다수 인원은 원산을 장악했던 구 북한군 소속으로 군기가 엉망이고 정신상태도 개판이라 철통 같은 경비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가죽과 고기, 뼈 등을 해체해 깨끗이 손질한 후 부위별로 나눠 1층 대형 냉장고에 차곡차곡 넣었다.

“무슨 고긴데 이렇게 많아요?”

“사슴 고기.“

“오빠가 직접 잡으신 거예요?”

“응!“

“숲에 들어가신 거예요?”

깜짝 놀란 아영이 큰 소리로 물어왔다. 엄마와 아빠를 숲에서 잃은 아영에게 숲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었다.

부모를 잃은 후 아영에게 숲은 트라우마(Trauma)로 남았다. 숲은 저주받은 곳이고, 괴물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절대 들어가선 안 될 재앙의 장소였다.

“위험하지 않게 살짝 앞에만 갔다 왔어.”

“오빠! 숲에 들어가지 마세요. 그곳은 위험한 곳이에요. 절대 가시면 안 돼요.”

“음... 앞으로 조심할게.”

내가 능력자라고 말해도 아영의 불안함을 잠재울 순 없었다. 그럴 바엔 재빨리 화재를 돌려 이 상황을 모면하는 게 나았다.

“저녁에 손님 몇 분 올 거야. 특별히 준비할 건 없고, 가져온 채소와 약초 좀 씻어놔. 장작과 고기는 내가 준비할 테니까.”

“아니에요. 제가 다 할게요. 안 그래도 하는 일이 없어 미안해 죽겠는데, 오빠가 다 하면 전 이 집에서 필요가 없잖아요.”

“장작 쪼갤 수 있어? 사슴 고기 숯불에 구워 봤어?”

“아니요.“

울상을 짓고 있는 아영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볼을 톡톡 건드렸다. 아영은 키가 140cm이라 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작았다.

원산과 회양 주민의 평균 신장은 남쪽보다 15cm나 작았다. 신장만 작은 게 아니라 30대만 넘어도 폭삭 늙은 아저씨였고, 40대는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신장의 경우 유전적 영향이 80%, 환경적 영향이 20%였지만, 굶주림 앞에선 이런 연구 결과는 휴짓조각과 다를 것이 없었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그게 날 도와주는 거야.”

“오빠! 저 일 시키러 데려오신 거잖아요. 다른 용도로 데려오신 거 아니잖아요.”

“다른 용도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동생들까지 몽땅 데려왔는데 하는 일도 없이 먹고 자고 공부까지 하고 있어요. 누가 이걸 일하러 왔다고 생각하겠어요?”

“아영아! 그런 부담가지지 마. 난 네가 정말 동생 같아서 이러는 거야. 다른 뜻 없어. 그리고 여긴 우리가 오래 머물 곳이 아니야.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면 할 일이 많아. 그때를 대비해 열심히 공부하라는 거야. 그래야 나중에 네가 나를 도와주지. 안 그래?”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럼.“

“흐음... 알았어요. 오빠 생각이 그렇다면 그렇게 할게요. 열심히 공부해서 오빠를 꼭 도와드릴게요.”

“그래야지. 그래야 착한 동생이지.”

“오빠! 전 오빠가 시키면 뭐든지 할 거예요. 공부하라면 공부하고, 먹으라면 먹고, 죽으라면 죽을 거예요.”

“.......”

지금 아영이 하는 말을 도와준 은인에 대한 고마움의 말이라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건 누가 봐도 17살 소녀의 사랑 고백이었다.

두 눈 가득 강한 열정을 담아 바라보는 아영을 살포시 품에 안아주었다. 아영의 사랑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찾아온 사랑을 아픔으로 기억하게 할 순 없었다.

넓고 두꺼운 돌을 구해와 벽돌처럼 네모 반듯하게 잘라 아궁이를 만든 다음 마른 나무를 적당히 잘라 불을 지폈다.

불이 좀 사그라지자 그 위에 손가락 굵기의 철망을 얹었다. 두껍게 썬 어린 레드와피티 등심을 올리고 굵은 소금과 후추를 살짝 뿌렸다.

은은한 불 위에서 고기가 지글거리며 익자 고소한 냄새가 사방에 퍼져나갔다. 이서인과 조은영은 물론 소연과 은비, 아영, 아정, 아솔, 아림까지 고기에 눈을 못된 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꿀꺽~”

“와~ 냄새 죽인다. 오빠! 이거 언제 익는 거야?”

“조금만 기다려. 금방 익어.“

“기다리다가 숨넘어가겠어. 장작 좀 더 넣어.”

“불이 너무 세면 타서 고기 맛이 없어. 좀만 참고 채소부터 먹고 있어. 그것도 먹을 만할 거야.”

내 말에 여자들이 울상을 지으며 샐러드를 집어 먹었다. 산에서 따온 약초와 채소를 버무린 샐러드는 발사믹 소스로 간을 했다.

“와! 샐러드 정말 맛있네. 아영씨가 한 거예요?”

“아니요. 전 씻기만 했어요. 고기부터 샐러드까지 모두 오빠가 준비한 거예요.”

“지홍씨! 요리 정말 잘하시네요.”

“감사합니다.”

샐러드 하나에 이서인이 호들갑을 떨었다. 평소 조용한 성격인 이서인이 간만에 기분이 업됐는지 활달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만큼 사는 게 무료하고 정에 굶주렸단 뜻으로 항상 혼자 있다가 이렇게 여럿이 모여 수다를 떨자 활기를 찾고 있었다.

“난 요리 잘하는 남자가 좋은데. 그런 면에서 지홍씨는 딱 내 스타일이야. 지홍씨! 데이트 한 번 해요.”

“;;;”

“은영 언니! 숟가락 놓고 싶지?”

“은비야! 농담이야. 호호호~”

특별할 건 없지만 쌉싸름한 약초와 산나물이 어우러진 샐러드는 발사믹 소스와 신선함이 더해져 입맛을 돋우기엔 그만이었다.

또한, 고기와 함께 싸먹으면 레드와피티의 풍미를 느낄 수 있어 궁합이 아주 잘 맞았다.

여자들이 샐러드에 심취해 맛을 논평하고 있는 사이 알맞게 익은 레드와피티 등심이 크게 썰어 접시에 담아냈다.

숙녀부터 꼬맹이까지 각자 자신의 취향에 맞게 기름장에 찍거나 샐러드에 싼 사슴 고기가 입으로 들어갔다.

순간 소고기와는 비교도 안 될 향긋함과 고소함이 입안을 자극하더니 사르르 녹아 목구멍으로 사라졌다.

“와~ 정말 맛있네요. 소고기도 아닌 것 같고, 돼지고기도 아닌데. 지홍씨! 이거 무슨 고기에요?”

“이거 혹시 레드와피티 고기 아니에요?”

“언니들 온다고 지홍이가 아껴둔 고기를 꺼냈어요.”

“너무 과분한 대접인데.”

“맛있게 많이 드시고 재미있게 놀다 가시면 돼요.”

“고마워. 다음에 내가 근사하게 한번 쏠게.”

“나도.”

이서인이 무슨 고기인지 물어오자 조은영이 단번에 레드와피티 고기를 알아맞혔다. 시중에서 레드와파티와 레드디어 등 레드몬 고기를 파는 집이 여럿 있어 돈만 많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가격이 워낙 고가라 일반인은 쉽게 접할 순 없지만, 능력자들은 사냥감 중 일부를 요리해 먹거나 음식점에서 사 먹을 만큼 부유해 맛을 모를 수가 없었다.

고기는 구워 올리는 족족 여덟 여성의 입속으로 사라졌다. 고급 요리에 길든 이서인과 조은영의 까다로운 입맛까지 사로잡은 연한 새끼 레드와파티 고기에 아영과 아정, 아솔, 아림이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맛있어?”

“네. 정말 맛있어요. 이렇게 맛있는 고기는 처음이에요. 고마워요, 오빠!”

고기를 별로 먹어본 적도 없는 아영이 너스레를 떨었다. 여자나 남자나 누군가 좋아하면 작은 것에도 크게 감동하고 유난을 떠는 것 같았다.

“많이 구워줄 테니까 체하지 않게 꼭꼭 씹어 먹어. 아림이도 많이 먹고.”

“네! 오빠!”

“아이고 귀여워! 흐~”

막내 아림이의 입에 고기를 넣어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 집에 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아이들의 얼굴에 혈색이 돌고 있었다.

한참 먹고 자랄 나이에 풀죽도 제대로 먹질 못해 얼굴이 허옇게 떠 있더니 그래도 지금은 혈색도 돌고 버짐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소연과 은비만 보약을 먹일 게 아니라 아이들도 먹여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잔병치레도 줄고 키도 좀 클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고기를 구워주는 사이 이서인과 소연, 은비는 조은영이 가져온 포도주를 돌리고 있었다.

“지홍씨도 한 잔 받으세요.”

“전 괜찮습니다.”

“오빠도 한잔해.”

“지홍아! 한 잔만 받아.”

“그럼 한 잔만 받겠습니다.”

조은영이 권하는 술을 계속 거절하기 뭐해 술을 받았다. 평소 술을 즐기지도 않지만, 여자들 틈바구니에 앉아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남자 많은 곳에 여자가 혼자면 홍일점(紅一點)이라고 떠받들어주지만, 여자가 많은 곳에 남자가 혼자면 청일점(靑一點)이라고 바보 되기 십상이었다.

소연과 은비가 있는 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낄 자리도 아닌 자리에 끼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도 않았다.

“오빠도 같이 가서 드세요. 제가 구울게요.”

“난 괜찮아. 동생들 옆에 가서 먹어.”

“혼자 하면 힘들어요. 저랑 같이해요.”

“이런 일은 남자가 하는 거야. 여자가 하는 거 아니야.”

“그래요? 처음 듣는 소린데요.“

“남쪽에선 그렇게 해. 집안일 안 하던 남자도 밖에 나오면 음식도 만들고 설거지도 하고 그래.”

“개방적인 남쪽이 틀리긴 하네요. 그래도 여긴 북이니까 제가 도와드릴게요.”

아영이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고기를 뒤집었다. 아영과 고기를 굽는 사이 술판이 제대로 벌어졌는데 순식간에 포도주 한 병이 비워지고 두 병째 뚜껑을 따고 있었다.

조은영은 평소 술을 즐기는지 포도주를 8병이나 들고 왔다. 멘탈리스트지만 일반인보다 체력이 월등해 포도주 8병에 취할 염려는 없었다.

하지만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소연과 은비라 다음 날 숙취로 고생할 것 같아 살짝 걱정됐다.

“언니들 정말 예뻐요.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너도 잘 챙겨 먹고 운동하면 예뻐져.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말 그럴까요?”

“물론이지.“

“그 말이 사실이면 좋겠네요. 저도 언니들처럼 예뻐지면 좋겠어요. 하지만 능력자와 비교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에요. 저도 그 정도는 알아요.”

“TV에 나오는 연예인들 봐봐. 여성 능력자만큼 예쁘잖아.“

“그건 모두 가짜예요. 성형과 화장, 조명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거예요.”

“벌써 그런 걸 알아?“

“그럼요. 저도 여잔걸요.”

“빠른데. 흐~“

“전 못 생겨서 꾸며도 안 될 거예요. 성형수술을 해도 언니들 발뒤꿈치도 못 따라갈 거예요. 하아~”

아영은 지극히 평범한 얼굴이지만, 나름 개성과 깜찍함이 있었다. 지금이야 워낙 마르고 피부가 거칠어 그렇지 잘 먹고 가꾸면 귀엽고 발랄한 숙녀가 될 수 있었다.

사람이 외모에 부쩍 신경을 쓴다는 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뜻이었다. 아영은 날 좋아하자 자신의 외모를 소연, 은비과 비교하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어린 소녀의 풋풋한 사랑에 웃음이 나왔다. 그렇다고 웃는 모습을 보여줄 순 없어 입에 살짝 미소를 띠는 것으로 웃음을 대신했다.

사랑은 외모에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사람이 아름다운 얼굴과 예쁜 몸매에 끌리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걸 사랑이라 말할 순 없었다.

하지만 그걸 깨닫기엔 아영은 너무 어렸고, 난 그걸 설명해주기엔 예쁘고 아름다운 것만 쫓는 속물이었다.

============================ 작품 후기 ============================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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