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9 원산 =========================================================================
29. 원산
1991년 2월 28일 아침 5시
상급 능력자인 내가 안전하게 보호하겠다고 약속해도 위험한 레드몬이 득실거리는 원산에 보내려니 마음이 편치 못한지 할아버님과 아버님이 은비와 소연의 손을 쉽게 놓지 못했다.
“선머슴처럼 덜렁거리지 말고 어딜 가든 침착하게 행동해야 한다.”
“할아버지! 내가 애도 아니고 인제 그만 좀 해. 창피하게 왜 이래?”
“집에서 새는 바가지 나가서도 새는 거야. 조신하게 행동해!”
“알았다고. 알았으니 그만 좀 해! 대체 똑 같은 말을 몇 번째 하는 거야?”
할아버지의 거듭된 걱정에 은비가 짜증을 부렸다. 먼 길을 떠나보내는 할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은 은비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같은 소리를 어제부터 계속 듣자 더는 참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자네만 믿네. 잘 부탁하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몸처럼 아끼겠습니다.”
“신랑하고 은비 잘 챙기고, 밥 잘 챙겨 먹고, 싸우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바로 전화해라. 알았지?”
“알았어요. 혼자 계신다고 식사 거르지 마세요.”
“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안전한 서울에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 위험한 곳에 가는 네가 걱정이지.”
“자주 연락드리겠습니다.”
“모자란 게 있어도 너그럽게 이해해주게. 엄마 없이 자라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네.”
“아닙니다. 둘 다 저에겐 보물 같은 존재입니다. 아끼고 또 아끼겠습니다.”
소연의 아버지 민정국도 떠나보내는 딸을 앞에 두자 할 말이 많은지 쉽게 손을 못 놓았다.
“다녀오겠습니다.”
“도착하면 바로 전화해야 한다.”
“알았다고. 알았다고 몇 번을 말하는 거야.”
“인석은 할애비가 걱정돼서 그러는데...”
은비와 소연을 떠나보내는 할아버지와 아버님의 얼굴엔 서운함과 불안함이 가득했다. 원산에 들어가면 최소 1년은 집에 올 수 없었다.
더구나 제대로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조국의 간성(干城)인 능력자들을 북쪽으로 내몰고 있어 더욱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1991년 2월 15일 정부는 한반도의 균형 잡힌 개발을 명목으로 옛 북한지역 전체를 레드몬 사냥터로 활용한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한 후속조치로 레드몬 사냥팀 30개를 북으로 올려보내 5월 1일부터 본격적이 사냥에 돌입하기로 했다. 이는 알맹이가 쏙 빠진 발표로 사람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30년간 버려진 북한지역에 사전 준비 없이 레드몬 사냥팀을 파견한다는 것은 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과 다름없었다.
여론이 들끓자 정부는 쾌재를 부르며 9개 거점도시와 2개 군사도시, 50개 사냥전진기지가 통일 후 차곡차곡 준비되어 사냥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발표했다.
이러자 여론이 돌변해 정부의 행동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처음부터 이런 효과를 노리고 여론을 조작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여론이 정부 편으로 돌아서며 전문가들이 제기한 재벌에 대한 특혜와 위험도는 여전하다는 발표가 묻혔을 뿐 의심마저 거두어진 건 아니었다.
떠나는 소연과 은비의 눈에도 눈물이 가득 고였다. 하지만 차에 올라타는 순간 눈물은 사라지고 웃음만이 가득했다.
소연과 은비에겐 원산으로 떠나는 것이 무서움과 두려움이 아닌 소풍이자 신혼여행이었다.
이래서 딸자식 키워봐야 소용이 없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었다. 사랑으로 20년을 돌봐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눈물도 사랑하는 남자 앞에선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 위에 아이스크림처럼 녹아 없어졌다.
“벌써 기대된다. 언니도 그렇지?”
“난 잘할 수 있을지 그게 걱정이야.”
“잘하고 못하고가 어디 있어? 그냥 같이 있으면 되는 거지.”
“하긴 그렇다. 이렇게 셋이 있는 것만 해도 좋은데 살림 조금 못해도 어때. 안 그래?”
“당근이지!”
“얘들아! 우리 소풍 가는 거 아니다.”
“그건 오빠 생각이고 우린 지금 기분이 날아갈 것 같거든.”
“.......”
강릉에 도착한 우린 신선 빌딩 앞에서 잠시 이별을 고해야 했다. 소연과 은비가 갈 곳은 신선 공대원들이 기다리는 4층 회의실이었고, 내가 갈 곳은 보조사냥꾼들이 모이기로 한 강릉 묵호항 여객터미널이었다.
“무거운 거 절대 들지 마. 허리 다치면 끝장이야. 알았어?”
“흐~ 알았어. 조심할게.”
“고추야! 이따 보자. 언니가 이따 빨아줄게. 쭈쭈쭈~”
“.......”
은비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말문이 막혔다. 징그럽다 무섭다 그럴 때가 엊그제였는데 이젠 잠시 떨어지는 것도 참질 못해 고추를 붙잡고 석별의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다.
“기분 나빠도 조금만 참아.”
“매일 하던 일이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늦겠다. 어서 올라가.”
소연과 은비의 예쁜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려 올려보낸 후 강릉 묵호항 여객터미널로 이동했다.
항구에 도착하자 팀장인 노일수와 부팀장인 김응수을 비롯한 20여 명의 보조사냥꾼이 옹기종기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동안 연락이 없어 관둔 줄 알았다. 뭐하고 지냈냐?”
“죄송합니다. 어디 좀 다녀오느라 그랬습니다.”
“올라가는 건 별문제 없는 거지?”
“예. 없습니다.“
“다행이네. 신참들 데리고 짐 좀 실어. 이사 가는 것도 아니고 뭔 짐을 그렇게 많이 가져가는지... 젠장!”
“예!”
오랜만에 봤다고 김응수가 살짝 걱정하는 것처럼 말하더니 곧바로 본색을 드러내 잡일을 시켰다.
서로 마음 터놓고 지내는 사이도 아닌데 심부름 잘하는 일꾼이 없어질 걸 걱정하는 게 아니라면 놈이 날 걱정할 이유는 있지도 않았다.
김갑수에겐 회양 기지에 도착하기 전까진 보조사냥꾼과 함께 이동하겠다고 말해두었다.
강릉에서부터 공대원들과 함께 이동하면 원산에 도착하기도 전부터 이상한 소문이 날 게 뻔했다.
회양이야 폐쇄된 곳이라 볼 사람도 별로 없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됐지만, 강릉을 떠나기 전부터 수군거리면 보는 눈이 많아 시끄러워질 수 있었다.
오늘 강릉을 떠나 원산으로 들어갈 공대는 신선, 비너스, 제우스 3개 공대로 모두 대유 그룹에 종속된 레드몬 사냥팀이었다.
비너스 공대는 피지컬리스트 12명과 멘탈리스 3명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공대장 차유리가 조직한 레드몬 사냥팀이었다.
출중한 미모와 사람을 끄는 능력이 탁월한 차유리는 TV와 언론에도 자주 얼굴을 내밀어 일반인에게도 친숙한 인기 많은 멘탈리스트이기도 했다.
중급 피지컬리스트 최재준이 맡고 있는 제우스 공대 역시 인원은 15명으로 비너스 공대와 같지만, 멘탈리스트가 2명 적어 전력이 조금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김갑수와 친구 사이이기도 한 최재준은 술을 엄청나게 좋아해 사고뭉치긴 해도 성격은 시원시원한 편이었다.
신선 공대보다 전력이 한 단계 위인 비너스와 제우스 공대는 보조사냥꾼도 45명, 50명으로 훨씬 많은 수를 거느리고 있었다.
1시간쯤 지나자 리무진 버스 3대가 차례대로 도착했고, 그 안에서 신선, 비너스, 제우스 공대 공대원들이 줄줄이 내렸다.
김갑수와 차유리, 최재준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이 능력자들도 서로 아는 사람을 찾아 인사를 나누는 등 묵호항 여객터미널엔 때아닌 친구 찾기 열풍이 불어 닥쳤다.
“어? 울 신랑 왜 안 보이지?”
“배 안에서 짐 나르고 있나 보다.”
“언놈이 내 낭군에게 짐을 나르게. 누구야? 다 나와~”
소연과 은비는 나를 찾기 위해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난 비좁은 화물칸에서 짐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20일경 원산으로 짐을 미리 올려보냈다고 들었었다. 그런데도 가져갈 게 많은지 커다란 화물칸이 꽉 찰 만큼 공대원들의 짐이 넘쳐나고 있었다.
「와~ 소연과 은비만 그런 줄 알았더니, 다른 사람들도 완전히 이사 수준이네. 달랑 옷 몇 벌 챙겨가는 보조사냥꾼들은 대체 뭐야?」
1시간 후 공대원과 보조사냥꾼들이 모두 탑승하자 화물선이 원산을 향해 출발했다. 만약을 대비해 화물선 앞뒤로 해군에서 파견한 울산급 호위함(FF)이 한 척과 참수리급 고속정(PKM) 두 대가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군함을 배치한 건 어류형 레드몬의 출현을 걱정해서였다. 포유류 다음으로 많은 레드몬이 어류였다.
하지만 연근해의 작은 어종이 레드몬으로 변이해 선박을 공격하는 예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뇌용량이 작은 어종이 레드몬으로 변이할 가능성이 현저히 낮았고, 운 좋게 부모의 영향을 받아 레드몬으로 태어난다고 해도 치어 상태에선 수많은 포식자에게 잡아먹혀 생존율이 육지보다 현저히 낮았다.
바다에서 나타난 레드몬은 주로 대형 어종인 상어와 청새치, 참다랑어, 가오리 등으로 이들이 종종 선박을 공격해다.
사실 바다에 서식하는 레드몬 중 상당수는 고래와 물개, 바다사자 등 포유류와 조류인 펭귄, 파충류인 바다거북 등이었다.
이 중에서 특히 범고래, 돌고래, 귀신고래, 밍크고래, 참고래, 수염고래, 참고래, 혹등고래, 향유고래 등 지구에서 가장 큰 포유류인 고래가 레드몬으로 가장 많이 변이해 바다를 지배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많은 사람이 바다에 사는 레드몬을 모두 어류로 인식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포유류 다음으로 어류형 레드몬이 많다는 이상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옛 북한지역에서 남포와 함께 가장 중요한 거점 도시인 원산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잘 정돈된 항구도시였다. 강릉을 떠날 때만 해도 모두가 작은 포구 정도로 원산을 생각했다.
그러나 원산항은 화물선이 접안할 수 있는 계류 시설부터 화물을 하역하는 하역 시설, 화물을 관리하기 위한 각종 건물과 화물을 임시로 적치하는 야적장, 항만 도로까지 규모는 조금 작아도 시설은 완벽히 갖춰져 있었다.
원산은 함흥과 김책, 청진에도 각종 생필품과 식량을 공급할 책임이 있어 화물 운반이 용이하도록 부두의 규모도 가장 크게 복구됐다.
원산에 도착한 우린 개미떼처럼 달려드는 노동자들을 이용해 재빨리 짐을 차에 실어 숙소로 옮겼다.
원산은 임금이 남쪽의 10분에 1로 한 달 내내 부두에서 짐을 날라봐야 50,000원을 벌기도 어려웠다.
식량과 생필품을 지원하곤 있지만, 엄청난 노동력 착취를 생각하면 생색만 내는 수준이었다.
공대원들과 보조사냥꾼들이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이 김갑수와 차유리, 최재준은 대유그룹 원산 책임자 박도준 시장, 원산 포스 협회 지부장 도명윤과 함께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고 있었다.
원산에 마련된 전진기지는 총 다섯 곳으로 장전과 금강산, 회양, 백암, 추애였다. 이들은 모두 금강산과 마식령산맥에 초입에 자리 잡고 있었다.
“김갑수 공대장은 백두대간과 마식령산맥 사이에 있는 회양 기지를 맡으면 됩니다. 차유리 공대장은 금강산, 최재준 공대장은 장전을 맡으세요.”
박도준 시장이 앞으로 공대가 머물 기지를 정해주며 그곳에 관련된 서류를 넘겨줬다. 원산 도착 전부터 이미 정해진 일로 최고 책임자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요식 행위였다.
============================ 작품 후기 ============================
대화형식이 수정됐습니다.
1~28편까지는 조만간 시간을 내어 수정하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