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0 최은비 =========================================================================
20. 최은비
어둠이 내려앉은 7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백화점을 탈출한 우린 목동에 있는 소연의 집으로 이동했다.
대한민족문제연구회 정회원인 소연의 아버지 민정국은 목동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하고 계셨다.
젊은 시절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다 수차례 투옥된 민정국은 군사정권의 가혹한 고문에 한쪽 다리를 심하게 다쳐 목발이 없으면 돌아다닐 수 없을 만큼 거동이 불편했다.
하지만 장애가 있다고 느낄 수 없을 만큼 성격이 밝고 쾌활했고, 서점도 직접 운영할 만큼 활동적이었다.
“어서 오게. 소연이 아빠 민정국이네.”
“안녕하십니까. 박지홍입니다.“
“한 번도 남자 이야길 안하던 녀석이 걸핏하면 전화를 걸어 자네 이야길 하기에 누군지 보고 싶던 참이었네.”
“아... 네에!
“아빠! 내가 언제 지홍이 얘길 했어? 갑자기 이상한 얘길 하고 그래.”
“그제도 전화해서 데려온다고 했잖아.“
“그거야 인사차 잠시 들린다고 말한 거지 다른 뜻으로 말한 게 아니잖아. 계속 쓸데없는 소리 하면 나 먼저 집에 간다?”
“좋으면 좋다고 말하면 되지 왜 저러는지 모르겠네요.“
“그러게 말이다. 하하하~“
“.......”
은비의 할아버지 최광석과 민소연의 할아버지 민조용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불알친구로 최광석은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했고, 민조용은 국내에 남아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최광석이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에 몸 바치는 사이 남동생 최광정은 사할린 타이헤이탄광에 강제로 끌려가 2년 만에 죽고, 하나 남은 여동생 최은숙도 15살 어린 나이에 일본군 강제위안부로 끌려가 모진 고초 속에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
일제는 중국침략 전까진 조선의 값싼 노동력을 모집해 토목공사장과 광산 등에 사용하다 중일전쟁(1937)이 발발하자 국가총동원법을 공포 국민징용령을 실시해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강제동원한 조선인은 146만 명으로 주로 탄광, 금속광산, 토건공사, 군수공장 등에 끌려가 혹사당했다.
또한, 1944년에는 <여자정신대근무령>을 발표하여 12세에서 40세까지의 여성 수십만 명을 강제징집해 군수공장에서 일하게 하거나 군대 위안부로 보내는 입에 담지 못할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은 강제징집한 조선인들을 기밀 유지를 위해 집단학살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평양 미림(美林)비행장 노동자 8백여 명, 지시마열도(千島列島) 노동자 5천여 명 등이 집단 학살된 대표적인 예였다.
이외에도 섬에 끌려간 많은 조선인이 일본군의 후퇴와 함께 동굴 속에 갇혀 무참하게 학살당한 예도 무수히 많았다.
일본 정부는 1990년 6월 강제징용한 한국인 수를 66만 7,648명으로 공식 발표했을 뿐, 정확한 집계도 보상도 외면하고 있었다.
간악한 일제에 맞서 계몽운동에 투신한 민조용의 집안도 최광석과 마찬가지로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났다.
민조용이 일제의 모진 고문에 해방도 보지 못하고 차디찬 감옥에서 숨을 거두며 핏덩이인 소연의 아버지 민정국과 고모 민영희 그리고 할머니 이정숙만 세상에 남겨지게 되었다.
독립운동가의 가족이란 이유로 수 대에 걸쳐 내려온 전답과 재산을 일제에 모두 빼앗기고 거리로 내몰린 이정숙은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날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가며 피눈물을 삼켜야 했다.
소연과 은비 가족의 불행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소연의 어머니는 소연을 낳고 산고로 3개월 만에 돌아가셨고, 은비의 부모님은 10년 전 뺑소니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소연에겐 남은 가족은 아버지 민정국이 전부였고, 은비에겐 할아버지 최광석이 유일했다.
소연과 은비가 친자매 이상으로 친한 이유는 두 집안의 슬픈 과거사와 가족이 없다는 것 그리고 태어나기 이전부터 끈끈한 유대로 얽혀있기 때문이었다.
천애고아인 나보다 의지할 가족인 있는 소연과 은비가 조금 나을지 몰라도 수십 년에 걸친 슬픈 가족사의 아픔은 내가 가진 상처보다 훨씬 크고 컸다.
“아빠 때문에 내일도 안 되겠다. 늦어도 모레까지 갈 테니까 내가 지홍이 좀 잘 돌봐줘.”
“그러다 내가 오빠 채가면 어쩌려고 그래?
“그럼 우리 셋이 같이 살면 되지 뭐가 문제야?”
“헉! 이 아줌마가 못하는 소리가 없네. 미친 거 아니야?”
“너 나랑 떨어져 살 수 있어?“
“.......”
서점을 나와 집에 돌아오자 시계가 벌써 밤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양손 가득 들고 온 쇼핑백을 침대 위에 올려놓자 은비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새 옷을 갈아입었는지 짧은 반바지에 티셔츠만 걸친 모습이었다. 쭉 뻗은 하얀 다리와 살짝 파인 가슴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오빠도 2월까진 여기 있을 거지?”
“집 얻어서 나가야지.“
“언니랑 같이 원산에 들어간다며?”
“응!“
“세달 살 집을 뭐하러 얻어?”
“집 구하는 게 어려우면 모텔을 구하면 돼.”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 보다시피 이 넓은 집에 할아버지와 나를 빼면 일해주시는 아주머니와 아저씨밖에 없어 같이 있어도 충분해. 그리고 오빠가 집 얻어 나가면 언니는 어쩌라고? 언니도 데리고 나갈 거야?”
“소연이는 자기 집에 있으면 되잖아.“
“오빠가 나간다고 하면 언니가 마음 편하겠어?”
“그래도 세 달은 민폐야.“
“민폐 아니거든. 젊은 남자가 있어서 오히려 든든하거든. 그리고... 오빠가 옆에 내가 꼬시기가 편하잖아. 안 그래?”
“.......“
은비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잘도 오글거리는 농담(?)을 해댔다. 황당한 농담을 하면서도 은비는 내 속옷과 양말, 바지, 윗도리 등을 하나씩 개어 옷장에 정리해 줬다.
소연은 돌아가신 엄마를 빼면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같이 밥 먹고, 차 마시고, 이야기하고, 사랑을 느낀 여자였다.
그리고 은비는 처음으로 내 옷을 정리해준 여자였다. 그것도 스스럼없이 러닝셔츠와 팬티까지...
“오빠! 배고프지 않아?”
“좀 고프네.“
“내가 그럴 줄 알고 아주머니께 야식 좀 부탁해놨지. 가자!”
부잣집 소녀라 버르장머리가 없을 줄 알았던 은비는 말투가 직설적인 걸 빼면 마음 씀씀이부터 배려심까지 남달랐다.
은비는 손을 잡는 걸 좋아하는지 스스럼없이 내 손을 잡았다. 이번에도 역시 보드라운 손에 이끌려 1층 주방으로 내려갔다.
잠시 소파에 앉아있자 은비가 국민 야식 라면과 왕만두, 순대, 떡볶이를 한상 차려왔다.
은비는 나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 지 내가 야식을 배속에 욱여넣는 중에도 이것저것 계속 물어왔다.
“산에서 혼자 외롭지 않았어?“
“처음엔 조금 그랬는데, 그것도 몇 달 지나니까 지낼 만했어.”
“대단하다. 난 6개월 동안 무서워서 방 밖에도 못 나왔는데.“
“어린 나이라 더 그랬을 거야.“
“할아버지가 나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셨어. 밥도 안 먹고 울기만 했거든. 그때 소연 언니가 6개월 내내 내 곁에 있어 주었어. 언니와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난 지금도 방안에 갇힌 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 거야.”
“나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것같이 마음이 아팠어. 그래서 네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아.“
“오빠 엄마도 누구에게 당했는지 모르지?”
“몰라.“
“나도 몰라. 대형 트럭에 정면으로 충돌했다는 것만 알뿐 목격자가 없어서 누가 그랬는지 알 수가 없어. 할아버지가 탐정까지 고용해 백방으로 범인을 잡기 위해 노력하셨지만, 찾을 수가 없었어. 이상하지?”
“그러네. 사람은 찾질 못해도 사고 차량은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이상하다.”
“누군가 우리 식구 전부를 노린 게 틀림없어. 그날 내가 아픈 바람에 할아버지가 나을 돌봐주느라 엄마·아빠만 외출하셨다가 봉변을 당하셨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할아버지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아. 할아버지만큼 성공한 독립투사도 없고 주변에 힘든 독립운동가 가족과 단체들을 많이 후원하고 계셔. 독재정권을 향해 쓴소리도 많이 하시고, 독립운동가의 탈을 쓴 친일파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한 일도 여러 번 있었어. 그러니 놈들이 좋아할 리가 없지.”
“그렇긴 하겠다.“
할아버지와 은비 주변에 경호원이 많은 이유를 이젠 알 것 같았다. 은비가 능력자로 성장하며 집 안에 있던 경호원은 모두 철수했지만, 밖을 나갈 땐 항상 10여 명이 이상의 경호원이 따라붙었다.
친일파들에게 자신들의 치부를 낱낱이 알고 있는 은비 할아버지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다른 독립운동가처럼 집안이 망해 못 배우고 가난하면 그나마 덜할 텐데, 국내 20대 기업 안에 드는 탄탄한 회사를 일구고, 정부에 반하는 단체들을 후원하고, 독립 운동가 후손들까지 돌보며 사사건건 자신들을 비판하고 있으니 속에서 열불이 났을 것이다.
은비 말로는 100대 기업 중 매년 세무조사가 나오는 유일한 기업이 미래정밀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꿋꿋이 버티며 이만큼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할아버지의 뚝심과 엄청난 기술력 덕분이었다.
그런 뛰어난 기술력을 가진 기업이 국내에 판로가 없어 매출의 95% 이상을 수출에 의존한다는 것이 이 나라의 슬픈 현실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오빠! 우리 기분도 그런데 술 한 잔 할래?”
“술도 마실 줄 알아?“
“그럼! 내 나이가 몇인데?”
“이제 20살이잖아.“
“오빠도 나보다 한 살밖에 안 많거든.”
“난 술 먹자고 한 적 없다.”
“잔말 말고 따라와.“
또다시 보드라운 손에 끌려 2층 은비의 방으로 올라갔다. 여자 방은 생전 처음이라 그런지 발을 들여놓는 순간 코끝을 자극하는 향긋하고 풋풋한 내음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냄새 좋지?”
“응? 아...“
“숙녀 방에 들어와서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어떻게 해. 그건 실례잖아.”
“미안해! 여자 방은 처음이라 그만...“
“킥킥킥~ 그렇게 좋아?”
“응! 흐~”
은비가 권하는 대로 의자에 앉자 냉장고에서 포도주 한 병 꺼내왔다. 까만 병에 영언지 프랑스언지 알 수 없는 글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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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대화체를 수정했습니다.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