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6 첫 번째 전투 =========================================================================
6. 첫 번째 전투
잎과는 달리 몸통은 엄청나게 썼다. 그래도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는 속담을 믿고 나머지도 입안에 털어 넣고 질겅질겅 씹자 언제 그랬냐는 듯 스르르 녹아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산삼 한 뿌리를 통째로 먹자 갑자기 열이 나며 세상이 빙빙 돌았다. 책에서 본 명현현상(瞑眩現象)이 떠올랐다.
생각이 드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지며 그대로 꼬꾸라져 얼굴을 바닥에 처박고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잤는지 해가 중천에 뜬 후에야 일어났다. 크게 기지개를 켜고 몸을 움직이자 개운하다 못해 활력이 넘쳤다.
하지만 방안은 지독한 악취가 가득 차 있었다. 지난번 각성 때보다 더 많은 때 국물이 옷을 적신 것도 모자라 방바닥까지 점령한 상태였다.
오물 덩어리가 잔뜩 쌓인 방안을 치우자 반나절이 후딱 지나갔다. 당분간 환기를 시켜놓지 않으면 코가 썩을 만큼 냄새가 사라지질 않았다.
한 달 후에 알았지만, 난 하루가 아닌 무려 일주일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약효가 워낙 세 일반인이었다면 목숨을 읽을 수도 있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천고의 기연은 바로 이런 것인지 자고 일어나자 키가 5cm나 자라있었고, 능력도 크게 향상해 500m까지 기감할 수 있었다.
또한, 산삼의 강력한 양기가 하체에 몰리며 고추가 전보다 세 배로 커져 있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989년 10월 10일
시내에 들어가 가죽을 팔고 헌책방에서 들어 읽을 만한 책을 산 후 책방 주인이 모아둔 신문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산속에 홀로 산다고 세상일에 무관심할 순 없어 한 달에 한두 번 시내에 나가면 철 지난 신문을 가져다 읽곤 했다.
한참 신문을 뒤적이다 보니 재미난 기사를 발견했다. 미국의 엠코사가 개발한 정밀포스측정기에 대한 기사였다.
엠코사는 레드스톤과 레드몬 사체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기업으로 미국을 대표하는 다국적기업 중 하나였다.
1975년 엠코사가 개발한 간이측정기 일명 감별기 덕분에 미국은 잠재 능력보유자(잠능자)를 선발할 수 있었다.
감별기는 중요지표인 힘, 민첩, 체력, 정신력 수치를 표시할 순 없지만, 일반인과 능력자의 차이를 찾아낼 수 있어 능력자와 잠능자 확인에 사용하고 있었다.
4년 전 엠코사가 개발한 정밀포스측정기는 감별기보다 진일보한 제품으로 능력자의 중요지표를 수치화해 나타낼 수 있었다.
정밀포스측정기의 개발은 그동안 모호했던 피지컬리스트의 역할을 확실하게 구분 짓는 계기와 함께 능력자의 장단점을 명확히 알려줘 보다 강력한 능력자를 양성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또한, 중요시설물 보호와 공항, 항만 등 출입국 감시에 이용할 수 있어 테러를 사전에 방지할 수 있었다.
감별기는 휴대가 가능한 소형이라 편리성은 있지만, 기계에 손바닥을 올려놓아야 능력자와 비능력자를 구별할 수 있어 적성국가에서 보낸 스파이나 테러범을 찾아내는 용도론 효과적이지 않았다.
정밀포스측정기는 덩치가 큰 대신 10m까지 측정할 수 있어 문이나 검색대 형태로 제작하면 공항이나 항구를 통해 은밀히 잠입하는 능력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미국과 소련을 필두로 수많은 국가에서 상대방의 정보와 기술을 빼내고, 요인을 납치·살해하는 일에 능력자를 동원했다.
능력자를 이용할 경우 적은 인원으로 큰 효과를 볼 수 있어 큰 이득을 볼 수 있었지만, 상대도 능력자를 활용하자 자신들도 막대한 피해를 보게 됐다.
이를 방지하고자 1984년 8월 19일 유엔에서 능력자 테러이용 금지조약이 발효됐고, 1985년 정밀포스측정기가 개발되며 능력자를 군사적 목적에 이용하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1989년 11월 15일
오늘도 어김없이 망태기를 두르고 산으로 올라갔다. 추운 겨울이 다가오는 만큼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선 서둘러 식량을 준비해야 했다.
레드문으로 숲이 풍요로워졌다고 해도 겨울은 봄·여름·가을만큼 풍족한 식량을 제공하진 않았다.
오늘은 조금 더 먼 곳까지 나가볼 생각이었다. 4년 9개월간 집 근처 산들은 이 잡듯이 뒤졌더니 먹을 게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배속의 거지를 잠재우려면 사냥감이 더 풍부한 먼 산으로 가야 했다. 산을 몇 개 넘자 한 번도 온 적이 없는 을씨년스러운 계곡에 들어서게 되었다.
기감을 최대한 넓게 펼치며 천천히 계곡 안으로 진입했다. 200m를 진입하자 섬뜩한 기운이 느껴졌다.
평소에 피나게 훈련한 대로 가장 큰 나무로 재빠르게 뛰어올랐다. 잎이 무성한 곳에 몸을 숨기고 전방을 주시하자 10초도 되지 않아 황소만 한 레드몬이 빠르게 달려 나왔다.
놈은 조금 전 내가 서 있던 곳을 중심으로 코를 ‘킁킁~’ 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황갈색 바탕에 검은 점무늬가 가득한 레드삵이었다.
두동장(頭胴長·주둥이 끝에서 항문 중앙까지의 길이) 2.3m, 꼬리 길이 90cm로 고양잇과 동물에서 변이한 놈으로 한국명은 삵이었다.
레드삵은 선공형이자 하급 레드몬으로 호랑이와 표범, 곰, 늑대가 사라진 대한민국에선 멧돼지에서 변이한 레드보어를 빼면 숲에선 최고의 포식자 중 하나였다.
혼자 생활하는 레드삵은 인간처럼 각성을 통해 변이하거나 레드몬인 부모의 피를 물려받아 레드몬으로 태어났다.
한반도를 비롯해 중국 북동부, 우수리 강, 시베리아 등지에 분포하는 레드삵은 아름다운 털 모양과 뛰어난 보온력 그리고 기관총으로도 뚫을 수 없는 가죽 덕분에 부호들이 가장 선호하는 물건중 하나였다.
하급 레드몬으로 가죽만 개당 3,000만 원이었고, 최근엔 눈알이 백내장과 녹내장 등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며 많은 이가 찾고 있었다.
하지만 레드삵은 기관총으론 사냥이 힘들고 대전차 로켓인 RPG-7이나 판저파우스트3(Panzerfaust 3)가 있어야 잡을 수 있었다.
더구나 빠른 스피드로 인해 대전차 화기로 맞추는 건 꿈같은 일이라 군대와 일반인이 잡겠다는 건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온몸에 기감력을 둘리며 칼에 힘을 모았다. 철근으로 만든 조잡한 칼이 미미하게 떨리며 파란빛이 뿜어져 나왔다.
기이한 산삼을 복용한 이후 기감력이 크게 증가하며 나 자신만 관조하게 아니라 다른 생명체의 몸에 기를 침투시켜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다.
아직 능력이 얕아 기초적인 크기와 무게 등만 알 수 있지만, 이를 활용하면 놈의 움직임을 더욱 세세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은밀히 기를 레드삵에게 밀어 넣자 놈이 나를 바라봤다. 놈은 이미 냄새로 내 위치를 알고 있었다.
영리한 놈은 내가 방심하기를 기다리며 모른 척 앙큼을 떨고 있었다. 힘차게 나무를 박차며 칼을 뻗어 놈의 머리를 노렸다.
레드삵은 포식자가 된 지 3년이 넘은 성체였다. 야생에서 3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 시간 동안 놈은 무수히 많은 도전을 이겨내고 이 자리를 지켜냈다. 살의를 크게 일으킨 레드삵이 앙칼지게 포효했다.
“크앙~”
포효와 함께 놈이 펄쩍 뛰어오르며 앞발로 칼을 후려쳤다. ‘탕~’ 소리와 함께 놈의 발이 튕겨 나갔다.
깜짝 놀란 놈이 급하게 몸을 비틀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고양잇과 동물답게 순발력 하나는 끝내줬다.
하지만 날 우습게 본 대가로 앞발에 상처가 나 피가 흘려내렸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은지 발을 절룩거리며 슬금슬금 옆으로 돌았다.
노랗게 빛나는 놈의 눈을 직시하며 다친 놈의 오른발을 목표로 빠르게 쇄도했다. 잽싸게 몸을 튼 레드삵이 반대방향으로 몸을 빼내려 했다.
난 처음부터 눈이 아닌 기감력을 사용해 놈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기감력은 눈보다 빨라 놈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놓치지 않았다.
살짝 기우뚱하는 사이 놈의 다친 다리에 칼을 찔러 넣었다. 재빨리 몸을 뒤로 빼내자 커다란 왼발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크앙~”
예기에 당한 상처에 오른쪽 다리가 떨어져 나갈 듯 달랑거리며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레드삵의 노란 눈에 공포가 어른거렸다. 천천히 놈의 주의를 돌며 숨통을 끊을 준비를 했다.
다리에서 피가 쏟아져 내리며 과다 출혈로 놈이 지쳐가고 있었다. 레드몬이 재생력과 회복력이 뛰어나다 해도 포스가 깃든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덜렁거리는 다리에서 피가 샘물처럼 흘러내리자 다리까지 떨기 시작했다. 좌우로 스텝을 밟으며 놈의 시선을 흩트린 후 번개같이 다가가 레드삵의 머리에 칼을 꽂았다.
조잡한 철근 칼이 레드삵의 가장 단단한 머리뼈에 구멍을 뚫고 단번에 뇌를 부숴 버렸다.
첫 전투가 끝나자 짜릿한 전율과 함께 손발이 떨려왔다. 무슨 정신으로 놈을 상대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말 그대로 본능에 따라 놈과 싸웠다. 나 자신조차 레드몬을 상대로 이렇게 잘 싸울지 생각도 못 했었다.
마음이 진정되자 엄마가 보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다면 원이 없을 것 같았다.
100kg짜리 레드삵을 가볍게 둘러매고 집으로 돌아왔다. 원래 살쾡이는 무게가 10~20kg 사이로 포식자 중에선 가장 전투력이 약한 동물 중 하나였다.
하지만 레드몬으로 진화한 순간 호랑이와 표범, 곰을 간식으로 잡아먹을 수 있었다. 레드몬을 생태계 파괴자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먼저 놈의 가죽을 벗겨 바위 위에 조심스럽게 널었다. 장당 3,000만 원이나 하는 물건으로 100만 원도 만져본 적이 없는 나에겐 실감조차 나지 않는 거금이었다.
하급 레드삵의 가격은 가죽을 합쳐 평균 6,000만 원 선으로 레드스톤까지 나오면 단번에 1억 5,000만 원을 손에 쥘 수 있었다.
1억 5,000만 원이면 강남의 은마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당시 은마 아파트 102㎡와 112㎡는 각각 9,500만 원, 1억 1,000만 원으로 아파트를 사고도 돈이 남았다.
놈의 배를 갈라 심장과 간을 꺼냈다. 커다란 심장을 살짝 헤집자 뭔가 딱딱한 물체가 손에 걸렸다.
달걀형의 붉은 루비로 크기가 5cm에 육박했다. 물에 잘 헹군 후 하늘에 비춰보자 영롱한 붉은 빛이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20세기의 황금, 레드스톤이었다. 공해가 전혀 없는 청정에너지인 레드스톤은 몬스터와 마찬가지로 최하급부터 하급, 중급, 엘리트, 상급, 최상급까지 총 6단계로 나뉘었다.
가장 낮은 최하급 레드스톤을 발전에 사용하면 중산층 1,000가구가 100~200일간 사용할 수 있는 전력을 생산할 수 있었다.
레드스톤은 크기와 에너지로 등급을 구분했다. 가장 작은 최하급 레드스톤은 1~2cm 크기였고, 하급은 3~5cm, 중급은 6~8cm 크기였다.
에너지양은 최하급 레드몬이 500몬(레드스톤 에너지 단위) 이하였고, 하급은 501~1,000몬 사이, 중급은 1,001~2,000몬 사이였다.
아직까진 대형 발전소 위주로 레드스톤이 사용되고 있지만, 조만간 자동차용과 선박용도 출시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었다.
바위 위에 레드스톤을 올려놓고 레드삵의 뼈를 추려냈다. 손발톱과 이빨까지 모두 뽑아 가죽과 함께 바위에 널었다.
뼈를 모두 발라낸 다음 고기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솥단지에 넣고 통째로 삶았다. 심장과 간, 눈알, 쓸개 등은 소금에 찍어 날 걸로 먹었다.
바로잡은 동물의 간과 심장, 쓸개는 생으로 먹어야 영양소 파괴가 적었다. 많이 비릴 거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단맛이 많아 자꾸 입맛을 다시게 했다.
사실 고기를 자주(?) 먹기는 힘들었다. 많아야 일주일에 서너 번으로 그것도 풍족하지 않아 맛만 보는 정도였다.
한창 자라고 있는 나이에 단백질 공급이 중요했다. 약초와 열매만으론 왕성한 소년의 식욕을 잠재울 수 없었다.
끓는 물에 소금을 한 움큼 집어넣었다. 3시간 동안 푹 삶은 고기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부엌칼로 쓱쓱 잘라내어 소금에 찍어 먹자 놈의 큰 다리 한 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레드삵의 육질은 포식자라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럽고 씹을수록 단맛까지 났다. 포식자는 근육이 많고 비계가 작아 고기가 질기고 누린내가 심해 맛이 없었다.
하지만 레드삵은 그런 통념을 깨고 입안에서 살살 녹듯 사라졌다. 지금까지 먹어본 고기가 많진 않았지만 레드삵 만큼 맛있는 고기는 처음이었다.
뼈를 추려내고 머리를 떼어도 족히 30kg은 될 레드삵의 고기를 한방에 뱃속에 모두 밀어 넣었다.
「쩝~ 쩝~ 정말 맛있네. 앞으로 이놈이나 잡으러 다닐까?」
============================ 작품 후기 ============================
4월 1일부로 많은 부분이 바뀐 레드문이 새롭게 연재됩니다.
내용부터 형식, 등장인물, 레드몬 능력 등 많은 부분이 바뀌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