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5 기이한 산삼(山蔘) =========================================================================
5. 기이한 산삼(山蔘)
강릉은 서울과 비교하면 물가가 싼 대신 도시방어가 형편없이 허술했다. 도시를 두르고 있는 방벽은 서울의 절반 높이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튼튼하지 못해 레드몬이 방벽을 넘거나 부수고 넘어오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그래도 탱크와 중화기로 무장한 군인들이 중요거점을 지키고 있어 피해가 그리 크진 않았다.
일단 방벽 너머 살기에 적당한 곳을 알아보기로 했다. 지방은 읍면동에도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주민자치대와 경찰 그리고 인근 군부대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지키며 살아갔다.
이들을 피해 레드몬 활동이 적은 지역을 찾아다녔다. 안전한 서울과 대도시로 사람들이 몰리며 강릉의 농촌도 버려진 집이 제법 많았다.
특히 레드몬 출현이 잦은 산기슭엔 대부분 농가가 버려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덕분에 이틀 만에 수월하게 비를 피할 집을 구할 수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 엉성한 칼을 한 자루를 만들었다. 레드문이 뜨고 레드몬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소지하기 시작했다.
사실 일반인이 칼을 소지한다고 레드몬을 잡을 수도 방어할 수도 없었다. 순전히 정신적인 안정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지 직접적인 도움이 안됐다.
하지만 심적 안정을 취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막을 수 없어 정부는 허가제인 총기류를 제외하고 도검류 소지는 허용했다.
버려진 공장에서 철근 몇 개를 주워와 불에 달군 후 쇠뭉치를 이용해 온종일 내려쳐 칼 모양을 잡았다.
칼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꼬박 하루를 매달렸다. 칼은 철근 세 가닥을 꼬아 찌르기 전용으로 만들었다.
날카로운 날이 있다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겠지만, 철근으로 만든 칼로 레드몬을 상대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이라 일찌감치 포기했다.
호신용(?) 칼이 만들어지자 온종일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먹을 것을 구하고, 한편으로 몸을 단련했다.
말은 단련이라고 하지만 아는 무술도 없고, 아는 훈련방법도 없어 많이 뛰고 많이 구르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목표로 하는 보조사냥꾼은 한 달 봉급이 100만 원 정도였다. 1985년 여성 봉급은 10만 원 안팎이었고, 남성 대졸 봉급이 30만 원 정도라 100만 원은 엄청난 거금이었다.
당시 80kg 쌀 한 가마니가 7만 원, 라면 한 봉지 100원, 자장면 한 그릇 500원, 탄산음료 300원, 4인 가족 하루 식비가 대략 5,000원 정도에 불과했다.
보조사냥꾼은 많은 임금을 받는 만큼 소모품처럼 사용하다 버리지는 경우가 허다해 학력이나 연고를 따지지 않았다.
위험부담은 크지만 부랄 두 쪽밖에 없는 내가 선택하기엔 이보다 좋은 직장은 없었다.
거처가 마련되자 쌀 한 가마니를 사 끼니를 해결하고 주변을 정찰하며 먹을 것을 구했다.
아직은 눈이 녹지 않은 추운 겨울이라 열매와 약초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토끼와 겨울잠에 빠진 개구리, 뱀 등이 많아 굶어 죽진 않았다.
기차에서 앓은 열병 이후 식욕이 왕성해져 먹어도 먹어도 항상 배가 고팠다. 80kg 쌀 한 가마니를 한 달 만에 먹어치울 만큼 배속에 들어앉은 거지가 끊임없이 먹을 것을 요구했다.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쉬지 않고 먹을 것을 찾아 산을 헤맸다.
추운 겨울이 지나자 산엔 먹을 것이 넘쳐났다. 사람 손이 타지 않은 데다 레드문과 함께 식물의 생장 속도가 가파르게 증가해 숲은 원시시대처럼 풍요롭게 변해 있었다.
덕분에 굶주림은 피할 수 있었지만, 언제 레드몬이 나타날지 몰라 정신을 집중한 채 주변에서 나는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끊임없이 주변을 관찰하며 산을 타자 어느 날 숲과 내가 동화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날이 이후 숲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느끼기 위해 노력하자 나도 모르게 기감이 발달하게 됐다.
기감이 점점 발달하자 사방 100m 이내의 사물은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무엇이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움직이지는 지 알 수 있었다.
레드몬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무기가 생기자 온 힘을 다해 기감력(氣鑑力)을 키우는 데 노력했다.
기감력을 얻자 식량을 얻는 일이 더욱 수월해졌다. 토끼와 고라니, 개구리, 뱀, 메뚜기 등 산과 들에 숨은 동물들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 잡아먹으며 체력을 키우자 2년 만에 몸이 훌쩍 자라났다.
키는 25cm나 자라 170cm가 넘었고, 몸무게도 65kg이나 나갔다. 힘도 좋아져 사람만 한 돌덩이도 가볍게 들어 던졌고, 나무 위를 마치 평지처럼 달릴 수 있었다.
체력과 지구력도 좋아져 온종일 산을 뛰어다녀도 힘들거나 지치지도 않았다. 그렇게 2년 만에 한몫은 충분히 할 힘이 붙어 있었다.
1988년 2월 강릉
강릉에 온 지 3년 만에 내 몸의 변화를 확신할 수 있었다. 기차에서 앓은 열병이 사실은 병이 아니라 능력자가 되는 각성 과정이었다.
그때 흘린 지독한 땀은 몸속에 있던 노폐물이 빠져나오며 생긴 악취였다. 난 그것도 모르고 아까운 옷을 버렸다고 타박만 했었다.
능력자로 각성한다고 곧바로 큰 힘을 사용하는 건 아니었다. 레드몬도 변이 후 최소 3개월에서 1년은 지나야 제대로 된 힘을 발휘했다.
사자 새끼가 태어나자마자 포식자가 될 수 없듯이 레드몬과 능력자도 성체와 성인이 되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처음 6개월간 산과 숲을 뛰어다닐 땐 무척 힘이 들었다. 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턱까지 차는 숨을 이를 악물고 뛰어다닌 것이지 능력자로 각성해 힘이 붙어 뛰어다닌 게 아니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고 1년이 흐르자 힘과 체력, 스피드가 붙으며 각성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힘과 체력이 늘어난 것으로 생각했지 내가 능력자가 됐으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기감력을 얻고 난 다음에야 내가 능력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기감력을 얻은 다음부턴 능력이 하루가 다르게 커졌다.
작은 소나무는 한 방에 두 동강을 낼 수 있었고, 찰과상은 몇 시간 안에 깨끗이 아물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3년이 지나자 기감할 수 있는 범위도 200m로 늘어나 그 안에선 누구도 날 속일 수 없었다.
더구나 기감력을 몸에 두르면 평소보다 청각과 후각, 시각이 몇 배나 증가했다. 당연히 힘과 스피드도 높아져 평소보다 두 배 강한 힘을 낼 수 있었다.
또한, 기감력이 발달하자 외부의 사물만 감지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내부도 기로 다스리고 감지할 수 있었다.
자신을 관조하는 건 외부의 생명체를 느끼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일로 자신을 관조할 수 있어야 내부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더 나은 길을 열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외부뿐만 아니라 내부까지 기감할 수 있다는 건 힘과 체력이 향상하는 것보다 더욱 큰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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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김없이 먹을 것을 구해 숲으로 들어갔다. 찌는 듯한 더위도 숲 속으로 들어가면 한결 누그러졌다.
밀림 같이 울창한 숲이 뜨거운 태양을 막아주며 더러웠던 몸을 식혀주고 있었다. 나무껍질을 벗겨 꼬아 만든 망태기를 매고 한 손에 철근으로 만든 칼을 든 채 숲으로 들어섰다.
여전히 옷차림은 해어진 바지와 구멍 난 반팔 티가 전부였다. 가끔 동물 가죽을 읍내에 내다 팔고 있지만, 그거론 먹을 쌀조차 마련하기 빠듯했다.
가죽을 팔기 위해 가끔 읍내에 들어가면 먹고 싶은 게 너무도 많았다. 과자부터 아이스크림, 떡, 생선 등 내 눈을 유혹하는 음식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음식보다 날 더 설레게 하는 건 여자였다. 젊은 여자나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지나갈 때 코끝을 간질이는 은은한 향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설렜다.
하지만 너무도 초라한 내 모습에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마저 푹 숙이고 지나가야 했다.
읍내에 갔다 온 날은 밤마다 발기한 고추를 잡고 끙끙 알았다. 성관계가 뭔지도 모르면서 막연한 동경심만으로도 밤새 끙끙 알아야 했다.
이 시대 대한민국은 학교에서 성교육은 고사하고 남성과 여성의 기본적인 생리현상조차 가르쳐주지 않았다.
양반의 나라였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사상이 1988년에도 뿌리 깊게 사회에 전반에 박혀있었다.
기본적인 욕구 해소의 방법조차 잘 알지 못한 난 잡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밤마다 앞마당에서 칼춤을 춰야 했다.
하지만 성욕이 칼춤만으로 해결되진 않았다. 그렇다고 월담을 할 수도 없어 체력단련에 죽어라 정력을 쏟아 부으며 의도치 않게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었다.
숲 속을 헤매며 먹을 것을 망태기에 주워담았다. 3년 넘게 산을 타자 약초와 독초는 구별할 수 있었다.
난 약초와 독초를 구별하지 않고 보이는 족족 망태기에 담았다. 동의보감을 통해 독초도 약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소량씩 섭취해 면역력을 키우고 있었다.
이 방법은 매우 위험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능력자의 강인한 체력이 독을 해독하고 내성까지 키워주었다.
하루해가 서서히 지기 시작하는 오후 4시경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 동안 안 보이던 좋은 약초가 많아 그걸 따다 산을 3개나 넘고 말았다.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에 발길을 되돌려 돌아나가는 순간 저 멀리 절벽 중간에 동물인지 식물인지 모를 이상한 물체가 느껴졌다.
깜짝 놀라 잽싸게 나무 위로 뛰어올라 아름드리 소나무에 몸을 숨겼다. 수천 번도 더 준비하고 연습한 행동으로 조금이라도 이상한 생명체가 감지되면 주저 없이 나무 위로 올라가 몸을 숨기고 기척을 숨긴 채 죽은 듯이 있어야 했다.
30분 동안 기감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원인 모를 생명체에 집중했다. 1시간이 지나도 침입자는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기이한 생명체는 마치 땅에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동물이라면 작은 미동은 있어야 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도망갈 것인지 아니면 놈을 확인할 것인지 결정해야만 했다. 동물의 후각은 인간보다 수배에서 수십 배 이상 뛰어났다.
동물에서 진화한 레드몬의 능력은 더욱 뛰어나 만약 선공형 레드몬이었다면 놈이 먼저 나를 발견하고 공격했을 것이다.
생각이 정리되자 조심스럽게 이동해 절벽에 다가갔다. 절벽 중간에 툭 튀어나온 바위 밑에 기이한 생명체가 웅크리고 있었다.
안력을 돋아 바라보자 바위 위에 산삼으로 보이는 식물이 자라 있었다. 3년 넘게 산에서 굴러먹었기 때문에 산삼 잎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산삼이 왜 기이한 생명체로 느껴졌는지 알 순 없지만, 위험이 없다고 판단되자 산삼에 다가갔다.
레드문은 동물에게만 영향을 끼친 게 아니었다. 식물에도 큰 영향을 끼쳐 곡물의 경우 낱알이 굵어지고 수가 늘어났다.
약초의 효과도 크게 증가해 산삼과 영지, 구기자, 하수오 등을 찾는 사람이 줄을 잇고 있었다.
하지만 심마니와 약초꾼이 크게 줄며 구하기가 힘들어 현재는 부르는 게 값일 만큼 비싸게 팔리고 있었다.
나무들을 몇 개 건너뛰어 산삼이 있는 바위에 도착했다. 근처에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맑아질 만큼 강한 향기를 풍겨왔다.
장갑을 끼고 주위의 흙을 조심스럽게 긁어냈다. 천천히 산삼을 잡아가자 마치 동물처럼 칭얼대듯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생각지도 못한 산삼의 반응에 흠칫 놀랐지만, 마음을 다잡고 재빨리 산삼을 캐내 절벽을 내려왔다.
어른 팔뚝만 한 산삼은 잎이 6개였고, 6개짜리 잎이 일곱 줄기나 있었다. 쌀알만 한 뇌두의 주름이 200개가 넘었고, 길이는 뇌두와 잔뿌리를 빼고도 20cm가 넘었다.
동의보감에서 본 게 맞는다면 이놈은 최소 수백 년, 어쩌면 천 년 된 천종산삼일지도 몰랐다.
산삼을 망태기에 조심스럽게 담아 집으로 날듯이 돌아왔다. 팔아 돈을 챙길까 하다가 내가 먹는 게 이익이란 생각에 조심스럽게 흙을 털어내고 잔가지와 산대, 잎부터 잘근잘근 씹어 먹었다.
쌉쌀하면서도 달착지근한 맛과 향기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몸통을 입어 넣자 산삼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정말 영기가 하늘에 뻗친 놈인지 동물처럼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눈을 질끈 감고 놈을 아작아작 씹어 먹었다.
기이한 산삼이 고통에 몸부림을 친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놈을 생각해줄 처지가 아니었다.
내 코가 석 잔데 산삼 따위를 걱정할 순 없었다.
============================ 작품 후기 ============================
4월 1일부로 많은 부분이 바뀐 레드문이 새롭게 연재됩니다.
내용부터 형식, 등장인물, 레드몬 능력 등 많은 부분이 바뀌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