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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문 진화의 시작-3화 (3/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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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돌아가신 어머니를 빼고 세상 사람 중 나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가정폭력의 달인이었으며, 아무 이유 없이 가족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파렴치한(破廉恥漢)이었다 .

어머니는 18세 꽃다운 나이에 아버지와 결혼한 그 날부터 차가운 눈밭에서 숨이 거둔 그 날까지 단 하루도 쉬지 못한 채 평생을 자식과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다 돌아가셨다.

온종일 폭력과 욕설이 낡고 허름한 지하 단칸방을 울렸다. 어머니는 식당과 행상, 청소부 등 무엇 하나 가리지 않고 일하셨다.

하지만 세상은 가난한 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오히려 가난하고 힘없는 자는 착취의 대상일 뿐이었다.

더럽게 못사는 판자촌과 재개발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낡은 연립들만 가득한 곳에서도 정치인과 경찰, 공무원 그리고 동네 양아치들은 동업자가 되어 영세민과 서민들의 피를 빨아 먹고 살았다.

1970년대 대한민국은 쥐꼬리만 한 임금도 착취해가는 알뜰한 나라였고, 그마저도 띠어 먹는 악덕 기업주들이 판치는 세상이었다.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도 없던 시절로 가난한 자에겐 법보다 주먹이 몸서리치게 무섭던 시대였다.

난 1970년 12월 22일 어두운 지하 단칸방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984년 12월 28일 사무치도록 보고 싶은 엄마가 세상을 떠나며 홀로 남겨지게 되었다.

엄마는 1984년 12월 28일 새벽 4시 먼동이 떠오르지도 못한 새벽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한 많은 생을 다하셨다.

허약해질 때로 허약해진 몸을 이끌고 새벽부터 남의 집 청소를 위해 눈보라 속을 걸어가셨던 엄마는 이미 몸과 마음이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허약해져 있었다.

60대 할머니처럼 늙어버린 엄마는 어린 내가 아니었다면, 이미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 만큼 마음속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아침 6시 30분 청소부가 엄마를 발견했을 땐 이미 숨을 거두신 후였다. 사인은 둔기에 의한 후두부 강타와 과다 출혈로 인한 쇼크였다.

누군가 엄마의 빈 지갑을 노리고 흉기로 뒤통수를 내리쳤고, 이로 인해 차가운 눈밭에 쓰려져 숨을 거두시게 됐다.

경찰은 범인을 잡겠다는 의지가 없는 것인지 3년 전 집을 나간 아버지와 어린 나의 행적만을 반복해서 물었다.

시도 때도 없이 경찰서에 불려 나가야 했고, 그때마다 토시 하나 다르지 않은 같은 질문과 답변만이 오갔다.

마치 어린 나를 범인으로 지목하려는 듯 담당 형사는 끊임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게 했다.

조사는 나를 빼면 엄마를 발견한 청소부 아저씨가 전부였고, 주변 탐문조사는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위압적인 자세로 나만 추궁하던 경찰은 한 달 만에 엄마의 죽음을 미해결 사건으로 마무리했다.

내가 돈이 있었다면... 내가 힘이 있었다면... 그들이 엄마의 죽음을 이렇게까지 무성의하게 처리했을까?

나는 수천 번도 넘게 같은 질문을 나에게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개 같은 소리였다.

엄마가 돌아가시자 나를 지켜주던 산동네의 지하 단칸방도 더는 안식처가 되어주질 못했다.

엄마가 장롱 속 깊이 감추어두신 현금 30만 원만이 나에게 남은 유일한 재산이었다.

집주인은 엄마가 돌아가신 지 일주일 만에 나를 거리로 내쫓았고, 어리다는 이유로 월세 보증금 30만 원도 떼어먹었다.

내가 보증금 반환을 요구하자 집주인은 그동안 집세가 밀렸다고 억지를 부리며 경찰서에 신고했고, 내가 아니라고 아무리 매달려도 경찰은 집주인 편만 들었다.

울며불며 사정했지만, 돌아오는 건 발길질과 욕설 그리고 가래침이 전부였다. 고아에 거지나 다름없는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은 이제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학교생활도 즐거웠던 기억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구멍 난 낡은 옷과 고물상에서 주워온 크레파스, 찢어진 스케치북, 점심조차 싸온 날이 손으로 꼽힌 학교생활이 평탄할 리가 없었다.

국민학교 내내 학생뿐만 아니라 선생들까지 무시하고 거지 취급하기 일쑤였다. 내가 살던 산동네는 서울에서도 가장 가난한 동네라 형편이 모두 어려웠지만, 그중에서도 우리 집은 유독 가난했다.

아버지는 온종일 술타령이었고, 조금만 비위가 틀어져도 집안에 남아나는 물건이 없었다.

부수다 부수다 부술 게 없으면 어린 나를 샌드백처럼 마구 두들겨 팼다. 그러다 보니 얼굴과 몸엔 멍 자국이 가실 날이 없었고, 그런 내가 가엽고 미안해 엄마는 항상 눈물로 나를 끌어안고 우셨다.

매월 내야 하는 육성회비도 제때 내 본 적이 없었고, 학교에서 부모면담이라고 공식적으로 촌지를 요구하는 날도 줄 돈이 없었다.

선생들은 이런 나를 교육의 일환이라는 말로 위로해주며(?) 흠씬 두들겨 팼고, 남들이 싫어하는 푸세식 화장실 청소를 고정으로 맡겨주셨다.

선생뿐만 아니라 매일같이 날 괴롭히는 놈들도 있었다. 놈들이 나를 괴롭히는 이유는 별로 특별할 것도 없었다.

항상 몸에서 풍기는 화장실 냄새와 지저분한 옷 그리고 가난이면 이유는 넘치고도 남았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고 괴롭히는 일엔 딱히 이유가 없었다. 약하고 괴롭히기 좋으면 핑계야 얼마든지 가져다 붙일 수 있었다.

입학한 그 날부터 나를 지독하게 괴롭히고 때리던 놈들의 우두머리는 같은 반 최동주였다.

매일같이 침 뱉고 때리는 것은 기본이었고, 수치심을 주기 위해 옷을 찢고 오줌을 갈기고 목에 새끼줄을 걸어 질질 끌고 학교를 돌아다녔다.

녀석 주변엔 똘마니들이 최소 5~6씩 따라다녔다. 최동주 어머니가 학교 육성회 회장이라 교장까지 눈치를 보고 있어 학교에서 놈의 행동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들의 폭행과 멸시가 점점 심해질수록 난 오기가 생겼고, 기필코 놈을 죽이겠다고 다짐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놈들과 선생들에게 두들겨 맞고 괴롭힘을 당하는데, 그런 오기와 독기마저 없었다면 오래전에 난 죽었을지도 몰랐다.

4학년 2학기 때 최동주가 도심 명문학교로 전학을 가며 놈을 죽여 버리겠다는 나의 결심은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으로 끝나고 말았다.

최동주와 내가 살고 있던 동네는 매우 가난한 곳이었지만, 최동주의 집은 서울에서 손꼽힐 만큼 큰 부자였다.

최동주의 할아버지 최주욱은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비상한 머리와 언변을 이용해 돈을 번 대표적인 친일파 중 하나였다.

최주욱은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자 재빨리 친일파와 일본 순사들에게 줄을 대고 독립군을 고발하는 등 친일행위에 앞장섰다.

이를 바탕으로 힘없는 농민들의 토지를 가로채고 이권에 개입하는 등 자신의 비상한 머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부자가 되었다.

최주욱으로 인해 죽은 독립투사들과 계몽운동가가 몇 십 명도 넘는다는 소문이 있을 만큼 악랄한 친일파로 남의 토지를 뺏기 위해 없는 죄도 만들어내 고발하는 등 출세를 위해 못할 짓이 없는 위인이었다.

해방 후 6·25사변이 일어나자 재빠르게 미군에 줄을 댈 만큼 사업수단도 아주 비상했다.

아부에도 능해 미군의 비위를 맞춰 훈장까지 받았고, 현재는 독립투사로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은 변신의 귀재이기도 했다.

최주욱은 빈민과 가난한 서민들이 살고 있는 땅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어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집에 갈 수조차 없었다.

이런 더러운 환경이 내게 세상의 부조리와 더러움을 알게 해줬다. 하지만 아무 힘도 없던 내게 남은 건 분노와 증오밖에 없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하지만 힘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들로 인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지만, 그래도 엄마가 있어 행복했다. 나의 가장 행복한 시절은 엄마와 둘이 같이 산 단 3년이었다.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새로 이사한 집은 전과 다를 것이 없는 산동네의 지하 단칸셋방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우리 모자에겐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보금자리였다. 폭력을 일삼을 아버지도 없었고, 나를 괴롭힐 최동주도 없었다.

밤늦게 식당일은 마치고 돌아오는 엄마를 마중 나가 같이 손 붙잡고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즐거웠다.

작은 밥상에서 같이 앉자 살갑게 밥을 먹는 것만으로도 난 행복했다. 이불 속에서 축 처진 엄마의 가슴을 만지고 자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나에겐 엄마와 함께한 시간이 유일한 행복이었다.

아버지란 작자가 집을 나가자 살림살이가 조금 나아져 가끔은 고등어 한 마리를 구워 엄마와 나눠 먹을 때도 있었다.

고등어 한 마리가 엄마와 나에겐 그 어떤 음식보다 맛나고 고소한 최고의 음식이었다.

너무 불행했기에 우리 모자는 이런 사소한 것조차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이었다.

============================ 작품 후기 ============================

4월 1일부로 많은 부분이 바뀐 레드문이 새롭게 연재됩니다.

내용부터 형식, 등장인물, 레드몬 능력 등 많은 부분이 바뀌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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