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Always
“음…….”
듣는 사람의 고막이 저릿해질 정도로 낮은 음성을 나른하게 터트리며 눈을 감은 채 기지개를 켰다.
몸을 일으키자 시트가 허리께로 스르륵 내려가며 탈의한 그대로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났다. 잠기운이 묻어 있는 얼굴은 이목구비가 꽉 들어차 여백 없이 그 유려한 얼굴선을 돋보이게 했다. 그에 반해 핏줄이 불거진 굵은 목선을 따라 떡 벌어진 어깨와 단단한 근육질 몸은 마치 예술가가 세심한 손길로 만들어 낸 듯했다.
일어나자마자 손으로 비어 있는 옆자리를 더듬었다. 이미 부재를 알고 있음에도 습관적으로 남아 있는 온기를 확인하는 동작이었다.
오늘은 모처럼의 여유로운 주말이었다.
오전에 일어나자마자 온기현과 함께 간단하게 토스트를 챙겨 먹었다. 그리고 입으로 우물거리며 눈을 비비적거리던, 잠이 덜 깬 연인의 얼굴을 씻겨 주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다큐멘터리 영화에 심취해서 잠 못 들던 온기현은 일어나서도 완전히 비몽사몽이었다. 새까맣고 결 좋은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았다. 뒤에 선 류주호의 가슴에 완전히 기대어 시중받는 모습을 보며 체중을 받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온전히 내맡긴 따스한 체온이 기꺼웠다. 아랫배에 힘이 몰릴 정도로.
처음엔 가벼운 키스로 시작했다. 졸음이 묻어나는 얼굴에 여느 때와 같이 키스를 내렸다.
나 약속 있는데.
하고 웅얼거리는 입에도 진득한 키스를 퍼부었다.
응, 알아.
행위에 열중하며 어물쩍 대답하자 온기현의 미간이 팍 찌푸려졌다. 얕게 칭얼거린다. 그래도 저도 화답하듯 혀를 휘감아 온다. 순식간에 욕구가 정수리 끝까지 차올랐다. 매일같이 난잡하게 해 대는데도, 매 순간 이랬다. 어쩔 수 없었다. 온기현을 앞에 두고서는.
그래서 정오까지 진탕 침대에서 구르다가 기진한 온기현을 껴안고 오수에 빠졌던 차다.
느지막이 일어나니 온기현은 이미 외출한 뒤였다.
뻐근한 목을 좌우로 까딱거리며 가볍게 푼 류주호는 실내화를 신고 바닥에 이리저리 떨어져 있는 옷가지를 주워 입은 후, 거실로 나왔다.
어쩐지 고소한 냄새가 났다. 부엌으로 걸어가다가 식탁 위에 올려진 하얀 종이를 발견했다. 종이가 날아가지 않게 하기 위함인지 위에 캡틴 아메리카 피규어가 올려져 있었다. 고개를 기울여 종이를 내려다봤다.
[나 현석이랑 윤규랑 저녁 먹고 올게! 저녁은 내가 만들어 놨으니까 꼭 챙겨 먹어! 일어나면 연락해. ^0^/]
류주호의 입가에 웃음이 맺힌다.
아마 핸드폰이 울리면 잠을 깨울까 봐, 이렇게 쪽지로 남겨 둔 것일 테다.
큭큭. 하고 목에서 자꾸만 웃음이 삐져나왔다. 꼭 저를 닮은 귀여운 글씨체다. 어떻게 글씨체까지 귀엽지? 이런 생물체가 다 있지, 어떻게?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심장이 옥죄어 왔다. 그러다 곧 아차, 하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찰칵. 찰칵. 셔터음이 여러 번 터졌다.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 가며 온기현이 남긴 쪽지를 카메라에 담았다. 앨범을 확인하고 자동으로 백업이 됐는지까지 꼼꼼히 확인했다.
예전에도 쪽지를 한번 남긴 적이 있다. 아직 둘이 삐걱대던 그 시절, 주인 없이 홀로 남아 있던 온기현이 먼저 간다는 말을 남기기 위해 쪽지를 써서 올려 둔 적이 있었다.
그 생각이 떠오르니 심히 입맛이 썼다.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
병신 같은 새끼.
자신에게 자조의 말을 흘렸다. 이제껏 자신을 깎아내리는 언행은 해 본 적도 없고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자신만만한 남자가 쪽지 한 장으로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자신이 그 쪽지를 쓰레기통에 버렸기 때문이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자신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었다. 쓰레기통을 뒤질 각오도 충분히 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버려진 온기현의 쪽지를 되찾아 오고 싶었다. 그것도 보관해 둬야 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하아.”
깊은 한숨과 함께 피규어를 들어 원래 있던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방향과 각도가 제대로 됐는지 신중하게 살폈다. 다시 안방으로 가 제 지갑 안에 쪽지가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부엌으로 돌아가니 냄비가 올려져 있다. 뚜껑을 열어 보니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확 퍼진다. 사실 된장찌개를 즐겨 먹지는 않는다. 하지만 누가 만들었는지 알고 있기에 벌컥벌컥 마실 수 있을 지경이었다. 된장찌개도 마찬가지로 카메라로 여러 번 찍었다.
누가 보면 미친놈 아니냐고 할 정도의 일련의 행동을 거친 후, 류주호는 일단 제 연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울리는 신호가 길다.
그놈들과 어울릴 때면 항상 이랬다.
버러지 1호와 버러지 2호.
과대였던 놈이 1호고 스터디에서 본 놈이 2호다. 류주호는 속으로 심현석과 이윤규를 세트로 묶어 ‘버러지들’이라고 불렀지만, 온기현에게는 비밀이었다.
―어, 여보세요?
“응. 자기야.”
―……어, 응. 잠깐만.
시끌시끌한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요란한 음악 소리가 크게 울렸다. 고막이 터져 버릴 지경이다. 어디지. 버러지들이 자꾸 제 연인을 여기저기 데리고 가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류주호의 응답에 온기현은 잠시 말을 하지 않더니 작게 잠깐 기다리라며 소곤댔다. 시끄러운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가게 밖으로 나온 듯했다.
―일어났어? 밥은? 먹었어?
“이제 먹으려고. 자기는 언제 와?”
―아……. 그, 어……. 조, 조금 있다가. 아, 아니, 지금.
어버버하고 눈을 깜빡이며 당황하는 얼굴이 눈에 선했다. ‘자기’라는 애칭이 입에 붙지도 않고, 듣기에도 어색한지 온기현은 자기라고 불릴 때마다 순진한 애처럼 얼굴을 붉혔다. 사람 미치라고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 건 알지만.
“데리러 갈까.”
―응? 아냐. 나 지금 갈 거야.
“술 마시고 있어?”
―음……. 맥주 한 잔……?
“데리러 갈게.”
―진짜 나 지금 간다니까. 원래 지금쯤 일어나려고 했어. 잠깐 얼굴만 보러 온 거라서.
데리러 간다는 류주호를 한사코 만류했다. 평소에는 유순한 것 같다가도, 이렇게 가끔 제 고집을 세울 때면 정말 당해 내질 못했다. 하긴, 언제는 당해 냈냐마는.
“알겠어. 조심히 와.”
픽, 웃으며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말했다.
―응. ……자기야.
조금 우물거리며 망설이다가 작게 속삭이는 소리에 심장이 내려앉는다. 온기현은 그 말만 남기고는 류주호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핸드폰을 내려놓고는 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신체 반응으로 속내를 훤히 알 수 있다면, 지금의 류주호가 그러했다. 순식간에 아래로 피가 몰렸다. 온기현의 쑥스러운 한마디로도 자신은 짐승처럼 발정했다.
언제나 온기현을 앞에 두고는 참을성이 없었다. 끈적하게 들러붙은 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성기는 제멋대로 존재감을 주장하고 있었다.
“돌겠네.”
뻑적지근한 목덜미를 주무르며 성감을 잠재우려 애썼다. 욕실로 가 찬물로 연거푸 얼굴을 씻어 냈다. 지그시 감았던 눈을 느릿하게 떴다. 그리고 다시금 거실로 나왔다.
“…….”
온기현이 없는 집이 어쩐지 황량했다. 그냥 데리러 간다고 할걸.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는 비뚤게 서서 공간을 빙 둘러봤다.
찬찬히 둘러보면 집 안 곳곳에 남은 온기현의 흔적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온기현이 좋아하는 영화 속 캐릭터 피규어들. 온기현과 짝으로 구입한 머그 컵. 작고 귀엽다며 온기현이 골라 티브이 옆에 일렬로 세워 놓은 다육 식물들. 어제 늦게까지 영화를 보다가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며 덮었던 이불 시트 등. 그런 것들을 눈에 담으며 초조한 마음을 진정시켰다.
소파로 가서 온기현의 몸이 빠져나간 그대로의 얇은 시트를 매만지다가 그러쥐고는 제 몸을 덮었다.
그리고 별 의미 없이 핸드폰을 들어 사진 앱을 실행했다.
이제껏 찍은 사진과 영상들이 주르륵 떴다. 사진을 여러 번 복사해 놓은 듯한 것들도 여럿이었다. 하지만 전부 일일이 찍은 사진이기 때문에 절대 삭제하지 않았다.
피식.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얼마 전에 근교 카페로 데이트를 나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 망고주스가 맛있다며 볼이 홀쭉해질 정도로 쭉 빨다가 숨이 모자라 얕게 헐떡이던 모습이다. 몰래 찍다가 걸려서 등짝을 맞았다. 하지만 절대로 삭제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나왔잖아! 꼭 지워!”
그렇게 으름장을 놓길래 고개를 끄덕이는 둥 마는 둥 했다. 하지만 불시에 지워질 수도 있었다. 이래서 백업은 필수였다.
한참 추억을 곱씹다 보니 ‘숨겨진 폴더’가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서 잠시 손가락이 배회했다.
온기현은 특히 섹스 중에 기록을 남기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민망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괜히 그런 걸 남겼다가 누가 보면 어떡하냐는 말이었다. 류주호도 마찬가지였다. 온기현의 그런 모습은 저만 보고 눈으로 새기면 되는 일이었다. 혹여라도 누군가에게 보이는 일은 원치 않았다.
하지만. 그 빗장이 풀어졌던 때가 있다. 둘이 집에서 와인을 홀짝이며 약간 취기가 올랐을 때였다. 핸드폰의 단순히 숫자를 맞히는 퍼즐 게임 앱을 가지고 손장난을 치다가 금세 야릇한 분위기로 넘어갔다. 그리고 어떤 정신이었는지 핸드폰으로 당시의 행위들을 영상으로 남겼다. 그 주범은 온기현이었다.
술만 마시면 솔직하고 대범해지는 온기현의 주사는 이미 알고 있던 터라, 류주호도 말리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에 핸드폰은 침대 위 어딘가로 내던져졌고 결국 내도록 섹스에 열중하게 됐지만. 음성만은 오롯이 남아 있을 터다.
지금 보면 좀 위험한데.
류주호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며, 다른 영상들로 손가락을 넘겼다. 그렇게 한참을 뒤적거리다가 새까맣고 어슴푸레한 빛 무리가 찍힌 섬네일이 눈에 들어왔다. 다름 아닌 예전, 영흘도에 가서 찍었던 온기현의 영상이었다.
파도 소리와 온기현의 말간 웃음, 그리고 핸드폰 화면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까지. 영상은 짧았다. 하지만 류주호는 이 짧은 영상을 몇 번이고, 몇백 번이고 반복해서 돌려 봤다. 만약 이게 필름 영화였다면 하도 돌려본 탓에 너덜너덜해져 있을 것이다.
실상 마냥 좋은 기억만은 아니었다. 서로에게 있어서.
자신은 이 마음을 어떻게 다룰지 모르는 애새끼나 다름없었다. 거칠었고, 서툴렀고, 어리석었다.
영상을 볼 때마다 자신을 벌주는 기분이었다.
당시, 미친 듯이 온기현을 찾아 헤매던 때의 자신은 이성이 완전히 나갔었다. 아직도 당시의 기분을 떠올리자면 생생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단순히 정신이 나가서 미친 짓거리를 한 게 아니었다. 그 모든 게 자신의 의지였다. 온기현에게 껄떡대는 놈을 주먹으로 내려치던 때 머리가 타 버리고 눈알이 뽑힐 정도로 걷잡을 수 없는 분기에 휩싸였었다.
다만, 제 실수라고 한다면 그런 날 것의 감정을 여실히 온기현 앞에 드러내어 겁을 먹게 한 것, 그리고 병신 같은 언행으로 온기현을 상처 주고 놓쳐 버린 것.
그때로 돌아간다면 온기현 앞에서는 열과 성을 다해 그를 보듬고 얼러서 품 안에 쏙 가두고는, 헤어 나올 수 없도록 했을 것이다.
절대로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류주호는 심상하게 속으로 읊조리고는 영상을 반복해서 재생했다. 어둠 속에서 눈을 접으며 저를 바라보는 하얀 얼굴이 보인다. 몇 번이나 봐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영롱하다. 새까만 눈과 흩날리는 머리카락, 그리고 발그레한 볼까지.
류주호는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제 아래를 확인했다. 트레이닝 팬츠를 뚫고 나올 듯이 음경이 거센 기세로 일어서 있다. 아래가 아플 정도로 열이 올랐다. 온기현의 웃는 얼굴을 볼 때마다 언제나 있는 일이기에, 류주호는 평연한 얼굴 그대로 욕실로 직행했다.
수음으로 세 번 정도 사정하고 가볍게 샤워를 했다. 좆을 세운 채로 연인을 맞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가뜩이나 행위 중에 울먹이며 변태라고 저를 퍽퍽 때리기 일쑤였다. 괜히 억울할 일은 늘리지 않는 게 맞았다.
수건을 머리에 걸친 채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때마침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주호야. 나 왔어.”
“응. 버러, 아, 아니. 애들 잘 만나고 왔어?”
연인을 반기며 그렇게 묻자, 온기현이 실내화를 신고는 총총 걸어왔다. 꽉 끌어안자 온기현에게서 바깥 공기 냄새가 났다. 뺨을 감싸 쥐고 눈두덩이에 키스하며 어깨를 손으로 탈탈 털어 줬다.
“어. 다음에는 너도 같이 보자.”
“왜. 예쁜 애인 얼굴 좀 보여 달래?”
“아 씨. 야, 그게 아니고. 그냥, 다들 네 덕분에 도움 많이 받았다고 해서. 근데 너 진짜……. 혹시라도 티 내면 안 돼.”
진심이었는데 농담 취급이다. 애인이라고 소개해 주면 좋으련만. 지금까지도 저는 그저 그 버러지들에게 있어, 온기현의 친구이자 룸메이트로 각인되어 있었다.
온기현은 주변의 시선에 간혹 이렇게 예민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했다.
“알겠어. 그럴 거야.”
마음에도 없는 말로 온기현을 안심시켰다. 안달한 것은 자신이었다. 보이지 않는 표식이라도 있어서, 밖에 내보이더라도 제 것이라고 누구나 알 수 있게 된다면.
요새 들어 부쩍 생각하지만, 대한민국의 동성 혼인에 대한 법적 제도는 무척 실망스럽다. 주변의 인식을 불식하는 것은 어렵더라도, 무언가 둘 사이의 공고한 결속조차 한없이 요원했다.
좀 더, 확실한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주 예전부터.
그러기 위해서는…….
“삐진 거 아니지?”
“응? 내가 왜?”
턱 아래에 살랑대는 머리카락이 좌우로 흔들린다. 동시에 등 뒤로 돌려진 팔이 류주호를 꽉 끌어안았다.
“……넌 삐돌이잖아.”
크흡. 류주호가 웃음을 삼켰다. 자신에게 이렇듯 귀여운 별명이 붙었던 적이 있었던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아마가 아니라 한 번도. 온기현은 류주호가 잘 삐진다면서 삐돌이라는 별명을 붙이고는 가끔 삐돌이, 라고 불렀다. 당장이라도 이 삐돌이가 할 수 있는 난잡하기 짝이 없는 음담패설을 입에 담아 연인의 새빨간 얼굴을 눈에 담고 싶은 저열한 욕구가 머리를 들이밀었지만, 꾹 눌렀다.
“삐돌이라 싫어?”
은근하게 속삭이듯 그렇게 묻자, 온기현이 잠시 숨죽이고 가만히 있더니,
“……아니. 좋아.”
라고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아, 씨발. 강력한 어퍼컷을 한 대 맞은 기분이다.
새까만 눈을 빛내며 볼에 홍조를 띤 자그마한 얼굴을 보며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이제는 염색이 완전히 빠져서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까만 머리로 돌아온 온기현은, 저와 같은 나이인데도 여전히 학생 같았다. 아니, 그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편의점에서 맥주를 살 때면 고등학생 아니냐며 의심의 눈초리로 신분증을 요구받을 정도였다.
망아지의 어퍼컷에 자신은 항상 KO였다.
도저히 참지 못하고 키스를 퍼부으려 저에게 들러붙은 몸의 팔꿈치를 잡을 때였다.
“아!”
온기현이 새된 신음을 질렀다.
아랫입술을 아득 문 온기현이 팔을 들었다. 삽시에 얼굴이 굳은 류주호가 소매를 걷어 올렸다.
“……여기 왜 이래.”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제가 다 아파서 가슴이 저며 왔다. 온기현은 눈을 껌뻑이며 제 팔꿈치를 보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다가 소매를 내렸다.
“오다가 잠깐 삐끗해서 넘어졌어.”
“넘어졌다고? 어디서.”
“버스에서 내리다가 헛디뎠어. 야, 괜찮아. 뭐 이 정도 가지고.”
“……차 살까.”
“뭐어? 됐어. 대중교통이 짱이야, 한국은. 그리고 우리 돈 아껴야 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젓는 온기현을 보며 류주호의 굳었던 입매가 설핏 풀어졌다.
우리. 우리. 우리…….
언제 들어도 울림이 좋은 말이다. 우리, 라니. 심장이 또다시 빠듯하게 죄어 온다. 온 힘을 다해 온기현을 와락 껴안았다.
“응. 약 발라 줄게. 방에 들어가자, 우리.”
가슴팍에 닿은 고개가 얕게 끄덕여진다. 바깥에서 묻은 찬 기운이 완전히 가신 온기현의 머리에 류주호가 얼굴을 묻었다. 입가에 길게 웃음이 맺혔다.
* * *
“안녕하세요, 어머님.”
시원하고 굵직한 목소리가 깍듯했다.
“아이고. 세―상에. 어서 들어와요. 먼 길인데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아닙니다, 어머님. 말씀 낮추세요.”
그럴까, 그럼? 하고 싱긋 미소 지은 여성이 손을 휘휘 위아래로 내저었다. 류주호는 감사합니다. 하고 꾸벅 인사하고는 구두를 벗었다.
“기현이가 신세 많이 지고 있지?”
“신세는요, 뭘. 제가 오히려 기현이한테 도움 많이 받고 있습니다.”
“어머머.”
사교성 좋은 얼굴로 만면에 웃음을 띤 류주호는 반듯하게 말씀을 올렸다.
“기현이가 워낙 성실하고 야무진 구석이 있어서 혼자 자취하는 것보다 훨씬 편하고 좋더라고요. 제가 오히려 신세 지고 있습니다.”
온기현의 어머니는 아들 칭찬에 못내 기쁜지 눈매를 접어 웃었다. 그에 류주호도 화답하듯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말씀은 많이 듣긴 했지만, 무척 미인이십니다. 누나라고 해도 믿겠어요.”
“뭐어? 하이고, 얘가. 사람 띄워 주는 것도 이렇게 훤칠하니 잘생긴 청년이 말하니까 기분 나쁘지는 않네. 고마워.”
“진짜예요, 어머님.”
능청스럽게 대답하자 중년의 여성이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호호호, 웃었다.
“이름이 류주호랬지?”
“네. 주호라고 불러 주세요, 어머님.”
“그래그래. 어머, 내 정신이야. 여기서 이러지 말고 어서 들어와. 저녁 아직이지?”
“네, 어머님.”
고개를 끄덕이며 옆을 돌아봤다. 온기현이 어색한 듯 볼을 긁적이며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기현아. 너도 얼른 신발 벗고. 아버지는 저녁때 맞춰서 곧 들어오실 거야. 요 앞에 마트 들러서 오신댔으니까. 오시면 같이 저녁 먹자. 응?”
“네, 알겠습니다.”
“응.”
“기현아. 얘가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너 어디 아프니?”
걱정 담긴 말에 온기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류주호가 조용히 속삭였다.
괜찮아?
그러자 온기현이 번쩍 고개를 들고는 입술을 삐죽이며 “뭐. 그냥.” 하고 말을 회피했다. 그리고 마치 가까이 있으면 안 될 사람처럼 류주호와 닿지 않게 옆을 휙 지나쳤다. 몇 걸음 가다가 멈칫하고는 몸을 빙글 돌렸다.
“짐 줘.”
“됐어. 내가 다 들 수 있어.”
“무겁잖아. 오른손에 있는 거라도 줘.”
출발하기 전에 백화점에 들러 어른들이 좋아하실 홍삼 정과와 열대 과일 세트, 그리고 한우 세트 등을 샀다. 온기현에게는 지인에게서 차를 빌렸다고 말하고, 차 트렁크에 그것들을 빵빵하게 실었다.
뻗어 오는 손을 피하려 뒤로 반걸음 물러나자, 온기현이 잠시 굳혔던 팔을 급하게 바로 했다.
“……그러게 왜 그렇게 많이 샀어.”
불만에 차서 그렇게 중얼거린다. 시선을 피하며 모로 돌린 옆얼굴 탓에 새빨개진 귓바퀴가 눈에 들어왔다. 부드러운 연골을 빨아 주고 싶다고 생각하다 더러운 상상을 억누르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너희 부모님께 잘 보이고 싶어서. 처음 인사드리는 건데 이 정도는 해야지. 떨리네. 잘 봐 주신 건지 모르겠다.”
“허. 야, 무슨……. 그냥 인사만 하러 온다며. 그리고 원래는 나만 온다고 했는데 네가 억지로.”
“얘들아. 안 들어오니?”
“아.”
“네. 들어가요, 어머님.”
자연스레 입에 붙은 어머님이라는 호칭이 들릴 때마다 온기현이 흠칫 놀란다. 친구 어머니들을 으레 부르는 호칭인데도, 어쩐지 그 뜻으로 말하는 게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긴, 온기현이 생각하는 게 맞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저렇게 불편해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일주일 전, 온기현은 고향에 계신 어머님으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다. 꼬박꼬박 안부 전화를 주고받는 온기현을 옆에서 지켜봐 왔지만, 전화를 끊은 뒤 온기현은 고향에 한 번 내려갔다 와야겠다고 말했다. 어머님이 아무래도 얼굴을 통 안 보이는 아들에게 쓴소리를 가장한 그리움을 표한 듯했다.
류주호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저도 함께 가겠다고 했더니, 온기현은 질색팔색하며 거부했다.
“대학 동창이랑 동거하는 거 아시잖아.”
“그렇긴 해도.”
“그럼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사이인데, 인사드리는 게 뭐 어때서 그래.”
온기현은 대답이 없었다. 지금 타이밍에 제 욕심을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를 부드럽게 다독였다.
“네가 걱정하는 말은 안 해. 정말 인사만 드리는 거야.”
저를 쳐다보는 온기현의 눈에서 불안함과 류주호에 대한 일말의 미안함, 그리고 그냥 자신이 이쯤에서 물러났으면 하는 기대가 읽혔다.
“네가 나고 자란 집을 내 눈으로 보고 싶어.”
“…….”
“너를 낳아 주신 부모님도 뵙고 싶고.”
“…….”
“그냥 그게 전부야.”
진심 어린 류주호의 말에 온기현이 마지못해 겨우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 사이를 밝히면 대충 어떤 사달이 날지는 류주호도 알 수 있었다. 고지식함을 탓하는 게 아니다. 누구나 그러할 터였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라는 생각은 이미 머릿속에 박혀 있던 터라 지금은 타이밍이 적절치 않으리라 생각하던 차였다.
류주호는 거실로 들어왔다. 낡은 연립 주택이었다. 방도 두 개뿐인 좁은 집이었지만 워낙 깔끔하게 정리된 터라 여기저기 칠이 벗겨져 세월의 흐름을 나타내는 살림살이를 제외하고는 낡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류주호가 부엌에 제가 사 온 선물들을 놓자, 온기현의 어머니는 무슨 돈이 있어서 이런 걸 사 왔냐며 타박 아닌 타박을 하다가 그 종류와 양을 보고 기함을 했다. 류주호가 별거 아니라며 겉을 잘 포장한 홍삼 정과 포장지를 벗기자 “어머! 이거 유명하던데.” 하며 만면에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때마침,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 오셨나 보다.”
“기현이 왔냐.”
걸걸하지만 따스함과 애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류주호는 자세를 바로 하고 모습을 드러낸 온기현의 아버지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어어. 기현이 친구가 온다더니. 이야아. 먼 길인데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어머님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은 말에 류주호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 말 한마디, 한마디에 아들에 대한 사랑이 진득하게 담겨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닙니다, 아버님. 서울에서 생각보다 얼마 안 걸리던데요. 그리고 말씀 낮추십시오, 아버님.”
온기현의 아버지는 세월의 흔적이 오롯이 담긴 거칠거칠한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류주호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맞잡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던 온기현이 또다시 흠칫 놀랐다.
“기현이, 너. 서울 산다고 얼굴도 한번 안 비치냐. 얼굴 까먹겠다, 이 녀석아.”
“죄송해요. 여러 가지로 정신없기도 하고, 취업 준비로도 바빠서요.”
아버지의 타박에 온기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배시시 웃었다. 부모님 앞에서는 영락없는 아이처럼 유순해지는 모습에 류주호가 속으로 빠듯하게 차오르는 벅참을 삼켰다. 가끔 잠투정하거나 마음이 한껏 풀어지고는 할 때 말을 길게 늘이며 어리광을 부리는 귀여운 버릇이 있는데, 아들을 아끼는 부모님의 따스한 모습에서 그런 어리광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알 것 같았다.
상차림을 거들려 일어섰지만, 어머님은 “가뜩이나 먼 거리 운전하느라 피곤할 텐데.” 하고는 애들이 나서는 거 아니라며 혼을 냈고, 외려 아버지가 눈치를 보며 봉지에서 마트에서 사 온 삼겹살을 꺼내 뜯어다가 프라이팬에 올려 굽기 시작했다.
백화점에서 사 온 한우는 두 분이 오붓하게 드시라며 냉장실에 넣어 둔 차였다.
“와, 너무 맛있어요, 어머님.”
“아휴. 그래? 말이라도 고마워라.”
“정말이에요.”
정말 빈말처럼 느껴지지 않는 감탄사에 웃음이 피었다. 아버님과 어머님을 앞에 두고 보니, 온기현과 닮은 부분이 보였다. 약간 새치름한 눈매와 가는 얼굴선은 어머님과 비슷하고, 숱 많은 머리와 이마는 아버님을 빼닮았다. 무척 신기했다. 이전에는 요망하다고 생각했던 콧잔등 위에 내려앉은 사랑스러운 점은 그들 누구에게도 없었다. 오로지 온기현에게만 있었다.
“약주 한잔 걸칠까?”
“이이가. 어제도 최 씨랑 오밤중까지 그렇게 마셔 놓고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가 불같이 날아드는 타박에 맥을 못 춘 아버님이었다.
“다음에 저랑 한잔 기울이시죠, 아버님. 제가 좋은 술 구해 오겠습니다. 괜찮으시죠, 어머님?”
자연스레 다음의 방문을 기약했다. 사르르 웃는 눈부신 얼굴에 대놓고 안 된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머님은 웃음을 터트리며, “그래. 그때는 내가 봐줄게.” 하고 통 큰 말씀을 하셨다.
류주호의 옆에서, 이러한 상황을 따라잡지 못해 넋을 놓다가 설핏 저를 쳐다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그런데 주호는 키도 훤칠하고 생김새도 예쁜데 말도 참 예쁘게 잘하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님.”
“예의 바르기도 해라. 행동거지도 이렇게 고울 수가 있나.”
“감사합니다. 저희 외가에 유럽 쪽 피가 섞여서요. 다른 아이들과 달리 약간 별난 외모 탓에 여러 가지 오해를 사기도 해서 그런지 어릴 때부터 여러 가지로 행동에 조심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류주호는 누가 보더라도 이질적인 외모였다. 염색한 티가 나지 않는 천연 갈색의 머리칼에, 눈동자는 올리브빛이 감도는 옅은 갈색이었다. 튀는 외모에 대해 궁금하련만, 부모님은 일절 물어보지 않았다. 그래서 류주호가 먼저 말씀을 드린 것이었다. 일부 과장의 말을 섞은 것은 애교나 다름없었다.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술술 뱉는 말에 옆에서 바람 빠지는 것처럼 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기현은 그 소리 외에는 아무런 말 없이 조용히 밥을 먹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기현이가 집에 친구를 데려온 게 워낙 오래된 일이어서 너무 반갑지 뭐야.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이 초등학생 때였던가? 그렇지, 기현아.”
“응? 응.”
단답식의 대답과 함께 밥을 우물거렸다.
“에휴, 뭐. 좀 더 커서는 그럴 새가 어딨었니. 우리가 여간 신경을 못 써 주기는 했지. 아무리 고등학생이고 다 컸다고는 해도 그 먼 타지에 애를 덜렁 떨어뜨려 놓고는 제대로 챙겨 주지도 못.”
“와, 아빠. 삼겹살 맛있다. 이거 어디서 샀어?”
“엉? 요 앞 마트에서 샀다고 했잖냐.”
“응? 아, 그랬나. 엄마. 이 파김치 맛있다. 엄마가 담근 거야?”
“아니? 인터넷에서 산 건데?”
“그렇구나.”
갑자기 온기현의 말수가 많아졌다. 별 시답잖은 질문을 해 대더니 허겁지겁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류주호는 그런 온기현을 흘끗 쳐다보며 제 밥그릇을 싹 비웠다.
“잘 먹었습니다. 주호야, 방에 들어가 있을래? 엄마, 내가 설거지할게.”
“아니야. 네 아빠가 하실 거야.”
“아닙니다. 제가 할게요, 어머님.”
“됐어. 손님한테 뭘.”
“손님이라뇨. 똑같이 아들처럼 편하게 대해 주세요.”
혀에 기름이라도 칠한 것처럼 미끄럽게 술술 나오는 말에 어머니가 한발 물러나셨다. 류주호는 설거지까지 완벽하게 마쳤다.
“아이고, 세상에. 미안해라. 방에 들어가 있어. 이따 과일 먹으러 나오고.”
“응.”
“잘 먹었습니다.”
제대로 인사를 드리거나 상을 치울 새도 없이 류주호는 온기현에 의해 방으로 질질 끌려갔다.
뒤에서는 “쟤가 배를 곯고 다니나.” 하는 우려의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탁. 등 뒤로 방문을 닫은 온기현이 휴우, 하고 쌓인 한숨을 내쉬었다.
“나 부모님하고 말씀 더 나누고 싶었는데. 빨리 단둘이 있고 싶었어?”
능청스러운 말에 온기현이 눈을 세모꼴로 치켜뜨며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무슨. 부모님 자꾸 이상한 소리만 하시고. 너는 자꾸 내숭 떨고, 너무 어색하잖아.”
“내숭 아니야. 나 네 부모님께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건데.”
류주호가 온기현의 뺨을 감싸 쥐고는 고개를 숙였다.
“널 낳아 주신 분들이잖아. 너를 세상에 태어날 수 있게 해 주신 분들. 어떻게 내가 잘 보이고 싶지 않겠어.”
“…….”
“나 예쁘게 봐 주셨으면 좋겠다.”
“…….”
눈을 마주한 온기현의 볼이 금세 홍조로 물들었다. 새치름한 눈매가 오늘따라 유난히 뾰족하다.
아, 키스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 혀를 섞으면 분명 더한 것도 하고 싶어질 것이다. 류주호는 빠듯하게 아래로 몰리는 열을 간신히 누르고 몸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고개를 휘이 돌려 몇 평도 안 되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헤드에 파란색 돌고래 그림이 그려진 낮은 싱글 침대와 작은 옷장. 학습지와 문제지가 뒤섞여 가득 꽂혀 있는 책장과, 류주호가 앉기에는 턱없이 작아 보이는 작은 책상.
“여기가 네 방이구나.”
“……별거 없어.”
온기현은 민망한 듯 그렇게 무심하게 툭 던지고는 괜히 깨끗한 책상 위를 손으로 쓸었다. 류주호는 침대로 다가가 그 위에 사뿐히 앉았다.
“바나나 향 난다.”
류주호가 목을 젖히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기현이 냄새.”
여기서 온기현이 어릴 적부터 공부하고, 자고, 옷을 갈아입고. 이 방에서 자라난 것이다. 어쩐지 환영처럼 온기현이 아이였을 때의 모습, 그리고 조금 자라난 소년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착각마저 들었다.
“변태야? 냄새는 무슨 냄새.”
어색하게 서서는 제 양손을 맞잡고 조몰락거리는 온기현을 보며 류주호가 손짓했다.
“이리 와.”
“……우리 집 벽 되게 얇아.”
“알겠어. 아무 짓도 안 해. 그냥 가까이 있고 싶어서 그래.”
“……하아.”
한숨을 푹 내쉰 온기현이 천천히 다가오더니 류주호의 옆에 털썩 엉덩이를 내렸다.
“아직도 내가 여기 온 거 많이 불편해?”
“아니, 그건 아닌데. ……네 앞에서 부모님 뵙기도 민망하고, 괜히 좀. 네가 창피하다거나 그런 뜻은 아닌데……, 아무래도…….”
“응. 무슨 마음인지 알아. 다 알아. 지금이 시기상조인 것도 알아. 네 동의 없이는 나도 절대로 안 드러내. 그러니까 마음 풀어. 응?”
고개를 숙여 눈을 맞추려 하며 은근하게 속삭이자, 온기현이 잠시 입을 삐죽이다가 이내 어차피 이렇게 된 일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드디어 웃어 주네.”
“아, 뭐래.”
온기현이 키득, 다시금 웃음을 머금고는 허벅지로 류주호를 툭 친다.
“야, 근데 진짜 웃긴 거 알아? 원래 우리 엄마, 막 아빠한테 엄청나게 잔소리하거든. 근데 네 앞이라고 그것도 자제하더라? 엄마가 너 되게 맘에 들었나 봐. 옛날에 누구더라? 옛날 할리우드 배우 중에 로버트 테일러 되게 좋아했다더니 엄마 눈도 참 한결같다. 그리고…….”
“…….”
조잘거리던 온기현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단 한 번의 터치로도 불이 붙은 듯 체온이 급격하게 뜨거워졌다. 둘 다 알아챌 정도의 미묘하고 끈적한 공기가 감돌았다. 익숙한 분위기였다.
이 상황이 곤란한 듯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어딘가 몽롱한 눈빛의 온기현을 보며 류주호는 입술을 축였다. 당장이라도 옷을 잡아 뜯고 살결에 코를 파묻고 싶었다. 그의 입에서 나는 소리를 죽이는 방법이야 얼마든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쪽.
잽싸게 뺨에 키스했다. 온기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깜짝 놀라며 눈을 홉뜨더니 괜히 가슴팍을 퍽 쳤다. 뒤로 물러난 류주호는 피식 웃었다. 이제 안 그러겠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나 네 방 구경해도 돼?”
“응? 볼 것도 없는데. 눈에 보이는 게 단데.”
“볼 거 많은데, 왜.”
류주호는 그 말과 함께 슬그머니 일어나서는 책장으로 다가갔다.
“네가 풀던 문제집도 구경하고 싶고.”
그리고 막 예전 온기현의 손때가 묻은 학습지에 손을 뻗으려던 찰나, 책상 위 유리 사이에 끼워져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허.”
덜컹. 저도 모르게 중심을 잃으며 의자를 무릎으로 쳐 버렸다.
“왜 그래? 괜찮아?”
“……이거, 너야……?”
“엉? 아.”
류주호가 입을 손으로 막은 채 부들거리는 손으로 가리킨 것은 다름 아닌 낡은 사진이었다. 색이 바래 이제는 뿌옇게 흐린 안개가 낀 것처럼밖에 보이지 않는, 오래된 사진. 그 안에는 멜빵바지를 입고 노란색 동그란 모자를 쓴 어린 시절의 온기현이 땅바닥에 주저앉아 카메라를 쳐다보며 방긋 웃고 있었다. 손에는 어디서 주워 왔는지 모를 하얀 풀잎이 들려 있었다. 예닐곱쯤 되어 보였다.
‘미쳤어. 이게, 대체…….’
류주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 씨, 창피해. 이거 끼워 놓은 지 오래돼서 빼는 것도 잊고 살았어.”
“…….”
“주호야?”
류주호는 엄청난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한참을 그 사진을 들여다봤다.
“……너무, ……너무 귀여워.”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자연스러운 동작처럼 핸드폰을 꺼내어 그 어릴 적 사진을 찰칵찰칵 마구 찍기 시작했다. 마치 옆을 찍으면 3D처럼 옆모습이 보이기라도 할 것처럼 여러 각도로 카메라를 들이댔다.
“아, 뭐 해.”
온기현은 쑥스러운지 류주호의 팔을 붙들고는 그를 말렸다. 하지만.
“혹시 옛날 앨범 있어?”
“옛날 앨범?”
“응. 너 어릴 적 사진들 들어 있는 앨범.”
류주호의 어투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앨범을 보지 않으면 영원히 이 집을 떠나지 않을 지박령이라도 될 것처럼 스산함이 감돌기도 했다. 온기현은 “아, 그게.” 하고 뒷머리를 잠시 긁적이더니 책상 밑의 책장에서 두꺼운 앨범 하나를 꺼냈다.
“하아…….”
연신 감탄사가 터졌다. 목덜미가 뻐근해질 정도로 어지러웠다.
“씨발. 너무 귀여워.”
“이거 웃기게 나자빠진 사진인데.”
“진짜 귀여워. 어떻게 이렇게 귀여울 수가 있지.”
찰칵. 찰칵.
류주호는 앨범 한 장 한 장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사진마다 카메라에 고이 기록을 남기고는, 왜 이런 사진을 찍게 됐는지 연유까지 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은, 타임머신이 개발되지 않는 이상은, 이 시절의 온기현을 절대로 저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미칠 정도로 깜찍하고 귀여운 갓난아기 때부터, 이제 막 걸음마를 떼며 나름 당당한 표정을 짓는 온기현. 어디에 심하게 부딪혔는지 이마에 새빨간 혹은 달고는 울먹거리다가 눈물을 꾹 참는 온기현. 그리고 아마 유치원 원장 놈임이 틀림없는 산타클로스 무릎 위에 앉아서 선물 박스를 들고 환하게 웃는 온기현. 아, 콧물 보인다.
이런 온기현을 색바랜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다는 게 통탄스러웠다.
“지금이랑 이목구비는 똑같다. 여기, 귓불 동그란 것도.”
“당연하지. 걔가 나거든? 야. 너무 그렇게 보지 마. 내가 뭐 하늘에서 어른인 채로 똑 떨어진 것도 아니고. 다 어릴 때 사진이 그게 그거지, 뭐.”
“아니야. 나는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기는 본 적이 없어.”
류주호는 진심이었다. 사진 위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엉엉 울음을 터트리는 온기현이었다. 책가방이 옆에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니, 초등학교에 다닐 때인 것 같다.
“안쓰러워.”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눈물을 뚝뚝 흘리는 온기현을 보며, 정확히는 사진을 흘린 듯 쳐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진심으로, 안쓰러웠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안아 주고 싶었다. 울지 마. 뚝. 등을 쓰다듬고 울음을 그칠 때까지 언제까지고 보듬어 주고 싶다.
자신은 온기현을 보며, 인간이 타인을 이렇게 제 것처럼 여길 수도 있구나, 생각했다. 그가 우는 것을 보니 제 마음이 다 찢어지는 것 같았다. 가엾고 불쌍했다.
멀뚱히 앨범과 류주호를 번갈아 쳐다보던 온기현이, 인제 그만 봐, 하면서 앨범을 덮으려 했다. 어차피 마지막 장이었기에 류주호는 순순히 고개를 물렸다.
“초등학생 때 앨범은?”
“……알겠어, 잠깐만.”
온기현은 체념한 듯 다시금 책상 아래에서 얇은 앨범 하나를 꺼냈다.
“핸드폰으로 찍은 것도 있긴 한데, 이때 아빠가 보통 필카로 찍었거든. 그래도 자주 갖고 다니지는 않았어서 별로 없어.”
“응.”
그래도 상관없다.
벅찬 가슴을 억누르고, 또 어떤 온기현이 등장할까 싶은 마음에 앨범 표지를 열었다.
아.
현기증이 일었다. 순간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초등학교 앞에서 책가방을 메고 신발주머니를 든 온기현이 어색한 차렷 자세를 하고 있었다. 배경은 학교 정문인 듯 보였다. 아마, 입학식인 것 같다.
“큭, 큭큭.”
이번에는 혼자 큭큭대며 웃는 류주호를 보며 온기현이 미친놈 대하듯 너 괜찮아? 하고 물었다.
아니, 괜찮지 않았다. 차마 앨범에서 꺼내 가지는 못하기에 이번에도 열심히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새까만 머리칼을 흩날리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열 살의 온기현. 생기가 넘치는 장난꾸러기 온기현. 웃음이 비실비실 샜다. 온기현은 저도 같이 얘기해 주며 옛날 생각이 나는지, 웃긴 자신의 모습을 보며 류주호와 함께 킥킥댔다.
결국 이번에도 샅샅이 훑으며 온기현과 어깨동무를 했던 놈들의 이름까지 꼬치꼬치 캐물은 후에야 마지막 장을 덮었다.
“혹시 졸업 앨범도 있어?”
“야. 이제 좀 그만 봐. 언제까지 보려고 그래.”
“그것만 볼게.”
정말로.
간절함이 하늘까지는 아니더라도 온기현의 마음을 움직였다. 온기현이 하는 수 없이 졸업 앨범을 꺼냈다. 졸업 앨범에서도 온기현의 아주 작은 얼굴이라도 나오면 류주호는 제가 더 먼저 알아채고는 전부 카메라에 담았다.
무언의 종용에 이번엔 중학교 졸업 앨범도 꺼냈다. 조금 더 성장한 청소년기의 온기현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마지막 장에는 반별로 롤링 페이퍼식으로 한마디씩 남기는 공간이 있었다.
[3학년 2반 온기현 : 얘들아. 졸업 축하해~. 다음에 또 보자~.]
“…….”
맹렬한 질투심이 끓었다. 3학년 2반을 졸업한 애새끼들이 부러워 미칠 것 같다. 분심을 억누르고 앨범을 탁 덮었다. 이제 자연스러운 순서대로라면 고등학교 앨범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없어.”
온기현의 한마디는 마치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뭐?”
“없다고. 고등학교 앨범.”
“그게 무슨 말이야.”
온기현은 인상을 찌푸린 채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류주호는 낮은 음성으로 되물으며, 마치 물에 솜사탕을 씻은 너구리처럼 황망하고 망연하게 온기현을 바라봤다.
“없을 리가 없잖아.”
“없어. 잃어버렸어.”
단답식으로 말이 끊긴다. 온기현은 어쩐지 기분이 나빠 보였다. 류주호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도 없었지만, 온기현의 태도가 아무래도 걸렸다.
“잃어버렸어? 이런. 그럼 수소문해서 구할 수 있으려나. 아마 인터넷에 글 올리면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졸업한 고등학교 이름이 뭐야?”
“그걸 네가 알아서 뭐 하게?”
가시가 잔뜩 돋친 말이 돌아왔다. 그리고 온기현은 아랫입술을 까득 사리물더니 아예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초조한 기색을 지우려 애쓰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류주호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왜. 내가 알면 안 되는 거라도 있어?”
“…….”
“기현아.”
“…….”
앙다문 입술과 눈매에 고집이 잔뜩 서렸다. 이런 때의 온기현은 아무리 재촉하고 채근해도 절대로 마음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는 연유조차 알 수 없었다.
왜 이러는 걸까. 대체, 왜.
가슴에 불안한 예감이 스친다. 어쩔 수 없는 불쾌한 상상이, 어쩌면 납득할 만한 가정이 불쑥 고개를 내민다.
고등학교 때의 자신을 보이고 싶지 않다든가.
고등학교에서 저에게 보여 주기 싫은 사람이……, 있다든가.
“…….”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날카롭게 떠오르는 한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온기현이 좋아한, 첫 번째 사람. 즉, 온기현의 첫사랑.
하.
그래. 일부러 잊으려고 애썼어도, 바꿀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온기현은 저 말고도 이전에 좋아했던 사람이 53명이나 된다. 그 시작이 고등학생 때부터라는 것도 말이 됐다. 첫사랑뿐이겠는가. 졸업 앨범 안에는, 온기현이 마음을 준 놈들이 한 트럭은, 아니 두세 트럭은 될지도 모른다. 서늘하니 입매가 굳어졌다.
“기현아.”
“…….”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도 있어서 그래?”
다정한 어투로 묻자 온기현이 설핏 몸을 굳힌다.
“괜찮아. 난 전혀 신경 안 써. 너만 보면 돼. 네가 고등학생 때 어떤 모습이었는지, 어떤 얼굴로 학창 시절을 보냈는지, 내가 직접 보지 못하더라도 그 일면이라도 보고 싶어서 그래. 너만 볼 거야.”
마치 말 안 듣는 아이를 어르는, 꼬드김과 같은 말이었다.
“응?”
“……없다니까.”
입을 벙긋거리던 온기현이 눈을 치켜떴다.
“없다는데 왜 이렇게 끈질겨? 그런 거 봐서 뭐 하려고. 없다니까!”
음량이 점점 커질 때였다. 닫힌 문밖에서 “얘들아, 뭐 하니? 나와서 과일 먹자.”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온기현은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는지 깜짝 놀라고는 그대로 류주호를 지나쳤다.
“얼른 나와.”
“…….”
방문을 열고 나가는 온기현의 뒷모습을 지그시 쳐다보며 가라앉은 눈을 하고 손가락으로 입매를 쓸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일단은 갈무리한 채 거실로 나갔다. 온기현은 껄끄럽고 불편한 표정으로 돌아와서는 아무런 말 없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류주호가 나와서 싱긋 부모님께 웃으며 인사와 함께 사과를 찍은 포크를 받아 들자, 그제야 온기현도 포크로 사과를 찍더니 입으로 가져갔다. 언뜻 거실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야구의 열성적인 팬이신지 아버님은 요즘 응원하는 구단에 대한 불만과 기대를 동시에 늘어놓았다. 은근슬쩍 자신도 예전부터 야구팀에 들어가 열심히 했었다, 말하니 아버님이 그러냐며 역시 운동한 티가 난다며 껄껄 웃으셨다. 티브이에서는 일일 드라마 재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머님이 눈을 빛내며 저기 나오는 남자 배우가 참 멋있다며 흐뭇한 표정을 지으셨다. 아는 사람이 연예 기획사 쪽에서 일하는데 괜찮으시면 사인을 받아다 드리겠다 하니, 소녀같이 좋아하신다. 그러한 와중에도 온기현은 아무 말이 없었다.
“너 침대에서 자. 난 밑에서 잘게.”
“왜.”
방에 돌아와서는 싱글 침대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류주호는 마뜩잖은 얼굴로 반문했다. 하지만 부득불 온기현은 바닥에서 자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류주호는 한숨을 내쉬며 함께 침대에서 자자고 했다.
“둘이 자기엔 너무 좁잖아. ……싱글이라서.”
“꼭 붙어 자면 돼.”
당연한 듯 읊는 말에 온기현이 정색을 했다.
“그래도 부모님이 보면 어떡해. 나 그냥 아래에서 잘래.”
시선을 마주치지도 않는다. 류주호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알겠어.”
“…….”
“내가 아래에서 잘게.”
“싫.”
“그게 편해, 내가. 싫다고 하면 난 너 침대에서 꽉 안고 잘 거야. 둘 중 하나야. 네가 선택해.”
“…….”
완강한 류주호를 보며 온기현이 조용하게 알았어, 하고 대답하더니 꾸물꾸물 침대 위로 올라간다. 류주호는 자연스레 바닥에 편 이부자리 위에 눕게 됐다.
불을 끄자 순식간에 각자의 어깨 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온기현은 벽을 보는 방향으로 옆으로 누운 채였다. 류주호도 옆으로 누웠다. 조금 위에 걸린 시야에 온기현의 푸른 등이 보였다.
“…….”
가만히 그 등을 지켜봤다. 온기현이 잠을 자고 있지 않다는 것 정도야 알 수 있었다. 허리께에 걸쳐진 이불을 쥐었다가 놓고는 오랜만에 누운 제 잠자리가 불편한지 연신 베개에 뉜 머리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한다. 그러다가 잠시 몸을 움츠리고는 휙, 이불을 머리통 끝까지 뒤집어쓴다.
한참 뒤에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지도 옆머리를 손으로 받친 채 뒷모습을 하염없이 보던 류주호가 조심스레 일어났다. 그리고 이불을 어깨까지 살살 끌어 내려 제대로 덮어 주었다. 색색, 노곤한 숨을 내쉬는 말간 옆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저도 모르게 손을 가져가다가 멈칫하며 뒤로 물렸다. 그리고 다시금 이부자리 위에 옆으로 누웠다. 새까만 머리통과 마른 등을 응시하는 눈은 동이 터 오도록 감기지 않았다.
* * *
[나 윤규랑 저녁 먹고 들어갈게.]
도착한 메시지를 보며 류주호가 미간을 꿈틀했다. 오늘은 스터디가 있는 날이다. 보통은 끝나고 바로 집으로 달려오던 온기현이었다.
간단히 알겠다고 답장하자 읽었다는 표시만 사라질 뿐 다른 말은 없었다.
온기현의 고향에서 올라오던 길에 온기현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니, 그렇게 일부러 애쓰는 게 보였다. 어딘가 껄끄러움이 남아 있는 듯, 류주호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엄청나게 의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긴장감이었다. 여느 때와 다른 불편한 긴장감이 둘 사이를 메웠다. 마치 류주호가 다시 고등학교 앨범 얘기를 꺼낼까 싶어서인지 안절부절못하는 똥 마려운 망아지처럼 연신 다른 화제를 입에 올리며 조잘거렸다.
류주호는 입가를 손으로 덮어 눈매를 좁혔다.
대체 뭐지.
대체 왜.
첫사랑을 보여 주기 싫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날 선 반응을 할 일인가 싶었다. 눈이 뻑뻑했다. 류주호는 눈두덩이를 손으로 꾹 누르며 제 손에 들린 네모나고 작은 상자를 바라봤다.
천천히 그 상자를 열자, 은색 빛을 발하는 플래티넘 소재의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반지의 양쪽을 연결해 주는 것 같은 가운데의 연결 고리 위에는 전문가의 손길로 세심하게 세공된 컷 다이아몬드가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군더더기 없이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온기현과 무척이나 잘 어울릴 듯한.
탁. 다시 상자 뚜껑을 덮은 류주호가 소파에 등을 늘어트리며 한 손으로 상자를 한 바퀴 휙 돌렸다.
류주호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은 온기현의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와서 이것을 건네주고 싶었다.
목덜미가 뻐근했다. 뚜둑 소리가 나도록 목을 풀었다. 피곤함이 가시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두통이 이어졌다. 밤에도 온전한 수면이 힘들었다.
“하아.”
소파 등받이에 체중을 싣고는 목을 뒤로 젖혔다. 잠깐 눈을 붙일 요량으로 눈을 감았다. 어느새 잠들었는지 감겼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뿌옇게 흐린 시야를 확보하고는 머리를 털고 일어났다. 핸드폰의 시계를 확인했다. 미간이 꿈틀했다. 상당히 늦은 시각이었다. 온기현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온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헉. 여, 여보세요?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미간이 깊게 파였다.
―아, 선배님. 안녕하세요. 저, 저 이윤규인데요. 기현이 형 핸드폰에 선배님 이름이 찍혀 있어 가지고 제가 대신 받았는데요, 그…….
“기현이 바꿔.”
―예? 아, 그게. 지금…….
“바꿔.”
목소리에 대번에 냉기가 감돌았다. 건너편에서 버러지 2호가 흡,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사이를 비집고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
―……으응, 뭐야. 전화? 아, 형. 형! 류주호 선배님 전화 왔어! ……어엉? 쥬, 호……? 그렇다니까! 아…… 댓서……. 끄너, 저나…….
“…….”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있는 힘껏 청각을 집중했다. 혀가 배배 꼬여 제대로 발음도 못 하는 그 목소리를 빠짐없이 귀에 담으려 하다가 핸드폰을 귀에 댄 채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제 겉옷을 챙겼다. 그리고 묵직한 저음을 씹듯이 내뱉었다.
“거기 어디야.”
* * *
버튼을 누르자 자동문이 열렸다. 내부는 어두침침했다. 종업원의 인사는 무시했다. 학교 근처 술집답지 않게 조용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일자로 다문 입매가 설핏 굳었다.
술집 안으로 들어가자 가게 분위기는 크게 소란스럽지 않았다. 도란도란 여기저기서 말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단체가 아니라 소수가 많이 찾는 듯 보였다. 주위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새까맣고 자그마한 머리통이 보이는 곳으로 곧바로 걸어갔다.
“어, 선배님. 여깁니다!”
“…….”
흘긋 시선을 이윤규에게로 돌렸다가 다시 제 연인에게 향했다. 온기현은 벽에 등을 기댄 모습이었다. 고개를 푹 숙인 것을 보니, 취기가 어디까지 올랐는지 가늠이 갔다.
“기현아. 정신이 들어?”
“…….”
무릎을 굽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눈을 감은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고, 발그레한 홍조의 면적이 넓었다.
“아니, 이렇게까지 마실 생각은 아니었는데요. 기현이 형이 막 맥주랑 소주랑 섞어 가지고는…….”
이윤규가 주절주절 변명 투의 어조로 횡설수설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류주호는 이윤규에게 눈길조차 주고 있지 않았다. 오로지 온기현만을 향해 있었다. 그 눈빛에 걱정과 애정이 오롯이 담겨 있어, 보는 사람마저 민망할 지경이었다. 이윤규는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설마, 싶은 의심이 점점 확신으로 변해 갔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 정도 머리는 있었다.
“기현아. 집에 가자.”
“우웅…….”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를 귀에 담으며 류주호는 힘없이 늘어진 온기현의 두 팔을 잡아, 제 등에 업었다. 이윤규는 어어, 하고 덜컹 일어섰지만 그게 끝이었다.
후우, 하고 온기현이 목덜미로 내뿜은 단 숨에서 술기운이 확 느껴졌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건지.
“안녕히 가십쇼!”
뒤에서 외친 우렁한 인사는 무시하고는 카드로 계산을 하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우…….”
몇 걸음 가지 않아 온기현이 앓는 소리를 냈다. 짜증이 묻은 목소리였다. 어깨와 목덜미를 꽉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야아……. 하하. 이짜나…….”
혀가 짧아지고 웃음이 헤퍼졌다.
온기현의 술주정은 이미 알고 있었다. 취기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서도 웅얼웅얼 말은 잘했다. 솔직해졌다. 제 마음과 몸에도. 등으로 느껴지는 따스한 체온과 엉덩이를 받친 팔이 예전 기억을 상기시켰다.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은근하게 속삭이듯 그렇게 묻자, 온기현이 하아, 하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너어……. 그때, 진자……. 머시써떤 거 알아……?”
저한테 하는 말인가.
류주호의 귀가 움찔했다. 묵묵히 온기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때……. 우리 2학년 때에……. 수학여행……, 가서…….”
“…….”
걸음이 우뚝 멈췄다. 제 귀를 의심했다. 팔에 힘이 뿌득 들어갔다.
수학여행이라니.
온기현이 말을 이었다.
“앞에서 막……. 그거, 그거. 손 들고 하는 거…… 할 때. 진짜 머시써써……. 너만, 봐짜나…….”
키들거리며 몸을 들썩이는 진동이 등을 타고 여실히 느껴졌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구……, 운동회에서도 달리기하는 거……, 엄청……, 빨라서……. 다들, 너만…… 봐써…….”
“…….”
“나도……, 그래써…….”
“…….”
“……좋, 아……해…….”
“…….”
쿵.
누군가 망치로 뒷머리를 내리치는 듯한 타격감이었다.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2학년? 수학여행? 운동회? 달리기? 그 어느 것도 저와 온기현 사이에 있었던 일이 아니다. 교집합을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었다.
좋아한다고. 좋아한다고?
사슬로 온몸을 칭칭 휘감은 것처럼 멈춘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발밑이 꿀렁거리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대체 지금 누굴 찾는 거야. 나한테 업혀서, 누굴 찾으면서 누구 얘기를 입에 담는 거야. 그렇게 묻고 싶었다. 거칠고 흉포한 마음이 거센 풍랑처럼 덮쳤다. 온기현이 저 말고 다른 사람을 좋아했었다는 것은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이미 예전부터, 많은 사람에게 마음을 줘 왔다는 것은. 하지만. 그 모두가, 저에게 주는 마음만큼은 아니라 믿었다. 당연했다. 류주호를 바라보는 온기현의 시선에 담긴 지극한 애정을 모를 수가 없었다. 우린 서로 사랑하고 있다. 굳건한 믿음이었다. 그래서 이전에 어떤 사람에게 마음을 준 적이 있다 하더라도 온기현의 머릿속에서 지워 버릴 자신도 충분했고, 저도 터럭만 한 신경도 내주지 않을 용의도 있었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거칠고 추악한 질투가 용솟음쳤다.
씨발.
잇새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잔악한 생각과 말들을 모조리 삼켜 버리고, 단조로운 욕설만 잘근잘근 씹었다.
“…….”
뚜벅뚜벅. 류주호는 큰 보폭으로 걸어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자동차는 지인에게 빌렸다고는 했지만, 구매를 전제로 빌린 거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탁. 운전석에 앉은 류주호의 눈빛이 냉담하게 가라앉았다. 옆에 앉은 온기현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시선을 온기현에 고정한 채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 숨 막힐 듯한 단내를 흠뻑 들이마시고, 떡처럼 뜨끈뜨끈 말랑하면서도 달콤한 그 몸을 꽉 끌어안고 싶다. 언제까지고. 둘만의 세상에 고립되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과거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제 것도 그다지 떳떳하지 않았다. 차라리 온기현과 만나기 이전의 과거는 걸레로 닦아 내듯 싹 지워 버리고 싶었다.
차라리.
그래, 차라리.
저와 만나기 이전의 온기현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기억을 전부 지워 버렸으면. 그의 기억 속에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만 남게 된다면. 짙은 호선이 입매에 걸쳐졌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황홀했다.
관자놀이가 지끈거려 손으로 움푹 팬 부근을 더듬었다. 눈길은 새근새근 잠든 온기현에 진득하게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다음 날.
온기현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 이미 새벽 운동을 갔다 온 류주호가 아침을 준비할 때였다. 밤새 어떻게 집에 왔는지, 왜 제가 잠옷을 입고 있는지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듯 귓바퀴를 달군 채 민망함이 깃든 얼굴로 거실로 나왔다.
“밥 먹어야지.”
“아, ……응.”
작게 대답하며 식탁 의자에 걸터앉는다.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맛있다. 온기현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류주호는 별 대답 없이 제 앞에 놓인 음식을 기계처럼 먹었다.
“아. 오늘 혹시 이따가, 영화 보러 갈래?”
“……영화?”
“응. 우리 오래간만에 영화 보자. 밖에서. 아, 빙수도 먹고 싶다.”
온기현이 먼저 밖에 나가자고 청한 것은 처음이었다.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고 눈꼬리가 축 처졌다.
“어제 일 기억나?”
“어?”
느닷없는 질문에 온기현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어제 쫌 기억나는데. 왜……? 니가 데리러 와서 차 타고 집에 왔잖아.”
아니야? 그렇게 묻는 눈빛이다.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딱히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류주호는 가만히 흔들리는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목구멍을 칼칼하게 채울 니코틴이 간절했다. 아니, 그보다 더 독한 것을 폐부까지, 몸속까지 들이붓고 싶었다. 파괴적이고 저열한 음심이 뇌수까지 녹여 버릴 정도로 제 속을 갉아 갔다.
“그래. 그러자.”
여상하게 뱉은 말에 온기현이 옅게 미소 지었다.
영화관 매표소 앞은 사람이 바글거렸다.
“와, 사람 진짜 많다. 이거 재밌다더니 진짠가 봐.”
미리 예매한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를 마찬가지로 기대한 온기현의 어투에 은근한 활기가 엿보였다. 마치 일부러 소리를 높이는 듯한 어색함과 함께. 고개만 끄덕이며 응수하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표정 없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류주호는 영화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남녀 가릴 것 없이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향해 수군거려 댔다. 파리가 귓가에서 앵앵거리는 소리처럼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지독한 토심이 전신을 짓눌렀다. 초조함에 질식할 것 같았다.
그때, 온기현이 류주호의 소매 끝을 살짝 잡아당겼다. 평소에는 밖에서 어떻게든 닿으려 애를 쓰던 류주호였다. 반면, 진저리 치며 절대로 건들지 말라고 엄포를 놓던 온기현이 인파가 많은 장소인데도 불구하고 제가 먼저 닿아 온 것이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비 맞은 똥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다가 짐짓 시선을 다른 곳으로 휙 돌렸다.
“캐러멜 팝콘 먹을까? 잠깐 있어 봐. 내가 사 올게.”
그렇게 말하며 온기현이 막 발을 떼려던 때였다.
“아냐, 같이 가.”
“어? 아, 응.”
캐러멜 팝콘을 품 안에 가득 안고서 한 손에는 콜라를 든 채 예매한 상영관에 들어갔다. 컴컴한 영화관 내부는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쾅! 소리와 함께 폭발음이 크게 울렸다. 예전에는 귀가 아픈 액션 영화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조용하게 숨을 죽이고 팝콘을 아작아작 먹는 온기현만이 온 신경을 지배했다. 팔걸이에 팔을 걸친 채로 앞만 주시했다. 손을 잡고 싶었지만 참았다.
“와. 박력 넘친다, 진짜. 스케일 엄청 크고.”
“그러게.”
상영관 밖으로 나오며 심상하게 대꾸했다. 영화 중반 이후부터는 아예 내용이 기억도 나지 않았다. 영화고 뭐고 단둘만 있고 싶었다. 초조하고 불안정한 기분을 가라앉히고 싶었다.
영화관 밖을 나와서는 온기현이 말한 빙수 가게로 향했다. 웨이팅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커플 혹은 여자들끼리 온 무리가 대다수였다.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흘긋거리는 시선이 자신들이 있는 쪽으로 몰렸다. 아랑곳하지 않은 채 얌전히 순서를 기다렸다.
그때였다.
“어? 어? 우와. 이게 누구야?”
길거리 한복판의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곳에서 어떤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헐. 대박. 류주호 아냐? 와아, 어떻게 이런 데서 보냐? 진짜 신기하다.”
제 이름이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웬 미꾸라지처럼 생긴 놈이 저를 향해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만면에 띤 웃음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였다.
누구지. 류주호가 눈썹을 슬쩍 위로 끌어 올렸다.
불쾌함에 턱이 빠득 불거졌다.
“미쳤다. 어떻게 너는 더 와꾸를 업그레이드할 수가 있냐? 진짜 불공평하다. 오랜만!”
“…….”
류주호는 아무런 말 없이 심상한 눈길만 줄 뿐이었다. 별로 상관없었다. 아예 무시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그때.
“……어? 뭐야. 너, 혹시 온기현?”
“……?”
뭐?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온기현 아냐, 너?”
“아.”
제가 잘못들은 게 아니었다. 놈의 시선이 향한 곳은 온기현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리고 제 옆에 붙어 있던 온기현이 뒤늦게 단발의 음성을 뱉었다.
“저, 아, 아니. 사람 잘못 보셨어요.”
“엉? 뭔……. ……어라. 아, 아닌가? 죄송합니다…….”
놈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마침 앞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순서를 기다리던 손님이 겨우 한 팀 들어갔다.
“주호야. 그, 그냥 가자. 너무 오래 기다리는 것 같아.”
“잠깐.”
온기현이 팔을 확 잡아끌었지만 류주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놈을 찾았다. 하지만 길거리의 인파에 섞여 가던 길을 간 건지, 온기현의 말에 민망해서 도망을 쳤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누구야, 저 새끼는.
아예 기억에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찾기를 포기한 류주호가 온기현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내뱉었다.
“너, 저놈이랑 어떻게 알아.”
“……뭐?”
“방금 나한테 아는 척한 놈. 쟤 뭐야. 너 저놈 알아?”
“아니. 무슨 말이야? 난 모르는 사람인데.”
시침을 뗄 때면 온기현은 말이 빨라진다. 어리숙한 습관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게 류주호의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을 뚝 끊어 버렸다.
류주호가 온기현의 팔을 붙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대기 줄에서 빠져나와 사람들 사이를 벌리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야, 어디 가! 이거 놔, 왜 그래. 온기현이 팔을 빼내려 할수록 더욱 옭아맸다. 한참을 걸었다. 번잡한 거리에서 떨어진 인적이 드문 작은 상가 건물로 들어갔다. 뒤에서 따라오기 벅찬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계단을 올랐다. 사위가 컴컴하고 조용했다. 류주호는 옥상과 가까운 제일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서 멈췄다. 그리고 온기현의 뒤통수를 잡아 그대로 키스했다.
“으!”
채 말이 되지 못한 온기현의 음성이 그대로 입 안으로 먹혔다. 류주호는 고개를 비틀어 가며 혀로 입 안을 샅샅이 헤집었다. 놀라서 홉뜬 온기현의 눈이 일그러졌다. 그것을 뜬 눈으로 오롯이 지켜봤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온기현이 심하게 버둥거렸다. 고개를 반대로 꺾어 가며 맞물린 입술이 까질 정도로 비벼 댔다.
미칠 것 같았다. 자꾸만 저에게 뭔가 숨기려 하고, 다른 놈과의 추억을 입에 담는 온기현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대로 잡아먹힐 것 같은 끔찍한 악몽이 되살아났다.
“허억.”
간신히 입술을 떼자, 숨이 가쁜 듯 헉헉거리는 온기현의 얼굴이 창문 틈새로 비친 빛으로 인해 시야에 들어왔다. 류주호가 낮게 으르렁거리는 음성으로 짓씹듯 물었다.
“아까 그 새끼, 누구야? 아는 새끼야?”
“뭐? 나, 난 모른다고…….”
“그럼. 어제 네가 네 입으로 입에 담고, 보고 싶어 미치려고 했던 새끼는 누구야. 그 씹새끼는 뭔데. 응? 괜찮아. 그냥 솔직하게 말해도 돼. 말했잖아. 우리는 다 괜찮다고. 그러니까.”
“무슨, 말이야? 주호야. 난 네가 무슨 말 하는지 정말 모르겠어. 이러지 말고, 집에 가자. 어?”
끝까지 모른 척이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눈알에 피가 몰렸다. 격정에 휩싸여 다시금 입을 벌려 여린 점막을 혀로 쑤셨다.
“하, 으흡, 야, 야! 하지, 흐읍!”
호흡과 함께 간신히 입을 열던 온기현이 입을 앙다물었다. 류주호가 이를 세워 입술 표피를 벌리려 했다.
“윽.”
정강이에 격통이 찾아왔다.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온기현은 그 틈을 타서 뒤로 물러났다. 발로 정강이를 냅다 걷어찬 온기현이 무어라 말을 하려 벙긋거리다가 발을 굴러 계단을 재빨리 내려갔다.
“온기현. 기현아.”
탁탁탁탁.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울렸다. 따라잡으려면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딛는 발을 멈췄다. 손으로 눈두덩이를 가득 덮었다.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로 온기현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할지 저조차 알 수 없었다.
전화를 아무리 걸어도 받지 않았다. 어디로 간 거지. 이제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 약속했던, 은밀한 방법을 시도하려 앱을 켜려던 때였다.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 집에 가 있을게.]
류주호는 그길로 집으로 내달렸다. 지끈지끈 머리가 아파 왔다. 해갈되지 않는 갈증에 오히려 머리가 냉정해졌다. 애초에 류주호에게 있어서 냉정함을 되찾는다는 것은, 체념이나 침묵이 아니었다. 미심쩍기 그지없는 온기현의 행동들을 천천히 복기했다. 그럼으로써 실마리를 찾고자 함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 예민하게 행동하던 것. 고등학교 시절의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과 추억. 공통점은 고등학교였다. 정답은 하나를 가리켰다. 누군가를 류주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 있었던 일은 이해 불가였다. 대체 누구길래, 저와 온기현을 아는 걸까. 단순한 대학교 동기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숨길 일인가. 온기현의 반응은 예사로운 게 아니었다.
일련의 사건들을 되짚는 사이 집에 도착했다. 달음박질하고 싶은 마음을 겨우 참으며 발걸음을 떼었다.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막 오피스텔 로비를 지나려 할 때였다.
“저기요! 1101호 사시죠?”
“네.”
“다름 아니라 이거요. 우편물이 엄청 쌓였더라고요. 오늘따라 뭐가 이렇게 많이 왔는지, 제가 챙겨 놨습니다. 마음대로 손댄 건 없으니까 걱정 마시고요.”
“네. 감사합니다.”
경비원이 건네는 우편물을 한 손 가득 받아 들었다. 이곳에서 오래 일한 경비원이었다. 보안이 철저하기로 유명한 브랜드 오피스텔이기에 경비원이 말하는 건 적당히 흘려들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1층을 눌렀다.
집에 와 있겠지.
눈이 뻑뻑했다. 열이 드글드글 끓던 머리는 이성적으로 돌아가는 사고와는 달리 여태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먼저 사과부터 해야 했다. 많이 놀랐을 것이다. 그러고는.
띵―.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
공기가 싸늘했다. 컴컴한 집이 류주호를 반겼다. 류주호는 미간을 더욱 깊게 모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게 확실한 내부를 휘둘러봤다. 우편물은 식탁 위에 거칠게 던졌다.
그리고 핸드폰을 들었다. 초조함에 굳은 손을 움직이려다 잠시 눈꺼풀의 움푹 팬 곳을 손가락으로 꾹 짓눌렀다. 깜빡깜빡. 눈을 홉뜬 채 어지러운 시야를 확보하려 앞에 놓인 사물에 시선을 고정했다.
“……?”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히고 또렷한 눈으로 그것을 응시했다. 식탁으로 가까이 다가간 류주호가 하얀색 봉투를 잠시 바라봤다. 두 개였다. 같은 봉투가. 도저히 매치가 안 되는 발신인과 수신인이었다. 아니, 제 앞으로 온 것은 이해가 갔다. 하지만.
띠로리.
벌컥.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아, 엄마! 그걸 여기로 보내면 어떡해. 아, 진짜. 아니, 왜 그걸……! 주소는 내가 일부러 엄마 집으로 해 둔 거란 말이에요. 모르겠어. 우편물 같은 거 아직 안 온 거 같…….”
“…….”
다급하게 엄마와 통화를 하며 후다닥 신발을 벗고는 귀에 핸드폰을 대고 안으로 들어온 온기현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마치 귀신을 보듯 류주호를 본 온기현이 작게 “끊을게.” 하고는 통화를 종료했다.
“먼저 와 있었구나.”
“…….”
어색하게 거는 말에 대답이 없자 온기현이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있잖아.”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어?”
맥락 없는 질문에 온기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여기에, 왜……. 네 이름이 쓰여 있는 거야.”
류주호가 내민 것은 두 개의 하얀색 봉투였다.
그 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강산 고등학교 동창회]
그리고 오른쪽 하단에는, 수신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류주호]
[온기현]
“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이거 지금, 잘못 쓴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눈을 감았다 떠도 글자는 더욱 명확하게 보였다.
“왜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 동창회 우편물에 기현이 네 이름이 적혀 있는 거야.”
“…….”
온기현이 잠시 입술을 사리물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더 이상 속이거나 감추기에는 늦었다고 생각했다. 현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얼어붙어 있는 류주호를 똑바로 보며 고개를 들었다. 달싹이던 입에서 또렷한 말이 흘러나왔다.
“나 너랑 같은 학교 졸업했어…….”
“……뭐……?”
“나 너 1학년 때부터 알았어.”
“…….”
류주호는 흰자에 핏발이 설 정도로 눈을 크게 떴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못 박힌 듯 온기현을 직시했다. 온기현은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말을 멈췄다. 곧이어 가느다랗게 떨리는 말이 이어졌다.
“……나, ……사, 사실 너 그때부터 많이 좋아했어. 그래서, 그래서…….”
시야 앞이 이지러졌다. 순간 힘이 풀린 무릎 탓에 휘청하던 류주호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털썩 주저앉았다. 어안이 벙벙한 듯 표정은 변함없었다.
“어, 주호야! 괜찮아?”
무릎이 꺾인 류주호를 보고 놀란 온기현이 저도 바닥에 앉아서 류주호를 살폈다. 류주호는 어깨를 늘어트린 채 그런 온기현을 멍하니 바라봤다.
“……나를, 그때부터 좋아했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를 좋아했다고?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그리고 온기현이 그때부터 저를 알았고, 그리고…….
“응.”
“……어떻게……?”
황망하게 의문이 담긴 말에 온기현이 이제는 털어놓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는지 귓바퀴를 새빨갛게 물들였다. 잠시 어물어물 머뭇거리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너 입학식 때 처음 봤어. 그때부터 좋아했어. 아니, 그때는 좋아한다고 생각을 못 했었어. 그런데 자꾸 눈이 가고, 자꾸 네가 좋아졌어.”
“…….”
“널 오래전부터 좋아했어.”
쿵.
혈류의 맥동까지 느껴질 정도의 거센 충격이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마치,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충격이 류주호의 전신을 덮쳤다.
“……다른.”
목이 칼칼했다. 가슴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겨우 터진 말에 목구멍이 꽉 멘 느낌이 들어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자 온기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사람도, 좋아하면서……?”
“아.”
온기현이 그 말에 대번에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다. 류주호는 제가 무엇을 듣고 있는지, 제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도무지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난 처음부터 너만…….”
“…….”
류주호가 그에 손을 뻗었다. 마치 건드리면 물거품처럼 톡 터지기라도 할 것만 같은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언뜻 손끝이 잘게 떨리는 듯도 했다. 천천히 다가온 손바닥이 온기현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따스한 체온에 류주호가 흡, 숨을 들이켰다. 그러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이야? 정말로, 네가 나를……? 나만. 나만…….”
“……그래서 너한테 고백했을 때도 사실은 고백하고서 마음을 정리하려고 했었어. 나 혼자서는 도저히, 안 되겠어서. 그냥 너한테 대차게 차이고 나면 깔끔하게 포기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
온기현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확 끌어 당겨진 탓이었다. 어푸, 하는 소리가 절로 났다. 류주호는 온기현의 몸을 양팔로 꽉 끌어안았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손끝과 발끝이 저릿저릿하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불시의 동작에 놀랐던 것도 잠시, 온기현은 “아, 창피해.”라고 쑥스러운 듯이 말하며 류주호의 등에 팔을 둘렀다. 서로 체온을 나누며, 흔들리던 몸이 단단하게 여물 때까지 둘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 침대 위에 누워서 둘은 밤새도록 얘기를 나눴다.
“몇 반이었어?”
“나 1학년 때는 3반, 2학년은 5반, 3학년은 1반이었어.”
“반이 다 달랐네. 이동 수업 때라도 한 번쯤은 겹쳤을 법도 한데.”
“이동 수업 겹쳤었는데.”
“…….”
류주호는 온기현이 이런 식으로 과거의 접점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세상이 무너지는 표정을 지었다. 류주호는 눈앞이 깜깜한 듯 “잠시만.” 하고서는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어떻게 내가 너를 못 알아봤을 수가 있지? 아직도 믿을 수 없어.”
“못 알아보긴 무슨. 그때 너는 나를 아예 몰랐었잖아. 그니까 몰랐던 게 당연하지.”
피식 웃으며 그렇게 대꾸하는 온기현을 보며 류주호는 진심으로 과거가 후회됐다. 다른 게 아니었다. 그저, 왜 당시의 나는 온기현을 알아보지 못했던 걸까. 네가 내 유일한 사람이라고, 그때는 왜 알아채지 못했던 걸까. 이 세상에는 신이 없는 게 분명했다. 애초에 믿지도 않았지만, 이로써 분명해졌다. 만약 신이 있다면 제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가 있는 곳으로 어떻게든 이끌어 줬을 거다. 어떤 표식이라도, 어떤 우연이라도. 류주호는 애꿎은 하늘을 탓했다. 그 정도로 상심이 컸다.
그때의 너는 지금처럼 귀엽고 예뻤겠지? 지금처럼 새까만 눈을 빛내면서 수업을 들었을까? 지금처럼 고기를 좋아해서 급식 반찬에 고기가 나오면 좋아하고는 했었을까?
류주호는 제 옆에 나란히 누워서 저를 쳐다보는 온기현을 보며 그렇게 과거의 온기현의 모습을 상상하며 시간을 거슬러 되짚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아. 꿈꾸는 거 같아.”
“……꿈 아니야. 사실 이거 말할 생각 없었는데…….”
“왜?”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취한 수상한 행동들이 전부 그것 때문이었던 것이다. 온기현은 물음에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푹, 한숨을 쉬었다.
“너무 구질구질해 보이잖아. 그때부터 계속 너만 좋아해 왔다는 게. 쪽팔리기도 하고.”
“그게 왜 구질구질해?”
류주호의 목소리가 대번에 딱딱해졌다. 뒤이은 말에는 자조의 한숨이 섞였다.
“내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지 네가 알면 그런 소리 안 할걸.”
“무슨 생각 하는데?”
빤히 바라보며 그렇게 묻자 류주호가 말을 고를 새도 없이 술술 털어놓았다.
“그때 너랑 나랑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들. 너랑 같이 수업을 들었으면 어땠을까. 나는 네 옆자리에 앉는 거야. 나는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네가 신경 쓰였겠지. 자꾸만 눈에 밟혀 미치겠는데 그때에도 바보처럼 자각하지 못했겠지. 아마 병신같이 굴기도 했을 거야.”
“…….”
“점심시간에 난 너한테 말을 걸 거야. 점심 같이 먹자는 애송이 같은 말을 지껄이면서. 그럼 너는 아마, 처음에는 불퉁하게 나를 밀어 내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래도 우린 결국 같이 먹게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어떻게든 너랑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무던히 애를 쓰겠지.”
마치 이게 실제로 있었던 일처럼, 혹은 실제로 일어났으리라 확신에 찬 어조로 여상하게 읊는 류주호를 보며 온기현이 눈을 깜빡였다.
“나는 너와 어김없이 사랑에 빠질 거야.”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제가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놓쳐 버린 시간들을 후회하면서도, 당시를 떠올리며 상상하면서도, 한결같이 저는 너에게 마음을 주었을 거라고 그렇게 고백했다. 온기현은 현재의 고백보다 어쩐지 더 가슴이 조여들었다.
“그리고 너랑 방과 후에 키스할 거야.”
류주호가 얼굴을 가까이했다. 말똥한 눈을 하염없이 응시하며.
“반드시, 그렇게 됐을 거야.”
우리는.
“응.”
온기현이 미미한 웃음을 걸치며 눈을 감고 류주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류주호는 벅찬 가슴에 못 이겨 괴로운 듯 미간을 잠시 찡그리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어슴푸레한 동이 틀 때까지도, 온기현이 스르르 잠에 빠졌을 때도 류주호는 잠들지 않았다.
* * *
하지만 류주호의 몽상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시시때때로 과거 고등학교 3년 동안의 추억을 곱씹으며 몽상에 빠졌다. 갑자기 밥을 먹다가도.
“우리 학교 급식은 맛있기로 유명했잖아. 기현이 너는 시금치무침이나 콩나물 반찬은 많이 남겼을 거야. 그렇지?”
라고 물음 아닌 물음을 하며 꿈결을 노니는 듯한 멍한 눈빛과 미소를 보냈다. 눈앞에서 젓가락을 놀리고 있는 온기현을 보며 당시를 그리는 듯했다. 그리고 또 언젠가는.
“우리 학교 뒤편에 작은 중정 있었던 거 기억나지. 여름에는 그늘도 지고, 비도 막아 주고. 그때 난 자습 시간에 몰래 너 꼬드겨서 중정에서 아이스크림도 먹고, 키스도 하고, 그랬을 거야.”
“…….”
류주호는 멈출 줄을 몰랐다.
“그리고 또…….”
온기현이 무어라 대답하지 않아도 제멋대로 망상을 마구 읊어 댔다. 매일매일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 발걸음이 가벼웠고, 예쁜 올리브빛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찬란하게 반짝였다. 입가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반면 온기현은 점점 이 상황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대체 언제까지 할 셈이냐며 조금 짜증 섞인 농을 던지기도 했지만, 류주호는 듣지 않았다. 줄줄이 읊어 댄 그의 상상만으로 소설책 너덧 권은 족히 나올 것 같았다. 1절로 끝나리라 생각했던 것이 여러 번 반복되자 온기현은 이제는 류주호가 뭐라 하든지 간에 자연스럽게 무시하는 요령을 익혀 갔다.
그리고 결국에는 대체 어디서 구했는지 고등학교 졸업 앨범을 들고 집에 왔다. 왜 가져 왔냐고 성을 내는 온기현을 겨우 어르며 소파에 나란히 앉아 앨범을 펼쳤다. 류주호는 빠르게 온기현을 찾아냈다. 그리고 입을 틀어막고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가위로 온기현의 졸업 사진이 있는 부분을 조심히 자르기까지 했다. 뒷장에 인쇄된 동창생의 얼굴은 절반이 잘려 나갔다. 온기현은 그때 사실 졸업하고 처음으로 류주호의 졸업 사진을 볼 수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차갑게 정면을 응시하는 얼굴. 류주호는 3반이었다. 어쩐지 감회가 새로웠다. 당시의 온기현은 이 사람을 향해 풋풋하면서도 괴로운 짝사랑을 3년째 하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시선을 들어 잘라 낸 온기현의 졸업 사진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연신 귀엽다, 지금이랑 다를 게 없어서 더 사랑스럽다며 연신 희희낙락하고 있는 류주호를 바라보았다.
신기했다. 당시에도 많이 좋아했던 사람과 지금 눈앞에 있는 이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 같은데도, 그때나 지금이나 좋아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단체 사진에서 온기현의 손톱만 한 얼굴을 찾고는 또다시 있지도 않은 추억을 읊어 대는 류주호는 졸업 앨범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한참이나 그 짓을 이어 갔다.
어디서 구했는지도 모를 그 졸업 앨범은 온기현의 얼굴이 있는 부분만 잘려 나가 너덜너덜한 채로 책장에서 제일 눈에 띄는 곳에 꽂히게 됐다.
그리고 정말로 그게 끝인 줄 알았다. 하지만 류주호가 이 사실에 얼마나 강렬한 충격을 받았으며, 얼마나 큰 희열에 찼고, 또 얼마나 처절한 아쉬움에 땅을 쳤는지 미처 알지 못한 채 간과한 게 실수였다.
“……이게 뭐야?”
온기현은 황망하게 류주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바라봤다. 류주호는 능글맞은 호선을 입매에 시원하게 걸친 채 말했다.
“뭐긴 뭐야. 교복이지.”
“아니, 아는데. 근데 왜 이걸 갖고 왔어?”
“네가 네 거는 버렸다며. 그래서 구해 왔지. 아쉽게도 딱 맞는 사이즈가 없더라. 조금 크지만 어쩔 수 없지.”
“……허.”
입을 벙긋거린 온기현이 교복으로 시선을 다시 돌렸다. 몇 년 만에 보는지 모를 고등학교 교복이었다. 짙은 쥐색 바지에 흰 셔츠, 흰 줄무늬가 들어간 쥐색 넥타이와 조끼, 그리고 베이지색 재킷까지. 명찰만 제외한다면 완벽한 한 세트의 춘추복이었다. 멍하니 보고만 있자, 류주호가 옷걸이째로 들이밀며 눈을 빛냈다.
“자, 교복 입자. 학교 가야지.”
“미쳤어?”
온기현이 입기 싫다고 극구 거부해도 류주호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워낙 간절하게 부탁해 오는 터라 “딱 한 번만이야. 입고 바로 벗을 거야.”라고 말하며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바지를 입고 셔츠 단추를 채우면서도 기가 찼다. 대체 이건 또 어디서 구했대. 재킷까지 걸쳐 입고는 거울을 보자마자 사실은 조금 놀라고 말았다. 덩치가 무럭무럭 자라리라 생각한 탓에 동네 교복점에서 조금 큰 사이즈의 것으로 맞추었었다. 그리고 지금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은 놀랄 정도로 당시와 흡사했다. 그래서 더 멋쩍고 어색했다.
주춤거리며 화장실 밖으로 나오자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던 류주호가 벌떡 일어서며 전신을 굳혔다. 그리고 하, 하고 나직한 탄성을 흘리고는 느린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한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선으로 훑어 내렸다. 그러다 그윽한 눈빛에 이채가 서린다. 슬금슬금 불안함을 느꼈다. 약간 눈빛이 맛이 가기 직전이었다.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주춤, 뒤로 반걸음 물러서자 부드러운 악력이 양팔을 잡아 온다. 류주호가 고개를 내리고는 귀가 녹아내릴 정도의 달콤한 저음으로 눈앞에서 속삭였다.
“기현아. 너도 알고 있었지. 내가 수학 시간에 너 계속 쳐다본 거.”
“……엉?”
온기현이 눈썹을 찡그렸다.
갑작스러운 대화의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은근한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너 지금 나한테 따먹어 달라고 온 거잖아.”
“뭔 소리야, 대체.”
온기현이 황망하게 되묻자, 류주호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온기현의 넥타이 매듭 부근에 손가락을 걸치고는 앞으로 당겼다.
“우리, 선생님 몰래 나쁜 짓 할까?”
“무, 뭐? 아, 잠깐만. 아, 으음……!”
항변의 말이 나오기도 전에 입술이 가로막혔다. 말랑한 입술을 벌리고는 치열을 쓸고 점막을 이로 간질였다. 불시에 야릇한 지점을 자극당한 탓에 성감이 확 피어올랐다. 질척한 소리를 내며 입술을 맞춰 오던 류주호가 온기현의 허리를 받치더니 침대 위로 누우며 뒤엉켰다. 여린 곳을 쓰다듬듯 간질이고 입술을 이용해 말캉한 곳을 앙, 물어 오는 행위가 어쩐지 풋풋한 그것을 떠올리게 했다.
그 키스에 흠뻑 취했다. 순식간에 눈앞이 몽롱해졌다. 어쩐지 평소의 키스와도 달랐다. 온기현이 류주호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순간, 재킷이 확 뒤로 젖혀졌다. 그리고 눈 깜빡할 새에 옷깃을 잡아 어깨 뒤로 넘긴 류주호가 그것을 팔뚝 아래까지 끌어 내렸다. 그에 양팔이 뒤로 결박당한 상태가 되어 양팔을 움직일 수가 없게 됐다.
“아, 야아. 이거 뭐야, 풀어, 흣……!”
“기현아. 그렇게 꼴렸어? 응?”
“무슨 소리냐고, 진짜!”
류주호는 제멋대로 떠들었다.
이거 무슨 역할 놀이인가? 상황극? 뭐 그런 건가? 어렴풋이 뭐 그런 종류 같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온기현은 도무지 놀이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이미 반쯤 정신이 나간 류주호가 너무 멀리 가 있는 탓이었다.
버둥거릴 새도 없었다. 흥분에 차서 가슴을 씨근덕거린 류주호가 또다시 깊게 입술을 맞물려 왔다. 육중한 체구로 온기현의 허벅지를 가랑이 사이에 두어 옴짝달싹 못 하게 가두었다. 쪽, 소리가 나도록 입술이 떼어졌다. 젖어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입술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맛을 다신 류주호가 상체를 훅 들어 올렸다.
“주호야. 너 진짜……!”
“미치겠다, 시발.”
류주호는 온기현의 모습을 위에서부터 뜯어보듯 살폈다. 볼은 발그레하게 물들이고 입술은 축축하게 젖어서는, 제 것과 같은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서 잔뜩 흐트러져 있는 온기현을.
“지금이라도 쌀 것 같아, 기현아.”
“알겠어. 알겠으니까, 으응……! 아!”
미친 사람처럼 홀린 음성으로 중얼거린 류주호가 대뜸 온기현의 교복 조끼 아래를 잡고 휙 위로 올리고는 하얀 셔츠 위로 뾰족하게 솟은 젖꼭지를 엄지로 튕기듯이 쓸었다.
온기현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터졌다. 살갗이 아닌 한 겹의 옷이 가로막은 상태인데도 그랬다. 그 민감한 반응에 류주호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터졌다.
“여기 언제부터 세운 거야? 응? 복도에서 나랑 인사할 때부터?”
“아응, 으흣……. 소, 손톱으로 긁지, 마아……! 우리가 언제 복도에서, 흣!”
“하아. 아니면, 내가 아까 너한테 말 걸었을 때부터? 이렇게 야하게 젖꼭지 꼿꼿이 세우고 수업 들은 거야? 기현아. 말해 봐.”
“말하긴 뭘 말해……! 아!”
온기현이 진저리치며 짜증스레 대꾸할수록 자극은 더욱 거세졌다. 점점 뭉근한 열감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더욱 미칠 것 같은 건, 슬슬 감질이 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천 너머로 손톱을 세워 젖꼭지와 유륜 주위를 긁어 봤자 직접 닿는 감각만 못했다. 오히려 더 간지럽기만 해서 온기현은 어깨를 움츠렸다.
“주호야……. 나, 안으로……, 해 줘……. 어?”
“……내 말에 대답하면.”
“읏…….”
류주호의 음성이 한껏 낮아졌다.
“언제부터 이랬어. 응?”
온기현이 입술을 사리물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이 돼먹지 않은 상황극에 응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작금의 이 고여 있는 쾌감을 해소할 유일한 방법 같았다.
“아, 아까부터…….”
“아까?”
“등……교하고, 너, 너랑……. 아침에 인사한 다음부터…….”
“하아……. 이렇게 야해서 어떡해. 너무 야해, 너. 나한테만 그런 거지? 나만 보고…….”
“응응…….”
고개를 잘게 아래위로 끄덕였다. 그리고 간절함이 어린 눈으로 류주호를 응시했다. 크게 가슴을 부풀린 류주호의 미간이 흥분을 참은 탓에 잔뜩 구겨졌다.
“짓무를 때까지 실컷 빨아 줄게.”
“아……!”
낮게 짓씹은 류주호가 단번에 팔에 걸친 재킷을 벗기고 조끼를 훌렁 머리 위로 벗긴 다음 아까와 마찬가지로 뒤로 빼서 팔에 걸쳤다. 언뜻 화가 나 보이기도 했다. 그 정도로 커다랗고 다소 폭력적인 동작이었다. 온기현은 아까보다 더욱 움직임이 제약되었다.
류주호가 고개를 숙여 셔츠 위로 입을 벌리고는 젖꼭지와 함께 입 안으로 흡입하듯 머금었다. 일부러 타액을 흠뻑 묻혀 셔츠가 척척하게 달라붙을 정도로 게걸스럽게 빨아 댔다. 반투명한 옷감 아래로 새빨갛게 부어오르기 시작한 가슴이 흐릿하게 보였다.
“아, 흐읏……! 좋, 흐……!”
“좋아? 하아, 가슴 빨아 주니까 좋아 미칠 것 같아? 우리 지금 몰래 나쁜 짓 하는 거야. 그런데도 흥분돼?”
“아, 하아! 으응……!”
마치 대답과도 같은 신음이었다. 농탕질이 이어졌다. 류주호는 흥분에 휩싸이면서도 성난 들소같이 과격하게 몸을 들썩였다. 정작 미칠 것 같은 것은 그 자신인 듯 보였다.
류주호는 반대쪽도 똑같이 빨아 댔다. 온기현이 몸을 배배 꼬며 벙긋 입을 벌렸다. 새빨간 혀가 밖으로 내밀어졌다가 쏙 숨어들길 반복했다. 류주호의 말마따나 미칠 것 같았다. 정말로 그가 하는 이 상황극 때문에 더 흥분한 것인지도 몰랐다. 평소보다 더 감도가 예민해진 것 같은 느낌이다. 좀 더 세게 마찰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좀 더, 더.
“옷, 흐으, 벗기고 해 줘, 응? 아읏.”
물기 어린 음성이었다. 제 본능에 솔직한 사랑스러운 말에 류주호가 턱 끝을 먹어 치울 것처럼 입술을 미끄러트려 얼굴에 입을 맞췄다.
“참아야지, 기현아. 선생님이 올지도 모르잖아.”
“무, 무슨 선생님이……! 아, 아…….”
입가에 침이 고였다. 중심에 열감이 더해졌다. 하지만 이제껏 퉁퉁 부어오를 정도의 자극을 감내했던 몸이, 이 정도의 야릇한 감각만으로 만족할 리가 없었다. 온기현은 혼몽한 시선을 들었다.
“알았, 어……. 선생님 오기 전에 빨리…….”
“빨리, 어떻게?”
“빨아 줘……. 빨리. 수, 수업 시작하기 전에 빨리…….”
하.
류주호의 입에서 거친 탄성이 터졌다. 그리고 흰 셔츠 위에서 두 번째 단추까지 후드득 뜯겨 나갔다. 류주호가 셔츠 깃을 좌우로 벌렸다. 그러고는 코를 처박듯이 얼굴을 묻었다. 온기현이 자지러졌다. 쭙, 쭙 소리가 날 정도로 입 안 한가득 살점을 머금고는 이로 긁고, 씹고, 삼켜 댈 것처럼 젖꼭지를 빨아 댔다. 무절제한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가슴이 더욱 앞으로 내밀어져, 류주호가 만족스럽게 이를 드러냈다. 타액이 가슴팍 위를 흥건하게 적실 때까지 빨렸다. 허리가 바르르 떨렸다. 결국 아래가 갑갑해질 정도로 성기가 힘을 받았다.
류주호가 젖은 소리를 내며 젖꼭지를 뱉어 내고는 제 상의를 훌러덩 머리 위로 벗어 던졌다. 후끈한 체온이 느껴졌다. 온기현이 입을 헤벌린 채 그의 모습을 바라봤다. 씰룩거리는 삼각근과 흉근이 유난히 두드러져 보였다. 평소와 달리 일찍부터 땀을 흘렸는지 가슴팍이 습기가 어린 터라 설핏 빛나 보였다.
미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류주호는 그런 온기현을 내려다보며 은은하게 웃었다. 입꼬리 한쪽을 보기 좋게 끌어 올려 눈을 빛내는 모습이 영락없는 장난기 가득한 소년 같았다. 아니, 제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지도 몰랐다. 자꾸 류주호가 상황극에 몰입하다 보니 저까지도 그가 그 시절의 그때 그 모습으로 보였다. 고등학생이던 류주호의 모습으로.
허리가 자꾸 위로 들썩였다. 골반까지 찌르르 울리는 감각에 온기현이 으응, 하고 보채듯 몸을 뒤틀 때였다. 불시에 하의가 벗겨졌다. 아니, 버클에 류주호가 손을 댄 것은 맞았다. 지익, 하는 소리와 함께 교복 바지는 허벅지 정도까지만 내려갔다. 그에 다리가 어설프게 벌어졌다. 조끼로 인해 양팔을 결박당한 탓에 제 맘대로 옷을 벗을 수가 없었다.
“주호야, 이거 바지……. 바지 좀.”
“안 되지, 기현아.”
하지만 류주호는 고개를 내저었다.
“전부 벗었다가 누가 오면 어쩌려고.”
“아.”
류주호는 완전히 상황극에 녹아들었다. 저렇게까지 말하니 정말로 누군가가 교실 문을 열고 올 것만 같았다. 괜히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러니까 얼른 박아 줄게.”
“흐읏!”
불시에 엉덩이가 뭉클하게 짓이겨졌다. 한 손으로 꽉 쥔 엉덩이 살이 이리저리 뭉개질 정도로 거친 손길이었다. 동시에 허리가 위로 들렸다. 어,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뜬 순간에 류주호의 혀가 꽉 다물린 구멍에 닿았다.
진즉 익숙해진 행위였다. 할 때마다 창피하고 미칠 것 같기는 해도, 혀를 이용해 아래를 적시고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빨리는 행위 자체는 수도 없이 받아 왔다. 하지만 오늘따라 더욱 몸이 펄쩍 튀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서인지, 긴장한 근육이 조밀하게 구멍을 조이고 쉽사리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으, 으으…….”
“힘 풀어야지.”
“흣, 아!”
짝! 엉덩이에 불같은 손길이 날아들었다. 찰진 소리가 나도록 가볍게 엉덩이를 맞은 온기현이 소리를 질렀다.
“혼나.”
엉덩이가 화끈거렸다. 타격과 동시에 움찔거린 구멍이 숨을 쉬듯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류주호는 그렇게 말하며 잔뜩 수축한 좁은 곳에 제 혀를 쑤셔 넣듯 벌려 젖혔다.
옅은 분홍빛의 주름진 곳이 기쁜 듯이 축축한 살덩이를 삼켰다. 점점 구멍이 열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하, 으읏, 잠……!”
혀를 안에 두고 주름을 한계까지 벌리며 사이를 비집고 침입한 것은 굵직하고 기다란 손가락이었다. 한 개가 아니었다. 두세 개는 됨 직한 압박감이었다. 안을 입으로 적시면서 동시에 손가락으로 점막을 비비고 안을 쑤셨다. 숨쉬기 힘들 정도로 빠듯한 느낌에 바지가 걸린 다리가 공중으로 쭉 펴졌다. 사지가 자유롭지 못한 탓에 가해지는 자극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새된 신음을 터트리며 허리를 뒤틀었다. 이미 성기는 새빨개진 채로 정체 모를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하얀 셔츠 밑단이 축축하게 젖어 갔다.
“아, 흐아, 아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느새 혀는 빠져나가고 손가락만 남아 내벽 깊숙이까지 들어 왔다 나갔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손가락은 어느새 네 개로 늘어나 있었고, 유독 온기현이 견디기 힘들어하는 도톰하게 부은 부근을 살짝살짝 건드리는 것처럼 빠르게 쑤셔 댔다.
응응, 하고 어금니를 꽉 문 채 쾌감에 흔들리던 온기현이 퍽,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찌르는 손길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절정의 신음을 터트렸다. 순간적으로 안개가 낀 것처럼 시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발간 볼을 타고 침이 줄줄 흘렀다. 혀를 빼꼼 내민 채로 입을 헤벌렸다.
극렬한 쾌감에 손가락을 집어삼킬 것처럼, 꽉 물어 조인 채로 자르르 경련했다. 류주호는 온기현의 몸에서 힘이 빠질 때까지 손가락을 전부 처넣은 채로 그 모습을 오롯이 지켜봤다.
“하아.”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린 류주호가 손가락을 한꺼번에 빼내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비어 버린 구멍이 벌름거리며 새빨갛게 농익은 점막을 내미는 것에도 시선을 고정하더니, 제 아래로 손을 내렸다.
온기현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에도 류주호가 지퍼를 내리고 브리프를 내려 성기를 꺼내는 모습을 흐릿하게 지켜봤다. 이미 금방이라도 터질 듯 잔뜩 부풀어, 검푸른 핏줄을 씰룩이며 엄청난 기세로 기립해 있었다. 금방이라도 뜨끈하고 여린 점막을 죄 짓이겨 들어올 것처럼 잔뜩 성나 있었다. 이미 진즉부터 극도로 흥분해 있던 탓인지 귀두 부분이 희멀건 점액질로 젖어 있는 것까지 매우 흉흉한 모습이었다. 문득 목구멍이 꽉 메는 느낌이 들고 가슴이 답답했다. 성기를 마주하며 고양된 성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류주호의 눈매가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내 자지 맘에 들어?”
성기 밑동을 손으로 그러쥐고는 제가 쑤실 곳을 향하게 한 류주호가 말을 이었다.
“벌써부터 이렇게 좋아하면 어떡해.”
“벌, 써라니, 아, 흐아……!”
“앞으로 얼마나 더 좋아하려고.”
온기현은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류주호가 그대로 빠끔하게 벌어진 구멍에 제 귀두를 집어넣었다. 그새 좁아진 내벽에 길을 트듯이 앞뒤로 허리를 움직이며 느리다고 생각할 정도로 커다란 성기로 안을 벌렸다. 다리를 크게 벌리지 않은 탓인지 내벽이 빠듯하게 성기를 조였다.
그리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지 철퍽, 하고 살끼리 맞부딪치는 소리가 울릴 정도로 허리를 쳐 올렸다.
“아……!!”
“하…….”
목을 긁는 듯한 탄성과 함께 류주호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난폭한 침입자를 반기듯 사방의 점막이 차지게 감겨 왔다. 커다랗게 부푼 음경을 받아 낸 내벽이 빠듯하게 벌어졌다. 미간이 깊게 팼다. 온기현은 엄청난 압박감에 못 이겨 등 뒤로 묶인 손으로 시트를 절박하게 그러쥐었다.
류주호가 허리를 뒤로 물렸다. 그러고는 다시금 젖은 살 소리가 난잡하게 터질 정도로 거세게 허리를 놀렸다. 허리가 지잉 울렸다. 심줄이 돋아난 것까지 여실히 느껴질 정도로 팽팽히 늘어난 구멍이 빈틈없이 그것을 삼켰다.
류주호가 거친 신음을 터트리며 시선으로 교복을 입은 온기현의 모습으로 쭉 훑었다. 그리고 제 성기를 야무지게 꽉꽉 물고는 바르르 떨고 있는 입구까지 시선을 내렸다.
“아흣, 아, 아, 아아!”
그러고는 미친 사람처럼 거세게 허리를 흔들었다. 구멍을 전부 빠져나가기도 전에 치골이 엉덩이에 퍽, 하고 부딪치도록 성기를 박았다. 거센 마찰에 의해 결합부가 점도 높은 액체로 음란하게 뒤엉키고,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해진 결합부는 탈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 자, 잠까, 하읏, 아, 윽!”
온기현이 감당할 수 없는 쾌락에 괴상한 소리를 내자 류주호는 핏발 선 눈으로 그 모습을 보더니 다리에 걸쳐진 바지를 대번에 잡아끌어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공중에서 애처롭게 흔들리는 두 다리를 잡더니 몸이 접힐 정도로 위로 끌어 올렸다.
“하아, 기현아. 너 지금 어떤지 알아? 윽, 교복 입고 나한테 박히는 거, 얼마나 예쁜지 알아? 하.”
얼마나 허리를 세게 놀리는지, 혈액이 온몸을 빠르게 치달았다. 땀에 젖은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거졌다.
“으, 흐읏, 아윽, 아아!”
류주호가 무릎을 팔로 감싸 안듯 오금을 가슴 쪽으로 끌어안고는 값비싼 매트리스가 움푹움푹 꺼질 정도로 거세게 허리를 움직였다. 끈덕지게 엉겨 오는 내부는 이미 셀 수 없는 섹스 탓에 버거운 크기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상태였다. 성기의 모양대로 안이 변한 게 아닌가 하고 여겨질 정도로 흉기처럼 부푼 그것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와 몸을 섞는 게 처음이라고 느껴졌다.
“씨발. 내가, 그때 너 알았더라면. 그때 널, 봤더라면.”
혼잣말이 짓이겨지듯 잇새로 터졌다. 언뜻 화난 듯도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성기는 더욱 팽창하여 누가 보더라도 작은 구멍이 거대한 것을 삼키고 있는 것이 버거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온기현 또한 안이 무지막지하게 헤집어지면서도 착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류주호에 동화된 것처럼, 어쩐지 죄를 짓고 있는 듯한 죄책감과 함께 그것이 곧 성적 고양감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하, 되돌아가고 싶어. 그럴 수만 있다면, 내가 너를, 그때 봤다면. 큭.”
거친 호흡이 터지고 턱이 단단해졌다. 온기현의 성기에서는 액체가 물처럼 흘러 배꼽에 고였다. 몸이 뒤흔들릴 때마다 성기에서 물이 튀었다.
“하읏, 아, 나, 흣!”
등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다. 어깨가 뻐근한 것도 잊었다. 사정감이 급속도로 찾아왔다. 새빨갛게 물든 목을 뒤로 젖혔다. 류주호의 눈은 온기현의 모든 쾌감의 증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랬다면, 틀림없이, 너랑 바로 사랑에 빠졌을 텐데.”
현실성 없는 가정이었다. 그렇지만 확신에 찬 어투였다. 내가 너를 눈에 담은 그 순간부터 마음이 흔들렸던 것처럼, 그때에도 그랬을 텐데. 너보다 내가 더 먼저 너를 발견해 냈을 텐데.
안타까움이 번진 얼굴에서 짙은 쾌감과 회한이 한데 어우러졌다.
“아니, 꼭 그때가 아니더라도 난……!”
둔부가 시뻘게질 정도로 아릿했다. 통증과도 같은 쾌감에 온기현이 허리를 뒤틀자, 류주호가 온기현의 성기를 그러쥐었다. 아! 헤벌어진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그가 엄지를 이용해 요도구를 긁듯이 자극했다. 온기현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색소가 옅기만 한 성기 끝이 진한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아, 하윽……!”
온기현이 허리를 위로 띄우며 다리를 뻣뻣하게 굳혔다. 성기 끝에서 반투명한 액체가 분출됐다. 몸을 굳혔음에도 치대는 손짓 탓에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것을 보며 류주호가 퍽! 하고 허리를 쳐 올렸다. 절정을 오롯이 성기에 오는 진동으로 느끼며 침대가 부서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미친 듯이 허리를 움직였다. 이윽고.
“크윽!”
성기를 씹어 삼키고 있는 내벽에 귀두를 문댄 채, 거센 물줄기가 쏘아졌다. 류주호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지독한 절정이었다. 하지만 평소와는 달랐다. 그것은 사정이 아니었다. 류주호가 이를 까득 물었다.
“아, 흐아, 이, 이거 뭐……!”
온기현이 바르르 떨다가 기겁을 하며 자지러졌다. 쉴 새 없이 터지는 물줄기가 내장을 가득 메운 터다. 류주호는 다시금 욕설을 짓씹고는 제 성기를 끄집어냈다.
촤악, 촤악.
분출이 멈추지 않았다. 무릎으로 선 채 딱딱한 조각상처럼 몸을 세운 류주호가 성기를 쥐고는 이제껏 느껴 보지 못한,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며 눈앞에서 폭죽이 수백 개가 터지는 듯한 엄청난 감각에 몸을 맡긴 채 허리를 튕겼다.
류주호의 성기에서 쉴 새 없이 터진 투명한 액체가 온기현의 온몸에 끼얹어졌다. 침대 위에 축 늘어진 온기현의 몸이, 사출된 액체로 인해 척척하게 젖어 갔다. 마치 비를 홀딱 맞은 사람처럼, 하얀색 셔츠와 넥타이, 그리고 땀에 젖은 상체가 완전히 젖었다.
“하…….”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만 같던 절정의 폭포수가 드디어 멈췄다. 류주호가 거칠게 숨을 골랐다. 온기현은 온몸에 물을 맞아 넋을 놓은 채 눈꺼풀까지 젖어 눈을 뜨지 못하고 떨기만 했다.
류주호가 제 것으로 인해 흠뻑 젖은 온기현의 몸 위로 상체를 숙였다. 그리고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을 손으로 쓸어서 떨어 줬다. 온기현이 살며시 눈꺼풀을 들었다. 가물가물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온기현을 응시하다가 귓가로 입술을 가져갔다.
그리고 재차 고백했다.
언제, 어느 형태로 너와 만났더라도 사랑에 빠졌을 거라고.
시간을 거슬러 중학교, 더욱 그 이전의 어린 꼬마 시절에 만났더라도.
아니, 오히려 태어날 때부터 함께였더라도.
너와 같은 배 속에서 만났다 하더라도.
그 어느 때라도, 너를 사랑했을 거라고.
그렇게 속삭였다.
온기현은 끊임없이 그의 목소리를 귀에 담으며 어느 순간 혼몽한 의식에 몸을 맡겼다.
그대로 잠들었다.
꿈속에서 자신은 잠들기 전과 마찬가지로 교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손끝에 걸리는 명찰만이 달랐다.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눈에 익은 풍경이었다. 제가 졸업한, 류주호와 같이 졸업한 고등학교였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빛 무리에 담긴 흩날리는 먼지. 교실 특유의 풋풋한 냄새.
아, 여기는 그때구나.
머리가 덜 자란, 갓 입학했던 그때. 제 마음이 뭔지 미처 몰랐던 그 시절.
꿈속에서도 자각은 명확했다.
교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혈기 왕성한 아이들의 흔적을 보여 주듯 이리저리 삐뚤빼뚤 흐트러진 책상의 나열 또한 어쩐지 입가에 웃음을 그리게 했다.
그리고.
고개를 바로 가져왔다. 동시에 눈이 크게 뜨였다.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저와 마찬가지로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명찰 또한 달고 있었다. 온기현이 어라, 하고 혼돈한 머릿속으로 눈앞에 있는 이의 모습을 뜯어 보다, 그 명찰로 시선을 내렸다.
이럴 리가 없는데.
왜 자신과 마주 보고 서 있는 것인지.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데.
하지만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 명찰에는 ‘류주호’라고 또렷하게 쓰여 있었다.
그의 입이 느릿하게 벌어졌다. 입가에 걸린 예쁜 웃음이 눈부셨다.
그는 말했다.
“안녕.”
“……아.”
“일어났네.”
온기현이 멍하게 뜬 눈을 얕게 깜빡거렸다. 뺨과 귓불을 쓰다듬는 온기가 느껴졌다. 언제 날이 밝았는지 커튼 새로 밝은 빛 줄기 한 가닥이 옅게 새어 들어와, 두 사람의 몸 위에 기다란 선을 그렸다.
마른 머리칼을 한차례 쓸어 넘겨 준 류주호가 쪽, 하고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가 떼었다.
아득하게 멀어졌던 의식이 점점 현실로 돌아왔다.
눈앞에 환하게 미소 짓는 이를 시야에 담았다.
지금의 류주호였다. 제가 사랑하는, 그리고 저를 사랑하는.
가슴이 충만하게 차올랐다. 눈이 접히며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그만 들릴 수 있도록 작게 속삭여 화답했다.
“안녕.”
* * *
“와, 어떡하지? 긴장돼.”
온기현이 수선을 떨었다. 제 목에 걸린 넥타이가 여간 갑갑한 게 아닌지 자꾸만 목젖 부근을 매만졌다. 몸에 익지 않은 정장의 소매 끝을 돌려봤다. 여태 정갈하게 다듬은 머리에도 자꾸 손을 올린다.
“괜찮아. 내가 말했지? 면접도 발표랑 똑같아.”
“구황 작물?”
“응. 그렇지.”
긴장감에 발을 동동 구르는 온기현 옆에 선 류주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인턴 면접인데도 왜 이렇게 떨리냐. 떨어지면 어떡하지.”
급기야 눈에 방울을 매단 온기현이 목구멍에서 터지는 불안을 삼키려는 듯 끅끅거리는 소리를 내며 입매를 굳혔다.
“떨어지면 어때. 그냥 평소처럼만 하면 돼.”
류주호는 옆에서 열심히 다독였다.
오늘은 인턴 면접이 있는 날이었다. 합격하더라도 정규직 전환도 아닌 6개월의 수습 기간만이 주어지는, 실상은 득이 될 것 없는 자리였다. 하지만 겨우 얻은 면접 기회였다. 아직 장래를 확실히 결정하지 못한 온기현이었기에 이번 기회가 더욱 중요하게 다가왔다.
“헉, 이제 가야겠다!”
“같이 나가자. 데려다줄게.”
류주호가 온기현을 따라나서며 차 키를 챙겼다.
구두를 신으려 몸을 숙였던 온기현이 헉, 하고 고개를 들었다.
“맞다. 반지! 면접에는 빼고 가야겠어. 잃어버릴라.”
“오늘은 그러는 게 낫겠다.”
류주호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에 후다닥 거실로 달려간 온기현이 장식 테이블 앞에 서서는 제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뺐다. 매일매일 끼고 다니던 것이라 손가락에서 잘 떨어지지 않았다.
‘잠깐 기다려. 금방 집에 와서 다시 껴 줄게.’
속으로 반지를 향해 그렇게 읊조렸다. 어쩐지 저도 류주호를 닮아 가는 것 같다며 피식 웃었다.
온기현이 반지를 빼고는, 액자 앞쪽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액자 속 사진을 보고는 빙긋 미소 지은 온기현이 “이제 가자.”라고 말하며 다시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뒤에 남겨진 액자 속에는, 두 사람이 각자 왼손을 들어 올린 채 반지가 잘 보이도록 보여 주는 모습으로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더없이 행복한 순간을 기념하며.
그 앞에 놓인 은색 반지에 한여름의 마지막을 고하는 환한 빛이 동그란 선 위를 둥글리듯 머물렀다.
반지 안쪽에 새겨진 음각의 문자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오래도록 바래지 않을 마음을 담아.
[Always in love with you]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