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2. B-day (19/20)

외전 2. B-day

핸드폰 화면을 한참이나 내려다봤다. 숫자가 나열된 캘린더를 뚫어질 듯 쳐다보며 테이블 위로 상체를 늘어트렸다.

“으으…….”

시선은 한 날짜에 박혀 있었다. 다름 아닌 5월 13일. 곧 다가오는 류주호의 생일이었다.

“하아…….”

카페 내부에 흐르는 발랄한 아이돌 노래에 맞지 않은 깊은 한숨이 터졌다.

“어쩌지…….”

“뭘 어째요?”

“엇.”

돌연 들린 음성에 온기현이 상체를 번쩍 들었다. 요즘 유행이라는 누더기 같은 빈티지 맨투맨을 입고 한쪽 어깨에는 백팩을 대충 걸친 이윤규가 서 있었다.

“윤규야. 왔어?”

“웬 한숨이에요? 땅 꺼지겠어요, 형.”

어깨를 들썩이며 장난스레 웃어 젖힌 이윤규가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의 커다란 체구 때문에 2인석이 순식간에 비좁아졌다. 온기현이 부산스럽게 핸드폰을 암전시켰다.

“와, 바깥 날씨 미쳤다. 지금도 더우면 여름엔 어쩌려는 건지. 벌써 무섭다니까요.”

“시원한 거 마실까?”

“좋죠.”

아이스아메리카노 두 개를 주문해서는 이윤규는 얼음까지 아득아득 씹으며 벌컥벌컥 들이켰다.

취업 스터디를 시작한 지 수 개월이 지났다. 심현석을 중심으로 한 스터디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며 아직까지도 그대로 잘 유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멤버들과 완전히 편해진 터라 이렇게 가끔씩 밖에서 만나서 함께 커피를 마시거나 밥을 먹기도 했다. 특히, 유달리 털털한 성격인 이윤규와는 수업도 몇 개 겹치는 게 있어서, 수업을 가기 전에 이렇게 카페에서 만나고는 했다.

취업 스터디에서 류주호는 빠졌다. 졸업생이란 게 첫 번째 이유였고, 계속해서 도움만 받을 수 없다고 심현석이 염치 선언을 한 게 두 번째 이유였다. 그래도 류주호가 전수해 준 여러 노하우가 스터디에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었다.

“아, 시원하다.”

걸걸한 소리를 낸 이윤규가 카페 의자에서 엉덩이를 앞으로 죽 빼고 늘어졌다. 그리고 투덜거리며 수업에 가기 싫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어린 남동생 같은 느낌에 귀여워서 피식 웃었다.

“근데 형. 뭐 고민 있어요?”

“어?”

“아니. 진짜요. 아까 이렇게 하아……. 하면서 한숨 쉬길래요. 뭐 고민 있으면 제가 들어 드릴게요.”

“아…….”

온기현이 음, 하고 눈매를 찡그렸다. 그래.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조언을 얻는 게 좋겠지. 힌트를 얻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윤규는 사교성도 좋고 친구도 많으니까, 이런 것에 대해서 아는 게 많을 것 같았다. 말이야 조금 바꾸면 되는 거고.

“사실은 음, 친구가 곧 생일이거든. 근데 뭘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어.”

“잉? 친구요? 아니, 뭘 준비해요. 그냥 만나서 술이나 사 주면 되지.”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진짜 소중한 친구거든.”

“그럼 진짜, 진짜 술 많이 사 주면 되죠.”

이윤규가 당연한 말을 묻냐는 식으로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이러다가는 아무런 조언도 못 얻을 것 같다. 답답한 마음에 그냥 사실을 털어놓았다.

“사실……. 애인 생일이거든.”

“네에?? 형! 여친 있었어요?? 언제부터요?!”

“아, 깜짝이야.”

이윤규가 대뜸 몸을 벌떡 세우더니 경악에 차서 소리쳤다.

“아니, 미친. 어떻게 한마디도 말을 안 할 수가 있어요? 대박. 진짜 있어요? 진짜? 언제부터요?”

“……얼마 안 됐어. 진짜, 얼마 전부터 사귀기, 시작해서.”

이윤규가 득달같이 질문을 쏟아 냈다. 개미 소리만큼 작아진 목소리의 온기현이 거짓말로 대꾸하자, 이윤규가 절망에 잠겨 희게 뜬 얼굴을 손으로 와락 덮었다.

“미쳤다……. 진짜 나 빼고 다 커플이야…….”

“야…….”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하지만 이윤규는 몇 초도 되지 않아 금세 회복했다. 그리고 아까와 다른 진지한 눈빛으로 온기현의 고민에 임했다.

“여친 생일 선물 뭐 할지 고민인 거죠? 와……. 나 같으면 밤잠도 설쳤겠다. 고민할 만도 하겠네요.”

“그치?”

“흠…….”

“근데 너무 여성스러운 선물 말고. 좀 둘 사이를 기념할 만한 특별한 선물 같은 거 하고 싶어서.”

이윤규도 같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골똘한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리던 이윤규가 아! 하고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처럼 손가락을 들었다.

“이벤트 어때요? 막 하트 모양으로 촛불 켜 놓고.”

“촛불? ……촛불 켜서 뭐 하는데?”

“어……. 로맨틱하잖아요.”

“그런가?”

이윤규가 자신이 없는 듯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던 온기현이 솔깃한 반응을 보이자 신나서 말을 이어갔다.

“네, 네. 여행 같은 데 같이 가서 하는 거죠. 막 주변 껌껌하게 해 놓고. 제가 도와드릴게요!”

“근데 여행은 얼마 전에 갔다 왔는데…….”

그렇게 말하는 온기현의 볼이 금세 달아올랐다.

딱 보름 전, 1박 일정의 국내 여행이었다. 4학년인 저도 그렇지만, 요새 한창 지인의 사업을 돕는 중인 류주호도 시간을 길게 내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겨우 느긋한 휴일에 모처럼 여행이나 다녀오자고 해서 갔다 온 거다.

그리고 거기서…….

아, 미쳤어.

그날 밤을 떠올리자 얼굴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동해가 훤히 내다보이는 독채 풀 빌라였다. 신나게 수영을 하고 술까지 들어가자, 여느 때와 다른 환경에 둘의 제어가 방만하게 풀어졌다.

서로의 것을 빨아 주는 것은 물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체위로 깊게 몸을 맞물렸다. 수영장과 방, 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까지. 이곳저곳 할 것 없이 난잡하게 뒹굴었다. 종내에는 울다 지친 온기현이 사정이 힘들어 헉헉거리기만 하자, 류주호는 온기현의 매끈한 음부에 얼굴을 묻고는 한참이나 게걸스럽게 빨아 댔다. 서로의 귓가에 사랑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퍼붓다가 결국 기절해 버린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어쩐지 지금도 몸이 저릿한 기분에 빨대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쭈욱 빨아들였다.

“헐, 형…….”

“어?”

그때 이윤규가 음흉하고 은근한 어투로 온기현을 불렀다. 괜히 죄지은 사람처럼 깜짝 놀라 제 머리칼을 쓸어 댔다. 머릿속에서만 회상하던 기억들이 혹여나 새어 나오지는 않았을까 쓸데없는 걱정에서였다.

“와……. 이 형. 아닌 것처럼 생겨서 은근히 속도 빠르네요.”

“뭐, 뭐? 무슨 소리야?”

뜨끔해서 헛기침과 함께 태연히 대꾸했다.

“에이, 모른 척하기는. 얼굴에 다 드러나는구만. 근데…….”

은근하게 말을 낮추는 이윤규의 얼굴에 음흉한 웃음이 떠올랐다.

“예뻐요? 여친?”

그 물음에 온기현이 눈을 깜빡거리다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어. 진짜 예뻐.”

“와 씨. 대박.”

진심이었다.

류주호는 이질적으로 특출난 외양이 눈에 띄는 편이었다. 그는 키도 크고 뼈대가 굵고 몸 전체가 단단해서 전체적으로 남성성이 강하게 두드러졌지만, 가까이에서 얼굴만 빼놓고 요모조모 살펴보면 속눈썹도 길고 쌍까풀도 양쪽이 깊고 고르게 파여서 객관적으로 예쁜 얼굴이었다. 거기다 모난 데 없이 쓸데없는 굴곡이 들어간 곳도 없었다.

거기에, 저는 그의 청소년 시절을 남몰래 몇 년이나 지켜봐 온 사람이었다. 10대 후반부터 20대 중반이 넘어서까지, 류주호는 점점 신체적으로 장성하고 커다래져 갔지만 얼굴만은 예전 그대로였다.

처음 봤던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참 예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혹시 사진 있어요? 완전 궁금하다.”

“어? 사진? 아니? 없는데?”

당황해서 말이 빨라졌다. 사진이야, 있기야 있었다. 사귀기 시작하고는, 아니 동거하기 시작하고는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류주호는 사진 찍기에 취미를 붙인 듯 툭하면 사진을 찍어 대고는 했다.

같이 찍는 사진일 때도 있었고, 온기현의 독사진일 때도 있었다. 얼마나 유난스럽게 사진을 찍어 대는지 저도 덩달아 류주호를 카메라에 담는 게 즐거운 습관이 되어 있었다.

당장 핸드폰의 앨범을 열더라도 그와 함께한 추억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래요? 왜요? 여친이 사진 찍는 거 안 좋아해요?”

“어, 응.”

“흠, 그래요? 다음에 소개 한번 해 주세요. 제가 술 쏠게요!”

“그래.”

고마워. 온기현이 웅얼거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이미 너랑 술 먹은 적 있어, 라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이벤트 또 뭐가 있지. 막 레스토랑 이런 데서 케이크 들고 노래 불러 주는 건 어때요?”

“뭐? 사람들 다 있는 데서?”

“네.”

“됐어, 윤규야. 그냥 나 혼자 생각해 볼게.”

자기 일처럼 고민해 주는 이윤규를 보며 온기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이윤규가 침울한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트렸다.

“저한테 괜히 물어봤다 싶죠.”

“어? 아니. 응.”

“……사실 저 모솔이에요, 형.”

“……미안.”

“사과하니까 더 죽고 싶어요, 흑. 씨발…….”

이윤규가 고개를 푹 숙였다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말없이 어색하고 머쓱한 시간이 흘렀다.

현타를 스스로 극복한 이윤규는 다시금 궁금함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형 여친, 연상 아니에요?”

“응?”

“형 여친은 왠지 엄청 어른스럽고 성숙미 넘치는 사람일 거 같아요. 형은 약간 그런 느낌 있거든요. 괜히 울리고 싶고,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든달까. 딱 연상 누나들이 좋아할 스타일.”

“뭐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마.”

이윤규의 장난스러운 말에 무언가를 떠올린 온기현의 눈동자가 얼핏 흔들렸다.

울리고 싶고, 괴롭히고 싶고. 어쩐지 류주호가 저에게 밤마다 해 대는 짓거리를 그대로 요약해서 읊어 대는 것 같았다.

“흠, 흠흠. 형, 그러면 이런 거 어때요?”

“뭐?”

이윤규는 샘솟는 아이디어를 포기하지 않았다.

“잠깐 귀 좀.”

손으로 입을 가리는 이윤규를 향해 귀를 내밀자 귓가로 다가온 이윤규가 작게 속삭였다.

“그런 거 있잖아요. 섹스 판타지.”

뚜르르르―.

“으악!”

“헉.”

화들짝 놀란 두 사람의 몸이 펄쩍 튀었다. 속삭임을 두고 울린 전화벨 소리는 온기현의 것이었다. 둘 다 놀란 심장을 쓸어내렸다. 발신자를 확인했다. 류주호였다.

심장이 콩닥거렸다. 놀라서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주호야.”

―뒤돌아 봐.

“어?”

홱 고개를 돌렸다. 반가운 얼굴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동시에 마침 그에 관한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기에 속으로 뜨끔했다.

류주호가 손을 흔들며 미소 띤 채로 걸어왔다.

“어, 주호야. 여, 여기 어쩐 일이야? 오늘 너 교수님 만나 뵌다고 하지 않았어?”

“응. 얘기가 금방 끝났어. 이 카페 온다고 하길래 집에 같이 가려고 왔지.”

선선한 얼굴에서 울림 좋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온기현의 표정이 절로 풀어졌다. 히, 하고 입이 벌어지며 반가운 기색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걸 쳐다보는 류주호의 눈빛에 훈기가 감돌았다.

“엇,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

어색하게 꾸벅 인사를 한 이윤규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류주호가 스터디에 몇 번 함께하는 동안에도 그와 사적인 대화를 한 적은 없지만, 류주호와 온기현이 절친하다는 것은 멤버들 모두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둘이 함께 살고 있다는 것까지 이윤규도 아는 사실이었다. 다만 이해하고 있는 결이 달랐을 뿐.

“둘이 무슨 얘기를 그렇게 비밀스럽게 하고 있었어?”

“엉? 아무 얘기도 안 했는데?”

온기현이 도리질을 쳤다. 버릇처럼 말이 다시 빨라졌다.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린 류주호가 입꼬리를 올렸다.

“왜? 내가 들으면 안 될 얘기라도 돼?”

“아니, 그게 아니라.”

“선배님. 선배님도 알고 계셨죠?”

의자를 끌어당겨 앉는 류주호를 향해 이윤규가 신나서 입을 열었다. 이윤규는 속을 모르고 끝까지 친해질 수가 없는 류주호를 대할 때 적당히 내외는 했지만, 또 활달한 성격 덕에 금방 이죽거리며 이것저것 주절거리기도 했다.

“뭘.”

“기현이 형, 여친 얘기요.”

“쿨럭.”

빨대로 쭉 들이켜던 커피가 기침과 함께 밖으로 튀었다. 다행히 재빨리 손으로 막았다. 천천히 마셔야지, 하고 류주호가 걱정스레 말했다.

“……여친?”

“네! 어, 어라. 설마 모르셨어요? 애인 있다고 그러던데…….”

“아.”

아하. 애인.

류주호가 나직이 혼잣말로 무언가를 납득한 듯 중얼거리더니 이내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었다.

“응. 있지.”

“와아, 선배님은 본 적 있으세요?”

“응.”

당연하다마다. 거울로 매일 보고 있다. 온기현의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진짜 궁금하다. 저한테는 사진도 없다고 그러던데. 근데 기현이 형, 진짜 주책인 거 아세요?”

“기현이가 왜?”

“아니, 글쎄, 막. 자기 애인 엄청 예쁘다고 자랑을, 자랑을…….”

당황한 온기현이 이윤규를 테이블 밑에서 발로 툭 찼다. 아얏. 제 다리를 내려다본 이윤규에게 무언의 사인을 보냈다.

윤규야. 닥쳐, 제발……. 그렇게 속으로 뇌까렸지만, 이윤규는 “왜 찼어요?” 하고 되묻기만 했다. 안타깝게도 이윤규는 활달하긴 하지만 눈치가 없었다.

류주호가 피식 웃었다. 한 번 피식했다가, 두 번 세 번 피식피식 웃는다. 마치 입술에 구멍이라도 난 사람처럼 실없이.

“그래? 예쁘대?”

“아, 네. 그렇대요.”

류주호가 참지 못하고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하, 씨. 미치겠네.’

토마토처럼 달아오른 얼굴에 꽂히는 류주호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렇구나. 둘이 계속 그런 얘기 한 거야?”

“네. 아, 그리고 기현이 형이 사실 그 애인한테요.”

“주호야. 가자.”

온기현이 벌떡 일어나며 이윤규의 말을 끊었다. 둘의 시선이 온기현에게 와서 박혔다.

“윤규야, 미안. 다음에 보자. 우리 갈게.”

“어? 네?”

“주호야. 가자.”

온기현의 채근에 류주호가 가만히 이윤규에게 흘긋 시선을 던지고는 순순히 일어섰다.

어벙한 표정으로 인사하는 이윤규를 뒤에 두고 온기현이 후다닥 자리를 피하듯이 카페를 빠져나왔다. 삐걱거리며 걷는 온기현을 보며 류주호가 몸을 옆으로 붙여 왔다. 그리고 정말 궁금하다는 듯 기현을 향해 고개를 숙여 물었다.

“방금 무슨 얘기였어?”

“어?”

“아까. 사실은 그 애인한테요, 에 이어지는 말.”

“아. 그,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딱히 중요한 얘기는 아니었어. 집에 얼른 가자. 집 앞에서 치킨 사갈 까? 거기 전기 구이 통닭 맛있던데.”

화제에서 벗어나려 시답지 않은 말을 빠르게 주절거리는 온기현을 지그시 쳐다보던 류주호가 가만히 시선을 내리깔더니 이내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도 고민은 계속됐다. 이윤규가 여러 가지 의견을 주긴 했지만, 류주호와 저 사이에 해당하는 것은 없었다. 단순히 선물만 건네기에는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기념 이벤트.

좋은 아이디어긴 했지만, 꽤 조심스러웠다. 세간의 시선도 그렇고, 주변에 떠벌릴 만한 사항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 둘만 알고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껴 준다는 것.

아마 부모님한테도 평생 말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류주호는 간혹 불시에 저를 당황케 했다. 자꾸만 드러내려고 안달하는 사람 같기도 했다.

아직 고향 친구인 연채우에게도 자세한 사정은 털어놓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동거하기 직전, 과에서 만난 사람과 사귀게 됐고 같이 살게 됐다는 정도만 털어놓았을 뿐이다. 연채우는 혹시 네가 예전부터 좋아하던 사람이 맞냐며 한마디 물었을 뿐이다. 아마 기회가 되면, 좀 더 시간이 지나고 자신이 안정된 직장을 갖게 된 후에, 류주호도 저도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사회 속의 객체로서 독립하게 되면 그때는. 아마도 담담하게 소개할 수 있을지도. 아마 그 시기가 머지않았을 것으로 생각하며, 어렴풋이 속에 담아 두기만 한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조언을 구할 데가 이제 연채우밖에 없었다. 동성끼리 사귀는 온기현을 이해해 줄 사람이었기에.

이를 어쩐다.

책상 위에 엎드려 가만히 고민하다가 한 줄기의 희망을 기대하며 전화를 걸었다.

―생일 선물? 애인한테?

연채우의 되물음에 온기현이 어, 하고 대답했다.

―뭐 별거 있냐? 니 애인 원하는 플레이 같은 거 없대? 아, 맞다. 내가 얼마 전에 후석이랑 했던 플이 있는데 말야.

“끊는다.”

―어? 야!

저를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고 전화를 뚝 끊었다. 귀를 씻어 내듯이 손바닥으로 마구 비볐다.

이윤규나 연채우나. 왜 다들 같은 곳으로 귀결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머릿속에 다들 그런 생각뿐인가. 그렇다고 아예 솔깃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고개를 털고 일어나 노트북을 켰다.

‘애인이랑 맞이하는 첫 기념일’, ‘남자 친구 생일에 뭐 할까요?’, ‘남자 친구 감동시키는 법’, ‘싸가지없는 애인이 좋아할 이벤트’…….

등등을 포털 검색창에 입력했지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딱히 없었다. 스크롤을 드르륵 내리다가 한 단어에 눈이 멎었다.

[커플템]

‘커플템?’

커플 아이템이면, 커플 티셔츠나 커플 액세서리 같은 걸 똑같이 맞추는 건가? 기현이 눈을 반짝였다. 그래. 이거라면 나름 이벤트적인 의미도 있고, 또…….

“기현아. 거기 있어?”

“으악!”

노크와 함께 들린 목소리에 온기현이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노트북을 휙 닫았다. 방문을 열어젖히며 안으로 걸음을 내디딘 류주호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놀라?”

“나 안 놀랐어.”

“방금 엄청 놀라서 엉덩이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펄쩍 뛰었잖아.”

“아니거든?”

온기현이 정색하여 의자에서 일어났다. 류주호가 어깨 뒤로 노트북을 흘긋 쳐다봤다.

“기현아.”

“응?”

“……혹시.”

“왜?”

온기현이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런 건 보안이 생명이다. 디데이까지 절대적으로 숨길 자신이 있었다. 절대로 들키지 말아야지. 깜짝 놀라게 해 줘야지. 아무도 모르게 다짐하고 또 결심하며 의욕을 불태웠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류주호는 그렇게 말하며 온기현을 꽉 끌어안았다.

[한강 핸드폰 GRAND OPEN]

굵직한 글씨가 박힌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였다. EDM 음악이 신나게 울려 퍼졌다. 바람이 가득 담긴 비닐 인형이 공중으로 현란하게 팔을 휘두르며 춤을 췄다.

그 옆에서 곰 한 마리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손에 들린 전단지를 한 장씩 나눠 줄 때마다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는 게 어쩐지 어설퍼 보여, 행인을 향해 내민 뭉툭한 손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덥다…….’

곰 인형 탈 안에서 온기현이 땀을 뻘뻘 흘리며 헥헥거렸다. 오픈 행사에 맞춘 단기 아르바이트라서 다행인 일이었다. 놀이공원에서 이런 인형 탈을 쓰고 내내 춤추고 손을 흔들어야 하는 아르바이트생들의 노고를 절절하게 느끼고 있었다.

일단 뭐라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했다. 수중에 있는 돈으로는 조금 빠듯하다고 생각했기에 온기현은 결국 단기 아르바이트 할 곳을 찾게 되었다.

물론, 류주호와 함께 사용하는 공용 통장의 체크 카드와 류주호가 별도로 건네준 신용 카드도 가지고 있긴 했다. 하지만, 그의 생일에 그가 준 돈을 사용하는 건 좀 아니지 않은가. 그 카드는 가끔 같이 마트에 장을 보러 가거나, 아니면 편의점에서 생수나 껌 같은 걸 살 때 사용하는 거지, 이럴 때 쓰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단기 아르바이트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 비슷한 경험에서 지독하게 상처받았던 기억을 어쩌면 좋은 추억으로 바꾸어 상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어렴풋이 들었다.

‘아, 너무 힘들다.’

등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아직 5월 초입인데도 날씨가 이렇게까지 더웠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처음에는 그냥 전단지만 나눠 주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인형 탈을 입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퉁퉁한 갈색 곰 탈의 배 부분은 때가 타 누렇게 바랬고, 머리에 쓰는 얼굴 탈은 새까만 눈으로 우스꽝스럽게 웃고 있었다.

걷기도 힘들어서 잰걸음으로 쫓아가며 전단지를 내밀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전에 쓰던 사람이 제대로 세탁해 놨는지 땀 냄새는 거의 안 난다는 점이었다.

“수고했어요.”

“네. 감사합니다.”

간신히 시간을 채우고 인형 탈을 벗어 던진 온기현의 온몸이 땀에 푹 절여져 있었다. 총 3일 동안 해야 하다니. 앞이 깜깜했다. 어쩐지 보수가 높더라.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꾸벅 인사를 하고 나왔다. 몸에 척척하게 달라붙는 티셔츠 때문에 상당히 찝찝했다. 속옷까지 죄 젖었다.

‘집에 어떻게 가지.’

이대로 집에 가면 절대로 수상하게 볼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가는 길에 있는 공중목욕탕에 들렀다. 매끈한 아래 때문에 어렸을 적 이후로는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곳이었다. 다행히 시간이 시간인지라 작은 목욕탕은 손님이 저밖에 없었다. 옷은 목욕탕에 놓인 건조기에 돌리고 얼른 씻고 나왔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내일도 여기 와서 씻어야겠다.’

거울을 보니 외출할 때와 변함없는 보송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미 바닥난 체력 때문에 집에 도착했을 때는 녹초가 되어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 적막한 냉기가 온기현을 맞았다. 주호가 집에 있는 줄 알았는데. 외출한다는 말을 못 들었다.

신발을 벗고 캄캄한 집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침실 문이 달칵 열리는 소리가 났다.

“왔어?”

“아, 응. 자고 있었어?”

고개를 끄덕인 류주호는 잠자고 있었다기에는 조금 어울리지 않게 면바지에 맨투맨 티를 걸치고 있었다.

“스터디는. 잘하고 왔어?”

“응.”

묻는 말에 단답식으로 대답했다. 눈이 마주치면 제풀에 찔려서 괜히 다른 말이 튀어나올까 봐 방지하고자 함이었다.

“그렇구나. 오늘 스터디 되게 힘들었나 보네.”

“어?”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류주호가 손을 뻗었다. 눈가를 지분거렸다.

“피곤해 보여.”

“그, 그래? 오늘 조금 말을 많이 하긴 했어. 내가 말했지? 애들이 사흘 동안 각 잡고 스터디 빡세게 하자고 해서. 와. 오늘은 첫날인데도 다들 기운이 넘치더라.”

말하던 도중 커다란 손이 뺨을 감쌌다. 그리고 엄지로 온기현의 눈가를 연신 쓰다듬었다. 눈을 깜빡이던 새 어느덧 손이 귓바퀴 뒤로 넘어갔다. 멍하니 류주호를 올려다봤다. 귀 뒷부분의 민감한 부근에 닿은 손길이 순간 딱 멈췄다.

온기현이 의아한 기색을 띠었다.

“……?”

“……너.”

지잉―.

그때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문자가 온 듯했다.

“아, 잠깐만.”

핸드폰을 꺼내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아.’

오늘 아르바이트 업체에서 보낸 문자였다. 내일 10분만 더 일찍 와 줄 수 있겠냐는 문자였다. 수고비는 일부 더 챙겨 주겠다는 말이 덧붙었다.

스리슬쩍 류주호로부터 몸을 떼어 냈다. 그리고 그한테 보이지 않도록 재빠르게 알겠다고 써서 전송 버튼을 눌렀다.

“아. 미안. 현석이한테서 연락이 와서…….”

어.

고개를 든 온기현이 순간 움찔, 했다. 류주호는 삐딱하게 서서는 서늘함을 두른 채 무표정한 얼굴로 온기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리깐 눈이 온기현의 전신을 고루 응시했다. 순간 섬찟한 느낌이 들어 핸드폰을 든 채로 동작을 멈췄다.

그런 온기현의 반응을 알아챈 류주호가 금세 웃음을 얼굴에 덧씌웠다.

“기현아.”

“응?”

“우리 약속한 거 안 잊었지?”

느닷없는 물음에 온기현이 입을 벙긋거렸다.

“어떤, 약속?”

류주호의 입매에 짙은 웃음이 그려졌다. 깊은 이목구비가 한층 더 풍부한 분위기를 입었다.

“우리가 했던 약속. 거짓말하지 않기. 하고 싶은 거는 다 털어놓기.”

“아, 응…….”

쿵쿵. 심장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거짓말. 물론 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런 이벤트는 솔직하게 말하는 게 오히려 마이너스 아닐까. 이건 서프라이즈니까, 해당 안 되는 거 아닐까. 나쁜 짓을 한 건 절대로 없었다.

“당연히 안 잊었지.”

부러 태연한 척을 했다. 그러자 류주호가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하고 싶은 거 말해도 돼?”

“물론이지. 응응.”

고개를 잘게 끄덕였다.

“나 오늘 너 말도 안 되게 울리고 싶은데. 그래도 돼?”

아.

그 말의 의미를 단번에 이해했다. 순간 온몸의 혈액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기분 좋은 긴장감에 몸이 쭈뼛거렸다. 동시에 새삼스럽기도 했다. 언제는 안 그랬나, 싶고.

평소 같았으면 이런 말을 입 밖에 내뱉으며 툴툴거렸을 터다. 하지만 오늘은. 어쩐지 찔리는 구석도 있고 해서, 류주호가 하는 말은 다 들어줄 작정이었다.

“으, 응. 그래도 되지…….”

“……그렇구나.”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온기현을 향해 류주호가 설핏 미소를 머금었다.

“미리 미안해.”

“어?”

귓가에 입술을 붙인 류주호가 말을 이었다.

“우리 기현이. 오늘 큰일 났다, 싶어서.”

‘으아.’

몸이 무거웠다. 전단지를 내미는 팔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비록 인형은 활짝 웃고 있었지만 정작 그 안에 갇혀 있는 온기현은 거의 녹초가 다 되어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전부, 류주호에게 있었다.

허리의 둔통이 상당했다. 밤새 시달리고 나서 뻑뻑한 눈을 비비며 나가려는 온기현을 붙잡고는 오늘 스터디는 쉬는 게 낫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건 아르바이트였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이었기에 당일 펑크를 낼 수 없었다. 붙잡는 손을 뿌리치고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후다닥 나오느라 뒤에 남겨진 류주호의 표정은 잘 보지 못했다.

‘얼른 끝내고 싶다.’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다. 이렇게 고단할 줄이야. 눈앞이 흐리멍덩했다. 어차피 작게 뚫린 구멍으로 시야가 전부 확보되지는 않았지만.

행인을 쫓는 걸음도 후들거리는 다리 때문에 느려 터져서 전단지를 전달해 줄 수도 없었다. 이러다가 아르바이트 잘리는 거 아닌가 하고 걱정이 들 때였다.

툭툭 치는 손길에 뒤돌자, 핸드폰 가게 사장이 보였다. 정확히는 그렇게 보이는 듯한 인영이었다.

“좀 쉬었다 와요.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저기, 가게 뒤편에 가서 물이라도 좀 먹고요.”

“아……. 네. 그럴게요.”

겉으로도 힘든 게 티가 났는지, 먼저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마웠다. 으레 하는 말이겠거니, 하며 괜찮다고 사양할 만도 하건만, 너무 힘들어서 냉큼 그 말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축 처진 고개로 끄덕이자 곰 인형 탈이 헐렁하게 까딱였다.

“푸하―!”

사장이 일러 준 대로 가게 뒤편에는 앉을 수 있는 의자도 있었다. 머리 탈만 벗어 던졌다. 시원한 외기가 미친 듯이 반가웠다. 젖은 얼굴에 바람이 와 닿으며 더욱 시원하게 땀을 식혀 주었다.

빠득, 하고 생수를 따서 벌컥벌컥 마셨다. 인형 옷이 두껍고 불편해서 두 손으로 생수를 맞잡은 채로 고개를 젖혀 물줄기를 입으로 쏟아 내듯 떨어트렸다.

“와, 살 것 같다.”

콘크리트 벽에 뒤통수 툭 댔다. 앞으로 한 시간만 더 버티면 되었다. 시원한 물을 마시며 앉아서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니, ‘까짓거, 하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당이 꽤 짭짤했다. 마지막 날인 내일 들어오는 사흘 치 일당으로 어떤 생일 선물을 준비할지 고민하는 일만 남았다. 계획으로는, 커플 아이템 한 세트와 고급스러운 넥타이를 선물할 생각이었다.

예전과 많이 바뀐 패션 취향 탓에 류주호의 옷장에는 캐주얼하고 편한 옷만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 간혹 정장을 갖춰 입고 나갈 때도 있었는데, 평상시와의 간극 때문인지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잘나 보였다. 좀 과장을 담아 TV프로에 나오는 젊은 사업가 같았다. 앞으로도 정장을 입을 일이 많아질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배움이 본분이었던 학생이라는 틀을 벗어나서 사회로 나아갈 거니까. 당장 정장을 맞춰 주지는 못하더라도, 넥타이 정도면 자신도 선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차였다.

순식간에 행복한 상상으로 머리가 가득 찼다. 커플 아이템은 뭐가 좋을까. 우리끼리만 알아볼 수 있는 상징이 담긴 거라면 좋을 텐데. 겉으로 티가 나면 안 되니까, 우리만 알 수 있는 그런 거.

곰곰이 생각하던 온기현이 헉, 하고 놀라 냉큼 몸을 일으켰다. 지금 몇 시지? 핸드폰을 가방 안에 두고 왔으니 시간을 알 턱이 없었다. 너무 늘어졌나 봐. 서둘러서 의자에 내려놓았던 곰 머리 탈을 들었다. 그리고 막 그 탈을 머리 위로 뒤집어쓰려던 찰나.

“어……?”

눈이 크게 떠졌다. 반가운 웃음이 얼굴에 확 퍼지며 저도 모르게 이름을 부르려다가 헙, 하고 숨을 들이켰다.

온기현이 고개를 흔들었다.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끝에 달린 땀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후다닥 벽 쪽에 붙어서 고개만 살짝 내밀어 다시 커다란 인영을 확인했다.

‘주호가 왜 여기에.’

멀찍이서 보기에도 확연히 눈에 띄는 외양이었다. 하지만 순간 눈을 의심했던 것은, 그가 입에 담배를 물고 있기 때문이었다.

주호는 담배 끊었는데.

하지만 분명히 그가 맞았다. 흡연 구역에 서서 어딘가로 심상하고 서늘한 눈빛을 던진 채 입술로 담배를 물고 길고 굵은 손가락으로 그것을 잡더니 입으로 뿌연 연기를 내뱉는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그를 둘러싼 주변의 시선을 휘어잡는다. 지나가던 여자 둘이 그를 쳐다보다가 유난스럽게 쑥덕거렸다. 옆에서 담배를 태우던 다른 남성 또한 자꾸만 시선이 가는지, 연예인이라도 되는 게 아닌가 확인하는 것처럼 자꾸 흘끔거리며 류주호를 쳐다본다.

그런 일련의 상황들이 온기현의 시야에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당장 류주호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설마 자신을 따라왔다든지 하는 건 아닐 것이다. 혹시 현석이나 윤규한테 연락을 한 건가? 불안하게 심장이 콩콩 뛰었다. 설마,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오히려 자신에게 물어보거나, 여기까지 왔으면 자신을 찾았을 것이다.

단순히 우연인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핸드폰 가게에서 횡단보도를 건넌, 멀찍이 떨어진 거리였다. 그는 이쪽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이쪽에서는 그의 단단하고 섬세한 옆얼굴만 보였다.

절대로 비밀로 해야 하는데. 그리고 자신의 지금 모습을 절대로 보여 줄 수도 없다. 퉁퉁한 곰 인형 탈 안에서 땀범벅이 된 모습을. 온기현이 자신의 곰 발바닥에 걸쳐진 곰 머리 탈을 뒤집어쓰기 위해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 그때.

“……어? 저건…….”

그가 누군가를 발견한 듯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쓰레기통에 담배를 비벼 껐다. 화려한 차림의 누군가가 생머리를 휘날리며 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알은체를 하며 다가왔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무어라 얘기를 주고받고는 그대로 그 둘은 나란히 걸어갔다. 그 모든 것들이 마치 아름다운 무성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가에 어릿하게 맺혔다. 류주호와 나란히 선 이의 옆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도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양희인…….’

중얼거림과 동시에 손에 들려 있던 곰 머리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 * *

쏴아아아―.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를 흐린 눈으로 쳐다봤다. 아니, 수전만 올려 둔 채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이다. 공중목욕탕 내부에 물줄기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류주호는 왜 거기 있었던 거고, 양희인은 왜 만난 걸까. 원래부터 둘이 친구라고 알고는 있었다. 결혼이 깨졌다고는 해도 우정까지 간섭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저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부모님이 시켜서 어릴 때부터 이어 준 거나 다름없다고 했으니.

그런데도.

‘내가 너무 속이 좁은 건가.’

마음 같아서는 속 시원히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부터 설명해야 했다. 류주호에게는 절대로 비밀이었다. 제 꼴을 그대로 비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말로라도, 봤으면서도 아는 척하지 않은 이유는 뭐라고 해야 할까. 양희인이랑 같이 있어서 말을 걸 수가 없었다고? 아니, 사실 그것도 맞기는 하지만.

순식간에 침울해진 온기현이 눈을 감고는 습기를 머금은 얼굴을 문지르고 있을 때였다.

“괜찮아요?”

“헉. 네?”

느닷없이 들린 걸걸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손님은 나밖에 없었는데. 언제 들어온 건지, 목소리의 주인이 기현의 옆 칸에서 샤워기 수전을 올리고 있었다.

우락부락한 팔근육을 꿈틀대는 남자가 쏟아지는 물을 제 어깨 위로 촥 끼얹으며 기현을 내려다보고 미소 지었다. 저보다 머리 두어 개는 더 커 보이는 신장이었다. 얼핏 내린 시선 끝에 남자의 등짝에 새겨진 문신이 걸렸다.

“괜찮냐고요. 어디 안 좋아요? 계속 가만히 있길래.”

“네? 아, 아뇨. 괜찮아요.”

“흠. 그래요?”

온기현이 당황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잽싸게 물줄기 아래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 후끈한 수온이 금세 전신에 쏟아져 내렸다. 옆에서는 촤악촤악, 하고 요란스레 몸을 씻는 소리가 들렸다.

은근하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어쩐지 신경에 거슬렸다. 가뜩이나 유쾌하지 못한 기분에 당황스러움과 조급함까지 더해져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얼른 씻고 나가야지 생각했다.

하지만 어쩐지 자꾸만 시선이 닿아 오는 느낌이었다. 기분 탓은 아니었다. 온기현이 가슴팍과 팔을 마구 손으로 문지르다가 몸을 슬쩍 남자와 반대편으로 돌렸다. 제 민둥한 사타구니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괜히 침이 꿀꺽 목 뒤로 넘어갔다.

“와하. 나 처음 봐요.”

“네?”

어깨 뒤에서 들린 음성에 온기현이 고개만 뒤로 홱 돌렸다.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백자지.”

“……아…….”

역시나. 제 아래를 본 게 맞았다. 온기현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말없이 쭈뼛거리다가 그냥 시선으로만 까딱, 하고는 다시 고개를 바로 했다.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경을 갉작이는 소리였다. 몸에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왁싱이에요? 아니면. 천연?”

“…….”

“애인 취향인가?”

“…….”

“와아. 생긴 건 무슨 애같이 순진하게 생기셨는데. 거참. 하하.”

연속된 질문에 눈동자가 흔들렸다.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하긴. 요새 애들 어른 할 것 없이 남자도 거기 털 미는 게 유행이라데요?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죄다 털을 뽑아 젖히니까, 나도 좀 하고 싶더라고요? 내 밑에 새끼들도 몇 놈이 하겠다고 난리고.”

남자는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절거렸다. 보기에는 저보다 나이가 조금 많아 보였는데, 말하는 투는 너무 거친 연륜이 묻어났다.

“근데 실제로는 처음 보네. 좆나 신기하다.”

“…….”

나가야겠다.

불쾌한 소름이 등줄기를 싸르르 타고 올라왔다. 수전을 돌려 꾹 잠그려던 찰나.

“나 거기 한 번만 좀 봐도 돼요?”

“네? 뭘 봐요?”

느닷없는 말에 놀라서 반문했다.

“다 밀어 버리면 진짜 매끈한지, 아니면 면도처럼 푸르게 자국이 남는 거 아닌지 궁금해서.”

“아. ……죄송해요. 그럼 이만.”

시선을 회피하며 수건으로 명치부터 아래까지 성급하게 가렸다. 무어라 쏘아붙이고 싶은데 그럴 기운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를 지나쳐 나가려고 하자 그가 발을 뻗으며 길을 막았다.

“헉.”

“에헤이, 그러지 말고. 아. 나도 신기한 거 보여 줄까요? 나 자지에 찡 박았는데. 이런 거 본 적 있나?”

경악에 찬 온기현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휘둥그레 뜨자 남자는 뭐가 그리 재밌고 유쾌한지 “아. 씨이발.” 하며 큭큭 웃었다. 동시에 남자가 자신의 덜렁이는 성기의 뿌리를 쥐고는 온기현을 향해 내밀었다.

“봐, 보라고.”

앞선 웃음과 대조적인 명령조였다. 헉하고 숨을 들이켠 온기현은 차마 시선을 내릴 수가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 하, 하지 마시라고요!”

온기현이 그렇게 버럭 소리치고는 후다닥 욕탕 문을 향해 달려갔다. 혹시라도 쫓아올까 봐 겁이 났지만 제 뒤에서는 신나게 웃어 젖히는 소리만 들렸다.

머리도 채 말리지 못한 채 다급하게 옷을 껴입었다. 도망치듯 공중목욕탕을 빠져나왔다.

헉, 헉.

밭은 숨을 들이쉬며 온기현이 젖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털었다. 계속해서 뒤를 흘끔거리며 잰걸음으로 큰 도로를 향해 내달렸다.

철컥.

현관문을 열고 힘없는 걸음으로 집 안으로 들어왔다. 당장이라도 기절하듯 잠들고 싶었다. 도대체 오늘 하루가 어떻게 굴러갔는지 머리가 따라 주지 않았다.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붉은빛으로 물든 하늘이 베란다를 통해 비뚤어진 사각 형태를 만들었다. 불이 켜진 곳이 없어서인지 집 내부는 컴컴하기만 했다.

주호는 아직 안 들어온 건가.

순식간에 가슴속이 싸하게 식어 갔다. 입매가 절로 처졌다. 어쩐지 아무도 없는 집 안에 냉기가 돌았다. 꼭 남의 집에 들어온 것 같은 이질감이 선연했다.

주먹을 꽉 쥔 온기현이 실내화로 갈아 신고 터벅터벅 거실을 향해 들어왔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어?”

제 눈을 의심했다.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던 거실 소파에, 커다란 인영이 그림자를 드리우며 앉아 있었다.

놀라서 굳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뭐야. 불도 안 켜 놓고. 컴컴한 데서…….”

“……어디 갔었어?”

여상하게 돌아오는 물음에 온기현이 고개를 모로 돌렸다. 지극히 평상시와 같은 어투인데도 그 속에 담긴 날카로움을 기민하게 알아챘다. 왜 저렇게 저한테 따지듯이 묻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가뜩이나 지쳐 온갖 피로로 갈린 신경이 예민하게 솟았다.

“어디긴? 스터디라고 했잖아.”

“그래? 아아, 스터디.”

“……그러는 넌. 어디 갔었는데?”

문득 앉아 있던 이가 스윽 일어나는 기척이 느껴졌다. 어둡고 그림자가 져서 그런지 오늘따라 더욱 위압적으로 보이는 커다란 체구가 부담스러워 시선을 피했다.

“내가 먼저 물었잖아.”

“하. 방금 대답했는데 뭘 또 물어. 지금 너, 내 질문 피하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기현아.”

“…….”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너야말로 양희인 왜 만난 건데? 대체 밖에서 뭐 한 건데? 어디 갔던 건데? 묻고 싶은 말은 많았다.

하지만 그걸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조차 미칠 듯이 피곤하고 짜증스러웠다.

주먹을 바르르 쥐고 있던 사이에 류주호가 바로 한 발자국 떨어진 거리까지 다가왔다.

“……기현아.”

“…….”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또다.

왜 나만 뭘 잘못한 것처럼 구는데. 어이없는 실소가 튀어나왔다. 온갖 비루하고 비열한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글쎄?”

이도 저도 아닌 대답을 비죽거리며 아무렇게나 던졌다.

“……온기현.”

“윽…….”

성큼 다가온 손이 팔뚝을 휘어잡았다. 근육통에 시달리던 몸이 고통을 호소했다. 작게 앓는 소리를 내자 류주호의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때. 훅, 담배 냄새가 끼쳤다. 코 속으로 들이닥친 매캐한 내음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신경을 펑 터트렸다.

“이거 놔! 나 피곤해.”

버럭 소리치며 손을 확 뿌리쳤다. 서재 방으로 씩씩거리며 걸어 들어가 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닫았다. 집 안이 흔들릴 정도로 너무 거세게 닫힌 소리에 지레 깜짝 놀라서,

“……바람 때문에 세게 닫힌 거야.”

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두꺼운 문 너머까지 소리가 들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머리가 띵하고 어지러웠다. 뻐근한 몸 사이사이로 불쾌한 기억들이 자잘하게 스미는 느낌이다. 온기현이 문에 등을 대고 이마를 짚었다.

“기현아. 문 열어 줘. 응?”

그때 문을 똑똑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낮게 울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기현아. 문 안 열 거야? 나와서 얘기해.”

“할 얘기 없어. 나 쉬고 싶어.”

“…….”

까칠하게 받아 치는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더 이상 무어라 말할 힘조차 없었다. 바닥을 드러낸 체력이 기어코 전부 휘발된 느낌이었다.

문을 억지로 여는 기척은 없었다. 이전처럼 제 뜻대로 무자비하게 침범하는 류주호가 아니었다. 저도 알고 있었다. 류주호가 변했다는 걸.

그럼에도 괜히 예민해져서 그가 혹여 문을 따더라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제 등으로 문을 더욱 세게 짓눌렀다. 고개를 푹 숙였다.

아마 물어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일 것이다. 류주호가 저를 사랑하는 마음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이건 질투였다. 류주호와 어떤 법적인 효력을 가질 수 있을 만한 그 누군가를 향한 맹렬한 시기였다.

온기현도 어쩔 수 없는 남자였다. 여느 사람과 똑같았다. 류주호가 욕심이 났다. 독차지하고 싶었다.

오랫동안 좋아해 왔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겨우 이루어졌지만, 티도 낼 수 없다. 류주호가 괜찮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인 체면을 완전히 벗어던져, 키워 준 부모에 대한 은혜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가 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리고 죄책감이기도 했다. 류주호는 아직도 자신의 집안에 관한 일이라고 하면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했다. 본가에는 이사한 다음 날 한번 다녀온 뒤로, 두어 번 정도 집안에서 주최하는 큰 행사가 있는 날만 얼굴을 비치러 다녀왔을 뿐이다. 평소와 다르게 멀끔하게 차려입은 류주호는 막상 가기 싫어하는 눈치였지만, 온기현은 말쑥한 차림의 그를 보며 감탄하며 멋지다고 추켜세웠다. 같이 가자는 말은 극구 거절했다.

하지만 사실은. 류주호의 아버지한테서 인정받고 싶었다. 축복받는 사이가 되고 싶었다. 우리 둘만 좋으면 됐지, 싶다가도 불쑥불쑥 그런 생각이 고개를 내밀었다.

좀 더 당당해지고 싶었는데, 막상 그게 잘되지 않았다. 하다못해 생일 선물 하나 고르는 것도, 그를 위한 이벤트를 준비하는 것도 이렇게 조심스럽다.

“나 너무 찌질하다.”

저에게만 들리는 소리로 작게 자조했다. 그렇게 한참을 뒷머리를 감싼 채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 문 바깥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이없겠지.’

아무런 이유 없이 화를 내는 저를 보고서 류주호도 황당했을 터다. 극도로 피곤한 몸이 어느새 문에서 스르르 미끄러졌다. 껌뻑거리는 눈을 들어 올리려 애쓰다가 금세 정신이 바닥까지 잠겼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바닥을 손바닥으로 턱턱 짚었다.

사위가 밝았다. 살며시 눈을 뜨자 커다란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서재였다. 대자로 뻗은 채로 깜빡 잠들고 말았다.

지금 몇 시지? 노곤한 몸을 겨우 일으킨 온기현이 제 주머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오전 8시 35분.

헉. 이렇게 많이 잤단 말이야? 제가 본 시간이 맞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열두 시간도 넘게 자다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정말 깊게 잠들었다. 여전히 몸에 쌓인 피로는 풀리지 않아 눅눅하게 몸을 짓눌러, 제가 본 시간이 맞나 의심이 갈 정도였다.

허둥지둥하다 몸을 슬그머니 일으켰다. 문손잡이를 잡고 돌리자 경칩이 부드럽게 맞물리며 문이 한 뼘 정도 열렸다.

사람 하나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문을 연 온기현이 방 밖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서재 문 바로 옆 벽에 기댄 시꺼먼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비벼도 그 인영은 제자리에 있었다.

“……주호야.”

“…….”

고개가 돌려졌다. 경첩에서도 나지 않던 끼익, 하는 금속성 불협화음이 이제야 들리는 듯했다. 어두컴컴한 사위 속에서 그의 갈색 안광이 샛노랗게 빛났다.

“너……, 계속 여기 있었던 거야……?”

“……기현아.”

흠칫 몸이 떨렸다. 그의 목에서 나오는 소리가 사포처럼 거칠기 짝이 없었다. 문득 가슴이 저릿하게 아렸다. 마음 같아서는 그의 몸에 매달려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입술이 얼얼해질 정도로 키스를 나누고 싶었다.

류주호는 말없이 온기현을 응시했다. 바닥에서 잠들어 어디 배기는 곳은 없는지 구석구석 살피는 눈이다. 자고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는 여기저기 삐죽 솟아 있었다. 그는 시선만으로도 자신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핼쑥해진 볼을 만지고, 또 어깨를 주물렀다. 그 모든 행동을 담은 눈빛이 여실히 느껴졌다. 류주호가 온기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해 사랑을 표현하는지 전부 오롯이 느껴졌다.

온기현이 입을 벙긋거렸다. 입을 열면 제 비루한 생각들이 모조리 튀어나올 것 같았다. 찌질하고 속된 생각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질 것 같다.

온기현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대충 제 머리를 매만졌다.

“……나 스터디 가야 돼.”

“못 가.”

“뭐?”

“오늘 못 간다고, 너.”

단호한 말에 어금니를 아득 물었다. 오늘은 아르바이트 마지막 날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적인 일로 당일 잠수는 탈 수 없었다.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류주호의 눈썹이 까딱 위로 솟았다.

“기현아.”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고 온기현은 어제 외출했던 옷차림 그대로 집을 나섰다. 발목에 추가 달린 것처럼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빠르게 걸었다.

“와, 미친 새끼. 너 그거 뭐냐? 신상이냐?”

“아, 꺼져. 때 타.”

탁. 남자의 팔이 앞으로 내밀어진 곰 인형 발바닥에 부딪쳤다.

“아, 죄송합니다.”

꾸벅.

왁자하게 떠들며 핸드폰 가게 앞을 지나던 남성 무리 중 하나가 흘리듯 사과하자 곰 인형도 고개를 숙였다. 그 행동이 너무나 느려서 고개를 올린 사이에 무리는 다시금 떠들며 저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처럼 몸이 무지근했다. 머리도 안개가 낀 것처럼 멍하고, 팔이 납덩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거웠다.

시간에 맞춰 온 온기현을 보고서, 가게 사장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며 오늘은 한두 시간만 하고 들어가도 된다고 했다. 온기현이 돈을 떼먹을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는지, 인심이 원체 좋은 사람인지, 인형 탈을 쓰기 전에 사흘 치 일당은 현금으로 한꺼번에 건네주었다.

돈 봉투를 받으면 엄청 기쁠 것 같았는데. 마치 그게 행운의 편지라도 되는 것처럼 돈을 손에 쥔 기분은 떨떠름하기만 했다.

손 안에 두둑하게 들린 전단지 더미가 무거웠다.

그냥 얼른 오늘 하루가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서 아무 생각 안 하고 쉬고 싶었다. 멍하니 기계처럼 행인을 향해 전단지를 내밀며 날짜를 셈해 봤다. 5월 13일, 류주호의 생일까지 딱 일주일이 남았다. 이 돈으로 뭘 해야 할지, 뭘 하고 싶은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것마저도 서럽고 짜증이 일었다.

관자놀이에서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제 고작 십여 분 정도만 버티면 되었다. 핸드폰 가게 사장한테도 죄송한 마음이었다. 커다란 스피커에서 연신 울려 퍼지는 발랄한 유행곡은 기분을 부풀리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이게 뭐냐.’

하.

푹 퍼진 한숨 사이로 울먹임이 파고들었다. 머리 탈이 덜컥이며 흔들렸다. 활짝 웃고 있는 곰의 입 부근 구멍 사이로 흑, 하는 흐느낌이 새었다. 금세 꾹 입매를 억눌렀다. 앞도 제대로 보지 않고는 팔을 뻗어 행인을 향해 전단지를 내밀었다.

“…….”

전단지를 받아 드는 사람도, 무심하게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다. 송송 뚫린 구멍 사이로 남성용 구두 앞코가 흐릿하게 보였다.

행인은 정면을 향해 있었다.

팔 아픈데. 받으려면 빨리 받지.

‘……?’

뭐지. 행인은 자신을 향한 상태 그대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의아함에 시선을 들었다. 동시에 행인과 눈이 마주쳤다.

“!!!”

쿵. 심장이 아래로 떨어졌다.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자, 손목이, 아니 정확히는 곰 인형 옷의 손목 부근이 턱 잡혔다.

“놔, 놔!”

패닉에 빠진 온기현이 힘껏 버둥거렸다. 류주호였다. 행인은 다름 아닌 류주호였다. 손에 들렸던 전단 뭉텅이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손목을 빼내려고 팔을 털고 몸을 흔들었지만, 곰 인형이 우스꽝스러운 동작으로 춤추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주위에 웅성거림이 퍼졌다. 어떤 사람은 핸드폰을 들어 동영상을 찍고 있기도 했다.

“놓으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류주호는 곰 인형의 손목을 잡은 채로 망설임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온기현은 계속해서 놓으라고 버둥거렸지만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며 넓적하고 뭉툭한 발바닥 소리만 턱턱 울렸다.

한참을 이끌려 갔다. 뒤뚱뒤뚱하던 걸음이 멈췄다. 류주호가 잡았던 손목을 놓고는 돌아서서 휙, 곰 인형의 머리 탈을 벗겼다.

“흐윽.”

동시에 눈물이 터졌다. 제 꼴이 어떻게 보일지 묻지 않아도 뻔했다. 땀으로 엉망진창 흠뻑 젖어서는 때가 타고 뚱뚱한 곰 인형 옷을 입은 꼴사나운 모습.

“흐어엉. 흐엉.”

울음이 더욱 커졌다. 안에 쌓인 무언가가 폭발한 듯 목구멍에서 터지는 오열을 멈출 수가 없었다.

“너 진짜 짜증 나! 여기는 왜 온 건데, 왜!”

“뭐 하고 있었던 거야, 너.”

원망 섞인 울음에도 류주호가 평연한 투로 그렇게 물었다. 자신은 이렇게 화가 나고 서럽고 미칠 것 같은데, 류주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뭐 하긴! 너 보면 모르냐? 나 알바하잖아!”

“그러니까 네가 알바를 왜.”

“내가 너한테 뭐든 다 말해야 해? 어?”

류주호의 말을 끊고 진저리를 쳤다. 다그치는 말이 억울해 미칠 것 같았다. 왜 자신이 이런 식으로 몰아붙여져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에 그동안 내내 혼자 속으로 앓던 말이 앞뒤 없이 바로 튀어나왔다.

“너도 나한테 말 안 하는 거 있잖아!”

온기현이 버럭 내지른 말에 류주호가 언뜻 미간을 찡그리며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기현아. 내가 그런 게 어딨어. 이 땀 좀 봐. 속상하게. 이거 얼른 벗어.”

부드럽게 어르며 다가오는 손을 곰 발바닥으로 탁 하고 쳐 냈다.

“거짓말하지 마. 너 나 몰래 누구 만나고 그런 거 진짜 없어?”

하아, 하아. 온기현이 뾰족하게 뜬 눈으로 류주호를 노려봤다. 나보고는 헤프다 어떻다 하더니. 그러는 자기는 뭔데! 뇌리를 가득 채운 비이성적인 사고가 해묵은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진짜……, 진짜 걸레 같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줄도 몰랐다.

“짜증 나, 류주호.”

흐어어엉…….

“온기현, 기현아. 울지 마, 응?”

“내가, 흐엉. 끄흑. 안 울게, 허엉, 생겼냐?”

또다시 울음이 격하게 터졌다. 이번에는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흐끅……. 너, 너 생일이라서, 그래서 우리, 이벤트, 흑. 같은 거 하려고. 그래서, 돈 벌어서, 흑……. 생일 선물도 주고, 하려고 흐엉, 끅. 그랬는데, 너는……. 흑, 막, 어? 양희인 씨랑, 흑……. 막 길거리에서 만나고 막……. 흐윽.”

엉엉 울어 젖히다가 눈썹에 맺혔던 땀방울이 눈에 들어가 따가워서 눈을 질끈 감았다.

꾹꾹 눌러두던 서러움이 죄 터졌다. 구멍 뚫린 둑처럼 마구 쏟아져 나왔다. 피곤한 몸 상태로 인한 서러움, 공중목욕탕에서 희롱을 당했던 서러움, 그리고 류주호로 인한 서러움, 그 모든 게 엉망으로 뒤섞였다.

꺽꺽거리며 몸을 들썩거렸다. 인형 옷 두께 때문에 눈물을 닦을 수도 없었다. 그때 문득, 눈앞에 우뚝 서 있던 남자가 바싹 다가왔다. 마음 같아서는 물러서고 싶은데, 제 뒤를 가로막은 담벼락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생일 선물……?”

류주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 네 생일! 넌 네 생일도 몰라? 너 다음 주에 생일이잖아!”

“……아.”

류주호는 그제야 알아차린 듯 단발의 음성을 뱉었다. 눈가가 시렸다. 입매가 우글우글 구겨졌다.

“그거 때문에 그런 거야? 내 생일 선물 사려고, 그런 거라고?”

“어! 왜!”

“……하.”

“너야말, 흡!”

나직한 탄성을 어이없는 한숨이라고 생각한 온기현이 홱 고개를 들던 때, 불시에 입을 틀어막혔다. 뜨끈하고 물컹한 살이 입술에 짓눌리며 거칠게 비벼졌다.

흐읍, 끄흑, 흑, 으흑.

헐떡이는 숨이 벌어진 입술 사이 맴돌았다. 류주호는 거리낌 없이 온기현이 뱉는 서러움과 숨결을 전부 흡입하듯 빨아들였다.

“무, 흐윽, 하지, 으응……!”

항의의 몸짓도 소용없었다. 그럴수록 더욱 깊게 맞물렸다. 하지만 튀어나온 곰의 배 때문에, 입술이 깊게 맞물릴수록 류주호가 고개를 길게 빼내었다.

정신이 몽롱하게 풀렸다. 언제 화를 내고 난리를 쳤냐는 듯 온기현의 호흡은 점차 안정되어 갔다. 커다란 손이 젖은 뺨을 한가득 감싸 쥐었다. 축축하게 젖은 뒤통수로 돌아간 손이 작은 머리통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하아…….”

진득하게 겹쳐졌던 입술이 촉,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혼곤하게 풀린 눈동자가 눈앞의 남자를 직시했다. 류주호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진귀하고 소중한 것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아득한 눈빛.

“나를 봤어?”

“……?”

“어제 나를 봤어? 여기서.”

류주호의 말에 온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하느라고, 나한테 비밀로 하느라고 나 못 불렀던 거야?”

“어……. 그리고. 네가……. 담배 피우다가, 양희인 씨 만나서…….”

“속상했어? 내가, 걔 만나서.”

“……아무 사이 아닌 거 아는데. 그래도…….”

말로 하기도 껄끄러웠다. 제 졸렬한 속을 그대로 내비치기 싫어서 조금 우물거렸다. 류주호가 고개를 숙여 온기현의 뺨을 다시금 감쌌다.

“우연히 만난 거야. 내가 요새 옛날 지인이 하는 벤처 투자 심사를 도와주고 있거든. 사무실에 가려던 참이었어. 양……. 걔도 아는 사람이거든. 마침 그쪽으로 향하던 길이라 하더라고. 그래서.”

“됐어. 그런 말까지…… 안 해도 돼.”

이런 구구절절한 이유를 듣고자 물었던 게 아니다. 그냥 제가 못나서였다. 꼭 양희인이 아니고 다른 여자가 접근하는 걸 봤더라도 제 반응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류주호가 가만히 시선을 피하는 온기현의 얼굴을 살피더니,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 나야. 왜 전화했냐니. 이제 전화할 일 없고, 볼일 없을 것 같아서. 그거 말하려고 일부러 전화했냐고? 아니. 혹시라도 길가에서 나 마주치더라도 절대 아는 척하지도 말고 눈길도 주지 마. 이 말 하려고.”

온기현이 눈을 크게 떴다. 핸드폰 건너편에서 소리를 꽥 지르는 게 여기까지 들렸다. 웬 지랄병이 또 도졌냐고 난리를 치며 쌍욕을 해 댔다.

“그리고 너 차단할 거니까 혹시라도 연락할 일 있으면 비둘기라도 날리든가. 어차피 연락할 일 만들지도 않을 거지만.”

그리고 마지막으로 뭔가 저주의 말이 들려오던 중에 류주호가 통화를 종료했다.

“……헐. 너 뭐 하는 거야.”

“뭐긴. 너한테 계속해서 예쁨 받으려고 발버둥 치는 거지.”

“뭐어?”

입을 떡 벌리자 류주호가 짓궂게 씨익 웃었다.

“나 예쁘다며.”

“헐. 야, 그건.”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다. 이윤규한테 했던 말이다. 그걸 이렇게 속에 꼭꼭 담아 두고 있었을 줄이야. 온기현이 볼을 발갛게 붉혔다.

그에 짓궂게 빛나던 눈이 순식간에 새까만 욕망에 잠겼다. 다시금 뒤통수를 받쳐 오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털었다.

“싫어. 나, 나 땀 났…….”

“괜찮아.”

“안 괜찮아. 더럽잖아.”

“나는 네 몸에서 나오는 거면 다 먹을 수 있어. 봐서 알잖아.”

“…….”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눈치챘다. 얼굴이 터질 듯이 벌겋게 타올랐다. 류주호가 척척한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며 은근히 말했다.

“집에 가서 보여 줄게.”

열 오른 고개가 아주 미미하게 끄덕 움직였다. 그러다 아차, 하고 중얼거렸다.

“나 아직 알바 안 끝났는데. 이거 마저 하고 가야 돼.”

“……있어 봐.”

류주호는 온기현 대신 자리를 비워 죄송하다고 말하며 업체 사장에게 명함을 하나 내밀었다. 비즈니스용 핸드폰을 단체 구매하겠다는 말에 사장의 얼굴에는 싱글벙글 웃음꽃이 피었다.

그길로 집에 돌아와서는 함께 몸을 씻었다. 뜨거운 물을 욕조에 받아 겹쳐 앉은 온기현의 온몸이 노곤하게 풀어질 때까지 연신 주물러 댔다. 온기현은 류주호가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류주호를 꽉 끌어안고 고개를 어깨에 기댄 채 잠결에 맘껏 어리광을 부렸다. 갓 찐 떡처럼 말랑해지고 나서야 마사지가 끝났다.

부드러운 손길에 비해 딱딱하게 일어서서 제 존재를 주장하는 성기가 눈에 들어왔다. 류주호 자신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모른 척하고 있었기에 온기현도 그저 멍하니 보기만 했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려 주고 류주호와 딱 달라붙은 채로 허벅지 위에 앉았다.

깜짝 선물을 하려고 했던 거야?

응. 놀라게 해 주고 싶었어.

뭐 하고 싶었는지 물어봐도 돼?

너 줄 넥타이랑 우리 커플 아이템.

커플 아이템?

응. 겉으로 티 안 나는 거. 우리만 아는 특별한 걸로.

그랬구나.

근데 망했어.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

왜 또 울어. 네가 울면 가슴이 미어져. 내가 생각해 볼게. 응?

진짜?

응. 진짜.

알겠어.

너는 아무것도 고민하지 말고,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자장가처럼 속삭이듯 대화를 나누었다. 긴장이 한껏 풀어져, 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내보였다. 어린애처럼 건네 오는 팔에 제 무게를 마음껏 기댔다. 제정신이면 절대로 하지 않을 말들을 주절거렸다.

그런데 절대로,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돼.

왜?

왜냐면 우리 사이는 우리끼리만 아는 비밀이니까.

어째서?

그래야 안전하니까. 그래야 사랑할 수 있으니까. 계속. 계속.

웅얼거림이 점차 잦아졌다. 속눈썹이 무거웠다. 이제는 한계였다. 눈꺼풀이 완전히 감겼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단단한 어깨 위로 흩어졌다. 잘게 떨리는 눈두덩이 위에 잘 자, 하고 사분대는 목소리를 끝으로 의식이 끊겼다.

5월 13일.

결국 둘은 집에서 생일 축하 파티를 하기로 했다. 소소하게 집에서 보내자는 류주호의 요청이었다.

미리 사 둔 생크림케이크 위에 초를 꽂았다. 정직하게 나이대로 전부 초를 꽂으려고 하는 온기현을 보며 류주호가 입가를 가리고 웃음을 참았다. 귀여워서 참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소원을 빌라는 온기현의 요구에 류주호가 대뜸 훅, 하고 초를 불었다. 이미 제가 바라는 것은 이루어졌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은 소원이 아니라 응당 찾아올 자신들의 미래라는 이유였다.

“너는 산타클로스도 안 믿었을 것 같아.”라는 불퉁한 온기현의 말에, “이런. 그걸 소원으로 빌 걸 그랬어. 내년 생일에는 온기현이 루돌프 분장한 거 보게 해 주세요, 라고.” 하며 진지하게 안타까워했다. 어이가 없어 어깨를 퍽, 때리자 자신은 산타클로스로 분장할 테니 공평하다고 했다. 어딘가 이상한 논리였지만 오늘은 좋은 날이기에 그냥 넘어가 줬다.

일부러 소리 내어 짝짝 손뼉을 쳤다. 하얀 이가 보일 정도로 환하게 웃자 류주호의 눈빛이 빛난다.

결국 이벤트는 준비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히려 돈에 여유가 생겨, 류주호가 평소에 즐겨 쓰던 향수까지 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류주호도 환하게 웃었다. 이처럼 기쁜 일이 없을 거라는 듯, 입꼬리를 올리고는 마치 애처럼 좋아했다.

사실은 어릴 적에 산타클로스를 믿지 않은 게 아니라 아예 존재 자체를 몰랐던 거 아닐까. 선물 하나에 저렇게 좋아하는데.

그러다가 한 번 본 적 있던 류주호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무엇이든 칼같이 잘라 내 버릴 것만 같이 냉기가 감도는 싸늘한 표정.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몸이 부르르 떨릴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류주호로부터 그의 어머니 얘기는 자세히 들은 적이 없었지만, 어머니가 집에 없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거기다 그런 차가운 아버지 아래에서 홀로 자랐다면……. 자신만의 섣부른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류주호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든지, 그런 꿈과 희망이 넘치는 날을 맞이한 적이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만약 산타클로스가 실재한다면, 선물을 받고 저렇게 좋아하는 어릴 적의 류주호를 봤더라면, 머리라도 한차례 쓰다듬어 주고 싶어 했을 것이다. 매년 어여쁜 아이를 보기 위해 찾아왔을 것이다. 오늘만큼은 자신이 그의 산타클로스가 되고 싶었다.

류주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류주호가 의아하게 시선을 던지더니 이내 웃으며 머리를 더 들이밀어 왔다. 킥킥거리며 마음껏 쓰다듬어 줬다.

“음…….”

웃음과 신음이 뒤섞인 채로 둘의 몸이 한데로 엉켰다.

침실로 들어온 둘은 꽉 끌어안은 채 입술을 깊게 맞물었다. 생크림이 얼굴에 덕지덕지 묻은 채였다. 턱에 묻은 생크림을 혀로 할짝거리다가 말캉한 아랫입술을 살살 빨아 주자 류주호가 씨근덕거리며 숨을 들이켜더니 강하게 제 입술을 짓눌렀다.

마찬가지로 온기현의 뺨에 묻은 생크림을 볼살과 함께 쭉 빨아 댔다. 앞니로 장난스레 간질이는 바람에 파하, 웃음이 터졌다. 그러다가 또다시 정염이 넘치는 키스를 반복했다.

정수리까지 흥분이 차올랐다. 류주호도 그걸 숨길 생각이 없는지 눈빛에 음험함이 감돌았다. 온기현의 등이 침구에 닿기도 전에 알몸이 됐다. 순식간에 옷을 벗기고 제 상의까지 훌러덩 위로 벗어 던졌다.

군더더기 없는 몸이었다. 같은 성별인데도 제 몸과는 확연히 달랐다. 볼수록 신기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제는 꿈틀대는 그의 어깨와 가슴팍만 봐도 군침이 돌았다.

기대와 흥분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걸 알아챈 류주호가 문득 입꼬리를 올렸다. 그것조차 너무 야해서 볼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그가 온기현의 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뜯어봤다. 시선이 집요했지만 숨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자꾸 힘을 받아 일어서려는 아래는 조금 창피해서 슬쩍 무릎을 굽혀 시야로부터 차단했다.

“그만 좀 봐.”

류주호는 대답이 없었다. 문득 허리를 굽히더니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강박적으로 항상 제 목덜미에 얼굴을 묻어 살 내음을 확인하는 류주호의 몸짓은 약간 짐승 같았다.

그를 곰이라고 놀려 댔지만, 사실은 류주호랑 가장 어울리는 동물은 재규어가 아닐까 생각했다. 느릿하고 우아하게 사냥감을 포착하여 한순간에 낚아채는 날렵하고 아름다운 동물.

괜히 그를 놀렸다가 제가 곰 인형 탈이나 쓰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목덜미에서 어깨를 배회하던 그의 얼굴이 좀 더 아래로 내려왔다. 유두가 뜨거운 입 안으로 삼켜졌다.

“흑……!”

울음 같은 소리가 목구멍에서 터졌다. 빨기 쉽도록 더 가슴을 내밀자 류주호가 그에 화답하듯 좀 더 거세게 흡입했다. 반대편은 류주호의 손에 의해 짓이겨진 상태였다. 자극이 너무 심해서 약간 버둥거리자 입술이 잠시 물러났다가, 새빨갛게 통통 부어오른 젖꼭지를 보고는 다시금 달려든다.

성기가 완전히 일어섰다. 강한 자극이 버거워 잔뜩 찌푸린 미간과는 다르게 마치 더 해 달라고 조르는 것처럼 말간 애액을 뚝뚝 흘려 댔다.

쪽, 쪽. 마른 뱃가죽과 아랫배에도 입술이 내려왔다.

“하아…….”

뜨거운 숨이 민감한 부위를 간질였다. 잠깐 움찔하자, 류주호가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스윽 핥았다.

진짜 재규어 같다……. 온기현이 울먹거리는 눈을 내리깔고 그를 응시하며 멍하니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틈도 없었다.

“아흑……! 아, 아!”

불시에 성기가 삼켜졌다. 걸리는 것 없이 매끈한 뿌리 부근까지 입 안에 한 번에 삼켜 버렸다. 성인 남성의 성기를 무리 없이 삼키는 게 신기했다. 예전에 그는 남자가 신음을 헐떡이는 것 자체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고 경멸 섞인 반응을 했었다.

체온이 후끈 달아올랐다. 발갛게 익은 귀두에 열기가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자, 잠깐만……! 아, 주호야……! 흣!”

머리칼을 붙들어 말려도 소용없었다. 낮게 목을 울린 류주호는 더욱 강하게 얼굴을 사타구니에 밀착시켰다. 목구멍이 성기를 꽉 조이는 순간, 온기현이 그의 목구멍 안에 파정했다.

부들부들 떨며 사정의 여운을 만끽하자 그가 혀를 내밀어 남은 정액까지 전부 삼켜 버렸다. 그러고는 매끈한 아래에 계속해서 입술을 눌러 댔다.

추웁, 하고 빠는 소리도 들렸다.

“그만 좀 해 봐……!”

“하아……. 여기 너무 부드러워. 놀라울 정도로…….”

“흐…….”

“……어떻게 여기까지 예쁘지. 예뻐서 돌아 버릴 것 같아. 하…….”

귀까지 새빨개진 온기현이 눈을 질끈 감고는 류주호의 머리칼을 잡아 뜯듯 당겼다. 류주호는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뜨거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이 부드러운 곳, 나만 본 거지, 나만……. 응? 기현아…….”

아.

온기현이 순간 멈칫했다. 그의 말에 공중목욕탕에서의 일이 퍼뜩 생각났다. 등에 문신을 한 남자에게 아래를 보인 것이 기억났다. 불과 며칠 전 일인에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는데, 류주호의 말에 갑자기 생각이 난 것이다.

“…….”

동시에 중얼거림도 멎었다. 아니, 정확히는 류주호의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호흡마저 멈춘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온기현의 속내를 파악하려는 듯 집요하게 시선을 마주쳤다.

“왜 그래?”

“어?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 그냥……, 창피해서.”

온기현이 도리질을 쳤다.

이 말은 거짓은 아니었다. 창피하니까 제발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어렴풋이 하고 있었기에. 하지만 이 상황에서 공중목욕탕에서 마주친 남자의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제 콤플렉스를 여실히 드러내기 싫었고, 당시 그놈의 비열한 머릿속까지 훤히 류주호가 알아챌 것 같았다.

류주호는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며 온기현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가늠하는 눈빛이다. 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말도 안 된다는 헛것이라고, 스스로 갈무리하려 애쓰듯 마치 주문처럼 온기현의 몸을 제 손으로 연신 쓸어 댔다. 그러다 문득 바람 빠진 헛웃음을 작게 낸다. 그래. 아니라고, 그럴 리 없다고 다시금 되뇌며.

눈에서 독기가 빠지며 다시금 온기가 돌았다. 싸늘해졌던 온도가 후끈 달아오른다.

류주호가 상체를 훅 일으켰다. 그러고는 제 바지춤으로 손을 가져가 버클을 풀고 지익 지퍼를 내렸다. 눈으로는 연신 온기현을 핥았다.

단순한 탈의 행위였지만 야릇하기 그지없었다. 그 모습을 눈에 담자 아랫배가 근질거리고 사타구니가 저릿했다. 하의를 완전히 벗어 던진 류주호가 세워진 무릎을 좌우로 느릿하게 벌렸다. 움찔하고 허리를 물리느라 침대 헤드에 맞닿은 고개가 들렸다.

아래를 내려다본 온기현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어? 너, 어?”

“왜 그렇게 놀라. 백자지 거울로 매일 보면서 새삼스럽게.”

류주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평연하게 지껄였다. 온기현이 아연함에 입을 벌렸다.

“뭐, 뭐야? 너…….”

말을 잇지 못하자 류주호가 싱긋 웃으며 무릎으로 섰다. 굵고 묵직한 살덩이가 핏줄이 흉흉하게 돋아 아랫배에 닿도록 올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거칠고 빼곡하던 음모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저와 같이, 아래가 매끈한 모양이었다.

“뭐기는.”

류주호가 온기현의 사타구니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우리 커플템이지.”

“미, 미쳤어?”

온기현이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니, 커플템이라니. 이런 건…….

“커플룩 맞추고 싶었다며. 이제 나도 너랑 같아. 한 쌍이네.”

“진짜 미쳤어? 왜 그 멀쩡한 걸…….”

나는 갖고 싶어도 못 갖는데. 그걸 왜.

어이가 없고 황당했다. 이런 커플 아이템이 세상에 어딨어. 황망함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싫어?”

류주호가 그렇게 물으며 제 좆을 잡고는 한차례 느리게 쓸었다. 굵은 성기가 그의 손안에서 점점 더 크기를 키워 갔다. 심지어는 선단에서 흐른 쿠퍼액이 툭, 툭 방울을 아랫배로 떨궜다. 그 아래로 흥분으로 단단해진 고환이 뿌리까지 바짝 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사타구니에서부터 위를 향해 이어지는 뱃가죽에 푸른 핏줄기가 잎맥처럼 뻗어서 불끈거렸다. 그 모든 것이 선연하게 드러났다.

말도 못 할 정도로 선정적이었다. 음모가 없어서 그런지 성기가 훨씬 더 길고 커다랗게 보였다. 굵은 뿌리부터 불퉁한 기둥을 지나 굴곡을 거쳐 아기 주먹 같은 귀두에 이르기까지. 무서울 정도로 야했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선정적이었다. 목까지 새빨개져서 눈을 반짝이는 이러한 반응을 류주호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좋아하는 거 같네. 다행이다. 내가 준비한 생일 이벤트인데, 마음에 들어 해서.”

눈매를 접으며 웃은 류주호는 상체를 숙여 온기현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더 자세히 볼래?”

황당함은 물러간 지 오래였다. 온기현이 자세히 봐야 알 정도로 살짝 고개를 주억거렸다.

류주호는 온기현의 겨드랑이를 잡고는 가볍게 끌어 올렸다. 순식간에 무릎으로 선 그의 가랑이 사이에 앉은 자세가 됐다. 가까이서 보니 후끈거리는 습기가 생생히 느껴졌다. 흥분의 증거가 눈앞에 오롯이 펼쳐졌다. 어쩐지 아래가 축축하게 젖는 느낌이 났다.

천천히 혀를 내밀어 기둥 부근을 살짝 핥았다. 류주호의 성기를 빤 적이 없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어쩐지, 조금 어색하고 생경해서 괜스레 긴장됐다. 할짝거리며 감질나게 기둥을 혀로 갉작이자, 정수리 위에서 목을 긁는 나직한 탄성이 들렸다.

이번에는 좀 더 아래로 입술을 내렸다. 뺨을 따갑게 찌르는 느낌이 없었다. 입술을 이용해 뿌리의 표피를 가볍게 우물거리자, 위에서 씨발. 하고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그 뒤는 완전히 무아지경이었다. 남성적인 냄새가 코 속 가득 채워졌다. 흉흉한 살덩이의 미끈한 부분을 크게 삼켰다. 겨우 중간까지 들어간 정도였지만, 온기현의 입은 한계까지 벌어졌다. 눈물이 찔끔 났다.

하아.

류주호의 허벅지가 돌처럼 딴딴해지는 게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입에 좆을 처박고 싶은 것을 한계까지 참고 있었다. 온기현은 좀 더 능숙하게 하고 싶어서 혀를 내밀며 동시에 입천장을 좆으로 문질렀다.

입 안이 데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너무 뜨거웠다. 침으로 온통 적셔진 음경과 입 안 점막이 마찰되어 쿨쩍쿨쩍 음란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흐읍…….”

류주호는 유독 펠라를 받을 때 말이 없어졌다. 평소 그가 성기를 박을 때는 온기현의 상태를 살피고 예쁘고 귀엽다고 연신 달콤한 말을 귓가에 쏟아 냈지만, 이때만은 말수가 적어졌다. 그게 마치 머리통을 붙잡고 제 욕심대로 하고 싶은 마음을 짓누르는 억제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냥 해도 되는데…….

몸속에서 불길이 일었다. 찌릿거리는 아랫배는 이제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웠다. 온기현도 욕심껏 움직였다. 턱이 얼얼했지만 한껏 성기를 머금고는 머리를 어설프게 앞뒤로 움직였다. 입 안이 시큼했다. 질척하고 끈적한 쿠퍼액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입 안이 온통 끈적거릴 정도였다.

“하읍, 으음……!”

“아, 기현아. 아, 씹……!”

류주호의 허리가 들썩거렸다. 어느 순간 성기가 크게 부풀었다. 앞니가 긁는 것도 막지 못할 정도였다. 그의 아랫배에 힘줄이 크게 불거졌다. 그리고 입 속 귀두가 훅 뜨겁게 달아오른 순간.

“헉……!”

류주호가 온기현의 얼굴을 떼어 냈다. 음액이 얼굴 위로 쏘아졌다.

허억, 허억…….

밭은 숨을 내쉬려 벌린 입에도 진한 정액이 후드득 쏟아졌다. 눈가까지 튄 정액 탓에 눈을 감은 채로 헐떡였다. 막 손등으로 체액을 닦으려 할 때였다. 류주호가 느닷없이 몸을 내려 입술을 덮어 왔다. 제 몸에서 나온 것인데도 전혀 개의치 않는 동작으로 온기현의 입술로 혀를 내밀어 게걸스럽게 탐했다.

“하, 하지 마……. 너 진짜……, 흐앗!”

묵직한 무게감이 온기현을 짓눌렀다. 어느새 급박하게 몸이 뒤엉켰다. 하윽. 온기현의 울먹임이 터졌다. 구멍으로 굵직한 손가락이 짓쳐들어왔다. 류주호는 능란하게 손가락 개수를 늘려 갔다. 간지러움을 해소해 주듯이 미친 듯이 안을 비벼 댔다. 온기현은 절박할 정도로 그의 몸에 딱 달라붙었다.

“아, 주호야……! 아!”

혀를 내밀자 그가 제 것을 얽어 왔다. 빈틈없이 꽉 껴안은 채다. 젖은 성기끼리 맞비벼졌다. 사이에 걸리는 것 하나 없이 맨살이 그대로 비벼지는 감각 탓에 엉덩이에 힘이 바짝 들어갈 정도로 몸이 달아올랐다.

“왜 이렇게 조여. 커플템 맞춰서 기분 좋아서?”

“무슨, 흐, 말도 안 되는 소리, 흐읏!”

찌걱찌걱, 쉴 틈 없이 안이 벌어졌다. 류주호는 온기현과 똑같이 매끈해진 아래가 마음에 드냐며 아래를 연신 비벼 댔다. 고개를 젖히고 얕게 헐떡이던 때 손가락이 쑥 빠졌다. 류주호가 두 손으로 허리를 잡아 왔다. 그러고는 단번에 제 성이 난 살덩이를 붙잡고, 잔뜩 풀어져 흐물거리는 구멍 안으로 쑤셔 넣었다.

“아아!”

“하.”

내벽 가득한 중량감이 기꺼운 듯 입이 벌어졌다. 훅, 하고 밭은 숨을 짧게 내쉰 류주호가 아까처럼 아래를 문지르자 귀두가 내벽을 꾹꾹 누르듯이 압박했다.

끝까지 몸을 채우며 들어오는 감각에 온기현이 잘게 진저리 친다. 그 미약한 행동에도 류주호는 쉬이 욕정했다. 온기현을 쳐다보는 눈에서 그게 오롯이 읽혔다. 그럴 때마다 온기현은 눈물이 핑 도는 느낌이었다.

평소보다 느리고 진득한 움직임이었다. 아래에 맨살이 드러나서 그런가. 찌릿, 아래가 저릿했다. 간질거리는 느낌이 컸다. 어깨를 바투 잡자 류주호가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퍽, 끝까지 좆을 넣었다.

헤벌리는 느낌에 가느다란 숨이 터지자 류주호가 허겁지겁 입을 맞췄다. 아래가 완전히 밀착했다. 접합부에 빈틈이 없을 정도로. 온기현이 어설프게 손으로 등을 더듬는 가벼운 접촉에도 류주호는 안에서 성기의 크기를 더욱 키워 갔다.

어떻게 이렇게 좋지. 왜 이렇게.

결합이 깊었다. 하지만 더, 더 깊게 닿고 싶었다. 류주호가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고는 허리의 힘만을 사용해 온기현이 원하는 안쪽까지 성기를 강하게 박았다.

“하윽……! 아, 흐아……!”

둥글게 휘젓고, 강하게 박았다가, 다시 잘게 율동하듯 안을 비비기도 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부가 질척하게 젖어 갔다. 세포 하나하나가 머리를 치켜든 듯 감각이 생생했다.

결국 온기현이 먼저 절정에 다다랐다. 뇌수가 녹을 듯한 달콤한 쾌감에 금세 함락당했다. 뒤를 이어, 바르르 경련하는 온기현의 몸 안에 진한 정액이 질펀하게 터졌다.

울컥, 울컥.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처럼, 깊숙이까지 욕심 사납게 퍼지는 뜨끈한 액체에 삼켜지는 느낌이었다.

류주호는 느릿하게 허리를 재차 흔들어, 남은 정액까지 전부 안으로 쏟아 냈다. 쥐어짜듯 엉겨 오는 터라 쉬이 쏟아 낼 수 있었다.

“하아…….”

류주호가 사나운 정복욕의 기갈을 겨우 일부 해소한 짐승처럼 만족스러운 탄성을 터트리며 결합한 채로 몸을 겹쳤다.

완전히 접붙은 상태로 한참을 죄 젖은 서로의 얼굴을 입술로 더듬었다. 몽롱한 눈으로 류주호의 짙은 음영이 진 얼굴을 응시했다.

하나가 된 것 같다.

문득 그렇게 생각했다. 커플템이라고 장난스레 얘기하던 류주호도, 온기현의 생각을 읽은 듯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마주했다.

그의 눈에도 충만한 행복이 가득했다.

온기현은 작게 입을 벌려 속삭였다.

“생일 축하해.”

흔해 빠진 축하의 말이었다. 하지만 류주호는 마치 생전 처음 귀에 담는 말이라는 듯 순간 멈칫, 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금세 사르르 웃었다.

“고마워.”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는 한숨처럼 속삭여 응답했다. 그리고 말을 잇는다.

“……다음 네 생일에는…….”

“응?”

혼잣말과 같은 낮은 음성에, 온기현이 어깨를 잡으며 되물었다. 류주호가 시선을 들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뭐야. 싱겁게.”

온기현이 앞니를 드러내며 피식 웃었다. 류주호는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가슴이 터질 듯 아파져 오는 것을 느꼈다.

생애 처음의, 가장 귀중하고 잊지 못할 생일이라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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