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트라우마 (18/20)

외전 1. 트라우마

“으앗.”

“어어, 그거 저희 주세요. 거기 내려놓으세요.”

“앗. 네, 네.”

온기현은 옷가지가 들어 있는 커다란 박스를 옮기려다 이삿짐 업체 직원의 만류에 무거운 것을 그 자리에 다시 내려놓았다.

너무 바쁘고 정신이 없어 보여서 도와주려 한다는 것이 되레 방해만 한 게 아닌가 싶었다. 생각보다 무게가 무거웠다. 괜히 머쓱하게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비비며 자리를 비켜섰다. 그러다 아차, 하고 이제야 생각난 듯 후다닥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오면서 편의점 봉지를 들고 왔다. 마침 이삿짐을 나르느라 엘리베이터를 잡아 놓았던 터라 금방 다녀올 수 있었다.

“힘드실 텐데 이거라도 드시면서 하세요.”

온기현이 봉지에서 여러 개의 커피와 생수를 꺼냈다.

“예―! 감사합니다―!”

저를 이삿짐센터 실장이라고 소개한, 작업용 조끼를 걸친 남자가 큰 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하지만 짐을 정리하느라 돌아보지는 않았다. 괜히 두리번거리며 뻘쭘하게 서 있었다. 그때.

“오. 티유피네요. 역시 커피는 티유피지.”

“아, 네네. 이거 드세요. 시원한 걸로 가져왔는데…….”

“감사합니다.”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뭉툭하고 커다란 손이 온기현의 손에 들려 있던 커피 병을 낚아채며 쾌활한 소리를 냈다. 온기현이 깜짝 놀라 돌아보며 대답했다. 감사 인사까지 큰 소리로 되돌려 주며 이가 보이게 웃는 남자는 머리에 반다나를 두르고 있는 제 또래의 남자였다. 땀을 비 오듯 쏟으면서도 힘든 기색 하나 없는 커다란 남자를 보며, ‘체력 대단하다…….’고 남몰래 감탄스럽게 생각했다.

“이거요. 물도 드세요. 힘드시죠.”

“근데 뭐, 짐이 옷이나 작은 가구밖에 없어서 다른 데보다 엄청나게 힘들지는 않네요.”

“아아, 네. 큰 가구랑 냉장고 같은 건 따로 배송이 올 거라서요.”

“오, 그러시구나. 원래 있던 가구들은 다 버려 달라고 하시던데. 새로 장만하셨나 보네요?”

어느 정도 이삿짐 정리가 끝나 가는 터라 남자도 조금 여유가 있는 듯했다.

“근데 아까 그분은 룸메?”

“아……. 네.”

남자가 던지는 심상한 질문에 잠시 말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둘의 관계를 무어라 칭해야 할지, 무어라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입술만 벙긋거리다가 조그맣게 대답하며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 근데 여기 두 분이서 살기에 너무 넓지 않나.”

“룸메 아닌데.”

남자가 목덜미의 땀을 훔치며 물을 벌컥 마시려던 때. 온기현의 뒤편에서 낮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온기현이 그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주호야! 왔어?”

“응. 미안, 늦었지.”

“아니.”

온기현이 배시시 웃으며 도리질을 쳤다. 류주호는 싱긋하고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온기현과 눈을 마주쳤다. 눈빛에 도는 훈기에 괜스레 파드득 볼이 달아올랐다. 여전히 스포티한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는 그는 요새 들어 완숙한 성년미가 더욱 도드라져, 이렇게 불쑥 눈에 담을 때면 다 큰 어른을 대하는 느낌에 괜히 어색하게 몸이 삐걱거렸다. 저도 다 큰 어른인데도 말이다.

“그런데.”

류주호가 온기현의 뒤에 붙으며 말을 이었다.

“일 다 끝나셨어요? 한가하게 잡담이나 나누고 있는 거 보니까 그러신 것 같네요.”

언뜻 웃음이 섞인 어투는 자세히 들으면 약간 메마르게 삐죽 솟은 경계의 날이 서 있었다. 아마 류주호를 곁에서 계속 지켜보고 겪어 온 사람은 알아챌 수 있을 정도의 미미한 차이였다. 온기현은 의아한 얼굴로 제 옆에 바짝 선 류주호를 쳐다봤다.

“아, 아아…… 아니, 이거 음료수를 주시길래.”

“그리고.”

“?”

“룸메 아니에요. 동거인이죠.”

“네?”

“동거인이라고요.”

“아…… 네에…….

남자가 당황한 빛으로 말끝을 흐리며 물병을 스윽 내려놨다.

온기현이 어리둥절하게 류주호를 바라봤다. 동그란 눈을 끔뻑대며 뚫어지게 쳐다보는 온기현의 눈빛에 못 이겼는지, 아까부터 눈썹을 꿈틀거리던 류주호는 이내 부드럽게 말을 덧붙였다.

“수고하셨어요. 가뜩이나 날도 더운데. ……실장님.”

류주호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끝으로 남자와는 그렇게 대화를 끊으며 이삿짐센터 실장을 찾았다. 실장이 곧 “네, 고객님!” 하며 대답해 왔다.

“얼마나 남았나요?”

“이제 얼추 다 정리됐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우리가 할 테니 이만 가 보셔도 됩니다.”

“예에.”

그렇게 이삿짐센터 직원들은 재활용 박스와 쓰레기봉투, 바닥에 까는 매트 등을 수거해서 순식간에 집 밖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하지만 한숨 돌릴 새도 없이, 오늘 도착하기로 한 가구 배송이 시작됐다. 그중에서 특히 온기현을 객쩍게 만든 것은 커다란 사이즈의 침대였다. 하지만 온기현이 멀뚱히 서 있는 사이에도 류주호의 지시에 따라 착착 제자리를 찾아간 가구들 덕에, 어느새 썰렁했던 집 내부는 어느 정도 살림이 갖춰진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뽀송하게 건조까지 된 침구 위에 풀썩 소리가 나도록 엎어졌다. 어느 정도 뒷정리가 끝나고 씻고 나오자 류주호는 잠시 구청에 마저 처리할 볼일이 있다고 나가 버렸다.

머리도 채 말리지 않은 상태로 고단한 몸을 새 침대 위에 뉘자 온몸이 푹 퍼지는 느낌이었다.

“으아…….”

앓는 소리가 섬유 유연제 향이 나는 침구 위로 퍼졌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침대가 있는 방을 휘휘 둘러보았다.

‘집 진짜 좋다……. 방도 세 개나 되고.’

단순한 감상이었지만 사실 그만한 감상도 없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이런 곳에 류주호와 함께 살기로 한 것 자체가 거짓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이게 현실이라는 감각이 별로 없었다.

‘여기서 둘이 사는 거지, 이제.’

헐.

진짜 동거하네, 우리.

입을 벌리고 방 안을 둘러봤다. 원래 방을 따로 만들자고 했었는데, 류주호는 어떻게 애인끼리 방을 따로 쓸 수가 있냐며 그건 사랑하는 사이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워낙 강경하게 나온 탓에 온기현도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얼결에 킹사이즈 침대까지 사고 말았다.

하아.

다시 엎드린 채로 풀썩 누워, 팔을 대자로 뻗었다. 그리고 여기로 이사 오기까지의 일을 곰곰이 상기했다.

지난 학기가 끝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다. 이제 다음 학기가 바로 4학년이었다. 가뜩이나 휴학과 복학으로 인해 들쑥날쑥한 학기였다. 이대로 쭉 졸업까지 휴학 없이 마치더라도 코스모스 졸업이었던 온기현은 방학에는 아무래도 학비와 생활비를 모으기 위한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은 터였다.

노트북으로 열심히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뒤적거리던 때에, 그것을 목격한 류주호가 대뜸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해 왔다.

“아르바이트 꼭 해야 해? 하지 마. 되도록 안 했으면 좋겠어.”

그 말을 듣고 헛웃음을 날렸다. 제 뻔한 사정을 알면서도 그런 소리를 하는지, 하고 억울함에 눈가를 벌겋게 물들일 때였다. 류주호가 대뜸 온기현 앞으로 통장 두 개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 하고 입술을 뾰족 내밀던 온기현에게 류주호가 심상히 말을 뱉었다.

“이건 너랑 나랑 청약 저축, 그리고 이건 적금. 그리고.”

류주호가 핸드폰 화면을 내밀었다.

“이건 우리 생활비 통장.”

“어…….”

온기현이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금액이었다.

“네가 돈이 어딨어서…….”

‘주호는 알거진데…….’라고 생각하며 말을 흐리자, 류주호는 소액의 현금을 여러 방법으로 불렸다고 했다. 어쩐지 수상쩍게 바라보는 통에 류주호가 자세하게 말을 읊었다. 오래전에 지인을 통해 투자했던 분배받은 소액의 이익금이라고 했다. 거기다 주식으로 돈을 이리저리 굴리다 보니 어느 정도 생활비를 충당할 정도는 벌었다고 했다.

그러고는 온기현이 더 무어라 물어보기도 전에, 류주호는 제멋대로 제가 현재 굴리고 있는 재테크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하며 온기현과의 미래 계획을 착실히 준비해 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 미래 준비 안에는, 온기현의 남은 학기의 학비도 포함되어 있다고 말이다.

“네가 말했잖아. 나랑 그렇게 하고 싶다며. 청약도 들고 연금도 들고……. 같이 준비해 가자고. 그거 거짓말이었어? 그냥 나한테 대충 둘러댄 거야?”

“아, 아니…….”

류주호의 말에 온기현은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입만 벙긋거렸다. 제가 그런 말을 했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리고 류주호의 말마따나 정말 대충 둘러대려고 말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놀라기는 일렀다. 류주호는 마지막 폭탄선언을 했다.

“그런데 우리 함께 이렇게 재테크 잘해 나가려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어.”

“어, 그게 뭔데……?”

온기현은 이미 파생 상품을 판매하는 은행 창구 앞에 선 고객처럼 그가 몰아붙이는 분위기에 반쯤 넘어간 상태였다.

“월세가 두 번 나가잖아.”

“응?”

“우리 둘이 따로 살면 월세가 두 번 나가니까, 돈 모으는 데 별로 좋지 않아. 그냥 월세는 한 번만 내는 게 낫지 않겠어?”

“한 번? 그, 그렇긴 하지. 그런데…….”

“그럼 결정한 거다.”

부드럽고 예쁘게 접히는 눈을 보며 온기현이 말을 잃은 사이에 이미 얘기는 끝나 있었다.

팔촌 친척이 외국으로 가게 되면서 월세로 내놓은 오피스텔이 있는데 거의 지금 사는 원룸 월세의 반절도 안 되는 가격, 즉 거의 관리비 정도만 받겠다는 류주호의 말에 덜컥 이사까지 오게 되었다.

류주호는 지난 학기를 끝으로 졸업했다. 일단 지인이 하는 사업을 도와주며 이제부터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미래라고는 해도, 아직 불투명한 것투성이다.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불확실성 중에서도 가장 확실한 것은, 지금 당장 곁에 있는 이 사람이었다. 온기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류주호의 말에 수긍했다. 설령 당장은 소비의 축이 한쪽으로만 기울더라도 지금은 여러 가지로 아끼고 저축하면서 미래를 준비할 때였다. 그렇다고 생활비라는 명목으로 남은 학비까지 류주호에게 신세만 지는 건 탐탁지 않았다. 류주호는 자신이 학비를 책임질 거라고 말했지만, 일단은 빌리는 것으로 하고 취직하면 갚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걸 말하면 류주호는 또 삐지겠지…….’

푹신한 이불 위에 누워 있는 온기현의 시야가 점점 흐릿해졌다. 스르르 잠이 몰려오면서 입가로 고단한 숨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막 잠에 빠지려던 무렵,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류주호다.’

하지만 그가 왔다는 생각은 머릿속에만 맴돌 뿐이었다. 손가락만 꿈틀거린 온기현은 제 몸이 마치 제 의지를 벗어난 하나의 정물이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의식만 열려 있을 뿐 눈이 떠지거나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침대 위에 찰싹 달라붙은 것처럼.

“기현아. ……자?”

살짝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온기현은 대답할 기력도 없어서 잠꼬대처럼 으응, 하고 콧소리만 냈다. 바닥을 딛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류주호가 침대 근처로 다가왔다. 기척으로 알 수 있었다.

“피곤했지, 오늘. 이사하느라.”

‘아니, 난 별로 한 것도 없고 이삿짐센터에서 다 해 줬는데. 이상하게 피곤해.’

속으로는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밖으로 나온 소리는 또다시 콧소리였다. 이번에는 끄응, 하고 좀 더 강한 소리가 났다. 문득 멍한 귓가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한숨 소리가 파고들었다. 다리 아래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커다란 침대 매트리스는 끼익거리는 스프링 소리 하나 없이 두 사람의 체중을 탄탄하게 받쳤다.

“원래 몸이 피곤하면 자고 싶어도 제대로 잠이 안 올 때가 있대.”

류주호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내가 마사지해 줄게.”

‘야. 너도 피곤하잖아, 하지 마. 괜찮아. 나, 진짜.’

만류의 말조차 입 안에서 웅얼거리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푹 퍼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는 새에 뜨끈하고 커다란 손이 종아리를 건드렸다. 그리고 지그시 눌렀다.

‘아…….’

입에서 나직하고 만족스러운 탄성이 터졌다. 그 손은 세지도 약하지도 않은 악력으로 온기현의 종아리 곳곳을 매만졌다. 신기하게도 주무르고 누르는 곳마다 약간의 통증과 함께 나른함이 찾아왔다.

“응…….”

하아.

입에서 만족스러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긴장해서 뭉친 근육이 조금씩 풀려 가는 게 느껴졌다. 어느 정도 무릎 아래가 편해졌다고 느꼈을 즈음, 허벅지 뒤쪽으로 손이 뻗어 왔다. 양다리를 꾹꾹 눌러 가며 부드럽게 아픈 근육을 풀어 주는 손길에 정신이 점점 더 멍해졌다.

‘흐아…….’

기분 좋아…….

혼곤한 정신으로 가만히 엎어져 누워 있는 온기현의 아래에서 계속해서 천천히 움직였다. 부드러운 맨다리를 한차례 쓸어 댄 손이 아래서부터 차례대로 주무르더니 엉덩이 아래 부근까지 올라왔다. 천이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욕실에서 샤워하고 간단하게 티셔츠와 반바지만 걸치고 그대로 침대 위로 엎어진 것을 기억해 냈다.

“여기 엄청 굳었다. ……아파?”

“후으…….”

온기현의 입에서 완전한 발음이 안 되어 웅얼거리는 앓는 소리가 났다. 류주호가 엄지를 이용해 허벅지와 사타구니로 이어지는 부근의 근육을 원으로 덧그리듯 부드럽게 누르며 풀어 주었다. 간혹 밤새 시달린 몸이 뻐근할 때에 류주호가 여기저기 주물러 준 적은 있었지만 이렇듯 온종일 정신 없었던 상태에서 긴장을 이완시키는 목적은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반드시, 라고 말해도 될 것처럼 어김없이 섹스로 넘어갔었기 때문이다.

‘하아……. 기분 좋아.’

정신은 몽롱한데 잠은 오지 않았다. 좀 더 나른한 이 감각에 취해 있고 싶었다. 마사지 왜 이렇게 잘하는 거야……. 입이 절로 벌어지고 숨이 편안해졌다. 포근한 침구류의 향이 코 속으로 파고들어, 진짜로 마사지 가게에서 전문 마사지사한테서 서비스를 받는 듯한 사치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더 해 줬으면 좋겠다……. 아냐, 주호도 힘들 텐데…….’

서로 바꿔서 마사지해 주자는 생각은 들었지만 도통 몸이 제멋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그때, 온기현의 입에서 흣, 하는 새된 소리가 튀어나왔다.

“미안. 아팠어?”

아니, 아니. 아픈 건 아니고…….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지만 겉으로 보이는 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픈 게 아니었다. 류주호가 사타구니 안쪽을 부드럽게 쓸며 누른 순간, 등줄기에 전율이 인 탓에 당황해서 나온 소리였다.

“읏…….”

손길이 더욱 부드럽고 은근해졌다. 류주호는 아픈 줄 알고 그곳의 근육을 집중적으로 풀어 주려는 것인데, 저는 자꾸만 감각이 다른 데로 샜다. 절로 엉덩이가 위로 붕 뜨는 것 같았다. 이불 위로 널브러진 손끝에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여기도 풀어 주면 좋대.”

“아…….”

둥글리던 원이 반바지 사이의 틈을 헤치고 봉긋 솟은 엉덩이 밑부분까지 다다랐다. 온기현의 몸이 움찔 튀었다. 특히나 엉덩이 부근은 제일 약한 신체 부위 중 하나였다. 한참 매일같이 몸을 섞어 민감함이 극에 달았을 때는 신체 감각이 예민하게 솟아, 류주호가 엉덩이만 주물러도 울먹일 정도였다.

둔부와 넓적다리의 경계선을 둥글리며 밀어 댄 탓에 엉덩이 살이 위로 눌려 올라가는 느낌에도 화들짝 몸이 튀었다. 너무 오랜만에 닿는 체온이었다. 이유는 다름 아닌 학교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기말고사까지 겹쳐서 한동안 진득하게 몸을 맞붙이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온기현의 마지막 시험이 끝나자마자 류주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온기현을 붙들고는 빈 강의실로 들어갔다.

가볍게 입술을 쪼아 대다가 깊은 키스로 넘어간 것은 순식간이었다. 류주호는 거의 강박적일 정도로 온기현의 입 안을 빨고 깨물고 핥아 댔고, 온기현 또한 가뜩이나 시험공부를 하느라 노곤해진 신체 때문인지 그대로 쏟아지는 감각에 함락되어 류주호의 어깨를 부여잡고 매달리며 정신 없이 키스에 응했다.

빈 강의실에 젖은 소리가 울리는 것도 모른 채 한참을 혀를 섞고 타액을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흥분에 못 이긴 류주호가 강의실 벽에 기댄 온기현의 하의를 빠르게 내리고는, 덥석 성기를 입으로 감쳐물었다. 온기현은 소리를 죽이려 애썼다. 이러면 안 되는데, 싶다가도 아래가 녹아 버릴 것 같은 쾌감에 정신이 흐려졌다.

쭙쭙거리며 빠는 소리가 선연히 들릴 정도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한창 온기현의 아래를 빨아 대던 때였다. 허리가 앞으로 휘고 지탱하고 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절정이 눈앞이었다. 입을 가린 손에 힘이 들어갔다. 사정의 기운을 알아차린 류주호가 더욱 열심히 혀와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던 때, 강의실 바깥에서 와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헉, 하고 놀란 온기현이 몸을 빼려고 하자 류주호는 더욱 집요하게 얼굴을 파묻고는 게걸스럽게 애무했다. 시험이 끝나서 들뜬 여럿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소란 소리에 기현이 몸을 버둥거렸다. 문을 잠그기는 했어도, 혹시나 들어올지도 모른다. 그런 온기현의 초조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류주호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번 강하게 흡입하던 때 온기현이 안 돼! 하고 속으로 소리치고는 발끝으로 류주호의 몸을 퍽 찼다. 동시에, 입술을 꽉 깨물며 사정했다.

결국 소란스러움은 복도 끝으로 멀어져 가서 안도했지만, 그 뒤에 온기현은 엄청나게 화를 냈다. 혹시라도 들키면 어쩌려고 그러냐, 나도 나지만 너도 꼭 이런 데서 그렇게 해야겠냐, 하고 원망의 말을 쏟아 냈다. 하지만 류주호의 반응이 더욱더 가관이었다.

“난 들켜도 상관없는데.”

온기현은 그 말에 제 가슴을 퍽퍽 치며 또다시 억울함 어린 화를 뱉어 냈다. 결국 류주호가 미안하다고 달래고 사과를 해서 좋게 마무리되긴 했지만, 아무래도 평소에 매일같이 붙어 있던 탓도 있는 것 같다며 잠시 거리를 두자고 말한 것은 온기현이었다. 스킨십도 습관이라면서 말이다. 거기다 이사 준비까지 겹쳐진 탓에 대체 얼마 만에 맞닿는 건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맨살에 닿는 감촉이 어쩐지 생경하기도 했고, 수면 아래에 가라앉아 있던 예민한 감각들이 하나둘씩 깨어나는 듯한 오묘한 느낌이 들었다.

“하으…… 읏.”

이, 이상한데…….

나른하게 풀리던 온몸의 감각이 점차 근질거리는 무언가로 변해 갔다. 손길로 점화된 불꽃이 몸 곳곳에서 화르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달뜬 숨을 삼켰다. 온몸에 힘이 꽉 들어가며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조금 들어 올린 듯했다.

“하아…….”

여전히 멈추지 않고 엉덩이를 덧그리는 아래에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잠 안 오면, 더 편하게 잠드는 방법이 있어.”

“……?”

의아함에 가느다랗게 뜬 눈을 깜빡일 때였다.

“흐아……! 아, 으……!”

얇은 반바지가 허벅지까지 내려가며 마사지하던 엄지가 둔부 사이의 골을 양옆으로 벌렸다. 동시에 그 사이로, 축축하고 뜨거운 살덩이가 파고들었다.

“아, 아……!”

“후우……. 괜찮아. 그냥 커다란 배에 탔다고 생각하고, 몸에 힘 빼. 뒤로 한번 가면 잘 잠들 수 있을 거야.”

“므, 흐……읏!”

온기현이 항변의 말을 뱉기도 전에 주름진 곳이 질척한 타액으로 천천히 적셔졌다. 온기현의 허리가 쑥 꺼진 사이에 비좁은 구멍 사이로 두툼한 혀가 비집고 들어왔다. 헉, 하고 밭은 숨이 터졌다. 아까까지 부드럽게 근육을 풀어 주던 두 손은 위로 솟은 둔부 위로 각각 올려져 말캉한 살을 주무르며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이불을 손으로 꽉 쥐었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어느새 식은땀이 배어났다. 쭙, 쭙, 하는 젖은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새롭고 낯선 공간이었다. 가구의 위치가 아직 익숙지도 않은 곳이었다. 느닷없이 새집에서의 첫날 이사를 마치자마자 뒤를 빨리다니.

하지만 이상하게도 저어되는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익숙한 장소가 아닌데도 전보다 더 신체가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너무 오랜만이어서일까. 아니면, 새로운 시작을 함께하는 장소에서 고양감 때문일까.

생각은 깊이 이어지지 않았다. 자장가와 같이 느린 박자로 안을 빠는 혀의 감각이 점점 생생하게 다가왔다. 앞이 단단해지는 게 느껴졌다. 밭은 숨과 함께 가슴을 들썩이며 불편한 듯 몸을 뒤척였다. 피곤한 신체에 나른한 쾌감까지 더해져서인지, 어쩐지 꿈을 꾸는 것 같은 혼몽함에 취한 기분이었다. 뒤가 간지러웠다. 안을 강하게 꿰뚫리며 기분 좋은 곳이 비벼지는 감각을 느끼고 싶었다.

“흐, 읏……. 주호야, 나…….”

“응. 앞에 만져 줄까.”

“……아니. 그거 말고. 그냥, 여기. 넣어 줘…….”

여기, 라고 칭하는 곳이 어디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

류주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온기현의 귓바퀴가 붉어졌다.

“하아…….”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이 들렸다. 제가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저런 반응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기현은 그저 그런 의문을 또 한 번의 보챔으로 풀고 있었다.

“빨리……, 어?”

온기현이 팔을 뒤로 뻗으며 엉덩이 쪽으로 내렸다. 그리고 손으로 덮은 다음 볼기를 양쪽으로 벌려 열었다. 하. 어느새 상체를 일으켰는지 위쪽에서 또다시 마른 숨이 터졌다.

“앞으로 돌아.”

낮게 으르렁대는 목소리는 명령조였다.

류주호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면 자기도 모르게 단조로운 명령조를 사용하고는 했다. 지겨울 정도로 몸을 섞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이었다.

“……아니……, 그냥 이대로 해 줘.”

잠에 취한 탓에 할 수 있는 민망한 요구였다. 애매하게 지펴진 흥분의 불을, 거센 쾌감으로 흔들리며 터트리고 싶었다. 그러면 정말로 류주호의 말마따나 곤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던 때.

“싫어.”

“……어?”

지금 뭐라고? 온기현은 제 귀를 의심했다. 제가 뭘 들은 것인지 몰라 눈을 깜빡거렸다. 스르르 퍼지던 의식이 점점 첨예하게 모였다. 지금 류주호가, 뭐라고?

“지금 이대로 하기 싫어.”

“……어어?”

“좀 쉬어. 나는 마저 정리할게.”

“엉?”

또렷한 의문의 소리를 낸 온기현이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봤다. 류주호는 침대에서 다리를 내리고는 방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방문을 열어젖힌 류주호가 소리 나지 않게 등 뒤로 문을 닫았다.

“……뭐야?”

벙찐 얼굴을 한 온기현이 하의는 완전히 알몸이 된 부끄러운 모습으로 문 쪽을 쳐다봤다. 류주호는 나갈 때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허. 황당한 숨이 터졌다.

* * *

그날은 그렇게 류주호가 방에서 나간 뒤로 잠기운이 완전히 가신 온기현은 저도 속옷과 바지를 챙겨 입고 쭈뼛쭈뼛하며 나와, 이삿짐 정리를 거들었다. 류주호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굴어서 괜히 더 어색했다. 하지만 얼마 정리하지도 못하고 결국 피곤해서 침대에서 쓰러져 기절하듯 잠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떠 보니 옆에 누워 있어야 할 류주호가 보이지 않았다. 베개 옆에 있는 핸드폰을 들었다. 벌써 만 하루가 다 지나 있었다. 비척비척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열린 문틈 사이로 어슴푸레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밖이 어둑했다.

주호야.

작게 류주호를 불렀다. 그러다 침실 반대편에 있는 방에 눈이 갔다. 서재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리는 것이 류주호는 서재에 있는 것 같았다.

서재로 들어가자 류주호는 등을 보인 채였다. 괜히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양 행동하기 위해 그 옆으로 다가가 자잘한 짐 정리를 거들었다.

“어……. 주호야. 이건 여기 작은 서랍에 넣으면 되지?”

“응. 거기 둬. 내가 나머지 정리할게.”

온기현이 그렇게 묻자, 아무렇게나 꽂혀 있던 책을 순서대로 정리하고 있던 류주호가 대답했다.

오늘도 미묘하게 평소와 다른 듯 똑같았다.

‘어제는 대체 뭐지.’

볼을 긁적이며 불가해한 류주호의 행동 때문에 혹여 어색한 기류가 흐르지는 않을까, 하던 온기현이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은 그의 말대로 일단 제 짐부터 가지런히 정리했다. 하지만 책도 별로 없고 애초에 원룸 빌라에 많은 짐을 두고 살았던 게 아니라서 금세 끝났다. 옆에 멀뚱히 서 있기도 뻘쭘했다. 괜히 쭈뼛거리며 서재 밖을 나와 거실을 죽 둘러보았다.

자신이 자는 사이에 나머지 가구가 배송된 모양이었다. 소파와 티브이, 거실장, 그리고 수납을 위한 서랍까지. 조금 썰렁하긴 했지만, 사람 사는 티는 날 법한 웬만한 가구들은 갖춰진 상태였다.

이사 오기 전, 빈한하던 류주호의 살림은 학기 중에 구입한 책 위주로 늘어났다. 그래서 결국 서재의 책장을 새로 장만하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예전 류주호가 살던 커다란 원룸 형태의 오피스텔도, 딱 필요한 가구들만 놓여 있었다. 그는 쓸데없는 살림은 애초에 거둬들일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지금 이 공간도 마찬가지였다.

온기현은 거실을 빙 둘러보다가 거실장 위에 나란히 세워 둔 제 미니 피규어들을 머쓱하게 바라봤다.

일전에 어벤져스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 감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온기현이다. 그 얼마 뒤, 류주호와 함께 마트에 장을 보러 갔던 때, 벅찬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장난감 코너에 진열돼 있던 어벤져스 캐릭터들의 피규어를 덜컥 충동 구매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따로 살았던 때라, 제 원룸 창가에 가지런히 놓아 두었던 것들이다.

막 전쟁을 시작하려고 하는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의 3등신의 피규어들이 너무 귀여워서 괜히 볼 때마다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류주호도 귀엽다고 했다. 그런데 이런 고급 오피스텔의, 모델 하우스처럼 깔끔하게 정돈된 거실과 오밀조밀한 피규어를 비교해 보니 언뜻 안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조잡해 보였다.

‘에이. 그냥 박스에 넣어 놔야겠다.’

온기현이 피규어들을 한데 그러모아 손에 쥐려고 할 때, 책 정리를 끝낸 류주호가 서재에서 나오며 온기현이 하는 양을 시선에 담았다.

“그거 왜 가져가?”

“어? 아. 그냥, 뭔가 좀 지저분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넣어 놓으려구.”

“아냐. 귀엽기만 한데. 그냥 둬.”

“그래도.”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류주호가 곁으로 다가와 온기현의 손에 들린 피규어들을 하나씩 빼내어 다시 제자리에 올려 두었다.

역동적인 자세로 칼을 들고 있는 캡틴 아메리카를 먼저 올려놓고는, 영화에서 나왔던 대결 구도와 똑같이, 서로 대치하는 형태로 피규어들을 배치했다.

와아. 포스터랑 순서도 똑같네. 온기현이 눈을 크게 떴다.

“여긴 네 집이기도 하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나 지금 월세도 못 보태는데.”

“그런 말 하지 마. 우리 길게 생각하기로 했잖아.”

계속 같이 있을 거니까.

나지막하게 그렇게 덧붙인 류주호가 미미한 웃음을 그렸다. 온기현도 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의 월세 정도야, 평생에 비하면 견줄 바가 못 되었다. 류주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기현아. 거기 피규어 옆에 서 봐. 이쪽 보고.”

“응?”

“손 브이 하고.”

“이렇게?”

찰칵.

류주호가 요구하는 대로 손으로 브이를 만들어 올리자 류주호가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대며 사진을 찍었다.

찰칵. 찰칵. 찰칵.

같은 각도에서 촬영음이 세 번이 더 들렸다. 촬영에 열중한 류주호를 보며 온기현이 멍하니 생각했다.

‘……류주호 이러는 거 보면 평소랑 똑같은데. 어제는 왜 그랬을까.’

“잘 나왔다.”

“그래?”

“아, 너무 귀여워.”

“귀엽다는 말 좀 하지 말라니까.”

“아, 너무 멋있어.”

류주호가 재빨리 말을 바꾸며 제가 찍은 온기현의 사진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언뜻 감격에 겨워 보이기도 했다.

“나두 봐 봐.”

온기현이 고개를 내밀자 류주호가 화면을 내밀어 보여 줬다. 화면 안에는 멍한 표정을 하고 머리는 까치집을 한 채 어설프게 브이를 그리고 있는,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의 후줄근한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야. 이게 뭐야. 진짜 이상해. 지워 줘.”

“하나도 안 이상하고 멋있는데? 이거 봐. 여기 머리 삐죽 솟은 거 봐. 어떻게 이렇게 멋있지. 그리고 브이자 그린 손가락이 살짝 구부러졌어. 너무 멋있다. 앞니가 쌀알처럼 살짝 보이는 것도 토끼 같고 너무 멋있.”

“놀리지 말고!”

“짐 정리 얼추 끝났으니까 밥 먹을까? 응?”

류주호가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말을 돌렸다. 심통이 나서 뾰족하게 입을 내민 온기현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류주호가 옅은 갈색빛의 눈을 빛내며 온기현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쓸었다.

“배고프지. 너무 곤하게 자길래 안 깨웠어.”

“아, 응. 나 엄청 오래 잤더라.”

민망함에 볼을 긁적였다.

“오늘은 우리 함께 살게 된 기념으로 나가서 먹자. 이 근처 맛집 탐방도 할 겸.”

쪽.

말과 함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한 류주호가 온기현의 얼굴을 제 품에 쏙 껴안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니, 청량하면서도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처럼 무덥고 강렬한 내음이 코 속으로 들어찼다. 류주호의 체취였다. 이제는 안심이 되기 그지없는.

따듯한 품에 푹 파묻힌 온기현의 얼굴이 금세 풀어졌다. 마음이 말랑해지니 궁금하던 말이 툭 튀어나왔다.

“근데 너 어제는 왜 그랬어?”

“음?”

류주호의 허리춤의 티셔츠를 움켜쥐며 온기현이 고개를 들었다. 날렵하게 두드러진 턱선이 눈에 들어왔다.

“그……. 그. 침대에서.”

“…….”

“왜 안 했어?”

“…….”

“뒤로, 해 달라고……. 했는데…….”

우물거리며 묻는 온기현을 바라보는 류주호의 눈에 일순 예기가 어린다. 순간적으로 그것을 포착하여 어,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시에, 류주호가 온기현의 어깨를 잡고 몸을 슬며시 물려 온기현을 떼어 놓았다.

“……그 얘긴 별로 하기 싫어. 나가자.”

“……어.”

다소 딱딱하고 냉정한 어투에, 온기현이 맥없이 대답했다.

다시금 어색한 기류가 둘을 감쌌다.

* * *

터벅터벅.

말한 대로 둘은 저녁을 먹기 위해 집을 나섰다. 오피스텔 로비를 지나 밖으로 나와서는, 큰 도로 쪽의 상점가가 모인 방향으로 향했다. 밤길을 나란히 걷는 둘 사이는 약간의 간격이 벌어져 있었다. 둘 사이에는 한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이유가 뭐야, 대체.’

조용히 입을 다문 채 옆에 걷는 이를 온기현이 곁눈질했다. 류주호는 회색 조거 팬츠와 검은 맨투맨을 편하게 걸쳐 입은 상태였다. 아무리 살펴봐도 평소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약간 가라앉아 보이는 얼굴이 어딘가 상념에 빠진 얼굴 같기도 했다. 온기현도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여태 어색함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새로운 동네도 탐색할 겸 밖에 나가서 맛집 탐방을 하려는 의욕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그때였다. 류주호의 핸드폰 벨 소리가 조용하던 둘 사이를 파고들며 울렸다.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있던 류주호가 바로 핸드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온기현도 덩달아 류주호를 쳐다봤다.

“…….”

“……안 받아?”

“응. 안 받아도 돼.”

그렇게 심상하게 대꾸한 류주호가 눈길을 거두면서 볼륨 키를 눌러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었다. 하지만. 몇 걸음 더 나가기도 전에 전화가 한 번 더 울렸다. 이번에도 발신자를 확인한 류주호가 작게 혀를 차며 볼륨 키를 다시금 꾹 눌렀다. 온기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누군데 그래?”

“스팸인가 봐.”

“그래? 아닌 것 같은데.”

“맞아.”

“스팸이 그렇게 끈질기게 온다고? 너 그거…….”

옛날에 너랑 만나던 사람 아냐?

그렇게 물어보려다 입을 꾹 닫았다. 그렇지 않아도 분위기가 오묘하게 어색한데, 괜히 류주호의 헤픈 과거까지 들먹이기 싫었다.

“받아 보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절로 툴툴거리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것을 자각하고 입술을 말아 물었다.

연신 울려 대는 핸드폰을 내려다보다 류주호가 작게 혀를 차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고개는 온기현의 반대편으로 살짝 돌린 채였다.

“네, 아저씨.”

아저씨?

아저씨가 누구지.

빤히 쳐다보는 기현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류주호는 가만히 핸드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다가 “네. 네.” 하고 간간이 대답했다.

“하아……. 일단, 알겠어요. 네. 무슨 말씀인지 알았습니다.”

커다란 손으로 이마 위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지금 갈게요.”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종료됐다. 온기현의 시선이 뚫어질 듯 류주호를 향했다. 류주호가 몸을 돌려 온기현을 바라봤다. 미간이 미미하게 좁혀졌다.

“기현아. 나, 미안. 지금 집에 좀 가 봐야 할 것 같아.”

“어? 집? 너, 본가에? 왜? 무슨 일인데? 너, 집에서 지금 전화 온 거야?”

“응.”

“왜? 무슨 일 있어? 어? 너 집에서 쫓, 아, 아니…….”

깜짝 놀란 온기현이 말을 하다가 멈췄다. 거의 연을 끊다시피 한 집에서 왜 갑자기 연락이 온 건지 궁금했다.

“지금 연락하신 분은 누군데?”

“아버지 일 도와주시는 분인데.”

“응.”

온기현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종용했다. 그에 조금 곤란한 듯 고개를 모로 기울인 류주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음. 아버지가 좀, 상태가 안 좋으신가 봐.”

“……뭐?”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 어. 하고 입에서 멍청한 소리만 흘러나왔다. 류주호는 접힌 미간 사이를 엄지로 꾹 누르고 있었다.

“야, 야. 그럼 얼른 가 봐야지! 어? 어, 어떡해. 많이 안 좋으시대? 어디 편찮으시대?”

“아니. 그런 건……. ……일단 가 봐야 알 것 같아.”

류주호가 무어라 말하려다 말을 흐렸다.

아마 엄청나게 걱정되겠지. 가뜩이나 지금 류주호는 집에서 쫓겨난 상태 아닌가. 그 사안에 자신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다고 내심 껄끄러움과 미안함을 느끼고 있던 온기현이었다. 결코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부모 자식 사이의 연을 이렇게 단호하게 끊고 나와 버린 류주호가 자신과 함께 미래를 꾸려 가려고 결심했던 뒤편에는, 그가 내버리고 온 것들이 참 많았다. 온기현도 당연히 그걸 알고 있었다.

“너, ……괜찮아?”

망설이다 그렇게 물었다. 둘이 있을 때는 그런 얘기를 나누거나 내색하는 일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내내 신경 쓰여 묻고 싶었던 말이다.

눈썹이 잔뜩 처진 온기현을 보며 류주호가 피식 웃었다.

“금방 올게.”

류주호는 아무런 준비 없이 바로 다녀올 심산인지, 오피스텔 앞까지 자신을 바래다주고는 저는 바로 등을 돌렸다.

멀어져 가는 널찍한 등을 바라보던 온기현은 한숨을 삼키다, 아차 하고 얼른 핸드폰을 들어서 류주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조심해서 다녀와!] 19:37

전송을 누르기 무섭게 읽음 표시 숫자가 사라졌다. 답장을 기다리다가 조금 초조해져서 연락해, 라고 쓰려 막 엄지를 움직이던 찰나, 노란 말풍선이 화면에 떠올랐다.

주호 [벌써 보고 싶다] 19:39

이 와중에도 낯 뜨거워지는 메시지를 보낸 류주호를 향해 허, 하고 황당한 숨이 화면을 향해 터졌다. 그러다 이내 피식 웃다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웃을 때가 아닌데, 하고 입을 꾹 닫았다. 곧이어 다음 메시지가 도착했다.

주호 [미안해] 19:40

메시지가 이어졌다.

주호 [같이 못 있어 줘서] 19:41

그에 바로 아니라고, 도착하면 꼭 연락 달라고 바로 답장을 보냈지만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 * *

서울 시내의 커다란 저택은 복잡하고 휘황찬란한 도심과는 조금 떨어진 동네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도 걷기에 벅찰 정도의 언덕 위에.

삼엄한 보안을 자랑하듯 어마어마하게 높은 담장이 길게 이어진 동네를 따라 걸으며 속으로 교통편이 좋지 않은 동네의 험담을 마구 지껄였다. 변변한 버스 하나 다니지 않았다. 오로지 자차를 가진 사람들만 편하고 한가롭다고 생각할 만했다.

그중 가장 주변 시선에서 자유로울 것 같은, 소나무로 머리가 뒤덮인 높은 돌담으로 둘러싸인 저택의 대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느릿하고도 묵직한 걸음이 잔디를 짓밟았다. 관리가 잘되어 있지만, 계절마다 화려하게 물드는 자연과는 달리 철마다 항시 같은 색으로 유지되고 있는 널따란 정원으로 흘긋 곁눈질한 류주호는 지긋지긋하다는 감상을 떠올렸다. 그대로 현관문으로 직행했다. 품이 넓은 트레이닝 팬츠 안에 꽂아 넣은 손이 나올 일이 없었다.

문을 벌컥 열자, 저가 이전에 살던 빌라의 원룸 정도 크기는 될 것 같은 현관 공간이 드러났다. 슬리퍼로 갈아신은 류주호가 보폭을 커다랗게 하여 집 내부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다.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도 없는 것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서늘한 눈으로 빙 둘러보았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조소를 삼킨 류주호가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려던 때였다.

“왔냐.”

뒤쪽에서 묵직하고 고압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입을 일자로 꾹 다문 중년의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몸은요.”

“보면 모르냐.”

남자의 비서가 전화로 아버지가 심하게 앓으시며, 자신을 찾는다고 말했던 게 바로 몇 시간 전이었다.

“하……. 역시나. 왜 부르셨어요.”

“뭐? 너 이 자식. 대뜸 그거냐. 너, 아버지한테 말을 그따위로밖에 못 해?”

남자가 버럭 성을 냈다.

“네. 이따위로밖에 못 해요. 아버지한테 배운 게 이따위밖에 없어서요. 모르셨습니까?”

“망할 놈.”

한마디도 지지 않는 아들을 향해 분기 어린 말을 내뱉은 남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곧바로 본론을 입에 담았다. 워낙 필요한 것 외에는 칼같이 자르는 냉철한 성미의 소유자였다. 류주호도 그것만큼은 피를 못 속인다고 내심 생각하곤 했다.

“집에 들어와라.”

“싫어요.”

“너, 이! ……하. 사업 말아먹은 것 때문에 그러냐? 그렇게 이 집에서 독립하겠다고 이것저것 벌여 놓고는 난리를 피우더니. 그러니 양씨 집안하고 사돈 맺으면 그간 헛짓한 것도 다 덮어 주고 사업 자금도 내주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류주호가 관심 없다는 얼굴로 목을 좌우로 늘였다.

빠직. 남자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내가 양 회장한테 얼마나 면이 팔렸는지 알기나 해.”

“제가 어떻게 압니까. 제 면이 팔렸습니까, 아버지 면이 팔렸지.”

“이……!”

남자가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눈매를 좁혔다. 이내 인내의 심호흡과 함께 분을 삭이며 고개를 정원 쪽으로 돌렸다.

“할 얘기 더 없으시면 저 갑니다. 이제 그런 비인간적인 거짓말로 부르지 마세요.”

“요새 뭐 하고 다니는 거냐.”

“그게 왜 궁금하신데요.”

“집이랑 연 끊고 뛰쳐나가서는 대체 어디서 미친 짓을……, 아니. 어디서 애먼 짓이나 하고 다니는 것 아닌가 해서 물었다.”

대화를 이어 갈 일말의 성의도, 의지도 없어 보이는 제 혈육을 앞에 둔 남자가 이글이글 끓는 분노를 다시금 내리눌렀다.

욕심 사나운 놈이었다. 어릴 때부터 영명한 머리를 타고난 놈이었고. 그래서 새끼 호랑이를 잘 키워 내겠다는 욕심에 상당히 일찍부터 각종 경제 관련한 공부를 시켰다.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투자였다. 오로지 투자로만 인생을 일궈 온 남자는, 제 혈육조차 자신의 유구하고 비옥한 토지들을 가꿔 줄 소작농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런 상황이 되고 나서야 겨우 지난날의 실수를 조금씩 깨우치고 있는 남자였다.

“왜요. 어디서 굶어 죽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은 안 하십니까?”

“기가 막히는군. 네가? 아무리 사업 자금을 절반을 날렸다고는 해도, 네가 어디서 굶어 죽을 놈이냐? 간신히 건진 나머지 금액도 웬만한 대학생이 손에 쥐기 쉽지 않은 금액일 거다.”

그리고 남자는 저와 닮은 구석이 있는 아들의 성미를 어느 정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애초에 굴리는 자금의 규모나, 생각하는 액수의 개념이 일반 대학생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래, 어디, 남은 자금으로 낡은 빌라를 한 채 샀다고 하던데. 그건 왜 산 거냐.”

“제 돈은 제가 알아서 굴립니다.”

대충 툭 던지는 대답에 남자가 다시금 부글대는 가슴을 꾹 내리눌렀다.

“건방진 놈.”

“자식은 부모의 거울입니다.”

“끝까지……!”

남자가 주먹을 꽉 쥔 채 뒤돌았다.

“난 너 같은 아들놈 필요 없다. 썩 꺼져.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마.”

“네, 아저씨.”

바로 이어진 대답에 남자가 소리를 버럭 지르려다 말고 그저 부들거리기만 했다. 이 이상 화낼 기력을 잃었는지 고개를 돌리며 턱이 불거지도록 이를 물었다. 예전 같았으면 당장에 노발대발했을 텐데, 이제는 나이가 들었는지 그것도 쉽지 않은 듯했다.

“됐다. 이만 가 봐라. 네놈이랑 대화하다 보니 십 년은 더 늙는 것 같군.”

“네, 아저씨.”

“…….”

남자가 힘이 빠진 발걸음으로 터벅터벅 거실을 가로지르더니 커다란 소파에 털썩 앉았다. 류주호 또한, 볼일을 다 마친 사람처럼 미련 없이 거실을 가로질렀다.

“그런데 그 아이는 누구냐.”

남자가 마지막으로 그렇게 물었다. 제 아들을 꾀어내기 위해 미끼로 썼던 남자애. 그 아이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아챈 류주호가 한쪽 눈썹을 위로 끌어 올렸다. 순식간에 눈빛에 냉기가 어렸다. 제가 이렇듯 강고한 태도를 고수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저는 말도 못 걸고 미움받을까 봐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했던 시기였다. 온기현을 그딴 험한 곳으로 불러내고 이용하려고 했던 간악한 종자와 같은 피가 섞였다고 어디 가서 드러내 놓기도 싫었다.

“말해 드려요?”

원하신다면.

낮아진 음성이 무미건조했다.

남자는 대번에 극도의 피곤함을 느꼈다.

“……됐다.”

체념 어린 끝맺음에 류주호도 일말의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때, 남자가 어색한 헛기침과 함께 말을 이었다.

“크흠. 그래도 가끔 집에는 연락해라.”

“……그럴게요.”

의외의 순종적인 대답에 남자가 귀를 의심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아저씨.”

쾅.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집 안쪽에서 노성과 함께 둔탁한 소리가 먹먹하게 울렸다.

저택 대문을 나서자마자 류주호가 성마르게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기는 했지만, 저 꼰대가 생각할 만한 수법이기도 했기에 한편은 반신반의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역시나 제 예상이 맞았다.

짜증 어린 기분을 얼굴 밖으로 여과 없이 표출하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던 류주호는, 핸드폰을 꺼내었다.

통화 버튼을 길게 꾹 누르자 귀여운 망아지 아이콘이 나타났다. 그것을 보자 밑바닥까지 꺼졌던 기분이 순식간에 고양됐다.

핸드폰에 동물 캐릭터를 커스터마이즈할 수 있는 앱에서 동그랗고 귀여운 망아지 캐릭터를 만들었었다. 온기현은 자신을 자꾸 왜 망아지라고 부르냐며 툴툴거렸다. 그러더니, 요새 들어 벌크업을 한 탓에 류주호의 몸이 점점 더 무거워진다는 이유로 “그럼 너는 곰이야.”라고 하며 표독한 표정의 우스꽝스러운 흑곰 이모티콘을 만들어 연락처 리스트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해 놓았다. 그러고는 깔깔 웃어 댔다. 뭐가 그렇게 웃기는지 눈까지 찡그리며 웃는 뽀얀 얼굴을 멍하니 정신 놓고 바라봤다.

사랑스러웠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도저히 억누르지 못하고 그 얼굴을 붙잡고 여기저기 입술을 눌러 대던 기억이 선연하다.

완전히 제 옆에서 마음을 풀어 놓은 온기현은, 제가 준 상처가 제대로 아물어 가고 있다는 것을 이렇듯 시시때때로 보여 주었다. 기꺼운 웃음으로. 가지런한 이로. 새빨간 혀로.

의도적인 것이 아니어서 더욱 벅차올랐다.

그게 못내 기쁘고 사랑스러웠다. 이전에는 한껏 날을 세워 대하던 경계가 어느 순간부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경계심 없이 애정을 표하는 온기현은 정말이지 상상 이상으로 깜찍하다.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를 지경이었다.

동시에 제가 생각지도 못했던 무구한 태도를 보일 때면, 절대로 겉으로 드러내지 못할 온갖 음험한 생각이 뇌리를 지배했다. 강압과 억압. 그러한 종류의 저열한 욕망이 고개를 치켜든다. 통제되지 않는 그 무언가였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드디어 함께 살게 된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꾸준히 함께할 미래 계획을 그리며 그것을 항시 주지하듯 온기현에게 일러 주었었다. 너의 미래는 나와 함께할 것이라며. 그것이 실현된 첫날이었다. 침대방에 저들이 함께 사용할 침대 위에 편하게 널브러진 온기현을 보며 욕구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몸을 섞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원하며, 조금 초조했다.

요망하게 섹스를 요구하는 온기현은 제 안의 가학심을 자꾸만 자극했다. 거기다 마지막으로 섹스한 지 24일하고도 아홉 시간이 지난 시간이었다. 눈이 돌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

뒤로는 하기 싫었다. 온기현의 등을 바라보며, 뒤에서 몸을 결합하는 짓은, 하기 싫었다.

이 불쾌함과 불안함의 이유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미래는 묶어 둘 수 있을지언정, 과거까지는 뒤바꾸어 삼키지 못하는 애달픔에서 비롯됐다.

류주호는 망설임 없이 망아지 아이콘을 눌렀다. 신호음이 세 번까지 가지도 않았다.

―어, 여보세요?

“응. 기현아.”

류주호의 입에 긴 호선이 그려졌다.

―집에 도착했어? 어떡해……. 많이 아프셔? 상태가 어떠셔?

염려가 잔뜩 묻은 음성은 다급하기만 했다.

“아니. 감기래.”

―헉…… 독감?

“그냥 목감기.”

―아, 그렇구나……. ……아. 근데, 어른들은 목감기도 위험하대. 자칫 잘못하면 폐렴으로 번질 수도 있대. 그니까 방이 건조해지지 않게 습도도 높여야 하고, 어, 또…….

귓가에서 연신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조잘댔다. 걱정 섞인 조언을 읊는 음성을 귀에 담으며, 바짝 곤두서 있던 신경이 느슨해지는 게 느껴졌다.

대번에 목 뒤가 뻑적지근해지며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아…….’

자꾸 입가가 풀어져서 커다란 손으로 입가를 가릴 수밖에 없었다.

―근데 그래도 큰 병 아니라서 다행이다. 아, 그렇다고 감기가 작은 병이라는 건 아니고…….

“응. 알아.”

온기현이 다급하게 덧붙이는 말에 류주호가 가슴을 주먹으로 꾹 눌렀다. 잠깐 정말 몇 시간 떨어진 것뿐인데도 목소리를 들으니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기현아. 밥은 맛있게 먹었어? 내가 가면서 초밥 시켰는데.”

―야아. 넌 무슨 초밥 배달을 막, 그런 데서 시키냐? 포장도 고급스러워서 뜯지도 못하겠더라. ……나 그냥 앱에서 내가 알아서 주문해도 되는데. 5분 거리에 편의점도 있고.

“네가 거기 맛있다고 했잖아. 우리 저번에 갔을 때.”

함께 갔던 오마카세 스시집에서 진짜 맛있다고 젓가락을 물고 방방거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오피스텔에서 출발하기 전, 혼자 배고플 온기현을 위해 미리 전화로 주문해 둔 류주호였다.

―너는 밥 안 먹었어? 집에서 자고 오는 거지?

“지금 가고 있어.”

―어? 왜? 오랜만에 집에 갔는데 자고 오지……. 자고 와도 되는데.

“왜. 나 없어도 혼자 잘 잘 수 있어? 오늘 새로 이사한 곳에서.”

―당연하지. 내가 애야?

“그래? 어쩌지. 난 못 자는데, 너 없으면. 애새끼는 나인가 보네.”

―뭐어……? 뭐야―. 진짜.

온기현이 말을 늘이며 작게 키득거린다.

얼른 뛰어가고 싶다. 아니, 눈 감았다 뜨면 바로 온기현 옆이었으면 좋겠다. 과학자들은 순간 이동 기술도 개발 안 하고 대체 뭘 했나 싶다.

―그럼, 빨리 와! 오늘 우리 이사 기념 파티 하자!

제가 바로 돌아간다는 것에 신이 났는지, 파티를 하자고 한다. 들뜬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그래.”

류주호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얼른 갈게. 우리 집으로.”

* * *

“……이게 다 뭐야?”

류주호가 거실 한가운데 서서 가득 찬 테이블을 내려다봤다.

“뭐긴 뭐야. 밥하고 술이지.”

능청스럽게 히죽 웃으며 대꾸했다. 끼니를 거른 류주호를 위한 1인분의 도시락과 마른안주, 그리고 테이블 절반 정도를 꽉 채운 술병. 온기현이 말한 그대로였다.

짐짓 태연한 얼굴로 류주호에게 얼른 앉으라고 보챘다.

“오늘 기념하자고 했잖아, 이사 기념 파티야. 파티에 술이 빠지면 어떡해. 그치.”

빠르게 말을 뱉은 온기현이 류주호 앞으로 도시락을 내밀었다.

“술 파티인 줄은 몰랐는데.”

바람 빠지는 웃음이 류주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너는 얼른 밥부터 먹어. 그거 다 먹고 술 마시자.”

“같이 먹어.”

“난 먹었잖아. 얼른.”

온기현의 채근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입꼬리를 올린 류주호가 눈 깜작할 새에 도시락 1인분을 해치웠다. 동시에 맥주 풀 탭을 하나 까서 류주호를 향해 내밀었다. 그리고 저도 하나를 땄다.

“오늘 같은 날은 같이 마셔줘야지.”

그렇게 부러 활기 있게 말하며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푸하, 하고 입소리를 내자 류주호가 천천히 마셔, 라고 말하며 온기현의 등을 쓸었다.

“야. 너는 안 마셔?”

“마실 거야. 근데, 술 다 왜 꺼내 놨어. 오늘 이거 다 마시게?”

“응. 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온기현이 다시금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켰다.

“나 취하면 사정하는 데 오래 걸리는데. 괜찮겠어?”

“푸흡―!”

콜록. 콜록.

류주호의 말에 온기현이 간신히 입을 손으로 막으며 밭은기침을 해 댔다.

“야……. 아니거든, 그런 거.”

대번에 온기현의 볼에 홍조가 어렸다. 입 주변에 잔뜩 튄 맥주 거품을 손등으로 훑으며 말을 잃었다. 결후가 두드러지도록 목을 젖히고 맥주를 들이켠 류주호가 심술궂게 웃었다.

‘씨이…….’

새빨개진 귓바퀴를 응시해 오는 류주호의 시선에 손으로 귀를 감쌌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벌써부터 말리면 안 되는데.

사실은, 기념 파티라는 말을 가장하여 오늘은 류주호에게 술을 진탕 먹여 완전히 취하게 할 생각이었다.

이제까지 류주호가 취한 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 그 모습을 봐야 했다. 인간은 취하면 솔직해진다. 류주호도 다를 것 같지 않았다. 왜, 취중 진담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류주호가 끝내 감추어 말해 주지 않았던 어제 일에 대해 전부 캐물을 작정이었다. 뒤로 왜 해 주지 않냐는 민망스러운 말을 맨정신에 두 번이나 말할 자신은 없었다. 그래도, 술을 잔뜩 먹인 다음에 아까 왜 그랬냐고 물어보면 솔직하게 말해 주지 않을까.

장난기가 다분히 섞인 단순한 사고의 흐름이었다.

“음, 아!”

좋은 생각이 떠오른 온기현이 히죽 웃었다.

“우리 게임할까?”

“무슨 게임?”

“술 게임.”

제가 알기로 류주호는 단체 술자리에서 술 게임을 많이 해 본 적이 없었다. 저도 마찬가지였지만, 이제는 좀 웬만큼은 알게 됐고 ― 사실 스터디 애들한테 배웠다 ― 요령을 깨우친 게임도 두 개나 됐다.

“그래.”

류주호는 선뜻 제안에 응했다. 온기현은 얼른 컵 안에 소주와 맥주를 들이부었다. 둘이서 하는 술 게임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병뚜껑 게임 알아?”

“병, 뭐?”

“그거 하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오늘 류주호 엄청 취하겠다. 그래도 많이는 말고, 적당히만 먹여야지. 그 모르게 결심하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소주병 뚜껑 따개 부분을 손으로 돌돌 말았다.

“손가락으로 딱콩 때리듯이 여길 치는 거야. 번갈아 때리다가 자기 차례에 날아가면 그 사람이 마시는 거.”

“뭐 그딴 게임이 다 있어?”

류주호가 의아함을 표했지만 산뜻하게 무시했다. 원래 이 게임의 규칙은 뚜껑을 날린 손으로 사람이 지정한 사람, 혹은 그 사람의 양옆 사람이 벌주를 마시는 것이었으나, 류주호에게 제대로 된 규칙으로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게임은 요령이 필요했다. 병뚜껑 꼬리의 어느 부분을 치는지도 상당히 중요했고 그에 따른 힘 조절이 필요한 게임이었다. 저도 깨우친 건 얼마 안 됐다. 어쨌든 적당히 세게 치는 척해야 했다.

“자, 나부터 한다.”

온기현이 엄지와 검지를 모아 배배 꼬아져 있는 초록색의 따개 윗부분을 퉁 튀겼다. 밑부분을 슬쩍 확인하니 정말 미미하게 금이 가 있었다.

“이렇게 하는 거야.”

“해 보지, 뭐.”

류주호에게 뚜껑을 넘겼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류주호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그는 온기현이 한 방법을 보고서 그대로 따라 했다.

펑, 소리와 함께 따개가 퉁겨져서 저 멀리 거실 벽에 부딪쳤다.

“음?”

“헉.”

어떻게 이렇게 한 번에. 온기현이 놀라서 입을 벌렸다.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떨어져 날아갔다.

“진짜 이게 게임이라고?”

“어? 아, 어. 너 마셔야 해. 너 졌으니까. 이거 떨어지면 지는 거니까.”

연한 노란색 액체가 든 컵을 들이밀었다. 개총에서도 생각했지만 류주호는 술이 센 편이었다. 이것 가지고는 취하지 않을 것 같았다. 류주호는 별말 없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은근하게 미소 지으며 온기현의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나 취하게 해서 어쩌려고?”

요망하게.

“뭐? 아닌데? 너 취하게 하려는 거 아닌데. 너 게임에서 져서 마시는 거야.”

극구 부정했지만 류주호는 알았다고 웃으며 얼른 마시라고 눈빛으로 보채는 온기현을 응시하며 가득 찬 액체를 원샷했다.

그 뒤로는 온기현의 온갖 유치한 술수의 향연이었다. 둘이서 할 수 있는 게임 이것저것을 들이댔고, 류주호는 거짓 규칙에 속아 번번이 패배했다. 그때마다 류주호는 내리 원샷을 했고, 그에게 내밀어지는 술의 색깔이 점점 투명하게 변해 갔다.

그가 지는 모습은 희귀한 장면이었다. 그러다 보니 괜히 흥이 올라 저도 모르게 계속해서 그에게 술을 내밀었다. 류주호는 이제 게임이 없어도 그냥 온기현이 주는 족족 목구멍에 술을 쏟아부었다.

“음…….”

“……괜찮아?”

류주호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손으로 얼굴을 뒤덮은 상태로 긁는 듯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너무 많이 먹였나. 온기현이 조심스레 류주호 곁으로 엉덩이를 끌어 다가갔다.

“주호야.”

“으음…….”

“내 말 들려?”

“응…….”

대답인지 신음인지 모호한 음성이긴 했지만, 온기현이 거는 말에 족족 대꾸해 오는 걸 보니 물어볼 여지는 있을 것 같았다. 조금 심술이 돋은 탓인지 이렇게 녹다운된 모습을 보니 조금 웃기기도 했다. 이런 모습을 또 언제 볼 수 있을까. 킥킥하고 작게 웃은 온기현이 조금 더 바싹 다가와 붙었다. 고개 숙인 남자를 향한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됐다.

“너 이름이 뭐야?”

“나……, 이름? ……류주호.”

오. 이름은 똑바로 말하네. 제 웃음 때문에 그가 술이 깰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입술을 안으로 꾹 말아 물었다.

“음. 그럼 너, 여기 어딘지 알아?”

“여기……? 여기……. 우리 집.”

우리 집.

아까도 전화로 그렇게 말했었다. 듣는 순간 어쩐지 귓가가 뜨거워질 법한 그런 단어였다. 비실비실 웃음이 샜다. 어느 정도 오늘 일에 대한 기억도 남아 있는 것 같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심문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럼 너…….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없어? 비밀 같은 거.”

“…….”

어라. 갑자기 말이 끊겼다. 자나? 손바닥을 펼쳐 류주호의 얼굴 앞쪽으로 휘휘 내저었다. 그때 류주호가 숙였던 고개를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올리브빛이 감도는 갈색 눈동자가 빤하게 저를 응시해 와서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있어.”

류주호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기울이며 씨익 웃었다. 위험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었다. 온기현이 당황하여 침을 꼴깍 삼켰다.

“뭐, 뭔데?”

“내가 온기현을…….”

“응응.”

온기현이 고개를 잘게 끄덕였다. 대답을 기다리는데 류주호가 커다란 상체를 기현 쪽으로 기울여 왔다. 얼결에 돌덩이같이 단단한 몸을 팔로 받치자, 류주호가 훗,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입술이 벌어졌다.

“너무, ……너무. 사랑하는 거.”

“어엉?”

뭐야, 그게. 그게 왜 비밀인데? 고개를 갸웃거린 온기현의 미간이 불만족스러운 듯 좁아졌다. 질문이 잘못됐나. 어제의 기이했던 류주호의 행동에 관해 장난 반 진심 반이긴 하지만 캐묻고 싶었는데, 이게 아닌데 싶었다. 차라리 직설적으로 물어볼까.

“아니, 아니. 그러면 너. 어제는 왜 그랬어?”

“어제?”

나른한 숨소리가 목덜미에 와서 닿는다. 오스스 돋는 소름에 온기현이 어깨를 움츠렸다.

“응. 어제 침대 위에서……. 너 좀 이상했잖아.”

“……침대……. 하.”

류주호가 뭔가를 떠올린 듯 실소했다. 그게 어쩐지 좀 소름 돋고 오싹했다. 여전히 온기현의 몸을 짓누르다시피 상체를 기대 온 채다.

좀 떨어져서 얘기해. 끄응, 하고 그를 조금 밀어 대며 들어 올렸다. 하지만 꿈쩍도 안 하던 몸이 그대로 온기현을 결박했다. 온기현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눈높이가 수평으로 맞으며 코앞으로 다가온 서늘한 표정의 류주호를 뜬 눈으로 바라봤다.

“네가……. 나 먹버하려고 한 거?”

“……뭐?”

“맞잖아. 옛날처럼. 처음에, 맨 처음처럼……. 얼굴도 안 보여 주고.”

“너 무슨 소리야?”

영문 모를 소리에 눈살을 찌푸린 온기현이 으윽, 하고 목 막힌 소리를 냈다. 고개를 휙 돌리고는 몸을 떨어트리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류주호는 그럴수록 더욱 바짝 붙어 왔다.

“뒤로 하고 싶었어?”

“아…….”

“뒤로 해 달라며. 처음에 네가 도망갔던 때처럼. 맞지.”

“아, 아니.”

입을 벙긋거렸다. 류주호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갑자기 돌변한 눈빛에 약간 겁까지 났다.

“난, 그게 아니라. 그냥, 그때는 내가…….”

당황한 탓에 횡설수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래.”

류주호가 입술을 귓가로 가까이 붙이며 속삭였다.

“정 그러면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게.”

“……아!”

“뒤돌아.”

“야, 잠깐만. 그만 마시자. 그냥 내일 얘기하자. 응? 아……!”

만류하는 온기현의 말은 귀를 할짝 핥는 느닷없는 동작에 의해 가로막혔다. 허리께에 전율이 일었다.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호흡을 가다듬을 새도 없었다. 발을 버둥거리자 단숨에 발목이 붙잡혔다. 그리고 앗, 하는 사이에 몸이 빙글 뒤로 돌려졌다.

바닥에 엎드린 자세가 된 온기현의 눈이 공중에서 흔들렸다.

머리가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눈 깜짝할 새에 연달아 일어나자 온기현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포박당한 개구리처럼 팔다리만 버둥거렸다.

“주호야. 잠깐……!”

“응. 듣고 있어.”

목소리는 술에 취한 사람 같지 않게 평연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외려 너무 단조로워서 비정상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하며 고개를 뒤로 돌리자 커다란 손에 의해 목덜미가 잡혔다. 류주호가 입술을 부드럽게 물어 왔다.

“음, 흐!”

젖은 소리가 났다. 등 뒤에서 엄청난 무게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류주호가 상체를 숙인 채로 혀를 내밀어 한껏 목을 젖히고 있는 온기현의 입술을 핥았다. 절로 벌어진 입술 틈 사이로 살덩이가 끄트머리를 집어넣었다가 다시 표피를 간지럽히기를 반복했다. 괜히 안타까웠다. 혀를 섞고 입 안에서 질척하게 녹아드는 쾌감을 아는 몸이 자꾸만 움칠거렸다.

밭은 숨을 내쉰 온기현의 허리가 잘게 떨렸다. 머릿속이 척척하게 젖어 들었다. 자꾸 감질나게 핥아 오는 동작에 외려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입술을 더욱 벌리고 혀를 빼꼼 내밀었다.

하지만 온기현이 원하는 행위는 이어지지 않았다. 발그레한 얼굴로 입을 벌리고 혀를 내민 온기현을 빤히 보는 류주호의 눈빛에 음험함이 감돌았다. 류주호가 상체를 훅 일으켰다. 그러고는.

“아!”

온기현의 하의를 한꺼번에 아래로 벗겨 냈다. 발목에 걸쳐진 하의 탓에 양손으로 바닥을 짚은 자세로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야, 너 진짜 왜 이래! 이거 놔 봐. 응?”

몸이 부자유스러운 어색함과 갑갑함에 항의를 해도 들려오는 말은 없었다. 불현듯 뒤에 바투 붙어 있던 무게감이 훅 가벼워졌다. 그가 상체를 올리며 몸을 뒤로 물린 까닭이다. 이때를 틈타 무릎을 세워 바닥을 짚으며 앞으로 기어갔다. 아니, 기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 몸짓은 허리를 손바닥으로 꾹 누른 동작으로 인해 삽시에 제압당했다. 그 바람에 엉덩이는 위로 치켜들고 상체는 바닥에 딱 붙은 자세가 됐다. 비부가 외기에 노출됐다. 헉, 하고 입이 벌어졌다. 버클이 풀리는 소리와 지퍼가 지익, 하고 열리는 소리. 그리고 나른한 한숨이 동시에 들렸다.

“주호야…….”

“하아……. 내가 이러길 바랐던 거지. ……응? 내가 이렇게 너한테, 뒤에서 개처럼 박아 주길. 그리고 너는…….”

“아……!”

허리를 양쪽에서 그러잡혀 거센 악력으로 끌려갔다. 팔이 바닥을 긁는 것처럼 앞으로 펴졌다.

“나한테 볼일 끝난 것처럼……. 그렇게 가 버리고…….”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보려고 해도 꾹 누르고 있는 손힘 탓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너 지금 무, 흐읏……!”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데! 하고 말하려던 찰나, 말캉한 둔부 한쪽에 뜨거운 것이 맞닿았다. 몸을 부르르 떨 정도로 후텁지근하고 축축한 살덩이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온기현의 얼굴이 빠르게 달아올랐다. 류주호가 제 성기로 탱탱하게 올라붙은 살의 가운데를 표면으로 슥슥 느릿하게 비벼 댔다. 쓰다듬는 것에 가까웠다. 이미 선단에서 흐른 액체로 인해 귀두가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액체를 펴 바르듯 온기현의 엉덩이에 좆을 비벼 대다가, 종내에는 살이 눌리도록 귀두로 엉덩이를 푹 찌르기도 했다.

“주호야. 나 이것 좀 잠깐……. 놔 봐. 숙취 해소제 사 올게. 응?”

“……어딜 가려고.”

“잠깐…… 흣, 밑에 편의점에, 흐악!”

아래에서부터 저릿한 전율이 올랐다. 류주호가 성기를 이용해 엉덩이를 철썩 내려쳤다. 이미 딱딱할 대로 딱딱해진 묵직한 성기가 주는 타격감에 온기현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너, 무, 뭐 하는……. 아!”

철썩.

뿌리 부근을 잡고 한 번 더 내려치자 온기현이 허리를 잘게 떨었다.

욕을 뇌까린 류주호가 엄지를 이용해 엉덩이 골을 한쪽으로 벌렸다. 아까부터 얕게 개폐를 반복하고 있던 구멍의 꽉 다물린 입구가 좌우로 길게 벌어졌다. 그에 새빨간 점막이 설핏 고개를 내밀다가 안으로 숨기를 반복했다.

“씹…….”

또다시 낮게 읊조린 짓씹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온기현이 손바닥으로 바닥을 탁탁 쳤다. 술에 취한 류주호의 모습이 어이없고 당황스러웠다. 왜 저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무섭지는 않았다. 약간의 흥분이 조금씩 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그런 저의 반응이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아래를 한참 내려다보던 류주호가 제 성기 끝을 살짝 벌어진 틈 사이로 가져갔다. 곧바로 꿰뚫릴 것 같은 느낌에 잠시 어깨를 떨었지만, 그는 쿨쩍쿨쩍 소리가 나도록 자신의 체액을 그곳이 덧바르고 있었다.

“넣고 싶어…….”

넣을래. 넣고 싶어. 넣고 싶어…….

허리를 튀기듯 귀두로 구멍을 살살 찌르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소리는 목구멍을 사포로 득득 긁는 듯 거칠기 짝이 없었다. 중심을 맞추지 못해 음부의 여기저기를 찌르는 탓에, 아래가 순식간에 희멀건 체액으로 지저분해져 갔다.

몇 번이나 넣고 싶다고 반복하는 중얼거림에 온기현은 오싹함을 느꼈다. 저도 한 캔을 다 비운 알딸딸한 취기가 이제야 올라오는지, 구멍의 주름만 젖어 가는 느낌에 어쩐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탁탁. 뒤로 뻗은 팔이 바닥을 치다가 제 아래로 손을 내렸다.

당장 자극이 필요한 빳빳하게 올라붙은 성기를 지나친 손이 샅 아래쪽으로 더욱 내려갔다. 아니, 한껏 치켜든 둔부로 인해 손을 위로 뻗는 꼴이 됐다. 그리고 그 상태로 온기현이 손가락을 사용해 제 구멍을 어색하게 쓸어 댔다. 취한 류주호 대신에 제가 아래를 풀려 했다. 이대로 넣어 줬으면 싶었지만…….

“흣…….”

자꾸만 여기저기를 찔러 오는 귀두를 부드럽게 쓰다듬듯이 손가락으로 약간 옆으로 젖히고는, 제 구멍 안으로 검지 한 마디 정도를 조심스레 찔러 넣었다. 뜨끈한 점막이 손가락을 차지게 휘감았다. 약간의 이물감만 느껴질 뿐, 불편한 느낌은 없었다. 훨씬 더 굵고 큰 것을 물고 내벽이 잔뜩 비벼지는 쾌감을 알고 있는 몸이, 더욱 강한 자극을 원하는지 연신 구멍을 빠끔거렸다.

“…….”

“음……. 흣…….”

끈적한 액체로 이미 죄 젖어 있는 터라 윤활제를 따로 쓰지 않아도 되었다. 한 마디 들어갔던 검지를 뺐다가 넣었다가를 반복했다. 아래가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흑…….”

입에서 앓는 소리가 터져 입술을 꽉 물었다. 쿨쩍, 찌걱. 느릿하게 아래를 출입하는 소리만이 울렸다. 저도 모르게 열중한 탓인지 입이 헤벌어졌다. 한참을 그렇게 스스로 아래를 풀다가 문득 게슴츠레 풀린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갑자기 뒤에 선 이가 조용했다.

빡빡한 구멍에 넣었던 손가락 두 개를 빼내어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상체를 지탱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다.

‘어…….’

류주호는 무릎으로 서서는 어깨를 축 내린 상태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앞머리가 시야를 가린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이 행위를 즐기고 있거나, 적극적으로 뭔가 하려는 태도는 결코 아니었다.

‘왜 이러지……? 자나……?’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주춤거리며 조금씩 몸을 움직여 무릎을 받치고 상체를 일으켰다. 가까이 다가가자 류주호는 정말로 앉아서 자는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주호야.”

“…….”

“류주호. 너, 너 괜찮아……?”

“…….”

놀란 눈을 한 온기현이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류주호의 팔을 살며시 잡았다. 몸이 움찔했다. 그러고는 그의 널따란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온기현이 깜짝 놀라서 손을 떼어 냈다. 하지만 미처 몸을 물릴 새도 없이 손목이 덥석 잡혔다.

“너 왜 그래……? 어?”

“하…….”

가쁘고 거친 숨을 내쉬며 손으로 얼굴을 뒤덮었다. 뭐, 뭐지? 우나? 싶어서 깜짝 놀란 온기현이 몸을 가까이해서 얼굴을 살폈다. 류주호가 고개를 들며 손을 떨어트렸다. 가느다랗게 빛나는 갈색 눈동자가 저를 뚫어질 듯 응시했다. 괴로운 듯 찡그려진 미간. 메마른 것 같으면서도 축축한 눈동자.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윽고 그의 입이 열렸다.

“……뒤로 하기 싫어…….”

“어……?”

“그러면 너…….”

“…….”

“갈 거잖아. 나 버리고, 떠나 버릴 거잖아, 넌…….”

“……어?”

“옛날처럼. 너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갈 거잖아.”

“아, 아니…….”

온기현이 도리질을 치며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류주호가 조용하게 말을 이었다.

“나, 씨발……. 딜도로 쓰려고…….”

“……아.”

그제야 작금의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처음 둘이 섹스했을 때의 이야기인 거다. 그때 온기현은 그냥 한번 자고 말겠다는 심정으로 류주호를 찾아가서 딱 한 번 몸을 섞고는 그대로 그의 집을 빠져나왔다. 그때도 류주호가 그랬었다. 딜도로 쓰려고 했냐고.

입을 멍하니 벌렸다. 지금 술에 취해 뱉는 고백이, 류주호가 숨겨 왔던 일인 것이다.

그래서……. 헐.

온기현이 손으로 입을 덮었다. 저도 모르게 놀란 탄성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상황을 파악한 온기현이 류주호의 모습을 빠짐없이 살폈다. 두껍고 널따란 어깨가 아래로 축 늘어지고, 갑옷처럼 조밀하게 짜인 탄탄한 근육이 얕게 실룩거린다. 그리고 결 좋은 앞머리는 어쩐지 힘없이 풀 죽은 채로 늘어져 있다.

온기현의 눈이 초롱초롱 반짝였다. 이 누구나 인정할 완벽한 남자가, 갑자기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신기하기도 했다. 과거의 그 어떠한 일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제 갈 길만 갈 것 같던 남자가 이렇듯 자신이 했던 충동적인 행동으로 인해 아직도 그게 트라우마로 남아 억지를 부리는 게. 그리고 동시에 조금 놀리고 싶은 마음이 불쑥 샘솟았다. 안쓰러움과 유쾌함 두 가지의 양가적인 감정으로 온기현이 되도록 심술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한 번도 뒤로 안 한 거야?”

“……뒤로 하기 싫어…….”

“헐…….”

‘귀여워.’

자꾸 웃음이 터지려는 걸 손으로 막았다. 미쳤다. 류주호가 귀엽다니. 이 남자를 귀엽게 느끼는 날이 오다니. 온기현 미쳤나 봐. 아니, 근데 귀여워. 풀이 죽어 커다란 어깨를 축 늘어트린 모습을 빼곡하게 눈에 담았다.

온기현이 입술을 말아 물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다독였다.

“괜찮아, 주호야. 어…….”

말을 고르던 온기현이 류주호의 손을 끌어 제 손과 깍지를 끼고는 맞잡았다.

“나 어디에도 안 가.”

“…….”

“나는, 이제 어디에도 안 가니까. 난 너랑, 하고 싶은 거 다 할 거야. 너도 하고 싶은 거 다 나한테 해도 되고, 나도 그렇고.”

진심이었다. 우리의 뒤에도, 그리고 앞에도, 둘 사이에는 그 어떤 거리낌도 존재하지 않았으면 했다. 하물며, 이런 고민 같은 건, 류주호가 전혀 하지 않아도 될 종류의 것이었다. 왜냐하면, 온기현은 류주호를 절대로 떠나지 않을 거니까.

“……거짓말.”

“진짜야. 나 네가 가라고 하지 않는 이상 너한테 껌딱지처럼 붙어 있을 건데.”

다독이듯 말하며 류주호의 어깨에 손을 가져다 댔다. 탈의한 상체의 미지근하고 부드럽고 단단한 외피를 더듬더듬 쓰다듬었다. 류주호가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깊이 침잠하여 암갈색으로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그 눈을 하염없이 보다가 아래를 슬쩍 내려다봤다. 그의 성기는 여전히 엄청난 무게감을 자랑하며 선단이 질척하게 젖은 채로 공중에 꺼떡이고 있었다. 눈가가 달아올랐다. 꿀꺽, 목구멍으로 침을 삼키며 그곳으로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커다란 몸이 움찔 튀었다. 그건 온기현도 마찬가지였다. 생각보다 너무 뜨거웠다. 깜짝 놀랄 정도로 맹렬한 기운을 내뿜는 그것은 감히 흉기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랗고 위협적인 형상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그것을 아래위로 문지르며 비벼 댔다.

“온기현……. 아…….”

뜨거운 숨과 닮은 거친 신음이 귓가에 고였다. 쿵, 쿵.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제 손바닥 안에서 맥동하는 성기와 닮은 고동이 제 안에서도 크게 울렸다.

이 남자가 사랑스러웠다.

류주호가 사랑스럽고, 또…….

류주호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바라 마지않던, 아니, 꿈에서조차 기대하지 않았던 커다란 마음을 저에게 부딪쳐 오는 류주호는,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마냥 빛나기만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더욱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이제야 류주호를 제대로 알게 되고, 진정한 관계로 거듭나는 기분이었다.

류주호가 나를 사랑한다. 류주호가 나를…….

“주호야, 나는……. 우리 사이에 벽 있는 거 싫어. 마음 가는 대로 다 하고 싶어.”

제 윗옷을 벗고 발목 부근에 걸쳐져 있던 하의를 발치로 내려 벗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상태로 무릎으로 걸어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류주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왜냐하면…… 우린 애인 사이니까.”

크게 뜨인 눈이 온기현을 올곧은 시선으로 응시했다. 가라앉았던 눈에 온기가 스미는 순간이 선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목격하는 희열이란, 머리가 핑 돌 정도로 아찔했다.

손바닥에 전부 들어차지 않을 정도로 커다랗게 부푼 성기가 델 듯 뜨거웠다. 울퉁불퉁 성이 난 핏줄이 손바닥의 여린 살에 맞닿을 때마다 꿈틀거렸다. 절로 몸이 뜨거워졌다. 안쪽이 아플 정도로 욱신거렸다. 어설픈 손길로 쓰다듬으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니까. 나 이걸로, 어? 막, 해 줘. 어?”

어설픈 유혹이었다. 제 입으로 뭘 어떻게 해 달라 구체적으로 담는 것조차 쑥스러워서 음절이 뚝뚝 끊어졌다.

“정말이야……?”

류주호의 흰자에 핏발이 선 듯 언뜻 새빨갛게 불이 피어오른 것처럼 보였다. 은근하게 몸을 기대던 온기현이 “어…….” 하고 입을 벌리며 눈을 깜빡였다.

“너 정말,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안 갈 거야……?”

끝까지 확인받으려 하는 불안한 말에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아……!”

동시에 커다란 손이 온기현의 엉덩이를 짓이길 듯이 틀어잡았다. 그리고 얼얼하다고 느낄 정도로 마구 주물러대더니 둔부를 양쪽으로 잡고 크게 벌렸다.

“뒤……돌아.”

“……응.”

명령조에 순순히 대답했다. 자동적으로 몸에 열띤 흥분이 찾아왔다. 기현이 주춤거리며 어색하게 뒤돌고는 뒤를 흘끗흘끗 쳐다보며 손바닥과 무릎으로 바닥을 짚어 몸을 지탱했다.

“엉덩이 더 벌려.”

“……응.”

목구멍을 긁는 낮은 소리였다. 손을 뒤로 돌리려면 상체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절로 들린 엉덩이 살을 한쪽 손으로 벌리며 어깨 너머로 시선을 보냈다. 창피한데, 라고 생각하던 찰나, 후끈한 습기가 훅 끼쳤다.

“하읏!”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저릿한 전율이 일었다. 내심 예상했던 상황임에도, 평소와 다른 미칠 듯한 흥분이 전신을 감쌌다.

춥, 흐읍, 추웁. 지저분하고 난잡한 소리가 났다. 아래를 거침없이 빨아 대는 류주호의 입에서 나는 소리였다. 제 손을 덮으며 우악스럽게 살을 벌린 류주호가 엉덩이에 코를 처박고 게걸스럽게 빨고 핥아 댔다.

이 행위에는 진작 면역이 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오늘따라 더욱 집요하고 거침이 없었다. 뒤로 빨리는 건 처음이라 그런지.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지. 어쩐지 감도도 더 예민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으으…….”

뜨거운 혀가 무자비하게 안을 짓쳐들어왔다. 그럴 리 없는데도, 내벽 안쪽까지 침범해 올 것 같은 느낌까지 들 정도로 험하게 빨아 댔다. 하지만 그런 일말의 두려움과는 달리, 허리는 계속해서 움찔거리며 흔들렸다. 젖은 소리가 나는 박자에 맞춰서 흔들리던 허리에, 결국 혀의 삽입에 따라 동작을 맞추는 꼴이 됐다.

아래가 눅진하게 풀어졌다. 타액과 함께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미칠 것 같았다. 미칠 듯이 좋았다.

한창 방탕하게 신음을 흘리던 때, 축축한 열기가 확 멀어졌다. 그리고 곧이어 굵은 손가락 두 개가 느닷없이 구멍을 벌리며 안으로 퍽, 소리가 나도록 깊게 들어왔다.

“아! 아, 흐읏, 아, 아아!”

손가락이 안을 찧듯이 빠르게 움직였다. 놀라서 뒤가 수축했다. 하지만 금세 빠끔거리며 손가락을 꼭꼭 씹어 물었다.

가위처럼 벌리고, 내벽을 문지르고. 또다시 깊숙이 쑤셔 넣고. 잘게 흔들고.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안에서 험하게 놀던 손가락이 어느새 중량감을 더했다.

공간을 채운 척척한 소리가 외설스럽기 짝이 없었다. 물이 많다는 말을 이제 부정할 수도 없었다. 제가 느끼기에도 몸 안쪽에서부터 축축하게 젖어 가는 것이 확연했다. 이미 온기현의 성기는 뒤를 손가락으로 잘게 쑤셔 준 것만으로도 바닥이 흠뻑 젖을 정도로 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엉덩이 들어.”

시키는 대로 엉덩이를 더 치켜들었다. 눈이 흐리멍덩하게 풀렸다. 바닥을 겨우 짚은 손이 부르르 떨렸다. 안을 채웠던 손가락이 훅 빠져나가며 순식간에 비어 버린 공간이 허전했다. 새빨갛게 빠끔거리는 점막이 훤히 보이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갑작스럽게 닿는 외기가 보이지 않아도 느껴졌다. 하지만 미처 인식할 새도 없었다.

뭉툭한 귀두가 구멍을 거칠게 지분거렸다. 손으로 받친 성기를 이용하며 허리를 튕기기도 했다. 부러 추접스럽게 움직이는 듯도 했고, 비로소 이게 제 본심이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둔부 전체에 체액을 치덕치덕 바르더니, 감당 못 할 민망함에 허리가 내려갈 때쯤 그것이 대뜸 입구를 벌려 왔다.

“아……!”

동시에 허리가 잡혔다. 즈즉, 즈윽. 허리가 악력으로 인해 고정된 상태로 내벽이 천천히 짓이겨졌다. 기현이 입을 벌렸다. 등줄기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너무 느렸다. 빠르게 진입해 오는 것보다 느린 게 더욱 참을 수 없었다. 빈틈 없이 안을 가득 채우는 중량감이 더욱 선연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외려, 감질났다. 더 가렵고 자극이 필요한 곳까지 꽉 채워 줬으면 좋겠다는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의 음탕한 생각이 뇌리를 지배했다.

“크, 윽…….”

류주호는 이를 빠득 갈고 짓씹으며 안으로 허리를 이용해 진입했다. 그러고는 중간까지 삽입한 채로 마른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성기를 끝까지 처넣었다.

“학……! 으, 아……!”

“아…….”

나직한 탄성이 터졌다. 온기현의 목이 뒤로 젖혀졌다. 그리고 놀랄 새도 없이 거친 추삽질이 시작됐다.

철벅! 하고 엉덩이에 치골이 부딪쳤다. 내장까지 찌르르 울릴 정도의 진동이었다. 허리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속절없이 신음을 내질렀다. 엉치뼈가 아릿할 정도의 거센 동작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허리를 주욱 뒤로 뺐다가 다시금 맨살을 철썩하고 때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쳐 올렸다. 바투 올라 단단해진 고환이 엉덩이에 부딪혀 축축한 살갗 사이에서 마구 뭉개질 정도였다.

“윽, 아, 으, 흑, 읏!”

뒤에서 가격하는 과격한 박자에 따라 괴상한 소리가 끊어지듯 터졌다. 류주호의 움직임에는 일절 망설임이 없었다. 마치 무언가에 뇌가 절여져, 머릿속이 섹스로만 가득 찬 사람처럼 이 난잡스러운 행위에 열중했다.

온몸이 딱딱한 벽에 부딪히는 것 같은 충격이 연이어졌다. 아기 팔뚝 굵기의 흉흉한 성기가 뒤에서부터 빠른 속도로 몸을 꿰뚫었다.

“하윽, 으, 흑, 아, 흐아……!”

허리를 잡혀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에서 고개를 젖혔다.

“기현아. 아, 온기현…….”

류주호는 중얼거리듯이 애틋하게도 이름을 불렀다. 억제할 수 없는 애정과 욕심이 나직한 호명에 전부 깃들어 있었다. 그러고는 엄지를 이용해 커다란 성기가 들락거려 잔뜩 부어 벌어져 있는 곳을 관찰하듯이 덧그렸다. 하얀 살갗과 선홍빛 점막의 색 대조가 두드러졌다. 검붉은 성기를 쉼 없이 쑤시면서도 묽은 액체들로 인해 음모와 살갗이 지저분하게 붙었다가 엉겨서 떨어지는 모양을 심취한 눈으로 쳐다봤다.

계속해서 안을 때리는 충격에 온기현이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가듯이 양팔을 뻗었다. 그러자, 기민하게 알아챈 류주호가 대뜸 팔을 그러쥐더니 뒤로 잡아당겼다. 어깻죽지가 빠듯하게 뒤로 접혔다. 헉, 하고 밭은 숨을 뱉으며 뒤로 시선을 던지려던 때, 몸이 다시금 격하게 흔들렸다.

“아으……! 아……! 아흑……!”

다른 쪽 팔도 잡혔다. 양팔이 붙들린 채 뒤로 끌려가다시피 당겨졌다. 견갑골이 튀어나올 듯 도드라지며 절로 허리가 아래로 휘었다.

이거, 이거 너무……!

입에서 침이 주르륵 흐르는 것도 몰랐다. 팔이 뒤로 당겨지는 반동에 의해 접합부가 더욱 깊숙이 맞물렸다. 류주호가 뒤에서부터 허리를 치켜올릴수록 찌걱거리는 소리가 심하게 났다. 등줄기를 굳힌 채 바르르 떨었다. 그때 커다란 몸이 등 뒤를 덮쳤다. 팔 한쪽의 악력이 스르르 풀리며 머리채가 잡혔다. 아니, 땀에 젖은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휘감겼다. 그에 저항 없이 고개를 돌리자 입술이 덮쳐졌다. 빠듯한 자세로 뒤를 뚫리고 입 안이 범해지자 몸이 심하게 꺾였다. 그런데도 류주호는 그저 아래위를 미친 듯이 흔들고, 빨고, 씹어 댈 뿐이었다.

“흡, 흑, 쭙, 흑……!”

아릿한 쾌감이 끊이지 않았다. 버겁다고 생각했는데 제 온몸이 척척했다. 허리가 절로 흔들릴 정도로 쾌감의 파도에 삼켜져 버린 기현이 훌쩍거리며 울면서도 혀를 내밀어 기꺼이 키스를 맞았다.

“하아……, 아. 기현아…….”

그건 아마도 자꾸만 저를 불러 대는 류주호의 음성 때문인지도 몰랐다. 사랑해서 안타깝고, 또 계속해서 저랑 접붙은 몸뚱이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그런 절절한 마음이 오롯이 느껴졌다.

온기현을 사랑하는 류주호의 마음이 전신을 뒤흔들었다.

“아흡, 흐응, 흐읍, 아!”

불시에 상체가 들렸다. 푸른 핏줄이 돋은 두 팔이 온기현의 가슴 앞을 압박하듯 끌어안고는 위로 들었다. 놀라서 지탱할 바닥을 잃은 팔을 버둥거렸다. 땀에 젖은 등과 마찬가지로 뜨겁고 단단한 가슴팍이 맞붙었다. 그대로 격렬한 피스톤질이 재개됐다.

상체를 결박당한 채로 아래가 들쑤셔졌다. 돌덩이같이 딴딴한 류주호의 허벅지가 둘의 무게를 지탱했다.

철퍽! 퍽! 철벅!

물먹은 솜덩이를 내려치는 소리가 났다. 끈적한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은 류주호가 앞니로 살을 갉작거리며 진득하게 코로 살 내음을 흡입했다.

“아……. 달아. 너 너무 달아. 사람이 어떻게 이래……. 응?”

……바나나 먹고 있는 거 같아.

의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린 류주호가 더욱 깊숙이 성기를 처넣고는 마구 들쑤셨다.

“나만 먹어야……. 나만…….”

“앗, 아, 안, 안 대……! 아, 흐아아……!”

머리털이 쭈뼛 서는 쾌감에 온기현이 몹시 놀라 버둥거리다 뒤로 뻗어 닿는 류주호의 허벅지를 손톱으로 짓눌렀다. 그가 아플지도 모른다는 생각보다 당장의 무섬증이 더 급했다. 하지만 류주호도 외려 아랑곳하지 않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허리를 놀려 댔다. 손톱으로 득득 허벅지를 긁은 탓에 손톱에 피가 맺혔다.

상체가 완전히 들렸다. 그에 눈물에 흠뻑 젖은 얼굴을 들자, 베란다 바깥으로 새까만 밤하늘이 보이며 내부와 바깥 사이의 투명한 유리로 육중한 체구에 갇힌 채 들썩이는 몸이 보였다.

어깨에 이를 박아 넣은 이의 머리와 이마가 창에 비쳤다.

“흐윽……!”

온몸이 새빨개진 채 울음을 터트린 온기현이 몸부림쳤다. 어디랄 곳 없이 찧어 대는 성기가 더욱 크게 부풀었다. 동시에, 팔짝 몸이 튀었다. 가장 예민한 부근을 아예 작정한 듯 성기가 비벼 대기 시작했다.

“아, 안, 흐, 아냐……!”

입에서 무슨 소리가 튀어 나가는지도 몰랐다. 거대한 쾌감의 파도가 금방이라도 몰아칠 것 같았다. 익숙한 듯, 생경한 감각이 마구잡이로 섞여 터질 것 같았다. 그때 류주호가 무자비하게 박아 대는 아래에 맞춰 온기현의 성기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힘껏 조였다.

“싫, 아……!”

눈이 크게 뜨였다. 온몸에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극치의 무언가가 온기현을 덮쳤다. 심하게 헐떡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손발이 이상한 모양으로 굽었다.

“아, 흐, 헉, 나, 나아, 나와……! 아, 아아아……!”

여린 짐승의 울부짖음과 같은 비명이 목구멍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촤악. 요도구에서 엄청난 양의 액체가 터져 나왔다. 푸슉. 퓻, 푸슉. 그것은 끊임없이 바닥을 적시며 여기저기 커다란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이제 막 이사한 새로운 공간에 새롭게 장만한 깨끗한 가구에도 물이 마구잡이로 튀었다.

시야가 뒤집혔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가느다랗게 뜬 온기현의 결후가 부르르 떨렸다. 류주호는 온기현의 상태를 유심히 살피더니 입술로 얼굴 여기저기에 키스를 퍼부었다.

눈물 젖은 뺨도 빠짐없이 핥아 댔다. 진짜로 개 같았다. 개처럼 박는다더니, 완전 짐승 같은 몸놀림이었다.

그제야 온기현은 흐릿한 의식 속에서, 괜히 하자고 했나 하고 뒤늦게 후회했다. 은근하게 유혹하던 아까는 이렇게까지 힘겨울 줄 꿈에도 몰랐다.

제대로 몸을 가눌 수도 없는 상황에서 뻑적지근한 몸이 사정감의 여운에 계속해서 떨렸다.

류주호는 후희를 즐기려는 건지, 위로를 하려는 건지, 그런 온기현을 꽉 끌어안고는 머리를 쓰다듬고 사랑스럽다는 듯 연신 귓바퀴와 목덜미를 쪽쪽거렸다. 그것마저 서럽고 거추장스러워서 도리질을 쳐서 피했다.

“아…….”

류주호가 허리를 뒤로 물리자 쿨쩍쿨쩍, 하는 소리가 났다. 언제 싸질렀는지 내부가 눅눅하게 절여져 있었다. 끈적한 점액질이 접합부의 틈새로 비집고 주르륵 새어 나왔다.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정액과 제가 싼 물웅덩이를 보며 온기현이 울먹거렸다.

“흑……. 막 이사했는데…….”

“괜찮아. 어차피 언젠간 젖을 거였어.”

마치 거실에서의 섹스는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듯 태연하게 대꾸하는 류주호의 허벅지를 퍽 내려쳤다.

“아.”

“……아……, 아파……?”

작은 탄성에 온기현이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그에 맞춰 류주호가 가볍게 입술에 키스했다. 잠깐의 기회도 놓치지 않는 그였다. 이제 술이 다 깬 듯 평상시의 눈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응, 조금.”

“어떡해…….”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류주호가 온기현을 뒤에서부터 안아 들었다. 또래의 남성을 번쩍 들어 올리는 류주호의 체력과 팔 힘이 경악스러웠다.

“아, 뭐, 뭐 해……!”

“침대로 가자.”

나지막이 속삭인 류주호가 성큼성큼 걸어 침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부터 둘이 함께 자고 일어날 공간이었다. 괜히 심장이 펄떡거렸다.

“음……!”

뒤통수를 받치고는 얼굴을 돌려 입술을 비볐다. 젖은 몸이 말라 한기를 느낄 새도 없었다. 질척이며 혀를 섞는 류주호의 몸짓에 온기현도 입을 벌려 응했다.

등 뒤로 푹신한 침구가 온기현을 부드럽게 감쌌고 삐걱이는 스프링 소리 하나 없이 두 사람의 체중을 매트리스가 단단하게 지탱했다.

“하아…….”

컴컴한 방 안. 천장이 보이고 류주호의 얼굴이 보였다.

“주호야…….”

이름을 부르자 류주호가 대답 대신 머리를 쓸어 주었다. 몸은 녹초가 되었는데도 자꾸만 끌어안고 싶었다.

“허벅지, 봐 봐.”

“괜찮아.”

“피 난 것 같았어.”

“피 나도 돼.”

다 해도 돼. 나한테 뭐든지 해도 돼, 너는.

그렇게 읊조리며 잠잠하게 저를 쳐다보는 시선이 기꺼워서 괜히 입매를 우그러트렸다. 쪽. 한 번 더 입술이 붙었다 떨어졌다. 류주호가 온기현의 오금을 팔뚝으로 받치며 커다랗게 벌렸다. 온기현은 그가 하는 대로 기진한 몸을 늘어트렸다. 하반신을 살짝 든 채로 커다란 성기가 벌어진 구멍으로 꿈틀거리며 들어왔다.

“흐으……. 쪽. 흣.”

쪽, 쪽.

류주호는 온기현의 예민한 곳이란 예민한 곳은 전부 건드렸다. 마치 온통 접붙어 있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사람처럼, 집요하게도 입술을 붙이고 아래를 바투 붙여 왔다.

“하, 좋아…….”

“……나도…….”

정상위의 장점은 눈을 바라볼 수 있다는 거다. 새록새록 피어나는 절정의 감각이 저 눈을 통해 온몸에 다시금 깊게 새겨지는 느낌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충만한 그 느낌이 있다.

두 다리를 전부 받쳐 올리고는 류주호가 다시금 스퍼트를 올렸다. 잔뜩 풀어져 넉넉할 법도 하건만, 아플 정도로 물어 오는 탓에 류주호가 미간을 찡그렸다.

손가락에 닿는 모든 곳을 쓰다듬듯이 애무했다. 온기현도 마찬가지였다. 흥분에 달아오른 서로의 몸을 기꺼이 탐했다. 이번에는 느리게 절정에 올랐다. 목울음과 함께 정액을 쏟아 냈다. 바르르 경련하며 입술을 깨물자 류주호가 혀를 내어 주었다. 그것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절박하게 쭉쭉 빨며 아래로는 배를 적셨다.

작은 입이 한껏 벌어졌다. 기특하게도 열심히 빠는 모습을 보며 류주호가 사납게 목을 울렸다.

몸을 내린 류주호는 마땅히 제 할 일이라는 것처럼 당연하게 온기현의 성기를 입에 물고 남은 정액까지 빨아 뒤처리를 해 줬다.

연이어 제 욕심을 채우듯 철썩철썩 아래를 무지근하게 비벼 대다가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내벽을 질척하게 적셨다.

코가 뭉개지도록 깊게 입술을 맞대었다. 결국 온기현이 몇 번이나 더 사정하기까지 이 느리고 진득한 행위는 끊이지 않았다. 종내에는 심하게 흔들리다 못해 눈물방울을 뚝뚝 떨구며 울먹였다.

가물거리는 눈을 하며 “이제 잘래…….”라는 말만 남기고 온기현이 몸을 축 늘어트렸다. 간간이 동그란 이마를 쓰다듬고 콧잔등 위의 점을 툭 건드리며 무어라 속살거리는 소리만이 새벽을 밝혔다.

“으…….”

칼칼한 목을 타고 쉰 소리가 났다. 작게 뒤척이자 등을 다독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잠결에도 전신이 뻑적지근하여 미간을 좁혔다. 흐으, 하고 꿍얼거리며 얕게 앓자, 이번에는 널따란 품이 바투 다가와 커다랗게 감쌌다.

“……아…….”

“더 자.”

낮고 깊은 목소리가 정수리 위에서 울렸다. 눈을 잘게 깜빡이다가 겨우 눈이 뜨였다. 익숙한 체취가 코 속으로 들이닥쳤다.

“지금 몇 시야?”

“일어날래?”

“응.”

고개를 끄덕였다. 겨드랑이 사이로 불쑥 끼운 팔이 상체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남자로서 자존심이 상하게도 힘이 너무 차이가 났다.

“야. 뭐 해. 그냥 내려줘…….”

작게 불퉁거리자 류주호가 온기현을 안은 채로 일으키며,

“싫어.”

단답식으로 대답했다.

“아, 진짜…….”

힘이 풀린 소리로 맥없이 항의하자 류주호가 부드럽게 웃음을 흘렸다. 침구를 새것으로 언제 갈았는지 몸이 닿는 곳곳이 보송하고 깨끗했다. 제 알몸도 마찬가지였다.

“씻을까.”

류주호의 말에 온기현이 응, 하고 대답했다. 제 발로 걷겠다고 해도, 축 늘어진 커다란 솜 인형을 안고 가듯이 자신이 손수 온기현을 욕실로 옮겨 줬다. 그리고 온기현의 얼굴을 미지근한 물로 닦아 주며, 심지어는 치약을 짠 칫솔로 이까지 닦아 줬다. 이 모든 일을 온기현이 어깨에 고개를 기대어 폭 안겨 있는 동안에 해내었다. 정확히는 억지로 안고서 해낸 일이었다.

“느 흔자 할 스 있드니끄…….”

치카치카 이를 닦아 주는데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직도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멍한 목소리였다. 사실 엉덩이도 아직 벌어진 느낌이 나서 걷거나 서 있기가 힘들긴 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수발을 받을 정도는 아닌데.

“물 가글하고. 뱉어. 응. 잘했다.”

“야. 내가 무슨……, 꼬맹이냐?”

말을 길게 하면 작게 기침이 터졌다. 어제 민망스럽게 하도 신음을 내질러서 그런 것 같았다.

“꼬맹이라니. 나처럼 너를 어른으로 대하는 사람이 어딨다고. 그런 짓은 어른끼리만 하는 거잖아.”

온기현이 입을 떡 벌렸다. 그런 짓, 이라는 게 어떤 걸 지칭하는지 절로 알아챘다. 민망함에 도리질을 쳤다. 미쳤나 봐, 류주호.

“진짜 내려 줘, 이제. 나 걸을 수 있다니까.”

“싫어.”

똑같이 반복하는 대답에 온기현이 발로 정강이를 가볍게 찼다. 사실 다리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아 거의 발가락으로만 툭 건드린 셈이었다.

“왜 그래, 진짜.”

“어제 약속했잖아.”

“뭘?”

“너한테 하고 싶은 거, 다 해도 된다고.”

“어? 야, 야……. 그건…….”

순식간에 온기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건 후배위를 지칭한 거였다. 아니 그것보다는, 인생에 있어서 일어날 여러 가지 복합적인 행위들, 특히 사랑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의 포용과 용인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싫다고 애처럼 굴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그건 이거랑은 좀 다르지…….”

“나한테는 같아. 이게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거야. 하고 싶은데 참았던 거.”

“뭐어?”

온기현이 어이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이렇게 무슨 병자 다루듯이 안아서 옮기고 씻기고 하는 이런 것들?

“야. 아무리 우리가 같이…… 살게 됐다고 해도 그렇지. 이런 걸 왜 매일 나한테 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불만스럽게 꿍얼거렸다.

“네가 정말 싫으면 안 할게.”

류주호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아니, 또 막 정말 진짜 싫다, 라기보다는 좀……. 너도 귀찮을 거고…….”

라고 머쓱하게 중얼거렸다. 그냥 하는 말이겠지 싶으면서도 류주호는 진짜로 할 것 같아서 대충 얼버무렸다.

“나는 너랑 늙어 죽기 전까지 매일 이럴 자신 있는데.”

“…….”

류주호가 온기현을 다시 침대까지 끌어안아 옮기면서 그렇게 말했다. 풀썩. 침대 위에 앉혀진 온기현이 잠시 말을 잃었다. 가끔 이렇게 황당한 말을 할 때가 있었다.

류주호가 한쪽 무릎을 꿇고는 온기현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올곧게 직시해 오는 또렷한 시선이 온기현의 새까만 눈을 마주했다. 가슴속에 뜨끈하게 불이 지펴졌다.

“농담하지 말고.”

“거짓말 같아? 나 너한테 거짓말 안 해.”

능청스러운 대꾸가 얄미웠다.

“……진짜로 네가 하고 싶은 게 뭔데, 나랑?”

새삼스러운 질문이었다. 애인이라서, 어떤 거리낌이나 장벽을 세우지 않고 서로를 끊임없고 용서하고 허용하는 그런 관계라서 가능한 것들. 류주호의 눈이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언뜻 몽중을 노니는 것처럼 초점이 흐려진다.

“나는 이런 게 하고 싶어. 너랑 같이 함께하는 이런 일상을……. 매일 마주하는 거.”

“…….”

“널 제일 사랑하는 거.”

온기현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류주호가 어제 일이 못내 미안한 듯 쓰게 웃으며 온기현의 부은 입술을 바라봤다. 괜히 민망해서 머리카락을 쓸자, 류주호가 심상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 세상 누구보다 너한테 사랑받는 거.”

“…….”

“그거 하고 싶어.”

와, 진짜 창피하다. 쑥스러운 탓에 눈이 샐쭉하니 길어졌다. 그런 행동 하나하나에 사랑스러운 눈빛이 와 닿았다. 붉어진 뺨을 숨기고자 눈을 내리깔고 류주호의 검지를 툭 건드리다 꽉 그러쥐며 대답을 읊조렸다.

“이미 하고 있는데…….”

나 너 이미 엄청 사랑하는데. 진짜 엄청. 엄청.

그렇게 말을 잇자 류주호의 입술이 길게 호선을 그렸다.

“응, 맞아. 그렇지.”

“진짜야.”

“응. 알아.”

“나 너한테 거짓말 안 해.”

부러 류주호가 대꾸했던 말을 되돌려 줬다. 류주호가 큭 하고 웃더니 온기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침대에 앉은 온기현의 목덜미에 류주호의 얼굴이 파묻혔다.

“응. 알아…….”

목소리가 언뜻 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두 팔을 크게 둘렀다. 류주호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제 팔 안에 가득 찬 포근한 체온이 가슴을 간질였다. 푸슬푸슬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함께 맞이할 아침이 기다려졌다. 내일이, 그리고 매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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