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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17/20)

Epilogue

온기현이 긴장한 듯 연신 허벅지 위로 손바닥을 문질렀다. 크흠, 하면서 목을 가다듬기도 하고, 새것이라 아직 몸에 감겨 오는 소재가 익숙지 않아 조금 거추장스러운 것처럼 소매 끝을 잡아당기거나 가슴팍 부근을 탁탁 털기도 했다.

강의실 안은 조금 소란스러웠다. 각자 조별로 발표를 맡은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으로 제가 준비해 온 스크립트를 손에 쥐고 허공을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기도 했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PPT 파일이 잘못된 부분이 없나 고개가 빠지도록 노트북 화면으로 목을 내밀고 쉴 새 없이 마우스를 움직이기도 했다.

그런 소란스러움 사이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중 하나는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하나는 그런 목각 인형처럼 바짝 얼어 있는 그의 안색을 연신 두루두루 살피며 걱정스러운 듯 미간을 좁혔다.

“기현아.”

“응?”

“그냥 내가 할까?”

“어?”

류주호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지, 아니면 단순한 말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산만한지 두 번이나 되물었다.

“발표, 그냥 내가 할까? 너 지금 얼굴 새파래.”

류주호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 크기로 작게 속삭이며 온기현의 등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스윽 어루만졌다. 계단식 강의실이라, 시야가 가려진 뒤편의 자리에서는 그런 은근한 손짓을 눈치채는 이는 없었다.

“아니? 내가 한다고 했잖아.”

새파랗기는. 스머프도 아니고.

온기현은 부러 입꼬리를 올리며 류주호를 향해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만들어 보였다.

“어제 이거 준비한다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야. 너야말로……. 그냥 너는 자라고 하니까 굳이 같이 꼴딱 밤새울 게 뭐야…….”

“나 혼자 어떻게 자.”

너 없는 침대에서 혼자 어떻게 자.

하지만 같이 밤을 꼴딱 새웠다는 이의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이 매끈하기만 했다.

“많이 긴장돼?”

“쪼금. 아니. 별로 긴장 안 돼. 그냥…….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 서는 거 처음이라…….”

“떨 것 없어. 여기 있는 사람 죄다 못생긴 구황 작물이라고 생각해. 땅바닥에 묻혀서 햇빛도 못 보고 자란 그런.”

“아, 무슨 소리야.”

류주호가 걱정과 위로를 오롯이 담아 말을 건네자, 온기현이 소리 죽이라며 말을 끊는 동시에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하지만 상상이 됐는지 자꾸만 웃음이 비죽거리며 새어 나왔다.

“그럼 너도 구황 작물이겠네.”

“그래도 이 중에서는 제일 예쁘고 큰 고구마 정도로 생각해 주면 좋겠는데.”

뻔뻔하게 그렇게 농담 섞인 말을 건네 오는 류주호의 발 옆을 툭툭 찼다. 피식피식 웃음이 샜다.

조명이 꺼지고 폭이 넓은 커튼이 쳐지며 내부에 어슴푸레한 그늘이 가라앉았다. 대형 스크린을 향해 푸른 빛 무리가 켜지며, 첫 번째 발표자가 강단 앞으로 올라갔다. 앞의 내용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온기현은 제가 발표할 내용을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암기하듯 읊어 내렸다.

“다음 5조.”

차례가 왔다.

“기현아.”

“응.”

“떨리면, 그냥 무조건 나만 봐. 나하고만 눈 마주치면 돼.”

“에이, 어떻게.”라고 작게 중얼거리며 몸은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일어나서는 프린트해 온 자료들을 들고 어정쩡한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단상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발을 돌려 학생들이 앉아 있는 강의실을 휘둘러보았다. 쿵, 쿵, 쿵.

‘어라. 왜 이렇게 갑자기.’

인원이 너무 많았다. 수십 개의 화살이 저를 향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혈액이 빠르게 돌고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흡, 하고 숨을 들이켜고 나서야 제가 숨을 쉬는 것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머릿속에 기껏 암기해 놨던 발표 내용들이 모조리 휘발된 듯 사라진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피가 마르는 느낌에 입술을 달싹였다.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미 자료는 커다란 스크린에 띄워진 상태다. 온기현이 운을 떼기만 하면 되었다. 자료를 움켜쥔 채 가만히 서 있자, 누군가 옆에 앉은 이의 귓가에 손으로 가리며 무어라 속삭였다. 한둘씩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많아졌다.

‘미치겠다. 어떡하지? 어떡…….’

그때였다. 마구 흔들리며 공중을 유영하던 눈이 어딘가에 멈췄다. 바로 류주호가 앉아 있는 쪽이었다. 류주호와 눈이 마주쳤다.

‘아…….’

류주호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갑자기 류주호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고등학교 입학식, 단상 위에 올라가 무수히 많은 시선을 받으며 오롯이 서 있던 너. 한순간에 시선을 빼앗겨 결국 류주호라는 사람으로 점철되었던 수많은 시간들. 그리고 돌고 돌아 지금 이렇게 함께 손을 맞잡는 사이가 됐다.

지금은 반대의 위치에 있었다.

그래.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든, 어떤 생각을 하든, 제 옆에는 류주호가 있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온통 너였다.

항상 뒷모습만 바라봐 왔다. 돌아봐 주지 않는 네가 괘씸하고 미워서, 그래서 너를 불렀다. 기대조차 하지 않았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기대는 했었을까. 모질게만 대하는 너를 보면서 가슴이 쓰려 온종일 체한 것처럼 가슴을 텅텅 두드렸던 날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5조, 시작 안 하세요?”

“아, 네. 해요. 하겠습니다.”

못마땅함과 의아함을 담은 부름에 온기현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후우, 하고 작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크게 공간을 둘러보았다. 구황 작물이라고 하던 류주호의 말이 생각나서 몰래 입술을 말아 물었다. 입꼬리가 비죽 올라갔다.

“흠, 흠. 안녕하세요. 저는……. 음. 한국 대학교 경영학과 온기현이라고 합니다.”

온기현이 목을 가다듬으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류주호의 시선이 느껴졌다. 점차 정신이 또렷해졌다. 어지럼증이 가셨다. 드디어 제대로 두 발로 땅바닥을 딛고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5조 프레젠테이션 시작하겠습니다.”

온기현이 류주호와 눈을 마주치며 옅게 미소 지었다.

* * *

“으아―!”

찌뿌둥한 팔을 머리 위로 쭉 펴며 홀가분하게 터지는 소리를 냈다. 근육을 한껏 이완시키느라 절로 찌푸려진 옆얼굴을 류주호가 빤히 바라봤다.

수업이 끝나고 둘은 건물 뒤편의 한적한 산책길을 나란히 걷는 중이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했네.”

온기현이 잔뜩 풀어진 얼굴로 헤, 하고 웃으며 제 팔을 두들겼다.

“긴장할 만하지. 발표라는 게 원래 그렇잖아. 누구 앞에서건 어디에서건. 자기가 준비했던 말을 논리정연하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데.”

“야. 네가 말하니까 거짓말 같아.”

“왜? 나도 그래.”

“아닐 거 같은데.”

온기현이 류주호를 돌아봤다. 미심쩍다는 듯 입술을 뚱하게 내민 탓에 입부리 끝이 뾰족하게 튀어나왔다. 유독 선연히 눈에 들어오는 붉은 그곳에 잠시 시선을 내린 류주호가 눈동자를 들어 눈을 마주치며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네 앞에서는 언제나, 내 마음을 전하는 게 너무 어렵고 떨려. 알아?”

“아, 또 느끼하게. 장난하지 말고.”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며 툴툴거렸다.

류주호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피식 웃었다. 전부터 솔직하게 터놓는 말은 귓등으로 듣고 흘리는 온기현이었다.

“아, 배고프다. 우리 뭐 먹을까? 날씨 진짜 좋다. 와, 꽃핀 거 봐.”

금세 다른 화제로 말을 돌린 온기현이 종알거리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볕이 좋았다. 머리 위를 비스듬하게 비추는 밝은 해가 눈 부셨다. 한국대의 명물이라 일컫는 빼곡한 분홍색의 꽃잎은, 봄이 왔음을 알린 제 역할을 다한 듯 하나둘씩 공중에 흩어졌다.

류주호가 문득 걸음을 멈추어 섰다.

온기현은 뭘 먹을지 고민하느라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나갔다.

햇빛에 반사된 온기현의 갈색 머리 끄트머리가 옅게 빛났다. 바람이 불어왔다. 봄바람에 이리저리 나풀거리는 뒤통수에 시선이 박혔다. 정수리에 새로 자라나는 까만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나의 걸음을 멈춰 세웠던 너의 말이 떠오른다.

그날 이후로, 매 순간이 오롯이 선명하다. 너와 처음 마주했던 순간순간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너는 그때, 어떤 심정이었어?

혹시나, 지금의 나처럼…….

가슴을 커다랗게 부풀린 류주호가 숨을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마치 호흡과도 닮은 이름을 입에 담았다.

“온기현.”

꽃잎을 흔드는 봄바람 소리에 섞인 호명에 온기현이 “어?”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저를 찾아 고개를 휘휘 돌린다. 그러다가 한참 뒤편에 머물러 있는 류주호를 찾아냈다.

눈이 마주쳤다.

멈춰 세운 뒤에 들려줄 말은 딱 하나였다. 너에게 돌려줄 말은 딱 하나였다. 단 세 글자에 도저히 전부 담지 못할 마음을 겨우 꺼내어 보여 주듯, 애틋한 언어를 입에 담았다.

“사랑해.”

멀뚱히 의아한 빛을 띤 얼굴로 류주호를 보고 있던 온기현이, 류주호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곧,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가슴이 아릴 정도로 천진한 웃음이. 입이 벌어지고 눈이 예쁘게 휘었다. 발갛게 상기된 볼이 사랑스럽다.

온기현이 그대로 땅을 박찼다. 그리고 제 마지막을 향해 힘껏 달렸다.

류주호가 양팔을 뻗었다.

벚꽃 잎이 바람에 흐드러졌다.

너를 닮아, 엷고도 선명하게 빛나는 꽃잎이.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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