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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Loose and Tight (3) (15/20)

6부. Loose and Tight (3)

“으, 추워.”

꽉 껴안은 둘의 열기 위로 순식간에 덮친 것은 다름 아닌 오한이었다. 거센 빗줄기를 그대로 몸으로 맞아 흠뻑 젖은 것도 모자라, 몇 시간을 내리 찬 공기를 맞으며 서 있었고 거기다가 흙탕물을 뒤집어쓴 류주호는 말도 못 할 상태였다. 그리고 그런 류주호를 온몸으로 껴안은 온기현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엄청난 모양새였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류주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뜨거운 고백 뒤에 둘은 빗물이 고인 웅덩이를 헤치며 온기현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물에 푹 젖은 생쥐 꼴로 집 앞에 다다라서 문을 열기 위해 제가 새로 바꾼 도어 록 앞에 섰다. 류주호가 저 몰래 달아 놓은 것을 전부 떼어 낸 흔적이었다. 등 뒤에서 어깨 너머로 도어 록에 시선을 던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부러 의식하지 않으려 하며 번호를 삑삑 눌렀다.

짧은 거리였지만 그새 또 몸이 식었는지 원룸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온기현의 입에서 에취, 하는 재채기가 튀어나왔다.

“미안해. 나 때문에.”

아까보다 조금 나아진 목소리가 안타까움을 잔뜩 담았다.

“감기 걸리면 안 되는데.”

류주호는 저는 춥지도 않은지 오로지 온기현에게만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콧물이 주르륵 나오고, 추워서 입술이 파랗게 질리고, 울어서 눈이 팅팅 부어서 차마 보기 힘든 몰골일 텐데. 그런 꼴사납고 지저분한 얼굴이 뭐가 그렇게 안쓰러운지 류주호가 미간을 좁히며 걱정 담긴 뜨끈한 눈으로 바라봤다.

“씻어야겠다.”

“아, 응.”

류주호의 말에 어색하게 대답한 온기현이 젖은 양말을 벗고 축축한 발의 물기를 대충 훔치다시피 하고서는 욕실로 들어갔다. 아까 넘어지면서 운동화 안에까지 물이 들어간 모양이었다.

뒤를 슬쩍 돌아보니 류주호가 제 젖은 윗옷을 벗고 있었다. 양팔을 엑스자로 겹쳐 상의 아랫단을 잡고 위로 쭉 올려 머리 위로 벗는 모습에 귀가 화르르 달아올랐다.

지금 당장 뭐 어떻게 해야 하거나, 불꽃이 튀는 일촉즉발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절대로.

거기다 둘은 이미 막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미 뜨겁게 몸을 섞은 적이 있는 기억은 휘발되지 않은 듯 잔열처럼 온몸에 남아 있었다. 그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용인하기로 한 게 바로 아까 전이었다. 마음속에 들이자마자 몸을 보며 괜한 생각이 드는 자신이 어이없었다. 죄 없는 이마를 퍽퍽 치고 싶을 정도로 자꾸만 쓸데없는 기억이 떠올랐다.

“어……, 너 먼저 씻을, 래?”

“아니. 난 괜찮아. 너 먼저 씻어. 난 수건 한 장만 던져 줘.”

그렇게 말하는 류주호는 오로지 온기현에게만 신경이 쏠려 있었다. 안에 받쳐 입은 티셔츠까지 죄 젖어 그 단단한 몸에 쩍 달라붙어 있는 것을 보고 온기현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너무나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이전에 몸을 섞었던 이라도, 정식으로 사귀게 된 지 십 분도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느닷없이 시야에 들어온 저런 모습에는 면역력이 떨어져서인지, 갑작스레 외설적인 모습을 눈에 담자 미친 듯한 서먹서먹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자꾸만 어처구니없는 야릇한 감상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알겠어. 잠깐만.”

그렇게 말하며 욕실에서 마른 수건 한 장을 꺼내어 류주호에게 건넸다. 그러자, 류주호가 갑자기 온기현의 손목을 턱 잡았다. 차갑게 식었으리라 생각했던 류주호의 몸이 뜨거웠다.

그리고 온기현을 보는 눈빛도.

“……왜.”

이상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그렇게 조용히 묻자, 류주호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꿈, 같아서.”

진짜로 아직도 꿈꾸는 것 같아.

그렇게 멍하니 중얼거린 류주호의 눈빛이 점점 착 가라앉았다. 그리고 손목을 그러쥔 힘이 점점 거세어져 가던 때, 온기현이 팔을 빼냈다.

“이거, 얼른 받아.”

그리고 제 팔 대신 수건을 그의 손에 내밀었다.

“응. 고마워.”

하지만 금세 원래대로의 태도로 돌아온 류주호가 수건을 받아 들고는 젖은 머리를 탈탈 털어 대듯 수건으로 비볐다. 그러고는 몸을 닦기 위해 티셔츠를 마저 벗었다. 고개를 홱 돌린 온기현이 도망치듯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가슴이 들썩였다. 백 미터를 전력 질주한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다급히 제 젖은 옷들을 모조리 벗고서는 샤워기 물을 틀었다. 뜨거운 물 아래에 몸을 맡기고 있으니 바짝 긴장해 있던 마음이 녹진하게 녹아드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보니 빙글빙글 돌던 머리도 점차 이성을 되찾아 갔다.

온기현은 훈기 가득한 욕실에서 잠시 멍하니 있다가, 밖에서 아직 추위에 떨고 있을 류주호를 상기해 내고는 얼른 수전을 잠그고 수건을 꺼내어 몸을 닦았다. 그러다가 아차 싶었다.

갈아입을 옷을 갖고 오지 않았다. 급하게 욕실로 들어오느라 미처 생각지 못했다. 안절부절못하며 잠시 발을 굴리다가 그런 자신에게 의아함을 느꼈다.

‘아니. 우리 둘 다 남잔데, 이렇게 신경 쓰는 것도 이상하잖아. 그리고 어차피 서로 볼 거 다 본 사인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도통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래도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이를 생각하며 온기현은 머리와 몸에 묻은 물기만 대충 닦고는 아래에 수건 한 장만 두르고 욕실 문을 열었다.

“기다렸지. 너도 얼른 씻.”

부러 태연하게 말하려던 온기현의 입이 떡 벌어졌다.

류주호는 심상하게 서서는 방을 둘러보고 있었는지 온기현이 보는 시야에 류주호의 벗은 옆모습이 보였다. 온기현의 말에 류주호가 고개를 돌리자, 그의 벌거벗은 상체가 오롯이 드러났다.

‘아.’

개총 뒤풀이에서도 그랬지만, 어쩐지 전보다 훨씬 탄탄해 보이던 것이 헛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아니, 외려 옷 위로 느껴지는 것은 일부에 불과했다.

마치 어디 국가대표 선수촌에라도 들어갔다 온 것처럼, 어깨선 아래로 쩍쩍 갈라져 불거진 근육의 중량감이 언뜻 위압적일 정도로 커다래 보였다.

수컷의 냄새를 철철 흘리는 떡 벌어진 어깨부터 꽉 죄인 허리까지. 날렵하고 조밀한 물성으로 뒤덮인 그 신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성적인 도취에 취하게 할 정도의 혼곤함까지 자아냈다.

공중을 향해 평연한 시선을 던지는 그 눈매와 이목구비는 섬세하고 예리했다.

너도 씻어야지, 이 말이 채 나오기도 전에 그 압도적인 남성미에 온기현은 아연하게 입을 벌렸다. 제 모습이 어떤지, 무슨 망설임을 했는지도 까맣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류주호가 굳은 입매를 한 채 제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온기현이 눈동자만 움직이며 가까이 다가오는 나신의 궤적을 좇았다.

지척으로 다가온 류주호의 굳은 얼굴이 설핏 풀어졌다.

입꼬리가 한쪽으로 올라가며 눈빛이 따사롭게 변했다. 그리고 온기현의 얼굴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배고프지? 조금만 기다려. 금방 씻고 나올게.”

“어, 어? 뭐, 아.”

온기현은 그 말에 흠칫 놀라 손으로 얼굴을 훔치려다가 제 입가에 침이 고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속으로 비명을 꽥 질렀다.

헐. 미쳤나 봐.

‘아, 씨.’

아직은 감정이 설익어 조금 어색한 기운까지 도는 이런 때, 벗은 몸을 보면서 침까지 흘리고.

류주호도 제 속을 알고서 하는 말은 아닐 테지만, 스스로가 어이없었다.

쥐구멍이 있다면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창피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터질 듯했다. 온몸의 피가 얼굴로 몰렸다 착각할 정도였다.

“혹시 갈아입을 옷 있으면 빌려줄래?”

그 말에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달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뒤이어 솨아아― 하고 샤워기에서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까지.

마른세수를 하고서는 홍조가 오른 볼을 쓱쓱 문질렀다. 그리고 얼른 속옷과 편한 티셔츠, 부드러운 재질의 트레이닝 팬츠를 꺼내어 입고는 사이즈가 큰 옷가지도 마저 꺼냈다.

“여기 놔둘게.”

욕실 문을 똑똑 두들기고는 곱게 갠 옷가지를 문 앞에 두었다. 안에서 낮은 목소리로 응, 이라고 대답하는 소리까지 들은 온기현이 침대를 등받이 삼아 바닥에 앉았다.

원래 류주호랑 어떤 얼굴을 했었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전의 우리는 어땠더라.

그러다가 불시에 깨달았다. 이렇게 단둘이 붙어 있을 때면 으레 흘레붙고는 했었던 것을.

쿵쾅대는 심장이 옷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제부터 제대로 시작해 보기로 했는데. 류주호가 모질게 했던 행동들, 그저 한번 몸만 맞추고 힘겹게 떨어내려고 했던 이전의 결심을 모두 리셋하고 새롭게 시작하려고 했는데. 자칫하다가는 또 이전과 같은 상황이 도래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일었다.

그렇게 끙끙대는 사이에 류주호가 몸을 씻고 나왔다. 욕실 문을 열고서는 문 앞에 놓인 옷가지를 줍는 커다란 손이 보였다. 괜히 헛기침하며 무릎을 끌어모아 가슴 앞으로 접었다.

“후.”

짙게 숨을 내쉰 류주호의 머리는 아직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얼굴이나 이곳저곳에 묻어 있던 지저분한 흙덩이가 있거나 없거나 여전히 독보적인 생김새였다.

“그래도 비 금방 그쳐서 다행이다.”

“응. 그러게.”

자연스러운 화제를 입에 올리자 류주호도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했다.

설핏 어색한 웃음을 짓자 류주호도 싱긋 웃으며 화답했다. 그러고는 단 두어 걸음 만에 온기현의 옆으로 성큼 다가왔다. 온기현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동시에 류주호가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를 에워싼 열기가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깜빡거리는 눈으로 류주호를 쳐다봤다. 류주호도 마찬가지로 온기현을 지그시 바라봤다.

목울대가 꿀꺽하고 울렸다. 제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해서일까. 착각인지 몰라도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은 분위기가 공간을 메웠다.

무릎을 더욱 끌어모았다.

류주호의 잘생긴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심하게 의식됐다.

‘어색해 죽겠다.’

입 안이 바싹 마르는 느낌이었다. 왜 이렇게 긴장되지. 더한 짓도 수없이 했는데, 갑자기 입술을 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재가 되어 타 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기현아.

낮게 그르렁대는 목소리가 들린 것과 동시에, 커다란 몸이 온기현의 위로 덮쳐졌다. 안에 진득하게 고여 분출할 일 없던 열기가 단숨에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후끈거리는 체온이 온기현을 감쌌다. 숨을 헉 들이켠 온기현의 입술 위로 류주호의 것이 맞닿아 왔다.

흐읏……, ……아.

숨이 모자란 폐부에 숨을 채우기 위해 살짝 벌린 입 새를 뜨겁고 물컹한 것이 파고들었다. 입에서 앓는 소리가 터졌다.

‘아, 어떡해. 어떡해.’

미칠 것 같았다. 결코 강하지 않은 입맞춤이었다. 부드럽고 포근하고. 제 생채기 난 여린 속을 살살 쓰다듬어 주는 것 같은 그런 약하디약한 접촉이었다. 그런데도 온기현의 눈가가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자꾸만 애가 타고 무릎이 부들부들 떨렸다.

으응…….

자꾸만 거칠어지는 숨결이 제 것인지, 류주호의 것인지조차 헷갈렸다. 눈썹이 아래로 처지고 볼이 불에 달군 듯 뜨거웠다. 춥, 춥, 습윤한 소리가 울려 뇌수까지 흐물흐물 녹였다.

질끈 감은 속눈썹이 부르르 진동했다. 더워서인지 생리적인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속눈썹 끄트머리에 방울졌다.

하지만 부드러운 것이 어느새 점점 거세게 바뀌어 갔다. 집요하게 점막을 헤집고 자꾸만 안쪽으로 숨어드는 혀를 부드럽게 옭아맸다. 온기현은 절절 녹아들 것 같은 감각에 몸을 맡겨 저도 적극적으로 류주호의 접촉에 응했다.

그럴수록 류주호의 몸짓은 더욱 거칠어져 갔다. 끼익, 하고 류주호의 팔이 뒤쪽 침대를 짓누르는 소리가 들리며 점점 무게 중심이 기울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미치겠어. 아.

그리고, 본능적으로 알았다. 류주호가 반응을 가늠하듯 살짝씩 접해 오던 입맞춤을 정욕적인 무언가로 바꾸려는 순간을.

저도 제어하지 못한 욕구를 확 풀어 헤치려던 때, 온기현이 눈을 번쩍 떴다.

동시에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느낌과 함께 단단한 어깨를 턱 잡았다. 류주호는 눈을 뜨고 저를 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소한 온기현의 몸짓에 류주호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팽팽하게 당기던 시선을 깜빡였다. 그리고 스리슬쩍 몸을 물렸다.

“야, 우리…….”

헉헉대는 숨을 가누며 온기현이 그렇게 읊자 류주호가 저를 빤히 바라봤다.

“이제부터, 오늘부터 사귀기로 했는데……. 너무 벌써부터 이러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순간 다 큰 성인끼리 할 법한 말이 아니다 싶었다. 제가 순진한 말을 뱉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몸을 섞는 것이 범법을 저지르는 것도 뭣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바로, 막 흘레붙는 건 어쩐지 짐승 같았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아직 쌓인 얘기가 많았다. 저 새로 달린 도어 록과 관련한 일에 대해서도 그랬고, 류주호 신변의 변화에 대해서도 그랬다.

더욱이, 몸을 붙이는 것 자체가, 아직 조금 거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류주호가 저에게 했던 말이나 행동들로 인해 받은 상처가 모두 깨끗하게 치유되거나 상쇄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찌꺼기처럼 제 마음 위에 둥둥 떠 있었다. 그래서 새로운 시작을 이렇게 몸부터 시작해서는 어쩐지, 다시 예전과 같은 일을 되풀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미미하게 존재했다.

젖은 입술을 손으로 쓸며 온기현을 쳐다보는 류주호의 눈동자가 낮게 일렁였다. 그리고 그는 멋쩍게 볼을 긁는 온기현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응. 그러게.”

그렇게 선선히 대답했다.

“우리는 오늘부터 시작이니까.”

앞으로 많은 날을 함께할 거니까.

온기현이 류주호와 눈을 마주쳤다.

그래. 그랬다.

“응. 처음부터, 제대로 시작하자. 천천히…….”

“그러자.”

그렇게 하자.

류주호가 눈을 접으며 웃었다.

“손은 잡아도 돼?”

“어? 당연하지…….”

느닷없이 순진한 질문을 해 온 류주호가 두꺼운 손을 뻗어 온기현의 손가락을 매만졌다. 어쩐지 간지러워서 피식 웃었더니 류주호도 마주 웃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사용해 온기현의 손바닥 아래로 비집고 들어오더니 손을 돌려 손바닥과 손바닥을 마주 잡았다. 손가락이 서로 얽히며 어디랄 것 없이 두 사람의 손이 완전히 맞닿았다.

“너무 좋다.”

“응?”

문득 한숨처럼 내뱉은 류주호를 보며 기현이 고개를 기울였다. 방금까지 못 잡아먹어 안달하던 놈이 고작 손 하나 잡았다고 이렇게 좋아할 일인가 싶었다.

“너무 좋아.”

“뭐가?”

“내가 마지막 숫자라는 게.”

“그게 뭐야.”

온기현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손바닥이 좀 더 빠듯하게 맞붙었다. 부드러운 악력으로 온기현의 손이 완전히 감싸였다.

“옛날에 항상 의문이었거든. 어렸을 때 반에서 조례하기 전에 앞에서부터 번호를 외치는 것으로 출석을 대신하던 때가 있었어.”

아아. 엄청 예전 얘기를 하는구나. 얘기를 들으며 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1번, 2번, 3번. 이렇게 쭉 번호를 순서대로 외치다가 마지막 번호인 놈이 자기 번호를 외치면서 번호 끝. 하고 우렁차게 소리치는데, 그러고 나서 혼자 엄청 뿌듯하게 미소 짓더라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난 그걸 보면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어. 저게 그렇게 기쁠 일인가, 싶어서.”

“응.”

“그런데 지금 내가 바로 그 심정이야.”

류주호가 더없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반짝이는 옅은 색의 눈동자가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환각까지 보일 정도로.

“외치고 싶어. 내가, 네 마지막이라고. 네 마지막은 나라고.”

이제야 알 것 같아. 뭐든지 다.

이제야 겨우 알겠어.

“뭐야, 그게.”

온기현이 피식 웃자 류주호가 다시금 아까부터 계속해서 온기현을 향해 읊조린 세 글자의 언어를 입에 담았다.

간질이듯, 속삭이듯, 애틋함을 담아, 그렇게. 온기현도 같은 말을 되돌려 주었다.

아마 우리는 앞으로도 이 흔하디흔한 단어가 완전히 닳아 없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서로에게 읊어 주겠지. 질리지도 않고, 퇴색하는 일 없이, 계속해서.

그리고 그것은 오롯이 둘이서 만끽할,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의 편린일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니까.

* * *

“배고프지 않아?”

“음. 조금.”

그렇게 격한 감정을 터트린 탓에 체력 소모가 어마어마했다. 온기현은 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것 같아서 먼저 선수를 쳐 물어봤다. 류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빗길이라 주문하기도 뭣하고. 집에는 라면밖에 없는데.”

“라면 내가 끓여 줄까?”

“니가? 너 라면 끓일 줄 알아?”

온기현이 놀란 눈을 하고서는 물었다. 마치, 갓 태어난 아이에게 너 말할 줄 알아? 라고 물어보는 것 같은 놀람이었다. 하지만 류주호는 외려 당연하다는 듯 심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 라면 못 끓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손만 있으면 다 끓이지.”

“아니, 그게 아니라. 넌…….”

컵라면도 못 끓이게 생겼는데. 그리고 실제로 끓여 본 적도 없을 것 같고.

그렇게 말하려다가 그냥 입을 닫고는 볼을 긁적였다. 본인이 자신 있다는데, 굳이 깎아내리는 말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있어 봐. 내가 끓여 올게.”

“아, 응.”

선선하게 몸을 일으킨 류주호가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주방으로 걸어가더니, 찬장을 열어 냄비와 라면 몇 개를 집어 꺼냈다. 온기현은 일부러 그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왠지 끓이는 과정을 보지 않아야 더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 후 류주호가 끓인 라면이 금세 완성되었다. 보면서도 의심을 거둘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젓가락 덜어서 먹고 나서는 입을 틀어막았다.

“……맛있다.”

“더 맛있는 거 먹이고 싶었는데. 오늘은 어쩔 수 없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거라 다행이다.”

“너 라면 먹어 본 적 있어?”

“얘가 이상한 걸 묻네. 끓일 줄 아니까 당연히 먹어 봤지.”

류주호는 대수롭지 않은 걸 묻는다는 듯 피식 웃었다.

“간단히 끼니 때우려고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끓이게 되던데. 그리고 포장지 뒤에 적힌 대로만 끓이면 되니까 별로 어렵지도 않고.”

대체 얘가 간단히 끼니를 때워야 했던 때가 언제인가, 류주호가 라면을 끓여 가면서 무언가에 쫓기듯 끼니를 해결해야 할 정도로 생활에 절박할 때가 있었던가.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이내 텅 비어 바짝 들러붙은 위장이 무언가를 넣어 달라고 아우성을 쳐,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라면을 더 덜어서 후후 불어 호로록 먹었다.

“와. 진짜 맛있어. 너 라면 되게 잘 끓인다.”

“많이 먹어. 체하지 않게 천천히.”

온기현이 연신 후후 불어 가며 젓가락을 놀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류주호에게 너도 먹으라며 채근하기도 했다. 결국 둘이서 가득 찼던 냄비를 싹 비웠다. 함께 설거지를 처리하고 양치까지 했다.

“으…….”

배가 차니 어쩐지 무척 졸음이 쏟아졌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는 걸 느끼고 연신 손등으로 눈을 비벼 댔다. 눈두덩이가 여태 뜨끈한 것을 보니, 울어 젖힌 여파가 세긴 셌나 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도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점점 감기는 눈을 하는 온기현을 보며 류주호가 나지막이 물었다.

“피곤했지, 오늘.”

“…….”

“나 때문에.”

“응…….”

그렇다며 순순히 대답했다. 너 때문에 그랬어, 처음부터 다 너 때문에.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아직도 물어볼 것도 궁금한 것도 많았지만 오늘은 이쯤이 한계였다. 류주호는 고요한 눈빛으로 온기현을 지그시 바라봤다. 졸음이 덕지덕지 묻은 말간 얼굴을 요리조리 살피고는 갑자기 미간을 좁히더니 으음, 하고 목을 울렸다.

“어……. 왜? 너도 졸리지? 여기서 자고 갈래?”

반쯤 감긴 눈으로 그렇게 물었다. 아직 옷도 덜 말랐고, 제가 건네준 옷도 후줄근한 트레이닝복으로, 자신도 잠옷으로 애용하는 것이었기에 저걸 입고 나간다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류주호의 눈동자가 순간 격하게 일렁였다. 그러다가 손바닥을 뒤로 돌려 목덜미를 감싸 목을 좌우로 기울이며 뻐근한 목을 푸는가 싶더니, 고개를 돌렸다.

“아니. 갈게.”

“그래도. 옷이라도 말려야지. 그렇게 하고 어떻게 가―.”

아쉬움이 잔뜩 담긴 목소리가 잠결에 어리광을 부리는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뒷말이 길게 늘어졌다. 평소의 저였으면 자신이 내는 소리에 심하게 정색하고 질색했을 법한 칭얼거림이었다.

“아니야. 가야 돼. 나중에. 응? 나중에……. 지금 말고.”

“…….”

이제 막 사귀기로, 앞으로 함께하기로 약속했는데 벌써 떨어진다니 어쩐지 섭섭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굳이 가야 한다니 어쩔 수 없었다. 온기현은 서운함을 숨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 비록 떨어지더라도, 우리에겐 내일이, 다음이 있다.

“응.”

그렇게 대답하며 류주호를 따라서 저도 일어섰다. 앞까지 배웅할 셈이었다.

“그냥 있어. 밖에 추워.”

하지만 류주호는 단호했다. 그에 괜히 불안해졌다. 뭔가 일련의 사건들이 전부 꿈같았다. 지독한 악몽 혹은 지독한 단꿈. 그런 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류주호는 날연한 표정으로 제 소지품을 챙겼다. 그래 봤자 핸드폰 정도였지만.

이미 머리는 버석하게 말라 있었다. 하지만 류주호가 입었던 옷이 세탁기 안에서 격한 소음을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그게 어쩐지 안심이 됐다.

“……갈게.”

“응. ……잘 가.”

현관 앞 신발장에서 그를 배웅했다. 마주 보고 인사를 하는 동안, 머리 위의 센서 등이 깜빡하고 켜졌다. 하지만 그 상태로 둘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조용하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에 환하게 빛을 내리던 센서 등이 팟, 하고 꺼졌다. 묵직한 저음이 들린 것은 동시였다.

“기현아.”

“응.”

“뽀뽀해도 돼?”

“어? 아.”

천천히 가자고 한 제 말을 의식해서일까. 류주호는 손잡아도 되냐는 요구와 더불어 뽀뽀, 같은 요새로 따지면 유치원생도 말하지 않을 것 같은 신체적 접촉을 입에 담으며 대뜸 제 의사를 물어 왔다. 귓불이 뜨끈해졌다.

‘그런 건 그냥, 알아서 하지. 뭘 물어봐.’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실제의 온기현은 당황해서 “어, 응. 해, 해도 돼. 해.” 하며 더듬는 느낌으로 대답했다.

동시에,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류주호가 커다란 두 손으로 온기현의 두 뺨을 감쌌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기울어진 고개가 다가왔다.

쪽.

아.

눈썹 끄트머리에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뜨거운 숨결이 아련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벼운 접촉이었다. 하지만 그걸 시작으로.

쪽. 쪽. 쪽.

입술이 얼굴 여기저기를 마구 쪼아 댔다. 콧잔등과 볼, 다시 관자놀이, 그리고 이마. 연신 딱따구리 부리처럼 쪼아 대는 통에 온기현에게서 웃음이 터졌다.

“아, 뭐야, 너. 아, 그만해. 진짜.”

“음.”

나직한 신음처럼 대답한 류주호의 마른 입술이 웃음이 대롱대롱 매달린 온기현의 입술 끄트머리에 쪽, 하고 와 닿았다.

하지만 그것은 앞선 것처럼 가볍지 않았다. 온기현이 어, 하고 주춤하기도 전에 류주호가 그대로 살짝 벌리며 미끄러트렸다. 결국 입술이 말캉하게 짓눌렸다.

“하.”

언뜻 탄식, 혹은 한숨 같은 거친 소리가 터진 듯했다. 헤벌어진 입술과 입술이 다시금 진득하게 맞물렸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류주호는 꾹 내리누른 채, 겹쳐진 감촉만 음미하는 것처럼 일절 다른 행동이 없었다.

오히려. 조금 숨이 찬 탓에 온기현이 입술을 더 벌렸다. 본능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자 언제까지고 붙어 있을 것만 같던 마른 입술이 천천히 떼어졌다. 끝에는 습기 찬 숨결 때문에 살결이 살짝 달라붙는 것처럼 축축한 소리가 미약하게 났다. 순간 오싹한 전율이 일었다. 눈꼬리가 흠칫 떨릴 정도로.

“……가야겠다.”

류주호가 얼굴을 물리며 그렇게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고는 온기현의 뺨을 다시금 쓸어내렸다. 그에 고개를 끄덕였다.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우고 싶으면서도 사실은 아직 덜 풀어져 응어리진 마음과, 이 남자와 쾌감 속에 뒤섞이는 아찔한 감각을 익히 알고 있는 몸의 기억이 제 속에서 창과 방패의 싸움을 했다.

‘나 진짜 왜 이러냐.’

약간 자조가 서린 생각까지 들었다. 반면에, 저에게 잘 있으라고 말하며 웃는 류주호의 얼굴에는 온기현을 향한 애정만 비칠 뿐, 자못 태연해 보였다.

들키지 않게 속으로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문 꼭 잠그고. 잘 자.”

“조심해서 가.”

겨우 떨어진 체온이 벌써 아쉬웠지만, 티 내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덜컹, 하고 닫힌 두꺼운 문 너머로 자박자박 물기 어린 바닥을 디디는 발소리가 들렸다.

망연히 현관문을 바라보던 온기현이 퍼뜩 무언가 생각난 듯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닫혔던 문을 확 열어젖히고는 후다닥 뛰어나갔다.

“주호야! 야, 류주호!”

그렇게 이름을 부르며 잰걸음으로 뛰었다. 골목을 유유히 빠져나가려던 이가 고개를 돌렸다. 온기현은 류주호를 향해 전속력으로 다가가 그 앞에서 숨을 헐떡였다.

“허억, 나……, 헉.”

온기현이 숨을 고르고는 그에게 무언가 내밀었다. 바로, 핸드폰이었다.

“나, 네 바꾼 번호, 알려 줘.”

경찰서에서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번호까지 바꾸었다는 그 말이. 예전 번호는 차단해 놔서 해제하면 그만이었지만, 번호를 바꾼 거라면 얘기가 달랐다.

내일 학교에서 만나서 얘기해도 될 말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이대로 번호를 모른 채 떨어져서 오늘 밤을 혼자 지낸다면 어쩐지, 전부 다 없었던 일이 될 것만 같았다.

무언가 엄청나게 급하고 중요한 일인 것처럼 전력 질주로 제 뒤를 쫓아온 온기현을 류주호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봤다.

온기현이 요구한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핸드폰 번호 따위, 어차피 류주호는 온기현의 번호를 외우고 있으니 제가 먼저 연락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필사적으로 뒤를 쫓아왔다.

그래. 온기현은 언제나 그랬다.

어설프게 영악하지 않고, 또 누군가에게는 두려울 한 발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제가 먼저 내디딜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또 누구보다 겁이 많았다.

누구나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다. 사랑 하나 제대로 찾지 못해서 서툴기 짝이 없었고, 스스로 엉망진창 망쳐 놓기까지 했다.

그래서 더욱, 얼기설기 짜인 허술함과 솔직함을 한데 뭉쳐 내 이루어진 이 사람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사랑스러워서 미칠 것 같다.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다.

류주호는 목구멍 밖으로 터져 버릴 것 같은, 차마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열렬한 고백을 필사적으로 삼켰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보여도 괜찮았다.

반드시 나중에는 지금보다 더 너를 사랑하고 있을 테니까.

지금만이 전부인 것처럼 토해 내지 않아도,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류주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번호는…….”

* * *

……르르―…….

“으음…….”

잠에 침잠해 있던 의식을 요란한 소리가 흔들었다. 몸을 한껏 웅크려 침대 위에서 이불을 한 아름 안은 채 모로 뒹굴었다. 눈이 무거워 억지로라도 뜨려고 해도 떠지지 않았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흐으…….”

연신 울려 대는 벨 소리에 굳게 감겼던 눈꺼풀이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자꾸만 처지는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이니,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으…….”

거의 반쯤 감긴 눈을 비비며 온기현이 팔만 등 뒤로 돌려 침대 위를 탁탁 두들기다 핸드폰을 쥐었다. 그리고 누군지도 확인할 정신도 없이 실눈을 뜨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 세요…….”

완전히 잠긴 소리가 목구멍에서 새어 나왔다.

―안녕.

“……어?”

귓가에 속삭이듯 간질이는 인사에 눈이 번쩍 떠졌다. 헉, 소리를 내며 눈을 벅벅 비볐다. 그리고 기침을 뱉고는 저도 “안녕.” 하고 어색하게 인사했다.

―잘 잤어?

귓가가 화끈거렸다. 푸스스 웃는 소리에 섞여 묻는 말에 온기현이 으,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어어, 너는……. 어……?”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창문으로 들이치는 따스한 햇볕이 방 안에 세모꼴로 들어찼다. 너무 따사로워서 눈까지 부실 지경이었다. 스멀스멀 불안한 예감이 퍼졌다.

이건…….

“헉! 지각!”

지금 몇 시지? 완전 지각 아닌가? 부산스럽게 이불을 걷어 냈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 내 시간을 확인하려던 찰나였다.

―괜찮아. 지각 아니야.

정신없이 부스럭대며 당황한 것이 통화에서도 알 수 있었는지, 안심시키려는 듯한 부드러운 그 말에 온기현이 핸드폰의 시간을 재확인했다. 오늘 첫 강의는 10시부터였다. 지금은 9시를 막 넘긴 시간이었다.

아, 다행이다.

가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아차, 싶었다. 지각할까 봐 난리를 친 게 아마 전화 너머로도 다 들렸을 텐데.

쪽팔린다, 진짜.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시금 상기했다. 하지만 이내 크흠 흠. 하고 목을 가다듬은 온기현이 속삭이듯 저도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잠결에 헝클어져 까치집이 된 머리를 머쓱하게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방금 뭔가 마음에 걸린 것 같은 이질적인 느낌에 갸웃거리다가 깨달았다.

“야. 근데 너……. 나 10시 수업 듣는 거 어떻게 알았어.”

―아.

온기현의 눈이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하지만 곧이어 핸드폰 건너편에서 터진 웃음에 입을 삐죽거렸다.

“왜? 뭔데?”

―어제 자기 전 통화할 때 그랬잖아. 내일 10시 수업이니까 깨워 달라고.

“내가 그랬어?”

―응. 그랬어.

아.

그제야 새록새록 기억이 떠올랐다. 어제 류주호와 번호를 주고받고 새롭게 저장한 온기현은 약간 두근거리는 마음에 잠을 못 이루고 있다가 류주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현아.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듯 온기현의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전화를 받은 그는, 약간 가쁜 호흡을 내쉬며 이제 막 제집에 도착했다고 했다.

그게 어쩐지 신선하고 또 어색하기도 하고, 새롭기도 했다.

집에는 잘 들어갔는지. 지금 뭐 하고 있는지.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다가 금세 잠이 몰려왔다. 온몸이 녹진하게 풀어진 탓이었다. 그리고 막 얕게 잠들기 전, 자기가 오늘 강의 때문에 일어나야 하니 깨워 달라고 말했던 것 같다.

“맞네. 맞다. 그랬었다.”

하하. 어색하게 웃은 온기현이 말을 덧붙였다.

“아……. 나 이제 준비해야겠다.”

전화를 끊을 때가 되었다.

―그러면.

그렇게 말한 류주호가 잠시 뜸을 들였다.

―이따 학교에서 봐.

그 말에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와, 진짜 사귀는 것 같다. 아. 진짜 사귀지, 우리.

홧홧해지는 볼과 귓바퀴를 연신 손으로 문지른 온기현이 밝게 대답했다.

“응. 이따 봐.”

온기현은 얼른 준비를 마치고 자취방을 나섰다.

류주호가 수업 끝나고 같이 점심을 먹자고 해서 그러자며 전화를 끊었다. 어쩐지 묘한 기분이었다. 이전에도 함께 밥을 먹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분명한 관계가 되고 나서 학교에서 만나는 게 처음이라는 생각에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어제 번호를 등록해서 카톡 친구 목록에 자동으로 류주호의 이름이 떴다. 대화창을 터치하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메시지를 보냈다.

[이따가 어디서 볼까? 학관?] 09:48

답장이 바로 왔다.

[아니 다른 데서 먹자 오늘 너 수업 끝날 때쯤 연락할게] 09:48

[응 알겠어!] 09:49

간단한 대화인데도 괜히 긴장되고 신기해서 몇 번을 읽어 봤다.

다행히 10시가 되기 전에 강의실 근처에 도착했다. 온기현이 크로스 백 끈을 쥐지 않은 손으로 강의실 문을 열었다. 온기현이 들어오는 것을 본 창가 근처에 앉아 있던 이윤규가 손을 흔들었다.

“형. 여기요. 제가 자리 맡아 놨어요.”

“아, 안녕. 고맙다.”

이 강의는 전공 선택이긴 한데 어쩌다 보니 이윤규랑 우연히 함께 강의를 듣게 된 것이었다. 이윤규 옆에 앉으며 노트북을 꺼내자 평소에는 까불거리며 추근대던 이윤규로부터 말을 하려다 말다, 하려다 말다 하는 주저함이 느껴져서 온기현이 의아하게 쳐다봤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하. 그, 아뇨. 그냥요. 형, 혹시……. 아 씨, 이거 물어봐도 되나 모르겠네.”

“어?”

“혹시, 그 선배랑 싸웠어요?”

“누구?”

“류주호 선배요.”

“엉?”

그렇게 되물으며 놀란 마음에 입을 벌렸다. 왜 그 이름이 여기서 나와. 심장이 아래로 쿵 떨어졌다. 아니, 싸우긴 싸웠지만. 그게 싸운 건 아니지만, 아니, 잠깐만.

혼란스러운 마음에 멍하게 쳐다보는 시선을 이윤규가 잘못 이해했는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개총 뒤풀이 때, 형이 류주호 선배 불러서 밖에 나갔잖아요. 사실 되게 신경 쓰이긴 했는데……. 그때는 차마 못 물어보겠더라고요.”

“아, 아아.”

난 또. 속으로 후우 안도의 숨을 쉬었다.

“괜찮아. 따로 할 말 있어서 그랬던 건데, 그러고 바로 나도 갑자기 컨디션이 안 좋아져서 집에 가게 된 거라. 연락 먼저 못 해서 미안해.”

“미안하긴요. 저는 그냥 걱정돼서요. 형, 류주호 선배랑 친해요?”

“응? 아니? 안 친한데?”

대답이 바로 튀어나왔다. 괜히 찔려서 고개까지 휘휘 내저었다.

“아. 그렇구나. 사실 우리끼리 얘긴데, 그 선배 예전에 소문 되게 이상했었어요. 여러 가지로……. 사람이 갑자기 변했댔나? 아무튼, 그랬었거든요. 그래도 뒤풀이에서 실제로 보니까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또, 뭐.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싶더라고요. 그래서 만약 형이랑 불편한 사이면 제가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그 선배가 형 막 괴롭히고 그러는 건 아니죠?”

이윤규가 속삭이듯 귓가에 대고 입을 놀렸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저는 형 편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라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몸을 기울여 귀를 내주던 온기현은 고마움과 곤란함이 뒤섞여 눈썹을 찡그렸다.

류주호 걔가 확실히 못되긴 했지만, 제가 욕하는 것과 남이 욕하는 것을 듣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막 입을 떼려던 때, 교수가 들어오며 웅성거리던 주변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에 온기현이 하는 수 없이 이윤규의 귀에다 대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속삭였다.

“싸웠는데, 화해했어.”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이윤규가 뭐라 말하기 전에 똑바로 앉아 노트북을 열고는 전원을 켰다. 이윤규는 강의 내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마 제가 가타부타 더 말을 얹기가 멋쩍겠지.

50분을 풀로 채운 강의가 끝나고 덜컹거리며 학생들이 일어서는 소리가 강의실을 울렸다. 온기현도 마찬가지로 바지런히 제 것을 챙겼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핸드폰으로 신경이 죄 쏠렸다. 이윤규도 같이 책을 백팩에 집어넣고는 학생들이 한차례 빠져나간 강의실에서 나란히 걸어 나왔다.

이윤규가 온기현을 향해 평소와 같은 가벼운 투로 말했다.

“형, 이 뒤에 뭐 없죠? 점심 같이 먹을래요?”

“어? 점심? 아, 나는…….”

점심은 류주호와 같이 먹기로 했다. 이윤규에게는 미안하지만 막 거절의 말을 뱉으려 할 때, 뒤에서 둘 사이를 가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기현이는 나랑 약속 있는데.”

“어?”

“네?”

온기현과 이윤규가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온기현이 눈을 크게 떴다. 복도 한가운데에 류주호가 서 있었다. 류주호는 짙은 남색의 바람막이를 턱 끝까지 채운 편안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린 듯한 웃음을 입에 걸치며.

“여기 어떻게 왔어?”

온기현의 목소리에 놀람과 반가움이 동시에 묻어났다. 저도 모르게 냉큼 그렇게 묻고는 류주호를 향해 빙글 몸을 돌리던 순간, 이윤규가 저를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는 화급하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와. 너무 티 났나. 괜히 볼이 홧홧해졌다.

“아……. 두 분 약속, 있으셨어요? 어, 그럼 저도 같이 먹어도 됩니까, 선배님?”

이윤규가 사람 좋게 웃으며 예의 바른 어투로 그렇게 물어 왔다. 류주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가셨다.

류주호가 웃을 때는 옅은 색소의 눈동자가 은은하게 반짝이며 기다란 속눈썹과 함께 예쁘게 접혀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을 좋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반면, 무표정을 지을 때는 온도가 삽시에 극점까지 낮아져 주변까지 싸늘한 기운이 감돌게 하는 묘한 감상을 자아냈다.

지금이 딱 그랬다. 이윤규의 표정이 급변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불편해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온기현을 향해 흘긋거렸다. 역시나, 라는 시선이었다. 눈치를 주며 ‘거 보세요.’ 하는 듯한.

류주호의 평판이라고 한다면 사실 류주호를 직접 겪었던 사람보다 멀리서 보는 사람들이 내리는 경우가 대다수였기에 이제까지는 근거 없이 떠도는 안 좋은 소문보다 훌륭한 외견에 더욱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눈앞에서 성격 나쁜 티를 낸다면 말이 어떤 식으로 와전될지는 뻔한 일이었다.

거기다, 만약 류주호가 행여나 그냥 꺼지라며 이윤규에게 수표라도 쥐여 주기라도 하는 날에는 이미지고 뭐고 류주호의 평판은 완전히 지구 내핵까지 뚫고 내려갈 것이었다. 과 사람들 사이에서 잘게 씹히고 뜯겨 류주호의 평판은 아예 가루가 될 것이다.

비록, 아무리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제가 좋아하는 이가 그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지는 꼴은 보기가 힘들 것 같았다.

“그냥 같이 먹자, 주호야.”

온기현이 류주호를 또렷하게 응시하며 그렇게 말했다. 응? 하고 다시금 대답을 재촉하는 온기현을 가만히 보던 류주호는 말이 없었다.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류주호는 곧, “그러든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온기현이 해설피 웃었다. 불그레한 양 볼이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류주호의 낯에서 다시금 표정이 사라졌다.

그사이에 이윤규가 “교수 회관 가실래요? 거기 순두부 진짜 맛있는데.”라고 말했다. 결국 어색한 셋이서 점심을 같이 먹기 위해 교정을 나란히 걷게 됐다.

이윤규는 걸어가는 내내 온기현의 옆에 딱 붙어 섰다. 류주호와 온기현 사이를 비집고 들어올 것처럼 불쑥 발을 들이밀며 연신 실없이 웃긴 소리를 해 대었다.

류주호는 말이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윤규와 온기현이 있는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기현이 이윤규의 말에 그러게, 응, 하고 대충 대꾸를 해 주었다.

교수 회관에 있는 식당은 교수들만 이용하는 식당은 아니었다. 학생회관보다 좋은 퀄리티의 식사를 판매하는 이곳은 누구에게나 오픈되어 있어, 대학원생들부터 학부생들까지 득실득실했다.

셋은 똑같이 순두부를 시켰다. 식판을 들고 빈 테이블을 찾아가서 앉았다.

온기현의 맞은편에 앉은 류주호는 말없이 차가운 낯으로 식사에만 집중했다. 반면 이윤규는 계속해서 무어라 떠들었다. 주로 온기현에게만 대화를 건넸고 류주호는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처럼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아, 맞다. 형, 우리 다음 스터디 미뤄진 거 아시죠? 단톡에 올라온 거 보셨어요?”

“응. 봤어. 어떻게 현석이랑 상오 둘이 동시에 감기에 걸리지. 이번 유행하는 감기가 독하다던데.”

“그러게요. 아. 어차피 스터디도 안 하는데, 내일 형네 집에 놀러나 갈까요? 저번에도 형 집에서 자려고 하다가 못 간 것도 아쉬운데.”

“응.”

온기현은 이윤규의 말에 순두부찌개 국물을 수저로 떠 입으로 가져가며 그렇네, 하고 열없이 대답했다. 그때였다.

“기현아.”

“응?”

여태 내내 말이 없던 류주호가 온기현을 불렀다. 이윤규를 향해 돌아 있던 얼굴이 정면으로 돌았다. 류주호는 싱긋 웃음을 띠고 있었다.

“어제 너희 집에서 빌렸던 네 바지, 빨아 놨어. 오늘 가져가.”

“푸훕!”

순간 입에서 밭은기침이 터졌다. 빨간 국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다행히 손으로 막았다.

‘뭐라는 거야, 지금.’

왜 갑자기 어제 있었던 일을 이런 데서 꺼내는 건지. 모난 얼굴로 류주호를 쳐다봤다.

“괜찮아?”

하지만 류주호는 대수롭지 않은 화제라는 듯, 살뜰히 티슈를 뽑아 주고 물컵을 건네 줬다. 그런 그를 한껏 노려보며 다급하게 컵을 받아 들고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말 자체는 사실 바깥에서도 충분히 나눌 수 있는 내용이었다. 특히 동성의 동기 사이에서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대화였다. 하지만. 그 내밀한 사정을 아는 당사자인 온기현으로서는 그저 어이없기만 했다.

“…….”

그런 둘을 번갈아 쳐다보던 이윤규가 말없이 식사를 재개했다.

그렇게 어색한 점심을 마치고, 이윤규는 볼일이 있다며 성급하게 자리를 떴다. 잘 가라며 인사하다 느닷없이 몸을 돌려 류주호를 노려봤다.

“야, 너 미쳤어? 거기서 그런 말 하면 어떡해.”

“무슨 말?”

“아니. 어제, 어? 바지 네가. 그.”

“응.”

류주호는 무고한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씨. 됐다, 됐어.”

하아.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미안.”

류주호가 나직한 저음으로 작게 속삭였다.

“앞으로는,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 밖에서 얘기 안 할게.”

“…….”

그래. 그거였다. 세모꼴로 치켜뜬 눈꼬리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류주호가 순순하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 오다니. 참, 사람이 많이 바뀌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해.”

“절대, 약속.”

진중하게 그렇게 대답해 오는 류주호가 조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보이지 않는 처진 귀라도 달고 있는 느낌이다. 이윤규가 들으면 기겁할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온기현이 피식 웃으며 “약속이야, 진짜.” 하고 장난스레 윽박질렀다.

마음이 풀어진 둘 사이에는 금세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따사로운 봄볕과 활기찬 캠퍼스 가운데에 선 둘의 모습이 새삼 낯간지럽게 다가왔다.

“근데 진짜로 옷 가지러 가긴 해야겠다.”

“음?”

“어제 그 옷, 아까 말한 거 말야.”

“아.”

류주호가 그렇게 외마디를 뱉더니 손으로 제 입가를 슥 가렸다. 그러고는.

“그냥 나중에 내가 가져다줄게.”

“어? 왜? 지금 가지러 가면 안 돼?”

“…….”

류주호는 뭔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체 뭘 고민하는 거지. 그러다 퍼뜩, 류주호가 주소도 바꿨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경찰서에서 남자로부터 들은 얘기였다.

“……알겠어. 가자.”

잠시 말이 없던 류주호가 그렇게 말했다.

“너……. 여기 살아?”

“응. 들어와.”

온기현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류주호가 제집이라고 가리킨 곳은, 다름 아닌 제 자취방이 위치한 빌라촌이었다.

즉, 같은 동네였다. 사실 한국 대학교의 자취생이 대부분 이 동네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난한 고학생들의 집결지에 그쳤다. 류주호가 이전에 살았던 고급 오피스텔을 생각하면, 온기현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장소였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류주호가 열어 준 현관문으로 들어갔다. 제가 사는 낮은 층의 빌라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는 외관의 건물이었다. 그리고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신발장에 신발을 벗고 들어온 기현은 류주호가 지금 살고 있다는 방 안을 빙 둘러봤다. 어딜 어떻게 봐도 그냥 원룸이었다. 구조도 온기현의 자취방과 흡사했다.

다만, 류주호의 자취방은 살림살이가 단출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잠만 자기 위해 마련된 공간인 것처럼, 창가 쪽에 커다란 매트리스 하나와 2인용의 작은 좌식 소파만 덜렁 놓여 있었고, 부엌에도 변변한 살림살이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공간 자체가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빈한한 살림을 멍하니 둘러보며 어색하게 발걸음을 안으로 옮겼다.

“거기 잠깐 앉아 있어.”

“아, 응.”

류주호가 가리킨 좌식 소파로 다가갔다. 가방을 내려놓고는 엉덩이를 내렸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아 있는 동안, 류주호가 욕실로 들어갔다. 손을 씻는 것인지 샤워를 하는 것인지 한참이나 안에서 거센 물소리가 들렸다.

애꿎은 상념에 사로잡혔다. 대체 그동안 류주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했다.

욕실에서 나온 류주호는 반소매 티셔츠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여기저기 솟은 앞머리 끝에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류주호는 작은 냉장고를 열어 생수병 두 개를 꺼내고는 들고 온기현이 있는 좌식 소파 쪽으로 다가왔다. 옆에 앉지 않고 옆에 붙은 매트리스 위에 털썩 주저앉는 류주호를 온기현이 빤하게 바라봤다.

“어쩌지. 집에 이거밖에 없네.”

“아, 진짜? 괜찮아. 나 어차피 물 마시고 싶었어. 아까부터.”

건네주는 생수병을 든 온기현이 손으로 드득 뚜껑을 따고는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아, 시원하다. 괜히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곁눈질로 류주호를 쳐다봤다. 류주호도 마찬가지로 생수병을 목을 젖힌 상태로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속이 홧홧하니 더운 사람처럼, 목울대를 꿀렁이며 500밀리 생수병을 단숨에 비워 냈다. 티셔츠의 소매 안에서 들어 올린 팔뚝이 씰룩이며 불거졌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온기현의 등줄기에 싸한 전율이 일었다. 굵은 목줄기의 핏줄에까지 괜히 눈이 갔다. 목이 꽉 잠긴 듯한 느낌에 생수병을 다시금 입으로 가져가 꼴깍꼴깍 목을 축였다.

“너……. 여기로 이사 온 거야?”

결국 참다못해 제가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화제를 입에 담았다. 류주호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응,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얼마 안 됐어. 한, 두 달…… 정도 됐나.”

“왜?”

그렇게 물은 온기현이 입을 다물었다. 류주호가 저를 빤히 쳐다본 탓이었다. 손끝이 조금 굽어졌다. 얼핏 들었던 말이라서 굳이 물을 필요가 있나 싶었다. 동시에 물어도 되나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집에서 나왔거든.”

류주호의 말이 더 빨랐다. 그는 으음, 하고 목을 울리고는 말을 이었다.

“아……. 어, 쩌다가?”

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집안의 어떤 일 때문일까. 혹시 자신과 관련된 일 때문일까.

고향에서 저를 반겨 주던 부모님이 생각났다. 아무리 이상한 사람이더라도, 그래도 피가 이어진 가족은 불변의 안식처였다. 적어도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아버지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절연을 당했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이야기였다.

자꾸만 눈꼬리가 처져 가는 온기현의 얼굴을 보며 류주호가 말을 덧붙였다.

“원래부터 독립은 하려고 했었어. 다만, 과정이 좀 매끄럽지 않았어. 그때는, 당시에는 내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거의…….”

미친놈처럼.

뒷말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워 기현의 귀에는 자조의 한숨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괜히 너까지 말려들게 되는 꼴이 됐지만. 깨끗하게 정리 못 한 온전히 내 잘못이야. 그러니까 이 모든 건 전부 내가 짊어질 일인 거고, 앞으로도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야. 기현아.”

아.

류주호가 자꾸만 다른 생각에 빠지려는 제 이름을 부르며 주의를 저로 돌렸다. 예전보다 편안해진 복장과 이것저것 부족해 보이는 살림들, 무엇보다 완벽하고 뭐든지 가질 수 있었던 류주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네가 신경 쓸 일 하나도 없어.”

“…….”

“이런 나를 아직 네가 좋아해 준다면.”

“…….”

“그럼 다 괜찮아. 난 너만 있으면 돼. 이제 다시는, 예전 같은 잘못 안 해.”

절박하게만 들리는 말에 온기현이 말을 잇지 못했다. 절박함과 류주호라니. 이토록 안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류주호는 마치 구명줄 하나만 기다리는 표류자처럼 초조해 보였다. 무척이나.

“아니면, 이런 아무것도 아닌 나는 별로 재미가 없어?”

“뭐어?”

온기현이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렸다. 입이 불퉁하게 튀어나왔다. 자신은 별로, 류주호의 배경이나 그가 가진 것 때문에 그를 좋아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반하게 된 순간이 너무 류주호란 사람, 그 자체에 쏠려 있어서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걱정이긴 했지만 말이다.

물론, 류주호가 무심하게 할퀴는 말에 상처를 입은 마음과 류주호가 처한 상황, 그리고 그가 빌었던 용서를 온전히 수용하고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아직 시기상조였다. 그럼에도 둘은 풀어졌던 관계를 이제 겨우 꿰어 나가려고 하는 첫발을 막 내디뎠을 뿐이다.

“무슨 말이야, 너. 어? 내가 그런 놈으로 보이냐?”

쏘아붙이듯 인상을 찡그리자, 류주호가 깊은 눈매를 가느다랗게 접었다.

“아니. 귀엽게만 보여서 큰일인데.”

“헐. 뭐야. 너 언제부터 이런 낯간지러운 소리 했어. 진짜……. 그리고 남자한테 귀엽다는 말이 뭐야. 남자답고 멋있다고는 못 할망정…….”

능청스러운 그의 말에 헐, 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터뜨리려고 했다. 그런데 자꾸만 삐걱거리는 안면 근육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뜨끈한 귓불을 식히려 괜히 손으로 잡아당겼다.

“근데 잘 보니까 여기 좋은 것 같아. 되게 아늑한데? 내 방이랑 구조는 비슷한데 여기가 뭔가 창이 더 커서 그런가. 햇빛도 잘 들어오는 것 같고.”

온기현은 부러 장점을 찾아내어 류주호에게 말해 주었다. 저도 비슷한 자취방에 살고 있고 누가 누구를 걱정하냐 싶었지만, 집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는 말을 듣고 나니 어딘가 처량해 보이는 이미지를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

“응응. 그리고 막 좁은 데에 너무 살림 많은 것도 안 좋아. 이렇게 매트리스 하나, 소파 하나 있는 게 딱 깔끔하고 좋은 것 같은데?”

제가 앉은 소파를 탕탕 두드리며 류주호가 엉덩이를 걸치고 있는 매트리스 쪽으로도 손을 길게 뻗었다. 소파와 매트리스 사이가 좀 떨어져 있는 터라 몸을 앞으로 눕히는 것 같은 자세가 됐다. 시중에 파는 것보다 두껍기는 하지만 무릎보다 낮은 높이에 있는 매트리스에 걸터앉은 터라 류주호는 무릎을 세운 자세였다.

“와ㅡ. 되게 푹신하다. 어디서 샀어? 원래 쓰던 가구들은 다 버렸어? 아님 팔았어?”

“…….”

온기현이 쫑알쫑알 질문을 해 댔다. 류주호는 대답이 없었다. 그에 “응?” 하면서 고개를 들어 눈높이가 조금 높아진 류주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 순간 귓가에 철렁, 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을 정도로 심장이 아래로 뚝 내려앉았다.

‘내가 너무 티 나게 굴었나? 억지로 말하는 것처럼 보였나?’

류주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턱은 앙다물려 근육이 불거져 있었으며, 말마따나 채광이 좋아서인지 얼굴 위로 드리워진 햇빛 때문에 눈이 얼핏 충혈되어 보이기도 했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느닷없이 전신을 지배한 팽팽한 긴장감에 등줄기에 땀이 맺혔다. 가슴께부터 화한 열감이 머리끝까지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목울대가 꿀꺽, 하고 울렸다. 그러자 순간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로 류주호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어.’

그러자 열기 어렸던 공간의 온도가 급격하게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온기현의 얼굴이 풀어진 것도 동시였다. 착각했나 보다.

“이제 나갈까?”

“어? 어딜? 벌써?”

류주호가 선선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온 지 10분도 채 안 된 것 같은데.

“응. 사람 많은 곳에 가서 바람 좀 쐴까 하고.”

‘아. 괜히 민망해서 그런가.’

여과 없이 제 빈한한 사정과 속내를 드러낸 후에 들이닥치는 현타 비슷한 건가. 하지만 이제 막 해묵은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는 중이었다.

“아냐. 좀만 더 있다가 나가자.”

그렇게 말하며 엉덩이를 조금 가까이 끌어왔다.

“……그래.”

류주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너 머리는 왜 잘랐어? 옷도 너 원래 그런 거 안 입었었잖아.”

금세 다른 화제로 돌렸다. 분위기를 쇄신하려 생각나는 대로 입에 질문을 담았다가 속으로 아차, 싶었다.

“아아. 이거. 그냥, 관리하기 좀 귀찮아져서.”

“그래?”

진짜로 돈이 많이 들어서 그런 건가. 이전과 같은 스타일을 유지하려면 아무래도 지금보다는 좀 더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던 게 아닐까. 기현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런데 너는 왜 염색했어? 그것도 이런 갈색으로.”

“아, 이거.”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류주호의 손이 온기현의 머리카락 쪽으로 뻗어 와, 앞머리 끝부분을 살금살금 매만졌다. 그게 어쩐지 간지럽고 멋쩍어져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나, 나도 분위기 전환 좀 해 보고 싶어서. 맨날 검은 머리만 했었는데, 아무래도 숱이 많으니까 좀……. 더 지저분해 보이기도 하고.”

“그래? 검은 머리도 예뻤는데.”

“허.”

“지금도 예쁘지만.”

“뭐래. 아까부터. 너 어디서 입에 기름칠해 오는 강의라도 받았어?”

헐, 헐,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자신의 입술을 가리켰다. 그와 동시에, 류주호의 시선이 손가락을 따라 그 끝이 가리키는 종점에 다다랐다.

‘아…….’

아래를 접붙이고 짐승처럼 서로의 체액을 뒤집어쓴 채 밤을 지새운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런데 단지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성적인 긴장감이 확 치솟았다.

쿵. 쿵. 쿵. 심장 박동이 일시에 거세졌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얼굴이 가까워졌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튼 류주호가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온기현은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자세로 허리를 길게 늘였다.

흣…….

눈을 질끈 감았다. 말캉하게 짓눌리는 입술의 감촉이 선연했다. 이렇게 밝은 대낮인데도 어쩐지 시야가 깜깜하게 느껴질 정도로 어지럼증이 몰려들었다.

맞붙은 살이 점점 습윤해지기 시작했다. 가만히 붙어 있던 입술을 꾸물꾸물 움직이자, 그에 화답하듯 류주호가 살짝 입을 벌려 온기현의 말랑한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리고 제 입 안 점막에 살짝 닿도록 머금고는 가만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게 노골적으로 혀를 섞는 행위보다 더욱 외설적으로 느껴졌다. 가만히 서로의 감촉만 느끼고 있는데도 눈꺼풀이 덜덜 떨리고 백 미터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심장이 요동쳤다.

결국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서 작게 입을 벌려 하아, 하고 짓눌린 틈새로 숨을 내뱉었다. 그때. 아주 작은 틈을 축축하고 두툼한 살덩이가 비집고 들어와 입 안의 여린 점막을 툭, 건드렸다.

“으응……!”

온기현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터졌다. 제 귀로 듣기에도 깜짝 놀랄 정도로 음란하기 짝이 없는, 요상하고 야릇한 소리였다. 하지만 차마 막을 정신이 없었다. 팔에서 힘이 풀리고 자꾸만 숨이 흐트러졌다. 읏, 흐으, 하고 습기 어린 숨이 연신 잇새로 비어져 나왔다.

고작 맞대고 있는 것만으로.

그에 반해, 류주호의 숨은 매우 안정적이었다. 그 뒤로 한 차례 더 얼굴을 기울인 각도가 반대로 바뀌며 서로의 콧날이 볼에 닿고 입술이 깊게 눌렸다. 머리가 핑핑 돌았다. 더는 팔 힘으로 지탱할 수 없다고 느낄 때쯤, 달라붙었던 젖은 살이 쪽, 소리를 내며 힘겹게 떨어졌다.

하아, 하.

수면 아래에서 한참 동안 잠수하며 숨을 참았던 사람처럼 온기현이 가슴을 들썩이며 입을 벌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거웠고 머릿속이 뭉근했다. 게슴츠레하게 뜬 눈이 어룽져 류주호를 향했다.

반면, 류주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아주 멀쩡해 보였다. 그저 조금 가라앉은 눈빛을 해 보일 뿐이었다. 이전처럼 혀를 섞는 질척한 애무도 아니었는데 저만 잔뜩 흐트러졌다.

‘아…….’

그런 온기현을 바라보던 류주호의 눈썹이 잠시 꿈틀하는가 싶더니, 단정한 몸짓으로 굽혔던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러고는 담담하고 차분한 표정으로 군더더기 없이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에 외려 혼자 안달 난 듯한 기분에 온기현의 얼굴이 더욱 시뻘게졌다.

“크흠, 흠.”

괜히 목을 가다듬으며 생수병의 남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순식간에 절반 이상을 비운 온기현이 손등으로 젖은 입술을 닦았다.

동시에 얼른 다른 화제를 생각해 내려 애썼다. 그러다 번뜩 무언가 떠올렸다.

“아. 혹시 취업 스터디 같이 안 할래?”

“……스터디?”

“응. 나 이번 학기부터 시작하게 됐는데. 같이 기업 분석하고, 자소서 같은 거 첨삭도 봐주고. 그래서 너도 필요하면 같이하면 어떨까 하고.”

류주호는 이번 학기가 졸업이었다. 여러 가지 사정을 들어 보고 종합해 봤을 때, 류주호도 이번에 취업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진짜?”

“응. 할게.”

“그럼 내가 현석이한테 연락해 놓을게.”

“현석이……?”

“어. 너도 알잖아. 과대였던 애.”

류주호는 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모르나? 말도 안 돼. 온기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하게 쳐다봤다. 그러자 류주호가 저를 빤히 보는 온기현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동시에 천천히 손을 뻗어 왔다. 그리고 바닥을 짚은 온기현의 손 위를 덮으며 가득 그러쥐었다.

온기현이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눈을 접으며 가지런한 이가 보이게 배시시 웃었다. 저도 화답하듯 손을 뒤집어, 따듯한 온기를 맞잡았다. 커다란 창으로 들이치는 봄 햇살만큼 따사롭기 그지없는 체온이었다.

* * *

“와. 진짜 맛있었다.”

“맛있었어?”

“응.”

온기현이 만족스럽게 눈썹을 늘어트리고 웃으며 포만감이 그득한 배를 티셔츠 위로 매만졌다.

학교 근처에 새로 생긴 맛집이라고 하는 멕시칸 음식점이었다. 동네 이웃이 된 둘은 오늘 학교에 같이 가기로 약속하여, 수업 시간 전에 만나서 점심을 해결한 참이었다. 일전에 이윤규로부터 얼핏 들었던 타코가 맛있다던 가게를 생각해 내어, 류주호에 넌지시 제안했다.

가격도 저렴하고 양도 많아서 가성비를 노리기에 최적인 곳이었다. 한국대 학생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했다. 다행히 조금 이른 시간에 들러서 기다리지 않고 주문할 수 있었다. 듣기로는 웨이팅이 어마어마하다고 했었다.

“나 타코 처음 먹어 봤는데. 막 되게 강한 향신료? 같은 냄새 날 줄 알았거든. 근데 하나도 안 났어.”

“그랬어?”

“어. 너는? 먹어 본 적 있어?”

옆에서 나란히 걷는 류주호를 향해 그렇게 묻자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헐. 진짜? 혹시 멕시칸 음식 안 좋아해?”

“아니. 이제까지 기회가 없어서 안 먹어 봤어. 먹어 보니까 맛있더라.”

“아, 다행이다.”

하긴. 류주호는 맛이 없으면 맛이 없다고 대놓고 가게 사장의 면상을 향해 말할 위인이었다. 괜한 걱정을 했나 싶었다. 하지만, 요새 들어 온기현을 향해 엄청나게 온유해진 태도를 보이는 류주호를 보니 얘도 개과천선한 건가 싶기도 했다.

류주호는 민무늬의 맨투맨을 입은 가벼운 차림으로, 몸을 가로지르는 스포츠 백을 메고 있었고 머리는 가볍게 매만져 자연스럽게 사방으로 흐트러진 모양이었다. 정말 어떤 화려한 장식도 하지 않았고 공들여 꾸민 티도 나지 않는데도 류주호는 오늘따라 한층 돋보였다. 어디 유명한 스포츠 브랜드의 모델 같기도 하다는 저만의 감상을 떠올렸다.

괜히 계속해서 류주호를 향해 시선이 갔다. 더욱이, 아까부터 팔을 흔들며 걷는 새에 몇 번이나 손등이 스친 터라 자꾸만 의식이 됐다.

‘손, 잡고 싶다.’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고는 괜스레 머쓱해져 혼자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손잡을까?”

“뭐어?”

하지만 그때. 류주호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 말에 외려 온기현이 펄쩍 뛰었다. 마음의 소리가 들린 건 아니겠지, 이런 실없는 생각까지 진지하게 들 정도로 깜짝 놀랐다.

“미, 미쳤어? 여기 밖이야. 여기 학교 근처거든?”

“뭐가 어때서. 사람 없을 때는 괜찮잖아.”

류주호는 농담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난. 너 자랑하고 싶은데.”

“자랑?”

“응. 네가 내 애인이라는 자랑. 내가 말했었잖아.”

내가 네 마지막이라고 외치고 싶다고.

온기현이 입을 벙긋거렸다.

“야. 그건, 그건 그냥 우리끼리 한 얘기잖아.”

목소리를 낮추어 얘기하며, 살짝 어깨를 움츠린 채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런가.

류주호가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읊조렸다.

느슨하게 걸린 호선이 마냥 부드럽지 않게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불만 어린 것처럼 조금 인상이 날카롭게 변했다.

아무리 요새 세상이 개방적으로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동성 간의 연애는 아무래도 눈총 받기에 십상이었다.

“너 행여나, 어? 스터디 애들 앞에서 막, 티 내거나 그러면 안 되는 거 알지?”

“어떻게?”

“우리 둘이…… 있을 때처럼 말이야.”

되묻는 말에 이제껏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을 그에게 재차 짚어 주었다. 그러자 류주호가 설핏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한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요 며칠 동안 류주호의 집에 매일 놀러 갔다. 처음에는 어색하기만 했던 둘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조금씩 좁혀지는 것을 느낄 새도 없을 만큼 매일 가까이서 서로를 마주했다.

나른한 오후에는 서로의 손을 붙잡고 서로 손 크기를 대 보면서,

‘너는 뭐 먹고 이렇게 손이 커졌어?’

‘글쎄. 고기?’

‘나도 고기 좋아하는데.’

‘응. 내가 앞으로 많이 사 줄게.’

‘소고기 많이 먹으면 그럼 나도 커지려나? 너처럼 막 이렇게.’

‘많이 먹고, ……많이 운동하면 가능하지.’

이런 실없는 말을 주고받기도 했다. 팔뚝과 팔뚝이 맞닿아 옷감 위로 전해지는 따듯한 체온이 만들어내는 어릿한 긴장감 속에서, 뜨거운 온도가 온몸으로 번지는 안정적인 기분을 만끽하기도 했다.

그리고 온기현의 손등 위에 난, 이제는 흔적도 잘 남아 있지 않은 옛 상처를 보며 이 세상에서 제일 안타까운 표정을 하는 류주호를 향해 “네가 내 등 발로 찬 데는 더 아팠거든?”이라고 뼈 있는 말로 쏘아붙이기도 했다. 류주호가 작게 “미안해.”라고 사과해서 온기현은 때늦은 용서의 의미로 류주호의 손바닥을 마구 간질여 주었다. 피식 웃는 류주호를 보며 장난스레 키득거렸다.

이제는 다 지난 일이었고, 엉망이었던 순간들조차 추억으로 쌓아 가는 재조립의 과정이 필요한 시기였다.

서로에게 체온을 조금씩 나누어 주며 천천히 시작해 나가는 흔한 연인의 모습이었다.

‘혹시 삐졌나?’

제 볼을 손끝으로 긁적였다. 하지만 류주호는 삐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걷는 동안 옆에 있는 새로 생긴 고깃집을 보며, “다음에는 여기 와 보자.”라며 온기현을 향해 온유한 어투로 말했다. 그에 “좋아!”라고 대답했다.

카페 입구의 버튼을 누르자 자동문이 좌우로 열렸다. 둘은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커뮤니티 룸을 별도로 예약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카페는 스터디를 하기에 제격이라, 심현석이 아예 일주일 단위로 예약해서 잡아 놓은 곳이었다.

카페 중앙을 가로질러, ‘5번’이라고 쓰여 있는 커뮤니티 룸의 문을 열었다.

“어? 기현 선배.”

“기현이 형. 왔어요?”

“어서 와요.”

“응. 안녕.”

온기현이 앞서 안으로 들어서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류주호가 따라 들어왔다.

“헛.”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반가웠던 안색을 언제 떠올렸냐는 듯 어색한 인사가 공간을 휩쓸었다.

류주호를 스터디에 끼워 줘야겠다고 말하자마자 바로 단톡방에 미리 언질은 해 두었다. 그리고 그 전에, 이윤규에게 먼저 따로 물어봤다. 류주호에 대해 안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는 그의 반응이 신경 쓰였다.

하지만 이윤규는 “형이랑 싸운 거 아니면 딱히 전 상관 없어요.”라고 의외로 가볍게 대답했다. 그래서 안심하고 단톡방에 넌지시 말을 꺼낼 수 있었다.

혹시 스터디에 자리 하나 남냐는 말에 심현석이 한 명 더 들어와도 좋다고 흔쾌히 대답했다. 나머지 애들도 마찬가지로, 온기현의 지인이면 좋다고 하며 다음 스터디부터 데리고 와서 같이하자고 말해 왔다.

모두의 머리 위로, ‘설마.’ 하는 생각이 둥둥 떠올랐다. 설마, 온기현이 데리고 온다는 지인이 류주호였던 건가, 하는 생각들이었다. 이윤규만 홀로 쓴 어색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이고 있었다. 얼마 전 같이 점심을 먹고 체한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온기현과 류주호가 일으킨 소용돌이 안에 잠시 끼워진 적이 있는 심현석은 의아함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미안해. 갑자기 스터디에 참여하게 돼서. 내가 기현이한테 졸랐어. 이제 취업 준비도 슬슬 해야 하고, 졸업 학기인데 마냥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어쩐지 정상적인 선배처럼 유하게 말을 읊는 류주호를 보며 다들 “아, 예.”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이 불현듯 들이닥쳤다. 둘을 위해 비워 둔 두 자리에 걸터앉으며 온기현이 류주호를 향해 살피듯 시선을 보내자, 류주호가 테이블 아래에서 보이지 않게 온기현의 손가락을 툭 건드렸다. 헉, 하고 놀라며 얼른 두 손을 테이블 위로 올려놨다.

“아, 그럼. 어……. 일단 오늘까지 각자 분석해 오기로 한 기업 정보들 하나씩 꺼내 볼까요. 류주호 선배님은 오늘 처음 오셨으니까, 일단 분위기만 한번 보시고요. 각자 다음 주까지 할 일은 스터디 끝나고 말씀드릴게요.”

심현석은 애써 냉정을 되찾고 제 할 일을 다 함에 여념이 없었다. 온기현 또한 제 가방에서 제가 준비한 자료를 꺼내 놓았다.

음료는 스터디 공용 비용을 관리하는 심현석이 한꺼번에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미리 주문해 놓은 상태였다. 제 앞에 있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쪽 빨아 먹었다. 오늘따라 산미가 짙은 커피에서는 쓰고 떨떠름한 맛이 났다. 단것이 당겼지만, 저 혼자 먹기도 머쓱해서 입 안에서 혀만 축였다. 그때.

“초콜릿 프라푸치노 사 올까?”

류주호가 온기현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갑자기 뜨끈한 숨이 닿아 와 거의 튀어 오르듯 화들짝 놀라며 귓바퀴를 감싼 온기현이 류주호를 향해 매서운 눈길을 보냈다.

제발 가만히 있어.

그렇게 소리 없이 말하자, 류주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대고는 턱을 괸 채 하관 부근을 손으로 감싸듯 가렸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자료를 펼치고는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한 명씩 제가 분석해 온 자료를 꺼내 들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터디가 시작되자 분위기는 대번에 바뀌었다.

기업 분석한 내용을 가만히 듣던 류주호가 한마디 거든 것이 시작이었다.

“와, 대박. 선배님 저도 이것 좀 봐주세요. 다트 사이트 보고 저 나름대로 분석한 거긴 한데, 사실 쫌 아리송하거든요.”

“그럴 때는 재무제표 분석도 중요한데, 기업에 대한 최근 기사도 같이 찾아봐야지. M&A나 지분 투자, 혹은 이종 업계 간 MOU 계약이라든가 협업 관계 등을 파악하려면.”

“헐. 그렇구나.”

“선배님, 선배님. 저도 좀 봐주세요.”

이전부터 제 사업을 준비하며 시류의 흐름과 경영 성과 지표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던 류주호다. 이것저것 기업 분석 방법과 노하우에 대해 제가 아는 것을 전수해 주자, 류주호는 단 30분 만에 이 취업 스터디의 다크호스가 되었다. 아니, 거의 구세주라도 된 것처럼 모두의 선망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이제까지 없었을 정도로 활기를 띤 이번 스터디 모임은 원래 두 시간이었는데 어느새 두 시간 반을 훌쩍 넘는 시간까지 계속되었다.

“우리 이제 수업 있어서 가 봐야겠는데.”

“아. 저도 이제 알바 가야 돼요. 헉!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더 빨리 만날걸. 아쉽다. 선배님, 다음에는 우리 뭐 해 오면 될까요?”

김상오와 고연희가 류주호에게 친근감을 표하며 그렇게 말했다. 심현석과 이윤규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눈을 빛내며 류주호를 쳐다봤다. 당장 제 취업의 운이 달려 있는 이 앞에서, 이전의 껄끄러운 감정들은 무의미해 보였다.

류주호는 그런 후배들을 심상한 낯으로 쭉 둘러봤다. 그러다 제 옆에 앉은 온기현과 눈이 마주쳤다.

온기현은 류주호가 후배들과 잘 지내는 모습이 신기하고 흐뭇하다는 듯 새까만 눈을 빛내며 류주호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내심 저 멍청한 버러지들이 당장 지구 밖으로 꺼졌으면 좋겠고, 스터디도 오늘부로 영영 해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류주호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우리 망아지가 저렇게 사랑스럽게 쳐다보는데, 감히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다음은 각자 들어가고 싶은 업종의 톱티어 기업들 몇 군데 추려서 각 회사별 장단점 분석해서 가져와.”

“네!”

“네, 알겠습니다.”

“넵.”

“알겠습니다!”

대답이 우렁차기 그지없었다.

“응!”

그리고 마지막으로 온기현이 대답했다.

‘귀여워. 씨발.’

류주호는 잠시 머리가 핑 도는 어지럼증을 느끼며 쓴웃음과 함께 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카페를 나온 둘은 그대로 학교를 향해 걸어갔다. 지금부터 있는 수업은 다름 아닌 둘이 함께 듣는 콘텐츠 수업이었다. 결국 돌고 돌아 같은 수업에서 다시 만난 둘이었다.

‘이번에도 중간 때는 발표하고 기말에는 뭐 영상 찍어서 올리라고 하려나.’

비틀어지기 시작한 시점이 딱, 기말을 위한 영상을 준비하던 시점이었다. 결국 기말을 위한 영상을 제대로 찍지도, 올리지도 못한 채 그대로 휴학해 버렸다. 그리고 아마 류주호도 마찬가지로…….

온기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졸업을 유예했던 게 진짜로 자신 때문이냐고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심각한 화제를 꺼내는 게 쉽지는 않았다. 굳이 확인받을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여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그보다 류주호의 말이 더 빨랐다.

“그런데.”

“어?”

심상하게 읊은 말에 온기현이 고개를 류주호 쪽으로 홱 돌렸다. 류주호가 시선을 내리며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 언제 죽여 줄 거야?”

“뭐? 무슨.”

뜬금없는 험한 소리에 온기현이 눈을 크게 떴다.

“수강 변경 안 하면 나 죽일 거라고 했잖아.”

류주호가 그 말을 하며 장난스레 입꼬리를 올렸다. 대뜸 무슨 소리인가 하다가, 제가 개강 총회 뒤풀이 때 술집 뒤편에서 류주호에게 빽 소리 질렀던 일이 떠올랐다.

“나는 수강 변경할 생각 없는데. 너랑 이 수업 마지막까지 꼭 들을 거야.”

“허. 야. 그, 그건 그냥 한 말이지. 그리고 지금 같이 가고 있잖아. 같이 들어야지.”

나도 너랑 끝까지 수업 잘 마치고 싶어.

온기현이 조용하게 그렇게 덧붙였다.

“나도.”

류주호도 그렇게 읊조렸다. 어쩐지 학교를 향하는 발걸음이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 가볍게 두둥실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 * *

으응…….

입에서 축축한 신음이 터졌다. 아까부터 참을 수 없이 내리 새어 나오던 앓는 소리가 점점 제어되지 않고 제멋대로 마구 쏟아지고 있었다.

함께 류주호의 집에서 불을 어둡게 꺼 놓고는 둘만의 영화 데이트를 즐기던 중이었다. 얼마 전 둘이 함께 구매한 작은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는, 벽에 등을 대고 어떤 영화를 볼지 선택하던 때였다.

재난 영화를 볼까, 아니면 마블 시리즈를 볼까, 하면서 류주호의 얼굴을 돌아봤다. 류주호는 벽에 등을 댄 채로 온기현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무표정으로 있으면 냉하게만 보이는 류주호의 몸에서 어쩐지 후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지는 착각까지 일 정도로 진득한 시선이었다.

요새 들어 이런 시선을 자주 받고는 했는데, 그럴 때마다 어쩐지 목이 턱 막힐 정도로 아찔한 감각에 휩싸이고는 했다. 그러고는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서로 입술을 겹쳤다.

류주호는 나란히 앉아 있느라 맞닿았던 어깨를 떼어 놓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온기현 쪽으로 고개만 틀어 입술을 감쳐물고 있었다.

흐, 응…….

그가 온기현의 입술을 제 것으로 베어 물 듯이 한 움큼 감쳐물다가 물컹한 살을 살살 빨았다. 뽀뽀보다는 진하고 키스보다는 못한 행위임에도, 더욱 예민해져만 가는 감각 때문에 어쩐지 뭔가 더 야릇하고 음란하게 느껴졌다.

자꾸만 흥분되는 몸 때문에 침대 시트가 와락 구겨질 정도로 아래를 짚은 주먹을 꽉 쥐었다.

‘더 하고 싶은데.’

사귀기 시작한 뒤로 뽀뽀는 수도 없이 했다. 서로의 집에 들락날락하게 되면서, 가볍게 쪽쪽거리는 건 이미 일상다반사였고, 지금처럼 진득하게 서로의 입술을 물고는 전해져 오는 체온과 숨을 오롯이 느끼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어쩐지 조금 모자란 느낌이 들었다.

제 뺨을 감싸 오는 손바닥의 온도 때문인지, 아니면 자꾸만 열이 오르는 제 얼굴 때문인지 맞닿은 곳곳이 너무 뜨거웠다.

“하아…….”

나만 이런 걸까. 나만 이렇게 막, 미칠 거 같은 건가.

억울한 듯 눈썹이 처졌고 미간이 자꾸만 움찔거렸다. 그에 따라 똑같이 입 안에 숨어서 움찔거리던 혀를 살짝 내밀어 봤다. 벌린 입술 사이로 스윽 밀어 넣는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결국 느리게 전진하던 온기현의 혀가 류주호의 살갗에 닿았다. 좀 더 용기를 내어 혀를 움직여 류주호의 입술 표피 위를 건드리다가 핥아 대듯 쓸었다. 그때였다.

“흡……!”

순간, 입술이 짓뭉개질 정도로 엄청난 압박감이 온기현을 옭아맸다. 혀끝이 살짝 닿은 것만으로, 마치 그것 하나로 안의 무언가가 폭발한 듯, 류주호가 입을 벌려 거세게 온기현의 입술을 연신 빨아들였다. 그리고 그에 놀란 기현의 헤벌어진 입 안으로, 이제까지의 고된 인내의 시간을 터트리는 것처럼 마구 쑤셔 넣기 시작했다.

“흐, 으응! 음……!”

정말 쑤셔 넣는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그것은 애무라는 수준이 아니었다. 입을 송두리째 넣고 빨아 대는 것과 동시에, 류주호는 마치 온기현의 여린 곳이란 여린 곳은 모조리 닿아야 한다는 강박증을 가진 사람 같았다.

급박하게 몰아치는 입맞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거기다, 어디로도 도망가지 못하도록 본능적으로 온기현의 움직임을 결박한 류주호의 팔 힘 때문에도 그러했다. 류주호는 온기현의 양 손목을 거세게 그러쥐어 한 손으로 손목을 붙잡은 채 다른 한 손은 벽과 온기현의 등 사이로 밀어 넣어 마른 허리를 받쳐 안은 상태였다.

눈앞에서 별이 튀었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점막의 자극이, 얌전히 닫혀 있던 성감이 억지로 벌어지는 느낌이었다. 쭙, 쭙, 하며 빨아 대는 통에 노골적인 젖은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정신이 혼몽했다. 터져 버린 신음을 참을 새도 없었다. 목에서 끙끙 앓는 소리를 낼수록, 류주호가 더욱 혀를 깊숙이 넣어 와서 그만두고 싶은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벌어진 입꼬리 사이로 지저분하게 침이 흐르고, 눈꼬리 끝에 맺혀 있던 눈물이 발간 볼 위로 주르륵 흘러내리는데도 닦아 낼 여유도 주지 않았다. 이미 이성적인 생각이 흐려질 대로 흐려진 기현조차 마찬가지였다.

마구 내리꽂히는 듯한 게걸스러운 입맞춤이 비단 입술이나 입 안뿐만이 아니라 온몸의 감각을 일깨웠다. 허리께가 저릿하게 울리며 후끈한 기운이 급격하게 아래로 몰렸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나른함 감각과 동반되는 흥분이었다.

‘아, 어떡…….’

류주호의 단단한 어깨 위에 놓인 손바닥에 무의식중에 힘이 들어갔다. 곤란한 상황이 찾아온 터였다.

턱까지 흘러내리는 끈적한 침까지 모조리 먹어 치울 기세로 입을 맞춰 오던 류주호가, 제 어깨를 슬며시 밀어 오는 온기현의 몸짓에 느닷없이 그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턱 아래를 손바닥으로 감싸더니 양 볼을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지그시 눌렀다. 그에 온기현의 입이 한계까지 벌어졌다.

“응……!”

살짝 밖으로 나와 입술 위에 걸쳐진 혀를 입술로 물더니 바로 쭉쭉 빨아당기기 시작했다. 혀뿌리까지 얼얼해질 정도로 강한 흡입력이었다. 동시에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부르르 떨었다. 엄청난 성감이 허리를 강타했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 더 아래였다. 몸의 중심보다 아래쪽, 가장 예민하고 민감한 부분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느낌이다.

‘아, 미친. 섰어.’

인식하자마자 빠르게 아래가 달아올랐다. 거의 반쯤 일어선 중심부가 후끈거리며 부풀어 올랐다.

“……ㄴ, 깐……! 흐, 아응……! 잠, 흐으…….”

그는 온기현이 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마치 귀먹은 사람같이 굴었다. 두 손으로 어깨를 밀어 대고 다리를 오므리려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는데도, 전혀 미동도 없었다.

숨을 쉴 수 없는 갑갑한 마음에 내리감고 있던 눈을 겨우 떴다. 그와 동시에 뜬 눈으로 저를 진득하게 바라보는 고요한 시선과 마주쳤다. 누군가 심장을 콱 움켜쥔 듯, 감각이 옥죄이는 느낌이 불시에 들이닥쳤다.

언제부터 저러고 보고 있었을까. 언제부터. 어쩌면, 처음부터.

순간 울컥하고 눈물이 차오르는 느낌이 들고, 버겁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류주호의 어깨를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돌덩이 같은 몸에 닿은 온기현의 주먹 쥔 손이 얼얼할 정도로 센 힘이었다.

“헉.”

저도 놀라서 숨을 들이켜자 그제야 난잡하게 움직이던 동작이 우뚝 멈췄다. 류주호가 제 혀를 물리며 빈틈없이 맞물렸던 입술을 겨우 떼어 냈다. 침으로 번들거리는 표피가 붙었다가 탄성 있게 흔들리며 떨어졌다.

“하아, 하아……. 미, 미안.”

온기현이 제가 때린 것에 대해 사과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세게 때린 건 아닌가 싶었다. 자꾸만 딱딱해지는 다리 사이를 오므리느라 벽에 몸을 기댄 채 약간 엉거주춤한 자세로 양손을 내려 침대 위를 짚었다.

“……괜찮아. 나야말로 미안.”

“엉? 아냐. 왜 미안해. 네가…….”

류주호는 언제 그렇게 다급하게 달려들었냐는 듯 금세 몸을 물리며 깨끗하고 상량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 가쁜 숨을 내쉬던 온기현이 머쓱하게 심호흡을 했다.

“아, 덥다.”

그렇게 말하며 창문을 열고 싶었지만 가라앉지 않는 사타구니 때문에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였다.

괜히 옆에 있는 생수병을 매만졌다. 목이 타오름을 느껴 뚜껑을 따려고 했는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스스로가 당황스러웠다. 온몸이 눅진하게 풀어지는 잔열이 남아 여태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내가 따 줄게. 이리 줘 봐.”

“아, 응.”

온기현이 생수병을 내밀자 따닥,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류주호가 뚜껑 없는 생수병을 다시 돌려주자 온기현이 꿀꺽꿀꺽 잘도 마셨다.

“나도.”

그리고 류주호가 그렇게 말하며, 온기현의 손에 들린 생수병을 가져가 남아 있는 물을 전부 입에 털어 넣었다. 고개를 내리자마자 와작, 생수병이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류주호의 손안에서 페트병이 거의 휴지 조각처럼 찌그러졌다.

“영화, 마저 볼까, 우리?”

“아.”

그에 멍하니 류주호를 보고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마우스를 움직여 스크린세이버가 돌아가는 노트북의 정신을 일깨웠다. 노트북이 아니라 지금 제가 정신을 얼른 차려야 할 정도로 저도 머릿속이 텅 비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어……. 뭐, 뭐 볼까? 이거, 아. 엣플 오리지널 시리즈도 재밌다고 그러고. 어, 또…….”

“음. 그러게. 다 재밌어 보이는데.”

“뭐 보지.”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온기현에게 류주호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더우면 무서운 거 볼까?”

류주호의 제안에 잠시 멈칫하다가 부러 쾌활하게 대답했다.

“무서운 거? 응, 좋지. 범죄물? 아님, 〈쥬라기 공원〉?”

“귀신 나오는 거 볼까.”

“……어. 재밌겠네.”

그래. 눈이 시꺼멓게 뚫린 섬뜩한 귀신의 얼굴을 본다면 확실히 열기를 가라앉히는 데 도움은 되겠다.

온기현이 비장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무서운 영화는 쥐약이었다. 특히, 귀신 나오는 영화는 더 그랬다. 어릴 적에 이불 아래로 들어오는 귀신이 나오는 영화를 본 뒤로는, 한때는 항상 자기 전에 이불 아래를 확인하고 잠들고는 했었다.

결국 호러 장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화를 틀었다. 섬네일부터 으스스했다. 벽에 등을 바짝 붙인 온기현이 무릎을 모아 굽혔다. 다행히 아래의 열기는 영화가 시작되며 음산하게 끼익거리는 효과음이 나오자마자 완전히 죽어 버렸다. 긴장감에 어깨가 바짝 굳었다.

그때. 손 위로 뜨끈한 손가락이 다가와 온기현의 손등을 툭 건드렸다. 흠칫 놀라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류주호도 고개를 돌린 채 저를 보고 있어, 얼굴 반쪽이 노트북 화면의 빛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무서우면, 손잡아 줄게.”

“나 하나도 안 무서운데.”

“진짜?”

류주호가 장난스레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하. 얘가 뭐래. 온기현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툴툴거리는 반응과 달리 손이 꾸물꾸물 움직였다.

그리고 기어가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잡아 줘.”

류주호가 커다란 손으로 온기현의 손을 빠듯하게 그러쥐었다. 손목을 타고 오르는 맥동에 어느새 환희가 넘실거렸다.

결국 공포 영화는 채 30분도 보지 못했다. 긴장된 어깨 때문에 근육이 잔뜩 굳어진 제 어깨를 주먹으로 툭툭 두들기자, 류주호가 막 본격적으로 내용이 전개되려는 영화를 꺼 버렸다. 그리고 로맨스 영화 카테고리에서 작년에 가장 유명했던 할리우드 로맨스 영화를 틀었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 한눈에 반하면서 시작되는 짝사랑 이야기였다. 결국 두 사람은 사랑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고 중반부까지 과연 이 사랑이 이루어지기는 하는 걸까 싶은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

숨죽여 영화에 집중하던 온기현은 문득 생각했다.

차라리 저 두 사람은 만나지 않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러다가 궁금해졌다.

만약, 우리 둘이었다면?

“우리가 만약 만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서로에게 그게 더 나은 쪽이 아니었을까. 처음부터 너에게 반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대학교는 여기로 왔을까? 아니면 지금쯤 다른 애인을 만나서 또 다른 사랑을 하고 있었을까. 만나게 될 사람은 여자였을까, 남자였을까.

지극히 단순한 생각의 흐름이었다.

당장 손에 닿는 온기가 있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어디까지나 상상만으로 그칠 수 있는, 해괴한 요술이라도 쓰지 않고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장난처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지금쯤 뭐 하고 있었을까?”

문득 류주호를 향해 조용히 그렇게 물었다. 영화는 남자 주인공이 술에 잔뜩 취해 길거리에서 비틀거리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잠시 영화에서 눈을 뗀 류주호는, 온기현이 곰곰이 여러 상황을 가정해서 생각할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갑자기 그게 궁금해?”

류주호가 낮게 되물었다. 그에 볼을 긁적이며 “그냥, 영화 보다 보니까.”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우리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응.”

“…….”

우리가 서로를 몰랐더라면. 아예 처음부터, 시작조차 하지 않았었더라면.

류주호는 잠시 침묵했다.

“……난, 네가 없으면…….”

가만히 뒷말을 기다렸다. 하고 싶은 말이 차올라 넘치는 듯, 아니 오히려 무수히 많은 말을 외려 담아내지 못해 말이 막힌 듯, 류주호는 말을 멈췄다. 그러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던 온기현이 장난스레 말했다.

“너 어디서 또 누구한테 막 칼 맞는 거 아냐? 아, 아니면 지금쯤 졸업해서 회사 다니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신입 사원 류주호라니, 진짜 안 어울린다.”

그렇게 뼈 있는 말을 하며 푸스스 웃음을 터트린 온기현을 가만히 응시하던 류주호가 이내 피식, 하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게. 정말 안 어울린다.”

정말, 상상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안 어울려.

그렇게 말을 갈무리한 류주호가 이내 “앞으로 좀 돌려야겠다. 내용 다 놓쳤네.”라고 해, 되감기 버튼을 눌러 다시 말없이 영화에 집중했다.

영화를 다 본 다음에는 언제나처럼 아쉬운 인사로 헤어졌다. 이렇듯 집에서 데이트를 하더라도 밤에는 언제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밥을 먹고 나른함에 깜빡 잠들더라도 류주호의 집에서 밤을 지낸 적은 없었다. 이제까지는 그게 일상처럼 자연스러웠지만, 진한 키스를 나눈 오늘은 그게 어쩐지 쉽지 않았다.

“데려다줄게.”

“야. 됐어. 뭘 데려다줘. 바로 요기 코앞인데.”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

류주호는 사귀고 나서부터 이렇게 대뜸 느끼한 말을 해 왔다. 그럴 때마다 온기현은 제가 다 부끄러워져서 핀잔을 줬지만, 지금은 어쩐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귀신이 나오는 공포 영화를 보느라 조금 무서운 것도 사실이었다. 티를 안 내려고 했지만, 자꾸만 굳어지는 몸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꽉 쥔 따듯한 손이 저를 위로하듯 손을 쥐고 연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결국 그만 보자는 류주호의 말에 계속 볼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리다가 반도 못 보고 꺼 버렸지만.

고개를 끄덕이자, 류주호가 얇은 점퍼를 위에 걸쳤다. 함께 류주호의 자취방을 나서며 시원한 밤공기를 맞았다.

“근데 너네 빌라가 좀 으스스하긴 해. 밤에도 껌껌하고, 여기 사는 사람들은 다 늦게 오나 봐.”

자꾸 말이 길어지니 변명같이 들리기도 했다.

“그러게. 다들 엄청 열심히 사나 보네. 뭐, 아니면 새벽까지 술 빨다가 날밤 까는 고고한 인생을 살고 있든가.”

류주호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온기현의 자취방은 정말 류주호의 집에서부터 걸어서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물론 가는 길에 굽이굽이 컴컴한 골목을 지나야 하긴 했지만, 거리상으로는 짧았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금세 도착한 집 앞에서 두 사람은 또다시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눴다.

“조심해서 가.”

“응.”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류주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온기현을 바라봤다.

‘아쉽다.’

좀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아까 그렇게나 격한 입맞춤을 나눴음에도, 제가 언제 그랬냐는 듯 그 이후의 류주호의 태도와 표정은 정말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안 가고 고개를 숙인 채 꾸물거리는 온기현을 보며 류주호가 뺨을 스윽 만져 왔다.

왜 그래?

하고 묻는 류주호를 올려다보며 온기현이 새까만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리고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가, 기습적으로 류주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쪽.

제가 무의식중에 입으로 낸 소리인지, 아니면 실제로 입술이 부딪치며 난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꽤 투박하고 귀여운 소리가 났다.

“내일 봐!”

온기현은 그러고 나서 바로 뒤돌아 후다닥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등 뒤로 문을 쾅 닫았다.

‘으아.’

그러고 보니 류주호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미처 보지 못했다. 아마 제 얼굴은 지금 불타는 문어처럼 시뻘겋게 익어 있을 터였다. 볼에 댄 손등까지 화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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