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부. Loose and Tight (2) (14/20)

6부. Loose and Tight (2)

다음 날 온기현은 다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학교에 나타났다.

수업이 하나 겹치는 이윤규와 강의실에서 만날 때. 이윤규는 크로스 백의 가방끈 부분을 꽉 쥐고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온기현을 보며,

“형. 왜 그래요. 뭐 죄지은 사람처럼.”

라고 말하고는 숙취로 인해 깨질 듯한 머리를 괴롭게 감싸 쥔 채 책상 위로 이마를 처박았다. 어제 결국 그 뒤로 새벽까지 달리게 됐고, 마지막은 노래방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이윤규로부터 술 냄새가 진동했다.

그런 이윤규에게 숙취 음료를 사다가 건네주었다. 비실거리며 웃는 꼴이 괜히 불쌍해 보여서 등을 토닥거려 주었더니 그대로 입을 막고서는 화장실로 직행했다.

수업에는 전혀 집중할 수가 없었다. 비단 연신 옆에서 욱욱 소리를 내는 이윤규 때문만은 아니었다.

공강 시간에도 그랬고, 콩나물 라면을 먹으러 학생회관에 가자는 이윤규의 말에 웃으며 대답해 줄 때도 그랬고, 학생회관에서 점심을 먹을 때도 그랬다.

이 학교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이 때문이었다.

그는 홍길동처럼 갑자기 짠 나타나서는 또 돼먹지 않은 말을 내뱉을 것 같았다. 그리고 자꾸만 자신을 혼란의 구렁텅이로 내몰 것 같았다.

노심초사한 마음에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오늘따라 류주호는 어쩐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니 더욱 신경 쓰이고 작은 것에도 흠칫흠칫 놀라게 됐다.

이러느니 차라리. 제가 먼저 연락해서 으름장을 놓는 게 나을까.

온기현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검은색 화면만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입술만 꽉 깨물고는 다시금 주머니에 핸드폰을 쑤셔 넣었다.

그렇게 심란한 마음을 한 채 수업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결국 학교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노선도 보지 않고 익숙한 번호의 버스에 탑승하여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다가 목적한 장소에 내렸다.

그리고 허름한 빌라촌을 골목골목 지났다. 연채우의 집으로 찾아가는 길이었다. 이런 날은 괜히 집에 있기 싫었다. 자꾸만 허튼 생각이 들었다. 그간 잊고 있었던 기대와 알맹이 없이 부푼 풍선을 닮은 희망 같은 허망한 것들이 가슴을 가득 메워 갔다.

털털거리며 무거운 발을 내딛다가 문득 류주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 자격을 얻기 위해 전부 깨끗하게 정리했다는 그 말.

온기현이 자신의 아랫입술을 손가락 사이로 집고는 꽉 눌렀다가 떼었다가를 반복했다.

진심일까.

그렇다면, 어디까지?

결혼, 안 하는 건가.

걸음이 뚝 멈췄다.

그래서? 그게 무슨 상관인데.

상처받은 마음이 아직 깨끗하게 치유되지 않은 채 버젓이 곪아 있었다는 것을, 류주호와 얼굴을 마주하고는 알게 됐다. 부모님과 웃는 얼굴로 식사를 하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고 했던 그간의 노력들이 과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행동들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너덜너덜한 마음을 억지로 기워 낸 흔적이었을까.

돌연 얼굴에 짜증이 깃들었다. 동시에 심장이 불안하게 울려 댔다.

쿵쿵거리는 심장이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혈액이 온몸을 빠르게 돌고 돌아 다시금 심장의 제자리로 찾아왔다.

“아,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온기현은 눈두덩이를 손목으로 짓누른 채 잠시 앓는 소리를 냈다. 연채우에게는 이런 약한 소리를 한 번도 낸 적이 없다.

애초에 류주호와 있었던 구체적인 일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혼란스럽고 힘들 때는 묵묵하게 곁을 지켜 주는 친구다. 오늘은 괜히 심란하고 헛헛한 마음에 연채우의 집을 찾아온 것이다.

온기현은 다시 발을 옮겼다. 작은 3층짜리 빌라에 들어서서 계단을 힘없이 올랐다. 지금쯤 연채우가 집에 돌아왔을 시간이다.

얼마 전 작은 회사에 취직한 연채우는 여느 회사원들처럼 9시부터 6시까지 근무를 했다. 나름 성실하게 일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데는 이유가 있었지만.

오늘은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막 7시가 지나는 시간이었으니, 연채우가 도착했을 터였다. 온기현이 문을 열려다가 말고 문을 두들겼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러자 안에서 우당탕탕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다소 소란스러운 음성과 함께 다급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네, 네! 누구세요!”

문이 벌컥 열렸다. 헉헉거리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불에 달군 쇠인 양 벌겋게 달아오른 연채우의 얼굴이 보였다.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

온기현이 천천히 위에서부터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는.

“나 간다.”

그렇게 던지고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날을 잘못 골랐다.

“어, 야! 온기현! 가지 마, 가지 마.”

“갑자기 찾아온 내가 미안하다. 즐거운 시간 보내.”

로봇처럼 딱딱하게 끊어지는 온기현의 말에 연채우가 헤실거리며 웃고는 팔을 잡아끌었다. 나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 아니라며 간다고, 간다고 하는 온기현을 억지로 붙들고는 제발 들어오라며 질질 끌다시피 했다.

온기현은 한숨을 푹 쉬고는 알겠다고 하고 몸을 돌려 신발장까지 걸어왔다. 역시나. 방 안에 보이는 커다란 실루엣은 익숙한 이의 것이었다.

“안녕.”

“응. 기현아. 왔어?”

감후석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양 웃는 얼굴로 온기현을 맞이했다. 그에 더욱 머쓱해져서 손 갈퀴를 만들어 여기저기 삐죽 솟은 머리를 빗어 내렸다.

“미안해. 갑자기 찾아와서.”

“야, 씨. 너 울 집에 올 때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말랬지.”

“그래도……. 안 그러게 생겼냐.”

사실 이번이 두 번째였다. 이렇게, 예기치 않은 상황에 들이닥치게 된 것은. 첫 번째는 정말 아무런 의식 없이 여느 때처럼 연채우의 집 문을 활짝 열었더랬다. 그러고는 어마어마한 참상을 목격했다. 다행히 거사가 치러지기 전의 한창 분위기가 달구어지던 장면이었지만, 그것도 차마 못 볼 꼴이었다.

“내 눈은 소중하잖아.”

온기현이 그렇게 읊자 연채우가 어이없다는 듯 허헛, 하고 웃더니 괜한 변명과 함께 툴툴거렸다.

“아니, 얘가 갑자기 나 퇴근하기도 전에 딱 맞춰서 와 있는 거야. 우연히 나도 오늘 외근 갔다가 직퇴하게 돼서 집에 좀 일찍 도착했거든. 아, 암튼 얼른 들어와. 신발 벗고, 어?”

연채우의 채근에 마지못해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왔다.

“학교 갔다 온 거야?”

“응. 너도 회사에서 일찍 마쳤나 보네.”

감후석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둘은 연채우라는 연결 고리를 사이에 두고 전보다 조금 편한 사이가 됐다. 둘이 연인 사이가 됐다는 것을 들었던 것도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원래 학교에서 자주 마주쳤던 사이라 경계를 풀게 된 것은 금방이었다. 감후석은 지난 학기를 마치고 바로 졸업하여 국내 굴지의 벤처 투자 회사에 취직했다.

연채우와는 언제 또 만나서 사귀게 된 건지, 이들의 연애 스토리를 A부터 Z까지 전부 듣지는 못했지만 참, 연애도 할 놈은 하게 되는구나, 싶었다. 물론 둘이 이런 사이가 되었을 때 정말 턱이 빠져라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연채우가 잠깐 화장실을 간다며 후다닥 자리를 피했고 온기현은 조금 민망해서 바닥에 주저앉아 괜히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무슨 짓을 했는지 척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티가 났던 연채우와는 달리 감후석은 옷도 멀끔하게 단정했다. 흐트러진 티도 나지 않았다. 대체 둘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괜히 왔다 싶은 생각이 다시 들었다.

“야, 나 그냥 갈게.”

“왜? 있다 가. 같이 저녁 먹고.”

“됐다. 그냥 얼굴이나 보러 온 거거든?”

“얼굴 보러 온 김에 밥까지 먹고 가면 좋지.”

감후석이 끈질기게 붙잡는 통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엉덩이만 들썩거렸다.

“그럼 밥만 먹고 간다. 진짜. 밥만 먹고 얼른 갈 거야. 알겠지?”

“그래.”

감후석이 하하, 하고 사람 좋게 웃었다.

그때 화장실에서 들리던 물소리가 끊기고 연채우가 나왔다. 급하게 샤워라도 한 것처럼 몸에서 훈기를 풍겼다.

“김치찌개 먹을까?”

“그래. 좋지.”

온기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감후석이 벌떡 일어나, 소매를 걷어붙이고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는 연채우의 옆에 서서 저도 마찬가지로 셔츠 소매를 말아 올리고는 도마와 칼을 꺼냈다. 아주 죽이 척척 맞았다.

피식, 하고 웃음이 샜다. 연채우는 이전보다 확실히 많이 안정되었다. 불안정하게 이 사람 저 사람에 치여 부표처럼 흔들리던 그때와는 달랐다. 완전히 차분해진 지금은 좋은 사람과 함께하게 되어 안정된 삶을 이어 가고 있었다. 돌부리에 걸려 앞으로 넘어진 채 그래도 살아 보겠다고 어기적거리며 발을 끌던 과거와는 달라졌다. 가는 길 앞에 돌부리가 박혀 있으면 피해 가는 법도 알게 되었다.

아마 연채우는 온기현을 보며, 예전의 자신을 투영하고 있을 터였다. 사랑에 상처받고 조금 지쳐 버린 온기현을 곁에서 쳐다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셋이 옹기종기 접이식 좌식 테이블을 펴서 가운데 두고 보글보글 끓는 김치찌개를 들고 와서 착착 밥상을 차렸다.

그리고 두런두런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대부분 연채우가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주절대는 내용이었다. 누구 대리가 업무를 시켰는데 지시가 멍청해서 반항하고 싶다든가, 탕비실에 맥신 말고 카무가 있으면 좋겠다든가 하는 자질구레한 얘기들이었다.

함께 욕해 주고 웃다 보니 금세 배가 불렀다. 감후석은 김치찌개를 싹싹 바닥까지 긁어 먹었다. 설거지는 감후석과 온기현이 나눠서 했다.

조금 더 있다 가라는 연채우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제 짐을 챙겨 밖을 나섰다. 간다고 손으로 대충 인사하며 신발을 신고 나가는 기현을 빌라 앞까지 따라 나온 연채우가 팔꿈치로 툭툭 쳤다.

“너 무슨 일 있냐?”

“아니?”

없는데? 왜? 없는데? 하고 정색하는 온기현을 향해 미심쩍다는 눈길을 보내왔다.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해. 알지?”

연채우의 진심 어린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준 연채우를 뒤로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한숨이 푹 삐져나왔다. 뜨거워진 눈두덩이를 주먹 쥔 손으로 비비적거리며 괜스레 핸드폰을 꺼냈다 넣었다, 켰다 껐다 했다. 그러다 옆머리를 차창에 콩 찍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원룸까지 걸어가는 길에도 멍한 상태였다. 자신이 뭘 하고 싶은 것인지 가늠이 잘 가지 않았다. 손바닥에 빨간 자국이 생길 정도로 가방끈을 꼭 쥐고 있던 것도 몰랐다.

빌라 문 안쪽으로 들어서자, 우편함에 꽂힌 흰색 봉투가 눈에 띄었다. 어두워서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자취방의 호수에 꽂혀 있었다.

‘뭐지?’

가까이 다가가서 우편물을 꺼내어 펼쳐 보았다. 어둑한 밤, 어스름한 달빛에도 똑똑히 적혀 있는 글씨는 다름 아닌 출석 요구서였다.

* * *

또다.

온기현의 얼굴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구겨졌다. 그리고 금색의 독수리가 날개를 펼친 정의의 상징을 올려다봤다.

‘삼재인가……?’

이제껏 두 번이나 출입한 경찰서였다. 하지만 세 번째인 이번에는 유독 눈에 확연히 들어왔다. 하지만 온기현은 긴장은 했을지언정 떨리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제가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미워하는 사람은 있을지라도, 누군가에게 죄를 저지른 기억은 없다.

그래서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은 채 홀로 경찰서의 출석 요구서를 보고 찾아온 것이다.

경찰서 건물은 규모가 상당했다. 강남 한복판에 자리한 건물이 이 정도 규모로 떡하니 자리하고 있을 줄이야. 상상도 못 했었다. 애초에 지역 자체도 생활 반경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고 온기현과 연이 없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출석 요구서에 적힌 사건의 요지 자체도 저와는 하등 무관한 일이었다.

[불법 도청 및 명예 훼손 관련한 참고인 조사]

“…….”

손안의 출석 요구서를 다시금 펼쳐서 유심히 보다가 이내 곱게 접고는 경찰서 안으로 들어섰다.

거의 10층 높이는 될 법한 커다란 경찰서 로비는 저녁임에도 다소 분주했다. 어색하게 쭈뼛거리며 서 있던 온기현은 두리번거리다가 ‘민원실’이라고 쓰인 표지판을 보고 찾아가 수사 1팀이 어디냐고 조심스레 물어봤다.

의외로 친절하게 안내해 준 사람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알려 준 대로 위층으로 올라 수사 1팀 표지판을 찾았다.

하지만 거기는 훨씬 더 복잡하고 소란스러웠다. 정말 영화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었다. 순간적으로 등에 식은땀이 났다.

“저, 죄송한데요. 출석 요구서 받고 왔는데요. 조사받으러 오라고 하셔서…….”

어찌할까 하다가 명패를 달고 지나가는 사람 중에 가장 인상을 덜 쓴 사람을 붙잡고 그렇게 물었다. 남자는 출석 요구서를 보더니 설핏 인상을 찡그렸다.

“이 사건, 경제 1팀으로 넘어갔는데.”

“경, 제 1팀……이요? 그럼, 그게 어디인가요?”

무슨 차이가 있는 줄 몰랐지만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남자가 흠, 하고 말을 않더니 온기현의 얼굴을 흘끔 바라봤다. 눈을 깜빡거리며 쳐다보자 쩝, 하고 입맛을 다신 남자가 온기현을 향해 고갯짓했다.

“따라와요.”

“아, 네.”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온기현을 지나쳐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부지런히 뒤를 따랐다. 계단을 올라 도착한 곳은 아까와 같은 복작복작한 장소가 아니었다.

사무실이 여러 개로 나뉘어 있었고, 각 공간은 개별 문으로 구분되어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조사를 받는 별도의 공간 같았다. 온기현은 긴장한 기색으로 주변을 살폈다. 몇 가지만 조사해도 자신이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자신하기는 했어도 왠지 주눅 드는 분위기였다.

“어이. 여기, 그 사건 참고인.”

“아아. 안녕하세요. 담당 조사관입니다. 이쪽으로 들어가시죠.”

“아, 네, 네.”

온기현을 인계받은 담당 형사는 작은 방으로 온기현을 안내했다. 문을 열자, 여느 개인 사무실 같은 공간이 드러났다. 의자를 사이에 두고 테이블이 있고 서류 더미가 여럿 쌓여 있었다.

온기현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한 후, 수사관은 마주 앉아 노트북 화면을 보며 키보드로 무언가를 두들기더니 어깨를 움츠린 채인 온기현을 향해 물었다.

“무슨 일로 오신 건지는 아십니까?”

“아뇨. 저는, 저는 잘못한 거 없는데요. 이거, 이상해요. 저한테 잘못 날아온 것 같아요. 저는 불법 도청을 한 적도 없고요. 명예 훼손을 할 정도로 명예 있는 사람하고 일한 적도 없는데요.”

의외로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말을 잇는 온기현을 보며 수사관이 화면과 온기현을 번갈아 힐끔거렸다.

“작년 12월경, 일일 아르바이트 한 적 있죠?”

“네? 일일 아르바이트요?”

순간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려던 온기현의 기억이 어느 순간에 머물렀다.

작년 12월경이라면.

그때였다. 고깃집 사장님의 소개로 프라이빗 파티 케이터링 아르바이트를 했던 날.

대번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날이었다.

“했죠?”

“아. 네. 하긴 했는데요…….”

“하아. 이것 참. 그럼 그때, 도청기 설치하거나, 휴대해 간 적 있어요?”

“도청기라뇨? 아뇨. 전 그런 거 있지도 않구요. 그런 짓 한 적도 없어요. 그런 거 살 돈으로 쌀이나 생활용품 사는 게 나아요. 진짜예요. 진짠데요.”

온기현은 적극적으로 부인했다.

“그럼, 도청기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그 어떤 기기도, 소지한 적 없다. 이 말씀인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녹음 기능이 있는 핸드폰 같은 것 말입니다.”

아.

저도 모르게 입을 벙긋거렸다. 당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결국 그 뒤에는.

“…….”

“하아…….”

입을 다물고는 짚이는 게 있다는 듯 생각에 빠져 고개를 숙인 기현을 보고는 수사관이 짜증 어린 한숨을 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때였다.

똑똑.

“네. 들어오세요.”

누군가 노크하고서는 문을 열었다.

“조사관님.”

“무슨 일이죠.”

“고소인 오셨습니다. 아까 말씀하셨던 사건이요.”

“아.”

온기현이 멍하니 생각에 빠진 사이에 수사관은 말을 전달해 오는 사람에게 대답하고는 노트북을 덮었다. 그에 고개를 번쩍 들고 수사관을 쳐다봤다.

“일단, 고소인이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답니다.”

“네? 고소인이요?”

사건을 고소한 누군가가 있으니, 이렇게 경찰서에 불려 나왔을 것이다. 그제야 고소인에 대한 존재를 머리에 떠올렸다. 대체 누구지? 혹시, 그 케이터링 서비스 매니저인가. 야무지게 주의를 주긴 했지만, 온기현의 핸드폰에 보안 스티커를 직접 붙여 주지 않았던가. 그래도. 설마.

눈썹을 축 늘어트린 채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온기현을 두고 수사관이 자리를 떴다. 조사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계속해서 혼란스러운 머리를 다잡으려 애썼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금 조사실 문이 열렸다. 온기현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누군가가 열린 문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조사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어……?”

손을 살랑살랑 흔드는 이가 어쩐지 낯익었다. 진회색의 옅은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정장을 잘 갖춰 입은 모습, 그리고 조금 능글맞은 미소. 분명히.

“나 기억나요? 그때 우리, 화장실에서 봤었는데.”

그랬다. 당시, 류주호 때문에 화장실로 도망쳤을 때, 저에게 말을 건 남자가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때 받았던 수치심과 모욕감까지 동시에 떠올랐다.

“하하. 이런 데서 마주치다니, 민망하네요.”

남자는 눈꼬리를 접으면서 웃고는 제 등 뒤로 조사실 문을 닫았다. 온기현이 의자에 앉아서 얼어붙어 있자, 남자가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고는 턱을 손으로 쓸었다.

“기억 안 나시나 보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남자의 말을 자르듯이 그렇게 물었다. 남자가 잠시 흐음, 하고 숨을 내쉬더니 양손을 정장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럼 바로 본론부터 들어갈까요?”

여유롭게 웃은 남자가 질문을 이었다.

“그날 보니까, 류주호랑 잘 아는 사이 같던데. 맞죠?”

“……아뇨. 잘 모르는 사인데요.”

“아하하. 여기 조사실이에요. 경찰서에서 거짓말하면 큰일 나는데.”

크은일이라고 말을 늘이면서 엄포를 놓듯이 말한 남자가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사실 고소 자체는 저도 의도한 것은 아니었어요. 다만.”

남자가 말을 잠시 끊었다.

“아저씨가 워낙 불같은 성정이시라.”

아저씨……? 의미 모를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 씨, 그러게 그 새끼는 왜 그딴 식으로 파혼하고 연락도 다 끊고 잠적해서 일을 이렇게 복잡하게 만드나 몰라요. 나까지 존나 피곤하게. 옛날부터 그랬지, 그러고 보니 그놈은.”

“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류주호랑 친하죠?”

물음에 물음으로 답한 남자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 류주호의 아킬레스건 맞잖아요.”

“저 진짜 무슨 말씀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사람 착각하신 것 같아요.”

“에헤이. 내가 류주호를 몰라요?”

슬금슬금 일어나려는 기현을 향해 남자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저 걔가 그렇게 사람 하나 두고 날 선 반응 보이는 거 처음 봤어요. 걔 누구한테나 무심하잖아요. 오는 사람은 안 막지만, 그것도 용무가 끝나면 그걸로 끝. 냉정하고, 칼같이 자르고. 사람은 더럽게 잘 꼬이는 데 반해서 말이죠.”

“…….”

“류주호 불러들이려면 이 방법밖에 없다고 아저씨한테 팁을 드린 건 나예요. 그놈 불러들이라고 엄포를 놓으셨거든. 그래서 나도 당신 앞에서 완전히 당당하고 깨끗한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워낙 류주호네 아버지 불같은 성정을 당해 내기가 힘들거든요. 그만큼 힘도 있고.”

하아. 그러게 왜 파혼은 해서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온기현은 굳은 채 가방을 꼭 쥐고 있었다. 파혼이란 말을 두 번이나 입에 담았다. 류주호가 파혼했다고. 모두 정리했다던 류주호의 말이 이런 뜻이었나. 기정사실처럼 못 박는 말이었다.

잠시 멍해 있던 온기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지금 자신과 무슨 상관이라고.

“그래서요?”

“와, 진짜 냉정하네.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뭐를요?”

“걔 지금 집에서 의절당했잖아요.”

남자가 제 손을 곧추 뻗어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하며 말을 담담하게 툭 뱉었다. 온기현의 눈이 커다래졌다. 남자가 입꼬리를 쭉 끌어 올렸다.

“류주호 그 새끼, 지금 완전 알거지예요. 집에서 맨몸으로 쫓겨나고, 호적에서도 파이게 생겼다고요.”

“…….”

“뭐 자발적인 부분이 거의ㅡ 99%지만.”

순간 뇌리에 캐주얼하게 바뀐 류주호의 최근 스타일이 스쳤다. 이전에는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부티가 흐르던 류주호였다. 물론 스타일이 바뀌었다고 지금은 안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예전보다 훨씬 격식을 차리지 않는 편안한 옷차림으로 바뀌게 된 것은 맞았다. 옆머리를 바투 깎은 머리도 마찬가지였다. 돈이 들어가는 세심한 관리가 힘든 것일까.

“……그거랑 지금 제가 조사당하는 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온기현은 부러 저랑 아무 상관도 없다는 투로 잘라 내듯 말했다. 그러자 남자는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선뜻 입을 열었다.

“아. 잠깐만 여기서 시간 좀 벌어 주시면 집에 돌려보내 드릴게요.”

“네?”

“과연 그 새끼 발을 묶을 수단이 유효한지 아닌지, 보면 알겠죠.”

당최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남자가 대체 뭐길래 자신을 멋대로 집에 돌려보내고 말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조사관 참석 없이 남자와 단둘이 대면케 하는 상황 자체도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두 달 사이에, 류주호에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 궁금했다. 그런데 물어도 될지 말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입만 벙긋거렸다.

“오실 때가 됐는데.”

남자가 그렇게 읊조리던 때였다. 문 바깥에서 묵직한 발걸음이 들려왔다. 뚜벅뚜벅 걷는 발소리가 느릿하면서도 또 듣는 사람이 초조해질 정도로 빠르게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아, 오셨나 보네.”

양반은 못 되신다니까.

그 말과 동시에 조사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아저씨, 오셨어요.”

남자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하지만 그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기현은 일어선 채로 어, 하고 입을 벌렸다.

‘……류주호.’

아니, 류주호는 아니었다. 얼굴에는 입가나 눈가에 주름이 졌고 나이가 묻어났다. 하지만, 커다란 키와 압도적인 풍채. 그리고 무엇보다 얼굴이 판박이였다. 류주호는 색소가 옅고 음영이 짙어서 이목구비가 뚜렷한 느낌이 더 강하다면, 이 중년의 남성은 새까만 머리에 새까만 눈동자를 가졌다. 하지만 전체적인 이미지와 이목구비가, 누가 보더라도 류주호와 피가 이어진 사람이란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은, 주위 사람을 그대로 짓누르는 압도적인 무게감이었다. 류주호 또한 묘하게 이목을 끌고 분위기를 흡수하는, 이른바 무게의 중심이 많이 쏠린 이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그보다 더욱 묵직하고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아마, 류주호가 나이 든다면 꼭 이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까지 일으킬 정도였다.

“이 아이인가?”

“네.”

20대 중반의 남성을 보고 아이라고 칭하는 단어마저 자연스러웠다. 꼴깍하고 마른침이 넘어갔다.

하지만 눈길을 준 것도 한순간. 중년의 남성은 이내 무심하게 제 시계를 내려다봤다.

“그래서. 언제 온다는 거지.”

“제가 아까 오기 전에 연락 넣어 놨으니까, 아마 곧이요.”

꼭 그들은 온기현이 이 자리에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제 역할을 다 마친 미끼에게는 일절 관심조차 내비치지 않는 것이다. 온기현은 어설픈 자세로 섰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누가 온다는 것일까. 설마.

인상을 찌푸렸다. 남자의 말대로라면, 그리고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 남성은 류주호와 혈연관계인, 즉 아버지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해서 류주호를 불러들이는 것일까.

‘정말로 의절한 건가……?’

대체 왜?

류주호가 뭐가 아쉬워서. 제가 누리고 가져 온 것들을 다 버리고.

그렇게 깊은 생각에 막 빠져 갈 무렵 그 침잠의 공간에서 꺼내는 묵직한 저음이 들렸다.

“그런데 정말, 이 아이가 맞나?”

의심이 가득 담긴 음성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따갑게 시선이 박혀 왔다. 요소 하나하나를 평가하는 듯한 송곳 같은 눈빛이었다. 저도 모르게 자꾸만 말리는 등줄기를 억지로 곧추세웠다.

“아무튼, 기다려 보지.”

그 말에 남자가 네, 하고 대꾸하고서는 온기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고소는 취하할 거니까 너무 걱정 마요. 이렇게라도 협박해야, 그 고집스러운 놈이 겨우 얼굴을 들이민다니까. 그 지독한 새끼. 번호까지 바꿔 버릴 게 뭐야. 주소도 옮기고.”

남자의 투덜거림에 류주호의 친부가 크흠, 하고 불편하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그에 남자가 이죽거리던 표정을 금세 갈무리하고는 조용히 남성 옆에 서서 기다렸다.

그때였다. 이상하리만치 고요하던 바깥에서 급박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빠르게 다가오는 발소리는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이내 굳게 닫혔던 문이 벌컥 열렸다.

“하아. 이, 씨발.”

류주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가벼운 차림의 봄버 재킷과 블랙 진을 입은 류주호의 얼굴이 설핏 굳어 있었다. 커다랗게 열린 문의 손잡이를 쥐고 있던 류주호의 시선은 조사실에 들어오기 전부터 한곳만을 향해 있었다.

“어, 류주.”

“괜찮아?”

그리고 남자가 류주호를 막 부르려던 참이었다. 류주호는 그 말을 아예 듣지도 못했는지 말을 끊고는 성큼성큼 기현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까부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그저 굳은 석상처럼 서 있기만 한 기현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류주호를 올려 봤다. 류주호의 얼굴에는 안타까움과 걱정, 당황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런 비이상적인 순간에도 온기현은 그게 못내 신기했다. 이런 얼굴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

“기현아. 놀랐지.”

온기현의 멍한 얼굴을 보며 류주호가 호들갑을 떨었다.

“이거 식은땀이야? 응?”

아까부터 극단의 긴장 상태에 놓인 온기현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까지 눈으로 훑으며 류주호는 제가 다 속이 문드러진다는 듯 양미간을 좁혔다. 아까워서 만지지도, 도망갈까 봐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던 류주호의 입매가 점점 일자로 다물어져 갔다.

남성 둘을 막아서는 모양새인 류주호의 등 뒤에서 그를 호명하는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류주호.”

“얼른 나가자. 애를 왜 이딴 데에 불러와서는. 하.”

이딴 데에 너 한시도 있게 하기 싫어.

“가자.”

그렇게 뇌까린 류주호가 여전히 멍한 얼굴을 하는 온기현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고 바로 그들을 지나쳐 두어 걸음 디뎠을 때였다.

“이거 놔!”

그제야 정신을 차린 온기현이 버럭 소리치며 류주호의 손을 확 뿌리쳤다. 세게 잡은 것도 아니었는데 갑작스러운 체온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커다랗게 팔을 휘둘렀다. 커다란 손이 느슨해졌다.

그사이에 빙글 몸을 돌렸다. 아연하게 온기현과 류주호를 번갈아 보는 남자와, 진귀한 생물체라도 조우한 양 저를 보는 남성을 향해.

“저한테 볼일 끝나신 거 맞으면 저 이만 가 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그럼.”

예의 바르게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팔을 뻗은 채 온기현을 바라보며 우뚝 서 있는 류주호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는 그대로 지나쳐, 조사실을 빠져나왔다.

곧바로 정신없이 계단을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딱히 조사관이 붙잡지도 않았다. 이미 애초에 그렇게 얘기가 서로 마무리되어 있던 것처럼. 제가 알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뒤에서 누군가 제 이름을 연신 부르며 쫓아오는 듯했지만, 부러 못 들은 척했다.

거의 두 층씩 다다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서, 아까 지나쳤던 경찰서의 너른 로비를 가로질렀다. 크로스 백 끈을 꼭 쥔 채 정신없이 다리를 앞으로 뻗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니, 사실은 단순한 것이었다.

류주호를 호출하려고 이용당한 것이다. 그의 친구에게, 그의 가족에게. 쓰고 버리는 일회용 플라스틱 용기인 양, 온기현이 제 몫을 마치기를 관조하며. 그들에게는 그게 천성이고 몸에 배어 있어 일련의 과정들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고소당했다고 했을 때 자신이 얼마나 두려웠는지, 혹여나 잘못될까 얼마나 걱정했는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사실 그런 것은 온기현에게 아무런 타격도 되지 않았다. 오로지 머릿속에 계속해서 맴도는 것은 그들이 입에 담은 다른 얘기뿐이었다.

헉, 헉.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경찰서 밖으로 잽싸게 빠져나왔다. 뒤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온기현은 무시했다. 잰걸음 탓에 숨이 가빴다.

“……현, 기현아!”

“헉…… 헉.”

“온기현!”

커다란 보폭이 온기현을 금세 따라잡았다. 류주호는 온기현을 부르며 정신없이 앞을 향해 나아가던 제 앞을 가로막았다. 그를 피하며 옆으로 가려고 하자, 다시 가로막고, 반대로 가려고 하자 또다시 막았다.

“기현아. 나 좀 봐, 나 좀 봐 봐. 너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으.”

온기현이 목구멍에서 짜증 섞인 소리를 내며 진저리 쳤다.

“왜 그래. 저 자식들이 너한테 뭐라고 해? 뭐라고 했어. 온기현, 기현아.”

“그만해!”

악 소리를 낸 온기현이 잔뜩 날을 세운 눈으로 류주호를 노려봤다.

“그만하라고, 너. 제발.”

“…….”

류주호는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온기현의 안위가 걱정돼서, 온기현이 고소를 당해 지금 경찰서에 구금된 상태라는 연락을 받자마자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바뀐 연락처는 지인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최근 두 달 사이에는 그 누구한테도 연락이 온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아냈는지 덜컥 문자 한 통을 보내온 것이다. 온기현이 경찰서에 있다고.

온기현이라는 세 글자만으로 류주호는 합리적인 의심이라는 것을 할 줄 모르는 비이성에 휩싸였다.

천천히 다가가려고 했었고, 안달하지 말자고 속으로 결심했다. 하지만 당장 온기현을 앞에 두고는, 혹시라도 온기현이 어떻게 될까 봐 머저리처럼 주위에 날을 세웠다.

사실은, 제 품에 안고 어디에도 꺼내 놓고 싶지 않았는데.

온기현이 주먹을 꽉 쥐며 분기에 휩싸여 고개를 숙였다. 서럽고 짜증 나고 또 불안하던 마음이 소용돌이처럼 제 속을 가득 채웠다.

“이거 무슨 일이야? 무슨 영문인지 도저히 모르겠어.”

“미안해.”

류주호의 입에서 억눌린 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자, 기현아. 응? 너 지금 곧 쓰러질 것 같아. 뭐라도 먹어야지.”

“비켜. 내가 뭐, 너한테 고마워라도 할 줄 알아? 이거 다 알고 보면 너 때문이잖아.”

“응. 다 나 때문이야. 내가 다 해결할게. 내가 다 책임질게. 그러니까 제발.”

“꼴도 보기 싫다고 했지. 너 진짜 꼴도 보기 싫다고…….”

그렇게 중얼거리던 온기현이 입을 벙긋거리다가, 남자가 흘린 말을 물었다.

“……너, 집에서 나왔다는 거 진짜야? 의절당했다고.”

온기현의 시선이 류주호의 발끝에 잠시 머물렀다가 서서히 위로 올라왔다. 이윽고 다다른 류주호의 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오묘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살짝 좁아진 미간과 날카로운 턱선이 설핏 굳어져 있었다. 마주치는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진득하게 바라보는 옅은 색의 동공이 일렁이다가 차츰 가라앉았다.

“응.”

대답은 단조로웠다.

“왜, 왜 그런 건데. 왜 그런…….”

거기까지 읊조리듯 되물은 온기현이 입을 닫았다. 제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아니었는데. 혹시 류주호가 술집 뒷골목에서 저에게 했던 말들이 전부 이런 일을 의미하는 거였는지 문득 궁금해져서 그랬다. 하등 상관없다고 부정하고 싶은데도, 자꾸만 묻고 싶었다. 그러다 류주호의 입이 떨어졌다.

“그건 너는 몰라도 되는 일이야.”

“……아.”

온기현이 단발의 음성을 뱉었다. 동시에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래, 저가 물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왜 자기랑 상관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왜 자기 때문에 류주호가 그 많은 것들을 포기했다고 생각했을까.

불에 달궈진 쇠처럼 시뻘게진 얼굴을 숨기듯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됐어. 그냥 물어본.”

“내가 너를 놓친 것도, 내가 정말 중요한 게 뭔지 몰랐던 것도, 전부 내가 한 짓이고. 전부, 나 때문이야.”

이 모든 것은 등가 교환이 아니었다.

“내가 등신같이 어리석었고. 이제야 그걸 바로 잡으려고 하는 것뿐이야.”

누리던 것을 잃었기 때문에 그 자리를 너로 메우려고 하는 것도 아니었고, 제가 가진 것을 차 버렸기 때문에 비로소 너에게 선택받을 자격이 생겼다고 자만하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네가 알아도 되는 것은, 나는 네가 나 돌아봐 줄 때까지 너를 끝까지 기다릴 거라는 거.”

너는 너다. 절대적인 그 무엇으로, 어떤 것과도 평행선에 둘 수 없다. 류주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절대적인 가치 앞에서 그 외의 것은 무의미했다. 거의 맹목적인 호소에 가까운 말에 기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얼굴을 가렸던 팔뚝을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진득한 시선이 온기현을 칭칭 옭아맸다. 어두운 밤 가로등 빛에 비쳐 곤두선 가느다란 솜털 하나하나까지도 전부 오롯이 눈에 담는 듯한 시선이었다.

거센 풍랑이 전신을 덮쳤다. 거친 파도가 지나간 후 잔잔한 물결 속에 몸을 맡긴 채 유랑하듯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던 기현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온기현은 또다시 거대한 파도 한가운데 있었다. 발끝부터 머리까지 전신이 뒤흔들렸다. 아찔한 감각이었다.

그 무섭도록 아찔한 감각에 집어 삼켜질 즈음에야 온기현은 화급하게 입을 열었다.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달싹이던 입에서 간신히 마른 소리가 튀어나왔다. 충동적이었다.

“……뭐라고?”

“나 사귀는 사람 있다고. 새, 생겼어. 좋아하는 사람. 그러니까.”

자꾸 흔들지 마.

그렇게 말하려던 참이었다.

“아니.”

그보다 깜짝 놀랄 정도로 소름 끼치는 낮은 소리가 앞섰다. 시선을 피하던 온기현의 까만 눈동자가 앞을 향했다. 하지만 얼굴은 목소리와 대비될 정도로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굳이 그런 거짓말까지 할 필요 없어.”

그렇게 단정 짓는 말에 온기현이 따지고 들었다.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왜 너한테 거짓말을 해? 어?”

“당장 너한테 나랑 뭐 어떻게 해 달라고 안 해. 그러니까, 그런 거짓말까지 입에 담지 말아 줘.”

류주호가 쓰게 웃는 얼굴을 지었다.

뭘 믿고 이렇게 자신하는 걸까. 제가 언제까지고 그만 마음에 품고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고 있지도 않은 무수히 많은 가상의 인연들이 있다고 이미 말을 늘어놓았던 터다. 혹시 그걸 알기라도 하는 걸까. 온기현이 쭉 좋아했던 건 류주호뿐이란 걸.

“내가 왜 너한테 거짓말을 하는데? 어? 진짜라니까?”

“진정해, 기현아. 일단, 집에 데려다줄게. 응?”

“아, 쫌!!”

온기현이 거의 악다구니를 쓰다시피 하며 진저리 쳤다. 그러고는 제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내어 메신저 앱에 들어갔다.

연락처 목록을 한참을 뒤적거렸다. 한없이 빈약했던 연락처는 그나마 과 활동을 했던 터라 조금은 풍성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거기서 거기였다.

말만 해서는 믿지 않을 게 분명했다. 눈앞에 들이밀 증거가 필요했다. ‘내가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 얘야.’라고 말해 줄 참이었다. 그가 모르는 누군가라도. 류주호의 눈앞에 들이대고 ‘나 이제 너한테 마음 없어.’라고 강하게 못 박아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누구라고 말한단 말인가. 충동적으로 저지른 행동에 그제야 이성이 돌아오며 스크롤 하던 손가락이 느려졌다. 아랫입술을 사리물었다. 그런다고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류주호는 아예 온기현이 거짓말을 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연락처를 마구 뒤지다가 뚝 멈춰 버린 온기현의 모습에 류주호는 그저 “데려다줄게.”라고 말하며 애초에 아무것도 못 들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씨…….”

핸드폰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류주호가 심상한 표정으로 온기현을 바라봤다. 그때였다.

손안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깜짝 놀란 온기현이 화면의 발신자를 확인했다. 화면에는 ‘후석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감후석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감후석과는 연채우를 매개로 연인의 친구라는 포지션에서 나름 가까워졌던 터라, 서로 번호를 저장하고 카톡으로도 가끔 연락을 주고받고는 했었다.

그래서 감후석한테서 전화가 온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분명 연채우 집으로 밥 먹으러 오라느니, 하는 대수롭지 않은 연락일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온기현은 전화 거절 버튼을 눌렀다.

그것을 류주호가 똑똑히 목격했다.

“왜 안 받아.”

순간 류주호의 낮은 음성이 정수리 위에서 들렸다. 얕게 펄쩍 튄 온기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시선이 멀리 있는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내 맘이야. 내가 전화를 받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그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전화가 한 번 더 울렸다. 이번에도 감후석이었다. 그에 다시금 거절 버튼을 누르려고 엄지를 뻗었다. 그 찰나, 류주호의 손이 핸드폰을 홱 낚아챘다.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류주호는 핸드폰을 들어 올리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계속해서 울려 대는 핸드폰의 화면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

류주호가 전화를 받았다.

귀에 핸드폰을 가져다 댄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온기현은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

“너, 뭐…….”

핸드폰을 다시 뺏어 오려 손을 뻗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류주호의 침잠한 눈이 전화를 받은 채로 온기현을 빤히 응시했다. 그에 얼어붙은 듯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아……. 온기현이 황망함에 크게 뜬 눈을 깜빡이지도 못했다.

―여보세요? 기현아.

감후석의 목소리가 얼핏 스피커 사이로 새어 나왔다.

―……기현아. 들려?

“들려.”

―…….

류주호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전화기 건너편의 감후석은 말이 없었다. 누가 들어도 온기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감후석은 이 상황이 무엇인지 가늠하는 듯했다. 류주호의 목소리를 알아듣지는 못한 듯했다. 평소 류주호의 목소리보다 한층 낮아져 목구멍을 긁는 듯한 어투는, 그것도 전화를 통해서는 더더욱 지금 전화를 받는 이가 류주호라고는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누구시죠.

감후석은 잠시 말이 없더니 그렇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도 낮은 울림을 머금었다. 대뜸 반말을 지껄인 류주호에게 존대로 대답한 감후석에 류주호가 미간을 꿈틀거렸다.

“알면.”

류주호의 말에 조소가 어렸다. 온기현이 전화를 뺏기 위해 한 걸음 내디뎠다. 하지만 류주호는 간단히 온기현을 제지했다.

―기현이 바꿔 주시죠. 기현이는 어딨나요.

“이름.”

―……?

“……이름, 멋대로 부르지 마.”

잇새로 지껄이는 음성은 아까보다 더욱 거칠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무언가 터져 버릴 것 같은, 아슬아슬함까지 내포하고 있었다.

―당신 뭐야.

감후석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온기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하는 어투는 곧이어 날카롭게 벼려진 스산함으로 이어졌다.

“무슨 사이야, 얘랑.”

―……당신한테 알려 줄 의무 없어. 지금 당장 어딘지 말해.

물러서지 않는 전화 건너편의 대답에 류주호가 이를 아득 갈았다. 관자놀이에 핏줄이 선연히 불거졌다. 눈빛이 마구 흔들렸다. 돌연 그가 제 가슴께를 꽉 움켜쥐었다. 괴로운 통증을 느낀 듯 바닥을 딛고 선 류주호의 중심이 흔들렸다.

그 틈을 타 잠시 아연하게 서 있던 온기현이 팔을 뻗었다. 류주호가 저에게 했던 것처럼 그의 손에 있던 핸드폰을 확 낚아챘다. 그리고 곧바로 핸드폰을 귀에 대고 다급하게 말했다.

“후석아. 미안.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뭐? 기현아. 기현이야? 너 지금 어딘데 그래. 누구랑 있어.

“나중에. 나중에 설명해 줄게.”

온기현의 말에 감후석은 잠시 말이 없었다. 온기현은 계속해서 미안한데 나중에 얘기해 주겠다고 말했다. 감후석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알겠다고 대답했다. 자신이 선을 넘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 잠시 고민하는 것도 같았다.

“끊을게.”

그 말을 끝으로 온기현이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숨을 애써 가다듬었다. 이 일련의 상황이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바닥으로 떨구어진 시선을 느릿하게 올렸다. 류주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심장이 바닥까지 쿵 떨어졌다.

류주호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그리고 짧은 시간에 얼마나 짓씹었는지 입술이 죄 뜯어져 붉은 속살까지 보일 지경이었다. 그에 입을 달싹이던 온기현을 향해 류주호가 조용하게 말을 뱉었다.

“감후석이랑, 무슨 사이야.”

“…….”

온기현은 입을 다물었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 다음이. 그놈이야?”

아.

그 말에 온기현이 눈을 크게 떴다.

오해를 살 만한 상황이라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내가 알려 줄 의무 있어?”

시선을 피하며 차갑게 대꾸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오해를 정정해야 했다. 아까 그렇게 당당하게 아득바득 우기기는 했어도 딱히 누군가를 지칭할 생각은 아니었다.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거기다, 감후석은 류주호도 아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친구의 연인이었다. 그를 이 진창에 끌어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진심으로.

전화를 든 손이 미미하게 떨렸다. 낮게 깔린 시선이 잠시 핸드폰을 눈에 담았다.

간신히 내리누른 뜨거운 것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그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하지만 동시에, 류주호는 무언가를 크게 인내한 듯 가슴 위에 얹었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들끓는 지독한 화염을 속으로 침잠시키듯.

“기현아.”

온기현이 손을 뻗자 류주호가 순순히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나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방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온유한 표정이라, 오히려 위화감이 들 정도였다.

“이런 장난 재미없어.”

“뭐? 내가 무슨 장난을 쳐? 내 말이 왜 거짓말이야? 너 왜 내 말 안 믿는데!”

씨근덕거리며 그렇게 소리친 온기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너 무슨. 혹시, 내 뒷조사 같은 거 했어?”

설마 하는 심정에 그렇게 물었다. 말끝이 조금 떨렸다. 류주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런데 네가 나에 대해서 뭘 그렇게 잘 안다고 자신하는 건데. 넌 이제,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아닌데.

그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말아 달라는 류주호의 거친 음성에 의해 질 나쁜 주박에라도 걸린 걸까. 목구멍이 뜨겁고 껄끄러웠다.

온기현은 아랫입술을 이로 잘근거렸다. 적요가 둘 사이를 파고들었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얇은 유리막이 가운데를 가로막은 것 같았다. 하지만 손을 뻗으면 언제든 그것을 깨트릴 것처럼 아슬아슬하기도 했다.

“야, 류주호!”

그때였다.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조사실에서 만난 남자의 목소리였다. 구둣발 소리가 뒤섞여 들리는 것이, 류주호의 친부도 함께인 듯했다. 어깨 너머로 확인하고 싶었지만 류주호가 떡하니 가로막고 있어 보이지 않았다.

온기현이 고개를 홱 돌리던 때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감후석이었다.

그것을 류주호도 확인한 것인지 시선 끝에 걸리는 류주호의 손이 움칠하는 것이 보였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받지 않고 종료 버튼을 눌렀다.

류주호. 야. 뒤에서 부르며 다가오는 소리에도 류주호는 제 이름이 아닌 양 미동도 하지 않고 온기현에게 시선을 못 박았다.

온기현이 몸을 빙글 돌렸다.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기도 전에, 류주호가 두 걸음 성큼 앞으로 다가오더니 온기현의 앞을 막아섰다. 가로막힌 움직임도 동시에 멈췄다. 찡그린 얼굴로 정면을 바라봤다.

씨근덕거리며 율동하는 목울대가 눈에 들어왔다.

“가지 마.”

목을 쇠로 긁는 것 같은 음성이 온기현을 향했다.

“……내가 네 말 들어줄 이유 있어?”

온기현의 말에 류주호가 숨을 멈춘 듯 온몸을 경직시켰다. 시야 속 류주호의 상체가 크게 부푼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비켜.”

“…….”

“비키라고. 내 말이 우스워? 나, 갈 거야. 비키라니까.”

“……알았어.”

의외로 류주호가 순순히 그 말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 대답은 심연처럼 낮고 깊어 마치 목구멍에 거친 모래알이 달라붙은 느낌이 났다.

“그래. 그렇게 할게. 그런데……. 네가 말하는 대로 하면 나 봐 줄 거야? 너 하라는 대로, 내가 지금 여기서 비키면……. 내가 하고 싶은 것, 묻고 싶은 것 다 참고. 너 안 붙잡으면. 그럼 그때는 나 좀 쳐다봐 주나. 그렇게 하면. 상상만 해도 돌아 버릴 것 같은……,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도 안 하고, 장난도 안 치고. 그렇게 해 주는 건가.”

짓눌린 것처럼 읊는 목소리에 온기현의 시선이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류주호의 표정은 한없이 음울했다. 그의 존재 자체가 마치 절망이란 이름으로 탑을 쌓아 올린 것처럼 처절해 보였다. 그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주춤했다.

“……나는…….”

“어떡하지. 네가 하라는 대로 하기 싫은데. 그런데도 안 들을 수도 없어. ……이젠 네 한마디가 나한테는…….”

파르르 공기가 떨렸다. 아니, 숨이 떨렸다. 진동하는 파동이 역학을 배반하며 되돌아와 온기현의 등줄기를 잘게 쳐, 떨게 했다.

“나, 나는……. 나는 이제 아니야. 나 지금 애인 있다고 했잖아. 그니까 비켜. 따라오지도 말.”

“주호야.”

등 뒤에서 들린 연륜 가득한 묵직한 음성이 온기현의 말을 가로막았다. 온기현은 무어라 말하려 달싹이던 입을 닫고 그대로 류주호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류주호는 저를 잡지도, 쫓아오지 않았다. 온기현이 말한 대로,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석상처럼 우뚝 선 놈을 뒤로하고 기현은 발걸음을 빨리해 대로변으로 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무슨 정신인지도 모르겠다. 강변도로를 달리는 도중 차창을 투둑투둑 두들기는 소리에 바깥을 보니 가느다란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멍한 상태로, 빨리 나오길 잘했네 라고 생각했다. 택시 기사가 “아이구, 차가 막히네요.”라고 헛헛한 웃음과 함께 건네 오는 말에도 그저 “네.”라고 망연한 대답을 돌려줄 뿐이었다.

창을 때리는 비의 힘이 점점 거세어져 갔다. 밀폐된 공간까지 눅눅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순간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머릿속이 잔뜩 헝클어져 혼란스러웠다.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왜 나는 너한테 이토록 쉽게 흔들리는 걸까. 너는 왜 내 처음을 모조리 가져가 놓고서는 아직까지 이렇게나 나를 애태우는 걸까.

류주호의 언어. 류주호의 표정. 류주호의 진심.

간절해 보이던 너.

내 거절의 한마디에 속수무책으로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던 너.

그리고.

여전히 나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 너.

눈가가 언뜻 붉게 달아올랐다. 귀가 얼얼해질 정도로 세게 귓불을 잡아당기기도 했다. 심장이 아릿하게 조여들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자취방 골목에 들어가는 부근에 택시가 도착했다. 기사님이 “비가 너무 많이 오는데 골목까진 못 들어가겠네요.” 하고 말해 와서 “괜찮아요.” 하고 얼른 대답하고는 택시에서 내리려던 찰나, 서글서글하게 웃음을 띤 기사님이 다른 손님이 예전에 놓고 간 우산이라며 안 쓰는 것을 하나 쥐여 주었다. 얼떨떨하게 그것을 받아들며 기사님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다행히 아까처럼 쏟아붓지는 않았지만, 바닥은 곳곳이 흥건하게 젖어 걸음걸음마다 차박차박 물소리가 났다.

우산 위를 미처 때리지 못한 빗줄기가 안까지 새어 들어왔다. 최대한 걸음을 빨리했다. 고개를 들자 막 빌라 앞 가로등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슴푸레한 노란 빛을 향해 뛰어가던 온기현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아.”

온기현은 제 눈을 의심했다. 다소 약해진 빗줄기가 시야를 방해했다. 하지만 확실히 눈에 들어왔다. 푹 젖은 사위 속에서 고스란히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고 서 있는 한 인영이 보였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에 튄 빗방울이 알알이 맺혔다가 깜빡거리는 사이에 아래로 떨어졌다. 입에서 밭은 숨이 흘러나왔다. 우산으로 차마 다 가려지지 못하는 빗발이 온기현이 서 있는 주위의 바닥을 마구 때려 댔다.

그리고. 제 눈에 들어온 이는 비를 막을 아무런 방패막이도 없이, 온몸으로 굵은 빗줄기로 얻어맞고 있었다.

“기현아.”

그때 쏴아아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그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순간 흠칫 놀라서 뒷걸음질 치던 발 때문에 찰박 소리가 울렸다.

대체 언제 여기까지 온 걸까.

택시를 타고 먼저 출발한 것은 기현이었다. 언제 도착해 있었던 걸까.

저렇게까지 흠뻑 젖을 정도면, 아마도…….

하지만 그런 의문을 느낄 새도 없었다. 빗줄기에 가로막혀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것 같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류주호가 질리도록 짙은 낯을 하며 기현을 향해 다가왔다.

무어라 항변의 말을 할 정신도 아니었다. 온몸이 홀딱 젖은 채 저에게 다가오는 류주호를 보며 온기현은 입을 벙긋거렸다.

“너, 뭐야. 왜 여기에 있는데.”

혼잣말같이 의문의 말을 흘리자 류주호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의 물방울을 얼굴에 그대로 흘려보내며 입을 열었다.

“기현아, 나 도저히 안 되겠어. 정말 안 되겠어.”

“뭐……?”

절망과 애원을 담아 읊조리는 말에 온기현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잘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어. 내가, 내가 마지막이라는 희망만 있으면. 자신 있었어. 다시 너를 잡을 수 있다는 자신. 그런데.”

그랬는데…….

코앞까지 다가온 류주호의 가슴팍을 바라봤다. 아래위로 들썩이는 그것은 무언가를 꾹 내리눌러, 애써 참고 있는 것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그렇게 결심했어. 내가 100번째가 되더라도, 200번째가 되더라도, 결국 네가 나한테 와 준다면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 네가 나를 선택해 주는 그 순간까지 노력하자고. 그렇게 결심했었는데…….”

류주호의 미간이 잔뜩 좁혀졌다. 목구멍을 긁는 듯한 괴로운 음성이 터졌다.

“그런데……. 네가 안 와 주면 어떡하지. 다른 데로 간 거면, 다른 새끼한테로 간 거면. 그러면 어떡하지. 아니, 그리고 혹시, 네가 아니라 다른 놈이, ……아까 전화한 그놈이 여기에 혹시라도 먼저 오면 어떡하지.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미칠 것 같았어.”

물이 뚝뚝 흐를 정도로 잔뜩 젖은 옷과 엉망으로 헤집어진 머리를 하고 파리한 낯을 한 채 류주호는 덧붙였다.

“전부 내 자만이었어. 기현아.”

자만. 온기현의 애정이 오롯이 제 것인 줄만 알았던, 오만에 찬 지난날을 자책하고 자조하는 말이었다. 쇳소리같이 마른 목소리는 축축하게 습기 찬 주위와는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절절한 자백이 온기현의 발을 얼어붙게 했다. 혼란스러웠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귀로 들어왔다가 고여 버린 물처럼 귓가에서 찰랑댈 뿐이었다.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눈꺼풀이 잘게 흔들렸다. 저도 모르는 새 제 오른발이 뒤쪽을 디뎠다.

듣고 싶지 않았다. 들을 수가 없었다. 아직 제 마음도 제대로 정리가 안 된 터였다.

“……난, 지금 네가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아.”

조금 힘을 잃은 빗줄기처럼 온기현의 목구멍에서 새는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흐읍, 하고 숨을 들이켜고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우산 손잡이를 쉰 손끝이 가녀리게 경련했다.

“나중에 해. 가. 제발.”

“나중에……? 나중에, 언제.”

“…….”

그렇게 묻는 류주호의 목소리가 심하게 진동했다. 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나중이라는 말만큼 기약 없는 불명한 언어가 없었다. 그렇다고 굳이 대답해 줄 필요도 못 느꼈다.

온기현이 언제 입을 열어 줄까, 류주호는 그것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눈이 충혈될 정도로 제 숨결 하나하나를 집중하듯 살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온기현은 입술을 꾹 깨물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온기현은 쫄딱 젖은 채 우뚝 서 있는 류주호를 지나쳐 빌라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 집으로 얼른 들어갔다.

쾅.

문을 닫자, 사방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마치 오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온갖 소음으로부터 격리된 느낌이다.

자꾸만 머릿속에 류주호의 젖은 모습이 떠올랐다. 처절하게 내뱉던 애원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이제 와서. 왜, 이제 와서.

온기현이 신경질적으로 우산을 접었다. 그리고 철벅거리는 운동화를 벗고는 껌껌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가만히 서 있었다. 어이없는 비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웃기고 있어.’

다잡은 마음을 다시금 추스르려 불을 켜려고 했지만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일을 하루 동안 겪은 것 같았다.

기진한 몸이 아래로 꺼졌다. 온기현은 바닥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댔다.

조금 진정할 필요가 있었다.

나중에, 라고 말은 했지만 그것은 류주호와 풀어야 할 일이 있을 때나 할 얘기였다. 애초에 류주호와 연을 끊고자 결심했었다. 오늘 들었던 얘기들은, 그것을 번복할 마땅한 이유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홀딱 젖은 류주호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온 신경을 저에게 쏟으면서, 동시에 혹여라도 집 근처에 온기현이 언급했던 누구라도 찾아올까 하고, 주위를 연신 살피며 날을 세우는 모습이 선연했다.

‘그만 생각하자. 이제.’

온기현은 뻐근한 뒤통수까지 벽에 기대어 잠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잠겨 있던 의식이 서서히 깨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선잠이 든 듯했다. 창밖은 아직도 껌껌했다.

비는 완전히 그쳤지만, 간밤의 비에 젖어 한층 짙어진 새벽이 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바닥에 놓인 핸드폰을 들어 보니 그래도 꽤 시간이 지나 있었다.

문득 가슴이 답답해졌다.

도저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버석거리는 머리를 쓸어내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대로 마른 신발을 꺼내어 신고서는 문을 열었다. 주위 공원에라도 가서 청량한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그리고 계단을 하나둘, 천천히 내려갔다.

이윽고 1층에 다다라 막 빌라에서 벗어나려던 때. 온기현은 걸음을 멈췄다.

눈이 크게 뜨였다.

류주호가, 아까와 같이 비에 푹 젖은 모습을 한 류주호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몇 시간 동안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은 것처럼, 거짓말처럼 기현이 그를 등지고 떠난 때 그 모습 그대로였다.

기척을 알아챘는지, 류주호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기현아.

그렇게 이름을 읊는 류주호의 목이 완전히 쉬어 있었다. 눈은 금방이라도 피가 터질 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예쁘게 반짝이던 연갈색의 눈동자가 잿빛으로 보일 정도로, 심하게 충혈된 채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온기현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순간 뒷걸음질 치려던 발을 애써 앞으로 뻗었다.

무시하고 싶어서였다.

왜 안 가고 여기에 있었던 건데. 그런 꼴을 하고서는.

그대로 발을 옮겼다. 류주호를 지나쳐, 어디론가, 류주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제가 다시 집으로 들어가면, 어쩐지 류주호가 제가 나올 때까지 절대로 발을 떼지 않을 것 같았다.

그에 정신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비에 젖은 바닥을 치는 소리가 찰박찰박하는 소리로 빠르게 바뀌었다. 하지만 그건 뒤를 따라붙은 이도 마찬가지였다. 물을 차는 소리가 점점 더 빨라졌다. 다리는 제 의지와는 다르게 너무나 무거웠다.

뒤도 돌지 않았다. 주먹 쥔 손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하지만 금세 거리가 좁혀졌다. 초조한 마음에 거의 뛰다시피 빠르게 걸었다. 인적이 드문 비탈길까지 도달한 온기현이 “제발 그만 따라와!”라며 외치려 뒤로 고개를 돌리려던 때, 발이 빗물 고인 웅덩이를 밟았다. 순간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발이 미끄러지며 옆으로 중심을 잃었다.

“아!”

“기현아!”

촤악. 퍽.

이런 상황에서 빗길에 꼴사납게 넘어지려고 한 온기현을 류주호가 뒤에서부터 팔을 받쳐 지탱했다. 비탈길에서 굴러 넘어지려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으악, 하는 소리도 나올 틈 없이 류주호가 강하게 팔을 아래로 끼워 넣었다. 신체 중심이 완전히 무너지며 그 팔 위를 강타하듯 전신이 아래로 무너졌다.

“헉, 헉…….”

“괜찮아?”

넘어진 채로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완전히 스러진 중심 때문에 어딘가 다쳐도 크게 다쳤을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제 몸 어디에서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등 뒤에서 저를 꽉 잡은 부드러우면서도 억센 악력만이 느껴졌다. 그리고 제 몸을 단단하게 받치고 있는 굵은 팔의 감촉도.

온기현은 류주호의 몸 위에 엎어지듯 넘어진 상태였다. 류주호가 바닥으로 몸을 던지며 온기현의 체중을 오롯이 받아 들었다. 행여라도 놓칠세라 기현을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요란하게 넘어질 뻔한 온기현은 겨우 바짓단 아래만 젖어 있었다.

류주호가 밭은 숨을 내쉬는 동안 위로 이끄는 힘에 의해 온기현은 겨우 중심을 잡고 일어섰다.

“괜찮아? 다친 데 없어?”

류주호의 말에 흠칫 놀라며 몸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입이 설핏 벌어졌다. 류주호는 흙탕물이 잔뜩 튀어 옷이 지저분하게 얼룩져 있었다. 여기저기 정체 모를 얼룩이 묻고, 상의 아랫단은 아예 새까맣게 젖었으며 얼굴에도 거무튀튀한 흙이 튀어 있었다. 그런 꼴을 하면서도 온전히 눈에는 온기현의 걱정만 담았다.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이 엄습했다. 아까부터 빙글빙글 돌던 머리가 뜨끈해지면서 빈혈이 인 듯이 어지러웠다.

아까부터 몸과 마음이 완전히 지친 상태였다.

답답했다. 짜증이 일고 진절머리가 났다. 혼란스러웠다. 머리를 흔들자 넘어지려던 때 바닥의 흙탕물이 튀었는지 머리 끄트머리에 대롱대롱 달렸던 물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너, 제발 가! 좀 꺼지라고! 제발 좀…….”

“좋아해.”

온기현이 중얼거리듯 말하는 틈새를 류주호의 언어가 파고들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 어디에서건, 어느 무리에 있건, 그 누구보다 빛나던 류주호였다. 이렇게 비탈길에서 더러운 흙탕물을 뒤집어쓴 류주호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모습이다. 하지만 정작 류주호 자신은 전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의 온 신경이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후둑, 투둑.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류주호가 한숨처럼 다시금 속삭였다.

“좋아해. 기현아.”

“지랄하지 마.”

독이 잔뜩 오른 신랄한 말이 류주호의 말을 뚝 잘라 냈다.

또다시 흔들린다. 진짜 거지 같다.

하지만 지난 기억이 떠올랐다. 저 단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온기현은 부러 류주호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 하며 재차 뚝뚝 흐르는 미련을 잘라 냈다.

그리고 돌아섰다.

하아, 하아.

호흡이 가빠져 오고 심장이 벌렁댔다. 류주호를 등지고 앞으로 나아갔다. 뒷머리가 당기는 느낌을 애써 무시했다. 무시하려 했다. 무시, 해야 했다.

“…….”

꽤 떨어진 거리까지 걸어간 온기현이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쥐었다.

윽.

독한 숨을 삼키며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입매가 잔뜩 우그러졌다.

비탈길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류주호는, 파랗게 질려 있었다. 전신에 지저분한 것을 뒤집어쓴 채, 금방이라도. 마치 금방이라도 땅으로 꺼져 버릴 것 같은 파리한 얼굴을 하고서는 땅에 못 박힌 듯, 그렇게 서 있었다.

그럼에도, 곧게 직시해 오는 눈동자는 오로지 온기현만을 향해 있었다.

“아…….”

순간, 류주호를 처음 봤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누구보다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단상에 올라 반짝이던 그 모습. 눈을 떼지 못해 홀린 듯 쳐다볼 수밖에 없던, 누구보다 빛나던 그 모습.

잔상처럼 아른거리던 옛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류주호로부터 차마 눈을 뗄 수 없었다.

“가지 마…….”

제발.

류주호의 음성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기현아, 기현아. 라고 작게 읊조리며 저를 부르는 그가 마치 우는 것처럼 들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그런데.

그때와 지금의 류주호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자신만만하던 표정은 처량함과 절망이 어려, 깔끔했던 옷은 지저분하고 더러웠다. 그런데도.

너는 왜.

그대로 발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금 성큼성큼 그를 향해 다가갔다. 멍하니 저를 바라보던 빛을 잃은 눈동자가 제 눈을 의심하듯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매섭게 말을 뱉었다.

“너 나한테 잘못한 것 많아.”

“……미안해.”

“내가 너 분명히, 꼴도 보기 싫다고 했어.”

“……미안해.”

류주호가 절망이 스민 빛을 띠며 그렇게 읊조렸다. 단순한 회피의 말이 아니었다. 갈색빛을 띠던 머리카락에 검은 것이 덕지덕지 묻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다.

말을 덧붙이려 벙긋거리던 입을 꾹 닫았다.

그런데도, 너는 왜.

너는 왜 이렇게 빛나 보일까. 왜 나는 이렇게 자꾸, 너만 눈에 들어올까. 왜 너만 특별해 보일까.

문득 가슴이 터질 것처럼 울렸다. 자꾸만 마음이 요동친다. 세상이 뒤집힐 것처럼 쿵쿵거리며 젖은 땅이 발밑을 쳐 올린다. 붉어진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동시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류주호는 버석한 얼굴로 한 발자국 더 가까이하며 온기현에게 말했다. 아니, 애원했다.

“기현아, 나는……. 너랑 있지 않으면 안 돼. 나, 조금 유치하고 성격도 그다지 좋지 않아. 지금 당장 너한테 잘 보일 만한 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그런데, 그래도 난 너랑……, 네 옆에 있고 싶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다.”

바닥을 거칠게 긁는 듯한 목소리였다.

온기현의 눈가에 빗방울이 뚝 떨어지며 눈물이 어렸다.

절절하고 구차한 고백은 하나도 멋이 없었다. 그런데도 어쩐지 목이 메어 왔다.

“너한테만 줄게. 처음부터 끝까지, 내 마지막. 전부 다. 그러니까 너도, ……나한테만 줘. 제발.”

“…….”

류주호는 말했다. 제 낭만과 사랑을 모두 저에게 주겠다고. 남은 인생을 모조리 온기현에게 주겠다고. 그리고 뻔뻔하게 저도 그런 비등한 사랑을 저에게 요구한다.

그게 미워야 하는데, 밉지 않다.

“미안해. 나쁜 말로 상처 줘서.”

“…….”

“미안해. 많이 몰라서.”

방울진 눈물이 턱을 타고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미안해. 꼴사납게, 널 놓지 못해서.”

“…….”

척척한 바닥을 한 걸음씩 디디며 류주호가 다가왔다. 저도 주체하지 못하는 감정을 어쩔 줄 모르고, 온기현의 반응을 하나하나 살피며. 온기현의 젖은 눈이 류주호의 젖은 얼굴을 마주했다.

지독한 짝사랑을 낯설게 마주했던 민낯은 사실은 사랑 앞에 완전히 굴복한 순종적인 패배자의 얼굴이었다.

제발, 이라고 애원하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떨렸다. 그 진동이, 그 파장이, 못 견딜 정도로 모든 결심을 앗아 갔다.

류주호의 깊은 눈이 온기현을 빼곡하게 담았다. 그리고 다시금 축축한 입을 열었다.

“나랑 사랑하자, 기현아.”

함께하는 사랑을 구걸했다.

“나랑 사랑하자. 너랑 사랑하고 싶어. 사랑하자, 나랑.”

“아…….”

나는…….

말을 잇지 못하는 온기현의 얼굴에 류주호의 손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혹여나 거절당할까 봐, 천천히 와 닿으며 머뭇거리는 손을 피부로 느꼈다.

“기회를 줘. 기현아. 나, 병신같이 잘 몰라. 처음이라서 많이 서툴러. 그래도, 네가 알려 줘. 사랑하는 법, 네가 나한테 알려 줘.”

“나, 나는…….”

입을 달싹이다가 자꾸만 어그러지는 입매를 꾹 닫았다.

눈에서 자꾸만 뜨거움이 치솟았다.

그러다가 왈칵, 참지 못한 울음이 터졌다. 끄윽, 하고 목구멍을 막았던 것이 허엉, 하는 울음과 함께 터졌다. 한 손을 올려 손등으로 눈두덩이를 가렸다.

“나, 나도 잘 몰라……. 허엉……. 나도, 나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읏, 흐어엉…….”

저도 몰랐다.

사랑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순수하게 누군가를 좋아하고, 맹목적으로 두근거리는 감정을 느낀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저 모든 게 처음이었다.

“나도 모르는데, 흐엉……. 뭘 알려 달라는, 흑, 거야아…….”

갑자기 원망 섞인 울음을 터트린 온기현을 바라보던 류주호가 어깨를 굳히다가 흘러넘치는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는지 온기현을 와락 껴안았다.

담벼락 아래에서 두 개의 젖은 몸이 완전히 겹쳐졌다.

온기현의 귓가에 뜨거운 숨이 와 닿았다. 류주호는 어찌할 줄을 몰라 인상을 찡그렸다. 감당하지 못하는 마음에 자꾸만 더욱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귓가에 터지는 울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온기현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그럼, 그럼 우리 둘이 같이 알아 가자. 사랑하는 법……. 너를 제대로 사랑하는 법. 함께 사랑하는 법. ……우리 같이 알아 가자, 이제부터.”

함께 알아 가자.

그렇게 읊조리는 류주호의 커다란 몸이 뜨거웠다. 불에 달군 듯 뜨거운 온기가 옷감 너머로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평생이 걸리더라도.”

흔한 사랑 얘기에서처럼, 쉬이 입에 담는 영원한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 말 그대로, 제 남은 인생을 온기현의 손 위에 선뜻 올려 준다는 것이었다.

이제껏 방만하게 받아 왔고, 또 헤프게 내밀어 왔던 그 모든 것을 온기현에게 통째로 쥐여 준다는 것이었다.

제 목줄을 네가 잡아 달라고 건방지게 애걸하고 있었다.

온기현이 손을 올렸다. 눈물이 뚝뚝 떨어져 계속해서 젖어 가는 단단한 어깨 위로 올라가던 양손 끝이 조금씩 떨렸다.

저를 껴안고는 다시는 놔주지 않을 것처럼 단단히 옭아맨 이의 어깨를 그대로 껴안을 것 같던 양손이 순간 어깨를 꽉 잡더니 확 떨어졌다.

류주호의 몸이 순간 움칠했다.

곧바로 온기현이 류주호의 멱살을 양손으로 한껏 틀어쥐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류주호를 진흙투성이의 담벼락으로 쾅 밀어붙였다. 철썩, 하고 등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커다란 몸체를 억누르듯 멱살을 쥔 양손에 힘이 들어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물기 어린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입술을 질근 문 채, 커다란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을 류주호가 홀린 듯 바라보고 있던 때, 온기현이 이윽고 울음 섞인 말을 뱉어 냈다.

“너, 너 진짜 나 좋아해? 흑, 흐윽. 너 그럼 진짜, 앞으로 나만, 봐야 하는 거야. 너 막 나 말고 딴 사람이랑, 결혼 같은 거, 하면 안 되고, 정말 나만 봐야 되는 거야. 흑. 흐으, 알아?”

중간중간 흐느낌에 자꾸만 입꼬리가 아래로 처지는 것을 억지로 열어 단호하게 윽박질렀다.

온기현의 손은 무른 두부처럼 금세 으깨어져 버릴 것 같은 미약한 힘이었다. 하지만 류주호는, 마치 엄청난 무게의 수갑으로 결박된 사람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발밑에서 정수리 끝까지, 거대한 환희의 물결이 들이닥쳤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희열이었다.

꿈결같이 압도적인 환락이었다.

무섭도록 사랑스러운 표독한 표정으로 그렇게 따져 묻는 온기현을 몽롱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런 류주호를 향해 흐윽, 하고 터지는 눈물을 참으며 막 입을 열 때였다. 류주호가 대답했다.

“알아.”

언뜻 단조로운 대답에 온기현이 울음을 참는 목소리로 재차 따졌다.

“진짜, 알아? 너 내가 말하는 뜻, 알고서 그러는 거야? 너.”

“사랑해.”

드디어 제 고삐를 틀어쥔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생물체에게 재차 사랑을 고백했다.

사랑해.

기현아. 온기현.

사랑해.

달콤하게 속삭이는 말에 놀란 표정을 짓던 온기현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새까만 눈동자에 원망과 애정이 뒤섞인 묘한 빛이 스몄다. 커다랗게 뜨인 눈이 일렁였다.

온몸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이 남자가 낯설었다. 아직 불안은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함께 사랑을 알아 가자는, 자기만 보겠다고 담담하게 선언하는 남자를 믿고 싶었다.

“그럼, 너 나한테…….”

온기현이 잠시 달싹이던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온 말은, 믿음을 보이라는 요구의 조건이 앞섰다.

류주호는 온기현이 요구하는 바를 뭐든지 들어줄 용의가 충분했다. 당장 제 앞에 무릎을 꿇고 기라고 해도 길 수 있었다. 장기를 내 달라고 해도 내줄 수 있었다. 온기현의 마지막이 자신만 될 수 있다면. 기현을 다른 이에게 뺏기지 않는 것이라면.

온기현이 이윽고 울음 섞인 말을 뱉었다.

“……키스, 해.”

아…….

무언가 엄청난 요구를 할 것처럼 저를 겁박해 놓고는, 이렇게 무르디무른 요구를 해 온다. 온기현이라는 사람이 그랬다. 그것조차 못 견디게 가슴이 벅찼다.

어째서 몰랐을까. 왜 처음부터 눈치채지 못했을까.

바보같이 빙 돌아왔어. 병신처럼 서투르게 대하고 상처 입혔어.

넌 나에게 있어서 이토록…….

멱살을 쥔 온기현의 손에서 스르르 힘이 빠졌다. 얕게 들이쉬었다 내쉬는 숨까지 모조리 달콤했다.

“어떡하지…….”

류주호가 빠듯하게 차오르는 감격을 어쩌지 못해, 손을 느리게 뻗었다. 그러고는 온기현의 등 뒤로 팔을 둘렀다. 와락, 젖은 몸을 껴안는 힘이 한없이 부드러웠다. 동시에 강인했다. 이 품에 가득 들어온 이 빌어먹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제 고삐를 틀어쥔 것이다.

그리고 주인의 요구에 따라 축축한 입술이 맞물렸다. 발갛게 달아오른 볼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어느새 비는 그쳤다. 서로의 숨만이 사위를 촉촉하게 채워 갔다.

가볍게 맞물렸다가 떨어진 맹세의 키스는 한없이 달콤했다. 말랑한 살이 잠시 붙었다가 떨어진 것만으로도 강렬한 희열이 전신을 감쌌다.

온기현이 감았던 눈을 스르르 떴다. 그리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좋아해.

그 말에 다시금 두 인영이 빈틈없이 맞붙었다.

온기현은 울어서 두 눈이 팅팅 붓고, 류주호의 온몸은 흙탕물로 젖어 있었다. 서로 이런 담벼락 밑에서 이런 꼴로 나누는 사랑 고백은 꼴사납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이제까지의 인생 중에 더없이 완벽하게 빛나는 순간이었다.

맞붙은 입술 새로 류주호가 조용히 읊조렸다.

이제 네 방은 전부, 나만 쓰는 거야. 다, 전부 다.

영문 모를 말을 하며 뭐가 그리 기쁜지 환하게 웃는 류주호의 얼굴을 보며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가 곧 온기현의 온몸을 빠듯하게 끌어안고는 쉴 새 없이 입술로 얼굴 여기저기를 쪼아 대는 통에 고개를 가누는 것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문득 바람 빠진 웃음이 샜다.

그러자 류주호가 마치 꿈이라도 꾸는 표정으로 그런 온기현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봤다.

젖은 얼굴을 한층 더 적셔 가는 물방울이, 마치 다른 것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아득한 표정의 그의 얼굴에서는 하염없이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러다 곧, 그도 마찬가지로 환희의 웃음을 터트렸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만 가지의 사랑 중에 오로지 서로를 위한 단 하나를 발견해 온 과정이 결코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아직은 사랑이란 게 어떤 모습을 띠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 이제야 겨우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눈앞의 이 사람과 수천 번, 수만 번 사랑에 빠지리라는 것.

두 사람의 사랑의 출발점은 전혀 달랐다. 하지만 그 보폭의 차는 빠르게 줄어들어, 결국에는 나란히 걸음을 맞추어 같은 속도로 차곡차곡 둘만의 무언가를 쌓아 나갈 것이다.

그리고.

온기현의 출발점이 그가 생각한 것보다 아주 조금 앞서 있었다는 것을 그가 알게 되는 것은,

아마 아직은 더 먼, 하지만 곧 찾아올 훗날의 이야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