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부. Loose and Tight (1)
익명
02/05 13:55
제목 : 오늘은 수강 신청 잘하는 법에 대해서 알아보아요~!
내용 :
안녕하세요~ 벌써 한 달 뒤면 꽃 피고 술에 찌드는 신학기가 시작되네요!
신학기를 맞아서 새내기들은 두근두근 대학 생활을 기대하고 있을 텐데요~.
그런 새내기들을 위해 오늘은!
수강 신청 잘하는 법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수강 신청 잘하는 법’에 대해서 많이들 궁금해하시더라구요~.
아마 다들 ‘수강 신청 잘하는 법’을 매우 알고 싶으실 텐데요!
‘수강 신청 잘하는 법’, 저도 참 궁금하네요~.
그럼 오늘은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할게요~.
다들 황사 조심하세요!
#수강신청잘하는법 #전필실패하면 #어떻게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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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 #죽을래? #당장좌표찍어라
익명
└ 빡치내.
익명
└ 빡치내 (×) 빡치네 (O)
익명
└ 맞춤법충 주거! 주거! 주거!
익명
└ 주거 (×) 죽어 (O)
익명
└ 넌Jobㅎ1면두1진匸r
익명
└ 비밀 댓글입니다.
익명
└ 비밀 댓글 ezr 하고 자빠짐 Aㅏㅡㅡ
익명
└ 꿀팁 알려 준다. 강의에 ‘콘텐츠’나 ‘4찬 산업 혁명’ 들어간 강의 무족권 들어라. 선배가 해 주는 세속에서의 마지막 유언이다…….
익명
└ 영장 나왔어요, 형님?
익명
└ ㅅㅂ
익명
└ 미친. 그 강의 두 번이나 백퍼 조별 과제 평가 아님? 지난 학기에 그 교양 들었던 내 친구는 너튜브의 너 자만 들어도 경기 일으키던데?;; 왜 추천함?;;;
익명
└ 넌씨눈이냐?
익명
└ 저도 그 강의 들었어요. ^^ 교수님도 정말…… 센스 있으시고 인성도 훌륭하시고…… 더할 나위 없이 감명받았던 강의였어요. ^^새내기들 꼭 수강 신청 성공하세요♡ ― 이 글은 공익을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
익명
└ 근데 지난 학기 그 교양 꿀이긴 했음. 중간 때는 무임승차 세 명이 최하점 받아서 밑에 깔아 주고, 기말 때는 2인 1조 팀플이었는데 조 하나가 완전 공중분해 됐었음.
익명
└ 그래? 이번에 박 터지겠네. ㅅㅂ
익명
└ 그건 아니라고 본다. 그냥 팀플 두 번이라는 거 자체가 좆 같음.
익명
└ 근데 공중분해라는 게 뭔 말이냐?
익명
└ 팀원 두 명 다 어느 날 갑자기 동시에 강의에서 사라짐.
익명
└ 헐;;
익명
└ 소오름……. 무슨 캠퍼스 괴담 같다; 존나 무섭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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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기현은 과방 앞에서 제 몸에 대각선으로 걸친 크로스 백의 끈을 꽉 틀어쥐었다. 마른 손바닥으로 오돌토돌한 끈을 문질렀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카락을 슥슥 쓸어내렸다.
크흠, 흠. 목청을 가다듬으며 과방 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문을 천천히 열어젖힘과 동시에 고개를 빼꼼 내밀어 들어가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응?”
“어?”
안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기현은 어색하게 설핏 웃으며 등 뒤로 문을 닫았다.
예전 과방에 두 번 정도 와 봤던 기억이 있다. 그 또렷한 기억 속의, 다 낡아 솜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던 가죽 소파는 깨끗한 회색 패브릭 소파로 바뀌어 있었다.
소파 위에 늘어지듯 몸을 뉜 채 만화책을 보던 이가 온기현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동시에 구석 캐비닛 앞의 테이블을 둘러싸고 여학생 둘이서 한창 수다를 떨던 명랑한 목소리가 뚝 끊겼다.
해설피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어리둥절한 눈들이 온기현을 향했다. 그리고 그중 하나, 익숙한 얼굴이 알은체를 해 왔다.
“기현 선배님. 헐.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와아. 이번 학기 다니세요?”
“네. 저 근데 이제 3학년이라 아직 1년 반 더 남았어요.”
“오오. 저랑 같네요. 어, 잘 지내셨죠?”
“네. 잘 지냈어요?”
과대인 심현석이었다. 그는 조금 어색하게 웃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온기현을 맞이했다.
뭔가 묻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뗐다 닫기를 반복했다. 그는 지난 학기에 온기현이 중도 휴학을 한 것도, 또 류주호와 저 사이에 있었던 모종의 연유로 자신이 중간에서 이용당했었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저 또한, 그날 그렇게 자리를 뜨고 나서 심현석과 사적인 연락을 한 번도 주고받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부러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양 행동했다.
심현석 또한 굳이 캐내어 물을 필요를 못 느꼈는지, 아니면 이 자리에서 물을 만한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지, 볼을 긁적이며 다른 화제로 말을 돌렸다.
“어, 근데 분위기가 좀 달라지신 것 같은데. 엇, 염색하셨네요?”
제 앞머리를 손가락 끝으로 매만졌다. 저도 아직 거울을 보는 게 어색한 참이었다. 염색을 한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체모가 거의 머리털에만 집중되어 빡빡하게 숱 많은 머리가 전체적으로 진한 갈색빛이 돌았다.
“엄청 밝게 한 것도 아닌데 알아보시네요.”
“제가 또 눈썰미가 기가 막히잖아요.”
“그러신 것 같아요.”
“것보단, 선배님 얼굴이 하얘서 티가 확 나요. 전 딱 한 번에 알아봤죠.”
“그래요?”
아, 태닝이라도 할걸.
온기현이 제 볼을 손등으로 멋쩍게 문질렀다. 피부색은 원체 하얀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온기현은 한참 얼굴이 말이 아니던 때와는 혈색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그동안 꾸역꾸역 잘 먹고 다닌 덕인지, 내렸던 볼살이 원래대로 올라와, 반들반들한 살이 손등 아래로 말캉하게 눌렸다.
“선배님, 말 편하게 놓으세요.”
“네?”
심현석이 살갑게 웃으며 “저도 형이라고 부를게요.”라고 말했다. 사교성이 좋은 과대였다. 온기현도 그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과방에는 어쩐 일로……. 아, 이렇게 묻는 것도 이상하다. 경영학과이신데 과방에 오는 것도 당연한데요, 그쵸. 하하.”
“아니. 나도 진짜 어색해. 전과하고 나서 거의 두…… 번째인가.”
“그래요? 앞으로 자주 오세요.”
“응. 그러려고. 이제 남은 학기 동안만이라도 과 활동 좀 열심히 해 보려고.”
“어, 진짜요? 좋죠.”
심현석은 반갑다는 말투로 호응을 해 주었다. 그러더니 옆에 앉아 있던 여학생 두 명과도 서로 인사를 시켜 줬다. 그들은 이제 막 2학년이 되는 후배들로, 인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선배님, 선배님 하면서 살갑게 굴었다.
새로운 사람들과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번호를 찍고 전화를 걸어 제 핸드폰에 찍히는 번호를 새로운 연락처로 등록했다. ‘경영학과 1×학번……’으로 시작하는 번호들이 나열됐다.
메신저 앱의 신상 이모티콘이 귀엽다며 이모티콘으로도 인사를 하고, 이름도 모를 경영학과 누군가가 썸을 타고 있다는 흥미로운 가십거리를 귀담아들었다. 그 어딘가의 흔한 대학생처럼. 그렇게 시답지 않은 화제를 주고받으며 사람들과 웃고 떠들었다.
어쩐지 괜찮을 것 같았다.
이제껏 놓쳐 왔던 시간을 되돌리기에, 충분한 시작인 것 같았다.
하지만 전부가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온기현은 속으로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아무리 눈을 감았다 떠도, 눈앞에 닥친 상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 씨. 그때 손이 미끄러지지만 않았어도.’
속으로 핑계를 대 보아도 아무것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티셔츠가 구겨질 정도로 아랫단을 꽉 쥐어 보다가 아니다, 싶어서 손으로 탈탈 털었다.
[4차 산업 혁명 시대의 콘텐츠 플랫폼 성장]
어떻게 이렇게 또.
수강 신청할 때 나머지 학점은 전부 원하는 과목으로 채워 넣었다. 지난 학기에 수강하지 못했던 강의도 두 개나 성공했다. 하지만 교양 필수 하나가 비었는데 전공을 채우느라 교양 필수를 만만하게 본 게 실수였다. 웬만한 강의는 이미 정원이 찼고, 그나마 남아 있던 강의가 이것뿐이었다. 달라진 점이라고 한다면, 어째서인지 강의명이 ‘혁명’에서 ‘성장’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교양 선택에서 교양 필수로.
버릇처럼 뚱하니 입술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렇게 엄청 대단한 강의도 아니었잖아.’
사실 이 강의는 대외적으로 학생들 사이에서가 아닌 학교 내부의 새로운 시도로서 호평을 받는 강의였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류의 아이덴티티에 충실한 강의라는 평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가 방식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는 기피 1순위 강의로 통했다.
그것과는 별개로 온기현의 감상은 사적인 감정이 담뿍 담겨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껏 조별 과제 경험은 세 번. 그중 두 번의 조별 과제는, 아마 앞으로 있을 어떤 조별 과제보다 고단하고 힘겨운 것이었으리라. 뭐든지 그것에 미치지는 못할 것이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한숨을 삼키고 강의실로 들어섰다.
강의실도 지난 학기와 같은 곳이었다. 계단식의 천장이 높은 중형 강의실 앞에는 무릎 높이의 강단이 위치했고, 오른쪽으로 줄지어 뚫린 사각형의 창에서는 따듯한 봄날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온기현은 눈동자를 굴려 안을 살짝 둘러보고는 얼른 강의실 맨 앞줄을 찾아가 앉았다.
강의 시작 3분 전이라, 이전 강의를 끝낸 학생들이 속속들이 강의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멀뚱히 앉아만 있기 뭣해서, 노트북을 꺼내어 전원을 켜고, 노트와 필기구를 꺼내어 책상 위에 펼쳐 놓았다.
이전에 살던 자취방 계약은 그대로 연장됐다. 부모님이 졸업할 때까지는 어느 정도 도움을 주시기로 했지만, 온기현은 손사래 쳤다. 아직도 집안 사정이 여유롭지 않다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었다. 1년만 버티면 그 뒤에는 어디에라도 취직을 하면 되었고, 제 밥벌이는 알아서 해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간 뒷바라지를 못 해 준 부채감 때문인지 억지로라도 등록금을 쥐여 주는 부모님 덕분에 월세만 스스로 감당하면 되었다.
새롭게 달렸던 디지털 도어 락은 아예 떼어 내 부숴 버렸다.
제 우려와는 다르게, 그간 누군가 침입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제 노트북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저는 단 한 번도 노트북을 정갈하게 놓아 둔 적이 없었다. 역시나가 역시나였다. 짜증보다 어이가 없어서 아연함을 금치 못했다.
서울에 오자마자 노트북을 새것으로 교체했다. 사실, 제가 느끼기에 새것이라고는 해도,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구매한 중고품이었지만.
그래도 예전 것보다 훨씬 가볍고, 또 훨씬 빨랐다. 역시 기계는 새것이 무조건 좋은 거다. 온기현은 빠른 부팅에 속으로 씩 웃으며 와이파이를 먼저 연결했다.
곧 강의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시곗바늘이 정각을 가리켰다.
도란도란 웅성웅성 떠들던 학생들의 소음이 일제히 가라앉았다.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강의실 앞쪽의 문을 보니, 교수가 들어온 기색은 없었다.
뭐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어느 기억 속의 순간을 떠올렸다. 뒤를 돌아본 것은 기시감의 발로였다.
누군가, 강의실 뒷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온기현은 그 얼굴을 보고서는 제 눈을 의심했다. 순간 숨 쉬는 법을 잊어먹은 사람처럼 전신이 굳었다. 절대로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사람을 담은 눈이 크게 뜨였다.
‘……류주호.’
저도 모르게 입을 막을 뻔했다. 그를 부르는 이름이, 순간적으로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탓이었다.
‘쟤가 왜, 여깄어? 왜.’
분명히 지난 학기가 마지막이었다. 분명히 진작 졸업했어야 했다. 이 캠퍼스 내에서, 절대로 마주치지 않았어야 할 사람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강의실로 들어온 그가 문득 고개를 돌리더니 조용한 시선을 강의실로 던졌다.
순간, 온기현이 얼굴을 홱 앞으로 바로 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쿵거렸다. 입술이 바싹 마르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다. 잠시 가만히 숨을 죽였다. 애써 진정하려고 하니, 그제야 머리가 조금씩 제대로 돌기 시작했다.
졸업, 안 한 건가? 아니면 혹시, 졸업했음에도 굳이 자신이 듣는 이 강의를 찾아 들어온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알 수가 없었다.
동시에 짜증이 났다.
설마,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불쑥 솟아났다. 그렇게 떨어트리려고 애썼는데도, 이렇듯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치다니. 이건 따라온 거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왜?
속으로 자문했다. 대체 왜. 류주호가 왜? 우연인가? 아니면.
더 깊이 고민하기도 전에, 교수가 강의실에 들어왔다. 지난번 학기와 같은 교수였다. 그는 여전히 만면에 자애로운 웃음을 띠고 있었다. 지난 학기에 비해 한 가지 달라진 점은, 패션이었다. 교수는 검은색 목 폴라 티에 청바지가 아니라, 딥블루색 솔리드 셔츠에 진한 검정색의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교수의 상쾌한 인사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뒤통수가 당겼다. 류주호가 어디에 앉는지까지 미처 보지는 못했지만, 맨 앞줄에 앉은 저보다 뒤쪽에 앉아 있는 건 자명했다. 자꾸만 뒤통수가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염색할 때 염색약이 따가워서 눈물을 찔끔 흘렸던 창피한 기억조차 갑자기 떠오를 정도로, 갑자기 뒤통수가 아려 왔다.
아니, 전신의 신경이 온통 뒤쪽으로 쏠려 있는 느낌이었다. 저한테 동물의 귀가 달려 있었다면 뾰족 솟은 귀가 완전히 뒤로 누웠을 터다.
동시에, 아까 잠깐 눈에 담은 류주호의 모습을 상기했다. 스치듯 눈에 담은 얼굴선이 어쩐지 날카로워진 느낌이 들었다. 그랬다. 전체적으로 어딘가, 많이 달랐다.
첫 수업은 30분도 되지 않아서 끝났다. 수강 변경 기간 전이라서 대략적인 인사와 강의의 취지에 대해서만 구두로 설명을 마친 교수는 강의실을 벗어났다.
온기현은 앉아 있는 그 상태 그대로 꼼작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아니다, 하고 제정신을 차렸다. 신경 안 쓰기로 했다. 혹여라도 다시 저한테 접근해 온다고 하더라도, 냉정하게 대할 수 있다. 무시할 수 있다.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내쳐야지.
이것저것 마구잡이로 생각했다.
‘그냥 불러다가 한마디 해? 아니면, 그냥 무시할까?’
노트북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그리고 부러 커다란 동작으로 씩씩하게 짐을 챙겼다.
그래. 내가 왜 피하는데?
온기현은 가방을 턱 짊어지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류주호는 맨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복작한 행렬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시선은 창밖을 향한 채로.
씩씩하게 올라가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점점 시야에 커다랗게 잡히는 류주호는, 정말로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머리 스타일부터 옷차림까지 전부 다.
옆으로 가르마를 타고 이마를 위로 자연스럽고 단정하게 내리던 머리는, 머리 양쪽이 짧게 깎여 있었고 가운데 머리는 눈썹까지 닿도록 앞으로 내린 모양새였다. 그리고 옷차림 또한, 언제나 깔끔한 셔츠나 니트와 재킷 혹은 코트만을 입던 그는 청바지와 가죽으로 된 트러커 재킷을 입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깔끔한 부잣집 도련님 같던 스타일이 완전히 정반대로 바뀌어 있었다.
정말로, 다른 사람 같았다.
쿵. 쿵.
심장이 자꾸만 방망이질해 댔다. 가슴뼈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마구 안쪽에서 온몸을 두들겨 댔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이 강의실에 있는 모두에게 들릴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걱정까지 밀려올 만큼.
하지만 점점 가까이 다가갈수록, 두근대던 심장이 조금씩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완전히 무뎌진 것일까. 놀랐던 것도 잠시, 이제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자신을 인식하고서는 내심 안도했다.
온기현이 천천히 눈을 깜박거렸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쳤다.
‘아.’
전체적으로 확실히 날카로워진 인상의 류주호는, 웃음기 하나 없는 마른 얼굴로 온기현과 시선을 마주했다.
‘뭐라고 해야 하지? “너 내가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했지?”라고? “너 졸업 안 했어?”라고?’
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며 멀뚱히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류주호였다.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던 것처럼. 자신을 못 알아보는 사람처럼. 저와 아무런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그렇게, 완벽한 타인을 앞에 둔 사람처럼, 류주호는 시선을 돌리더니 커다란 체구를 일으켜 온기현의 앞을 지나쳤다.
그가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까지 눈이 그를 좇았다. 그러다 그렇게 넋을 놓고 있던 사이에, 어느덧 손에서 힘이 풀렸다.
턱. 촤르륵.
“으아.”
온기현의 손에 들려 있던 교재와 그 사이에 끼워져 있던 프린트물이 바닥으로 넓게 쏟아졌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당황함에 몸서리치며 얼른 그것들을 주우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
온기현이 고개를 들었다. 한 발자국 앞쪽까지 떨어진 프린트물을, 류주호가 하나씩, 하나씩 주워 들고 있었다.
“…….”
아무런 말 없이 그가 손을 뻗어 차곡차곡 종이를 줍고는 마지막으로 온기현의 발밑에 있던 교재까지 손에 쥐어 그 안에 가지런히 넣어 주고, 마지막으로 먼지까지 탁탁 떨어 주는 모습까지 미동도 하지 못한 채 바라보기만 했다.
“여기.”
“어…….”
제 쪽으로 내민 교재를 멀거니 바라보다 아차, 싶은 마음에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 들었다.
“고, 고마워.”
간신히 떨어진 잇새로 어설픈 감사의 말이 겨우 나왔다. 놀라서 바보같이 말을 더듬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조금 맹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다는 것 또한.
“조심해야지.”
나긋하게 떨어지는 말에 온기현이 교재를 받아 들고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오랜만에 듣는 음성이었다. 무겁고, 부드럽고, 또 어딘가 거친 면이 있는. 분명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괜히 귀를 감싸 쥐고 싶었다.
오묘한 갈색빛의 눈동자가 저를 직시했다.
류주호 또한, 저처럼 과거에 둘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고요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완벽한 타인을 대하는 듯한 눈동자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류주호는 눈만 깜박거리는 온기현의 모습을 조용하게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몸을 돌리더니 온기현을 뒤에 두고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온기현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썰물처럼 빠져나간 인파 뒤에 남겨져 멍하니 강의실 문을 바라봤다.
* * *
삑.
중앙 도서관 게이트에 카드를 찍으니 유리로 된 낮은 칸막이 출입문이 좌우로 열렸다.
무거운 백팩 대신 넓은 모양의 크로스 백을 가볍게 어깨 위에 걸친 온기현은 제가 대여하려고 했던 자료가 있는 위치를 다시 한번 속으로 가늠했다.
한국 대학교의 중앙 도서관은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했다. 2년 전 리노베이션 공사를 통해 증축까지 한 도서관은, 졸업생조차 자칫하면 길을 잃을 정도로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근로 장학생을 한 적이 있는 온기현에게 있어서는 어디에 어떤 책이 있는지 찾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갔다.
기다랗게 늘어선 책장 위에 붙여진 표식을 보고, 사회 문화 카테고리에 해당하는 도서가 빽빽하게 꽂힌 책장 사이로 들어갔다.
열심히 검지를 세워 청구 기호를 더듬으며 책을 찾는 도중에, ‘ㅇ’으로 시작하는 열까지 손가락이 뻗어 나갔다. 그리고 문득, 류주호가 지껄였던 헛소리가 생각났다.
“아시아 100인의 패륜아.”
‘그런 책 같은 건 있지도 않으면서.’
나중에 포털에서 책 제목을 검색해 보고, 검색 결과가 ‘0’인 것을 확인한 온기현은 당시에도 어이없어서 그 뒤로 몇 번이나 ‘북미 100인의 패륜아’, ‘아시아 99인의 패륜아’ 등등으로 추가 검색을 했었더랬다. 류주호가 아무렇게나 지껄인 말에도 일일이 궁금해하던 때의 자신이 할 법한 일이었다.
이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온기현은 작게 한숨을 삼키고는 겨우 찾던 책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쏙 빼내어 다인용 책상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 앉았다.
학생들이 띄엄띄엄 앉아 있는 도서관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쓸데없는 소음을 내지 않도록 조용히 자리에 앉고서는 한 아름 품에 가득 안고 온 책들을 내려놓았다.
그중에 《혼돈의 시대 속 리더란》이란 책을 먼저 꺼내 들었다.
이번 학기부터 과대인 심현석의 권유에 따라 취업 스터디에 참가하기로 했다. 이미 작년부터 가볍게 스터디를 시작했다는 심현석과, 그 외의 몇 경영학과 학생들은 올해부터 3학년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를 시작한다고 했다. 소수로 이루어진 스터디라 많은 사람과 부대낄 부담도 적을 것 같아, 온기현도 기꺼이 권유에 응했다.
첫 장을 폈다. 줄줄이 나열된 목차가 눈에 들어왔다.
[1부. 혼돈과 분열]
첫 번째 목차부터 어쩐지 조금 골이 띵했다. 뒷장으로 넘겨 본문의 첫 페이지를 펼쳤다.
[혼돈의 시대란 무엇인가. 그 탁한 시대를 살아가는…….]
첫 줄만 거의 세 번은 읽은 듯했다. 혼돈이란 단어가 정말 있기는 한 걸까, 하는 생각에 도달했다. 게슈탈트 붕괴의 조짐이었다.
‘미치겠네.’
아무리 읽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온기현은 자신이 왜 이런 상태인지 알고 있었다. 진작 졸업해야 했을 이가 눈에 보인 탓이었다.
후우.
다섯 번째 시도 후에 책을 펼친 상태로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빡빡한 눈을 손으로 비벼 댔다.
왜 아직까지 학교에 있는 걸까.
왜 자신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은 걸까.
그렇게, 그렇게 미친놈처럼 행동할 때는 언제고. 대체 왜.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메웠다. 정수리에서 김이 날 정도로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낼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한 가지 도달한 이유는 이것이었다.
‘이미 끝난 거다.’
자신이 열병처럼 앓았다가 일어나 이제 겨우 걸음을 뗀 것처럼 그놈도 그랬던 것이다. 아니, 그 정도도 아니겠지. 그저 한철의 감기처럼 앓았던 것이다. 류주호는 그럴 만했다. 제 뜻대로 되지 않는 사람을 앞에 두고 오기가 생겼겠지. 그러다가 의도대로 되지 않으니 금세 손에서 내려놓은 것이다.
그렇게 저를 옭아매지 못해 안달했던 류주호는, 그런 안달과 초조함을 이미 밖으로 내버린 지 오래였다.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
그러라지. 나도 마찬가지니까.
픽.
입에서 허탈한 실소가 새어 나왔다.
좋아하긴 개뿔. 좋아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냥 입 터진 대로 막 뱉었던 말이잖아. 거봐,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그래, 이럴 줄…….
온기현이 읽던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순간 같은 책상에 앉아 있던 대각선의 학생이 찌릿한 눈빛을 보내왔다. 온기현은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이고는 자세를 바로 하고 다른 책을 꺼내는 척했다.
그때.
덜컹.
의자를 빼는 소리가 났다. 앞에서 울린 소리에 온기현이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어? 하는 소리를 낼 뻔했다.
눈앞에서 의자를 빼내어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 평연한 얼굴로 자리에 앉는 이는 다름 아닌 류주호였다.
‘뭐야?’
또다시 설마, 하는 의혹이 피어났다. 하지만. 류주호는 저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일에 여념이 없었다. 아예, 온기현 쪽으로는 일말의 시선도 건네지 않았다. 인식하지 못한 것처럼도 보였다.
가늠하는 표정으로 미간을 설핏 좁히고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그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자리가 이렇게 많은데.
미심쩍은 마음이 든다. 그런데, 괜히 자의식 과잉처럼 보일까 봐 약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책 위에 손을 얹은 채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시선이 절로 앞쪽으로 향하는 것을 돌리느라 무던히 애를 썼다.
‘그런데, 진짜 다른 사람 같아.’
아무리 봐도 생경했다. 그리고 여전히 눈에 익지 않은 머리 스타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진한 카키색의 블루종 재킷을 입고 있었다. 길을 가다 마주하는 흔한 대학생의 캐주얼한 차림 그대로였다. 애초에 류주호에게 ‘흔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지만.
자꾸만 시선이 가는 자신을 인식했다. 괜히 가방 안을 소리 나게 뒤적거리다가 짜증이 밴 손길로 책장에서 꺼내 왔던 책을 이리저리 정리했다.
정정한다. 그냥 날 티만 풀풀 나는 스타일이다.
사락. 류주호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생생했다. 어쩐지 귓가가 간지러웠다. 얼굴을 봐도 이제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예전처럼 세상이 뒤집힐 정도로 심장 박동이 온몸을 두들기지도 않는다. 그래. 얼굴을 보지 않는 게 제일 좋으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얼굴을 마주쳐도 생각보다 괜찮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계속 마주하고 싶지는 않다.
온기현은 제가 가져왔던 책 중에 얇은 것 한 권만 대출을 위해 빼내고 나머지는 다시 품에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성큼성큼 걸어가, 청구 기호를 확인하며 하나하나씩 책장에 꽂아 넣었다.
막 두 번째 책의 위치를 찾아 몰두하던 때, 얼굴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우며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어, 실례…….”
제일 상단까지 팔을 뻗은 이가 책을 제자리에 돌려 놓았다. 실례할게요, 라고 말하려던 입을 헤벌렸다. 제 등 뒤에 바투 붙어서 기다란 그림자를 갈무리하는 이는 류주호였다.
쿵. 쿵.
느리게 울리는 심장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기분이었다. 박동이 멀리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가깝게 들려왔다. 또다시 맹한 얼굴을 하고 그의 꽉 다물린 턱을 올려다보던 온기현은 헉, 하고 화들짝 놀랐다. 미친, 지금 무슨 생각 하는 거야.
고개를 돌리고 얼른 나머지 책을 아무 데나 퍽퍽 꽂아 넣었다.
“거기 아닌데.”
“어?”
웃음기 섞인 듯한 부드러운 음성이 떨어진 것도 잠시, 다시금 팔이 길게 뻗어져 온다. 온기현이 순간 몸을 움칠 굳혔다.
카키색 재킷의 소매가 눈앞을 스쳤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넣어 버린 책을 꺼내더니, 청구 기호를 확인하고는 제자리에 가져다 넣었다.
그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동작을 홀린 듯 눈으로 좇았다.
“여기. 이 책의 제자리는, 여기야.”
“아……. 나, 나도 알고 있었거든? 알았는데, 그런데…….”
누구 때문에 그런 건데.
그런 불퉁한 생각에 입술 끝과 눈매가 대번에 뾰족해진다. 하지만, 이미 식어 버린 뚜껑을 다시금 열어젖힐 필요가 있을까? 그런 자문에 말을 아꼈다.
류주호가 졸업하지 않은 것은 류주호의 사정이고, 그 강의를 수강하는 것도, 도서관에 온 것도 류주호의 사정이다. 이게 우연이든 뭐든, 저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류주호가 저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태도를 보여 오는 이상, 저도 마찬가지로 과거의 일을 덮고 없었던 것처럼 잊어버릴 용의는 충분했다. 애초에 그러려고 했었다.
“……했네.”
“?”
그렇게 속으로 골몰하던 때에, 문득 웃음기 어린 나직한 말이 귓가에 들려왔다. 중얼거림과 흡사한 앞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온기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봄과 동시에 류주호가 등을 돌려 책장 사이에서 걸어 나갔다.
* * *
경영학과 과대 심현석 [개강 너무 시르다 ㅠㅠ 시르다 시르다 ㅠㅠ 영원히 방학이었으면…….] 17:30
경영학과 1×학번 김상오 [넌 영원히 방학해라 난 취업할게 ㅃㅇ] 17:30
경영학과 1×학번 고연희 [한국대 지박령 너야너 너야너] 17:30
경영학과 과대 심현석 [(째려보는 사자 이모티콘)] 17:31
경영학과 1×학번 김상오 [ㅋㅋㅋ] 17:31
경영학과 1×학번 이윤규 [ㅋㅋㅋ 그나저나 이번 학기 스터디는 언제부터 시작? 스터디 룸 예약함?] 17:32
경영학과 과대 심현석 [고럼고럼 다했쥐 ㅋㅋ 근데 그전에 오늘 개총 있는 거 알지? 다들 안 잊었지?] 17:33
경영학과 1×학번 고연희 [어르신…… 요새 누가 3학년이 개총을 가요ㅋ 세대 차이 오져서 말도 안 통함요ㅋ] 17:33
경영학과 과대 심현석 [이번 개총 내 과대로서의 마지막 행사야ㅠㅠ…… 뒤풀이에 너네는 와야지 ㅠㅠ 기현이 형도 올 거죠?] 17:34
취업 스터디를 위해 만들어진 단톡방은 시끌시끌했다.
온기현이 참여하기 전부터 만들어져 있던 스터디라, 멤버가 하나 추가되더라도 어색하거나 겸연쩍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선배인 저를 어렵게 대하는 후배들도 없었고, 다들 성격이 유쾌하고 착해서 그런지 형, 오빠 하면서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는데 지금은 몇 번 얼굴을 트고 대화하다 보니 친숙해졌다. 그래도 단톡방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고 대화만 쭉 읽어 가다가 이렇게 간혹 말을 걸면 그제야 대답하고는 했다.
[응 갈게. 한대비어 맞지?] 17:35
경영학과 과대 심현석 [네 맞아요ㅋㅋ] 17:35
개총 자체는 신입생과 일부 간부만 참석하지만 뒤풀이에 참석하는 선배들의 비율이 높은 편이었다. ……라고 전해 들었다.
온기현은 과에서 진행하는 행사에는 한 번도 참석해 본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강제성이 없는 비공식적인 행사들이었다. MT나 개총 뒤풀이 등. 그 시간에 차라리 아르바이트 시프트를 늘리는 게 나았던 터다. 하지만 이번 학기는 좀 더 적극적인 학교 생활을 하기로 마음먹은 터라 이런 권유가 기꺼웠다.
경영학과 1×학번 김상오 [스터디 시작하고 맨날 스터디룸에서만 보다가 형이랑 처음 술 먹네요] 17:36
경영학과 1×학번 고연희 [기현 오빠 2차까지 있을 거죠? 저 쫌 늦을 것 같아서ㅠㅠ] 17:37
경영학과 1×학번 이윤규 [아님 스터디 첫 회식 겸해서 3차는 기현이 형네 가서 먹어도 돼요?><저 재워주때욤~!] 17:37
경영학과 1×학번 고연희 [아 미친 애교부리냐 지금? 토나와ㅠ; 그쵸 기현 오빳~!] 17:38
경영학과 1×학번 이윤규 [기현이 형 쟤 차단하세요 형의 비위는 제가 지킵니다!] 17:39
[ㅋㅋㅋ어 이따 밤에 울집 와서 먹자] 17:40
경영학과 1×학번 고연희 [오빠……그러다가 윤규 놈이 오빠네 집에 빈대 붙을지도 몰라요; 요새 맨날 눈치 없게 오빠한테 떡대 비비잖아요; 아……생각만 해도 속 부대껴] 17:41
[괜찮아 맨날 와도 돼 ㅋㅋㅋ] 17:42
경영학과 1×학번 이윤규 [ㅠㅠ 온엔젤..] 17:43
경영학과 1×학번 고연희 [기현 오빠. 불편하다고 생각하시면 조용히 당근을 흔들어 주세요] 17:43
[(당근 이모티콘)] 17:43
경영학과 1×학번 이윤규 [……오프엔젤……] 17:44
[ㅋㅋㅋ] 17:45
온기현은 실제로도 킥킥거리고 웃으며 키패드를 쳤다. 살갑게 대해 주는 과 후배들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니, 동생들이 있으면 이런 느낌이려나 싶었다. 자취를 한다고 했더니, 온기현의 집에 놀러 오고 싶다고 전부터 내내 장난스레 말해 왔었다.
그래. 언제까지나 류주호 생각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지 않은가. 호되게 앓고 겨우 일어났다. 자꾸만 복잡해지는 머리를 겨우 털어 냈다.
공지 사항을 보며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1차 : 한대비어 오후 7시]
대략적인 위치를 확인하고, 남은 시간 동안 리포트를 마저 쓰기 위해서 노트북 화면으로 정신을 다시 집중했다.
그러다가 흘끔흘끔 핸드폰을 곁눈질했다. 단톡방은 여전히 왁자했다. 눈 깜짝할 새에 백 개가 넘는 톡이 쌓였다. 여백에 깜빡이는 커서를 보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그리고 이름 검색에 ‘ㄹ’까지 썼다가 후다닥 지웠다.
여전히 류주호의 핸드폰 번호의 차단은 풀지 않은 채였다. 카톡 또한 마찬가지였다. 스리슬쩍 해제할까 싶었던 것도 한두 번 있었지만 애써 생각을 뿌리쳤다. 지금에 와서는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저가 그랬던 것처럼, 류주호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무미건조하고, 평연한 반응을 할 리가 없었다. 미친놈이라고 일컬었던 짓거리를 했다는 사람과 전혀 다른 타인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절대로 조별 과제에서 같은 조가 되어선 안 된다. 이 이상 얽히는 일은 애초부터 막아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또다시…….
머리를 손으로 마구 헤치고는 볼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짝짝 때렸다. 너무 세게 때려서 살짝 얼얼해지기까지 한 볼을 손등으로 슥슥 문지르고는 다시금 노트북 위에 손을 올렸다.
* * *
술집 문을 열어젖히자, 왁자한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이미 안쪽의 소란과 소음이 문 바깥까지 튀어나올 정도로 엄청났다. 개강 무렵의 대학가 술집의 흔한 광경이었다. 여타 술집의 상황도 이것과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문을 열자마자 여기저기의 꽉 찬 테이블마다 시끌벅적한 웃음소리와 건배사 같은 것이 귓가를 때렸다.
온기현은 눈을 굴려 제가 가야 할 테이블이 어딘지를 찾았다. 아직 신입생이나 후배들의 얼굴을 전부 익힌 것이 아니기에, 여기저기를 둘러봐도 생소한 얼굴들만 보였다.
그때.
아.
온기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쪽 구석에 있는 자리에서 심현석이 일어나서 손을 공중에 붕붕 흔들고 있었다. 온기현 또한 환하게 웃으며 손으로 인사하며 테이블로 다가갔다.
7시 정각에 도착했는데도 이미 개총에 참석했던 이들과 뒤풀이 자리만 참석하기 위해 발걸음한 고학번들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개총이 끝나자마자 예상보다 이르게 술집에 도착한 이들은 치킨과 골뱅이 소면, 그리고 맥주와 소주를 각 테이블마다 균등하게 주문해 놓은 상태로 유리잔에 가득 부어 놓은 맥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언뜻 보니 비어 있는 자리는 심현석이 있는 테이블의 끝자리와 완전히 반대편이라, 온기현은 눈인사로만 같이 스터디하는 후배들과 인사를 주고받고 가장 구석의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자리에 앉으며 인사를 건네자, 같은 테이블에 있던 학생들이 어색하게 웃으며 안녕하세요, 라고 꾸벅 고개를 숙여 왔다. 어쩐지 얼굴이 앳되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게, 신입생들인 것 같았다.
그들은 온기현을 보고서도 누군지 긴가민가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중 척 보기에도 사교성 있고 호탕해 보이는 남학생 하나가 맥주잔을 하나 건네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신입생 맞지? 말 놓는다. 난 1학년 김은태.”
당연하게 바로 반말로 낮춘 남학생을 향해 온기현이 무어라 대답하려고 하자, 바로 옆에 앉은 여학생이 피처 통을 들고 온기현의 잔에 맥주를 콸콸 따라 주며 바통을 받아 물어 왔다.
“안녕. 난 1학년 오유라. 근데 재수했어. 그냥 말 놔. 누나라고 불러.”
“어, 아니, 난.”
“아까 개총에서는 못 봤는데. 못 온 거야?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아니, 그게.”
“야, 일단 짠 하자, 짠. 지금 우리 테이블 다 신입생밖에 없어. 이때 얼른얼른 말 까고 안면 트자. 좀 있으면 선배들이랑 테이블 섞는다고 하더라.”
“짠―!”
“아니, 난.”
맥주잔이 가운데로 모였다. 거기서 “아니, 아니.”만 반복하며 가만히 있는 온기현에게로 시선이 모였다. 온기현이 일단 “짠.”이라고 말하며 맥주잔을 부딪쳤다. 굳이 나이로 유세를 떨 필요를 못 느꼈고, 정정한다고 해도 한 잔 들이켜고 얘기하려던 참이었다.
“야, 너 너무 신입생티 내는 거 아니냐? 완전 땅땅 얼어 가지고는.”
저야말로 긴장한 탓에 꼴깍 맥주를 한 모금만 고개를 돌려 마신 남학생이 온기현을 향해 크큭, 하고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니깐. 와, 근데 고딩티 장난 아니다. 나보다 피부 좋은 것 봐. 오, 대학교 간다고 염색했나 보네. 나도 이거 지난주에 염색한 거다? 탈색 두 번 한 거야. 완전 맘에 들어.”
여학생이 맞장구치며 제 머리 옆통수를 들이밀었다. 온기현이 “응, 색깔 예쁘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기현이 형. 내가 자리 맡아 놨는데 왜 여기 앉았어요.”
심현석이 온기현이 있는 제일 끝 테이블로 다가와서는 기현에게 알은체를 했다.
“난 여기도 괜찮아.”
“에이, 그래두요.”
심현석의 말에 열없이 웃었다. 동시에 신입생들이 이제는 전임 과대인 심현석을 보고는 우렁차게 인사하기 시작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어, 그래. 벌써 다들 인사 텄어?”
심현석의 물음에 다들 일제히 네, 하고 대답했다. 목소리에는 힘이 빡 들어가서 너나 할 것 없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심현석이 온기현을 보고 “이따 테이블 섞을 거니까 같이 마셔요.” 하고는 자리를 떴다.
잠시 침묵이 지나가고. 아까 처음 인사해 온 남학생이 눈치를 쓱 보더니 입을 열었다.
“어, 근데 형, 이었나 보다. 헐. 솔직히 우리보다 학교 늦게 들어온 건가? 한 살 어린가? 싶었는데. 핵동안이네. 원래 과대 선배님이랑 아는 사이였어?”
“그러게. 완전 깜놀. 앗, 동기니까 말 놔도 되지?”
“몇 살인 거야, 그럼?”
온기현이 다시 한 모금 맥주를 홀짝이고는 눈을 깜빡였다. 저에게 모이는 시선을 멋쩍게 받으며 입을 열었다.
“나 이제 스물여섯 살.”
“헐.”
“어?”
“1×학번이고.”
온기현의 입에서 나온 학번에 다들 입을 떡 벌렸다. 저들보다 지금 몇 년 선배인 건지 속으로 가늠하고는 입이 더욱 크게 벌어졌다.
“온기현이라고 해.”
“…….”
“…….”
“…….”
“잘 부탁해.”
온기현의 인사에 입 벌린 가자미 같은 얼굴을 급하게 수습한 후배들이 저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괜히 민망한 순간이었다. 싸한 공기가 테이블을 덮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갑작스럽게 온기현을 향한 질문이 터졌다.
“선배님. 왜 이렇게 동안이세요? 와, 전 당연 저보다 동생인 줄 알았어요.”
“그러게요. 아 씨, 죄송합니다. 전 완전 친하게 지내려고 했는데 너무 귀엽, 아, 아니 인상이 좋으셔 가지고.”
덩치 큰 남학생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재수했다던 여자 신입생도 연신 우와, 우와 감탄했다. 귓가를 손으로 쓸며 대답했다.
“그래? 근데 내가 워낙 휴학을 많이 해서. 내 동기들은 거의 졸업반이거나 졸업했어. 나만 3학년이야. 아는 사람도 별로 없어.”
“과대 선배랑 친하신 거 아니에요?”
“그건 스터디를 같이해서…….”
“헉, 근데 1×학번이면.”
재수생인 여학생이 느닷없이 손을 들었다.
“혹시, 류주호 선배님이라고 있지 않아요?”
“……어?”
“아. 저 고딩 때 같은 반이었던 애가 작년에 한국대 수시로 들어왔거든요. 저는 재수했는데 제가 여기 경영학과 붙었다고 하니까, 거기 류주호 선배라고 존잘에다가 거의 연예인 포스인 선배님 있다고 하더라고요. 학교에서 겁나 유명하다던데. 혹시 동기세요?”
“아…….”
“맞아. 나도 소문으로 들었는데. 근데 졸업하신 거 아닌가?”
“얼마나 잘생겼길래 그런 소문까지 돌지? 완전 갓반인이네. 실물 한번 보고 싶다.”
온기현이 입을 벙긋거렸다. 이런 데서 류주호의 이름을 들을 줄이야. 애써 난감함을 숨기려 입꼬리를 올렸다.
“……난 잘 모르겠어. 걔랑 별로, ……안 친해서.”
“그래요? 하긴. 들어 보니까 과에 잘 어울리지는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성격이 완전 개차반이라서, 헙.”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후배는 제가 실수했다고 생각했는지 짠, 짠. 하면서 잔을 내밀었다. 그리고 곧이어 테이블을 섞자는 신임 과대의 말에 다른 테이블에 있는 학생들이 잔을 들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온기현의 테이블도 마찬가지였다. 온기현의 앞에 스터디 멤버인 이윤규가 앉았고, 후배 두 명이 나머지 자리를 채웠다.
소주병이 오가고, 추가 주문하는 안주류가 늘어나면서 점차 분위기는 과격한 활기를 띠었다. 후배들이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고 그다음으로는 선배들이 이름과 학번을 대며 후배들과 통성명했다. 온기현의 차례에서는 누구나 놀란 기색이었다. 그런 자잘한 부분이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온기현은 술자리에서 오래간만에 들떠 있었다.
대학 생활을 온전히 즐기지 못했던 과거를 후회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같은 과 학생들과 왁자하게 떠드는 게 마냥 재밌었다.
“형. 우리 술 뭐 시킬까요?”
“어, 글쎄. 판쏘 먹을까?”
예전에 먹어 본 적 있는 판타와 소주의 혼합주 이름을 댔다.
“나 너무 단 거는 별론데. 우리 한라토닉 어때요?”
“한라토닉?”
“아, 형. 한라토닉 몰라요? 있어 봐요. 내가 완전 기가 막힌 비율로 말아 줄 테니까. 너네도 괜찮지?”
후배들이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고학번 헌내기가 비싼 술을 시키자는 데에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다들 이미 새터에서 술맛을 거하게 봤던지라, 소맥은 질리고 입이 텁텁하던 차였다.
이윤규는 한라성과 토닉워터를 잔 네 개에 시원하게 쏟아부었다. 맑고 청량한 소리가 쏴아아 울렸다. 옆 테이블에서도 “너네 뭐 먹어?”라며 기웃거렸다. 레몬까지 잔에 꽂으니 칵테일 같기도 했다.
“자. 이따가 게임 하면 이것도 못 마신다. 지금 마셔야지. 짠.”
시원하게 부딪친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온기현이 꿀꺽꿀꺽 술을 들이켰다. 음료수 같기도 했고, 약간 새큼달큼한 맛도 감돌아서 목 넘김이 좋았다.
“형. 천천히 마셔요. 이따가 우리 3차까지 가야 하는데?”
“아, 맞다. 응. 알겠어.”
대답과 함께 눈을 접으며 웃었다. 이윤규가 온기현의 자취방에 놀러 오겠다고 한 말은 빈말이 아니었는지, 갈아입을 팬티도 챙겨 왔다며 킬킬거렸다. 온기현 또한 제집에 남아 있는 새 칫솔이 있었나, 하고 생각하며 술로 목을 축였다.
그러다가 문득 떠올렸다. 예전에, 류주호가 자고 갈 때를 대비해서 새 칫솔 여러 개를 구비해 놨던 것이.
“쿨럭.”
“괜찮아요? 아, 천천히 마시지.”
살뜰하게 챙겨 주는 이윤규 덕에 휴지를 받아 들고는 젖은 입을 닦았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흔적들에 자꾸만 발목이 잡히는 기분이었다. 강의실에서 직접 얼굴을 마주했을 때도 무덤덤하게 넘기지 않았는가.
볼이 미어터지도록 치킨을 포크로 푹 찍어다가 입 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술집은 여전히 소란스러웠고, 가게 안의 데시벨은 이미 한계치에 다다라 있었다. 한국대 경영학과 테이블이 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다른 테이블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같은 테이블에 앉은 선후배끼리 얼굴을 익히고 번호도 주고받고, 슬슬 두 번째 자리 교체를 해야 할 타이밍일 때쯤.
술집 문이 열렸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워낙 정신없이 자주 열리고 닫히는 통에 애초에 신경 쓰는 이가 드물었다. 하지만 온기현은 입 안에 가득 담은 순살 치킨을 그대로 꿀떡 목구멍 뒤로 넘기고는 두 잔째의 한라토닉을 마시던 중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이쪽 테이블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이는, 제가 아까까지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쓰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여기.”
순간, 류주호가 서 있는 테이블과 그 주변의 소란스러움이 딱 멎었다.
“어?”
“어, 누, 누구…….”
새내기 둘이 얼빠진 얼굴을 했다.
“자리 있어?”
류주호가 가리킨 곳은 온기현의 앞자리였다.
“아, 네네. 아, 아뇨. 자리 없어요.”
“헐.”
“와.”
옆 테이블의 2학년 이상의 선배들이 저마다 입을 떡 벌렸다. 신입생들은 누구지? 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개중 가장 얼빠진 것은 온기현이었다.
‘뭐야?’
잔을 든 채 그대로 눈을 동그랗게 뜬 온기현의 앞자리를 가리키던 류주호는 여전히 제 눈을 의심하게 했던, 강의실과 도서관에서 마주쳤던 모습과 사뭇 비슷한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바짝 깎은 옆머리와 눈썹까지 자연스럽게 내린 윗머리가 남성미를 돋보이게 했다. 거기에 더해, 오늘은 턱 끝까지 지퍼를 올린 레드와 블랙이 적절히 배합된 아노락 점퍼를 입고 있었다.
온기현과 그렇게 지지고 볶던 때에, 류주호는 항시 일관된 분위기의 옷차림을 입었었다. 단정하고 차분한 색의 니트나 셔츠, 겨울에는 무조건 코트였다.
하지만 지금의 류주호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류주호 선배님 아니세요? 와, 대박. 완전 몰라봤어요.”
저쪽 테이블에 있던 심현석이 얼떨떨한 웃음을 띠며 다소 예의 바른 투로 인사를 해 왔다. 그리고 동시에 놀란 얼굴을 했다.
“진짜 딴사람 같아요. 스타일이 엄청 바뀌셨네요, 선배님.”
“응, 뭐.”
류주호는 고개를 기울인 채로 곁눈질로 눈길을 주며 단조롭게 대꾸했다.
“그러게요. 안녕하세요, 선배님. 저 예전에 한번 같이 수업 들었었거든요!”
“선배님, 어, 막, 그거 같아요, 그거. 인별 셀럽!”
“어, 맞아, 맞아. 선배님, 혹시 인스타 안 하세요? 저 선배님 계정 왠지 본 것 같은 느낌도 들어요.”
“야, 이 새꺄. 그거 선배님 아닐걸? 선배님 인별 안 하셔.”
“니가 어떻게 그걸 아냐? 너 혹시 선배님 염탐하냐?”
“아 씨, 조용히 해.”
술에 취해 흥분해서 음량이 높아진 고학번들의 수다가 이리저리로 튀었다. 그 화제의 도마 위에 오른 이는 류주호였다.
한편 온기현은 의심스러운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왜 온 거야, 여긴.’
자꾸만 우연처럼 마주치는 것이 이상했다. 하지만 막상 맞닥뜨렸을 때는 전혀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저를 보통의 동기, 아니 타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태도로 대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자신도 마찬가지였고.
류주호가 덜컹, 하고 온기현의 앞에 앉았다. 옆에 있던 후배들이 알아서 수저와 잔을 세팅해 주었다.
옆쪽에 있던 신입생들이 저들끼리 멋있다느니, 잘생겼다느니, 연예인 같다느니, 수군거리는 소리가 기현의 귓가에까지 들렸다.
제 잔에 남은 한라토닉을 마저 벌컥벌컥 마셨다. 푸하― 하고 입소리를 낸 온기현이 탁,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젖은 입가를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쓱쓱 닦았다.
시선은 류주호를 향한 채였다. 모난 눈 모양을 하고 지그시 노려봤다.
‘흥. 멋있기는 개뿔.’
류주호는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로 몸을 물린 채 사람 좋게 웃으며 쑥스럽게 건네 오는 신입생들의 인사를 받아 주고 있었다.
‘왜 저렇게 웃고 난리야?’
원래 류주호는 이런 자리는 애초에 참석도 하지 않을뿐더러, 저를 향한 웃음에 비웃음을 날려 주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같은 강의를 듣는 것도 이상하고, 도서관에서 마주친 것도, 그리고 개총에까지 모습을 드러낸 것도, 모두 다 이상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대놓고 따질 수가 없는 것은 제 마지막 기억의 모습과 너무나도 다른 류주호의 모습 때문이었다. 떠오른 것은 비단 외양만이 아니었다.
마지막 모습……. 그것은 다름 아닌 제 고간에 얼굴을 처박던 모습이었다.
‘아, 망할. 젠장. 아.’
거기까지 상기한 온기현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어쩐지 그런 저에게 시선이 향해 오는 착각까지 들어 고개를 푹 숙여 뜨거운 눈두덩이를 비비적거렸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저 이윤규라고 합니다. 경영학과 3학년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응. 안녕.”
류주호는 제 옆에 앉은 이윤규에게 싱긋 웃으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의외로 부드럽게 받아 주는 분위기에 이윤규는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선배님, 올해에는 졸업하신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그 감후석 선배랑 친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선배는 졸업하셔서 선배님도 하신 줄 알았습니다. 어, 혹시 졸업 유예하신 겁니까?”
“응. 아무래도 학교에 남아 있을 이유가 생겨서.”
누가 들었으면 눈치 없다고 욕을 한 바가지로 먹었을 말에도 류주호는 대수롭지 않은 듯, 턱 위로 올라오는 지퍼를 살짝 내리며 대답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특유의 아노락 소재로 인해 사락사락하는 마찰음이 사람들의 소음 사이로 들려왔다.
“헐. 그러셨습니까. 개총은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공지에 올렸던데. 오라고 올린 거 아닌가?”
“아이고, 당연하죠! 잘 오셨습니다, 선배님.”
“잘 오셨어요, 선배님! 완전 환영이에요!”
둘의 대화를 쫑긋거리며 듣고 있던 옆 테이블의 고학번 중 하나가 손을 펴서 입 근처로 가져가 소리치듯 환호했다. 순식간에 왁자하고 화기애애한 웃음이 번졌다.
그래. 비단 외양뿐 아니라, 행동 하나하나가 과거의 류주호와는 사뭇 달랐다. 건네 오는 의미 없는 말들을 적당히 받아 주고 웃음으로 화답하는 것은, 절대로 류주호가 할 만한 사교적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주변의 반응 자체가 호의적인 친근함을 드러내는 것 또한 바뀌어 버린 외양 때문이기도 했다.
예전의 류주호는 이윤규와 같은 후배들이 스스럼없이 다가오게 하는 분위기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항상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포멀하게 차려입고 다니던 류주호는, 그 서구적인 외모까지 더해서 사람들이 함부로 다가가지 못했었다. 이질적이고 우월한 생물은, 주변인에 있어서 사회의 위계질서에 대해 은연중에 상기토록 하는 힘이 있었고, 마치 보이지 않는 장벽을 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작금의 류주호는 딱 누군가가 말한 대로, 잘나가는 SNS의 셀럽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즉, 다시 말해 지금처럼 술에 취한 같은 과 후배 정도면 은근히 마음을 터놓고 치대고 싶을 정도의 친근함을 내뿜고 있었다. 분명 그것은 가볍고 캐주얼하고 트렌디한, 대학의 흔한 선배로 보이기 마땅한 옷차림도 분명히 한몫했다. 류주호에게 그런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풍기는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했다.
‘개날라리 같아.’
심통이 잔뜩 일었다.
애초에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싫었던 이다. 제 반응이 생각보다 차분하게 가라앉았던 것은, 근 두 달 동안 상상하기 싫어도 우연히 류주호를 마주치는 상상을 여러 번 했던 터였다.
‘혹시 카페에서 마주치면?’이라는 가정을 할 때마다 쿵쾅대는 심장을 꾹 내리눌러 애써 안정을 찾았다. 이미지 트레이닝 비슷한 거였다.
강의실에서는 성공이었다. 그리고 도서관에서도. 점점 미심쩍은 마음이 커지긴 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멀쩡하게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보다 더 나아가, 짜증스러운 마음이 확 커졌다.
사람이 애써, 과거의 일을 지우고,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데. 사람들하고 좀 어울리고, 놓쳤던 즐거운 캠퍼스 라이프도 한시적이나마 즐기려고 하는데. 일부러든 아니든, 그걸 훼방 놓는 류주호가 원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날티 나. 완전 날티 나.’
온기현은 괜히 류주호의 옷차림에 대해 속으로 힐난했다. 차마 사람들이 있어서 대놓고 뭐라고 하지는 못하니, 눈으로만 구시렁거렸다.
“선배님. 근데 혹시, 몸 좀 키우셨습니까? 뭔가 막, 막. 몸이 되게 좋으신 것 같습니다.”
류주호는 입고 다니던 옷도 그렇고 옷을 입었을 때 길쭉하게 잘 빠진 몸매처럼 보이고는 했었다. 하지만 옷을 벗으면 온몸이 섬세하게 갈라져 꽉 죄인 단단한 근육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얼굴선이 다소 날카로워진 것과 더불어, 품이 넓은 아노락 점퍼를 입었음에도 대번에 알 수 있듯이 어쩐지 예전에 비해 덩치가 더욱 커진 것 같긴 했다. 상체 자체가 단단하고 묵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가.”
“네. 팔 한번 만져 봐도 됩니까? 헉.”
이윤규가 물음과 동시에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류주호의 팔뚝을 덥석 잡았다.
“돌덩이 아닙니까, 완전?”
감탄한 얼굴로 제멋대로 팔을 주물럭대는 이윤규에게 서늘한 눈길을 잠시 건넨 류주호가 은근슬쩍 팔을 빼냈다. 약간 떨구는 듯한 제스처였지만, 알딸딸하게 흥에 겨운 이들 중에 눈치채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너도 만져 볼래?”
류주호가 팔을 스윽 내밀더니, 저에게 그렇게 지껄인 것이다.
뭐? 뭔 개소리야?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억지로 삼켰다.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그걸 왜 만져? 미쳤어?
제 눈앞으로 길게 뻗은 팔을 보며 온기현이 눈을 세모꼴로 치켜떴다. 류주호는 자, 어서, 하는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정말, 기억력이 엄청나게 나쁘거나 머리에 커다란 흠이 있는 병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저한테 이렇게 뻔뻔하게 대할 수 있냔 말인가.
그리고. 팔 근육 좀 단단한 게 그렇게 자랑할 거리냐? 자랑할 게 그렇게 없어?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분위기였다. 이윤규의 얼굴을 보니 ‘형도 어서, 어서 만져 봐 봐.’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가 느낀 흥분을 너도 느껴 보라는 식으로 말이다. 뚱하게 삐죽 입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고는, 온기현이 포크를 들더니 손목을 돌려 포크의 손잡이 부분으로 아노락 점퍼의 팔뚝 부근을 꾸욱 눌렀다가 뗐다.
이제 됐지.
온기현은 콧방귀를 뀌며 그대로 다시 포크를 바로 쥐어, 순살 치킨을 푹 찍더니 입으로 가져갔다.
“아, 뭐야, 형. 진짜 웃겨.”
이윤규가 킬킬댔다.
웃기긴. 포크 삼지창으로 찌르려다가 참은 건데.
온기현은 눈만 모로 치켜뜬 채 말없이 포크로 류주호의 팔뚝 대신 치킨을 푹푹 찍어 입에 가져갔다.
양 볼이 미어터지도록 부드러운 살덩이의 치킨이 가득 들어차 겨우 입술만 오물거릴 뿐이었다. 가뜩이나 작은 입에 음식물이 가득 들어가서 겨우 숨도 얕게 헐떡거리듯이 쉬었다.
류주호는 뒤로 물렸던 상체를 앞으로 살짝 기울이고는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올리고 손으로 지퍼 부근을 다시금 매만졌다. 그러고는 언뜻 무감한 얼굴을 하고는 그 상태 그대로 손을 펴 제 턱 주위를 살며시 감쌌다.
옆에서 이윤규가 한라토닉을 시원하게 말아 주어 다른 한 손으로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꿀꺽. 겨우 씹어 삼킨 치킨의 자리를 메우기 위한 것처럼 또다시 짜증이 가득 밴 동작으로 포크로 치킨을 푹 찍어 입으로 가져가 욱여넣었다.
‘아…….’
씨발.
가린 입에서 제멋대로 소리 없는 욕설이 뱉어졌다. 다행히 웃음기 안으로 숨긴 채, 정체 모를 음료가 뒤섞인 잔을 입가에 가져간 덕에 알아채는 이는 없었다.
‘너무 귀여워서 돌아 버릴 것 같네.’
류주호는 그렇게 속으로 지껄이며 잔뜩 상기된 마음을 애써 누르고 있었다.
제 눈앞에, 손만 뻗으면 바로 닿을 거리에 있는 온기현을 터질 것 같은 감정을 죽인 눈으로 지그시 바라보다가, 저를 째려보는 따가운 눈빛을 온몸으로 받아 내고 있었다.
‘미치겠다.’
온기현은 쉴 새 없이 치킨을 집어 먹고 있었다. 마치, 며칠을 굶주린 작은 동물처럼 입에 욱여넣어 양 볼을 잔뜩 부풀린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저 자그마한 얼굴을 양손에 가득 담고 부드러운 살결을 한껏 음미하며 키스를 퍼붓고 싶었다.
우물거리는 입을 입술로 감쳐물고는 양껏 빨고 싶었다. 입 안에 음식물이 담겼든 뭐가 담겼든 상관없었다.
온기현의 모습은 두 달 새 조금 바뀌어 있었다.
새까맣던 머리가 지금은 갈색빛을 내며 여기저기 삐죽 솟아나 있다. 그리고, 제가 봤던 마지막 기억의 그보다 훨씬 얼굴 살이 붙어서 반질반질한 볼이 통통하게 올라와 있었다.
얼마나 부드러울까.
이미 그 감촉을 알고 있는 눈에서 순간 욕망의 스파크가 튀었다. 순간 예기 어린 눈을 숨기고자 부러 눈을 아래로 깔고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참는 게 고역이었다. 애틋함을 숨기느라 무진 애달았다.
하지만 여기서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경계심 많은 망아지는, 제 속을 또다시 여과 없이 드러내는 순간 어디론가 도망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부담 없이 가벼운 척, 평연한 척, 제 안에 있는 날 것의 욕정과 그 이상의 욕구를 숨기는 노력은 온기현을 마주한 이후로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다시는 그렇게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류주호는 그날, 온기현의 등을 하염없이 바라만 볼 수밖에 없던 그날. 그렇게 푸르스름한 박명에 발밑이 꺼져 버릴 듯한 절망감을 느끼고는 거의 반쯤 미쳤었다.
학교에는 아무리 수소문해도, 온기현을 제대로 알고 있는 이가 많지 않았다. 전과해 왔다는 경영학과는 애초에 포기했지만, 그 이전의 전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온기현이 입학했던 전공은 영문학과였다.
그곳에서도 아무나 붙잡고 온기현이란 사람의 행방에 대해 캐물었다. 온기현은 그때도 아르바이트에 매진하느라 과 활동을 거의 못 했는지, 온기현이란 이름을 아는 이도 드물었다.
한동안 온기현을 찾아 전국을 헤매었다.
아마 경기도는 구석구석 안 가 본 데가 없을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조차 모른 채 무작정 온기현을 찾아 나섰다.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차 안에서 쪽잠을 청하는 것은 이미 당시엔 일상이었고, 끼니도 대충 차에서나 잠깐 집에 들러 대충 때우고 또 바로 차를 끌고 나가고는 했다.
방향을 잃은 초조함과 불안함, 그리고 사무치는 그리움을 오로지 체력을 키우는 데 쏟았다. 진득하게 땀을 흘리고 나면 몸속의 불덩이가 조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고깃집 사장이라던 사람도 온기현에 대해서 몰랐다. 어느 고등학교를 나왔는지, 태어난 곳은 어디인지,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따위로 장사를 해서는 곧 망할 게 뻔했다. 류주호는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와 버렸다.
그렇게 기약 없는 수색 활동을 펼치느라 류주호의 복장은 점점 움직이기 편한 옷으로 변해 갔다. 차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되어 코트나 움직이기 불편한 셔츠, 또는 구두를 신는 것이 거추장스러웠다. 그래서 점점 점퍼나 후드 티, 운동화를 즐겨 찾게 되었고, 한동안 정리를 안 해 거의 귀 끝을 덮는 머리칼을 매번 다듬는 것이 번거로워 머리통 양쪽을 짧게 밀어 버리기까지 했다.
집에서 오는 연락은 죄다 무시했다. 제가 속해 있던 사회의 알량한 약속이나 체면 따위, 알 바 아니었다.
이제는 정말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안다.
마치 벼락같은 깨우침이었다.
초조함과 처절한 고통 속에 한 달이란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도 차마 새로 바꾼 번호로 온기현에게 전화를 걸지는 못했다. 단호하게 돌린 매서운 등이 목전에 아른거린 탓이었다. 자동으로 흘러나오는 차단 음성 메시지는 또다시 수백 번의 이별을 경험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무너졌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나약하고 비열한 인간이었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것은 류주호가 생전 처음 경험한 참회였다.
잠들 때마다 두통처럼 찾아오는 빌어먹을 악몽 때문에 제대로 잠을 이루는 날이 드물었다.
결국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던 그 시점이, 류주호가 미치기 직전에서 이성의 한끝을 겨우 틀어쥔 극적인 순간이었을 것이다.
온기현은 휴학했다. 하지만 자퇴하지는 않았다.
온기현은 자취방을 떠났다. 하지만 원룸 계약은 그대로 남아 있다.
고로, 온기현은 다시금 복학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류주호는 핸들에 머리를 박은 채 생각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찾을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온기현이 더 이상 류주호를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다리고, 인내하여, 제 목줄을 잡아줄 손을 기다릴 수밖에.
온기현이 원하는 모습대로, 다시금 저를 좋아할 수 있도록. 54번째는 실패해도, 그다음이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도, 그다음도.
그리고 우연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래, 우연.
온기현이 다음 학기에 학교로 돌아올 가능성과, 온기현이 수강에 실패한 강의를 다시 들을 가능성, 그리고.
다시금 제 얼굴을 똑바로 바라봐 줄 가능성.
류주호는 함께 들었던 강의에서 온기현과 맞닥뜨렸을 때 그대로 달려가서 온기현을 껴안을 뻔했다. 그 탐스러운 머리에 입술을 눌러 마구 비비고 마른 몸이 부서질 정도로 와락 품에 가득 안을 뻔한 충동을 간신히 내리눌렀다.
그리고 어떤 반응을 하는지를 가만히 지켜봤다. 온기현은 경계는 할지언정 도망가지는 않았다. 태연한 척은 할지언정 무시하지는 않았다. 갖가지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그 모든 일련의 것들이 사랑스러운 망아지에게 간택받기 위함이었다.
온기현을 눈앞에 둔 지금도 계속해서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마치 모든 사고가 마비된 것처럼 얼얼하다.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싶다.
망아지가 도망칠세라 필사적으로 참는 중이었지만, 욕구는 끝을 모르고 들끓었다. 간택을 위한 여정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미 진즉 한계에 다다라 있음을 류주호는 알고 있었다.
저 열심히 오물거리는 작은 입이 선사하는 희열과 그 새까만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자신을 바라볼 때 머리끝부터 전율이 이는 황홀경은, 이미 익히 몸소 겪은 터였다.
만약 여기서, 무언가 촉발되는 계기라도 생긴다면 그대로 폭발해 버릴지도 몰랐다.
‘하아.’
점퍼의 지퍼 부분을 매만지는 척하면서 입가를 설핏 가렸다. 온기현은 연신 포크를 바쁘게 놀리며 음식을 먹어 대고 있다.
흐뭇해 죽겠다.
그때의 온기현은, 입술은 잔뜩 부르트고 눈은 퀭했었다. 애처로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많이 먹여 둘걸, 세상에서 최고로 비싸고 값진 음식들을 전부 먹여 둘걸, 하고 얼마나 후회를 했던지.
천천히 먹으라고 등을 다독이고 싶다. 마음 같아서는 제가 입에 묻은 기름기를 입으로 빨아 주며 하나하나씩 입에 넣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또 날을 세운 망아지는 기겁하고 도망갈 것이다. 도망가지 않게, 경계를 풀 때까지, 류주호는 이 돼먹지 않은 연기를 계속할 요량이었다.
“어, 나도 치킨 먹을래.”
대각선에 앉아 있던 여학생이 그렇게 말하며 포크를 들이밀었다. 류주호는 그와 동시에 치킨이 담겨 있는 커다란 접시를 온기현 쪽으로 스윽 밀었다. 여학생은 자꾸만 포크로부터 멀어지는 접시가 제 술기운 때문에 일어난 착시라고 생각하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를 반복했다.
그때였다.
“읏.”
온기현이 밭은소리를 냈다. 그리고 가슴을 주먹으로 텅텅 두들겼다. 기어이 급하게 먹어서 목이 막힌 것이었다.
“헐. 형, 무슨 전생에 닭이랑 웬수라도 졌어요? 천천히 좀 먹지.”
옆에 앉아 말이 많던 놈이 온기현에게 친한 척하며 제가 먹던 술잔을 온기현에게 건네려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류주호의 행동이 더욱 빨랐다. 류주호는 이윤규의 팔을 저쪽으로 탁, 쳐 내다시피 하면서 물이 든 잔을 온기현에게 내밀었다.
이윤규는 갑자기 내쳐진 제 팔과 류주호를 번갈아 보며 어, 하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온기현도 마찬가지였다. 똥그랗게 뜬 눈을 류주호에게 향하며 제 가슴을 치던 손을 멈췄다. 먹이를 잔뜩 집어 먹은 다람쥐처럼 볼이 빵빵했다. 그러고는.
“욱. 쿨럭.”
다시 밭은기침을 했다. 입에 있는 음식물을 뱉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류주호는 벌떡 일어나 온기현의 옆으로 다가갔다. 테이블 끄트머리에 앉았던 터라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그리고 입을 틀어막고 티슈를 찾는 온기현의 입가 근처에 손바닥을 내밀었다.
“뱉어, 얼른.”
“……??”
온기현이 숨 쉬는 것도 잊은 것 같은 모양새로 류주호를 올려다봤다.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것처럼 샐쭉한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류주호는 걱정이 돼서 미간에 주름이 팼다. 빨리 뱉지 않으면 기도로 들어가 사레들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온기현은 류주호의 손을 무시한 채 다급하게 티슈를 몇 장 뽑더니 고개를 돌려 입 안에 있던 음식물들을 뱉어 냈다. 곧이어 헉, 헉 하는 밭은 숨소리가 들렸다.
온기현은 찡그린 얼굴로 류주호를 흘끔 쳐다봤다. 다행히 사레들린 것 같지는 않다. 류주호는 안심이 되어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온기현이 손등으로 젖은 입가를 벅벅 문지르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런 온기현에게 시선을 던졌다. 귓불이 말랑해 보였다. 말랑한 감각을 익히 알고 있었다. 몇 개월이 지났다 해도 잊을 수가 없었다.
조금 더 가까이 붙고 싶었지만 참았다. 조금만 움직이면 더 가까워질 수 있을 텐데. 저 멀리 물통을 집는 척하면서 실수로 넘어지는 척할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은근하게 느껴지는 온기현의 온기가 기꺼웠다. 그렇게 헤어지고 이렇게 가까이 몸을 붙인 게 처음이었다. 너무 오랜만이었다.
온기현은 그간 더 귀여워졌다. 온기현을 바라보는 놈들의 눈깔을 파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순간, 달콤한 바나나 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간 온기현의 살 내음을 상기하고 느껴왔던 게 착각이 아니었다. 온기현이 바로 제 옆에 있었다.
온기현을 어떻게 하면 돌아보게 만들 수 있을 것인지 고민하며 돌아가던 머리가 동작을 멈춘 느낌이었다. 온기현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미친 듯이 초조해졌다.
약간 살이 빠진 것 같았다. 잘 먹고 다녔는지 궁금했다. 어디 아픈 데는 없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묻고 싶었다.
혹시라도, 잠깐이라도, 내 생각은……, 한 적이 있는지.
온기현에게 다른 사람이 생긴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이건 멋대로 저 좋을 대로 생각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다른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자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상상만 해도 미칠 것 같았지만 여러 험악한 충동을 내리눌렀다.
아니. 상관없었다. 다른 수십 번째의 마음의 방이 생겼다 해도 괜찮았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더라도 반드시 자신을 돌아보게 할 것이었다. 반드시.
순간 급격하게 목이 타서 손으로 입가를 쓸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인내가 몸에 배었다고 생각했는데도,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워진 지금 그 인내는 썰물처럼 깨끗하게 쓸려 간 느낌이었다. 류주호는 혼신의 힘으로 자신을 다잡으려 애썼다.
가늘디가늘어진 인내가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류주호는 초연하게 다시금 자리로 돌아와 털썩 앉았다.
“……헐.”
“와아…….”
갑자기 주변의 소란이 조금 잠잠해진 기운이 느껴졌다. 동시에, 얼이 빠진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대박. 친하시다고 얼핏 듣긴 했는데, 진짜 친하신가 보네요.”
류주호는 굳이 부정하지 않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또다시 주위에서 무어라 주절대는 쓸데없는 말을 들어 주는 척할 새도 없었다. 온기현이 목이 막히는지 비어 있는 물컵에 따를 물통을 찾았다. 류주호는 응당 제가 해야 할 일을 한다는 것처럼 물통을 찾아 빈 컵에 쪼르르 물을 따라 주었다.
온기현의 표정이 또다시 일그러졌다.
그리고 제 앞에 놓인 물컵을 빤히 쳐다본다. 갑자기 확 물컵을 낚아채어 벌컥벌컥 마시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어, 다녀와요, 형.”
흘끔 이윤규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리듯 뱉은 말에 이윤규가 대꾸하며 “시원하게 싸고 와요.” 하고 킬킬댔다.
류주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따라가고 싶었다. 이딴 자리, 온기현이 없으면 제가 올 이유가 없는 쓰레기 같은 자리였다. 돼지처럼 처먹고 흥청망청 술을 들이붓는 짓밖에 하지 않는 아주 비생산적인 자리다. 자신은 입학할 때부터 이런 행사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직 이른 것은 아닐까. 지금 쫓아가면, 또 도망가는 것은 아닐까. 머릿속이 대번에 복잡해졌다. 사실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납치해서 저의 집에 꼭꼭 숨겨 놓고 싶었지만, 제 욕심대로 했다가는 말짱 도루묵이었다. 이제껏 시야에 들기 위해 무진 애를 썼음에도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 하나하나가 엄청난 고민이었고 인내였다.
어떻게 하면 온기현이 다시금 저를 돌아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류주호는 막막함을 느꼈다. 우연처럼 만난 것까지는 좋았다. 온기현이 류주호를 인식한 것까지는 좋았다.
그렇지만 거기에서 그쳐서는 안 되었다. 단순한 과 동기로는 안 된다. 단순한 옛 인연으로는 안 된다.
류주호는 반드시 온기현과…….
그때였다. 상념에 막 빠져 갈 무렵,
“어, 선배. 저도 거기 물통 좀 주세요.”
이윤규가 류주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손가락으로 테이블 끄트머리에 있는 물통을 가리켰다.
단순히 술김에 치댄 것이 아니라, 소문만큼 류주호가 어려운 선배가 아니라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옷차림도 어쩐지 동네 형, 아니 동네는 아니고 조금만 분위기가 달아오르면 바로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은, 마치 친근감 비슷한 느낌을 제멋대로 갖고 있었다.
만약 류주호가 이전의 차림새였다면, 아니 이전 같은 싸늘한 분위기를 두르고 있었다면, 넘을 수 없는 벽이 세워진 느낌에 차마 함부로 가볍게라도 부탁이나 요청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류주호가 제 어깨에 올려진 손을 흘끔 쳐다봤다. 그러고는 어깨를 움직여 손을 쳐 냈다. 손조차 닿고 싶지 않다는 제스처였다.
이윤규가 어, 하고 당황한 외마디를 내기도 전에, 류주호가 말했다.
“손 없어?”
“네?”
“손 없냐고. 니가 가져가.”
“…….”
“…….”
방금까지 제 동기를 살뜰히 챙기던 이는 어디로 갔는지. 류주호의 입에서 싸늘하게 터진 말에 반경 두 테이블 건너까지의 분위기가 대번에 숙연해졌다. 놀란 신입생이 옆자리의 동기와 귀엣말로 무어라 수군댔다.
온기현 한 사람이 빠진 것만으로 류주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
“…….”
류주호가 앉은 테이블 분위기는 흡사 장례식에라도 온 것처럼 축 가라앉았다.
“어? 뭐야. 거기 테이블 왜 그래? 뭐 게임 같은 거 하냐?”
그때 멀리 있던 심현석이 고개를 내밀고는 큰 소리로 물었다. 이윤규가 아니야, 아니야, 하고 입 모양을 내면서 심현석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어? 뭐라고?”
그 말에 이윤규가 입 모양만으로 소리 질렀다.
게 임 아 니 라 고. 이 자 식 아.
“게임 하자고? 그래, 좋지!”
아니! 시발, 지금 게임 같은 거 할 분위기 아니라고!
이윤규는 답답한 마음에 옆의 류주호를 곁눈질했다. 류주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어딘가로 시선을 빤하게 던지고 있었다. 아까까지는 진짜 조금만 술이 들어가면 완전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냉랭한 기운이 온몸을 삽시에 휘두른 것처럼 접근하기 버거웠다.
심현석이 일어났다. 무언가 게임을 시작하려는 듯했다. 이윤규가 아오, 하고 가슴을 턱턱 쓸어내리며, 류주호가 향한 시선의 끝을 저도 모르게 바라봤다.
화장실에 갔던 온기현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윤규는 반가운 마음에 손을 들어 얼른 오라고 손짓했다.
“기현이 형, 게임 한대요!”
“어? 아, 응.”
이윤규의 말에 온기현이 고개를 갸웃하고 대답하며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흘끗 류주호를 바라볼 때 미세하게 이마에 금이 갔다.
세수까지 하고 온 모양인지, 이마를 덮은 앞머리 끝이 물기에 젖어 있었다. 아래로 고인 물방울 하나가 콧등으로 똑 떨어졌다. 그에 콧등 위의 점이 실룩거렸다. 온기현은 대충 손가락으로 물기를 닦아 냈다.
류주호는 이러고 하염없이 보고 있으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입가를 세게 문지른 탓인지 온기현의 오동통한 입술에 빨갛게 혈색이 올라 있었다.
‘하, 씨발.’
류주호가 턱을 끌어당겨 아노락 점퍼 속으로 입가를 가리듯이 얼굴 아랫부분을 집어넣었다.
키스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다.
저 빨갛게 부은 입술을 벌리고 혀를 밀어 넣고 싶었다. 촉촉하게 벌어진 잇새의 물컹한 살덩이를 찾아 옭아매고 싶었다. 어디를 어떻게 빨고 자극하면 온기현이 앓듯이 끙끙거리며 흥분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더 미칠 것 같았다. 성감이 빠듯하게 당겨져 왔다. 불시에 들이닥친 갑작스러운 충동이었다.
제 생각보다 한계가 너무 쉽게 왔다.
기실 처음 맞닥뜨렸을 때부터 내리 이런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참을 수 있었던 건, 눈앞에서 꼬리가 살랑대지 않았을 때뿐이다. 인내의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 같았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온기현 앞에서는 한없이 물러지는 제 얕은 참을성을 간과했다. 참을성 있게 기다리려고 했었다.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어 준 온기현이 저에게 기회를 주었을 때, 제가 했던 행동들에 대해 그제야 용서받을 자격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빠듯하게 당겨져 오는 온몸의 얼얼한 감각을 오롯이 느끼며 이제야 뼈저리게 알았다. 얼굴을 보지 못했던 두 달이 딱 한계였음을.
“자, 그럼 게임 시작할게요!”
그때, 시끄럽고 어수선한 술자리를 뚫고 전임 과대인 심현석이 소리쳤다.
과대를 맡은 지 몇 달밖에 지나지 않았다. 4학년에 올라가니 취업 준비를 위해서이기도 했고, 중간에 역임한 자리라서 어쩔 수 없이 오늘을 기점으로 신임 과대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마지막 행사라고 하더니, 얼굴은 시뻘게져서는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때였다.
“일.”
심현석이 느닷없이 말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러자 바로 그 옆의 고학번이.
“이.”
라고 말했다.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곧이어.
“삼.”
“사.”
고학번을 시작으로 번호가 줄줄이 이어졌다. 남은 것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온기현과 신입생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몸을 의자 등받이로 늘어트린 채 정면만을 직시하고 있는 류주호뿐이었다.
“시, 십일…….”
이제 신입생들끼리의 눈치 게임이 시작됐다. 눈에서 서로 불이 튀었다. 그 뒤부터는 촌각을 다투며 서로 숫자를 외쳐 대기 바빴다. 그리고 숫자가 튀는 대로 시선만 따라다니며 입만 벌리고 있던 기현을 향해 이윤규가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숫자 말해요, 숫자!
“뭐?”
숫자 말하라고요, 형!
“숫자?”
온기현은 저한테 해당하는 숫자가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생전 개총이나 MT, 혹은 새터도 가 본 적 없는 온기현은 술을 마실 줄만 알았지 술 게임에는 참여해 본 적이 없는 터였다. 아르바이트하던 고깃집에서도 이런 식의 술 게임을 하는 손님들은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고민도 잠시.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뒤에서 숫자를 외쳤다. 그리고 동시에, 이쪽으로 이목이 쏠렸다.
남은 이는 단둘뿐이었다.
온기현, 그리고 류주호.
수십 개의 눈이 온기현을 바라봤다. 누군가는 류주호를 흘끔거렸다. 온기현이 제대로 된 숫자를 불러서 류주호가 술을 마시는 것을 봤으면 좋겠다는 시선과, 온기현을 향해서는 ‘그냥 네가 틀린 숫자를 말해서 네가 마시고 말아라’는 종용의 의미를 담은 시선도 있었다.
온기현이 슬그머니 류주호 쪽으로 눈길을 보냈다. 그러다가 다시금 고개를 모로 홱 돌렸다. 류주호의 시선이 저에게 못 박혀 있었다.
이윤규는 그 옆에서 연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입 모양만을 이용해서 소리 없이 외치고 있었다. 온기현은 여전히 알아듣지 못해서 미간을 찡그렸다.
‘그냥 술 마시면 되는 것 아닌가.’
괜히 몰려드는 초조함에 그렇게까지 생각했을 무렵. 제 앞에 있던 이의 입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다.
“오십사.”
“어?”
대번에 모든 이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오십사?
“……그, 그 숫자 아닌데…….”
“트, 틀리셨다.”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 울까요…….”
벌주의 흥을 돋우는 목적의 흥겨운 가락 또한, 초상집의 그것처럼 작고 구슬프게 들렸다. 다들 어색하게 웃음을 짓고 있었다.
마지막에 숫자를 부르는 사람, 혹은 틀린 순서의 숫자를 부르는 사람이 벌주를 마시는 것은 눈치 게임 불변의 룰이었다.
류주호는 여전히 부동의 자세였다. 온기현 또한 크게 뜬 눈을 향했다. 눈이 마주쳤다. 순간, 류주호의 눈에 이채가 어리는 듯했다. 잘생긴 입가에 쓴웃음이 드리운 것이 착각인가 싶을 정도로 짧게 스쳤다.
“아, 아! 선배님, 제가 말아 드리겠습니다.”
옆에서 이윤규가 공손하게 넙죽 소주와 맥주를 맥주잔에 부었다. 정확히 5 대 5의 비율이었다. 류주호는 그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살짝 입을 벌리고 멍하게 저를 향한 눈빛을 오롯이 받으며 술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벌컥벌컥 쭉 들이켰다. 현실에 순응하기 위해, 스스로 독배를 자처하여 달콤한 굴복을 맛보는 패배자처럼. 자학적인 조소가 술잔 끄트머리에 옅게 걸렸다.
오오오.
주위에서 환호성이 울렸다. 어쩐지 술잔이 그대로 이윤규의 머리통으로 향할 것 같은 환상이 모두의 눈에 잠시 어렸으나, 그건 착각이었다. 류주호는 깨끗하게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금세 다시금 소란에 휩싸였다. 눈치 빠른 심현석은 류주호에게 랜덤 게임을 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는지 술병을 숟가락으로 땅땅 치며 다음 게임의 시작을 알렸다.
‘지가 틀려 놓고 왜 저렇게 쳐다봐?’
온기현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리려다가 참았다. 이를 사리물며 고개를 모로 돌렸다.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저랑 대체 뭘 하자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괜스레 시선이 닿아 오는 느낌에 볼 근처가 뜨거워지는 느낌이다.
“자, 자! 다음은 가볍게 미니 게임 하나 하고 갑니다! 두구두구두구.”
심현석이 젓가락을 테이블에 번갈아 내려치며 입으로 말발굽 소리를 냈다.
“신조어 게임!”
“엥, 그게 뭐예요?”
“말만 들으면 모르냐? 신조어 맞히기 게임 하자. 자, 여기서부터 쭉 시계 방향으로, 신조어나 약어 말하고 뒷사람이 못 맞히면 벌주 마시기. 어때? 걸려도 한 바퀴 돌 때까지 안 멈추는 거야. 다들 이해했지?”
에에이.
설명을 들은 이들은 모두 이게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여럿을 동시에 먹이기 위한 게임이란 것을 알았다. 그리고, 괜히 동기들이나 옆 사람을 생각해서 쉬운 문제를 내면 그만큼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리란 것도.
그때, 이윤규가 온기현의 굳은 얼굴을 눈치챘는지 작게 웃으며 테이블 너머로 소곤거렸다.
“형, 이런 거 잘 모르죠?”
“어? 아, 아니. 조금 알긴 아는데?”
“거짓말이네.”
이윤규가 큭큭댔다.
“형, 딱 보기에 게임 구멍인데. 폭탄주 겁나 마시는 거 아녜요? 이따가 형 집에 가서 3차 달려야 된다구요.”
이윤규의 말소리는 그렇게 작지 않았다. 옆 사람까지는 전부 들릴 만한 소리였다.
류주호의 시선이 천천히 이윤규를 향했다. 그러다가 서서히 일그러지는 미간을 알아채는 이는 없었다.
“무조건 커닝하거나 핸드폰으로 검색해 보기, 또 알려 주기 없기다. 그럼 그 사람도 마시는 걸로. 이제 시작!”
심현석의 손짓에 웅성대던 이들의 낯이 조금 진지해졌다. 그리고 첫 타자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옆 사람을 보며 말했다.
“낄끼빠빠.”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진다.”
거의 동시에 나온 대답에 다들 조금 볼멘소리를 냈다.
“에이, 그거 너무 쉬운 거 아니냐?”
“쟤네 동기끼리 괜히 붙여 놨어. 그치?”
“야야, 어렵게 좀 가자.”
고학번의 아우성에 두 번째 타자의 얼굴이 조금 심각해졌다.
“좋못사.”
“…….”
안타깝게도 그 옆에 앉은 이는 스터디 멤버 중 하나인 김상오였다. 그가 안경을 가운뎃손가락으로 추켜올리며 자못 심각한 얼굴을 해 보였다.
“카운트 들어갑니다. 5, 4, 3…….”
“좋…… 좋은 리포트를, 못 쓴다면, 사유서를…….”
“아, 미친. 뭐 하냐.”
“그것도 몰라? 세상에.”
다들 웅성거리는 와중에 벌주가 금세 만들어졌다. 김상오는 눈을 질끈 감고 그것을 단번에 들이켰다. 이제야 이 게임에 유리한 게 고학번인지 신입생인지 드러났다. 심현석은 고학번들의 눈총을 온몸으로 받으며 게임을 재개했다.
‘어떡해.’
온기현은 속으로 진땀을 빼고 있었다. 신조어는 완전히 쥐약이었다. 조금 알고 있다는 것은 정말 전 국민 누구나 알고 있을, 이미 온라인상에서는 유행이 한참 지나 이제 막 방송에 등장하는 것들뿐이었다.
태연함을 가장하며 끙끙거리고 있는 사이에 순서는 빠르게 이어졌다. 무슨 외계어를 하는지 신입생들끼리 맞붙어 앉아 있는 자리는 금세 지나갔고, 고학번 순서에서는 어김없이 막혀서 벌주를 먹게 됐다.
류주호가 자꾸만 사람을 심란하게 하는 것도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인데, 거기다가 게임까지 저를 가만두지 않았다.
저를 향하는 따가운 시선은 부러 모른 척하며 두 손을 꼭 모아 무릎 위에서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이윽고 온기현의 두 번째 전 차례가 왔다.
“얼죽아!”
“너무 쉬워요, 선배님. 얼어 죽어도 아이스.”
이 세상에 신조어가 이렇게 많을 줄이야. 온기현은 기함했다. 그나마 아는 것도 몇 개는 섞여 있었다. ‘얼죽아’는 저도 아는 것이었는데, 제 앞에서 이미 끝나 버렸다. 안타까운 탄식을 삼켰다.
“자, 그럼 다음.”
모두의 눈이 온기현에게 쏠렸다. 침을 꼴깍 삼켰다. 이렇게 긴장될 수가 없었다. ‘따아’ 혹은 ‘아아’ 이런 게 나오길 간절히 바랐다.
“자만추.”
‘헉.’
이거 아는 건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온기현은 꿈틀거리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누르고는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자 보고 만족스러운.”
“……어?”
“엥?”
“……사람…… 추……구……?”
자신 있게 운을 뗀 것도 잠시. 모두의 눈빛에 의아함이 스친 것을 기민하게 느낀 온기현이 말꼬리를 흐렸다. 끝까지 대답하는 온기현의 어깨가 조금 움츠러들었다.
“야아! 완전 대박.”
“헐, 선배. 그런 사람이었어요? 장난 아니다.”
“형, 지금 웃기려고 그러는 거죠? 미쳤다. 근데 말 되는 게 더 웃겨요.”
모두가 파안대소하기 시작했다. 입을 가리고 킥킥거리면서 웃는 이들도 있었다.
“어……. 이거 아니야?”
“아, 형. 진짜.”
이윤규가 다시금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며 온기현을 손가락질했다. 순식간에 얼굴이 화르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가뜩이나 열 오른 볼이 화끈거렸다. 발긋한 얼굴을 손등으로 문지르다가 눈앞에 있는 류주호와 눈이 딱 마주쳤다.
류주호는, 한쪽 눈썹을 위로 끌어 올린 채 다소 괴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쓰게 웃음을 짓는 것 같기도 하고, 불쾌한 듯 찡그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한.
“형, 형 거는 제가 말아 드릴게요.”
이윤규가 그 말과 동시에 양손에 소주와 맥주를 들고서는 콸콸 들이붓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잔 끝이 찰랑거릴 정도로 술이 가득 찼다. 맥주의 노란빛이 점점 연해졌다.
류주호의 시선이 신경 쓰여 어설프게 손을 뻗어 벌주를 받으려 했다.
그때였다.
누군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이거, 내가 대신 마실 수 있나.”
듣기 좋은 저음은 류주호의 것이었다. 온기현을 향하던 시선이 또르르 굴러가 류주호를 향했다.
그리고 그 말에 놀란 술자리에 잠시 정적이 휘몰아쳤다. 그러고는 모두가 대번에 소란스럽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선배님이 흑기사요?”
“흑기사?”
“남자끼리 웬 흑기사?”
류주호는 아무런 대답 없이, 팔을 뻗어 이윤규가 내밀던 술잔을 낚아챘다. 온기현이 눈을 깜빡이지도 않은 채 동그랗게 뜬 눈을 류주호에 향했다. 공중에서 시선이 부딪쳤다.
“형! 흑기사 괜찮아요? 형이 선배 소원 아무거나 들어줘야 하는데요, 무조건요. 네?”
“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것처럼 외마디와 함께 무어라 말하려 입을 벙긋거리던 때. 류주호가 입꼬리를 올렸다.
“어차피 내가 원하는 건, 딱 한 가지밖에 없는데.”
그 말과 동시에 벌주를 들이켰다. 오늘만 해도 폭탄주를 위장에 쏟아부은 것이 벌써 두 번째였다. 주위가 환호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들이켠 류주호가 입술에서 잔을 떼어 내며 나머지 말을 이었다.
“들어줄지 모르겠네.”
“흑기사 룰이잖아요! 죽어도 들어줘야지! 그게 뭔데요? 궁금해요.”
다들 흥미진진한 얼굴이었다.
류주호는 술잔을 손안에서 빙글 돌리고는,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유리잔의 매끄러운 겉면을 엄지로 쓸었다.
그를 바라보는 온기현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빨간 혓바닥이 엿보였다. 술기운이 싹 가시는 것처럼 하얗게 질리는 얼굴과는 대조적인 선정적인 색감이었다.
모두가 두근거리며 기다렸다. 짙게 호선을 그리던 입술이 이윽고 벌어졌다.
“내가 원하는 건.”
“야.”
류주호가 나지막한 음성을 입에 담자마자, 온기현이 그 뒷말을 가로막았다.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모두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온기현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류주호의 손에 순간 힘이 들어갔다. 작금의 심정을 대변하듯 잔을 쥔 손등 위에 푸른 핏줄이 불거졌다가 곧바로 가라앉았다.
온기현은 뾰족하게 세운 눈을 깜빡일 새도 없이 정적을 가르듯 류주호를 보며 대각선으로 고갯짓을 했다.
“너 잠깐 나와.”
앞서가는 이의 머리털이 공중에서 붕붕 휘날렸다. 얼굴을 마구 비벼 대고 싶을 정도로, 못 본 사이에 진한 갈색으로 변한 부드럽고 새까맣던 머리털 끄트머리가, 염색으로 인해 약간 상해 조금 부석거리는 게 눈에 보였다.
성큼성큼 부지런히 걸어가는 것에 비해 속도는 그다지 나지 않아, 류주호는 평소의 걸음 속도처럼 뒤를 따르며 하염없이 나풀거리는 머리와 정수리 위에 얹어진 회전목마 같은 동그란 가마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도달한 곳은 술집 건물 뒤편에 있는 좁은 골목이었다. 부러 인적이 드문 길로 돌아간 듯 소란하게 터지던 취객의 소음이 골목을 돌자마자 확 줄어들었다.
온기현이 우뚝 섰다. 그에 류주호도 걸음을 멈췄다.
온기현의 어깨가 위로 조금 솟은 것이 보였다. 푸드덕대기 직전과 같이 약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인내심이 적용되는 거리를 속으로 재차 가늠하며 류주호는 기다렸다. 온기현이 돌아보기를.
“너.”
온기현이 몸을 돌리며 그렇게 말했다. 역시나. 올려다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작고 까만 점이 더 눈에 잘 띄었다. 꿈에까지 나왔던 예쁘고 작고 동그란 점이었다.
그런 류주호의 머릿속 따위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는 온기현이 다시금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거리다가 낮게 소리쳤다.
“무슨 속셈이야, 대체?”
“속셈……?”
“어. 속셈. 너 내가 한 말 다 잊었어?”
온기현의 눈 끝이 억울함을 표하며 아래로 축 늘어졌다. 왜 제가 한 말을 기억 못 하냐는 작은 항의가 눈꼬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듯했다. 만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너랑 이 이상 얼굴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다시는 보지 말자.”
허무함과 체념, 그리고 분기를 담아서 정말 마음먹고 선고한 말이었다. 그런데 이 뻔뻔스러운 놈은, 온기현이 독하게 뱉은 말을 완전히 무시하는 짓거리를 골라 하고 있었다.
어딜 가나 눈에 띄게 행동했고, 또 개총에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반드시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기억나. 똑똑히.”
“그런데, 왜 자꾸 내 눈에 띄는데? 왜 자꾸, 내 앞에 나타나는데! 내 말이 우스워? 이, 이 개자식아.”
온기현이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 면상에 대놓고 욕설을 뱉기를 잠시 머뭇거렸지만,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개자식’이라는 단어를 똑똑히 입에 담았다.
하지만 정작 욕을 받은 이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류주호는 고요한 눈빛으로 온기현을 내리 응시했다.
그러고는 한 걸음 가까이 내디뎠다. 도망치지 않을 정도의 거리 안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내가 그 말이 우스웠으면 지난 두 달 동안, 미친놈처럼 네 얼굴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도 그렇게 참기만 했겠어? 참고 또 참고. 환장할 정도로 그 영상 하나만 죽어라 매일같이 돌려 보기만 했어.”
“뭐.”
“너무 보고 싶어서.”
류주호의 얼굴 위로 어둑하니 그림자가 졌다. 아득한 눈은 앞에 있는 제 목적을 고요히 좇고 있었다. 드디어 도달한 제 마지막을.
“병신같이. 너랑 같이 찍은 사진 하나 없더라.”
초점 없이 흔들리는 영상 하나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영흘도에서, 밤바다를 눈동자에 새기며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음 짓던 꿈결 같은 모습의 영상 하나만.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왜 자꾸 나 헷갈리게 해. 날 보고 싶었다고? 날 그렇게, 세상 천치로 만들어 놓고서는. 네가 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아득바득 따지려던 온기현의 말이 점점 작아졌다. 마구 할퀴려던 뾰족한 날이 자꾸만 제풀에 무뎌졌다. 종국에는 습기 어린 떨림이 어미에 옅게 맺혔다.
“그래. 그 자격. 내가 스스로 발로 차 버린 그 자격. 그래.”
“…….”
“내가 빌고 싶은 단 한 가지 소원이 딱, 그거야. 자격.”
내가 네 옆에 다시 설 수 있는 자격.
처음부터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자격.
네 선택지가 될 자격.
그것만 허락해 주면, 너에게 선택받기 위해서라면, 나는 무슨 짓이라도 할 테니까.
“그걸 얻기 위해, 자격을 얻기 위해서 전부 깨끗하게 정리했어.”
온기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말은 즉.
“결혼한다며.”
그랬잖아, 네 입으로. 나와는 다르다며.
온기현과의 관계는 결혼과는 엄연히 다르다고 못 박은 게 그였다. 결혼은 필요에 의해 맺는 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언행으로 기현을 기만했다.
류주호가 눈을 내리깔았다가 눈꺼풀을 조용히 들어 올렸다. 옅은 빛의 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아스라이 잔열을 담으며 빛났다.
“미안해. 내가 어리석었어.”
“하.”
온기현이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다야? 어리석었다고?”
“응.”
류주호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감히 너랑 그 어떤 것도 같은 선상에 두어서는 안 됐는데, 그걸, 네가 내 옆에서 떠나고 나서 알았어. 매일같이, 진저리칠 정도로 지독하게 앓았어.”
흐트러지는 숨결과 함께 말이 이어졌다.
“평생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았던 감정이라 너무 어려웠어. 그렇게 지독하고 깊은 마음이 나한테도 있는 줄, 몰랐어. 내가 어리석었어. 정말……. 네가 던지고 간 한마디에 남겨졌던 그날 이후로, 하루하루 견디는 매 순간이 악몽 같았어.”
억눌린 음성에 온기현은 눈도 깜빡거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당혹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자학과 조소를 담은 류주호의 말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쉽게 받아들이면 다시금 질질 끌려다니던 예전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자신을 채찍질해야만, 지독한 기만에 잔뜩 할퀴어진 상처를 겨우 기워 낸 과거의 자신에게 미안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혼란 속에서 류주호가 말을 멈췄다. 아니, 잠시 숨을 멈췄다. 참았던 그것이 아주 미묘하게 균열을 일으켜 폭발하려고 하는 것처럼. 잠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주먹을 빠듯하게 쥐었다. 땀이 배어났다. 그때, 이제껏 직시하기를 피해 왔던 류주호의 얼굴이 좀 더 자세히 눈에 들어왔다. 예전과는 조금 달라진, 머리 스타일도 얼굴의 날연한 느낌도, 예전과는 정말 다른 느낌을 자아내는 남자가 고통스럽게 애원한다.
“가만히 기다리라면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어. 아니,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어. 수없이 참고, 참고 또 참았어.”
그런데…….
류주호가 한 걸음 더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온기현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너무 많이 참았나 봐.”
류주호가 상체를 앞으로 구부렸다.
올려다보던 온기현의 시선이 점점 수평으로 내려왔다. 마주 보는 시선이 평행선 위에서 만났다.
“나 지금 좀, 너무 오랜만에 너랑 가까이 있게 돼서, 제정신이 아니야. 나도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약간 미칠 것 같거든. 그래서 그런데.”
숨결이 닿을 정도로 얼굴이 가까이 왔다.
잘게 요동치던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한 번만 만져 봐도 될까?”
“……뭐?”
“손가락이라도 괜찮아. 응? 딱 한 번만.”
“…….”
“그럼 조금 안정될 수 있을 것 같, 윽.”
류주호는 열띤 말을 끝맺지 못했다. 정강이에 격통이 느껴진 터였다. 하체가 휘청이며 상체가 잠시 앞으로 기울어졌다.
가까스로 얼굴을 들자, 분기탱천한 모습의 온기현이 씩씩거리고 있었다.
아.
이런 순간까지도 류주호는 입에 군침이 돌았다. 통증보다 그 감상이 먼저였다. 하지만 그렇게 홀려 있는 사이에도 온기현이 주먹 쥔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이 자식은 대체.’
머릿속에 뭘 넣어서 다니는 거야. 잠시라도 흔들린 자신이 바보 같았다. 이놈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서, 또다시 홀랑 넘어가서 여기저기 만지라고 내주고 말았을 뻔한 것을 생각하면 아찔했다.
억울함에 눈물까지 찔끔 고였다.
“으, 진짜…….”
“기현아.”
안타깝게 뻗어 오는 손을 보며 뒷걸음질해 가까스로 피했다. 입매가 잔뜩 일그러졌다. 정강이를 까인 남자는 이런 꼴사나운 때까지 잘나 보였다. 그게 더욱더 화가 났다.
“너 수강 변경 안 하면 진짜 죽여 버릴 거야!”
온기현이 그렇게 버럭 위협적으로 소리치며 그대로 류주호를 등지고 빠르게 달려가 버렸다. 골목을 가로질러 거리로 빠져나갔다.
“기현아. 온기현.”
류주호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기현의 뒤를 쫓았으나, 이미 인파 사이로 뒤섞여 사라진 뒤였다. 머리털 한 올조차 보이지 않았다.
씨발. 하.
류주호가 섣부른 행동을 한 자신을 자학하듯 욕설을 뇌까렸다. 그리고 잔뜩 좁아진 미간을 가리듯 손가락으로 얼굴을 덮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술기운이 확 달아났다. 다행히 빠트리고 온 소지품은 없었다. 정신없이 달려서 집까지 오기는 했지만, 갑자기 빠져 버린 자리에 돌아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윤규로부터 [형, 어디 갔어요?]라고 메시지가 왔다. 그냥 머리가 아파서 일찍 집에 왔다고 간단히 답장하고는 핸드폰을 뒤집어 돌려 버렸다.
그 뒤로 아무런 연락 없이 핸드폰이 잠잠한 것을 보니 술자리를 즐기느라 여념이 없는 듯했다.
“으으.”
온기현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현관 바닥에 주저앉아 앓는 소리를 내며 두 손으로 얼굴을 뒤덮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게 제가 아는 류주호가 맞나 싶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제 곁을 내주지 않았지만 동시에 그 누구와도 함께 있었고, 그 애정이 누구에게도 향하는 것 같았지만 또 누구에게도 건네주지 않는 듯 보였다.
진득하게 몇 년을 관찰해 왔던 온기현이 내린 결론이 그것이었고, 또 그게 사실이었다.
멀리서 쳐다보던 류주호는 절벽 위에 핀 꽃처럼 아득하니 먼 존재였다. 사실 알고 보면 화려한 겉모습을 가진 독초였지만, 어쨌든 쳐다만 보며 저 혼자 마음을 키웠을 때는 그랬었다.
하지만 지난 기억 속 류주호는 어땠는가. 적당히 거리를 두는가 싶더니 금세 거리를 좁혀 와 혼란스럽게 만들고, 또 바짝 다가와 곁을 내주는가 싶더니, 결혼을 선언하며 온기현과의 관계를 진창으로 처박았다.
그것을 뼈저리게 몸소 깨우쳤던 저다. 애초에 한 걸음 다가가지 말걸, 하고 수없이 후회했다.
하지만 지금의 류주호는 자신이 어리석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친 짓거리를 대수롭지 않게 자행했다.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어.”
그 말에 심장이 떨렸다. 죽여 놓았던 기대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를 향하는 마음이 완전히 고개를 숙인 것은 아니었나 보다.
‘미쳤지, 미쳤어.’
그러면 안 된다니까.
또 몸만 이어지는 허무한 관계로 돌아가기는 싫다고.
그래, 내가 정말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라…….
‘아.’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도 모르게 숨겨 왔던, 자신을 속여 왔던 속내가 튀어나올 뻔했다.
아닌데. 나는 걔랑 정말, 연 끊고 살고 싶었는데. 새로운 사람도 사귀고, 애인도 만들고 그러면서 그렇게. 정말로 원하는 건 그거였는데. 그거여야 하는데.
온기현이 천천히 손바닥을 심장께로 가려가서 꾹 눌렀다.
그리고 구부렸던 무릎을 펴서 신발장에 걸려 있는 거울을 쳐다봤다. 미용실에 염색하러 갔을 때, 좀 더 밝은색으로 염색해 달라고 했다가 탈색하지 않으면 발색이 어렵다던 말을 떠올렸다.
그때, 자연스레 떠올렸던 색은 누군가의 눈동자 색이었다.
버석거리는 머리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마구 헤집었다.